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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ㅣ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2년 5월
평점 :
아상블라주(assemblage)다.
빌레글레는 거리의 찢어진 벽보를 모아 대형 캔버스에 다시 붙이는 작업으로 당시 시대상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벽보를 수집한 거리 이름과 날짜, “성당 거리 99번지, 1974년 5월 19일(99,Rue du Temple, 19 mai 1974)”, “라파예트 거리/ 오트빌 거리 1988년 4월(Rue Lafayette/d’Hauteville avil 1988)”과 같은 제목이 붙여져 있다. 선동, 전쟁 규탄, 대통령 선거, 제품 광고, 영화 홍보 등의 내용을 담은 찢어진 조각들은 서로 겹쳐지고 흩어져 그 거리 그 시간을 설명하고 있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3/0111/pimg_7640422943708161.jpg)
레오퀴르 거리-베르튀 거리, 1984년 6월 4일 (Rue Réaumur-Rue des Vertus, 4 juin 1984)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3/0111/pimg_7640422943708162.jpg)
그라빌리에 거리 1973년 1월 (Rue des Gravilliers, janvier 1973)
아니 에르노의 『세월』은 사진 한 컷 위에 찢어진 기억의 벽보들이 덧붙여진 아상블라주로 다가왔다.
“흑백 사진 한 장, 골목에서 두 소녀가 둘 다 등 뒤에 팔을 숨기고 어깨를 맞대고 있다. 뒤로는 소관목과 높은 벽돌 벽, 위로는 커다란 흰 구름이 뜬 하늘이 보인다. 사진 뒷장에는 ‘1955년 7월, 생 미셸 기숙사 정원에서’ 라고 적혀 있다.(63p)”
이렇게 사진을 그린 후, 그 사진의 주인공, 그녀의 눈에 비치던 세계를 그린다. 그녀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세계와 사유의 대상은 확장되어 간다.
“실내에서 클로즈업으로 찍은 흑백 사진, 쿠션을 이용해 소파로 꾸민 침대 위에 젊은 여자와 아이가 투명한 커튼이 있는 창문 앞에 나란히 앉았다.(120p)”
‘67년 로베르쉬가’라고 적혀 있는 이 사진의 젊은 여인은 《그녀》다. 67년과 68년을 지나면서, 그녀의 생각은 베트남이나 공공의 이슈보다는 자신에 대한 질문들, 존재와 소유, 실존에 대해 집중되었다. ‘68 5월 투쟁’과 혼란과 격동의 시절에 그녀 주변의 작은 것들에도 변화가 있었다. 그녀는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일하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에 대해 끝도 없이 물었고, “모든 것을 시도해도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134p)” 그녀에게 1968년은 세상의 첫해였다.
그녀는 부부와 가족 외의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수모로 기억되는 모든 장면들로부터 벗어나 활동의 장으로서 미래를 받아들였다. 계속되는 질문들을 기록하고 글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리라 생각된다.
삼십 즈음의 그녀는 여전히 젊은 여성으로 폐경기 여성을 향한 거만함을 품고 있다. '샤를리 엡도'와 '리베라 시옹'을 읽음으로 자신이 68정신 안에 있음을 확인한다. 진보적인 매체를 읽고 보면서 공감하는 스스로에게 안도했던 나의 모습이 겹쳐졌다. 파리로 이사한 그녀가 노곤한 느낌을 받는 것은 과거가 없는 도시 때문인지, 진보한 자유주의 사회의 전망 때문인지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스스로에게 의문이 있어도 오랫동안 모른 채 한 것은 아닐까? 그 자본주의의 안락함 때문에. 베트남 전쟁이 끝났고 그녀는 희열과 피로를 느낀다.
좌파의 시대, 마흔의 80년대, TGV 안에서 『말과 사물』 독서, 돌아온 우파, 시몬 드 보부아르와 장 주네의 사망, 체르노빌, 전쟁, 테러, 폭발……. 그리고 “68년은 낡았다, 86년이 더 낫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그 젊은이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68년에 그녀의 세대가 기성세대를 비판했듯이, 비판을 받는 세대가 되었다.
‘92년 3월 세르지’라고 적혀 있는 사진의 그녀는 오십대 여성의 충만함을 풍긴다.
“그녀는 태어나서부터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지금까지 분리되고 조화가 깨진 그녀만의 수많은 장면들을 서사의 흐름,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 한데 모으고 싶어 한다. 개인의 것이지만 세대의 변화가 녹아 있는 삶. 그녀는 시작하는 순간, 늘 같은 문제에 부딪친다. 어떻게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과 사물들, 생각들, 관습들의 변화와 이 여자의 내면의 변화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45년의 프레스코화와 역사 밖 자아의 탐구, 고독이란 시를 썼던 스무 살의 일시 정지된 순간들의 자아를 동시에 만나게 할 수 있을까, 등등. (224p)”
그 소망, 고민이 바로 이 『세월』이라는 작품에 구현되었다는 생각이다. 《나》와 《그녀》 일치, 생각했던 자신의 책의 모습, 그녀가 책에 남기기를 원했던 느낌들. 그 감각이 살아날 때까지 사진의 그녀에게 가는 과정은 마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연상케 한다. 50대의 그녀는 방법을 모른다면 "마르셀 푸르스트의 차에 적신 마들렌처럼 우연히 가져다주는 어떤 신호를 기대하고 있다(224p)"고 한다.
“글 속에서의 《그녀》는 거울 속, 사진 속의 《끊임없는 타인》에 해당될 것이다.……이 글에는 《일반적인 의미의 사람들》과 《우리》가 있다.(301p)”
나는 아직 사진 속의 그녀를 마주하고 싶지 않다. 과거의 기억, 수모, 부끄러움, 치기, 오만… 등의 부정적인 기억들과 만나는 것을 꺼린다. 나는 그녀를 타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글을 쓴다면 나와 그녀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 선행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쓰다보면 타인인 그녀의 감각이 내게서 되살아나는 순간이 올 테고, 환희의 순간이 될지, 견딜 수 없이 아픈 순간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 때 그녀는 내가 될 것이다. 만약에 나에 대한 글을 쓴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