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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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숲 (상실의 시대)』 후기에서 밝혔듯이, 작가는 성적인 상황이 더욱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행위로서 해방되어야 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시점(時點)으로서 (느낌으로서)라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므로 섹스를 완전히 자유롭게 만들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능동적인 하나의 표현 행태로 파악하는 시점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468p 노르웨이 숲)”라고 한다. 외설적으로 표현되게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잘 알지 못하는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음에도 관계를 하는 모습은 그저 그런 통속적인 스토리로 보여질 수도 있다. 작가는 여인이 홀로 집으로 가기 싫었다는 말에서 외로움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소외된 관계를 담담히 말하는 장면과 나중에 보내온 그녀의 단카집 가사들에서 그 외로움은 차츰 죽음의 심연에까지 다다른다. 헤어지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에게는 말과 생각은 전부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리고, 오직 여인은 단카의 가사로만 남았다.

오후 내 /쏟아지는 /빗줄기에 섞여

이름도 없는 도끼가 /황혼의 목을 베다(23p)”

 

하루끼가 표현하는 성적인 묘사들은 외로움이나 소외와 관련 있다.

 

숨막힐 듯 밀도 높았던 하루끼의 글들이 이 단편집에 와서는 조금 느슨해졌다는 느낌이다. 작가의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경험을 회상하며 쓴 소설이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어떤 단편은 습작이나 일기 같다. 하지만 결말 부분에서 주는 한 번의 강한 획은 각성시키는 메시지가 있다. 유연함을 지닌 고수의 연주라고 할까?

 

이 단편집에는 작가가 심취했던 재즈와 클래식, 비틀즈 등을 소재로 한 음악애호가다운 작품들이 실려 있다.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위드 더 비틀즈>, <사육제>가 그렇다. 이 세 작품과 함께 <크림>,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은 환상적 요소가 섞여 있다. 작가가 말했듯이 우리의 삶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그것이 불쾌하거나 불행한 사건일 경우 시간이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는 삶의 지혜로운 태도를 말한다. 얼굴이 못생긴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사육제>는 박민규 작가의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를 떠올리게 하는 소재다. 또한 박민규 작가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소환하는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은 꼴찌 야구팀이라는 소재와 이기는 법이 아닌 지는 법을 즐기는 의 태도,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 등 주제까지 비슷하다. 단지 하루끼는 조금 더 여유롭고 즐기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 단편집의 백미는 단연코 <일인칭 단수>. 명품 브랜드 슈트차림으로 책을 들고 외출을 하는 는 바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위화감을 느낀다. 그 위화감과 낯섦의 정체는 그 바를 찾은 여인과의 대화와 반응에서 드러난다. '그렇게 하면 멋져 보일 것 같으냐'는 느닷없는 질문과 옷이 빌린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아냥도 담담히 듣고 있던 그가 삼 년 전 어느 물가에서 어떤 여자에게 저지른 고약한 짓(231p)”을 부끄러운 줄 알라는 말에 일어나 나와 버린다. 그녀가 말하는 사람이 자신인지, 정말 삼년 전 어느 물가에서 고약한 짓을 했는지, 알려고 하지도 시비를 가리려는 어떤 시도도 않은 채, 그 바를 나와 버린다. 자신을 쫓는 여자의 시선을 느끼면서.

길고 날카로운 바늘에 찔린 듯한 그 감촉은 폴 스미스 슈트의 고급 원단을 뚫고 내 등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230p)”

 

가 아무말없이 나오는 순간은 이 소설에서 압권이다. ‘는 고급 슈트를 입는 낯선 차림을 하며, 자신의 지성과 사회적 성취를 떠올리며 그 겉도는 듯한 차림을 애써 긍정한다. 모든 선택의 결과로서 거울 앞에 서있는 일인칭 단수’! 하지만 그렇게 낯선 차림은 오히려 평소에 보지 못했던 스스로를 직면하게 된다. 거울 앞에서 느낀 께름칙함을 머금은 위화감(220p)”은 자신 안에 숨어있던 수치심을 수면 위로 떠올린다. 그러기에 그 여인의 말에 자리를 피하고 만 것이다. 계속 이야기를 하게 되면, 삼 년 전 자신이 저지른 고약한 짓의 내용이 밝혀질지 모른다는, 그리고 또한 그 안에 있는 자신이 관지 關知하지 못한 무언가가, 그녀에 의해 눈에 보이는 장소로 끌려 나올지도 모른다는 사실(231p)”이 두려웠던 것이다. 이 반응은 그의 실체를 폭로한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서 부끄러운 짓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존재다. 그리고 누군가의 시선의 권력에 노예가 되는 존재다.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직면한 후, 그는 이전의 존재가 아니다

 

계단을 다 올라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계절을 더 이상 봄이 아니었다. 하늘의 달도 사라졌다. 그곳은 더이상 내가 알던 원래의 거리가 아니었다. 가로수도 낯설었다.(232p)”

 

인간은 주관적 사건에 의해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다르게 인식하는 종속적인 존재다. 개별자로서 자유롭고 싶지만 어떤 형태로든 권력의 지배를 받는다.

““부끄러운 줄 알아요라고 그 여자는 말했다.(233p)”

마지막 문장은 시선은 권력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여러 가지 형태의 시선(권력)대타적 존재로 회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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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10-12 21: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 님 이 책 리뷰 반갑네요
사두고 아직 안 읽은 책입니다. 얇으니 어서 읽어야겠어요 ^^

그레이스 2022-10-12 21:24   좋아요 4 | URL
몇시간이면 다 읽으실듯요^^
짧은 단편이어도 메시지는 강했어요~♡

책읽는나무 2022-10-12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민규 작가의 소설과 비슷한 단편도 있군요?
황녀 책은 읽다가 포기했었고, 삼미 슈퍼스타즈 책은 진짜 재미나게 읽었던 기억이 있네요~^^ 전 삼미 슈퍼스타 그 책 읽으면서 오쿠다 히데오 작가 책 읽는 느낌이었는데 하루키 단편 중에도 비슷한 느낌이 있다니? 새롭네요.
나중에 이 책도!! 아~바쁘다, 바빠!!!ㅋㅋ

그레이스 2022-10-12 21:26   좋아요 2 | URL
저도 놀랐어요
같은 소재에 같은 메시지~!
서로 통하는게 있을까요?
아님...?
암튼 이쪽이 훨씬 여유로운건 사실이예요

새파랑 2022-10-13 07: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루키 단편집 좋게 읽었었는데 북플하기 전이어서 리뷰를 안남겼네요 ㅋ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레이스님 리뷰보니 생각이 날듯말듯 합니다 ㅋ 전 <시나가와 원숭이>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

그레이스 2022-10-13 08:02   좋아요 2 | URL
<시나가와 원숭이>
이렇게 보는 관점이 다르네요^^
저도 흥미롭게 느꼈어요. 다신교인 일본인들 문화에서는 백퍼센트 공감할수 있는 내용이라 생각했거든요^^

레삭매냐 2022-10-13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춘수샘 책도 정리해야
하나요.

부러 독립서점 에디션으로
샀었는데...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나 봅니다.

그레이스 2022-10-13 18:01   좋아요 1 | URL
애먼 사람 잡나보다 싶기도 해서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매냐님 춘수샘은 누군가요?;;;^^;;;

서니데이 2022-10-13 21:23   좋아요 1 | URL
무라카미 하루키를 한자로 쓰면 村上春樹 일거예요.
아마 레삭매냐님은 한자로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그레이스 2022-10-13 22:05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일본어를 모르니 ...^^
감사합니다 ~~
서니데이님!

그런데 왜요?
레삭매냐님?

scott 2022-10-14 11:53   좋아요 1 | URL
무라카미 하루키 むらかみ はるき (村上春樹)를 풀어 쓰면 村 마을 촌. 上 윗 상. 春 봄 춘. 樹 나무 수.
춘수옹
하루키옹 ^^

그레이스 2022-10-14 12:10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한자는 한자일뿐 일어로 가면 영 다른 말이 되버려서, 사전을 의지하지 않고는...^^
막내 아라비아어 배울때 옆에서 들여다보단 느낌!ㅋㅋ

레삭매냐 2022-10-14 13:46   좋아요 1 | URL
스캇트님이 너무 친절하게도
설명을 해주셨네요.

하루키 샘의 책도 정리해야
하나 어쩌나 싶네요.

희선 2022-10-14 0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인칭 단수에서 그 사람은 세해 전에 고약한 짓을 했을지... 이 말 보니 미투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뭔가 찔리는 일이 있었을지... 그런 말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희선

그레이스 2022-10-14 06:35   좋아요 2 | URL
그 심리를 소재로 잘 사용했다는 생각입니다.^^

scott 2022-10-14 12: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옹 장편이 슬슬 출간 될 때가 되었는데 ㅎㅎ

이 책에 수록 된 단편들
부분 부분 문예지에 실릴 때 마다

제 🖐으로 발번역을 했었습니다

일본어 실력 일취 월장 하게 만든 하루키 옹 ^^

그레이스 2022-10-14 12:06   좋아요 2 | URL
부러워요
일본어는 입도 뻥끗 못하는데...^^;;

mini74 2022-10-20 2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책 속 성적묘사는 야하단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외로움 소외된 관계가 담겨서.. 건조하고 쓸쓸한거 같아요. 오호. 춘수옹이군요 ㅎㅎ

그레이스 2022-10-20 22:01   좋아요 1 | URL
^^
춘수옹
낯설어서 자꾸 잊어버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