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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싱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9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평점 :
“우리가 블랙웰스 섬을 지날 때, 백인 기사가 모는 리무진이 우리 곁을 지나갔다. 차 안에는 세련된 흑인 셋, 즉 흑인 남자 둘과 여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거만하게,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우리를 향해 달걀노른자 같은 눈동자를 굴렸고, 나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 『위대한 개츠비』 피츠제랄드
1925년, 피츠제랄드의 소설에 표현된 이미지즘이다. 차창 밖으로 바라보는 뉴욕의 풍경을 바라보는 한 백인의 감상이다. 탁월한 유미주의로 읽혀지지만 리무진에 탄 그들 흑인들을 우스꽝스럽게 보고 있는 동일자의 사유가 보인다. 『패싱』이 1929년에 쓰여진 것이니 동시대의 작품이다.
‘패싱’은 주로 어떤 구성원을 특정한 범주로 생각하거나 받아들여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유색인종의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혈통을 감추고 백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소설 중 브라이언이 말하듯 흑인사회의 사람들은 ‘패싱’을 비난하면서도 용납하고, 경멸하면서도 부러워하고, 극도로 멀리하면서도 눈감아준다.
아이린의 피부색은 어둡지 않다. 살인적인 더위를 피해 시카고 드레이튼호텔 스카이 라운지에서 차를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에 분노와 경멸,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는 모습에서 아직 흑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장소가 있던 시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이 흑인인 것이나, 심지어 그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어떤 장소에서 쫓겨난다는 생각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그것이 드레이튼 측에서 취하리라 예상되는, 제아무리 정중하고 세련된 방식이라 할지라도 그랬다.”(23p)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시선의 주인공은 오래전 뉴욕 할렘에서 함께 자란 클레어다. 잠시 백인 행세를 하던 아이린은 백인사회의 일원이 된 하얀 피부의 클레어를 만난다. 그녀는 자신의 인종을 감추고 백인과 결혼해서 화려한 삶을 살고 있다. 2년 후 클레어는 아이린을 찾아온다. 남편의 눈을 피해 뉴욕에서 파티에 참석하고 그들과 교제한다.
아이린의 눈에 어렸을 적 클레어는 “모질고, 감정이 전혀 없어 보였다.”(15p) 그녀는 항상 위험의 극단에 서있다. 타인의 감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천성적으로 배려심이 부족한 사람이다. 아이린은 “클레어와 연관되면 자신은 목적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느낀다.”(71p) 클레어의 아름다운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은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아이린으로서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63p) 아이린은 클레어가 불편하고 피하고 싶으나 그녀를 만나면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 그런 자신이 싫다. 그렇게 클레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아이린은 클레어 켄트리에 대해 의구심과 죄책감을 갖게 되고 그것들은 커져간다. 클레어를 초대한 댄스 파티는 아이린의 삶에 흔적을 남기게 될 중요한 시점이 된다. 클레어는 아이린의 삶에 깊숙이 파고들고 아이린 부부의 가라앉아 있던 불안한 요소들을 떠오르게 한다. 클레어가 자신의 삶으로 퇴장할 때 마다 브라이언은 불행과 불안에 휩싸이고, 자기 안으로 깊숙이 틀어박히고, 아이린은 그의 상태에 대해 무력감을 경험한다. 집에서 열리는 티파티에서 클레어를 바라보는 브라이언의 복잡한 시선을 깨닫고 분노와 수치심을 느낀다. 아이린은 클레어의 남편이 아내가 흑인임을 알게 되거나, 클레어가 병에 걸려 죽는 상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녀는 조용히 부르짖었다. 인종 때문에 겪는 고통이 아니더라도 여자로서, 한 개인으로서, 스스로의 일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고통을 겪고 있지 않느냐고, 너무도 비인간적이고 부당했다.”(133p)
아이린의 존재 안에는 이미 여러 개의 경계가 새겨져 있다. 클레어의 내면에 침투한 동일자는 스스로 존재를 부정하고 가장하게 한다. 아이린의 경우 배제를 겪고 있다. 인종과 성과 관련된 권력으로부터. 경계의 철학자 푸코에 의하면 동일자가 타자를 배제하고 추방하는 지식 권력은 신체에 새겨지는 생체권력(bio-pouvoir)으로 작용한다. 클레어와 아이린 모두 양상은 다르지만 그 권력의 지배를 받고 있다.
브라이언과의 갈등을 오래된 것으로 여기려는 아이린의 생각은 무력감만 더한다. 할렘가의 흑인사회와 미국의 인종주의에 환멸을 느낀 브라이언은 브라질로 이민을 떠나고 싶어 했으나 아이린은 뉴욕에서의 삶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녀는 남편의 “상실을 메꿔주기 위한 그녀의 모든 노력, 모든 수고로움, 그녀의 방법이 최선임을 증명하기 위한 그 모든 조용한 노력들, 그를 위한 모든 헌신, 드러나게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덧없어진단 말인가?”라고 생각한다. 자신과 아이들 남편에게 닥칠 일들을 떠올리며 불안해한다. 그 불안은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경계와 배제와 관련된 존재의 불안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노력이 덧없게 느껴지고 실제로 덧없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서운 상상이 현실로 나타날 때, 그것이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상상일 때, 그 상상의 주체는 어떤 느낌을 받을까? 추락한 클레어가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때 아이린은 안타깝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가 클레어의 팔에 손을 댄 장면 이후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에, 그녀의 혼란스러움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순간을 모호함으로 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클레어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아이린의 불안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클레어의 죽음은 아이린의 상상 속에서 이미 여러 번 일어난 일이었다. 아이린은 클레어의 죽음에 안도한다. 클레어는 아이린이 지키려는 가정, 남편, 아이들을 무너뜨리는 존재였으니까. 아이린이 “감사의 흐느낌이 밀고 올라오는 걸 막으려 했다”(156p)는 극단적 감정 상태는 추방당하고 감금된 타자의 몸부림이라는 생각이다.
“하얀 흑인, 그것은 배제와 억압 속에서 ‘타자’들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동일자의 가치척도를 내면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일자는 이처럼 자신이 핍박한 타자들의 피부, 타자들의 내면에까지 침투한다.”
(342p 『철학자와 굴뚝청소부』,2003년판, 이진경)
우리에게 경계가 많아질 때 그것은 언젠가 나를 배제하는 권력으로 작용한다. 이미 우리는 많은 경계를 경험하며 살고 있다. 그 경계들 사이에서 자신도 모르게 타자로 배제되는 경험을 한다. 혹시 배제된 경계 안으로 잠시 외로운 ‘패싱’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경계가 사라지게 되면 ‘패싱’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