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책을 읽어가면서 가장 첫 번째 든 생각은 정말 본 영화가 없다는 것이다. 영상보다는 텍스트를 더 좋아한다. 머리가 아파서 영화관에 앉아있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영화는 짧은 정보로만 접한다. 이 책의 많은 영화들 중에 기껏 본 영화가 <버닝> 하나다. <버닝>도 사실 포크너의 「헛간 타오르다」 때문에 봤다.
그런데도 이 책은 읽어가기에 무리가 없고 공감이 되었다. 경험의 창으로 영화를 읽어내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느낀 점은 작가가 오랫동안 글을 써왔음을 드러내는 어휘들에 관한 것이다.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용어들과 조탁되고 잘 닦여진 언어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하고 있다. 글을 쓸 때마다 나는 빈약한 몇 가지 언어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답답한 순간을 자주 마주친다.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해 문장 전체를 다시 쓰고 마는 좌절을 여러 번 경험한다. 작가가 부러웠다.
작가는 얼마나 많은 영화를 보고 곱씹고 되짚어 사유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특별히 공감하고 좋았던 감상은 <밀양> 이다. “지상의 심원한 햇볕을 느끼게 되는 날”이란 제목으로 시작되어 “심원한 햇볕이 어디든 있어서 지친 평온함의 이유”가 된다는 감상이 새로웠다. <밀양>을 언급할 때 흔히 사람들은 용서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나 역시 그랬다. <밀양>을 영화는 Secret sunshine으로 번역했지만, 작가는 ‘깊은’ 또는 ‘심원한’ 햇볕이라 하고 “보편타당한 진리가 숨 쉬는 곳, 우리가 사는 땅 어디든 ‘밀양(密陽)’이 내려앉는다”고 감상을 적는다. 우리 사회 사각지대에서 햇볕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빛이 찾아들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보인다. 우리 땅 모든 곳이 “보편타당한 진리가 숨 쉬는 곳”이기를 바라는 나의 바램을 붙여본다.
남자 주인공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가슴 떨렸다던 <흐르는 강물처럼>과 <개 같은 내 인생>, <바베트의 만찬> 조차도 책으로 읽었다. 영화 트레일러에 소개된 영상만 잠깐씩 봤을 뿐이다. 소개된 다른 영화들도 책으로 읽으려 계획 중이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영화는 각자의 영화’다.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내 인생에 본 영화들을 기억하며, 그것들과 함께 겹쳐 떠오르는 인생 사건들을 생각했다. 대학입학시험을 치르고 자유를 만끽하며 친구들과 함께 봤던 <지옥의 묵시록>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종로거리를 돌아다니다 표를 구할 수 있는 영화였다. 보고나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상들에 머리가 아팠던 첫 번째 영화였음에도 자유에 들떠 있던 기분 좋은 추억을 남겼다. 프랑스의 대학 졸업 구술시험의 무시무시한 순간에 전율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너는 어떻게 거기서 그걸 보니?” 하고 의아해했던 <You call it love>.^^ 첫아이를 낳기 전날 만삭의 몸으로 피카디리인지 단성사인지에서 봤던 <인디펜던스데이>. 임신이라는 몸의 구속으로부터 독립한 날이었다. 영화가 던지는 의미들보다는 이벤트로 기억되는 영화들이다.
밤늦게 까지 깜빡거리던 TV 주말영화, 명화극장을 보던 아빠의 등을 기억한다. 정작 뒤에 앉은 나는 엔딩 크레딧까지 보고, 잠든 아빠를 깨우곤 했다. 아빠는 영화를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가족들과 당신 어깨에 짊어진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싶은 마음에 TV를 켜지만, 불안함과 걱정은 어느새 그의 머리를 꽉 채우고 영화 한 편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었을텐데, 그 때는 몰랐다. 몰랐던 게 당연했겠지만. 가끔 영화 보다가 책상 의자에 앉아 잠든 남편을 보며 그때의 아빠를 떠올린다. “어떻게 영화 한 편을 끝까지 못 봐. 수면제네”라고 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