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가장 먼저 당황스러운게, 리뷰 http://blog.aladin.co.kr/760670127/6629638 를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저는 그다지 칸트와 러셀에 대해서 옹호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저에게 답을 요구하시면 별 수 없이 저는 칸트와 러셀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글을 쓸 수 밖에 없지요. 졸지에 악마의 변호인이 된 기분인데, 그다지 좋아하는 역할은 아닙니다. 제 리뷰를 통해서 칸트와 러셀을 판단하시는 것 보다는 직접 칸트와 러셀의 저작을 읽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립간님께서 올리신 글들을 다 읽긴 했지만 답변을 해야될까, 말아야될까, 고민을 좀 했습니다. 제가 그다지 옹호하지도 않는 입장에 대하여 논쟁이 일어나는 것은 사양하고 싶거든요. 게다가 여기서부터는 반 농담, 반 푸념입니다만 오늘은 빼빼로 데이입니다. 결혼하신 분은 모르시겠지만 저같은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기분이 안좋은 날입니다. 외롭고.. 쓸쓸하고... 이런 철학이나 과학나부랭이에 정신적으로 신경을 쏟을 때가 아니라 더욱더 답변을 하기가 꺼려졌습니다. 그리고 이 글이 사실 마지막 답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직접 저에게 답을 요구하시지 않으셨으면 답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물에 독을 뿌리는 소리같지만.. 저같은 솔로는 이런 인터넷보다도 신경써야 될 게 훨씬 많거든요. 논쟁같은걸로, 그것도 제가 그다지 옹호하지도 않는 입장을 옹호하는 척하면서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것은 사양입니다. 농담같지만 진심입니다ㅠㅠㅠ

 

그러나 아무래도 계속 오해가 커져가실까 두려워 제가 아는 범위안에서 간단히 답변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애초에 칸트의 철학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여기서 몇마디 끄적거리는 것보다 직접 칸트의 철학을 읽어나가시는게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글들을 읽어봤는데, 제가 볼때는 오해라고 여겨지는 부분이 있고, 논리적으로 오류도 좀 보이고 있습니다. 댓글을 달아서 조용히 말씀드리는게 훨씬 좋을 것 같지만 길어질테구.. 저도 생각을 가다듬는 의미에서 이렇게 새로 글을 씁니다. 

 

가장 첫번째 글입니다.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78492 인데요, 여기서 마립간님의 태도를 보시면 사실 비과학적이고 철학적이다, 라고 보는게 옳을 것 같습니다. 다음은 마립간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거의 모든 학문을 철학으로 본다. 사람이 궁금증, 호기심을 갖는 것 자체가 철학이며, 나름의 가설을 제안한 것이 철학이다. 이런 문제에 시간이 가면서 자료가 축적되면, 그 자료를 바탕으로 좀 더 타당한 가설이 되면 (자료가 충분하면 가설은 이론이 된다.) 과학이 된다.

 

문장들 자체가 사실 옳은지조차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첫번째 문장, 본인이 모든 학문을 철학으로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본인의 모든 학문에 대한 태도는 당연히 철학적이어야 맞겠지요. 마립간님의 말씀으로는 철학에서 자료가 모여져 타당해지면 이론이 되고 과학으로 일컫어진다고 하셨는데, 위의 글의 마립간님의 친구분께서는 그 타당한 이론을 자연과학으로 보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 그분의 말씀으로는 철학적이신 마립간님이 비과학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잘 이해가 안가신다면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아래에 의문을 남겨주셨는데 다음입니다.

 

의문 1 ; 비과학의 분야, 예를 들어 종교적 의문까지도 과학으로 생각하는 나는 과학적인가 비과학적인가?

 

본인이 종교적 의문을 비과학의 분야, 라고 이미 규정하고 계시는데 그 이상 어떤 답을 원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립간님의 과학에 대한 규정을 가져와봅시다. 마립간님께서는 철학에 자료가 축적되어야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마립간님에 따르면 철학으로 불릴 수 있는 종교 - 마립간님은 모든 학문을 철학이라고 방금 규정하셨지요 - 는 과연 과학으로 불릴만큼 자료가 많이 축적되었습니까? 그렇다면 그 근거는 어디있습니까? 어느 논문과 어느 책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본인은 종교도 과학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조금 오해하시는 부분이 바로 이부분입니다.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는 분야를 모두 과학으로 판단하고 계시고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론, 소위말하는 가설설정으로부터 이어지는 그런 절차가 반드시 그 내용물이 과학이라는 것을 도출해내지는 않습니다. 이는 지식을 산출해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지요. 쉽게 말해서 소시지 기계가 있다고 합시다. 그 소시지 기계에는 보통 소시지의 재료를 넣지만, 굳이 소시지의 재료를 넣지 않아도 됩니다. 다른 무엇인가를 넣으면 소시지처럼 생긴 무엇인가가 나오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걸 두고 소시지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물론 마립간님께서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적설계론들도 과연 과학적 방법론을 거치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도리어 더 철저하게 과학적 방법론을 거쳐서 도출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지적설계론들도 과학일까요?

 

사실 이런 논리적인 이야기보다도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비과학적이라고 해서 그게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 친구분이 비과학적이라고 하셨을때 받아들이지 못하셨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비과학적이라는 말이 반과학적이라는 말도 아닌데 말입니다. 저런 이야기를 모두 놔두고 그냥 난 종교와 윤리, 도덕에도 모두 과학이라는 말을 쓰겠다, 라고 하셔도 사실 상관없습니다. 그런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깐요. 하지만 과학이라는 말에 미묘한 우월감을 부여하고 계시다면 그건 정말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글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79724 은 사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 리뷰와 말씀하시는게 어떤 연관이 있는지조차도 잘 이해가 가지않습니다. 신이 없다, 라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과 수학과 생명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 제가 더 궁금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세 번째 글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81487 인데요. 사실 칸트의 사상을 해설한 책을 직접읽어보시기를 진심으로 권해드립니다. 제가 어설프게 설명했다가 도리어 의문만 증폭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들은 모두 어설픈 설명이라고 판단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크게 본령에서 어긋나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빈 서판, 과 스피노자의 뇌, 인데.. 저는 이 두 권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현대과학에서 감정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는지 대략 짐작만 할 뿐입니다. 사실 빈 서판과 스피노자의 뇌, 의 저자를 보면 무슨 말이 대략 쓰여져 있을지 짐작이 되긴 하거든요. 그러나 그런 과학적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칸트를 비판하는게 과연 옳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제 리뷰에서 인용하신 부분만 잘라서 보면 제가 마치 칸트와 러셀의 사상을 설명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이 부분을 가지고 러셀이나 칸트를 비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비판하시려면 제 글을 기초로 삼지 말고, 직접 러셀과 칸트의 저작을 읽어보셔야 합니다. 제가 저 부분에 불분명한 이해를 바탕으로 글을 썼을지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당장 저 자신만해도 제가 칸트의 철학과 러셀의 철학을 모조리 이해했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할테니 말입니다.

 

이제 칸트 철학에 대해서 조금 이해를 하셔야될 것 같은데요, 저 또한 순수이성비판조차 제대로 읽지 못한 주제에 감히 뭐라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이 문장부터 일단 살펴보겠습니다.

 

칸트의 자유의지에 관한 가치관은 7. 자유의지, 도덕적 자유, 실존적 자유로 판단된다. 하지만 그 판단이 옳은가? 깨닫다. 후회, 양심의 가책이 의지에 속한 것인지, 단지 사고와 감정의 현상인지 내게는 불명확하다.

 

일단 7번 범주자체가 사실 잘 이해가 안가는데, 자유의지와 도덕적 자유, 실존적 자유 자체는 사실 한 범주로 묶일만한 성질의 것들이 아닙니다. 칸트에 따르면 자유의지가 도덕적 자유를 담보하고, 칸트에서의 자유는 실존적 자유의 의미와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가치 판단이라면서 - 자유의지에 대한 가치 판단이 연속선(spectrum)위에 있다. 나는 이 8가지 가능성을 모두 수용한다. - 자유의지를 범주에 넣어놓은 것 자체도 이해가 안갑니다만, 어쨌든 범주 자체가 조금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칸트의 자유의지에 대한 가치관은 저기에 나오는 범주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자유의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초월, 초월적 이라는 말부터 먼저 하도록 합시다. 마립간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십니다.

 

초월에 대한 심상은 경우에 따라 신神, 영靈, 성性, 도道로 표현되나 실제적으로는 원형原型에 대한 동경과 창발에 대한 동경이라고 생각한다. 내 판단이 맞다면, 즉 내 판단 외에 다른 근거가 없다면 초월 역시 인위적이고 허상에 불과하다. 이렇게 묻는다. “일반 정신을 넘어선 초월적 세계, 있기나 한 거야?”

 

이 문장이 바로 마립간님의 초월에 대한 인상을 말해줍니다. 신, 영, 성이라고 말입니다. (참고로 性이 아니라 聖을 의도하신 거겠죠..) 하지만 칸트의 초월은 이와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칸트의 전기 연구를 검색해보시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칸트는 뉴턴의 물리학을 공부했었습니다. 당시의 뉴턴 물리학은 철학자들에게 이성의 믿음을 가져와주었습니다. 그런 칸트에게  신, 영, 성이라는 말은 당황스럽지요. 그렇기때문에 초월이라는 말은 마립간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일반적 정신을 넘어선 세계, 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정말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해를 정확히 못했다, 라는 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초월과 초월론적, 이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별 수 없이 철학 용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으리라고 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칸트 관련된 철학서를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초월이라고 번역되는 transzendent는 상당히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칸트에서의 이 초월은 일종의 존재론적인 의미입니다. 물론 존재론적인 의미가 칸트에서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현상학적인 계보를 이어 후설, 하이데거에 이르게 되면 더 정립이 확실히 됩니다. 초월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주관으로부터 독립된 대상을 가정했을때, 그 대상의 인식론적, 그리고 구조적 요건이 우리 자신의 주관성이 된 경우 우리 자신의 주관성이 그 대상에 선행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주체에 대한 객체의 초월성 획득이지요. 결국 이런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두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물에 대한 자신의 발화가 그 사물의 가능한 경험을 넘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경험을 넘어서고 있는가? 혹은 넘어서고 있지 않는가? 의 여부가 사물에 대하여 있어서 중요한 일이 됩니다. 만약에 경험을 넘어서 있다면, 우리는 그 것을 초월적이라고 부릅니다. 경험의 한계 안에 있다면? 당연히 내재적이라고 부르겠지요.

 

초월에 대해서는 사실 칸트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칸트 철학에 있어서 진실로 중요한 것은 초월론적, 이라는 말입니다. 초월론적이라는 말은 transzendental을 번역한 말로 알고 있는데, 아마 입에 와닿지 않으실겁니다. 보통 오늘날의 번역서들은 이를 선험적이라고 번역하거든요. 이는 존재론적인 의미를 가진 초월, 과는 달리 일종의 인식론적의 의미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작업을 보면 인식론적인 의미로 파악하는 것이 맞습니다. 칸트의 제 1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천착하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라는 질문말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어떻게 나왔을까요? 이는 근대철학사의 발달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간략히 설명하면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는 데카르트는 자아를 근대철학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얼마 뒤 나타난 데이비드 흄은 경험과 인과론에 대한 연구로 근대철학을 뒤집어 엎습니다. 이 흄 뒤에 바로 칸트가 나타난 것입니다. 흄은 인과론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태양이 동쪽에서 뜨지만, 내일은 서쪽에서 뜰 수도 있지 않겠냐고. 그런데 우리는 지금껏 태양이 동에서 떠왔다 라는 경험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 경험을 우리는 어떻게 믿지? 라는 것이 흄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칸트가 이야기합니다. 경험이지만, 그 경험을 분석하면 실제적으로 선험적인 부분들이 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 선험적인 부분 - 아 프리오리 - 이 있다면 경험이라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인식을 쌓아나갈 수 있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 지성, 이성, 감성의 구분을 지어야겠습니다만, 이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선험적인 부분은 어떻게 구성되어있는가? 여기서 칸트의 유명한 범주가 나옵니다. 공간, 시간 범주, 그리고 사고형식의 범주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범주를 적용하는데 우리 인간의 이성과 감성이 모두 작용합니다. 서로의 협동을 통하여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인식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바탕에서 제가 쓴 글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칸트에 대한 러셀의 말도 (중략) '실천 이성에 따르면 의지는 자유로운 것이다. 이러저러한 행위를 할 능력이 내가 없다면 당신은 그런 행위를 해야 한다, 라는 명령이 그릇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만큼만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능력만큼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칸트가 원하는 것은 정언 명령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 자체가 자유의지의 표상이라고 우리가 깨닫는 것이다. 후회감, 등으로 말이다. 우리가 거짓말하면 후회를 느낀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우리가 그런 것을 느낀다는 것이 초월적 자유의 편린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사실 칸트 전공자들이 보시면 웃을 내용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참조한 내용은 살림출판사의 칸트, 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글을 통하여 의도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유의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라는 겁니다 - 칸트의 비판서들을 번역한 백종현 교수님의 논문을 참조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 그리고 러셀은 단순히 자유를 할 수 있다, 그러니 해야 한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실은 그게 아니다, 후회, 양심 등과 같은 것은 바로 부정할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라는 말입니다. 물론 칸트의 어구 중에 할 수 있으니 하여야 된다, 라는 말이 있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적어도 칸트가 의도한 것은 이런 자유의지에 부정할 수 있는 능력, 에 무게를 더 두었다는 겁니다. 그런 사고와 감정의 현상이 바로 칸트 철학의 큰 틀에서 포용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사고와 감정 둘다 사물을 인식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위에 적힌 초월적 자유, 라는 말은 붕 떠버립니다. 이 초월적 자유라는 말은 왜 나온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해답은 바로 실천이성비판 - 저도 아직 읽지 않은 - 에 있습니다. 앞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우리는 선험적, 초월론적인 범주를 통하여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천이성비판에 따르면 순수이성을 실천적 사용을 할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기존에 초월적, 우리의 경험을 벗어났다고 여겨졌었던 객체들이 바로 주체의 영역으로 넘어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초월적 자유, 라는 말을 사용하였었습니다.

 

물론 신, 영성, 과 같은 것을 칸트적으로 초월적이다, 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칸트적으로 초월적이다, 라는 이야기는 그런 것들만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초월적인 부분을 다루게 되면 필연적으로 모순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 모순은 어떻게 해결할까요? 여기서 칸트는 초월론적 변증법을 가져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마립간님이 생각하는 그런 초월적과는 다른, 순수하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결과로서의 초월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글입니다.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86116 이 글을 잘 읽어보시면 마립간님께서는 논리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책의 예화를 빌면 ; 브레이크가 망가진 기차에서 그대로 달리면 10명의 사람이 사망한다. 방향을 틀면 한 명의 사람이 사망한다. 인도주의 입장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나? 다른 예로 폭풍이 치는 바다에 요트를 타고 있는 사람이 조난을 당했다. 그를 구조하기 위해 구조대를 보냈는데, 그 과정에서 10명 사망했다. 이 구조는 인도주의에 입각해서 어떤 가치판단을 내려야 하나?

 

부연설명을 하자면, 러셀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눈 앞의 비교적 확실한 악을 내버려두고 미래의 비교적 불확실한 미덕을 택해서는 안된다

 

이 러셀의 말과 마립간님이 예시로 든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생략된 부분을 넣어보겠습니다.

 

브레이크가 망가진 기차에서 그대로 달리면 10명의 사람이 (100퍼센트) 사망한다. 방향을 틀면 한 명의 사람이 (100퍼센트) 사망한다.

 

넣은 말은 100퍼센트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제가 러셀의 말에 맞게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브레이크가 망가진 기차에서 그대로 달리면 10명의 사람이 (50퍼센트의 확률로) 사망한다. 방향을 틀면 (100퍼센트) 한 명의 사람이 사망한다.

 

자, 이해가 가십니까? 물론 이 예는 잘못된 예이긴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가 만든 예입니다. 이해가 어느 정도 가셨으리라고 여기고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보겠습니다. 어디가 잘못되었느냐면 바로 이부분입니다. 방향을 틀어서 구해지는 10명이 미래의 불확실한 미덕입니까? 그대로 달려서 구해지는 1명이 눈앞의 확실한 악입니까? 애초에 이 사례자체를 러셀의 말에 적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작왕의 딜레마도 마찬가지입니다.

 

1) 눈앞의 확실한 악덕을 행했다면 미래의 나타냈던 더 큰 악덕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확실한 악덕을 피했더니, 미래의 가능성의 더 큰 악덕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2) 눈앞의 확실한 악덕을 피했다. 그런데 이로 인해 발생할 미래의 더 큰 악덕은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1번을 봅시다. 눈앞의 확실한 악덕을 피했더니.. 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데, 러셀의 저 문장을 다시 읽어봅시다. 눈앞의 확실한 악덕을 내버려두지 말라고 되어있습니다. 애초에 말자체가 잘못된 것이지요.

 

눈앞의 확실한 악덕을 막았더니, 미래의 더 큰 악덕이 현실로 나타났다, 라는 말씀을 하시는 거라면 이 또한 러셀의 저 말에 그다지 맞지는 않다고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마립간님께서 직접 인기 없는 에세이, 를 읽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러셀은 자신의 책에서 눈앞의 확실한 악덕과 미래의 더 큰 악덕을 저울질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지도 않구요. 그가 저울질하는 것은 눈앞의 확실한 악덕과 미래의 불확실한 미덕입니다.

 

전체적으로 볼때, 결론적으로 러셀과 칸트의 책들을 직접 읽지 않으시고 제 글을 바탕으로 비판을 하고 계시기에 저런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졸지에 러셀과 칸트를 옹호하는 쪽으로 이렇게 글들을 쓰게 되었는데, 사실 저는 그다지 옹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칸트나 러셀을 오늘날의 과학적인 결과를 바탕으로 비판하는 것은 그들에게 온당치 못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제 글로 판단하지 마시고 그들의 책을 직접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오늘 빼빼로데이인데 왜 이런 글을 제가 쓰고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철학이나 과학나부랭이가 뭐가 중요합니까.. 라는 말씀을 진심으로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껏 길게 써놓은게 아까워서 지우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커플따위는 모두... 여하튼 사실 이렇게 길게 써놓았습니다만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만 직접 칸트와 러셀의 글들을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더 의문가는 게 분명 많으실테지만, 제가 아는 것 또한 당장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이상 더 답변할 정신적 여유가 없습니다.  회피하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만 사실 애초에 답변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칸트나 러셀인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이런 게 저한테 지금 눈에 들어오는게 아니라서... ㅠㅠㅠ 당장은 평가단 글도 써야되기는 하지만...

 

 

 

참고로 이 글은 즐겨찾는 서재브리핑에만 노출됩니다. 불필요한 일들을 막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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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3-11-12 07:48   좋아요 0 | URL
우선 이 글을 숙고하지는 못했지만, 제 글이 가연님의 정신 에너지를 극도로 소진시킨 것에 대한 사과를 드립니다. 그리고 미래 양해를 구했지만, 가연님에 대한 반론보다는 제 생각과 그에 대한 오류를 집어달라고 부탁드린 것입니다.

지난 번 지운신 댓글을 슬쩍 보았습니다. '비과학적'인 것이나 칸트, 러셀, 가연의 각각의 의견에 대해 해명을 하려했습니다.

어째거나 오늘까지 올리려고 했던 글은 올리고, 댓글에 보았던 내용에 대한 해명 글은 가연님의 댓글에 따라 올리지 말지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가연님의 글 중 일부는 제가 동감하는 내용입니다.

가연 2013-11-12 17:50   좋아요 0 | URL
어제는 좀 멘붕상태라서..ㅎㅎㅎ 푸념을 많이 늘어놓았네요. 제가 오류를 집어낼만큼 당장 학식이 풍부한 상태가 아니라 사실 이런 글을 쓰기가 저어되었네요. 지금도 여전히 이렇게 답변을 쓰는게 옳았었는지조차도 잘 모르겠네요.

마립간 2013-11-13 07:27   좋아요 0 | URL
반론이라고 생각될지 모르겠으나 5일간의 글에서 지적하신 내용에 대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쩌면 내일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가연 2013-11-13 08:45   좋아요 0 | URL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다 드렸습니다. 더 말씀드릴게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저와의 대화보다는.. 당장 제가 아는게 별로 없기에... 책에서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실 거라고 여겨집니다.

2013-11-12 0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12 1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13 0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13 0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13 15: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15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15 0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15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15 0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15 1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실 원래 나는 슈퍼스타 K를 잘 안챙겨봤다. 그래서 사실 그다지 기억에 남는 사람이라던가 그룹은 없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본방사수(?)를 위해서 몇 주간 금요일 밤에 집에 일찍 들어가보니 뭔가 느끼는게 있었다. 누군가를 응원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라는 것 말이다. 이런 생방송 오디션 프로그램은 바로 이런 응원하는 사람이 바탕이 되서 이뤄지는거구나. 머리로는 당연히 알고 있었던 것이고.. 이를 통하여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이랄까, 그런 속성을 좀 더 자세히 느끼게 되었달까. 자본주의 운운하는 것은 웃긴 일이지만 그른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뭐, 여기서 응원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본주의, 혹은 이 기계에 관여하는가, 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슈퍼스타 K는 그 대상으로는 적절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런 적절하지 않은 대상에 이르러서야 나는 이런 프로그램에 대하여 약간은 생각하게 되었지만) 시청률이 상당히 낮아지고, 문자투표도 상당히 줄었으니까..

 

이런 저런 사족은 다 줄이고, 사실 이제 떨어졌으니까 편하게 이야기하는데, 나는 이번 슈퍼스타 K에서 가장 응원하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장원기였다. 방금 말했다시피 나는 슈퍼스타 K를 안봤었지만, 정말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장원기와 김나영이 콜라보Collaboration를 해서 - 사실 이 콜라보라는 말이 적절하게 쓰이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 Street life를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장원기가 계속 올라가기를 바랬다. 물론 그후의 그의 모든 무대가 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장 마음에 드는 무대가 있었다. 그건 태진아의 미안 미안해, 를 편곡한 미안 미안해, 라는 곡인데.. 대략 이런 곡이다.

 

             

 

약 1분 37초쯤 시작하니까 바쁜 사람은 그렇게 넘겨서 봐도 괜찮을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지지하던 장원기가 지난주 금요일날 떨어졌다. 사실 팬덤이 그렇게 크지도 않고, 이번 슈퍼스타 K는 앞에서 언급하였다시피 예전에 비하면 문자투표도 활성화가 잘 안된 상태이기도 하니깐 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유리한 면모가 있다. 그래도 네 명 안에는 들거라고는 생각했는데 결국 떨어지더라. 팬을 만드는 것도 스타의 자질이라면 자질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다.

 

요즘 읽고 있는 책들은 추리 소설류인데, 사실 장원기가 떨어져서 실의에 빠져서 이렇게 서재를 방치한 것은 아니구.. 책을 읽다보니까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서 지금에서야 뻔뻔하게 이렇게 몇 자 글을 남기게 된다. 결국 이 서재에서는 위의 노래가사에서도 나오듯이 해줄 말이 이것 밖엔 없다.

 

혼진 살인사건.

김전일이 맨날 명예를 들먹이는 그의 할아버지 이야기이다. 사실 원래 긴다이치 코스케는 긴다이치 하지메, 그러니까 김전일의 할아버지가 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나, 이미 많이 이름을 써버렸으니, 별 수 없이 할아버지가 되버린.. 것은 아니고, 원래 요코미조 세이시의 유족들에게서도 말이 많았었지만 결국엔 인정받았다고 한다. 왼쪽의 이 살인사건이 바로 긴다이치 코스케가 처음으로 활약하는 첫 사건이다. 이 작품에서 긴다이치 코스케의 배경에 대하여 대략적인 설명이 나오는데, 미국서 체류하다가 어떤 사건을 해결한 것을 계기로 후원자의 눈에 띄어 착실히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갔다고 한다. 내가 지금 끄적인 설명도 많이 줄인 설명이다. 갓 대학을 졸업하고 젊은 나이로 왼쪽의 혼진 살인사건을 해결해버린다. 다만 범인도 잡지 못하고, 피해자를 구제하지도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옥문도.

젊은 코스케는 혼진 살인사건, 에서 끝이다. 전쟁에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온 그는 나이를 훌쩍 먹어 장년의 나이가 된다. 그 전쟁에 같이 참여하였던 같은 부대원이 죽어가면서 남긴 유언을 듣고 그는 저 옥문도라는 이름을 가진 섬으로 가게 된다. 왜 옥문도인가? 한자를 보면 알겠지만 옥 옥, 자이다. 감옥, 에 쓰이는 옥이다. 감옥은 누가 가는가? 범죄자들이 가는 곳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충격적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충격적인 것은 사실이다. 이전에 미미 여사의 외딴 집, 에서 나는 왜 에도시대를 다룬 작품이 마음에 드는가, 라는 의견에 대하여 괴물이라던가, 요괴가 금방이라도 나올 듯한 그런 환상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를 적은 적 있다. 그런데 이번 옥문도에서는 정말로 요괴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끝끝내 우리는 요괴보다는 인간이 더 무서운 존재였구나, 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게 된다. 

 

밤 산책.

보통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중에서 유명한 작품을 꼽으라면 혼진 살인사건, 옥문도, 팔묘촌, 악마의 공놀이 노래, 이누가미 일족, 이 다섯 작품을 꼽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밤 산책, 은 위의 다섯 권을 제대로 즐기기 위하여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이 책은 팔묘촌과 옥문도 사이의 시간적 공백을 메워주며, 어째서 긴다이치 코스케가 팔묘촌에서 그 사건 지역에 있는가, 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탐정소설에서는 그다지 중요하게는 다뤄지지가 않는 부분이겠지만, 이런 개연성을 잘 맞춰주는 것 또한 시리즈 전체의 즐거움들을 배가시킬 수 있는 장치이리라. 그리고 이 밤 산책, 의 의미는 그런 사소한 개연성을 맞추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서술의 잔혹함에 있다. 사람의 목이 잘려나가는 것은 예사다. 이를 두고 의미, 라고 표현한 것에 반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잔혹함은 독자들에게 순간적으로 공포를 주는 역할을 하며, 그런 공포감들은 추리 소설 독자라면 누구나 떠올려보는 범인이 누굴까, 라는 의문조차도 떠올리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그대로 글을 읽어나갈 수 밖에 없고, 범인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 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특징이 된다. 당장 혼진 살인사건만 해도 이만큼 잔혹스럽게 죽는 모습이 묘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을 기점으로 뒤의 작품들의 묘사는 하나같이 잔인한 모습을 보인다.

 

팔묘촌.

위의 사건이 끝난 뒤 긴다이치 코스케는 잠깐 팔묘촌에 들른다. 의뢰를 받아서 팔묘촌에 들르긴 했는데, 독자입장에서는 이 책을 읽어나가면 긴다이치 코스케가 도대체 무슨 역할을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의 역할은 그저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 되었고 어떤 트릭을 범인이 사용하였는가 정도를 마지막 부분에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것 뿐이다. 마지막에서 작가는 긴다이치 코스케의 입을 빌려 이미 긴다이치 코스케는 범인을 짐작하고는 있었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더 의아할 뿐이다. 물론 증거가 없는 이상 모든 사람을 무죄추징의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보아야 하는 것은 옳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살인사건을 막는 것 또한 옳은 일이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최대한 희생자를 줄이는 쪽으로 방어적 행동을 취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렇게 한다면 범인을 잡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범인을 잡는 것을 사람을 구하는 것에 우선할 수 있을까?

 

악마의 공놀이 노래.

어쨌든 저런 사건을 보내고 긴다이치 코스케는 요양을 좀 해아겠다는 생각에 친하게 지내는 경찰의 도움을 받아 시골로 내려가게 된다. 하지만 원래 그렇잖는가, 명탐정 코난, 의 코난 주변에서도 수많은 사건이 터지고, 김전일 주변에서도 수많은 사건이 터진다. 이 책에서도 예외가 아니라, 그는 편하게 쉬지도 못하고 바로 사건에 휘말려 고생을 하면서 열심히 뛰어다닌다. 이 책의 의의라면 아무래도 노래, 가 사건 해결의 열쇠로 작용하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가 요양을 간 마을에서는 공놀이 노래, 가 구전되어져 오고 있었는데, 그 노래가 묘사하는 형태로 살인이 일어난다. 물론 그 공놀이 노래가 무슨 저주의 노래, 그런 것은 아니고, 살인범이 그 노래를 우연찮게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존에 존재하던 노래, 를 바탕으로 일어나는 사건은 한층 더 독자들에게 기괴한 기분을 준다. 마치 그 사건을 위하여 노래가 전래되어온 그런 기분을 주니 말이다. 

 

이누가미 일족.

이 책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글쎄, 범인이 누구인가, 그렇게 추리를 하는데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이라면 사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전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독자입장에서는 아무리 추리를 하려고 해도 완전히 추리를 하지는 못하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비단 이 책 뿐만 아니라 다른 책들도 어떻게 보면 추리소설보다는 공포 소설에 더 가까울런지도 모르겠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이라는.. 물론 범인이야 추리 소설을 많이 읽어온 사람이라면 이 사람이 아닐까, 가정은 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그 사람이 저런 짓을 했을까, 라는 정확한 가설은 세우기 힘들 것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라서 범인을 찾는 것 보다는 우리나라 아침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으로 책을 읽으면 도리어 재미있을 것 같다. 아니, 아침드라마가 아닌가? 살인 사건이니말이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명탐정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탐정은 탐정이되 명탐정이라고 보기는 조금 힘들 것 같다. 그가 해결했다, 라는 사건들은 모두 그 사건들의 전말을 밝힌 것 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것이기도 하다. 위의 소설 등 중 쉽게 풀 수 있는 트릭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사건이 다 터지고, 범인이 죽일 사람을 다 죽인 뒤에 밝혀낸다면, 그야말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라는 속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에 긴다이치 코스케의 능력이 부족하여 다음 범인을 잡지 못한 것이라면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명탐정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고, 그가 범인을 알고서도 증거가 없기 때문에 일단은 놓아둔 것이라면 사람의 생명을 경시한 것이 아닌가, 라는 비판에 직면하여야 하기 때문에 명탐정이라고 일컫을 수 없을 것이다.

 

증거가 없더라도 의심이 간다면 주변과 협력하여 최대한 동태를 파악하였어야만 하는데, 긴다이치 코스케는 경찰과 협력하는 모습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뛰어난 생각이 떠올랐더라도 혼자서 품고 계속 추리의 탑을 쌓아나갈 뿐이다. 경찰이 가져와준 증거를 논리적으로 분석하여서 사건을 해결한다고 이야기하는데, 뒤집어 이야기하면 경찰은 그저 증거나 가져오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다른 탐정들과 차별화된 어떤 개성을 가지고 있는 것에는 분명할 것이다. 일본의 다른 탐정은 흥분하면 칠판에 수식을 마구 갈기고 - 유카와 마나부, 히가시노 게이고 - 혹은 완벽한 초인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 아케치 코고로, 에도가와 란포 - 모습을 보이는 반면에 이 코스케, 는 정말 일본인들에게 친근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그 친근함이 계속 작품을 읽히게 만드는 힘일 것이다. 이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중 5권이 남았다. 이 5권은 친근함이라는 그의 무기와 더불어 천천히 즐겨볼 생각이다. (사실 지금 이 글을 올리는 시점에서는 코스케 시리즈를 다 읽었다. 과연.. 우리나라 아침드라마 뺨치는 내용이 정말 많은 것 같다.)

 

 

 

 

 

 

여기서부터는 내용이 누설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적을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적지 않으려고 보니 무언가 핵심을 놓친 기분이 자꾸 들기에 결국 몇 자 보탠다. 이 책에 쓰인 트릭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물론 어느 책에 어떤 트릭을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만, 추리 소설을 많이 읽어온 사람이라면 사용된 트릭의 종류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이 시리즈들을 읽으며 범인을 추측할 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경고 문구를 달았다. 일단 간략히 여기서 쓰이는 트릭을 이야기하겠다.

 

밀실 살인 트릭이다. 명탐정 코난, 에서는 밀실 살인이 나타나면 우리 코난의 눈빛이 바뀌며 불가능 범죄, 라는 이야기를 한다. 말 그대로 불가능한 범죄다, 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말은 어폐가 있다.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범죄가 일어났겠는가? 그래서 다시 쓰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 불가능하게 보이는 범죄다. 이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밀폐된 공간에서 사람을 죽인 뒤 지문을 모두 닦아낸다. 그리고 자신은 그 공간에서 나가고 문을 잠궈놓는다. 창문이든 출입문이든 모조리 잠근다. 말은 쉽지만 어떻게? 우리가 초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한, 어떤 식으로든 손이 작용을 해야 할텐데, 이 손, 은 내 손이 될 수도 있지만 살해당한 사람의 손이 될 수도 있다. 살해당한 사람을 유인해서 직접 문들을 잠그게 하거나, 혹은 살해당한 사람이 쓰러지면서 자연스레 문이 잠기게 하거나. 내 손으로는 어떻게 잠글 수 있을까? 비밀통로가 있을 수 있다. 기계장치를 사용할 수도 있다. 이런 기계장치류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줄이다. 가느다란 줄이면 더욱 좋다. 어떤 식으로든 문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좋다. 줄이 아니라면 어떤 기계장치가 필요할까? 도르래같은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들어가지는 못할만한 틈이 나오면 무조건 의심하라. 그건 반드시 범죄에 이용되었을테니까.

 

1인 2역 트릭이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서는 1인 2역 트릭이 정말 정말 정말 많이 쓰인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어? 얘랑 얘는 같은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 거의 대부분 맞아떨어진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저자인 요코미조 세이시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역으로 거짓정보를 보여줄 수도 있으니 주의하라.) 이 1인 2역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범죄자와 피해자가 같은 인물인 경우, 피해자와 엑스트라가 동일한 인물인 경우, 피해자와 주요 인물이 동일인물인 경우, 가해자와 엑스트라가 동일한 인물인 경우, 가해자와 주요 인물이 동일인물인 경우. 가장 충격적인 트릭은 범죄자와 피해자가 같은 인물일테이리라. 하지만 어떻게? 여기서 말하는 범죄자, 는 우리로서는 소설 속 사람들에게서 구전되는 사람이다. 누구누구가 범죄자가 아닐까, 라고. 그리고 시체가 나오는데 얼굴이 갈려있다. 즉, 얼굴을 구분을 할 수 없게 해놓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범죄자는 실제로는 피해자이고,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닐까, 하고 의심을 한번쯤 해보아야 할 것이다. 피해자나 가해자와 엑스트라가 동일인일때는 엑스트라인 사람이 어느 순간에 부각이 되며 지나가는 말로 몇 마디 언급이 된다. 이런 경우에는 그런 말들을 주의깊게 살펴보는게 좋다. 피해자와 주요 인물이 동일인물이라면? 피해자의 얼굴이 소설 내내 조금도 언급이 안되거나, 혹은 언급은 되지만 위화감을 느꼈다거나, 할 때는 의심해보기를 바란다. 가장 자주 쓰이는 트릭은 주요인물과 범인이 동일인물일때다. 사실 이는 1인 2역이라고 부를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서술 트릭이다. 서술트릭은 말 그대로 독자와 추리소설가 사이에 나오는 트릭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술하고 있는 화자가 범인인 경우를 말한다. 주요 인물에 대한 서술을 열심히 하지만 뭔가 빠진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면 서술트릭을 의심해보라. 원래 가장 무서운 거짓말은 진실의 일부를 숨기는 것이다. 그리고 화자가 사건에 관계된 것 같다, 관찰자의 입장이 아닌 것 같다, 그런 판단이 들면 서술트릭을 의심해보라. 서술트릭으로 숨길 수 있는 것은 단순히 범죄자, 피해자, 정도가 아니다. 예를 들어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아이가 치인 것을 보고 신고해서 병원에 갔다. 그런데 그 병원에서 수술을 집도하려던 의사가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아이라고 울부짖는다. 이런 경우 우리의 고정관념은 당연히 의사가 남자라고 우리를 이끌어버리지만, 실제로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고 하더라도 논리적으로 어긋나는 것은 없다. 마찬가지로 고정관념을 이용하는 트릭도 넓게 보아 서술트릭이다.

 

혹은 범죄자가 한 명이 아닐 수 있다. 위의 것들을 모두 적용해보고 남는 가능성이 있다면 '아무리 허황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여러 명이 함께 공모하여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고, 이런 경우에는 차라리 알아차리기 쉬울테지만, 아니면 여러 명이 간격을 두거나 두지 않고서 범죄를 저질렀지만 모두 개별로 저지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독자로서는 알아차리기 힘들다. 우리가 직접 사건 현장에 있지 않는 한.

 

아니면 아예 범죄자가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 정말 주변 인물과 관계가 없이 죽은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이 경우에는 추리 소설이라고 부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p. s. 사실 밤기운을 빌려 안네 프랑크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가 내가 뭐하는 짓일까, 하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안네 프랑크에 대하여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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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3-11-04 23:29   좋아요 0 | URL
어휴.... 혼진살인사건 최근에 본 사람인데요, 이 책 읽기 전에 이 리뷰 안본게 참 다행..! 객관적인 글 같지만 스포 와장창ㅋㅋㅋㅋㅋㅋㅋ
전 밀실 살인은 역시 기계적인 도움 없는게 제일 마음에 오래 남는 것 같아요..
긴다이치 쿄스케는 옥문도랑 이누가미일족을 가장 재미있게 봤는데 어째 집에 남아있는 건 팔묘촌 뿐이네여. 다 팔아버렸나 ㅠㅠ

긴다이치의 추리를 보는 것도 재밌지만 너무 무서운 사건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작가가 정말귀엽ㅋ

가연 2013-11-05 00:01   좋아요 0 | URL
어헝헝.. 스포가 와장창이라시니 그냥 내용누설이 있다고 바꿨어요, 풋. 읽으신 분이 보면 스포덩어리이긴 하지만.. 사실 저 트릭들은 여기만 쓰이는 것들이 아니라 괜찮을거라고 생각했는데, 풋. 이 글을 쓸때는 명탐정 코난의 에피소드들을 떠올리면서 일부 트릭들을 적어나갔거든요. 밀실같은 경우에는 코난과 핫토리가 처음 만난 ... 살인사건, 이라거나.. 서술 트릭에 정말 유명한 ...의 ...라거나 범죄자가 인간이 아닌 경우에는 ...의 ...가 있고...ㅋㅋㅋ 범죄자가 한 명이 아닌 경우에는 ...의 ...를 들 수 있겠죠. 1인 2역은 코난에서는 ...때문에 맨날 나오는 거구.

아, ...가 너무 많네요. 하지만 다 알아보실거라고 믿습니다, 하하하.

여담이지만 긴다이치 시리즈는 공포물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풋. 전 실제로 무섭던데, 병원 고개의 목매달린 집, 같은 경우에는...

Forgettable. 2013-11-05 00:30   좋아요 0 | URL
아.. 코난. 어느샌가부터 김전일보다 코난을 더 즐겨봤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뜸하네요. ㅋㅋ
전 혼진살인사건이 진짜 무서웠어요. 거문고 소리나...... 단편으로 실린 도르래가 삐걱거리는 소리(!!!!!) 진짜 밤에 읽기 무서움ㅋㅋ 하지만 낮에 보면 맛이 아니라 항상 밤에 읽고 무서워 무서워 이러면서 자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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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다시 읽어보니 아가사 크리스티 트릭도 다 여기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연 2013-11-05 00:34   좋아요 0 | URL
ㅎㅎ 저는 둘 다 다봤지요. 상당한 팬이었고.. 요즘은 잘 안보게 되더군요.

저도 밤새워 읽고는 오.. 정말 무섭다, 이러면서ㅋㅋㅋ 제가 젤 처음 혼진을 보고, 거의 시간순대로 따라서 읽어나갔는데, 처음에는 와 정말 무서워, 덜덜덜 떨다가 어느 순간 이게 적응이 되서.. 훗, 이정도로는 날 공포에 떨게 할 수 없어, 이러다가 병원 고개 두 권을 보고는 후덜덜.. 했었답니다. 그게 지난 주 일인데, 글은 참 늦게 쓰여졌네요, 풋.

아니 그걸 말씀하시면 아직 아가사 크리스티를 즐기지 못하신 분들이 저에게 돌을 던질것같은데요ㅠㅠㅠ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13-11-05 08:56   좋아요 0 | URL
저는 [이누가미 일족] 을 재미없게 봤어요. 그거 하나 보고나서 이 시리즈는 안 보는걸로 결정. 언급하신것처럼 이미 죽을 사람 다 죽었고 탐정 캐릭터도 매력이 없....

그런데 위에 뽀게터블님이 단편으로 실린 게 무섭다는 댓글 다신거 보니 저는 [나는 전설이다] 책에 실렸던 단편 하나가 생각나네요. <어둠의 주술>이었나..장난감병정 인형만 등장했는데 어휴, 지하철에서 읽다가 초무서워서 벌벌 떨었던 기억이.....(쓰고보니 생뚱맞군요. 하핫)

가연 2013-11-11 19:37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정말 무서운 단편이었나봅니다. 궁금한데요.

다락방 2013-11-05 08:59   좋아요 0 | URL
아 그리고 안네 프랑크 글도 기다립니다. 흣.

가연 2013-11-11 19:37   좋아요 0 | URL
ㅠㅠㅠ언제 쓸 지 모르겠...

희선 2013-11-07 02:11   좋아요 0 | URL
본 적은 없지만 일본에도 우리나라에 나오는 아침드라마 같은 게 많은가봐요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그런 거 좋아하는지도... 하지만 저는 별로... 그런데 조금 우스운 일은 한번 보면 끝까지 봐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 아예 안 보는 겁니다 (지금 생각하니 아침에 본 것은 거의 없군요) 우리나라는 드라마 엄청 길게 만들잖아요 날마다 하는 것은 거의 여섯달은 가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정이 들어버릴지도 모르겠군요 끝날 때는 아쉬울지도...^^

긴다이치 코스케는 사건이 끝났다 해도 그게 끝이 아니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대로 본 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이런 말을 했군요 마지막이어서 쓸쓸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막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이런 마음은 다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가연 님을 응원하겠습니다^^


희선

가연 2013-11-11 19:38   좋아요 0 | URL
ㅠㅠㅠㅠㅠ 저를 응원해주시는건가요!!!

2013-11-07 0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11 1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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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들이 많이 나왔다..지만 일단은 한 권만.

 

온도계의 철학.

 대한민국의 자부심, 이라는 말이 뭐랄까, 기분이 묘한데, (우리나라 물리학자 중에서 논문 인용수가 두 번째인 사람은 피서영 - 그렇다, 피천득씨의 딸이다 - 교수로 알고 있다. 왜 두 번째냐고? 첫 번째는 누구나 다 아는 이휘소박사다.) 장하석교수는 눈여겨보고 있던 사람이다. 장하석 교수가 부족하다, 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지만, 그 논문인용수 높은 피서영 교수만 해도 그녀의 업적보다는 피천득의 서영이, 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지는 판에.. 장하준 교수를 먼저 떠올릴 사람들이 훨씬 많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자부심, 이라는 말이 입에서 쓴맛을 낸다. 여하튼, 이 책은 과학철학쪽에서 상당히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잘 알고 있다고 여겨지는 개념이 실제로 깊이 파고 들어가다보면 잘 모른다, 라는 것에서 착안한 이 책에서 우리는 온도, 를 자신의 연구 과업으로 삼은 한 과학자의 과학과 철학을 가로지르는 작업을 확인할 수 있다.

 

돈의 철학.

선정될 가능성은 상당히 낮지만, 혹시나 해서 추천해본다. 자본주의의 속성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의식을 밀고나가보자. 자본주의같은 그런 체제에서 우리는 어떻게 문화가 가능한 것인가? 재화관계가 중심이 되고, 갑과 을로 대비되는 수직관계가 유지되는 이런 체제에서도 여전히 시인들은 시를 쓰고, 음악가들은 노래를 부른다. 이에 대한 연구 중 가장 뛰어난 책이 바로 이 짐멜, 의 돈의 철학, 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짐멜의 이 책은 자본주의라는 것은 별 수 없이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다, 라는 부분에서 시작을 하고 있다. 이런 흐름안에서 문화는 어떻게 발전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다시금 영혼이 문화 속으로 스며들 수 있는지, 이 책은 밝히려 노력하고 있는 듯 하다.

 

 

트랜스크리틱.

가라타니 고진의 대표작이다. 절판된 뒤 언제 새로 발간이 될까,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다시 출판되었다. 이전의 세계사의 구조, 등의 기원이 되는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이니만큼 그 중요성은 더할 나위 없이 클 것이다. 마르크스와 칸트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시차라는 개념은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그에 대한 수많은 답, 혹은 단초는 이 책에서 유래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다양한 이론가들을 가로질러야 할까? 이미 수많은 이론들이 근대를 설명하기 위하여 제창되었고, 거기서부터 파생된 수많은 이론들이 현대를 설명하려고 노력중이다. 한편으로는 그 이론들 모두가 비슷비슷한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론들 모두가 다른 층에서 이야기할수가 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른 층에서 논의된다는 부분이 사회를 설명하는데 주된 중심이 되는 듯 하다. 

 

 

리딩.

부담스러운 히친스의 얼굴이지만, 책 내용은 여기에 추천을 안할 수 없을 정도로 알차다. 여담이지만 히친스, 의 논쟁, 은 그나마 얼굴을 좀 가려서 덜부담스럽던데..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나도 포함해서, 히친스를 논쟁가, 정도로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히친스는 논쟁가 이전에 저널리스트이다. 그의 글쓰기에는 이런 저널리스트적인 글쓰기가 크게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일반적인 독서에세이를 쓰듯이 기사를 쓴다고 하자. 당장 편집부에서 빨간펜으로 난도질을 해놓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책을 읽을 때 리딩, 이라고 하여 단순히 자신이 읽은 책들을 나열해놓았다고 여기면 안된다. 이 책은 수많은 배경지식을 아래에 깔고,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는게 아닌, 문단 속의 문단을 읽어나가는 작업을 기록해두었다, 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성역없는 비판 태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도 분명 마음에 들 것이다.

 

 에티카를 읽는다.

이번에 스피노자에 대한 길잡이 책이 나왔다. 이 책의 저자인 스티븐 내들러는 이전에 스피노자, 라는 평전을 통하여 스피노자에 대한 이해를 높인 바 있다. 스피노자에 대한 저자의 이해, 말이다. 철학 이야기, 에서 월 듀런트는 말한다, 저자의 저작에 바로 뛰어들기는 어려운 철학자들이 있는데, 칸트와 스피노자가 바로 그러하다고. 이들은 적절한 길동무들이 필요한데, 적어도 스피노자에서는 그 길동무들로 가장 적합해 보이는 책이 바로 이 책이리라. 이러니 저러니해도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상당히 어려운 책이다. 이런 해설서가 번역되어 나온 것이 정말 다행스럽기 그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솔직히 요즘 좀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책을 읽어도 책이 눈에 잘 안들어온달까..

힘이 정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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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3-11-05 00:28   좋아요 0 | URL
추천은 위의 다섯 권이지만.. 지금 돌아보니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 라는 책도 있네요. 이걸 놓치다니...

희선 2013-11-07 01:29   좋아요 0 | URL
온도계와 돈으로 철학을 하다니... 언젠가 돈에 대한 것은 한번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책을 읽은 것은 아니고 그런 책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온도계로는 어떻게 했을지... 어제 도서관에서 <논쟁>이라는 책을 봤습니다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쓰는 글과는 다른 글이 실려 있을 것 같군요 책 모두가 아닌 문단 속 문단이라니...

가라타니 고진도 스피노자도 이름밖에 모르는군요^^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에서 풀다라고 했는데 정말 풀었을까 하는 생각이... 어느 정도는 풀었을지 모르겠지만 다 풀지는 못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설명하다는 말을 풀다로 했군요


희선

가연 2013-11-11 19:35   좋아요 0 | URL
어헝헝.. 잘지내고 계신가요?
 
[우리는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괴테가 쓴 책은 많지만, 나는 그다지 그의 저작을 접하지 못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 일단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나는 일부분만 읽고 끝까지 읽지는 못했다. 정말 읽고 싶었던 책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인데, 이 책도 일부만 읽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고보면 읽고 싶다, 라는 감정과 읽을 수 있다, 라는 행위 자체에는 상당히 큰 괴리가 존재하는 것 같다. 읽고 싶은 책일지라도 결국은 읽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지만, 별다른 그런 감정이 없는데도 쉽게 읽히는 경우가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평을 내릴 수 없고, 후자의 경우에는 적어도 책이라는 것은 읽히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 보기에, 나로선 높게 평가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사례들 사이에서 읽고 싶은 책이고, 마지막장까지 넘길 수 있는 작품을 만난다면 정말 행운이라고 할 수 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괴테의 수많은 작품들 중 나에겐 파우스트, 가 그랬다. 

 

파우스트의 얼개는 일목요연하다. 지상의 모든 지식을 얻은 파우스트는 절망한다. 그 지식을 얻으면 지금껏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파우스트는 여겼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지식을 얻은 후에도 그는 그 전과 동일하게 파우스트였다. 정령들은 그를 거부하고, 결국 그에게 눈독을 들인 것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였다. 여기서 이 악마는 계약을 제시한다. '이 세상 모든 쾌락을 그대가 만족할만큼 안겨주마, 그 대가로 그대는 그대의 영혼을 바쳐라.' 파우스트는 코웃음친다. 흥, 너같은 악마가 나의 무한한 갈망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은가, 라고. 하지만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법, 밑져야 본전이라고 여기고 피의 계약을 맺는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순간이여 멈추어라, 정말 아름답구나, 라고 말할 정도로 현실에 만족한다면 내 영혼을 멋대로 하여도 좋다.' 그렇게 이 장대한 서사시는 막을 올린다. 이후의 전개에서 인간의 욕구를 대비시켜보면 파우스트의 행적이 명확해지는데, 성욕 - 파우스트는 난봉꾼처럼 순진한 처녀를 유혹하기도 하고, 헬레네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서 아이를 낳기도 한다. 권력욕 - 황제의 신하가 되어 높은 위치에 오른다. 재물욕 - 해안에 자신의 영지를 가진다.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우리는 욕구가 무한한지 무한하지 않은지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쉽게 허무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마치 오래 쓰면 닳는 것과 같아서, 누구나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있으면 눕고 싶을 것이다. 더 편해지기를 바라고,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란다. 따스한 것들에 안겨서 손하나 까닥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을 것이다. 나태함은 우리가 죽을때까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죽지 않는다면 영원히 나태함을 추구할 것이고, 영원히 편하게 살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니 어떤 쾌락의 역치에 다다른다면 결국 생물학에서의 실무율처럼 모두 반응하거나, 혹은 모두 반응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를 파우스트에 적용시키면, 과연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가 맺은 계약이 공정계약이었는지 의심스러워진다. 과연 메피스토펠레스가 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까? 어떤 지고의 쾌락을 주더라도 반복된 쾌락은 결국 허무함을 낳게 될 것이고, 또다른 나태의 길로 접어들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허무함과 나태는 현실에 만족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싫증이 났을 뿐이다.

 

하지만 정말 낮은 확률을 뚫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적어도 파우스트의 입에서 '순간이여, 멈추어라. 그대 정말 아름답구나.' 라고 말을 꺼내게 만들었다. (물론 신의 개입으로 영혼을 뺏기긴 했지만) 물론 그 수단은 메피스토펠레스 본인도 이해가 가지 않는 방법이었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목적만 이루면 끝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저런 악마가 아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조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파우스트는 어떤 순간에 만족한 감정을 느꼈나? 아니, 엄밀하게 말해서 어떤 순간에 만족할 거라고 장담했는가? 그것은 간척지 사업이었다. 그 사업이 끝나면 백성들이 모두 도움을 받고 더이상 자연의 변덕스러움에 피해를 입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적어도 파우스트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모두가 함께 행복을 누리며 즐기고 있는 순간, 그 순간을 꿈꾸며 파우스트는 멈추어라고 외친 것이다. 괴테는 왜 이런 순간을 지고의 행복과 쾌락이라고 설정했을까?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나의 상상속에서도 어렴풋이 저 순간에 지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든다. 이런 지고의 행복 - 사람들 모두가 행복을 누리고 기뻐하는 순간 - 을 위해서 플라톤에서부터 마르크스까지 얼마나 많은 이상이 명멸했던가?

 

지그문트 바우만이 쓴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에서도 큰 얼개는 다르지 않다. 바우만이 쓴 이 조그만 소책자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고 이상적인 이야기들을 쓰고 있다. 누가 모르는가? 낙수 효과가 어떤 의미에서든 제대로 작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현대의 부의 격차는 그 옛날 전태일이 무전유죄를 외치던 때보다 몇 배는 심화되었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사회에 깔려져 있는 전제들, 생명력을 획득하고는 사회를 똑같는 레일 위를 달리게 하는 그런 전제들을 배격하지 않는 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바우만이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지금의 불평등은 잘못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바우만은 왜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서서 하고 있는가? 그건 바로 그가 인용한 이 문장에 집약적으로 정리되어있다. 끝났다. 내가 진짜 작가라면, 나는 전쟁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바우만은 예견된 파국을 막기 위하여 비록 모두가 아는 주장이지만, 그 주장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도록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파국이 예견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일수도 있다. 마치 바우만이 우리가 너무 쉽게 사회 구조에 순응한다면서 그 원인으로 내세운 네 가지처럼 말이다. 경제 성장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경쟁은 필요충분조건이다,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다, 처럼. 바우만은 방금 이야기한 네 가지가 너무나 쉽게 아무런 근거 없이 받아들여진다고 주장하며 분석하지만, 한편으로는 지식인들이 바라보는 '파국'은 지식인 스스로들에게는 아무런 증명도 없이 받아들여지는 경향도 있다. 바우만은 여기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를 할까? 여기서 데카르트를 다시 가져온다. 데카르트의 영혼과 물질의 이원론이 여기서 적용되는 것이다. 영혼은 좋은 것이고 물질은 나쁜 것이다. 그렇기에 영혼을 가진 사람은 좋은 존재이고 물질로 이뤄진 동물은 나쁜 존재이다. 영혼을 가진 존재는 주체성을 가지고, 영혼이 없는 동물은 우리의 쓰임을 받는다. 이것이 확대되어서 주체성을 가진 존재에게는 모든 긍정적인 측면이 고착되게 되고, 주체성이 없는 존재에게는 모든 부정적 측면이 고착이 되버린다. 여기서 조금만 더 살펴보자. 오늘날 사회에서 주체성이 있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오늘날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이러니저러니해도 경제관계이다. 경제관계라는 것은 무엇인가? 생산과 소비가 주를 이루는 관계라는 이야기이다. 논란이 되었던 갑과 을 관계 모두 이런 경제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절대 왕권이 없는 이상 경제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사람이 더 주체성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살펴야 할 것이 있다.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에 어떤 우위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비자와 생산자는 사실상 동등한 존재이다. 방금전 경제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사람이 더 주체성을 가진다고 말을 하였었는데, 소비자가 더 경제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오늘날의 세계는소비자와 생산자 대부분 사이좋게 경제 지층의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세계이다. 모든 부는 상층부에만 집중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디서 우위 관계가 생길 수 있는가? 소비자와 물건사이이다.

 

바우만의 말을 빌려오자. '고객과 소비자가 상품과 소비재에서 기대하는 것은 자신들의 필요와 욕구의 충족뿐' 이라고 한다. 바로 이부분에서 문제가 드러난다. 고객은 실제로 자신도 다른 존재의 필요와 욕구의 충족만 채울 수 있는 도구로 쓰이면서도 판매자를 소비재의 위치로 끌어내린다. 상대를 소비재의 위치로 끌어내리면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이득이 생긴다. 먼저 주체성이 생긴다. 방금 언급한 확장된 데카르트적인 이분법을 따르면 모든 긍정적 면모가 주체성에 고착이 된다. 그리고 물건에 우리는 무관심하거나 무의미하게 대할 수 있다. 상대가 인간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지만 상대가 물건이라면 그런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인간적 유대가 취약' 하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유대에서 더 나아가 '사랑'도 힘들어지게 된다. 사랑은 가시밭길이다. 칼릴 지브란은 그의 저서 예언자, 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랑은 그대에게 왕관도 씌우지만 십자가도 안겨주리라고.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왕관은 원하면서도 십자가는 피하려고한다. 결국 자신의 일방적 감정만 충족시킬 수 있는 소비자, 소비재 관계를 선호하게 된다. 상대를 물건의 위치로 내려앉혀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유대가 약해지고 '사랑'이 사랑이 아니게 된다면 이 사회에는 어쩔 수 없이 파국이 올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오늘날 사회는 위기에 빠져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 처럼 바우만이 진짜 사회학자라면 파국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견된 파국을 막지 못하였다고 하여 그가 사회학자가 아니라고는 할 수는 없다. 단순한 논리학적인 말장난같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그가 진짜 사회학자가 되려면 우리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의 의견을 조금씩 따르는 사람들, 무비판적인 수용이 아니라 그의 의견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바로 우리가 될 것이다. 이런 힘이 모여서 바로 파국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파국의 원인을 알았으니까 그 해결책도 간단하다. 주체, 객체 관계 등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탈피하여야 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상층부에 있는 일퍼센트들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일퍼센트는 제외하고서라도 적어도 우리끼리는 사랑을 배우고 상대를 소비재로 격하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상대를 도구로 격하시키는 본인 스스로도 정작 다른 사람에 의하여 도구로 격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좋아서 서로를 그렇게 객체화시키는가? 그렇지는 않다. 사회의 구조에 문제가 분명 있기 때문에 그렇다. 자본주의의 폐단, 특히 팔 수 없는 것을 팔게 된 현대 사회의 문제는 이미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등을 통하여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구조탓으로 돌린다면 늦어지게 된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여야 한다. 이 책의 저자 바우만이 소리를 높이는 것 처럼 말이다.

 

가끔 나는 경제적으로 일퍼센트를 차지하는 그런 부유한 사람들을 생각해보곤 한다. 솔직히 부럽다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내가 조금만 더 부유했다면 책을 주문할 때 굳이 오만원씩 끊어서 마일리지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그렇게 고심할 필요가 없었을텐데, 와 같은 사소한 고민에서부터 조금만 더 자유롭게 돈을 쓸 수 있다면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을텐데, 와 같은 생각들까지도 한다. 그러다가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더 자유롭게 돈을 쓸 수 있으면,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다니. 수많은 옛날 경전에서 이야기하지 않는가, 재물은 스스로를 얽어맬 뿐이다, 라고. 하지만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더 많은 돈을 가지면 더 자유롭게 살 수가 있으리라고 대부분 떠올리게 된다. 물론 어느 사람들은 이야기할 것이다. 이 돈을 벌고 또 벌게 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얼마나 바쁘게 살고 있는지. 하지만 그런 계층을 넘어서 돈이 돈을 벌어다 줄 경제적으로 더 상위층을 보면 자유로울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본다. 그리고 그들처럼 나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다음에 따라오는 것은 마치 포도를 올려다보는 여우처럼 늘상 이런 질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행복할까? 사실 잘 모르겠다. 행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파우스트, 에 따르면 그들은 지고의 행복은 맛보고 있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마치 신포도라고 합리화하는 여우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파우스트의 말을 빌려 이렇게 되뇌게 되는 것이다. 무한한 곳에 군림하는 그대들이여, 함께 모여 지내면서도 영원히 외로운 당신들이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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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0-21 01:57   좋아요 0 | URL
글 제목이 슬퍼요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은 더 갖기 위해 일을 할 것이고, 누가 이 돈을 가져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늘 할 거예요 많으면 다른 사람한테 나눠주면 좋을 텐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갖게 된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들지도... 그러니까 돈은 적당히 있는 게 좋습니다 자신이 움켜쥐려는 사람도 있지만 사회에 다시 돌려주는 사람도 있어서 다행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 있어야겠군요 우리가 서로를 끌어내리지 않는다면 좋겠습니다


희선

가연 2013-10-22 12:49   좋아요 0 | URL
저는 붙이면서 멋있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봐요? 하하하하하ㅠㅠㅠ 파우스트를 이번에 다시 읽어가면서 이 구절이 너무 맘에 들어서 써야지, 라고 생각을 하고는 이렇게 써버렸네요.

여담이지만 돈이 아주 많으면 누가 돈을 가져가든지 말든지.. 할 것 같네요, 풋.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는 것 같아요

2013-10-21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2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3-10-22 09:06   좋아요 0 | URL
책 제목이 너무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져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 리뷰에서 '소책자'란 단어가 보이지 뭐에요. 그래서 검색했더니 100쪽이 조금 더 넘는 책이네요. 그렇다면 한 번 읽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져요. 무엇보다 이 얇은책이 가연님에게 이토록 긴 리뷰를, 별 다섯을 불러냈군요.

상위1프로라면, 당연히 마일리지 때문에 5만원씩 끊어서 주문하지 않겠지만, 제가 곰곰 생각해보니, 상위 1프로라면 주문을 직접 할것 같지 않은데요. 비서 3이나 비서 4에게 시켜서 이책과 이 책 사다 서재 내 책상에 올려둬요, 라고 하지 않을까요? 하하하하. 저로서는 실현 불가한 얘기네요.

저는 감당이 안될것 같아서 상위1프로까지는 쳐다보지를 못하겠어요. 만약 애초에 그렇게 태어났다면, 아 이 돈이 그냥 다 내 돈인가보다 하겠지만 없었는데 생긴거라면 제가 그 돈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 역시 신포도를 쳐다보는 여우의 마음인지도 모르겠어요.

가연 2013-10-22 12:53   좋아요 0 | URL
네, 분량이 얼마 안되는데 빨리 읽혀지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물론 제가 그때 딴생각들을 하고 있어서 그랬었는지도ㅎㅎ 별 다섯개는 좀 많이 고민을 했는데, 네개는 아닌 것 같아서.. ㅋㅋㅋ 제가 또 별 다섯개는 잘 안주는 편이긴 한데ㅎㅎㅎ 네 개는 인플레가 심하지만요, 하하하하하하하하..

오, 다락방님의 말씀이 더 옳아요, 비서 3에게 시킬 듯 하네요ㅠㅠㅠ

맥거핀 2013-10-23 00:30   좋아요 0 | URL
이 다음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는 거의 끄트머리에 다다른 것 같기도 합니다(다만 이 다음이 파국일지, 아니면 더 극심한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요). 파국이 가까이 시작되는 때는 '차라리 파국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 생각의 비율을 넘어설 때이겠지요. 오늘 다큐 하나를 봤는데, 그런 말이 나오더군요.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한다...

그러고보면 파국이 오지 않기를, 그럼으로써 이 세계가 영원히 이렇게 지속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 위의 1%의 사람들일텐데, 그들은 도리어 이 파국을 앞당기고 있으니..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연 2013-10-31 08:46   좋아요 0 | URL
요즘에 개도국에서의 다국적기업의 현황, 이랄까, 그런 류의 다큐멘터리 소식을 들은 적 있는데 많은 점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다국적기업이라는 게 자본주의의 진화의 정점에 다다른 그런 생물체 아닌 생물체라고 볼 수 있을것인데.. 예견된 파국은 언젠가 오기는 할 테지만.. 개도국들이 거의 전멸할때쯤 오지 않을까, 싶네요. 이들의 생명이 희생물로 바쳐져 유예되었다고나 할까..

다만 다국적기업도 다국적기업나름대로 희생자의 목숨을 살려두려고는 하겠죠. 그게 더 효율적일테니.. 바로 이 부분에서 말씀하신 1퍼센트의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의미에서 볼때 파국보다 더 심한 무엇인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2013-11-01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04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기없는 에세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버트런드 러셀의 책 중에서 가장 많이 읽혔다는 이 인기 없는 에세이, 의 목차를 읽어내려가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런 생각이었다. '이 모든 게 러셀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지?' 러셀의 이 책은 정말 수많은 영역을 다루고 있다. 철학, 정치, 종교, 억압받는 자, 인류에게 해를 끼친 관념과 이득을 준 관념 등등으로 말이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것은 러셀과 그다지 관련없을런지도 모른다. 서양철학사, 로 먹고 살만한 수입을 가지게 된 러셀, 여러 여성과 염문을 뿌렸던 러셀, 수학과 논리학 분야에서 한 획을 그은 러셀. 결국 러셀이 살고 있는 경계는 그정도이다. 하지만 러셀에게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비판받을 일일런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아니, 그러면 이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는 입이나 다물고 가만히 있어야 한단 말이야?' 물론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우리는 정치, 사회, 그리고 경제 등에 대해서 자유롭게 자신의 신념을 말할 권리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러셀 본인이 강조하듯이) 그 신념이 그릇된 근거를 바탕을 하고 있거나, 설령 제대로 된 근거(라고 짐작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광신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놓아두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사실 이 책은 (러셀 자신은 부인하고 싶겠지만) 이미 러셀이 가지고 있는 이름에서부터 오는 후광, 그리고 그 자신의 활동과 업적에서 오는 권위 등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사람들' 에게 정말 적절한 '제대로 된 근거(라고 짐작되는 것)'를 제공해준다. 이런 제대로 된 근거를 제공받은 사람은 탄탄한 이론을 세우게 된다. 러셀은 이 책에서 지적한다 : 단단한 이론을 제공받은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더욱 구체화시킨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헤겔 철학에 대한 러셀의 비판이다. 사실 나로서는 헤겔과 라캉에 대하여 좋은 감정이 없기에, 정확히 말하면 근거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 둘에게 철학적으로 빚을 지고 있는 지젝도 좋아하지는 않는다.) 헤겔 철학에 대한 러셀의 비판을 읽으면서 아주 좋은 비판이다, 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기까지 했지만, 몇 몇 부분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헤겔의 저작인 행성궤도론에 대한 러셀의 비야냥거림은 아주 적절하다. 하늘에 행성은 7개밖에 존재하지 못한다는 헤겔의 행성궤도론에 대하여 러셀은 뒤에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엮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의 치아의 개수와 남자의 치아 개수에 대하여 이론을 세웠다.) 이야기한다. 직접 눈을 뜨고 관찰했다면 그런 이론을 세우지는 못할텐데, 라고. 하지만 이 비야냥거림이 적절하다고 해서 헤겔 철학 전체를 비판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변증법에 대하여 너무나 명징한 문장을 가져와서 '자, 이게 헤겔철학의 정수임에 다름아니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공격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변증법이 왜 엉터리인가? 러셀은 변증법과 역사의 관계에 대한 제대로 된 근거를 헤겔이 설명하지 못했다, 고 이야기하지만 러셀 본인도 왜 그게 마르크스가 얻은 '가장 터무니 없는 부분' 인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러셀은 헤겔의 철학을 읽으면서 '뭔가 있을런지도 모른다' 라고 여겼었다가 수학철학에 대하여 엉터리인 내용을 언급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헤겔 철학이라는 독' 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한 사유를 말하는 사람이 일부가 거짓이라고 해서 전체를 두고 다 잘못된 거야, 라고 비판받아야 하는가? 나는 헤겔의 철학에 대하여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러셀 처럼 '무언가 심오한 뜻이 있을런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조차도 해본적 없다. 하지만 이는 내가 어쩌면 충분히 깊게 헤겔 철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일지 모른다. 내가 시간을 들여 충분히 헤겔 철학을 공부한다면, 그리고 그의 모든 저서를 깊게 분석한다면 어쩌면 정말 심오한 뜻이 있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만약에 내가 헤겔 철학을 접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렇게 여기고 접근하고 싶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경험론자이자 합리적인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러셀이 취했어야 하는 태도일런지도 모르겠다.

 

칸트에 대한 러셀의 말도 당혹스러운데, 물론 대학에서 윤리학과 철학을 분명히 공부했기에 나보다 더 많이 러셀이 칸트 등에 대하여 사유를 했었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장은 보아넘기기 어렵다. '실천 이성에 따르면 의지는 자유로운 것이다. 이러저러한 행위를 할 능력이 내가 없다면 당신은 그런 행위를 해야 한다, 라는 명령이 그릇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수학적으로 집합을 그려보자.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A집합이라고 하고, 그런 행위를 하는 사건을 B집합이라고 두자. 그리고 자유의지를 C집합이라고 두면, 위 문장에 따르면 A집합은 B집합을 포함한다. 그런데 이 A집합과 C집합의 관계는? 이를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만큼만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능력만큼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 말 자체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이 아니다. 칸트가 원하는 것은 정언 명령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 자체가 자유의지의 표상이라고 우리가 깨닫는 것이다. 후회감, 등으로 말이다. 우리가 거짓말하면 후회를 느낀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우리가 그런 것을 느낀다는 것이 초월적 자유의 편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초월적 자유에서 칸트는 신 등의 개념을 가져온다. 러셀의 저런 사고과정에서도 신이 결국에 등장하기는 하겠지만 두 신에 이르는 길은 전혀 다르다. 물론 나는 러셀이 칸트에 대해서 이해가 부족하다고 여기고 싶지는 않다.(인기작 러셀의 서양철학사, 를 보면 전혀 이해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책을 쓰다보니 쉽게 풀어서 쓰게 되고 결국 오류가 생겼다고 믿고 싶다. 아니, 도리어 이게 러셀의 심정에 관한 더 정확한 문장일지도 모르겠다.'철학자들은 늘 서로 다른 관념을 가지고 싸운다. 그런 관념을 일반인들에게 적당히 끼워맞춰서 이야기한다고 해서 일반인들에게 무슨 영향이 생기겠는가?' 

 

이런 러셀의 태도가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또 아니다. 이 책애서 러셀은 이야기한다. 거칠게 말하면 먹고 살기도 바쁘고, 우리가 사는 이런 문화 수준을 유지하기 위하여 좁은 영역의 전문가들을 많이 배출하여야만 하지만, 그런 좁은 영역의 전문가들과 일반인들을 위하여 전반적인 정도의 수준의 교양은 필요하다, 라고 말이다. 원 글은 교사의 중요성(저런 전반적 수준의 교양을 갖추기 위하여 교사의 역할이 크다)에 관한 글이었지만, 이렇게 잘라서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일반인들은 넓게 어느 정도만 알면 된다. 굳이 깊게 파고들어서 명사와 형용사, 부사의 미묘한 차이에 따른 철학의 변천사 등을 알 필요가 있는가? 라고 말이다. 실제로  그런 것을 안다고 하여 그다지 도움되지는 않는다. 굳이 채우는 거라면 지적 허영정도일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교환양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 서양철학사, 서문에서 러셀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철학은 No man's land, 과학과 종교 사이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라고 말이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이 매우 애매하기도 하다. 러셀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 로지 코믹스, 를 보면 러셀이 어떻게 논리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알려준다. 이 철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저 철학자는 저렇게 말해. 철학도 수학처럼 계산해서 어떤게 답이다, 라고 알려주면 좋을텐데, 라는 마음을 품고 있던 러셀은 라이프니츠를 만나게 된다. 라이프니츠가 그런 방법을 고안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라이프니츠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한 것 같다. 오죽하면 서양철학사,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겠는가 '라이프니츠를 제외하고는 다른 철학자들에 대하여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다. 라이프니츠를 '제외' 하고는.

 

특히 헤겔에 대하여 공격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이론이 논리적 기반인 변증법을 활용을 하고 있다는 점때문이리라. 논리적 기반을 바탕을 하는 이론은 러셀이 책에서 지적하듯이 '마음뿐만이 아니라 머리까지 사로잡는다.' 그것의 결과는? 광신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중심이 되는 관념, 역사가 변증법적인 논리를 따라 발전해나간다, 를 받아들인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적으로야 어떻든) 결국 소련을 낳았다. 그리고 소련이 어떤 국가였지는 굳이 여기서 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런 건 러셀이 라이프니츠와 그의 제자 불Bull이 그들이 고안한 방식으로 옳고 그름을 계산했었다면 당장에 그르다, 라고 나왔을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풍선에 김을 빼는 소식이겠지만, 그런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러셀의 저런 태도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러셀의 공격이 그의 권위를 빌려 '헤겔은 모조리 엉터리야, 칸트도 초등학교때나 배우던 것 (사실 이 부분에 러셀은 유년기의 도덕률, 이라고 표현하는데 러셀의 표현에 동의하기는 한다. 진, 선, 미는 우리가 초등학교때 배우잖는가.) 을 이야기하려고 하네, 우린 초등학교 나왔거든?' 라는 식으로 또다른 광신을 낳게 된다면 정말 끔찍하지 않겠는가?

 

다른 분야에 대해서 러셀이 말한 것도 좀 당혹스러운 부분이 있다. 뭐, 러셀이야 미국이 지금 이런 나라가 되리라고는 몰랐을테니 -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쉽사리 자신의 시대를 초월하지는 못한다 - 어느 정도 감안을 한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미국에 대하여 편향적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국제 정부를 만들자니. 그것도 미국을 중심으로 소련을 밀어내면서.  러셀은 당시에 드러낸 칼날만 날카롭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만큼이나 무서운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당하는 중독인데도 말이다. 오늘날 미국의 헤게모니를 보면서 러셀은 그때 내가 정말 잘못생각했구나, 라고 여기지 않을까? (뒤에 역자가 친절하게 러셀은 '평생 후회했다' 라고 적어주었지만 말이다.) 핵무기는 정말 잔인한 무기이지만, 동시에 일종의 억지력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그 옛날 개틀링 박사가 개틀링 건을 만들면서 '이 무기를 만들면 모든 사람들이 손을 들고 떨거야, 그럼 이제 전쟁은 안녕이겠지?' 라고 여겼던 순진한 꿈을, 이 핵무기가 이뤄준 것이다. 쓰면 모두가 죽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억지력은 사람들을 이렇게 이끈다. 마치 핵무기가 없는 것 처럼 삶을 살아가도록 말이다. 그런 속담이 있지 않은가. 항상 가까이 있지만 모른체 하는 것은? 죽음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 에서 이렇게 말한다.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런데 이렇게 삶을 살아가다보면 먹고 사는게 가장 큰 일이 된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아, 먹고 사는 것을 무기로 하면 되겠구나, 라고. 그리고 이는 '자본' 의 이름으로 이를 무기화된다. 이것이 은밀한 독이 되는 것이다.

 

러셀의 경험주의적 태도는 배울만하다. 어떤 사례에 대하여 의견을 가진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그 의견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이러한 근거가 있는 한 이 의견이 다른 의견에 비하여 더 옳다, 라고 여겨야 된다. 하지만 러셀 본인이 이런 경험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에 이르면 사실 고개를 갸웃거릴수 밖에 없다. 이런 경험주의적 태도는 양비론과는 다르다. 그래서 비교적 명확한 입장을 취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명확한 입장이 다른 입장을 논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항상 본인의 의견이 틀릴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다른 입장이 그르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이 부분이 더 옳다, 라고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신에 대하여 러셀이 언급하는 부분들을 보자. 수녀들은 목욕을 할 때 옷을 입고 목욕을 한다고 한다. 러셀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누가 본다고. 그러자 수녀들은 대답한다. 아니, 하나님이 보시잖아요? 그리고 러셀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수녀들은 신을 무슨 관음증 환자로 여기는 건가, 라고. 여기서 유추되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당연히 신은 관음증 환자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수녀들은 왜 저렇게 목욕하는가? 이런 식으로 신이라는 관념을 인정하면 걸리는 관습이 너무 많다. 이러한 근거들을 종합해볼때, 신은 없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여기까지를 유추해냈지만, 만약에 경험론자라면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신은 없다' 라고 결론을 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증거가 없으니 받아들이지못한다, 라는 말은 양날의 칼이다. 증거가 없으니 일축해버릴수도 없다.

 

이렇게 문제점들이 생기는 이유는 러셀 본인의 생각과 태도가 불일치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이 책 자체가 오랫동안 써왔던 글들을 묶어서 출판했다는 것에 기인할지도 모른다. 사람의 생각은 (근본적 심성이라던가, 신념, 사상은 바뀌지 않을지 모르나) 조금씩 깎여나간다. 어제는 신은 있다, 라고 외치던 사람이 오늘은 안 외치고, 그다음날은 신이 있을까?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마찬가지로 어제는 신이 없다, 라고 말하던 사람이 오늘은 신이 있을까? 라고 이야기하고 그 다음날은 신은 있다,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런 '깎여짐' 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어진 일종의 후천적 관념일 경우에 두드러진다. 갓 태어난 아이가 신에 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정치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자유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그런 의견들은 항상 '깎여질 수 있다' 는 말이다. 러셀의 초기 글에 비하여 이후의 글들은 약간씩 생각이 바뀐 것이 있을지 모른다. 그런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놓았으니 오류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이 책이 생긴 이유가 상업적이니 말이다. 서문에 대략 이런 내용의 글이 있다. '러셀의 책을 간행하던 출판사는 사실상 러셀이 무슨 주제에 관하여 쓰든 비평과 판매에 성공을 거둔다는 것을 확인하고 아직 안 낸 글이 있다면 묶어서 책으로 만들자 하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인기 없는 에세이' 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책에서 다른 것을 주목할 것이 아니라 러셀의 핵심 그 자체를 노려야 한다. 그 외에는 모두 결국엔 깎일 이야기들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러셀의 핵심은 무엇인가? 러셀이 살아가면서 절대로 바뀌지 않을 그 신념, 사상, 심성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이 책이 아니라 다른 책들을 참조하여야 할 것인가? 아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그것은 명징하게도 이 책에 적혀있다. '눈 앞의 비교적 확실한 악을 내버려두고 미래의 비교적 불확실한 미덕을 택해서는 안된다.' 라는 말이다. 몇 번이고 재반복되며 이 책에 나타나는 저 주제가 바로 러셀 본인의 신념이자 절대로 깎여나가지 않을 심성이다. 그런데 어째서 러셀은 이런 신념을 품게 된 것일까? 그것은 러셀 본인의 심성과 관련이 있다. 어린 시절 자살을 하고 싶었던 러셀을 살게 해준 것은 유클리드 기하학을 더 알고 싶다, 라는 심정때문이었다. 논리적이고 완전한 세계, 그 세계를 수학은 이루어주었고, 그에 힘입어 그는 수학 원리를 쓰고, 논리학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수학의 세계는 결국엔 불완전한 세계였었고, 사실일지도 혹은 거짓일지도 모르는 추측을 바탕으로 위태롭게 세워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체계였었다. 바로 여기서 러셀은 그가 원하는 완전한 세계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눈에 보이는 비교적 명확한 모순을 제거해나간다면 결국엔 무엇인가에 도착할거라고. 모든 것이 그와 '상관이 있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일종의 방향이 되어준 경구다. 생각해보면 러셀의 삶은 저 주제의 실천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전쟁이 위험하니 반전운동에 나선 것이다. 공산주의랍시고 사람을 굶겨죽이고 탄압하니까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것도 저것도 기억하기 싫은 사람이라면 러셀의 삶이 어떻고, 사상이 어떻고 다 잊어도 좋다. 그러나 러셀이 남긴 이 말만은 가슴에 품기를 바란다 : '인도주의를 기억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무시하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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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0-10 00:54   좋아요 0 | URL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이런 말을 붙이다니... 본래 제목에는 없는 말을 붙인 것인 듯해서 찾아보니 책 목록에 나와 있네요 본래 제목은 쉬워서 영어를 잘 모르는 저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생각나는군요 나중을 위해 지금 나쁜 일이 일어나도 눈감는 사람과 지금 바로 앞에 일어나는 나쁜 일을 없애려는 사람, 결국 처음 사람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막아야 한다로 돌아섭니다

러셀은 완전한 세계가 없다고 절망하지 않았군요 절망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희선

가연 2013-10-10 20:43   좋아요 0 | URL
ㅎㅎ 러셀이 정말 완전한 세계를 목표로 살아갔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제 추측에 지나지 않죠, 풋. 하지만 러셀이 논리학 그리고 수학을 정말 좋아하였던 것은 사실이니깐.. 뭐랄까, 수학의 체계를 완전히 반석 위에 올릴 수 없다, 는 것이 증명되었을 때 눈을 돌려서 수학에서는 실패했지만 세상에서라도 모순을 줄여보겠다, 라고 생각한다면 좀 앞뒤가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합니다.

러셀의 현대적 후계자라고 볼 수 있는 촘스키의 경우엔 러셀과 아인슈타인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모두 반전운동에 뛰어들었지만 아인슈타인은 편지를 써놓고 다시 연구실 안에서 물리학 연구에 뛰어들었고 러셀은 거리로 걸어나갔다고.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그렇게 불멸의 명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던데.. 저야 물론 이 말에 동의하지않지만... 아하하하하하하하하

희선 2013-10-11 01:17   좋아요 0 | URL
수학은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실제로는 꼭 그렇지도 않군요 수학을 왜 좋아하는지를 말한 사람도 더 깊이 공부를 해나간다면 그것을 알게 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수학 체계, 이런 것은 잘 모르지만... 러셀 조금 재미있는 사람 같기도 합니다

반전운동을 하기 위해 거리로 나가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아인슈타인처럼 자기가 할 일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자기 자리를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앞에 나서서 무엇인가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희선

가연 2013-10-16 13:04   좋아요 0 | URL
ㅎㅎ 수학은 딱 맞아 떨어지지만 그 기반은 불안하다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인슈타인을 지지하기에... 하하하하하하

마립간 2013-11-02 13:01   좋아요 0 | URL
위 가연님의 글을 처음 게시 때 읽기는 읽었는데, 리뷰 당선작으로 선정되어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제가 모르는 부분을 언급하셔서, 반론보다는 의문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떠오르네요. (몇 가지는 이미 고민하고 있던 것이구요.)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제 서재에 글을 올리겠습니다. 그 때 링크하려 해서 미리 양해의 말씀을 구합니다.

가연 2013-11-04 18:06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에 당선작이라고 해서 벌써 이달의 당선작이 발표되었나, 했더니.. 신간평가단 당선작이군요. 굳이 양해하실필요 없이 나중에 의문점 생기셨을때 댓글달고 링크하셔도 되는데.. 다만 제가 양해드려야 될 것 같은데요.. 요즘 제 서재도 잘 안들어오는 편이기도 하고... 요즘 마음이 좀 심란하기도 하고.. 제가 그렇게 많이 알고 있지도 않기에 답을 제대로 못해드릴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마립간 2013-11-08 08:15   좋아요 0 | URL
제 글을 이 글에 직접 먼댓글로 링크하지 않고 본문에 주소로 인용을 표시했습니다. 내용상 반론?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 날 때 읽어주시고 내용상 오류가 있으면 면 지적해 주세요.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8일 글 말고 다음주에 2편 더 있습니다.)

가연 2013-11-11 19:34   좋아요 0 | URL
답변을 길게 썼습니다.. 졸지에 푸념이 섞여버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