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가장 먼저 당황스러운게, 리뷰 http://blog.aladin.co.kr/760670127/6629638 를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저는 그다지 칸트와 러셀에 대해서 옹호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저에게 답을 요구하시면 별 수 없이 저는 칸트와 러셀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글을 쓸 수 밖에 없지요. 졸지에 악마의 변호인이 된 기분인데, 그다지 좋아하는 역할은 아닙니다. 제 리뷰를 통해서 칸트와 러셀을 판단하시는 것 보다는 직접 칸트와 러셀의 저작을 읽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립간님께서 올리신 글들을 다 읽긴 했지만 답변을 해야될까, 말아야될까, 고민을 좀 했습니다. 제가 그다지 옹호하지도 않는 입장에 대하여 논쟁이 일어나는 것은 사양하고 싶거든요. 게다가 여기서부터는 반 농담, 반 푸념입니다만 오늘은 빼빼로 데이입니다. 결혼하신 분은 모르시겠지만 저같은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기분이 안좋은 날입니다. 외롭고.. 쓸쓸하고... 이런 철학이나 과학나부랭이에 정신적으로 신경을 쏟을 때가 아니라 더욱더 답변을 하기가 꺼려졌습니다. 그리고 이 글이 사실 마지막 답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직접 저에게 답을 요구하시지 않으셨으면 답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물에 독을 뿌리는 소리같지만.. 저같은 솔로는 이런 인터넷보다도 신경써야 될 게 훨씬 많거든요. 논쟁같은걸로, 그것도 제가 그다지 옹호하지도 않는 입장을 옹호하는 척하면서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것은 사양입니다. 농담같지만 진심입니다ㅠㅠㅠ

 

그러나 아무래도 계속 오해가 커져가실까 두려워 제가 아는 범위안에서 간단히 답변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애초에 칸트의 철학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여기서 몇마디 끄적거리는 것보다 직접 칸트의 철학을 읽어나가시는게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글들을 읽어봤는데, 제가 볼때는 오해라고 여겨지는 부분이 있고, 논리적으로 오류도 좀 보이고 있습니다. 댓글을 달아서 조용히 말씀드리는게 훨씬 좋을 것 같지만 길어질테구.. 저도 생각을 가다듬는 의미에서 이렇게 새로 글을 씁니다. 

 

가장 첫번째 글입니다.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78492 인데요, 여기서 마립간님의 태도를 보시면 사실 비과학적이고 철학적이다, 라고 보는게 옳을 것 같습니다. 다음은 마립간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거의 모든 학문을 철학으로 본다. 사람이 궁금증, 호기심을 갖는 것 자체가 철학이며, 나름의 가설을 제안한 것이 철학이다. 이런 문제에 시간이 가면서 자료가 축적되면, 그 자료를 바탕으로 좀 더 타당한 가설이 되면 (자료가 충분하면 가설은 이론이 된다.) 과학이 된다.

 

문장들 자체가 사실 옳은지조차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첫번째 문장, 본인이 모든 학문을 철학으로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본인의 모든 학문에 대한 태도는 당연히 철학적이어야 맞겠지요. 마립간님의 말씀으로는 철학에서 자료가 모여져 타당해지면 이론이 되고 과학으로 일컫어진다고 하셨는데, 위의 글의 마립간님의 친구분께서는 그 타당한 이론을 자연과학으로 보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 그분의 말씀으로는 철학적이신 마립간님이 비과학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잘 이해가 안가신다면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아래에 의문을 남겨주셨는데 다음입니다.

 

의문 1 ; 비과학의 분야, 예를 들어 종교적 의문까지도 과학으로 생각하는 나는 과학적인가 비과학적인가?

 

본인이 종교적 의문을 비과학의 분야, 라고 이미 규정하고 계시는데 그 이상 어떤 답을 원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립간님의 과학에 대한 규정을 가져와봅시다. 마립간님께서는 철학에 자료가 축적되어야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마립간님에 따르면 철학으로 불릴 수 있는 종교 - 마립간님은 모든 학문을 철학이라고 방금 규정하셨지요 - 는 과연 과학으로 불릴만큼 자료가 많이 축적되었습니까? 그렇다면 그 근거는 어디있습니까? 어느 논문과 어느 책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본인은 종교도 과학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조금 오해하시는 부분이 바로 이부분입니다.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는 분야를 모두 과학으로 판단하고 계시고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론, 소위말하는 가설설정으로부터 이어지는 그런 절차가 반드시 그 내용물이 과학이라는 것을 도출해내지는 않습니다. 이는 지식을 산출해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지요. 쉽게 말해서 소시지 기계가 있다고 합시다. 그 소시지 기계에는 보통 소시지의 재료를 넣지만, 굳이 소시지의 재료를 넣지 않아도 됩니다. 다른 무엇인가를 넣으면 소시지처럼 생긴 무엇인가가 나오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걸 두고 소시지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물론 마립간님께서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적설계론들도 과연 과학적 방법론을 거치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도리어 더 철저하게 과학적 방법론을 거쳐서 도출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지적설계론들도 과학일까요?

 

사실 이런 논리적인 이야기보다도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비과학적이라고 해서 그게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 친구분이 비과학적이라고 하셨을때 받아들이지 못하셨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비과학적이라는 말이 반과학적이라는 말도 아닌데 말입니다. 저런 이야기를 모두 놔두고 그냥 난 종교와 윤리, 도덕에도 모두 과학이라는 말을 쓰겠다, 라고 하셔도 사실 상관없습니다. 그런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깐요. 하지만 과학이라는 말에 미묘한 우월감을 부여하고 계시다면 그건 정말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글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79724 은 사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 리뷰와 말씀하시는게 어떤 연관이 있는지조차도 잘 이해가 가지않습니다. 신이 없다, 라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과 수학과 생명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 제가 더 궁금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세 번째 글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81487 인데요. 사실 칸트의 사상을 해설한 책을 직접읽어보시기를 진심으로 권해드립니다. 제가 어설프게 설명했다가 도리어 의문만 증폭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들은 모두 어설픈 설명이라고 판단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크게 본령에서 어긋나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빈 서판, 과 스피노자의 뇌, 인데.. 저는 이 두 권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현대과학에서 감정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는지 대략 짐작만 할 뿐입니다. 사실 빈 서판과 스피노자의 뇌, 의 저자를 보면 무슨 말이 대략 쓰여져 있을지 짐작이 되긴 하거든요. 그러나 그런 과학적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칸트를 비판하는게 과연 옳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제 리뷰에서 인용하신 부분만 잘라서 보면 제가 마치 칸트와 러셀의 사상을 설명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이 부분을 가지고 러셀이나 칸트를 비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비판하시려면 제 글을 기초로 삼지 말고, 직접 러셀과 칸트의 저작을 읽어보셔야 합니다. 제가 저 부분에 불분명한 이해를 바탕으로 글을 썼을지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당장 저 자신만해도 제가 칸트의 철학과 러셀의 철학을 모조리 이해했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할테니 말입니다.

 

이제 칸트 철학에 대해서 조금 이해를 하셔야될 것 같은데요, 저 또한 순수이성비판조차 제대로 읽지 못한 주제에 감히 뭐라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이 문장부터 일단 살펴보겠습니다.

 

칸트의 자유의지에 관한 가치관은 7. 자유의지, 도덕적 자유, 실존적 자유로 판단된다. 하지만 그 판단이 옳은가? 깨닫다. 후회, 양심의 가책이 의지에 속한 것인지, 단지 사고와 감정의 현상인지 내게는 불명확하다.

 

일단 7번 범주자체가 사실 잘 이해가 안가는데, 자유의지와 도덕적 자유, 실존적 자유 자체는 사실 한 범주로 묶일만한 성질의 것들이 아닙니다. 칸트에 따르면 자유의지가 도덕적 자유를 담보하고, 칸트에서의 자유는 실존적 자유의 의미와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가치 판단이라면서 - 자유의지에 대한 가치 판단이 연속선(spectrum)위에 있다. 나는 이 8가지 가능성을 모두 수용한다. - 자유의지를 범주에 넣어놓은 것 자체도 이해가 안갑니다만, 어쨌든 범주 자체가 조금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칸트의 자유의지에 대한 가치관은 저기에 나오는 범주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자유의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초월, 초월적 이라는 말부터 먼저 하도록 합시다. 마립간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십니다.

 

초월에 대한 심상은 경우에 따라 신神, 영靈, 성性, 도道로 표현되나 실제적으로는 원형原型에 대한 동경과 창발에 대한 동경이라고 생각한다. 내 판단이 맞다면, 즉 내 판단 외에 다른 근거가 없다면 초월 역시 인위적이고 허상에 불과하다. 이렇게 묻는다. “일반 정신을 넘어선 초월적 세계, 있기나 한 거야?”

 

이 문장이 바로 마립간님의 초월에 대한 인상을 말해줍니다. 신, 영, 성이라고 말입니다. (참고로 性이 아니라 聖을 의도하신 거겠죠..) 하지만 칸트의 초월은 이와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칸트의 전기 연구를 검색해보시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칸트는 뉴턴의 물리학을 공부했었습니다. 당시의 뉴턴 물리학은 철학자들에게 이성의 믿음을 가져와주었습니다. 그런 칸트에게  신, 영, 성이라는 말은 당황스럽지요. 그렇기때문에 초월이라는 말은 마립간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일반적 정신을 넘어선 세계, 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정말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해를 정확히 못했다, 라는 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초월과 초월론적, 이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별 수 없이 철학 용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으리라고 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칸트 관련된 철학서를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초월이라고 번역되는 transzendent는 상당히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칸트에서의 이 초월은 일종의 존재론적인 의미입니다. 물론 존재론적인 의미가 칸트에서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현상학적인 계보를 이어 후설, 하이데거에 이르게 되면 더 정립이 확실히 됩니다. 초월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주관으로부터 독립된 대상을 가정했을때, 그 대상의 인식론적, 그리고 구조적 요건이 우리 자신의 주관성이 된 경우 우리 자신의 주관성이 그 대상에 선행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주체에 대한 객체의 초월성 획득이지요. 결국 이런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두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물에 대한 자신의 발화가 그 사물의 가능한 경험을 넘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경험을 넘어서고 있는가? 혹은 넘어서고 있지 않는가? 의 여부가 사물에 대하여 있어서 중요한 일이 됩니다. 만약에 경험을 넘어서 있다면, 우리는 그 것을 초월적이라고 부릅니다. 경험의 한계 안에 있다면? 당연히 내재적이라고 부르겠지요.

 

초월에 대해서는 사실 칸트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칸트 철학에 있어서 진실로 중요한 것은 초월론적, 이라는 말입니다. 초월론적이라는 말은 transzendental을 번역한 말로 알고 있는데, 아마 입에 와닿지 않으실겁니다. 보통 오늘날의 번역서들은 이를 선험적이라고 번역하거든요. 이는 존재론적인 의미를 가진 초월, 과는 달리 일종의 인식론적의 의미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작업을 보면 인식론적인 의미로 파악하는 것이 맞습니다. 칸트의 제 1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천착하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라는 질문말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어떻게 나왔을까요? 이는 근대철학사의 발달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간략히 설명하면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는 데카르트는 자아를 근대철학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얼마 뒤 나타난 데이비드 흄은 경험과 인과론에 대한 연구로 근대철학을 뒤집어 엎습니다. 이 흄 뒤에 바로 칸트가 나타난 것입니다. 흄은 인과론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태양이 동쪽에서 뜨지만, 내일은 서쪽에서 뜰 수도 있지 않겠냐고. 그런데 우리는 지금껏 태양이 동에서 떠왔다 라는 경험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 경험을 우리는 어떻게 믿지? 라는 것이 흄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칸트가 이야기합니다. 경험이지만, 그 경험을 분석하면 실제적으로 선험적인 부분들이 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 선험적인 부분 - 아 프리오리 - 이 있다면 경험이라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인식을 쌓아나갈 수 있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 지성, 이성, 감성의 구분을 지어야겠습니다만, 이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선험적인 부분은 어떻게 구성되어있는가? 여기서 칸트의 유명한 범주가 나옵니다. 공간, 시간 범주, 그리고 사고형식의 범주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범주를 적용하는데 우리 인간의 이성과 감성이 모두 작용합니다. 서로의 협동을 통하여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인식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바탕에서 제가 쓴 글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칸트에 대한 러셀의 말도 (중략) '실천 이성에 따르면 의지는 자유로운 것이다. 이러저러한 행위를 할 능력이 내가 없다면 당신은 그런 행위를 해야 한다, 라는 명령이 그릇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만큼만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능력만큼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칸트가 원하는 것은 정언 명령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 자체가 자유의지의 표상이라고 우리가 깨닫는 것이다. 후회감, 등으로 말이다. 우리가 거짓말하면 후회를 느낀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우리가 그런 것을 느낀다는 것이 초월적 자유의 편린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사실 칸트 전공자들이 보시면 웃을 내용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참조한 내용은 살림출판사의 칸트, 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글을 통하여 의도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유의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라는 겁니다 - 칸트의 비판서들을 번역한 백종현 교수님의 논문을 참조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 그리고 러셀은 단순히 자유를 할 수 있다, 그러니 해야 한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실은 그게 아니다, 후회, 양심 등과 같은 것은 바로 부정할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라는 말입니다. 물론 칸트의 어구 중에 할 수 있으니 하여야 된다, 라는 말이 있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적어도 칸트가 의도한 것은 이런 자유의지에 부정할 수 있는 능력, 에 무게를 더 두었다는 겁니다. 그런 사고와 감정의 현상이 바로 칸트 철학의 큰 틀에서 포용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사고와 감정 둘다 사물을 인식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위에 적힌 초월적 자유, 라는 말은 붕 떠버립니다. 이 초월적 자유라는 말은 왜 나온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해답은 바로 실천이성비판 - 저도 아직 읽지 않은 - 에 있습니다. 앞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우리는 선험적, 초월론적인 범주를 통하여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천이성비판에 따르면 순수이성을 실천적 사용을 할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기존에 초월적, 우리의 경험을 벗어났다고 여겨졌었던 객체들이 바로 주체의 영역으로 넘어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초월적 자유, 라는 말을 사용하였었습니다.

 

물론 신, 영성, 과 같은 것을 칸트적으로 초월적이다, 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칸트적으로 초월적이다, 라는 이야기는 그런 것들만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초월적인 부분을 다루게 되면 필연적으로 모순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 모순은 어떻게 해결할까요? 여기서 칸트는 초월론적 변증법을 가져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마립간님이 생각하는 그런 초월적과는 다른, 순수하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결과로서의 초월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글입니다.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86116 이 글을 잘 읽어보시면 마립간님께서는 논리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책의 예화를 빌면 ; 브레이크가 망가진 기차에서 그대로 달리면 10명의 사람이 사망한다. 방향을 틀면 한 명의 사람이 사망한다. 인도주의 입장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나? 다른 예로 폭풍이 치는 바다에 요트를 타고 있는 사람이 조난을 당했다. 그를 구조하기 위해 구조대를 보냈는데, 그 과정에서 10명 사망했다. 이 구조는 인도주의에 입각해서 어떤 가치판단을 내려야 하나?

 

부연설명을 하자면, 러셀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눈 앞의 비교적 확실한 악을 내버려두고 미래의 비교적 불확실한 미덕을 택해서는 안된다

 

이 러셀의 말과 마립간님이 예시로 든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생략된 부분을 넣어보겠습니다.

 

브레이크가 망가진 기차에서 그대로 달리면 10명의 사람이 (100퍼센트) 사망한다. 방향을 틀면 한 명의 사람이 (100퍼센트) 사망한다.

 

넣은 말은 100퍼센트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제가 러셀의 말에 맞게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브레이크가 망가진 기차에서 그대로 달리면 10명의 사람이 (50퍼센트의 확률로) 사망한다. 방향을 틀면 (100퍼센트) 한 명의 사람이 사망한다.

 

자, 이해가 가십니까? 물론 이 예는 잘못된 예이긴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가 만든 예입니다. 이해가 어느 정도 가셨으리라고 여기고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보겠습니다. 어디가 잘못되었느냐면 바로 이부분입니다. 방향을 틀어서 구해지는 10명이 미래의 불확실한 미덕입니까? 그대로 달려서 구해지는 1명이 눈앞의 확실한 악입니까? 애초에 이 사례자체를 러셀의 말에 적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작왕의 딜레마도 마찬가지입니다.

 

1) 눈앞의 확실한 악덕을 행했다면 미래의 나타냈던 더 큰 악덕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확실한 악덕을 피했더니, 미래의 가능성의 더 큰 악덕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2) 눈앞의 확실한 악덕을 피했다. 그런데 이로 인해 발생할 미래의 더 큰 악덕은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1번을 봅시다. 눈앞의 확실한 악덕을 피했더니.. 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데, 러셀의 저 문장을 다시 읽어봅시다. 눈앞의 확실한 악덕을 내버려두지 말라고 되어있습니다. 애초에 말자체가 잘못된 것이지요.

 

눈앞의 확실한 악덕을 막았더니, 미래의 더 큰 악덕이 현실로 나타났다, 라는 말씀을 하시는 거라면 이 또한 러셀의 저 말에 그다지 맞지는 않다고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마립간님께서 직접 인기 없는 에세이, 를 읽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러셀은 자신의 책에서 눈앞의 확실한 악덕과 미래의 더 큰 악덕을 저울질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지도 않구요. 그가 저울질하는 것은 눈앞의 확실한 악덕과 미래의 불확실한 미덕입니다.

 

전체적으로 볼때, 결론적으로 러셀과 칸트의 책들을 직접 읽지 않으시고 제 글을 바탕으로 비판을 하고 계시기에 저런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졸지에 러셀과 칸트를 옹호하는 쪽으로 이렇게 글들을 쓰게 되었는데, 사실 저는 그다지 옹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칸트나 러셀을 오늘날의 과학적인 결과를 바탕으로 비판하는 것은 그들에게 온당치 못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제 글로 판단하지 마시고 그들의 책을 직접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오늘 빼빼로데이인데 왜 이런 글을 제가 쓰고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철학이나 과학나부랭이가 뭐가 중요합니까.. 라는 말씀을 진심으로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껏 길게 써놓은게 아까워서 지우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커플따위는 모두... 여하튼 사실 이렇게 길게 써놓았습니다만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만 직접 칸트와 러셀의 글들을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더 의문가는 게 분명 많으실테지만, 제가 아는 것 또한 당장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이상 더 답변할 정신적 여유가 없습니다.  회피하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만 사실 애초에 답변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칸트나 러셀인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이런 게 저한테 지금 눈에 들어오는게 아니라서... ㅠㅠㅠ 당장은 평가단 글도 써야되기는 하지만...

 

 

 

참고로 이 글은 즐겨찾는 서재브리핑에만 노출됩니다. 불필요한 일들을 막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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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3-11-12 07:48   좋아요 0 | URL
우선 이 글을 숙고하지는 못했지만, 제 글이 가연님의 정신 에너지를 극도로 소진시킨 것에 대한 사과를 드립니다. 그리고 미래 양해를 구했지만, 가연님에 대한 반론보다는 제 생각과 그에 대한 오류를 집어달라고 부탁드린 것입니다.

지난 번 지운신 댓글을 슬쩍 보았습니다. '비과학적'인 것이나 칸트, 러셀, 가연의 각각의 의견에 대해 해명을 하려했습니다.

어째거나 오늘까지 올리려고 했던 글은 올리고, 댓글에 보았던 내용에 대한 해명 글은 가연님의 댓글에 따라 올리지 말지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가연님의 글 중 일부는 제가 동감하는 내용입니다.

가연 2013-11-12 17:50   좋아요 0 | URL
어제는 좀 멘붕상태라서..ㅎㅎㅎ 푸념을 많이 늘어놓았네요. 제가 오류를 집어낼만큼 당장 학식이 풍부한 상태가 아니라 사실 이런 글을 쓰기가 저어되었네요. 지금도 여전히 이렇게 답변을 쓰는게 옳았었는지조차도 잘 모르겠네요.

마립간 2013-11-13 07:27   좋아요 0 | URL
반론이라고 생각될지 모르겠으나 5일간의 글에서 지적하신 내용에 대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쩌면 내일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가연 2013-11-13 08:45   좋아요 0 | URL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다 드렸습니다. 더 말씀드릴게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저와의 대화보다는.. 당장 제가 아는게 별로 없기에... 책에서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실 거라고 여겨집니다.

2013-11-12 0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12 1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13 0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13 08: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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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3 15: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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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5 17: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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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5 01: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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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5 17: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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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5 02: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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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5 17: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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