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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틀비가 들어있으니 추천.

 

 

 

 

 

 

 

 

 

 

 

 

 

아이작 아시모프 추천.

 

 

 

 

 

 

 

 

 

 

 

 

 

 

피츠제럴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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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대륙의 합리론자였고, 다른 합리론자들처럼 당시의 수학적 세계관에서 인간의 본성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원적인 욕구를 자기보존욕구라고 보았고, 이 자기보존욕구는 남에게 받는 수동적 성향과, 남에게 주는 능동적 성향 사이에서 마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앞날을 예견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가장 근본적인 제약 조건 하나를 두고, 그 제약조건에 수동적 조건을 빼고, 능동적 조건을 더한다. 이는 전형적인 수학의 방법이고, 그의 대표저서인 에티카가 그렇듯, 스피노자는 수학의 공리처럼 인간의 감정을 낱낱히 분석하고, 거기에서 법칙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하나의 거대한 실체, 능산적 자연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그리고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신이라고 대표되는 조르주 브루다노에게서부터 내려온 범신론이라는 것. 모든 것은 신, 하나의 실체가 그 근원에 있고, 이 실체는 무한의 변양을 거쳐 각 양태로 나뉘게 된다. 그런데, 이 양태는 그 주변의 양태에 의하여 일정한 제한을 가질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우리는 우리 주변을 돌아볼때 굳이 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의 양태를 계산하면 되는 상황이다. 옆의 사람이 나에게 뭘했네, 저기 길이 있네. 등등.

 

스피노자는 옳았다. 만약에 우리 삶이 저런 수학적 법칙처럼 딱딱맞아떨어져서, 더하고 빼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감정이 계산되고, 이 감정으로 인하여 야기될 상황을 고려해보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미래를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시대에도 - 앞날이 모조리 계산할 수 있는 시대에도 - 그렇게 될 것 같다, 라는 것은 절대 그렇게 해도 좋다, 를 보장하지 않으니 윤리학이 여전히 필요하기는 할테지만, 우리 삶이 그야말로 굴레에 묶여있고, 우리는 그 극장에서 정해진 대본을 읊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그야말로 이성을 통하여 자신의 바른 양태를 찾아 그 길대로 걸아가는 사람이라면 무엇에 절망하고, 무엇에 슬퍼하겠는가.

 

당신이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졌다면. 이는 충분히 계산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서로의 마음이, 서로의 환경이 당신들은 원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감정을 그렇게 몰아갔을지도 모르고, 이윽고 스스로만 몰랐던 그런 파국이 당신들에게 닥쳐오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우리는 그저 미래에 모든 가능성을 걸 수 밖에 없다. 그 미래가 설령 엄청나게 멀어서, 몇 겁의 시간이 필요하더라도, 언젠가 인생아 다시 한번, 이라는 신의 외침속에 모든 입자가 뉴턴 역학적 세계관대로 그 자리가 계산되어 다시 지금 한번이 반복되는 푸앵카레 순환이 일어난다면, 그야말로 니체가 말했던 영원회귀처럼, 나는 당신을 만나서 다시 사랑을 할 수 있고, 그리고 그때는 - 똑같이 헤어질테지만 -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노라고, 그녀를 품에 안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틀렸다. 현대 물리학은 뉴턴 역학의 개념을 보완했고, 미시적인 세계에서는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여 한 입자의 위치와 운동을 계산해낼 수가 없다. 아니 더 나아가서, 벅키볼, 그러니깐 탄소 60개짜리 구형 분자의 실험 결과는 양자역학에서의 미시성과 거시성의 경계를 허물었고, 정보를 교환하지 않는 한, 거시세계에서도 충분히 불확정성 원리가 일어날 수 있다는 실험 결과를 보였다. 물론, 여전히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감정적 교류를 가지며 살아간다. 그런데 감정은, 근본적으로 감정의 분자는, 머리속에서 생산된 수많은 호르몬과 화학물질의 집합이고, 어쩌면 이 분자들이 고립되는 상황이 생긴다면, 이 분자들의 위치와 운동은 계산하기 어려울 것이고 - 영겁회귀가 일어나기 위하여 영겁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 영겁의 시간 동안 한 분자가 다른 분자와 고립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할터이니 아마 영영 지금 이 순간과 같은 화학물질의 균형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 시대에서 몰랐던 것을 근거로 그를 비판하는 것은 온당치않지만, 아마도 감정은 계산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감정을 계산할 수 없으니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더하거나 더 빼거나 할 수도 없으며, 이윽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비이성적인 존재인가, 라는 결론에 자괴감에 빠질 수 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아마,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한동안 계속 고통스러워할수밖에 없을것이다. 지금 그녀와 헤어진다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테니까. 다시는, 영겁의 시간이 지나더라도, 계산된 과정에 따라 걸을 수 없을거니까.

 

이런 생각에 접어들게 되면, 나는 너무 슬퍼서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게 된다. 헤어지고, 떼쓰며 매달리고, 그러나 결국 그녀는 아마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라는 명확한 - 다른 사람 눈에는 보였지만,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아니,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 그런 결론에 다다르게 되면, 그야말로 무너져서 쓰러져 오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힘들었던 그녀의 등을 마지막으로 떠밀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그녀를 만나지 않았으면 서로에게, 더 좋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 어쩌면 자의식 과잉이겠지만 - 직장을 그만두고 올라가버리는 일도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그녀가 떠나더라도 전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할텐데.

 

수백권의 철학 서적. 수백권의 과학 서적. 수십권의 소설. 내 방 한켠에 놓여있는 인류 지식의 결정체들. 그녀와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났을때, 그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무엇때문에 이렇게 책을 많이 사냐고, 무엇때문에, 다 읽지도 못하는 책들을 이렇게 사냐고. 나는 그녀에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아마 - 좀 더 멋있어 보이려는 말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책들의 높이는 나의 고독의 높이라고. 나의 고독함이 깊어질수록 책이 쌓여만 간다고. 그렇게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거의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었지만, 그 말만큼 나의 상황을 드러내주는 말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마치 자신이 철학적 성과를 완수하도록 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양, 레기네 올센과 파혼을 했다고 한다. 그건 정말 멍청한 짓이다. 뒷날 파이힝거는 마치 ..의 철학, 이라는 논문에서 이런 명제를 분석하며, 이런 의제가 도리어 고차원적인 세계를 낳을 수 있다고 부연하지만, 마치 ..는 실제 현상을 절대 표현할 수 없고, 그저 가정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당신은 고차원적인 세계에 사는가? 그것은 사실 펜로즈의 견해에 따르면 '의식의 짐'이고 진화과정에서 생긴 것일지도 모르며, 어쩌면 진화심리학적인 사례가 아닌가? 결혼을 하고나면 - 마음의 안정을 찾고 나면 - 도리어 어떤 성과가 줄어든다던가. 일부러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 성과를 내려고 했던걸까, 그러나 반대로 말하자면, 사랑은 그 업적만큼이나 소중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본능에 새겨질정도로. 그 화학적 불균형과 호르몬의 분비가 천칭의 반대쪽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좋아하게 되는 일은 저 수많은 인류 지식 따위들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훨씬 더 값지고, 훨씬 더 기적같은 일이다. 어쩌면, 신도 없고 운명도 없는 이 세계에 유일하게 믿을만한, 유일하게 가치있는 그런 일일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이 - 환원론적 사고에 따르면 그저 감정의, 호르몬의 불균형에 지나지 않더라도 스피노자가 앞서 자신의 세계관에서 여전히 윤리관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듯, 그런 불균형이 있다고 해서 그게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 무엇보다도 가치가 있었던 것이고, 헤어지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나는 그저 무너져서 울음을 터뜨릴 뿐이다.

 

사실은 신이란 게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은 운명이라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수많은 논리적인 논증, 수많은 진화적 증거, 수많은 당위성 - 너 하나만을 위하여 우주를 움직여주는 존재가 있을 리 없다는 - 그런 논증이 수백개가 있더라도, 사실은 책을 집어던지고 싶을 뿐이다. 그녀가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면 그런게 무슨 소용일까?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도저히 할 수 없는 - 틀어질만큼 틀어지고, 멀어질만큼 멀어진 그 거리에서, 그야말로 광속으로 달려도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그 사건의 광원뿔 저편에서, 이럴때는 그저 체념을 하면될텐데, 그저 체념을 하면 될텐데, 그래도 아쉬워 기적을 바라고.

 

헤어진 것 까지가 운명일까?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헤어지는 것 까지가 정녕 운명인 것일까? 그렇게 체념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렇게 살아가면 - 죽을만큼 힘들지만 - 그냥 영영 추억으로 남으면 되는걸까. 이렇게 복잡하게 이야기하느니 역시 운명이란, 신이란 없고. 그저 남는 것은 자기 합리화일뿐이다. 그러니깐 그냥 단순히 연애랑,사랑이랑, 결혼을 분리할 수 있으면 돼. 몇번씩이고, 가슴아프고, 상처주고, 상처받는 그런 과정들, 그냥 제외해버리면 마음이 편하잖아. 그렇게 쌓인 책더미들에게 물어봐도,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아마 영영 나는 이전과 같지 못하겠지. 아마. 사실은 행복하게 그녀와 살고 싶었다..

 

보고 싶다. 하지만 그때 내가 다리를 태웠다. 그저 멍청한 짓이었다. 한번만 되돌리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기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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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4 08: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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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03: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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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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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불한당의 일기이다. 이 책은 말하자면 일종의 증명인데, 그 전부터 있었고, 이후로도 있을 수많은 불한당과 악당들의 일기이며, 또한 세상에는 그들보다 더 악당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는 부재증명이다. 빛은 어둠을 통해서 더 드러난다고 흔하게 이야기하고, 신은 악을 통하여 자신의 선함을 내세운다고 하던가? 그렇다면 어둠은? 그림자는 더 짙은 어둠에 의하여 가려질따름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인공은 누구인가? 그는 러시아의 정치인인 리모노프 - 물론 필명이지만, 이다. 무엇보다도 실존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전기적인 형식을 가진다. 여기서 잠깐 여담인데, 저 책의 표지의 레몬수류탄을 보고 의아하게 여긴 사람들이 많으리라. 저 레몬수류탄은 바로 리모노프에서 따온 것이다. 레몬수류탄이라는 단어가 리모노프가 아니고, 레몬, 수류탄 각각의 러시아어가 리모노프와 비슷한 어감을 지닌다.

 

그런데 그와는 별개로 저 레몬수류탄은 정말 리모노프 본인의 삶을 잘 드러내주는 일종의 상징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레몬은 시고 수류탄은 폭발한다. 누구나 달콤한 것을 먹고 싶고, 쓴 맛을 가진것을 피하고 싶어하는데, 이는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항상 인생이라는 녀석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지는 않으며, 이윽고 우리는 때때로 달콤한 인생을 맛보기도 하지만,  때때로 쓴 맛으로 토악질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신 맛은 어떤가? 신 맛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이 항상 신 맛을 찾아서 계속 먹지는 않는다. 신 맛은 달콤한 맛과 쓴 맛의 사이에 있어서, 달콤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쓰지도 않기에 그야말로 중용의 맛이고, 이윽고 인생의 맛이 된다. 이렇게라면 그냥 중용으로 살아갔기에 불한당이라고 붙이기 애매하겠지만, (톡톡 튀는 신맛만으로는 불한당일수가 없다.) 문제는 수류탄에 있다. 빵빵, 하고 터지는 수류탄에 말이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하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와 정치인생을 시작한 리모노프는 그의 인생 전반에서 수류탄처럼 터지며 살아왔다. 어렸을때는 부모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살아왔고, 겨우 참여하게 된 문학클럽에서는 자신 외의 다른 사람들의 재능과 작품을 내심 무시하면서 살아왔으며 두 번째 아내가 될 사람을 얻기 위해 자살 소동을 벌였고, 항상 자신과 자신보다 더 유명한 명사들의 삶을 대비시켜 그들에게서부터 열등감을 가지며 살아왔다. 그러다가 자신의 작품이 아웃사이더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기에 그때부터 그의 인생이 반등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평범한 성공스토리처럼 들리지만 저 맥락 사이사이에는 리모노프의 과격한 언사와 행동이 숨어있다. 이제 저 리모노프의 삶에서 빠진 것들을 채워보자. 장애를 앓고 있는 소년에게는 차라리 죽어버리지, 라는 말을 자신의 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쓰며, (밑에 저자는 눈물겨운 변명을 하고 있지만, 이건 저자가 변명한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의 성질이 아니다. 이후에 이 태도에 대하여 몇 마디 적을 것이다.) 파시스트들과 어울리고, 전쟁에 참여하고 등등. 그야말로 불한당 같은 삶을 살아온 것이다. 이는 그의 필명 리모노프와 유사하게 발음되는 수류탄에 정확히 부합한다.

 

하지만 앞서 나는 부재증명이라는 단어를 썼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리모노프는 그림자인데, 이 그림자를 덮는 더 짙은 어둠들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리모노프는 불한당에 지나지 않지만, 더 큰 악당은 저런 개인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닌, 엄청난 돈이나, 혹은 권력으로 사람들의 목숨을 사소한 것으로 앗아가는 사람들이며, 리모노프는 그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언제나 여실히 드러낸다. 내전에 참여한 것도 유사한데, 사실 진정한 악당은 저 내전을 일으키고 거기서 어부지리를 얻는 사람들이다.

 

고작 리모노프 혼자가 참전을 하였든 안하였든 차이가 있었겠는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악, 혹은 거대한 세력에 마주하게 된다면 어떤 사람은 자신이 깨지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열심히 비판을 하거나 할 수도 있겠지만, 리모노프처럼 이제부터 나도 삐뚤어질거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법이다. 따라서 리모노프의 삶은 거대한 악, 그러나 지금은 여기 없는 것 처럼 보이는 그런 악, 을 예감하게 만드는, 그런 예언자적인 부재증명이리라.

 

이 책의 구성상 특이점이라면 현실과 주인공의 삶을 적당히 버무려놓았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현실에서 시작하여 리모노프를 저자가 언제 만났더라, 에서부터 시작하여 리모노프의 일생을 한바퀴 돌아보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저자와 리모노프의 현실에서의 만남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런데 이런 구성은 상당한 장점을 지니는데, 이 책은 비록 소설이지만 현실에서 시작하고 현실에서 마무리한 결과 소설 구성 전체에서 일종의 현실감이 부여된다. 그러니까 지금, 2015년 3월 8일 7시 48분에(이 문장을 쓸 때의 시간이다) 저자와 리모노프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말이다. 실제 이 책은 3년 전에 출간되었을텐데도.

 

그러나 단점도 있다. 무엇보다도 한마디 안할 수 없는 것은 이 책의 주인공에 대한 저자의 태도인데, 중간 중간 잊을만하면 저자는 주인공의 삶 근처에 자신의 삶을 풀어놓는다. 그 두 개의 삶은 거의 겹치지 않으나, 완전히 평행선은 아니라서 이윽고 종국에 가서 겹쳐지게 된다. 그야말로 개떡같은 인생 - 주인공의 말이다 - 을 저자가 취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하더라도 주인공에 대한 호의가 담긴 시각은 매우 보기 불편하다. 나의 리모노프씨가 이럴리 없어, 설령 리모노프씨가 그런 말을 했더라도 정말로 위기에 빠지면 가장 먼저 달려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 사람은 리모노프씨야, 이런 문장이 줄을 잇는다.

 

이에 대한 태도는 저자의 아들의 비평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책의 말미에 아들과 리모노프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아들은 아버지, 그러니까 저자에 대하여 한마디 툭 던진다. 아버지는 그 사람을 루저로 그리기가 싫은 거에요, 라고. 맞다. 매우 적확한 비평이다. 리모노프를 작중 전체에서 루저들의 왕, 킹오브 루저, 루저들의 제왕으로 그려놓고는 마무리에 가서는 그래도 제왕이다, 라는 식으로 일관하려니 적절한 마무리가 안될수밖에. 아니 루저들의 왕은 루저가 아닌가? 킹오브 루저는 루저가 아닌가? 본인이 그렇게 그려놓았다면 그렇게 일관되게 갔어야 옳다. 꼭 무슨 뱀꼬리보다 닭머리가 낫다, 라는 식으로 사감을 개입시키지 말고.

 

그럼에도 이 책에 나오는 객관적 사실들은 어느 정도 정확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리모노프가 두번째 아내 엘레나와 찍은 19금 사진도 검색해보니 있기도 있고 그의 자서전 등이 실제로 있는 책들이라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적당하게 객관적 근거를 잘 투여하고 있으니, 리모노프와 더 나아가 그가 속한 러시아 정치의 복잡한 양태를 그려보는데 일부 도움이 되리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여담인데, 사실 정신분석비평을 시도해볼까, 조금 뒤적거려봤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걸릴것같아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을때, 이중의 정신분석을 행해보는 것도 상당히 흥미로운 작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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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5-03-09 11:34   좋아요 0 | URL
카레르의 신작인가 보군요. 전 카레르의 작품들을 보기 전 너무 기대치가 높았기에 읽고 나서는 매번 실망했습니다. 재미없다기 보다는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느끼는 그런 아쉬움 있지 않습니까. 이 작품은 어떨지...리뷰만 봐서는 감을 잡기 힘드네요~^^

희선 2015-03-10 01:49   좋아요 0 | URL
세상에는 리모노프 같은 사람이 있을 것 같네요 많다고 하려다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잘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한 일이 별로 좋지 않았을 테죠 그래도 이것저것 잘했다는 말이 있기도 하더군요 뭐든 잘하지만 뛰어나게 잘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생각나기도 하네요 저는 그것만 해도 어딘데 하는 생각을 할 텐데...

이 사람 이야기는 왜 썼을까요 그렇게 괜찮은 사람은 아니지만 알아둘 만한 사람이기에 쓴 걸까요 좋아한 건 아니겠죠

이것도 잘 모르는데 이런 말을 했네요


희선
 
[선셋 리미티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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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가 시작될무렵, 유럽 신학계와 철학계는 고대로부터의 유산을 받았다. 그 유산은 고대의 두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비롯된 것인데,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뉘게 되었다. 하나는  신플라톤주의, 라는 이름이 붙어, 유대전통과 결합하여 플로티누스에 이르러 찬란하게 빛이 나기 시작하였고, 다른 하나는 이슬람에서 역수입되어 이븐시나와 아하수에로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 이라는 형태로 흐르기 시작하였으니 이에 우리가 흔히 생각했던 것과 달리 - 중세를 흔히들 암흑시대라고 하니깐 - 그 내부의 빛은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 빛을 수용하든, 혹은 배척하든.

 

그런데 이에 대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중세 신학의 첫 번째 줄기를 만든 교부철학의 아버지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호교론자들이 특히 이런 경향을 싫어했는데, 이들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일단 사람들이, 그것도 교양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리스 철학을 소위 쿨-하다고 생각해서 열라게 공부하는데, 그런 사람들한테도 전도를 하고 싶은데, 어설프게 이야기했다가는 씨알도 안먹히네? 그러니 열라 멋지게 말을 화려한 수식법을 써서 이야기는 하는데, 이게 영 맘에 안든단 말이지.

 

생각해보라, 사실 플라톤도 그렇고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렇고, 그들은 교회입장에서는 사실 이교도들아닌가? 그런데 이교도들이 그렇게 잠식하면서 생난리를 피우고 있는데, 우리는 그게 바로 교양이라고 마구 받아들인다니.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어디있는가 - 결국 이 간극은 둔스 스코투스에 이르러 극명하게 재조명되게 되고 이윽고 서로 갈길을 가게 되지만 그것은 이때보다는 훗날의 이야기이고.

 

그 중에서도 테르툴리아누스, 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한 말이 있는데, 바로 이 글의 제목인  Credo quia absurdum(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이다. 사실 라틴어가 제대로 맞는지 모르겠지만 - 기억에 의존해서 쓰는 거니 양해바란다 - 여튼 이런 말을 하면서 전도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왠지 무언가 있어보이지 않는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이것이 전형적인 호교론자의 어법이었다. 무언가 있어보이면서도 그렇다고 뭐라 콕 집어서 설명하기도 어려운.

 

그리고 이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라는 명제는 뒤에 스콜라 학파에 이르러 -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 믿기 위하여 이해한다, 로 바뀌기도 하다가 (내 기억에는 안셀무스가 이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키에르케고르에 이르러 실존철학의 뿌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솔까말 백더하기 백은 이백이라는 거,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거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있누? 누구한테나 똑같은 그런 진리, 대륙의 합리론자들이었다면 무덤에서 벌컥 박차고 튀어나와 신발을 던질지도 모르겠지만 - 엠페도클레스는 자신의 죽음을 완벽하게 은폐하고자 몸을 화산에 던졌지만 끝내 신발 한 짝이 밖으로 나와버렸다 -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런게 아니다.

 

라고 키에르케고르는 생각한거다. 누구한테나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다. 삶, 죽음, 그리고 무엇을 믿는가. 바로 여기서 믿음의 문제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단숨에 격상되게 된다. 그리하여 저 모순된 언명이 제대로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믿어라! 일단 믿고 보라! 그러면 너의 삶에 닥친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그런데 이 상황을 잘 살펴보면, 절대 논쟁에서는 이길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보통 우리가 논쟁에서 이기려면 논리적이어야 하고, 근거가 확실한 출처를 가지고 많이 확보되어있어야만 되는데, 1. 불합리하다 -> 논리적이지 않다, 2. 불합리하다 -> 근거가 확실한지도 모르겠다. 로 끝나게 되니 신과 관련된 논쟁에서 논리적인 결론이 날 수가 없는 거다. 그렇다면 저 언명을 포기하여야 하는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게 아니라면, 저 이교도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런데 이교도들의 철학을 교회의 중심에 놓다니? 그러면 다시 합리화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이교도고 예수도 모르지만, 그래도 계시비스무리하게 받은거라고. 그렇게 합리화를 하더라도 찜찜한 것은 사실이다. 왜? 저들을 중심에 놓는다는 것은 시한폭탄을 받아들이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는 삼위일체에 대하여 싸웠고, 결국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아타나시우스지만, 그 아타나시우스가 지금껏 통용되는 삼위일체에 대한 기본 해석을 내렸다고 해서 박해를 안받은 것은 아니다. 저 삼위일체에 대한 해석이 - 양태론이든, 아니면 예수가 피조물이든, 아니면 오늘날 받아들이는 것 처럼 신에 대한 위격이든지 - 이렇게 다양하게 되어버린 것은 바로 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스승의 이론을 중심에 놓았기 때문이기에 시한폭탄을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 결과로 아타나시우스는 박해도 받았다. 오늘날 니케아 공의회에서 내린 삼위일체에 대한 표준 해석을 내놓았는데도 말이다.

 

이상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이라면, 다음과 같은데, 우리는 논쟁은 역시 인간의 것이고 믿음은 신에게 다다르는 것이니, 영원히 신자들은 논쟁에서 무신론자를 이길 수 없을 것이고 - 애초에 논리로 믿음을 설명하고 논쟁한다는게 말이 안되지 않는가 - 무신론자는 영영 신에 다다를 생각이 없을 것이다. 다다를 수도 없을지도 모르지만 난 여기에 약간 비정통적인 사례를 하나 끼워놓고자 한다. 나니아 연대기에 그 사례가 나오는데, 거기서 아슬란은 바른 방법으로 삶을 살아간 것이라면 설령 적대자를 섬겨도 누구든 자신을 섬긴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니 말이다. 궁금한 사람은 최후의 전쟁을 읽어보시라.

 

여튼 바로 이지점에서 코맥 매카시의 선셋 리미티드가 시작한다. 그러니까 위의 서설은 말하자면 준비작업이다.난 코맥 매카시가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전작이 뭔지도 모르겠으며, 왜 이게 인류의 운명을 결정지을만큼 (광고에 그렇게 적혀있어서 솔깃했다) 대단한 책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난 물음표다. 하지만 특색있게 대비를 해놓은 것에 대해서는 점수를 좀 주고 싶긴하다. 작가를 모르면 참 편하다. 이렇게 마구 평가하는 양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선셋 리미티드, 가 시작하는 지점은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위의 저 서설이고, 여기서부터 흑과 백은 대립을 시작한다. 흑은 흑인 목사이고, 백은 백인 교수인데, 흑인 목사는 이야기한다. 불합리하지만 믿으라고. 그러면 너 좋아짐. 오케이? 하지만 백인 교수는 고개를 젓는다. 내 기반은 모조리 망가졌는데, 뭘 더 믿을게 있음?

 

그리고 시작하는 지점을 짚어낸 만큼 끝나는 지점도 짚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 끝나는 점은 말하자면 불교철학의 용어로 진속이제설, 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는 나가르주나, 가 불교철학을 정립하면서 나온 이야기이다. 일종의 부정변증법이라고 보면 되는데 - 그렇다고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을 떠올리면 곤란하고 - 쉽게 말해서 소위 말하는 변증법인 정반합에서, 정과 반이 서로 부딪히다가 둘다 지양되는 형식이다. 별로 어려운 말 아니다. 난 천재다. 라는 명제가 있고, 난 바보다, 라는 명제가 있다고 하자. 그럼 이 진속이제설에 따르면 니가 천재든 바보든 니 삶에는 아무 지장 없음ㅋㅋ 이 되는 거다. 아마 우리가 익숙하게 느낄 정반합공식에 따르면 넌 그냥 인간임ㅋ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흑인 목사의 말도 지양되어야 되고, 백인 교수의 말도 지양되어야 한다는 거다. 이들의 말은 둘 다 진리가 아니며, 둘 다 옳지 않다. 그리고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어떠한 것이든 진리는 둘 다 아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둘 다 나와 상관이 없다, 에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저 팽팽하게 대립하는 두 개의 명제는 더 높은 차원에 다다르게 되며, 그 차원에서 바라보면 저 두개는 비진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내부에서는 팽팽하게 대립하는 대결이겠지만, 이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을 초월한 곳에 있는 존재가 보게 될 경우, 그러니까 독자가 책을 읽을때, 그 의미를 가지고 다시금 비진리로 지양되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진리가 되리라. 그리고 그 진리는 읽어나가는 독자 모두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읽어나가는 독자에게는 영영 저 책 내부의 등장인물들이 다다를 수 없고, 오직 그들의 말들만이 와닿을 뿐이다. 불교적 부정변증법이 이보다 더 잘 해당될 수 있는 곳이 있겠는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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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3-10 01:46   좋아요 0 | URL
두 사람만 나와서 뭔가 이야기를 하는가보네요 책 소개에 있는 글을 보니 그런 말이 있더군요 그 두 사람은 왜 거기에서 만나고 이야기를 할까 싶습니다 어쩐지 답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네요 두 사람 말이 다 진리는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 말이 나름대로 진리일 수도 있죠 잘 모르는데 이런 말을 했네요 진리는 하나가 아니고 시간이 가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한 건 얼마 안 됐어요

대립해서 흑과 백... 이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거군요
두 사람을 보면서 다른 것을 볼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여기에서 뭔가를 찾으려고 하는군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구나 할 뿐입니다


희선

테레사 2015-03-16 10:33   좋아요 0 | URL
이거 ..괜찮을까요? 코맥 매카시의 작품은 어쩐지 두려워서 읽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깊게 상처받을 것 같아서요...이상하게 두렵군요..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죽이는 책, 은 일종의 가이드북으로, 미스터리 작가들이 직접 뽑은 세계의 미스터리라는 점에서 추리 소설 세계에 빠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할 수 있을 듯한 책이리라. 다만 궁금한 점은 찰스 디킨스, 의 두 도시 이야기가 들어가있다는 점인데, 두 도시 이야기가 미스터리 작품이었던가?

 

우리 동네 아이들이라는 책은 제목과는 다르게 종교에 관련된 책이라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는 사실 모두 한 집에서 나왔다고들 한다. 이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자면 - 내 기억에는 중세 희곡이었던 것 같다 - 어느 시점에 유대교 상인이 살고 있었는데, 이 상인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그 딸은 자라서 기독교 기사와 결혼하게 되는데, 그 결혼은 순탄치가 못하여 풍파를 맞이하게 된다. 이를 중재하는 것은 이슬람 술탄이었고, 이 술탄은 알고보니 기독교 기사의 어릴적 잃어버린 형이었다는 막장 드라마 뺨치는 결론으로 희곡은 마무리된다.

 

이때 술탄이 두 집안의 - 그러니까 유대교와 기독교의 결혼을 중개하면서 이야기하기를 알고보면 이슬람교와 유대교와 기독교는 모두 하나의 가족과 마찬가지이며, 신께서는 세 자식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세 개의 금반지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었는데 저 세 개의 금반지 중 어떤 것은 순금이고, 어떤 것은 합금이라는 게 아닌가.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신은, 금은 비록 하나 뿐이라도 너무나 자식들을 아낀 나머지 이걸로 싸우기를 바라지 않았던 모양이다. 따라서 세 개의 반지를 서로 구분이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리하여 술탄은 신의 뜻에 따라 세 가족의 화합을 축원하며 결혼을 집전한다.

 

맏물이야기는 미미여사의 책인데, 개인적으로 미미여사의 책은.. 뭘 읽어봤는지도 잘 기억이 안나지만 여튼 하나 읽어본 것 같다. 미스터리는 미스터리인데 사람과 요괴과 공존하는 따뜻한 미스터리, 였었으리라

 

 

 

 

 

 

 

 

 

 

 

 

 

 

개인적으로 내가 진짜로 추천하고 싶은 책은 이 책이긴하다.

 

이젠 전편 내용도 잘 기억도 안나는 아룬드 연대기의 첫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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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3 0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08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콰지모도 2015-03-05 20:49   좋아요 0 | URL
그 희곡은 현자 나탄이 아닌가 합니다.

가연 2015-03-08 00:31   좋아요 0 | URL
맞아요, 레싱의 현자 나탄.. 저거 쓰고 이틀 뒤에 생각났는데 다시 적기는 또 애매하고 바쁘고 그래서 놔뒀어요, 풋. 아니, 그것보다도 이렇게 누군가가 적어주실거라고 믿었기도 했고.. 그러니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