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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국가란 무엇인가


1.



  지금부터 3년 전, 백분토론이 400회 특집을 맞이하였지요. 그때 백분토론 초대 손님으로 많은 분들이 나오셨었습니다. 진보와 보수 쪽을 대표하는 논객들을 모아서 양 쪽에 나란히 앉혀놓았었습니다. 그런데 보신 분은 기억하시겠지만 그 백분토론은 결국 두 명에게 초점이 맞춰지더군요. 그 두 명은 바로 유시민과 진중권이었습니다. 물론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분도 계시겠지만 적어도 저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그 둘의 토론이나 다름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분이 말씀하셨던가요, 유시민의 토스와 진중권의 스파이크라고.

저는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이 책을 보자마자 바로 떠올랐던 생각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저 400회 특집과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이었습니다. 사실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은 그저 제목이 똑같아서 떠오른 것이었고.. 여담입니다만,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의 원제는 ‘정의 : 무엇을 하는 것이 정의로운가’입니다. 실제로 정의를 정의하지는 않지요. 400회 특집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더 이어가자면, 사실 진중권과 유시민은 서로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단순하게 광고를 예로 들어서 설명해보자면, 좌파라는 점에서 유시민이 그냥 커피라면 진중권은 T.O..... 차마 더 쓰면 간접 광고가 될 것 같으니 여기쯤 해두도록 하지요. 토론 중간에서도 그런 성향이 서로 드러났었습니다만, 아무래도 공동의 적, 이라고 할 수도 있는 보수 논객을 앞에 둬서 겨우 뭉친 모습이더군요.

그러고 보면 이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책에 담긴 내용은 어쩌면 이미 이때부터 싹을 틔우고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에 적힌 정치적 연합에 대한 이야기도 사실 저 토론 때 진중권과 유시민이 연합한 것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었고, 법치주의가 기반이 되어야 하는데 그 법치주의가 정치를 하는 정치가들을 제한하는 게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저 토론에 이미 언급을 했었더군요.


2.


  정의란 무엇인가, 이후에 수많은 책들이 OO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 를 읽어보면 정작 정의에 관한 명확한 설명은 하지 않는다고들 하지요. 어떤 분은 이런 말씀도 하시더군요, 살짝 간만 보면서 약을 올리는 것 같다고. 결국은 읽는 독자들에게 정의의 개념을 정의해보라고 떠넘긴다면서. 하지만 저는 저 책의 방식을 이해합니다. 사실 정의란 개념에 대해서는 백명의 사람이 있으면 백명의 생각이 있듯이 모두다 그 정의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정의에 대해서 개념을 정의하였다고 하여도 다른 사람들이 그 정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요. 비슷한 개념으로는 자유, 선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국가는 저런 추상적인 개념에 비해서 그 의미가 와 닿기는 합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거나 글을 보거나, 혹은 무엇을 먹으러 식당에 가서 주문한다거나 등의 활동이 모두다 국가라는 구체적인 실체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상대적으로 와 닿는다는 이야기이지 정말로 그 개념을 쉽게 규정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논의를 진행시켜봅시다. 이 국가란 개념을 규정하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네, 그렇습니다. 국가가 없는 상태를 생각해본다면 국가가 무엇인지 상대적으로 쉽게 개념을 파악할 수 있겠지요.

이런 생각을 저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찍이 국가에 대해서 그 생각을 진척시킨 사람은 바로 홉스였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에서도 국가를 정의하기 위해서 세 부분의 철학자를 끌어들이는데, 그 중 첫 부분에 해당하는 이가 바로 토마스 홉스입니다.

홉스는 만약에 국가가 없다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 가 지속될 것이며 그로 인해서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의 삶은 비참하고 고독하며 불안하고 가혹할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주장이 일견 타당한 것 같습니다. 최근 소말리아 해적 총격 피격사건이 있었지요. 그때 우리는 그 소말리아의 실상을 신문을 통해서든 다른 미디어를 통해서든 어느 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법도 인권도 없는 순수한 폭력만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악의를 가지고 서로를 집어삼키는 곳이었습니다. 국가가 없다면 저런 폭력이 우리에게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없습니다. 그래서 국가는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하며, 그 국가에 속한 사람은 주권자에게 저항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이렇게 국가에 강력한 힘을 부여하고 그 국가에 속한 사람들은 국가에 저항할 수 없다는 생각을 국가주의 국가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정말 국가의 역할은 저게 전부일까요? 우리 인간을 자연 상태에서 지켜주는 역할이 국가의 전부라면 수많은 독재와 인권 탄압도 어쩌면 정당화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껏 독재에 맞서 싸워왔고, 그때 흘린 피들이 절대 헛된 피가 아니라고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국가주의 국가론으로는 이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국가론을 여기서 가져올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자유주의 국가론입니다. 이 책에서는 자유주의 국가론을 정의하기 위해서 세 명의 철학자들을 데려옵니다. 존 스튜어트 밀, 애덤 스미스 그리고 존 로크가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약간씩 상이하지만 그 중심이 되는 이야기들을 하자면, 권력은 법치주의에 의해서 다스려져야 되며 그 법치주의는 통치자에 대한 구속이 되어야 하고 국가는 당연히 외부의 위험에 대해서 대항하여야만 하지만 사회의 구성원들의 불의나 불공평을 해소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밀의 경우에는 자유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사회 구성원들의 불의나 불공평을 해소한다는 측면은 국민의 평화와 일맥상통할 것이며 복지에 국가가 힘써야 한다는 말과도 합치합니다. 앞서 백분 토론이야기를 했었지요, 그때 이 책의 저자 유시민은 한나라당 의원과 논쟁하면서 우리나라는 법치주의로 다스려져야 되고, 이는 적법한 절차를 밟아야 되는데 그것이 안 되니 정말 죽겠다, 제발 좀 살려 달라, 라고 말을 합니다. 저 말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더라도 저자의 국가론을 잘 파악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이 있습니다. 이 국가론에서는 국가가 무용하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은 오직 계급간 불평등을 심화하고 착취를 위한 그런 도구로 봅니다. 이 국가론을 주장한 철학자로는 마르크스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그 거대한 실험은 소련연방의 해체와 더불어 끝이 나고 이제는 어쩌면 무용하다고까지 일컬어집니다. 이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은 현실의 일부를 잘 포착하기는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이루기에는 너무나 먼 이상향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직도 이 마르크스주의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자본주의의 비극은 쉽게 가시시 않기 때문이겠지요,


3.


  저 국가론들은 사실 코끼리를 장님들이 만져보듯이 각자의 관점에 걸맞은 부분만 손으로 더듬거린 것과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저 세 가지 국가론을 통합하면 대부분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고 해도 여전히 그 국가론이 국가 자체가 되지는 못합니다. 어떤 ‘장님’의 경우에는 좀 더 새로운 방향을 더듬거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국가론은 갈수록 늘어만 갑니다. 그래서 저 세 가지 국가론으로 국가의 모습을 책에서 대략 그려본 저자는 좀 더 실제적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바로 질문을 던짐으로써 말이지요.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는 그의 철학을 설하기에 앞서 일종의 격률을 만들었습니다. 그 격률 첫 번째는 자신이 명백한 진실로 판명한 것만 받아들일 것이며, 그 두 번째는 모든 문제를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해하기 쉬운 것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의 방향을 나아가게 하라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그 문제에 대해서 빠뜨리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면 솔직히 당연한 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물론 당연한 말입니다. 이 말 뿐만이 아니라 철학의 대부분의 명제들은 당연한 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당연한 말을 이렇게 의식의 표면에 이끌어내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연하고 쉬운 말들은 마치 물이 흐르듯 의식에서 스르르 흘러가버리기 때문이지요. 어쨌든 저 방법론 4원칙을 통해서 데카르트는 ‘모든 수학 문제를 다 풀 수 있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저 원칙은 수학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일들, 가령 바로 이런 ‘국가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서도 충분히 적용이 가능하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과연 어떤 부분에서 우리가 국가에 대해서 접근해야 할까요? 다시 말하면 국가는 어떤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을까요? 거기에 대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다스려야 되는지, 애국심이라는 감정은 어떤 감정인지, 혁명은 어떤 것이고 진보정치는 무엇인지, 국가는 어떤 이상을 가져야 하는지, 마지막으로 정치인은 어떤 윤리를 가져야 하는가, 가 바로 책 후반부를 차지하는 내용들입니다. 이 질문들이 국가의 모든 것을 포괄한 것인지 저로서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당연한 것을 이끌어내는 것이 일견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것처럼 이런 질문들을 이끌어내는데 저자도 정말 수많은 고민을 했으리라는 점은 두말 할 나위 없겠습니다.


4.


  우리들은 수많은 부조리들로 둘러싸여져 살아갑니다. 정치인들의 모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거의 달라진 것이 없고 옛날에 문제시 되었던 일이 아직도 문제시 되는 게 현실입니다. 책의 서두에서 언급되는 용산 철거민 사태에서부터 최근에는 4대강 사업과 등록금 문제 등 거기에 빈부격차는 여전히 심화되고만 있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가 써지게 된 배경은 분명 이런 문제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을 테지요.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약간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책의 좋은 내용도 그 저자의 가치관, 즉 진보적 성향에 자꾸 연관을 하면서 읽게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책의 앞부분을 읽을 때는 현실 정치에 적용을 시켜서 책 내용을 진행해주었으면, 하고 바랐었는데 뒷부분을 읽을수록 은근슬쩍 집어넣은 현실 정치와의 대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가를 이야기하는데 그 정부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으며, 그 정부가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를 빼놓고 정부의 정책을 논할 수는 없습니다. 그 정부에 논하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논객도 자신의 정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같은 정치관이든 다른 정치관이든 말이지요. 저자는 이를 긍정이라도 하듯이 책 내에서 그의 진보에 대한 성향을 드러냅니다. ‘진보란 진화에 따라서 과거의 지배적 사유습성을 체현하는 낡은 제도에서 벗어나서 오늘날 생활환경이 요구하는 최적의 대응을 펼쳐나가는 것’ 이라고 말이지요. 책에서도 물론 언급했다시피 진보와 보수는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어느 한 쪽으로는 날지 못합니다. 하지만 진보와 보수가 있다면 그 중 더 나은 것은 진보다, 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심어줍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자유주의와 국가주의를 놓고 본다면 당연히 자유주의가 좋은 국가론이다, 라는 생각을 품게 만듭니다. ‘진짜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국가주의자인 경우가 많다’, ‘자유주의자의 온화함을 겉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속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와 같은 문장은 저런 생각을 뒷받침해줍니다. 물론 그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현재 정권을 잡은 보수정당에서는 정말 백분 토론에서 말했듯이 ‘제발 좀 살려달라’ 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을 하기도 하고, 제대로 된 비판을 하지 못하게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아버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그리 옹호하지도 않는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기도 하며, ‘이것 봐, 이것만 완성이 된다면 언젠가 사람들이 내가 한 공적을 알아줄 거야’ 라는 생각으로 일관하기도 합니다. 저런 일들은 비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리고 이 뿐만이 아니라 국민과의 대화가 단절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정책들 모두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런 비판은 무차별적으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무의식중에 진보는 옳고 보수는 나쁜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보수 정권이 하는 모든 일들을 국가에 해가 되는 일들로 보게 되고 정권은 당연히 진보가 쥐어야 된다, 라는 비약을 가져오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국가주의 국가론이나 자유주의 국가론이나 모두 하나의 국가를 두고 장님이 어루만지듯 만져본 것에 다를 바 없습니다. 어느 하나가 절대적이라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책의 저자는 진보가 옳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고, 자유주의가 절대적이라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텍스트 전반에서는 그의 진보와 자유주의에 대한 사랑이 뚝뚝 묻어납니다. 게다가 저자가 정치인이었기에 그리고 이번 대선에 나올 가능성이 있는 정치인이기에 그의 성향을 배제하고 책에 오롯이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자의 주장을 정리해보면, 그의 국가에 대한 생각과 정치인에 대한 생각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에 저자가 제기한 질문들에 맞춰서 이야기해보면 먼저 ‘자유주의 성향의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정권을 잡아야 하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텍스트를 읽으신 분들마다 논란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애국심은 ‘굳이 기피할 대상은 아니며’ ‘공동의 선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로서 그 의지를 ‘정당과 정치인들이 북돋울 책무’가 있으며 전체주의를 피하기 위해서 ‘점진적 개혁의 길’을 걸어가야 하며 사회혁명은 일단 지양할 것이며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여야’ 하며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세우고 ‘특정한 가치 하나만 추구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정치라는 것이며 정치인에게는 자신의 신념에 따른 행동에의 예견할 수 있는 결과를 자신의 책임으로 껴안는 그런 책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에 따른 보론으로 복지국가의 실현 그리고 연합정치의 당위성을 주장합니다. 저렇게 주장을 정리하고 보니 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정말 이상적이며 한편으로는 당연한 국가의 모습입니다. 국가가 선을 행하고 정의를 세우는 것은 너무나 이치에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치조차 현실에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에 이렇게 글로써 다시금 되새기는 것이겠지요.


5.


  요즘 이슈가 되는 문제는 반값 등록금 문제입니다. 그러고 보면 대학교들의 등록금은 거의 항상 인상만 해왔던 것 같습니다. 물가가 상승하기에 등록금도 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주장을 되풀이 하면서 물가 인상률의 1.5배까지는 법으로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최근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카이스트의 자살 사건도 이 등록금 문제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3.3학점 이상에 한해서 등록금 면제가 되며 그 이하의 학점에 대해서는 징벌적 등록금 제도를 시행한 것이 발단이 된 것이지요. 지금은 조정을 한다고 말들을 합니다만 애초에 경쟁의 결과로 승자승이 아니라 패자패가 되는 순간 이미 문제가 된 것 이었습니다. 이런 자살은 카이스트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대학교들에서 목숨을 버리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추정컨대 200명에서 300명에 달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최근 집권 여당에서 이를 정책으로 삼고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물론 이러한 정책이 선거 때 뿌리는 그런 선심성 정책이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정부에서의 반발과 당 내부에서의 방발에 부딪혀 현실화되기가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관련 예산이 없으면 무용지물로 돌아가 버리지요. 그러나 집권 보수 여당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저는 이러한 정책을 하나의 큰 발걸음으로 보고 싶습니다. 비록 이런 정책이 거짓 공약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을 듣게 되더라도 이렇게 집권당에서 목소리를 내었다는 점에서 변화가 약간은 생긴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해보고 싶습니다. 집권당의 성향이 보수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는 사회 문제의 해결에는 진보도 없고 보수도 없다는 것을 드러내주며 더 나아가서 이 책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그렇게 강조해왔던 사회 정의 실현과 공공선 실현에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지요. 물론 아직 수백, 수천 미터 떨어져 있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말입니다.

작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프로그램을 하나 꼽으라면 슈퍼스타 K2라고 말하겠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오디션을 통해서 가수가 된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좁은 문을 통과해서 슈퍼스타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외모의 열세를 딛고 기적을 노래했었지요. 그 프로그램의 유행어를 들자면 역시나 ‘내 점수는요’ 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유행어를 빌려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내 국가는요, 시민을 자유롭게 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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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5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1-08-16 20:56   좋아요 0 | URL
아직 제가 많이 부족해서ㅠㅠ 긴 글을 읽어도 긴 글을 읽은 것 같지 않은 그런 글을 쓰고 싶은데 잘 안되네요ㅠㅠㅠ 사실 이 리뷰는 약간 짧았던 기억이 나는데 수양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글을 좀 더 쓰다보면 점차 약간씩 분량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은 하고 있는데 이 내용도 넣어야지 저 내용도 넣어야지 이건 흥미를 유발하려고 이건 내용상 꼭 필요한 거라 등 이렇게 넣다보니깐 길어져버리더군요 큭 저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정말 잘 쓰시는 분들이 많아서 항상 배우는 입장입니다. 완전 부끄럽네요ㅠㅠㅠ 정말 감사합니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바로 들어갑니다.



'후쿠오카 신이치, 컬렉션 세트' 입니다.

이 분은 글을 쉽게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지요. 꼭 소설을 읽는 것 같아서 읽다보면 어느 샌가 지식도 함께 배양시키는 그런 교양서적이라고들 하는데 한 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다만.. 만약에 만약에 신간평가단 책으로 선정된다면 약간 고생을 할 것 같기는 하네요.. 4권 모음이라니... 하지만 워낙에 읽는 재미가 쏠쏠한 책들이라고 짐작이 되어 이렇게 추천합니다.









'고차수로 떠나는 보이차 여행' 입니다.

일전에 러셀의 생애를 다룬 '로지코믹스' 라는 만화를 보고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아무리 훌륭한 구슬도 잘 꿰어야 보배라는 것이었지요. 그 내용을 읽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풍부한 사진자료와 기행문 형식을 빌어 흥미를 유발하여 548페이지라는 긴 쪽수가 절대로 길지 않게 여겨지도록 구성을 한 듯 싶습니다. 그리고 차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모르겠지만, 그 이면에는 정치적 역학관계에서부터 소수민족의 눈물까지 숨어있는 기호품입니다. 영국사람들은 홍차가 없으면 하루를 보낼 수 없다고들 하며, 중국사람들도 만만치 않게 차 애호가라고 알려져있지요. 단순히 차를 소개하는 것을 넘어 거기서 인문학적인 사유를 펼칠 수 있다면 추천 도서로 그 이상 바랄 게 없을 듯 합니다.





'인지자본주의' 입니다.

사실 인지자본주의라는 말이 저한테는 매우 생소합니다만.. 그렇기에 더욱더 관심을 끄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자본이라는 말과 인지라는 말은 마치 강물의 이 쪽과 저 쪽만큼이나 멀리 떨어져있지요. 그러나 이 책은 자신이 그 강을 가로지는 배가 되겠다고 분연히 들고 일어납니다. 비록 소개글만 보면 '자본이 우리의 신체 뿐만 아니라 정신마저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착취한다' 고 하는 부분을 볼 때 논의가 전반적으로 자본은 너무나 거대한 힘이다, 혹은 자본은 어쩔 수 없이 악이다.. 이런 쪽으로 흘러가는게 아닌가 염려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에서의 인지의 역할, 자본에서의 인지력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고찰한 듯 싶은 이 책은 한 번 쯤 읽어 볼만한 가치가 있을 듯 합니다.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입니다.

아.. 이 책을 추천할까 말까 정말로 고민했습니다. 흔하디 흔한 군주론 책에 다시 한 권을 더 추가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걱정도 들었고(물론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 못했으니 이런 판단은 잘못된 선입견일 가능성도 있겠지요) 저 개인적으로도 마키아밸리의 평전을 읽다가 꾸벅꾸벅 졸았던 기억이 있던 경험이 있어서.. 이 책도 이런 저런 논의를 끌어오다가 내용을 제대로 전달을 못하고 결국 지루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걱정까지도 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아무리 좋은 책도 그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지요. 소수 지성들만을 위한 글은 점진적으로 지양해나가야 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염려들에도 불구하고 '군주론' 이니깐 이렇게 추천 페이퍼를 쓰게 됩니다. 책을 직접 읽어본다면 어떤 느낌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혁명의 불씨로서의 군주론이라는 새로운 시각은 마키아밸리가 '아냐! 내 사상을 곡해하고 있어!' 라고 무덤 속에서 관뚜껑을 집어던지며 부활할만한 발칙한 시각이기도 하면서도 그만큼이나 흥미를 끄는 시각이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마치.. 하이데거가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를 읽으며 '이건 내 사상을 곡해하고 있다' 라고 말한 것 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저런 시각들 속에 실제로 마키아밸리조차 생각을 못했던 새로운 사유를 발굴해낸다면 정말 읽어볼 만한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문학의 싹' 입니다.

저자들이 쟁쟁합니다. 김기승, 진중권.. 아.. 쟁쟁하다고 하고는 두 명 밖에 아는 분들이 없네요. 어쨌든 온고지신의 말뜻이 갈 수록 귀해져가는 현대입니다. 정말 이 책에서 제기한 물음대로 우리에게도 과연 '인문학의 고전' 이라고 불릴만한 글들이 있을까요? 그러고보면 우리는 그동안 외국의 고전을 읽어온 것이 아닐까, 그런 반성마저도 들게 되는군요. 어디든 뿌리가 중요하고 우리의 의식을 구성해온 선조들의 사상을 현대에 되살린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추천할만 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물론.. 멀쩡한 고전이 비판적 고전 읽기라는 명목 아래에 전혀 다른 뜻으로 왜곡이 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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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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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의 감옥에서' 라는 책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제가 느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껏 제가 고민해오고, 또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언어의 한계에 대한 것이었지요. 우리는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아무렇지도 않게 언어를 구사합니다. 게다가 우리의 생각은 머릿속에서 언어로 구현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언어라는 것이 있기 전에 우리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생각을 구현한다는 말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컴퓨터를 예로 들자면, 일반적으로 컴퓨터를 사용하려면 운영체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 옛날 구체제 DOS가 그랬고, 지금은 윈도우즈, 리눅스 등 수많은 운영체제가 있지요,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있어야 기계덩어리에 불과한 컴퓨터를 제대로 이용할 수 있게 되는 거지요. 게임을 한다던가, 이렇게 글을 쓴다던가 말입니다. 이 언어라는 것이 일종의 운영체제가 아닐까, 저는 그렇게 비유를 하고 싶습니다. 사실 이런 비유는 선후 관계를 따지자면 약간 잘못되었지만, 언어(인간)가 있고 운영체제(컴퓨터)가 있으니깐, 그러나 적당한 비유가 없으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저만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수많은 철학자, 논리학자, 언어학자들까지 이런 문제에 매달리고 나름대로의 답을 내리고 있습니다. 저번 러셀의 책에서 언급했던 비트겐슈타인부터,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는 약간 다른 점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최근 몇 십 년을 바라본다면 역시나 노암 촘스키에 이르기까지 말이죠. 그러고 보면 촘스키는 가장 언어의 근본에 다가간 사람이 아닐까, 그렇게 짐작되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변형생성문법을 제창하고 우리의 언어가 실재로 '존재' 한다는 것을 보인 사람이라는데 의의를 둡니다. 그는 일단 플라톤의 문제에 주목합니다. 플라톤의 문제는 '우리가 정보가 이렇게 적은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아는 데까지 어떻게 이를 수 있을까.' 라는 내용입니다. 어린 아이는 어른에게서 가나다, 혹은 알파벳만 배우고 단어들 익히고 그렇게 적은 내용만 배우는데도 전혀 듣지도 못한 문장을 어법에 맞게 사용하게 자라나지요. 촘스키는 이렇게 되는 이유가 생물학적으로 우리에게 LAD : Language Acquisition Device가 있기 때문이며 유전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종의 언어에 대한 보편적 그리고 선험적 지식이 담겨있는 기관입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가 이 오랜 가설을 뒤집었다고 합니다. 관련된 뉴스가 하나뿐이라 내용의 신빙성이 어느 정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연구에 의하면 네덜란드의 어느 심리언어학 연구소에서 4개 어족, 301개의 언어 문법 발달을 추적 관찰한 결과, 각 언어의 발달은 개별적인 문화의 진화에 따른다고 밝혀졌다고 합니다. 이는 동일한 규칙에 따라 기능하는 내재적 언어능력 때문에 언어의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하는 촘스키의 주장과는 상반되지요. 지금부터 말씀드릴 책, '언어의 감옥에서' 를 조명하는데 있어 저는 바로 저 '문화에 의해서 언어가 발달' 된다는 말에 집중합니다. 저자 서경식 교수는 재일조선인 2세입니다. 그는 책의 첫 부분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유대인 파울 첼란의 말을 빌려 이렇게 절규합니다. '자신의 진실은 오직 자신의 모어로밖에 말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모어는 저자가 책에 직접 주를 달았듯, 모국어와는 다른 개념이고 그의 말을 빌려 설명하자면 '무자각인 채로 자신 에 생겨버리는 언어' 며 '일단 몸에 익히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몸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언어입니다. 재일조선인 2세로 사는 삶은 저의 빈곤한 상상력으로도 충분히 고달프리라 집작됩니다. 주변의 차별, 멸시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으며 자신의 삶의 환경이 일본이기에 어쩔 수 없이 일본어를 쓰게 되고 결국엔 일본어가 모어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니깐 위의 연구결과를 약간 빌려오자면 서경식 교수 개인의 언어 발달은 그 주변의 일본적 문화에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발달된 모어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이윽고 자신의 생각마저도, 앞서 이야기한 운영체제마저도 일본어가 되어버리게 되고, 결국엔 그 일본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책의 제목 '언어의 감옥에서' 에는 이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논해봅니다.


2.


  윤동주는 연세대, 정확히 말하면 그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다녔었다죠. 그래서 연세대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서 시비를 세웠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저도 예전에 연세대에 잠시 적을 두던 때가 있었습니다. 고백하건대 연세대에 윤동주의 서시를 새긴 시비가 있다는 이야기는 제가 연세대서 떠난 뒤에 들은 터라서 그의 시비는 못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서시는 참 좋아했습니다. 책은 이 서시를 왜곡하는 일본의 번역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논란이 되는 문장은 하나,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입니다. 이를 일본의 번역가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로 오역합니다. 사실 얼핏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 일본의 번역가 말대로, 살아있기 때문에 죽을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살아있다는 말로 대체를 해도 상관이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냉소적 어투로 그런 세세한 것까지 뭐 하러 신경을 쓰냐. 그런 조그만 것에 신경을 쓰지 마라, 그래도 그들은 그나마 양심적 지식인들이다. 최소한 서시를 읽지 않느냐. 지금 일본 우경화 세력이 날뛰는데 그런 것을 경계하는 게 훨씬 옳지 않냐. 이렇게 주장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말도 얼핏 맞는 듯 합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원전 사고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독도는 자기네 땅이다, 라는 발언을 멈추지 않습니다. 일본의 우경화세력은 정말 끔찍할 정도며, 그들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고, 어쩌면 일본 내 그나마 양심적인 사람들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선결 과제가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듭니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의 대부분은 이런 생각을 경계하는데 바쳐져 있습니다. 도리어 우리에게 ‘모든 일본인들이 다 나쁜 것은 아니야’ 이런 생각을 심어주는 그런 소위 말하는 양심적 지식인들, 책에서는 리버럴 세력으로 소개됩니다만, 그런 자들을 더욱 더 경계해야한다고 밝힙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이야기가 적혀있었던가요, 사람이 공포나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잘 아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미지의 것, 내용을 잘 파악하지 못한 것들이 우리에게 정말 두려움을 안겨준다고. 똑같은 맥락에서, 일본의 우경화세력은 일종의 양지의 ‘칼’입니다. 보이는 칼은 피하거나 막을 수 있습니다. 혹은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서 제압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런 리버럴 세력의 퇴락은 음지의 ‘무기’입니다. 이게 칼인지조차 모릅니다. 언제 어디서 우리 몸을 찌를지도 모릅니다.


3.


  적어도 저와 비슷하거나 나이 어린 또래에게서 일본 문화란 제법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저 개인적으로도 일본 노래를 듣기도 하고 만화를 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일본이라는 데가 영 나쁜 데만은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여행도 쉽게 다녀올 수 있고, 먹을거리도 맛이 좋고, 괜히 오차즈케나 스시를 먹으며 웰빙의 기분을 맛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젊은 세대에게는 사실 일본의 강점기의 기억이 흐려져만 갑니다. 어쩌면 몇 몇 젊은이들은 이런 생각마저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과거? 과거는 과거에 묻어야지! 우리가 발전하려면 무조건 배타적으로 일본인들을 미워해서는 안돼, 라고. 아닐 것 같지만 제가 본 소위 외국물을 먹고 외국에서 공부를 해 본 아이들마저 '아, 일본인이라고 하니깐 괜히 부정적 인식이었는데 같이 공부해보니깐 괜찮더라. 모든 일본인들이 다 그런 거 아냐.’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과거를 과거에 묻는다는 말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라는 겁니다. 이 책, ‘언어의 감옥에서’ 는 그들 일본인의 속 심정을 정확히 꿰뚫어 설명합니다. 일본인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그나마 ‘양심적’ 이라는 지식인들도 그들의 치부에 논의가 이르면 다 ‘그때는 전쟁 중이라서 명령에 따른 것이다.’, ‘우리는 침략당한 나라에서는 침략자일 뿐인 병사들을 끌어안은 후 그 후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식으로 끝없는 말꼬리잡기만 할 뿐 실제로 어떠한 행동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책임은 진실로 그들 자신들을 위로하는 그런 수사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말 그들이 책임을 질 마음이 있었다면, 위안부문제가 부결되지는 않았겠지요, 재일조선인들이 그들의 땅에서 시름시름 앓아가는 것을 두고 보고만 있지는 않았겠지요. 그들 자신들은 끊임없이 ‘사과를 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사과를 하라는 말이냐’ 라고 그들이 침략한 국가에 말을 하지만 백 번 사과를 한 들 어쩌겠습니까, 그들의 사과(라고 주장하는 것)에 담긴 허구성을 이 책은 치밀한 논리로 낱낱이 파헤칩니다.


어쩌면 이렇게 서경식 교수가 그들의 논리를 파헤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일본인들의 말을 모어로 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말을 쓰는 집단은 싫으나 좋으나 일종의 의식을 공유한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언어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 오면서 오랜 세월 갈고 닦인 것이기에 그것엔 어쩔 수 없이 그 집단의 문화가 녹여져있게 됩니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이해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생각해봐도 ‘말이 안 통하는데’ 당연히 상대의 말을 배우겠지요. 다짜고짜 그들의 문물을 퍼부어가며 이거 봐라, 이건 어떠냐, 이렇게 하지는 않지요. 우리는 그런 것들을, 무분별한 문물의 주입들을 일종의 침략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어떻게 보면 또다른 형태의 제국주의라도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런 사례를 세계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즈텍 문명을 멸망시켰던 스페인 군대가 그들의 말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이나 했겠습니까. 이런 이유에서 한 집단의 말을 익히는 것은 그 집단의 이해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그 말을 선천적으로 익힌 상태, 그러니깐 모어로 삼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그 집단의 문화의 영향을 진하게 받을 것도 자명합니다. 서경식 교수는 이런 점에서 일본어의 그 조그만 뉘앙스조차 예민하게 감지해내며 거기에 더하여 재일조선인이라는 그가 처해있는 힘겨운 상황 때문에 리버럴 세력의 사상의 허구를 조목조목 비판할 수 있는 것이지요.


4.


  책에서 큰 흐름을 차지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세 유대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파울 첼란, 프리모 레비, 장 아메리가 바로 그들입니다. 프리모 레비에 대해선 얼핏 들은 기억이 있지만 파울 첼란과 장 아메리는 이 책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입니다. 세 명 모두 유대인이라는 공통점 외에 나치에게서 박해를 받았다는 점이 동일합니다. 또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도 큰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는 파울 첼란에 초점을 맞춰서 나아가보겠습니다. 앞서서 파울 첼란의 말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 말을 하나 더 보태겠습니다. 첼란은 그가 문학상을 탈 때 소감을 이렇게 밝혔지요. ‘갖가지 손실 중에서 언어만이 다른 이에게 가 닿을 수 있는 것으로, 상실되지 않은 것으로 남았다.’ 라고. 이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로 자리를 잡고 있는 걸까요? 이 책에서 저자는 ‘이는 국어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 이라고 단언합니다. 비록 유대인이었지만 모어로 독일어를 쓰는 입장에서, 독일에게 박해를 받았다고 그 언어를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독일어가 꼭 독일인이 쓰는 것이 아니다, 독일어를 모어로 가진 독일인이 아닌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이는 저자의 상황과 일치합니다. 비록 조선인이지만(저자가 본인을 남과 북이 통일된 나라로서의 조선인으로 언급하기에) 어쩔 수 없이 모어로 일본어를 쓰고 있다는 점이지요. 그리고 첼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저자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비록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일본어를 모어로 쓰고 있지만, 일본어 자체에 대해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물론 모어를 선택할 수 있다면 당연히 조선어를 선택하겠지만 이미 일본어가 자신의 틀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비록 감옥 같은 언어이지만 떼어낼 수는 없다. 자신이 비판하고 싶은 대상은 일본어를 쓰기 때문에 자신을 일본인으로 규정지어버리는 국가다, 라고 말이지요. 물론 이런 성찰을 이끌어내기까지 스스로를 얼마나 몰아붙였을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습니다. 다른 조선인이었던 시인 김시종은 일본어에 결코 숙달되지 않으려 노력하고 뼈를 깎는 노력으로 모국어를 습득하려고 합니다. 그런 과정이 저자에게 물론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을 첼란의 사례를 받아들이며 극복해내는 중이라 생각됩니다. (근원적인 극복은 일본이 과거에 대해서 엄밀한 책임을 지지 않는 한 불가능하겠지만) 비록 첼란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서경식 교수는 자신의 모어로 일본과 대결하고 있지요. 앞서 쓴 자신을 ‘일본인으로 규정지어버리는’ 이라는 말에 보충 설명이 필요할 듯싶습니다. 이는 단순히 어디 여행을 갔을 때 ‘당신 일본인이에요?’ 라고 묻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일본어가 모어라는 이야기는 그들의 정체성을 일본어로 된 저작과 일본어를 쓰는 친구들을 보면서 형성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이고 다시금 말하면 일본의 시각이 어쩔 수 없이 정체성 형성과정에 섞여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며, 실제로는 재일조선인들은 일본인이 아닌데 어느덧 일본인처럼 사고를 가지도록 주입 당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폭력이지요. 즉, 식민지의 경험이 여전히 그들 재일조선인들에게는 바로 곁에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 라는 글을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되자마자 바로 쓰게 되었습니다. 마치 그 글들이 자신의 몸속에서 축적되고 축적되다가 결국 분출되듯이 말이죠. 평소에 아무런 일이 없이 평화로울 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극한 상황에 빠졌을 때, 그리고 그 심연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아도 자신을 구원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 그리고 적어도 그 사람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나를 구해 줄 사람은 나뿐이다, 라는 강한 정신을 가졌을 때, 그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은 바로 자신의 정체성입니다. 프리모 레비의 경우엔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 여기서 더 나아가 휴머니즘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바로 그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를 이겨내게 만든 근원이었을 겁니다. 거기에 희박하던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상대가 있을 때 사람은 뭉치게 됩니다. 프리모 레비와 같이 자신이 유대인이었나, 싶을 정도로 근원을 모르던 사람들도 유대인을 박해하는 나치 정권 앞에서 자신들을 재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말하자면 박해가 있어서 거기에 대응하는 집단이 생겨난 거지요. 여기까지는 장 아메리도 비슷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생겨났으니 그것은 모어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었지요.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그를 미치지 않게 만들었지만 장 아메리의 경우에는 상황이 나빠서 그가 가졌던 독일 문화가 그를 내부로부터 찌르는 칼이 된 형세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잔혹한 언어경험은 이들만 겪은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식민 지배를 당할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겪었었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아포리아Aporia, 내 정체성으로서의 조선인이라는 것과 내 모어로서의 일본어를 합치시켜 나갈 수 있을까, 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이 책의 저자는 다문화 공동체에 눈을 뜨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5.


  이 책은 정말 논리적으로 치밀하며 저자의 문체는 정갈합니다. 마치 베틀에서 씨줄과 날줄을 촘촘히 짜내어 이윽고 아름다운 옷감을 만드는 작업을 보는 듯 합니다. 특히 그가 이 책에서 리버럴 세력의 잘못된 부분을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 논파하는 부분은 백미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다문화 공동체에 대한 부분입니다. 책 뒤의 대담에서 서경식 교수는 우리나라는 앞으로 다원주의를 채용하는 그런 공동체로 나아가야 된다고 언급을 합니다. 그러니깐 이왕 문이 열린 김에 가장 열린 나라로 나아가지는 말이지요. 사실 이 부분은 예민한 부분이기도 하고, 제가 이렇게 언급하는 것이 디아스포라에 대한 일종의 또 다른 폭력이 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여 많이 주저했지만, 감히 말하건대 이는 너무나 디아스포라적인 시각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디아스포라는 디아스포라이기에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지요. 재일조선인은 재일조선인이기에 그들의 상황을 도리어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과 나를 동일 선상에서 동등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거칠게 말하자면 소속감이 없다, 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하지만 한 국가에 속한 사람은 그렇게 속해있기에 또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말대로 정말로 열린 국가를 지향하게 된다면, 우리의 역사는 늘어나는 걸까요? 우리의 문화는 어디까지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과연 미국이 그랬듯 용광로처럼 인종을 다 녹여서 포용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인문학자 호미 바바의 말을 잠깐 빌려오겠습니다. 문화는 아무리 서로 융합되더라도 이윽고 절대로 융합이 되지 않는 핵이 남는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호미 바바는 식민지배를 한 국가와 식민지배를 당한 국가 사이의 문화에 대해서 연구를 한 사람이지만, 적어도 저렇게 절대로 융합이 되지 않는 핵이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에 적용시켜도 무방하리라 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단일민족이었고, 단일민족이라는 점에 대해서 일종의 자부심마저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이 과연 다른 문화와 인종을 다 녹여낼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것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단일 민족이라는 것이 큰 역할을 한 만큼 (통일을 왜 해야 되는가, 라는 질문에 첫 번째 답변이 우리는 한민족이니깐요, 라는 말이 많습니다.) 문화의 핵도 클 것이고, 이는 도리어 열린 나라라고 찾아온 다른 민족을 우리의 문화나 역사에 다 녹이는 우를 범하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다른 현실적 문제도 산재하겠지요. 국력이 약화될 수도 있겠고, 다른 나라가 우리를 본받아 순순히 문을 열어 지구공동체로 나아갈 리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기에 저자도 그것을 알고 공상적인 이야기이다, 라고 언급했습니다만 적어도 이 부분은 저자가 생각한 대로 나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 방향일까, 라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물론 저도 인간으로서 범인류적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국가 간의 소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훨씬 좋은 방향으로의 진보라는데 동의합니다만 아마 그런 일은.. 화성에서 침공해오지 않는 한 생기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5.


  몇 번이고 몇 몇 구절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이 감옥에서 내가 어떻게 열쇠를 건네줄 수는 없을까, 그런 고민을 했었습니다. 열쇠는 아마도 일본의 진정한 사과,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책임을 거부하지 않는 진지한 자세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저 개인이 어떻게 해낼 수 있는 차원의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외부의 힘에 의해서 일어나서도 안 되며 일본 내부에서의 성찰로부터 비롯되어야 된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한쪽은 사과를 요구하고, 다른 쪽은 언제까지 사과를 해야 되는 거냐고 화를 내는 일이 반복될 것입니다. 물론 일본 내부의 자성이 과연 제대로 이루어질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습니다. 그리고 결코 그들로서도 쉬운 일이 아닐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일본의 리버럴 세력이 자신들은 양심적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사상적으로 퇴락에 빠져버린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그들을 돕는 것은 일본은 충분히 사과를 했다, 그러니 우리도 쇄신이 필요하다고 옹호하는 우리나라의 몇 몇 지식인들입니다. 하지만 그 지식인들이 무슨 자격으로 사과가 끝났다 운운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사상적 퇴락의 독이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을 중독 시킨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사과를 받을 권리가 있고, 사과를 했으니, 이제 사과를 그만 받아도 된다, 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과를 받을 권리는 있지만, 여기서 받을 권리라는 것은 정말 그 사과가 가서 닿아야 할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는 한 끊임없이 요구를 할 권리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이기 때문이지요. 하나만 예로 들자면 아직도 위안부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정녕 희망이 없는 것일까요. 최근에 본 뉴스에 일본의 도서 반환이 연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동안 오래 지속해 온 외교의 결실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 일본의 다수 계층에서도 자신들의 수탈을 잠정적으로 인정하는 자세를 어느 정도 갖추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는 저자와 다른 재일조선인들이 이런 글로서 일본에 힘들게 싸움을 해온 성과라고도 생각이 듭니다. 아직 이것으로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만큼이나 인식의 변화를 이루게 된 것은 앞으로는 조금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만듭니다. 그러면 언젠가 이 책의 저자인 서경식 교수도 더 이상 코리안 디아스포라로 살지 않아도 좋을 날이 올 것입니다. 서경식 교수뿐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재일조선인 모두가. 
  

p. s. 글을 쓰다가 Go라는 일본 영화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재일조선인을 다룬 영화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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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7 0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1-06-11 23:32   좋아요 0 | URL
ㅎㅎ 전 그런 생각안했는걸요ㅠㅠ 저도 이제 접속해서ㅠㅠㅠ 사실 덕분에 저도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하게되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헉, 제가 첫 댓글이었군요ㅎㅎㅎ 요즘 바쁜.. 척 하느라 잘 접속못하고 있는데 종종 들어가서 댓글 남길께요. 근데 여기서 비밀 댓글 클릭하면 님과 저만 볼 수 있는건지 아니면 저만 볼 수 있는지 몰라서 이렇게 그냥 남길께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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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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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가 러셀이라는 이름을 처음 보게 된 것은 사실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책 '논리철학논고'에서였습니다. '논리철학논고'를 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총 명제는 일곱 개에 지나지 않지만 그 일곱 개를 이해하기란 정말 쉽지가 않지요. 게다가 중간 중간에 함수를 끌어와 이론을 전개해 나가는 통에 저는 중간에 읽다가 책을 놓다가 뒷부분으로 훌쩍 넘기는 등 결국엔 완전히 다 읽지 못하고 놓아두게 되었습니다. '논리철학논고'가 무엇을 다루느냐면, 언어와 논리에 대해서 다룹니다. ‘언어는 세계를 반영하는 일종의 그림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철학적 문제는 언어가 명확하지 않을 때 발생하며 철학은 이를 명료화하는 과정이다.’ 등을 다룬다고 적어두겠습니다. 사실 솔직히 고백하건데 정말 쉽지 않은 책이라 제가 위에 저 책이 저런 것들을 논한다, 라고 언급한 부분이 정말 그러한지조차 확신을 가지지 못하겠군요. 그런데 이 딱딱하고 재미없는 책의 어디서 러셀이 언급되었을까요? 바로 이 부분입니다.


'러셀의 도움으로', '러셀이 그의 책에서 논증하듯이'


사상이라도 완전 다 언급한 줄 알았네, 라고 기대하셨던 분들이 계시다면 죄송하지만, 러셀의 이름은 거의 저런 식으로밖에는 나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런데 저렇게 어려운 책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다니, 그것만으로 정말 대단한 일 아니겠습니까? 하하. 사실 버트런드 러셀은 이런 종류의 논리학에 대해서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었지요.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에 매료된 것은 사실이고, 비트겐슈타인의 재능을 개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지만, '그들은 문제를 명확히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라는 말과 함께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었지요. 그러면 러셀은 과연 어떤 것에 관심을 가졌던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그의 인생은 어디에 바쳐져있었기에 그가 매료되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성과를 비판하기에 이르렀을까요.


2.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라는 책은 원제가 'Bertrand Russell's Best' 라고 합니다. 러셀은 그의 긴 삶과 함께 수많은 저작물을 남겼기에 그의 책을 모두 접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저만 해도 러셀의 저작이라고 한다면 다른 책들에서 언급된 2차적 저작물들이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와 같은 책정도 밖에는 읽어보지를 못했으니깐요. 그렇기에 그 저작물 중 엑기스라고 평가할 만한 부분을 모아서 이렇게 책을 내었나 봅니다. 하지만 이 책을 러셀의 베스트, 라고 평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러셀을 정말 대가다, 라고 평할 수 있는 부분은 수학과 논리부분이겠지요. 그 외의 부분이 뒤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큰 족적을 남긴 기호논리학부분이라던가, 논리에 대한 그의 공헌을 빼놓고 제목을 베스트, 라고 붙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러셀은 이 책, 그러니깐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에서 한마디 합니다.


'그러면 책 판매 부수가 줄어들 거야'


그렇겠지요. 논리와 수학에 관한 내용을 싣는다면 분명 일반 대중들로서는 관심이 멀어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 관심이 멀어질 대중들 속에는 저도 물론 포함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을 제외한 남은 부분, 그러니깐 이 책에서 다루는 결혼과 성이라던가, 윤리, 정치, 심리, 종교 그리고 교육에 관해서 러셀은 그의 촌철살인과도 같은 말들을 아낌없이 내놓아 보입니다. 철학은 어렵다, 철학자들은 항상 딱딱한 말만 한다, 등의 편견이라도 깨듯이 그 자신이 철학자들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그 자신이 쉬운 말로 대중들을 위해서 그의 생각을 정제시켜나갑니다. 프랑스의 어느 문필가가 했던 말이던가요, 현인은 쉬운 말로 상대방을 납득시키고 우인은 그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어려운 말을 쓰는 경향이 많다고 하지요. 가벼운 말 속에 곱씹어볼 내용이 있다는 말은 그 말 자체는 하기 쉬울지 모르나 실제로 그런 말을 이끌어내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러셀은 이런 점에서 대중들의 관심을 그의 해학으로 끌어오면서 동시에 그들의 생각에 ‘생각거리’를 던져줌으로써 그가 현인임을 드러냅니다. 그가 작고하기 몇 주 전까지 이 책의 원고를 검토했다는 말은 그가 대중에게 다가가는 일을 얼마나 중요시했나를 보여주는 말이겠지요.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의 말을 다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지 못한다면 그의 사상은 사라지게 되고 대중들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게 될 터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시대의 굵직굵직한 이슈들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밝힘으로서 지식인으로서 ‘시대에 대답을 하는 일’ 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들 중에는 그를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옥중 생활을 하게 만든 반핵시위도 있지요.


3.


하지만 아쉬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이야기는 책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책 구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당황스러웠던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책 페이지를 지적하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종교 부분의 101페이지에 똑같은 문단이 다시 반복되지요. ‘내가 보기에 자연의 ~ 잊지 말아야 한다’ 부분입니다. 여기가 정말 중요한 부분이라서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적어두었는지, 책의 원본에도 이렇게 두 번씩이나 반복이 되어있는지, 아니면 편집상의 실수인건지 분간이 가지 않지만, 아마도 후자에 더 무게가 실리긴 합니다만... 이 부분이 굳이 반복되어야 할 이유는 없겠지요. 구성에 대한 단점은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각 글에 출처를 바로 밑에 명시한 점도 사실 내키지 않습니다. 마치 모자이크 조각을 그러모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 지적하자면 각 부분에 대해서 '여는 말', 그리고 '닫는 말'이 따로 첨부되어있는데, 적어도 닫는 말은 없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닫는 글이 있음으로서 손님이 집에 왔는데 어린애가 난리를 피워서 안방이 엉망이라서, 억지로 문을 밀어붙여놓은 그런 느낌을 주게 되는 것 같습니다. 굳이 비유를 들다면 말이지요. 그런데 러셀은 어린애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나름대로 사색을 한 결과로 빚어낸 문장들인데 그것들을 뭉뚱그려서 닫아버리려고 하니 어색한 느낌을 받았었지요. 이제 내용에 관한 단점을 지적하자면 가장 먼저 들 수 있는게 가볍다는 점입니다. 러셀의 풍자는 정말 재미있습니다. 보면서 낄낄거리며 웃기는 쉽습니다. 대중의 관심을 모으고 그들의 생각의 방향을 전환시킨다는 점에서는 이 책이 제 몫을 다하겠지요. 웃음 속에 우리들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이 생각거리가 진지한 사색으로 발전하느냐는 의문에는 솔직히 회의적입니다. 그래서 러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고, 그의 저서를 읽어본 경험이 있는 분들에게는 쉽게 만족하지 못할 글들입니다. 하나 더 지적하자면 글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 글 전체의 맥락입니다. 예를 들어서 문단 A, 문단 B, 문단C로 구성된 글이 있다고 합시다. A, B가 서로 상반된 내용을 주장하지만 C까지 읽어보니깐 정말 작가가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A였습니다. 그런데 글의 일부분만 발췌하여서 인용한다면 B를 인용한 사람은 작가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이를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지요. 러셀의 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책들 중 수많은 책들의 ‘일부분’ 이 글 전체 내용과는 상관이 없이 그를 비난하는데 쓰여 왔습니다. 이 책은 그런 오류에 빠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이 책만 읽고 러셀에 대해서 정반대의 주장을 가지고, 혹은 그의 주장의 일부분을 가지고 버트런드 러셀에 대해서 아는 척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요. 실제로 그의 사상을 집약해서 정의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4.  


그러나 저렇게 비판할 부분만 이 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책은 그 단점을 포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첫 문단의 의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무엇이었으며, 그의 삶은 어디에 바쳐져 있었을까요? 여기서 잠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노암 촘스키는 그의 연구실에 러셀의 좌우명을 붙여놓았다고 합니다. 바로 다음의 글입니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었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은 이 책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의 표지와 대미를 장식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삶은 사랑에 대한 갈망과 탐구욕, 그리고 인류에 대한 연민에 바쳐져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저작활동을 하고 반핵운동에 뛰어들고 굵직굵직한 이슈에 답해온 것이 이해갑니다. 물론 본격적으로 러셀이 대중들 속으로 뛰어들어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한 것은 그가 대학교 교수 임용에서 외설 시비로 인하여 떨어졌을 때부터였겠지만, 그 사실이 그가 대중에 대해서 연민이나 사랑을 가지지 않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대중과 갈수록 멀어지는 언어철학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저 글은 이 책이 가지는 의의를 새롭게 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러셀은 평생을 걸쳐서 스스로의 의견을 새롭게 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한 주장은 세월이 지나가면서 다른 견해를 수용하면서 바꾸어나갔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것은 결국 사랑과 연민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랑이 지나쳐 네 번씩이나 결혼을 했겠습니다만, 아, 이렇게 쓰면 러셀이 저를 인습과 지배적 도덕에 사로잡혔다고 비판하려나요, 그러나 이런 결점을 제외한다면 그는 그 자신의 비판과 풍자가 결국에는 인류의 진보를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오늘날과 같이 서로를 감싸 안을 수 있는 마음이 부족한 시대에 따뜻한 햇볕을 비춰주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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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알라딘에서 글을 쓰게 된 가연입니다. 

주목신간을 쓰기 전에 잠깐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을까 합니다. 아무래도 처음으로 이렇게 페이퍼를 쓰는 것이기도 하니깐.. 지금까지 사실 책을 읽고 리뷰는 그럭 저럭 해왔었다지만 이렇게 프리뷰 형식으로 책을 소개하는 것은 처음이라서 약간 주저되네요. 다른 분들의 먼댓글 글을 찾아보면서 오.. 이렇게 쓰는구나, 생각이 들어도 언제나 그렇듯 이렇게 모니터 앞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 머릿속이 새햐얗게 되버리지요. 어떤 형식으로 써야되지? 어떤 내용을 담아야 되지? 등등..  

게다가 한 가지 더 끄적이자면.. 앞서 다른 분들의 주목신간을 읽어보았습니다만... 과연 책의 세계는 깊고 오묘하군요. 제가 내심 가장 기대를 했던 책은 아무도 주목을 안하셨길래 약간 당황스럽기도 하고, 스스로가 특이한건가! 이런 생각까지 들었었다죠. 그러나 그렇게 추천을 하는 책들이 다채롭다는 것 또한 독서가들에게는 일종의 행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첫 페이퍼라서 이렇게 괜스레 길에 끄적였습니다. 아마 다음부터는 이렇게 길게 끄적이지는 않겠지요. 그럼 아래에 주목 신간을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목 신간을 뽑은 기준은.. 아무래도 주관적이지만 제가 얼마나 책에 흥미를 느꼈는가, 라는게 중심 기준이 되고, 그 외에 현재 시점에서 이 사회에 이 책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라는게 보조 기준입니다. 

 

먼저 추천드릴 신간은 '벽광나치오' 입니다. 

원래 조선의 프로페셔널, 이라는 책의 개정 증보판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3월 신간 중 가장 기대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벽광나치오의 뜻은 벽, 고치기 어렵고 광, 미쳤으며 나, 게으름뱅이에 치, 바보같으며 오, 오만하다는 뜻입니다. 모두가 부정적인 한자로 이루어져있습니다만 이 책에서는 저렇게 고치기 어렵고 미쳤기 때문에 하나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한때 논란이 되었던 불광불급이라는 말이 있지요. 사실 이 말은 출처도 불분명하고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널리 퍼진 말 중 하나라고도 합니다. 제가 고등학생일때는 어떤 선생님께서 본인이 만들어낸 말이라고도 말씀하시기도 할 정도였지요. 사실 저 말은 한자로서는 그리 적절하지는 않다는 평가가 많습니다만 뜻하는 바는 자명합니다. 미치지 않으면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소위 말하는 성공한 사람들의 저서를 읽어보면 '나는 하루에 잠을 거의 안잤다', '이 일을 할때는 정말 다른 것들은 하나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라는 문장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이들도 그만큼 그 일에 미쳤기 때문에 하나의 경지를 이룰 수 있었겠지요. 이 책에는 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분야에 미친다는 것, 덕분에 자부심을 가지고 오만해지기까지 하는 조선의 인물 11명을 소개합니다.  

하지만 성공하는게 다는 아닙니다. 실제로 이 책의 주인공들 중 세속적인 성공을 하는 인물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일종의 자기계발서는 되지 못할겁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에 미친다는 것의 의미는 요즘처럼 '마니아' 가 많은 사회에서 더 두드러지리라 생각이 들며, 그렇기때문에 더욱더 우리 사회에서 그들의 가치를 오롯이 들어낼거라 짐작됩니다. 

두 번째 소개드릴 책은 '루소' 입니다.

루소의 전기 비슷한 책을 읽은 적 있습니다. 왜 비슷한 책이라고 썼냐면, 사실 루소의 입장에서 글을 풀어나간 책이 아니라 루소의 여인, 그러니깐 애인이었고 또한 어머니와 같았던 바랑 부인의 입장에서 글을 쓴 책이었지요. 책의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동안 주체의 입장, 그러니깐 루소의 경우에는 루소의 입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보았던 저에게 주변인의 관점으로도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책이었습니다. 각설하고, 이 책은 기존의 루소 관련 저서들과는 약간 다르다고 합니다. 기존의 루소 관련 저서들이 루소의 행적을 그저 되밟아보는데 그치고, 그 행적을 본인들이 내세우는 가치에 끼워맞추어왔다면 이 책은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루소가 얼마나 복잡한 인간이었나, 그 복잡한 심경은 그의 사상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에 더 초첨을 맞추었다고 여겨집니다. 이 점이 저의 주의를 끌었지요.  

 사실 저는 루소의 기본적인 저서, 에밀조차도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루소에 대하여 평한 책들은 읽어보았었지만 정작 루소 본인이 쓴 저서를 읽어보지는 못한 거지요. 이는 어찌 보면 핵심을 놓쳐왔던 것과 다를 바 없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무작정 그가 쓴 저서의 탐독에 뛰어든다면 순식간에 골머리를 앓을 듯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루소의 사상은 지금 사회에 이르러 상반된 평가를 받을 만큼이나 복잡하니깐요. 그래서 이 책이 일종의 길잡이가 되어주리라고 기대합니다. 

 세 번째 소개할 책으로 '프로파일러' 입니다. 

 요즘 대세는 심리학과 정신과학이라고 감히 단언합니다. 임상의학에서 그동안 선호되어왔던 피부과, 안과, 성형외과를 제치고 이제 새롭게 정신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가 뜨고 있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지요.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는 심리학에 안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합니다. 상대의 심리를 얼마나 잘 파악할 수 있는가? 상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은 오늘날 인기 드라마에서도 나왔었듯 '사람을 잡아야 승리한다' 라는 말로 귀결이 됩니다. 그만큼 사람의 마음 속은 파악하기가 어렵지요. 오죽하면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라는 속담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한 길 사람 속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각종 심리학적 툴Tool로 이 사람의 성향을 파악해봐도 그런 것들은 그 사람이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만 가르쳐 줄 뿐 그 이상의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해주지 못하지요. 그러다가 큰 사건을 저지르는 사람도 생겨납니다. 모든 사람이 사회에 잘 적응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자신의 통제하에 둘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지요. 뉴스를 보면 심심찮게 감정에 못이겨 내연녀 살해, 가족의 살해, 동료의 살해.. 살해 살해 살해... 가 끊이지 않습니다. 이런 단순한 사건들 뿐만 아니라 이유 없는 살인도 횡행합니다. 사이코패스라고 일컫지요. 하지만 성향 파악의 모호함때문에 늘 경찰은 사건이 일어난 뒤에 뒷수습을 하게 되고 법의학자들이나 프로파일러들은 범인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하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이너리티 리포트' 처럼 범인을 미리 알아야 된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런 영화와 같은 세계는 사람들의 인격을 무시하는 행위겠지요. 그러나 조금이라도 일찍 범죄자들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다면, 이라는 생각도 끊이지 않습니다.  

이 책은 그런 노력의 결정판입니다. 저자 팻 브라운은 평범한 주부였다가 그녀의 일생을 뒤바꾼 산건을 통하여 프로파일러의 길에 뛰어듭니다. 이 책을 통하여 조금이나마 그들의 노고를 깨달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추천할 책입니다. '벽화로 꿈꾸다' 

고구려에 대해서 생각해보라면 여러 이야기들이 나오겠지요.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가졌던 광개토대왕에서부터 수나라를 몰살시켰던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연개소문의 당에 대한 항쟁까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고구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어쩌면 어릴때부터 시청해왔었던 사극의 영향도 어느 정도는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사극에서의 고구려는 속된 말로 '끝판왕' 입니다. 고구려의 멸망을 다룬 작품이 아니라면 대개의 경우 강맹한 위용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사실 고구려에 대해서 떠올리라고 하였을때 저런 군사들의 위용보다도 저에게 먼저 다가오는 것은 고구려 무용총의 벽화입니다. 

네, 누구나 알고 계실 바로 그 고분 벽화입니다. 말을 타면서 활을 겨누는 고구려인들, 꼬불꼬불하게 그려진 산 또는 언덕은 사람과의 비례가 전혀 맞지 않습니다. 이는 어쩌면 일부러 그들 고구려인의 기상을 드러내기 위함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산 따위는 전혀 우리 고구려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 라는 거지요. 하지만 그들이 겨누고 있는 대상은 적병이 아니라 사냥감입니다. 고구려는 옛 삼국 시기에 유일하게 중국과 경계선을 맞닿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지금이야 정보와 기질이 미디어 매체를 통해서 거의 평준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때만 해도 어쩌면 대륙적 기상을 가질 수 있었던 나라는 국경을 맞닿고 있던 고구려 하나 뿐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 그림은 그런 느낌을 잘 보여줍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달리는 태연한 고구려 무사들을 통해서 말이지요. 

과연 저 무용총의 벽화가 이 책에 나올 것인가, 네, 목차 중에 수렵도라고 분명 나와있군요. 그런데 이 책은 이런 수렵도의 소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8가지 이야기를 통하여 고구려인들의 특질을 잘 나타내는 듯 합니다. 물론 눈을 만족시키는 아름다운 고구려 벽화들과 함께 말이지요. 

  

처음으로 이렇게 페이퍼를 써 보았습니다만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드문 드문 눈에 띄네요. 그리고 과학 분야에 대한 추천도서가 없는게 마음에 걸리긴 합니다만, 이는 다른 분들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페이퍼를 쓸때는 앞서도 언급하였다시피 머리가 하얘졌었지만 이렇게 쓰고 나니 도리어 더 계획적인 도서가 가능하리라는 기대가 됩니다. 그러면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분께 감사드리며 다음 리뷰때 다시 뵙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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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4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05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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