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노벨 생리의학상이 발표가 되었고, 그 주인공은 제임스 로스먼, 랜디 셰크먼, 토마스 쥐트호프가 되었다. 한 분야에 세 명까지 동시에 시상받을수 있는데, 작년에는 존 거든과 야마나카 신야였었다면 이번에는 세 명이 채워진 것 같다. 그들이 이번에 상을 탄 분야는 '세포 내 단백질의 전달 메커니즘' 에 관한 것이라는데 사실 기사만으로는 잘 감이 안잡힌달까. 노벨상 위원회는 1980년대 그들이 썼던 논문을 그들의 주요저작물, 그러니까 그들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논문으로 판정하였다고 한다. 어쩐지.. 골지Golgi 시스템이라던가 소포체 등은 너무 익숙한 생물학적인 개념이기는 하다. 중학교때도 배우지 않는가, 풋. 물론 그렇게 단편적인 지식은 아닐테고.. 분명 여러 수용체들과 그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가 그들에게 노벨상을 부여했으리라고 본다. 세포 내 수송작용과 전달기전은 순수과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분명 실용적인 측면에서도 의학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떤 질환에 적용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테지만 말이다.

 

사실 내가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 실제로 내가 관심을 더 많이 가져야 할 분야는 생리의학상이어야 할텐데도 - 물리학상이다. 2013년의 노벨 물리학상은 특별하다. 과연 피터 힉스가 힉스 입자를 예견한 공로로 물리학상을 획득할 것인가? 스티븐 호킹은 작년에 CERN에서 힉스 입자가 매우 높은 확률로 발견되었다, (어설픈 용어 선택이다.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어떤 입자가 발견되었고, 그 입자는 우리가 예측한 힉스 입자의 성질과 높은 수준의 확률로 일치하는 모습을 보였다, 라고 하여야 옳다.) 는 소식을 듣고 힉스 입자의 발견은 정말 대단한 일이며, 힉스가 이번에 노벨상을 타는 게 옳다, 라고 이야기했었다. 스티븐 호킹은 힉스 입자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의 예상이 빗나갔었다. 그리고 힉스는 이 신의 입자God's particle, 아니 Godamn particle가 자신의 생전에 찾아오리라고는 생각못했기에 눈시울을 붉혔다. (왜 Godamn particle이라고 썼는지는 예전에 언급한 바 있다. 힉스는 원래 이 입자를 보고 Godamn particle이라고 농담조로 명명하려고 했고, 그것을 따른 리언 레더먼 : '약력을 규명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탄 물리학자' 는 본인의 책에서 그것을 따르려고 했지만 출판사에서는 어감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God's particle로 바꿔버렸다.) 

  

나는 작년 7월 4일을 아직도 기억한다. 물론 나는 무슨 물리학자도 아니고, CERN에서 일하는 사람도 아니고, 심지어 물리학도조차도 아니지만 그 들뜬 분위기는 잊을 수가 없다. CENR이전에 페르미 랩에서는 이미 힉스 보존으로 짐작이 되는 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라는 연구 결과가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지우기, 그러니까 있을 만한 에너지 수준을 조금씩 지워나가면서 발견해나가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니 저러니 해도 범위가 좁혀진 것은 사실이고, 이 상태로 나아간다면 더 높은 에너지 수준을 탐색할 수 있는 CERN에서 결판이 나리라는 것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작년에 본 CERN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한 연구원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어떻게든 결판이 날 것이다' 라고. 그리고 7월 4일, 힉스 입자로 짐작되는 입자를 발견해내고 말았다. 그리고 작년 말, 높은 수준으로 확정지었다. 힉스 입자에 대한 발견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올해 10월 일본 연구소에서 확정지어졌다.

 

근데 힉스 입자가 뭐가 중요한 걸까? 많은 사람들이 신의 입자, 라고 부르면서 오오, 라고 감탄사를 내뱉기는 하지만 실제로 왜 중요한지는 알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실용성의 측면에서라면 힉스 입자가 있든 없든 이 세상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고,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고도 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비유할 수 있다. 서양 철학사에서 데이비드 흄은 회의론을 극한까지 몰고나가서 '젠장, 세상이 정말 내 눈에 존재하는건가?' 라는 식으로 내뱉는다. 하지만 칸트는 흄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 눈앞에 있는게 진짜로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그건 상관없잖는가.' 이를 두고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식의 전환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칸트가 다시 철학의 기초를 붙들어매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 이야기이다. 힉스 보존이 있든 없든 우리 거시적인 삶에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나는 힉스 입자를 대칭성, 그리고 거기서 오는 아름다움으로 파악하기에 높게 평가하지만, 그렇다고 힉스 입자가 발견된 것이 무슨 특별한 계기가, 그러니까 무슨 아광속 여행이 가능하다던가, 타임머신이 만들어진다거나,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힉스 입자의 역할은 그런 SF적인 상상력과는 거리가 멀고 말이다. (물론 나는 그런 상상력들도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힉스 보존의 가치를 폄하해서는 안된다. 실용성만으로 어떤 지식을 평가한다면 우리의 지식 수준은 그 옛날 원시인에서부터 그다지 많은 발전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리라. 이러한 순수한 과학이 쌓여 실용적 의미도 가지고 되는 것이다. 아니 무엇보다도, 실용적 의미를 가지지 않으면 어떤가? 다른 모든 것을 넘어서 세계의 구조를 쫓는다, 라는 것은 정말 가슴 뛰는 일이 아닌가? 그런 욕구야말로 가장 순수한 욕구일 것이다. 지식에 대한 끝없는 갈증말이다.

 

그렇다면 이 힉스 입자는 어떤 입자일까? 사실 이 힉스 입자는 부산물에 가까운 입자이다. 확실한 설명은 왼쪽의 숨겨진 우주, 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특히 왼쪽의 책의 저자인 리사 랜들은 입자물리학자로 이런 입자모형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이기에 훨씬 정확한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전공자가 아닌 입장에서 물리학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하지만 아는 만큼만 끄적여보자면, 첫 번째, 힉스 메커니즘은 자발적 대칭성 깨짐과 연관이 있다. 두 번째, 힉스 입자는 힉스 메커니즘의 부산물이다. 세 번째, 힉스 메커니즘은 힉스 장을 통하여 질량을 부여한다. 바로 이 세 번째 성질때문에 힉스 입자가 질량과 연관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힉스 입자가 질량을 준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힉스 입자는 일종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말하자면 힉스 메커니즘으로 인하여 입자는 질량을 부여받게 된다. 뭐라고? 주의깊은 사람이라면 이 말들에는 좀 모순이 있는 것 같다고 여길 것이다. 방금 세 번째, 를 보면 힉스 장이 질량을 부여한다는데 또 힉스 메커니즘때문에 질량이 생긴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여기서 우리는 게이지 이론Gauge theory에 대한 정말 기초적인 사실을 가져와야만 한다.

 

게이지 이론은 사실 입에 잘 익지 않는 단어이리라. 그러나 실험실에서 일하는 사람이거나, 또는 의학드라마를 열심히 보는 사람이라면 분명 들어보았을 것이다. '여기 18게이지 니들Needle 주세요' 이런 식으로 말이다. 게이지는 측정 단위다. 측정에 쓰인다, 라고만 알고 있어도 좋다. 그런데 이 게이지가 왜 물리학에 등장했는가? 철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자연은 우리 인간과 떨어져 존재하는 실재다. 우리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더라도 자연이 우리 인간을 따라서 움직이지는 않는다. 이런 유물론적인 관점이 과학자들은 가지고 있다. (사실 나는 장기적으로는 이런 관점이 우리가 사회를 보는 관점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만 여기서 자세히 논하지는 않겠다.) 여기서 동의하지 않는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다. 자, 동의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우리가 자연을 한 눈금이 1cm인 자로 측정하든, 1mm인 자로 측정하든 그 결과는 같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느 새싹을 측정했는데 눈금이 1cm인 자로 측정했을때는 10cm이고, 1mm인 자로 측정하였을때는 100mm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우린느 자연이 10cm이기도 하지만 100mm다, 라고 여겨야 하는가? 아니다. 이럴 경우에 우리는 10cm은 100mm이다, 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씩 1cm이 눈금인 자를 가지고 측정을 하는 경우도 있고, 1mm가 눈금인 자를 가지고 측정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입자 물리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것을 게이지 변환이라고 부른다. 측정하는 것을 바꾼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앞서도 예를 들었듯 우리가 어떤 측정 도구를 가지더라도 자연을 동일하게 기술하여야 한다. 이 측정도구는 입자 물리학에서 게이지 보존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자연을 동일하게 기술한다는 이야기를 입자물리학에서는 게이지 대칭성이 유지가 된다, 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휘소 박사는 이야기한다. '게이지 보존의 질량 항은 - 게이지 보존은 보존이라는 말 그대로 힘을 매개하며 광자, W입자, 글루온 동이 있다 - 국소 게이지 변환에 대해 불변이지 않으므로 존재 할 수 없다' 라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어려운 말을 다 빼면 변환했는데 동일하게 자연을 기술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동일하게 자연을 기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따라서 이휘소 박사는 말한다. 게이지 입자는 질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게이지 입자의 질량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강력을 매개하는 글루온의 경우 질량은 0이지만, W입자의 경우 1983년 와인버그-살람의 이론에서 예측한대로 낮은 에너지에서 높은 질량을 가지는 것이 실험적으로 증명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난 것일까?

 

이론상으로는 게이지 보존의 질량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언가 시스템이 있어서 질량을 부여해준다면? 바로 여기에서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 대두되게 된다. 일단 단순한 방법으로는 저 대칭을 깨지 못한다. 대칭은 정말 아름다우며, 물리학뿐만 아니라 여러 과학 분야에서는 뛰어난 툴Tool이다. 하지만 이 대칭이 꼭 들어맞지가 않다면? 실제로 대칭인 때보다 비대칭일때가 더 안정된 상태라면? 이런 이론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이에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 논의되었다. (정확히 말해서 난부 요이치로와 제프리 골드스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참고로 이 자발적 대칭성 깨짐은 전자기력과 약력의 통합에 큰 역할을 했었다. (사실 설명의 선후가 조금 바뀌었다. 하지만 쉬운 설명을 위해서 양해해주기를 바란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깨어진다면 이제 대칭상태에서는 질량을 가지지 못했던 게이지 입자들도 질량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이걸로 끝인가?

 

아까 첫 번째, 에서 나는 힉스 메커니즘이 자발적 대칭성 깨짐에 크게 연관이 있다고 말했다. 분명 자발적 대칭성이 생기면 질량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자, 여기서 힉스 장이라는 것을 가져 오자. 장field는 말 그대로 그 힘이 작용하는 범위를 뜻한다. 여기서 유의하여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명제다. 힉스 장은 어디에나 있다. 여기서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미시세계에서 입자와 파동이 상보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중 가장 특이한 사실일 것이다. 바로 이 상보성때문에 영원한 파동은 없고, 영원한 입자는 없다. 힉스 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 파동은 어느 순간 입자로 봉긋 솟아오를수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 상호작용하면서 말이다. 그런 순간을 힉스 장의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힉스 장은 네 개의 성분을 가지게 되는데, 그 중 셋은 게이지 보존에 질량을 부여하고 남은 하나는 힉스 보존으로 남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일종의 연예인의 거리 등장에 비유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요즘 최고의 인기를 달리는 아이돌이 거리를 걷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아이돌을 알아본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이돌 주변은 북적북적거릴 것이다. 원래 거리를 걷던 사람을 힉스 장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아이돌이 나타난 경우 그 아이돌에게 가는 것들을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혼잡한 거리를 걸으면서 '오 마이 갓, 자꾸 밀려나가' 라고 외치는 심정을 힉스 메커니즘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썩 좋은 비유는 아닌 것 같다. 내 식으로 설명하자면 이렇게 설명하련다. 자연을 판단하기 위하여 우리는 게이지 대칭성을 유지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게이지 변환을 하다보니까 변환이 제대로 안되고 결과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자연을 우리가 바꿀 수는 없으니 측정 시스템을 바꿔서 다시 시도하였다. 측정 시스템을 어떻게 바꾸느냐가 문제가 되는데, 가지고 있던 측정 기구의 눈금을 모두 가지는 - 예를 들어서 버튼을 누르면 눈금이 바뀐다거나 - 그런 측정 기구를 가져왔다고 하자. 그 기구를 통하여 얻어진 결론은 새로운 시스템으로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그 시스템을 힉스 메커니즘이라고 부르고 그단위가 힉스 보존이 되는 것이다.

 

이 글은 물리학의 정말 편린의 편린에 지나지 않는 글이다. 이 글에는 분명 오류도 있을 것이며 - 그렇다고 수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테지만 - 그렇기 때문에 이 글만으로 힉스 입자의 메커니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실제로 힉스 입자에 대하여 설명하자면 차원과 에너지 수준을 도입한 뒤 멕시칸 모자 모양의 그림을 하나 그려야 한다. 물론 그것만으로 확실히 설명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글을 통하여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힉스 입자에 대한 설명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글로 이런 과학적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이 정말 조금이라도 생기기를 바랄 뿐이고, 무엇보다도 이 글이 힉스 입자와 노벨 물리학상의 주인공이 될 -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지만 - 피터 힉스 그리고 이휘소 박사에 대한 일종의 감사로 읽혀졌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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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8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09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3-10-09 01:19   좋아요 0 | URL
얼마 전에 힉스 입자라는 것이 보이기도 하던데(가연 님이 쓴 글에서 한번 본 적 있는), 노벨상 때문이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받았더군요 우주 탄생의 비밀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소리도 잠깐 들었습니다 그런 것은 시간이 많이 걸려서 이루어 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다가 결과가 나왔을 때에야 알 수 있잖아요 그런 일을 말없이 하는 사람들 대단합니다 이것은 과학을 하는 사람만 그런 것은 아니겠네요


희선

가연 2013-10-09 18:41   좋아요 0 | URL
예전 글에서 한 번 끄적거렸었지요. 맞아요. 마지막 말에 정말 동감합니다. 잘 모르고 있는 일을 꾸준히 하다가 결과를 드러내는.. 그런 사람들이 정말 대단한 거에요. 하지만 사람들은 모르겠지요. 정말 모르겠지요..

가연 2013-10-09 18:41   좋아요 0 | URL
노벨 물리학상 축하합니다!

테레사 2013-10-11 15:53   좋아요 0 | URL
하지만, 흥미로운 주제네요..우리의 기원을 아는 일이니까...우주의 기원...

가연 2013-10-16 17:18   좋아요 0 | URL
정말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답이 많이 늦었네요ㅜㅜㅜ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이렇게 늦게 올리는 것에 대하여 변명을 좀 하자면, 먼저 신간평가단에서 보통 신간 추천하라고 문자가 오는데, 이번에는 문자가 안왔다.. 분명 추천하라고 공지가 올텐데,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뒤늦게 이렇게 알게 되서 올린다. 하나 더 변명하자면, 내 기억으로는 평가단 서재에 접속하면 신간 추천하라는 페이퍼를 보통 가장 최근에 보도록 올렸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뒤로 완전히 밀려 있어서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이런 저런 변명에도 불구하고 늦게 올리는 것은 죄송한 일이다. 이 추천이 반영될런지는 모르겠지만 늦게나마 올려보련다.

 

사실 이번에는 봐둔 책이 많다.

 

 

 

비글호 항해기.

 

 

 

 

 

 

 

 

 

 

 

 

 

 

 

 

나, 스티븐 호킹의 역사.

 

 

 

 

 

 

 

 

 

 

 

 

 

 

 

 

위대한 수학문제들.

 

 

 

 

 

 

 

 

 

 

 

 

 

 

 

 

4퍼센트의 우주.

 

 

 

 

 

 

 

 

 

 

 

 

 

 

 

 

우상의 추락.

 

 

 

 

 

 

 

 

 

 

 

 

 

 

 

 

하나 빼고는 다 과학책이다. 10월은 과학의 달이다. 아닌가? 풋. 급하게 책들만 올린다.. 이번에는 제대로 보고 설명이라도 끄적거리려고 했으나... 조금씩 끄적여 보겠다..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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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3-10-07 12:55   좋아요 0 | URL
흙. 저 문자 보냈는데 ㅠ 왜 문자가 가연님께 안갔을까요 ㅠㅠ

가연 2013-10-07 20:38   좋아요 0 | URL
헉.. 이렇게 직접 오셔서 달아주시다니ㅠㅠㅠ 보내셨다면 제가 잠결에 문자를 지워버렸나봅니다, 풋.

희선 2013-10-09 01:03   좋아요 0 | URL
이 가운데 하나라도 되기를...^^
전에 <4퍼센트 우주> 이 책 제목을 봤을 때, 가연 님이 이런 거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월은 무슨 달일까요 잘 모르겠군요 문화의 달과 경로의 달이 보였습니다 둘 다인가봐요 문화의 달은 1972년 10월에 정했답니다
과학의 달은 4월인가 봅니다 과학의 날은 4월 21일이네요

무슨 달이라고 정했다고 해도 그때만 그런 것은 아니지요^^


희선

가연 2013-10-09 18:37   좋아요 0 | URL
당연히 10월은 과학의 달이 아니죠, 풋. 그냥 과학책이 하나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과학의 달이라고 끄적거리는 거죠, 아하하하하... 우상의 추락, 도 읽고 싶은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외딴집.

외딴집을 읽었는데 (협찬(?)을 받았다. 이 자리를 빌어 협찬해주신 모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나는 그렇게 미야베 미유키의 책들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이 책을 읽고는 어느 정도 호불호랄까, 그런 감정은 생긴 것 같다. 나는 에도 시리즈가 마음에 든다. 그 이유는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던 것 처럼 외부가 척박하기에 서로 인간의 정을 나누는 시대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에도 시대가 환상과 공포, 그리고 신화가 쉽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부연을 하자면, 현대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신화가 끼어들기에는 어렵게 된다. 물론 현대에서는 새로운 신화가 생겨나겠지만 뭐랄까, 우리가 잘아는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이 활보하기에는 힘들다. 마찬가지로, 에도 시대를 빌리면 일본의 수많은 괴물과 도깨비들이 쉽게 움직일 수 있다. 여담이지만 일본에는 정말 많은 괴물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그 괴물들을 아직까지도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삶에 녹여내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 삼십육계.

이 책 생각보다 괜찮다. 소설이지만 고증도 잘 된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잘 모르던 인물들이 두각되어 있어서 좋았다. 예를 들어 청태종의 모사 범문정, 같은 경우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 삼십육계의 차도살인의 계, 에는 범문정와 원숭환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물론 범문정이 진짜 청태종에게 차도살인의 계를 발안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범문정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지 않은가? 그리고 오호 십육국과 오대 십국 시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아볼 수 있어서 마음에 드는 책들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보면서 어떻게 전략이 중국역사에서 이용되었는지를 확인해보면 좋을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의 해설을 맡은 이가 가장 중요시하는 전략은 진화타겁이다. 불이 난 틈을 노려 이득을 취한다, 라는 뜻인데, 어부지리와 뜻이 어느 정도는 통한다. 조개와 홍학이 다툴 때 어부가 이득을 보는, 그런 형상이라고 볼 수 있을까? 다만 현대사회를 생각해보면 가장 중요한 전략은 미친 척 하는 것이 아닐까. 가치부전, 이라고 하는. 손빈은 미친 척을 해서 방연의 손에서 벗어났고, 유비는 번개를 보고 거짓으로 두려워하여 조조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에드워드 고리 걸작선.

솔직히 말하면 애매하다. 난 팀 버튼의 굴소년의 죽음, 읽고 정말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 미묘한 감정에 몸을 떨었다. 그래서 소개글을 읽고 이 책을 바로 구입했다. 팀 버튼이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그럼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글쎄, 음.. 나는 잘 모르겠다. 표지까지 무슨 연관이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리고 그림을 찬찬히 뜯어서 본다면 분명 무언가 뜻이 담겨있을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뭐랄까.. 이 책들 해설서 없을까? 아니면 비평서라던가.. 내가 이쪽은 거의 문외한이라 아는 바가 없다. 억지로 해석을 가져다 붙일 수는 있지만... 개인적으로 에드워드의 고리의 작품 중 나에게 어떤 충격을 가져다 준 작품은 (여기에는 없고 인터넷 검색으로 알게되었지만) 산산조각난 아이들, 이라는 작품이다. 정말 당혹스러운 작품이다.

 

 

 

 

티벳, 말하지 못한 진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매우 추천하는 책이다. 물론 초판이 발간된 지 좀 오래되서 현재의 상황을 담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런지도 모르겠지만, 현재라고 해서 티벳인들의 삶이 더 나아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테니 별로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중국이 어떻게 티벳을 수탈을 하고 있는가? 이다. 그리고 그 수탈 내용을 체계적으로 환경, 교육, 자원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철저하게 파헤치고 있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책에 티벳과 중국의 지도가 그다지 없다. 책에서 서장자치지구, 라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직접 내가 검색을 해서 위치를 찾지 않는 한 어디를 이야기하고 있는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그 외에는 모두 만족한다.

 

 

 


 

 

메리 스튜어트.

이 책도 협찬(?)을 받은 책이다. 협찬해주신 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 책에 대한 평가는 이 책을 어떤 장르로 볼 것인가, 에 달린 것 같다. 만약에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본다면, 이 책에는 후하게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고증이 잘못된 부분이 보인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가장 무리수를 둔 것은 엘리자베스의 성격을 그녀의 처녀성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단정한다. 엘리자베스가 이러한 성격이 된 것은 그녀가 '원치않는' 처녀가 된 것 때문이다, 라고. 그래서 거기에 대한 대비로 메리 스튜어트를 가져온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실제로 '그러'하다고 볼 만한 근거는 희박한 것이 현실이다. 이와 비슷한 오류는 이전의 마리 앙투아네트 평전, 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책을 문학작품으로 본다면 이 책 이상으로 훌륭한 문학 작품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유려한 문장은 그야말로 가슴을 찌르고 온몸을 전율시킨다. 결국 평전이지만 이 책은 문학작품에 더 가까운 책으로 보아야 책의 진수를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슈테판 츠바이크의 저런 접근, 엘리자베스와 메리 스튜어트의 대비가 단점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두 여왕의 상대되는 부분을 대비시켜 빛과 그림자를 더욱 선명히 보이는 수법은 슈테판 츠바이크만이 구사할 수 있는 방법이리라. 

 

 

 

카사노바 자서전.

사실 이 책 때문에 겨우 접속하고는 글을 끄적거린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이제야 읽게 되다니. 절판이 된 것이 정말 아쉽지만 아직 전자책으로는 판매를 하는 모양이다. (난 전자책으로 읽고 있다.) 카사노바에 대해서 우리는 바람둥이, 호색한 정도의 이미지 정도만 가지고 있지만, 이 책은 그런 카사노바에 대하여 심층적인 이해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카사노바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번역을 한 것 같은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책은 완역은 아닌 것 같다. 그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 일단 카사노바의 회고록은 12권으로 알고 있다. 책 한권으로 완역하기에는 조금 힘들 것이다. 두 번째는 각 장의 마무리에 역자가 끼어들어 카사노바의 행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분명 카사노바가 말을 안할 리 없는 (그가 정말 사랑했던 앙리에타라거나, C.C에 대한 사랑) 부분을 짧게 요약을 하니 완역본이 아니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완역본의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한길사에서 출판된 카사노바, 나의 편력도 함께 읽어야 할 것이다. 일부를 비교해보니 두 책은 같은 책을 번역한 것이라 여겨지기에 좋은 보완재 역할을 서로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하여 호색한의 이미지 뿐만 아니라 지적인 카사노바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여담인데 성적인 묘사가 상당히 야하다. (진짜다. 그다지 노골적이지도 않는데 너도 알잖아? 하면서 뭉그적 거리는 카사노바의 서술은 괜스레 얼굴을 붉히게 만든다. 역시 상상의 힘이란..) 그러나 의외로 그다지 민망한 기분은 들지 않는다, 풋.

 

 


 

 

p. s. 슈퍼스타 K의 김나영 장원기 street life는 정말 좋은 노래같다. 지금까지 굳이 슈스케를 밤마다 찾아서 보지는 않았는데, 재방송을 멍하니 보다가 저 노래를 듣고는 계속 챙겨보았다. 이 기세대로라면 노래만 친다면 장원기가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가 아닐까? 하지만 슈퍼스타 K는 노래 뿐만이 아니라 상품성도 우승후보에 상당히 영향을 미치기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달까. 아.. 나도 슈스케 나가보고 싶다...는 1차예선탈락일 가능성이 높겠지... 푸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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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0-04 01:33   좋아요 0 | URL
괴물이라고 하니 조금 무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냥 요괴라고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지금도 요괴를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만들어낸 많은 신도 요괴에 들어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요괴보다는 조금 위로 생각해주겠지요

삼십육계는 모두 서른여섯 권이군요 그리고 이것이 여섯 '계'로 나뉘어 있군요 잘 보니 계마다 지은이가 다르군요 자세히 안 봤으면 그냥 넘어갈 뻔했네요 그저 승전계만 봐도 될 것을...^^

티베트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중국 때문에 여러가지로 힘들다는, 그저 그것만 알고 있습니다 라디오에서 어떤 분이 슈테판 츠바이크 글이 참 좋다고 하더군요 저는 아직까지 한권도 못 읽어봤는데, 그것보다는 글이 좋은 게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더 봐왔기 때문에... 읽어보면 조금은 알 수 있을까요

카사노바라...^^
슈퍼스타 K는 한번도 본 적 없어요(텔레비전을 거의 안 봅니다) 가연 님이 나오면 볼게요^^


희선

가연 2013-10-07 12:03   좋아요 0 | URL
삼십육계는 천천히 다 읽어보려고 생각중입니다.. 재미있어요, 풋.

아하하.. 슈퍼스타 K는 나가면 광탈이 뻔하겠지요...

웽스북스 2013-10-04 21:07   좋아요 0 | URL
저는 슈스케에 나오는 가연님을 보고 싶네요. 훗훗.

제가 안좋은 추억이 있는데.. <카사노바 나의 편력>을 다루는 TV 책을 말하다, 에 방청을 갔었거든요. 근데 급 인터뷰를 하게 되고, 급 이상하게 편집당해서 (나는 카사노바를 만나고 싶다.. 뭐 이런 말만 쏙 잘라서 ㅠㅠ) 그래서 저 책에는 트라우마가 있어서 안읽었는데.... 가연님 글에서 보니 반갑네요. 으헷.

가연 2013-10-07 12:00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이렇게 바람을 넣으시면 진짜로 나갈지도 모르겠... 아하하하하

저런.. 편집을 그렇게 하다니, 너무하네요.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
로버트 트리버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살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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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한 때 난 황우석 박사를 매우 좋아했었다. 어쩌면 소위 말하는 황빠, 라는 범주에 조금이나마 발을 걸치고 있었던 것 같다. 모두가 알다시피 황우석 박사는 서울대 수의대의 교수였었고, 젖소 영롱이로 그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렇게 체세포 복제를 통하여 영롱이를 만들어낸 황우석 박사는 인간 체세포를 이용한 배아줄기세포에 도전하며 우리나라의 과학계에 한줄기 빛을 던져주었다. 당시 침체된 우리나라의 분위기에서 세계 유수의 과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과학자가 나왔다니, 그 당시 나는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드디어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타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겠구나, 라며. 황우석 박사가 그의 배아줄기세포 관련 논문을 실은 사이언스지는 매우 유명한 학술지이다. 굳이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이런 사이언스지 등의 학술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노벨상을 탈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게다가 논문의 내용은 여간한 논문들과는 실용성 측면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내용이었으니 (줄기세포의 복제는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나는 그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는 그때 미쳐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대한민국이 그에게 모두 미쳐있었다.

 

하지만 보름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황우석 박사는 그의 절정에 있을 때 동시에 몰락을 준비했다. 2005년, PD수첩은 황우석 박사 연구팀의 난자 채취과정이 비윤리적이라는 내용의 방송을 내보내었다. 그 방송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최고의 과학자의 연구를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욕을 매우 많이 먹었고, MBC당국에서조차 PD를 경질시키는 동시에 대국민사과를 방송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 또한 당시에는 PD수첩이 말도 안 된다고 여겼다. 말도 안 돼, 감히 황우석을 건드려? 그래, 꼭 이런 기분이었달까. 물론 지금 와서 판단해볼 때,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때 일을 떠올려보면 정말 부끄러울 따름이다. 굳이 한 가지 다행이라면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도 황우석에 대한 옹호글을 올리지 않았다는 점 정도이려나. 황우석 박사의 쇼는 결국 미즈메디 노성일 원장의 폭탄발표로 끝이 나고야 말았다. 체세포 줄기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그 다음에는 솔직히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아니, 잊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PD수첩 2차 보도는 보는 둥 마는 둥했었고 서울대에서 자체 조사한 결과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서울대에서 자체 조사한 결과는 더 충격이었다. 앞서 말한 영롱이마저도 아무런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 복제를 통해서 만들어진 소인지, 아니면 어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인지. 정말 눈을 돌리고 싶었고 그리고 정말로 눈을 돌렸다. 다만 내 머릿속에 끝까지 남은 것은 그나마 황우석 박사의 줄기 세포 일부가 처녀생식으로 발생되었다고 추측된다는 것. 그래, 황우석 박사가 완전히 거짓말은 한 것은 아니야, 정말 아깝다, 처녀 생식도 정말 대단한 발견인데, 그걸 그대로 말하지 않고, 왜 이렇게 부담감에 시달려서 거짓 논문을 썼을까, 라고 나는 계속 되뇌었던 것 같다.

 

프레시안 북리뷰에 보면 당시에 진중권이 황우석 지지자들에게 공격을 받았던 사건에 대해서 (진중권은 황우석 지지자들 때문에 감금당했다) 이렇게 말했다. 일부를 인용해보겠다.

 

내가 진짜 상처를 받은 것은 그때가 아니라 훨씬 전이었다. 거의 모든 국민이 황우석을 신봉하고, MBC의 광고를 끊어버리고, 황우석 비판자들에게 집단적으로 언어적 폭력을 가하던 상황. 솔직히 그때 무서웠다...(중략)... 왠만한 욕에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나지만 그때 퍼부어진 욕은 내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중권은 하나의 사례를 들며 이런 의문을 던진다.

 

우리 프로그램의 청취자 게시판에 올라온 욕설 중에는 나와 절친했던 학교 후배가 제 실명을 걸고 써놓은 것도 있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갑자기 이상해진 것일까?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 주변의 사람들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이 갑자기 이상해진 것일까? 이 질문에 나는 오랫동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몇 년 전에야 겨우 대답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대답이 늦어진 이유는 간단하다. 나 또한 ‘이상한’ 사람들 속에 속해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험은 나에게 어떠한 우상도 만들지 말라, 라는 교훈을 전해주었다. 결국 이런 말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감정적으로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A라는 글에 대해서 읽었다고 하자. 그 후에 A에 대하여 찬성, 혹은 반대의 의견을 내놓으라고 요청받아서 의견을 내놓았다고 가정한다면, 나의 그 의견, 찬성이든 반대든 그 의견은 정말 그 글로만 판단되어진 의견일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A를 쓴 사람에 대한 편견이 먼저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A를 쓴 사람을 좋아한다면 설령 이상한 내용일지라도 이해해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읽는 둥 마는 둥 하며 이 글은 이상한 글이다, 라고 단정 지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 어느 쪽도 옳은 것이 아니다. 편견이라는 말에 대하여 오해할 수 있는데, 편견은 단순히 그 사람의 첫인상 이런 것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편견을 가질 수도 있다. 풍문으로 듣든, 이름으로 판단하든. 거짓말 같은가? 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있다. 그리고 이미 결론을 내린 사람들에게는 어떤 증거를 가져다주어도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의견만 더 강화하게 된다. (굳이 사족을 달자면 이를 확증 편향이라고 일컫는다.)

 

자, 이런 것들을 깨달았으니 나는 과연 완전히 저런 편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나는 내가 제법 객관적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왜? 황우석 사건을 거치며 나는 어떠한 우상이라도 내 손으로 때려부수겠다고 마음먹었으며, 어떠한 주장도 객관적 근거가 없이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그래서 어떠한 것이라도 내 머리로 직접 생각하면서 판단할거라고 마음먹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마음 자체 또한 일종의 편향, 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그러니까 자기를 과신하는 그런 기만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나는 가수다, 라는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나는 가수다, 에 얽힌 논란도 황우석 사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나는 가수다, 에 얽힌 논란은 절대치로 비교하자면 황우석 사건에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사람들이 집단으로 기만에 빠졌다, 라는 점에서는 인식에 거의 비슷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나는 가수다, 는 MBC에서 여러 가수들, 특히나 재야에 묻혀 있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이 점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정말로 노래를 잘 부르는 그런 가수들을 초빙해서 경연을 붙여서 한 명을 탈락시키는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가수다, 는 정말 사람들의 환상을 꼭 채워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떤 환상인가? 방금 나는 재야에 묻힌, 에 강조점을 두었다. 바로 그 점이다. 재야에 묻혀있지만 실제로는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가수들이 나온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혹은 보물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 남에게 은근슬쩍이나마 알리고 싶어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 혼자서만 갖고 있고 싶다. 나는 가수다, 는 바로 이 환상에 절묘하게 부합되었다. 예를 들어 임재범을 보자. 임재범은 나는 가수다, 출연 전에는 거의 방송출연이 많지 않았고, 그래서 가끔 노래방에서 제일 여자들이 싫어하는 노래 1위인 고해, 정도로 인구에 회자될 뿐이었다. 물론 나는, 그리고 여러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임재범이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을. 박정현과 함께 부른 사랑보다 깊은 상처, 는 정말 말이 필요없는 노래였었다. 하지만 방송에 출현하지 않으면 그 어느 누구든 전설, 이라는 이름 아래 잊혀져 갈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의 욕망과 나는 가수다, 의 욕망은 서로 만난다. 나는 임재범이 정말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임을 알고 있고, 그의 노래 실력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동시에 이대로 전설의 이름으로 더 이상 대중앞에 나타나지를 않았더라도 그 또한 아주 섭섭하게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혹시나 우리나라의 가수들 중 가창력 1위에 대한 잡담을 할 때 남들이 거의 다 잊어버린 임재범의 이름을 당당히 말할 것이다. ‘야, 니들은 모르지? 임재범이 얼마나 뛰어난 가창력을 가진 가수였는지를.’ 그리고 난 뿌듯함을 느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심정을 공중파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이 나는 가수다, 라는 프로그램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임재범이 실제로 나는 가수다, 에 나와서 너를 위해, 그리고 여러분, 을 열창했을 때 그는 눈물을 흘렸고 나도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임재범이 좋았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임재범의 갑작스러운 하차 선언으로 인하여 갈 곳을 잃고 방황하고 만다. 그리고 임재범의 대타로 들어온 것은 옥주현이었다. 여기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옥주현이 과연 나는 가수다, 의 전설들 사이에 있을 자격이 있느냐, 에서부터 시작해서 여기에는 큰 음모가 있다, PD와 방송국 전체가 임재범을 몰아내려고 했다, 등의 음모론으로 발전해나갔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옥주현의 관객반응 중 일부를 다른 가수의 노래를 들을때의 관객반응을 가져와 편집한 것이 드러나면서 나는 가수다, 홈페이지의 게시판은 터져나갔다. 그 게시판만 터져나갔던 것이 아니라 모든 인터넷 게시판이 터져나갔던 것 같다. 나도 생전 들르지 않았던 방송 프로그램의 홈페이지를 새로고침하면서 사람들의 댓글을 읽었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스포일러, 그러니까 후기를 알기 위하여 (나는 가수다, 는 선행 녹화 후 방영이기에 노래를 들으러 갔었던 방청객들이 스포일러를 남길 수 있었다.) 인터넷을 밤새도록 새로고침하면서 뒤졌던 기억이 난다. 옥주현을 비판(혹은 비난)하는 글은 추천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옥주현이 전조(곡의 코드를 변화시키는 것)를 했다는 기사가 뜨면 함께 출연하던 조관우를 언급하면서 옥주현이 한 번 전조를 하면 조관우는 전조를 자유자재로 한다, 고 글을 쓰던 사람도 있었다. 옥주현이 오케스트라를 요구했었다, 라는 말들도 널리 퍼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우석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도 글을 올리지 않은 것 정도다.

 

바로 몇 년전에 황우석 사건을 겪었었는데 겨우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나는 완전히 황우석 사건을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사실 지금 와서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옥주현 입장에서는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황우석 사건을 겪고 나는 내 머리로 모든 것을 생각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나는 가수다, 논란을 보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부분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애초에 내 마음 속에선 결론이 나있었다. 임재범이 없는데 옥주현이 들어왔네? 감히 임재범의 자리에 옥주현이 들어와? 빨리 임재범 다시 데려와, 라고. 이미 이렇게 결론이 나있는 이상 옥주현이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만 쫓아 글을 읽었을 것이다. 누가 어떠한 증거를 내밀더라도 나는 그것을 보고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이렇게 두 번의 사건을 겪으니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크게 신뢰를 가지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강렬한 감정에 휩쓸리면 또 비이성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지 않을까?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텐데, 분명 기회가 다시 생긴다면 갑자기 돌변할 텐데. 결국 내가 스스로 객관적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과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객관적 관점에서 사태를 보려고 노력하지만 언제나 객관적이기 어렵다. 나도 그렇지만 상대방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 또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쇠귀에 경 읽기가 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그러다보니 나는 내 논지에 대해서 방어적으로 전개해나간다. 너를 공격은 안할 테니까, 나도 공격은 하지 말아줘, 라는 생각이라도 가진 것처럼. 결국 항상 사람은 이렇게 자기를 기만하고, 누구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늪에 빠지게 되는 게 아닐까? 그게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걷게 되는 길이 아닐까? 이런 길은 결국 절망만 남기게 된다. 어차피 이해 못할 거라면 그냥 내 의견과 비슷한 사람들로만 내 주위를 채우면 모두가 좋은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기어코 나의 지옥은 상대방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게 될 테니까.

 

그렇게 궁리하던 나에게 찾아온 것이 바로 이 책,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이다. 책 내용은 지금까지 내가 말해온 저 사례들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다. 기만, 편향, 과신. 나는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대하여 스스로를 기만하였고, 황우석 지지자들의 집단을 일종의 내집단으로 판단하여, 거기에 비판을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외집단으로 판단하면서 침묵으로 대응하였던 것 같다. 무슨 증거가 나오더라도 지지쪽으로 의견이 편향되었고, 그 사태가 모두 끝난뒤에는 쓸데없는 과신, 절대로 이런 일을 다시 겪지 않을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믿음마저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그대로 나는 과정을 밟아나갔다. 이런 자기기만은 왜 생겼던 것일까? 결국 이야기는 간단하다. 이 책에 따르면 나는 진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진실을 받아들이면 나의 인지에서는 부하가 걸리게 되고, 그런 부하를 생물학적으로 겪고 싶지 않아서 환상을 지어낸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리라.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특히 생물학적인 연구를 언급한 장인데, 여기에서 나는 이런 기만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연구인데, 최근 연구 결과에서 의식은 도리어 일종의 관찰자에 더 가까운 위치를 차지한다고 한다. 책에서 언급한 연구는 이런 것이다. 어떤 운동을 할 때 fMRI를 통하여 뇌의 부분의 활성화가 되는 것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은 의식적인 부분이 활성화되기 이전부터, 그러니까 운동을 해야겠다, 라는 의식을 가지기 이전부터 이미 운동에 쓰이는 부분이 활성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풀어서 쓰면 이런 말이다. 내가 운동해야지, 하기 전부터 이미 몸은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현대 과학의 결론이다. 그런데 이게 말이 되는가? 내가 어떠한 의지를 가지기도 전인데 먼저 몸이 먼저 운동을 준비한다니. 보통 우리는 의식을 가진 뒤에야 운동이 발현되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론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이미 그런 명령이 먼저 내려진 뒤에 의식은 그걸 지켜볼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이런 질문을 동반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가질 수 없는가?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가지지 못한다면 저런 기만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영영 없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더 선호하는 그런 표상들에게 휩쓸릴 것이다, 영원히.

 

하지만 현대 과학은 그런 부정적인 결론만 우리에게 안겨주지는 않는다. 의식은 비록 관찰자이지만, 우리가 그럴 의식만 있다면 절대적 권리를 가진 관찰자이다. 적어도 어떤 행동이 있기 10초 전부터 무의식적인 단초, 책의 말을 빌리자면 의식과 행동 자체를 빚어낼 신경 신호가 가 나타난다고 하면, 이 신호는 행동이 시작되기 10분의 1초 전까지 중단되어질 수 있다. 무엇을 통해서? 바로 우리의 의식이 그 역할을 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거부하고자 하는 의식만 있으면 언제든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을 좀 더 크게 확대해보자. 나를 어떤 집단으로 확대하고, 의식을 집단 내에서 중의를 모으는 것으로 말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반대하는 사람을, 반대하는 의견을 배척하지 말라, 다양한 의견을 허용하라. 물론 이런 집단은 인간과 달라서, 설령 집단의 일부가 그런 의견을 중지한다고 마치 의식처럼 닥터스톱, 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배척하지만 않아도 큰 소득이 된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부분이 하나 있다. 글쎄, 이런게 또 다른 기만의 단초가 되면 어쩌지? 이런 이야기처럼 말이다 : 내가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다른 몇 명은 제대로 길을 걷고 있겠지, 뭐 양심은 그 사람들에게 맡겨두자, 나는 일단 다수의 편에 있어보겠다, 잘 안되면 그 사람들 편으로 돌아서면 되는 것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p. s. 여담인데, 이 책은 상반기에 읽은 책 중에서 최고의 책이다.

p. s. 2 프라이머리의 입장정리, 를 들으며..

p. s. 3 사실 이 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쓰여질 수도 있었다. 무한도전의 노홍철을 중심으로.. 내가 또 무한도전의 광팬이라서, 아니 글 내용을 좀 구상했었던 아이디어가 아까워 이렇게 몇 자 붙인다,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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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9-26 01:27   좋아요 0 | URL
올해 읽은 것 가운데 최고의 책이군요

자기 자신도 믿을 게 못 되기도 합니다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또한 가연 님이 한 말처럼 자신은 벌써 결론을 내려놓고 있기도 하지요 그러니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한테도,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한테도 늘 자기 마음을 열어두어야 해요 이런 말을 하고 있지만 저도 잘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하려고요^^

마음을 진정시키고 모두 내려놓기... 사실 이 말은 어떻게 하면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해 말하면서 한 것입니다 그래도 황우석 박사 일이나 임재범이 나는 가수다에 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도 그런 식으로 한다면 훨씬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조금 억지가 있는 걸까요

마음을 진정시키면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무엇이든...

이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늘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희선

가연 2013-09-26 20:10   좋아요 0 | URL
네, 일단 오늘까지는 최고의 책인 것 같아요. 특히 생리학에 대해서 설명해놓은 부분을 읽는게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옛날에 배우던 기억도 갑자기 떠오르기도 하고... 배울땐 그렇게 지겨웠었는데 말이죠, 하하하하하.

마음을 열어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그리고 내려놓는것은 더 어려운 일이지요. 무엇보다도 정말 다 내려놓을 수 있다면 여기 인간세상에 살기 어렵지 않을까..

마립간 2013-09-26 12:38   좋아요 0 | URL
저는 우선 가연님을 제가 신뢰하는 그룹의 사람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의지'는 제가 인지과학에서 남겨둔 마지막? 퍼즐입니다.

가연 2013-09-26 20:12   좋아요 0 | URL
아하하.. 신뢰하는 그룹은... 감사합니다만 넷상은 위험하니까 좀더 지켜봐주심이...ㅠㅠㅠ

그렇죠. 사실 궁금한 점이 많은 부분입니다, 의지에 관한 문제는.

드림모노로그 2013-09-30 09:53   좋아요 0 | URL
하하하 ~ 가연님께서 말씀해주신 과거의 일과 묘하게 감정의 교집합이 생기네요 ㅎㅎ
황우석 사태는 정말 , 대단했죠...^^
그리고 임재범은... 저도 무척 좋아하는 가수라, 가연님의 생각하셨던 그 마음이 그대로 이해가 되네요 ㅎㅎ.....
집단주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문제시 되는 부분이라고 심리학자들이 대부분 지적하는 부분이죠..전 혼자 노는 것을 좋아라 하는 부류이기 때문에 하하~
비가 와서 처지던 기분에 가연님의 글을 읽으면서 괜시리 즐거워지네요 ^&^
즐겁게 읽고 갑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세요 ^^

가연 2013-10-03 20:57   좋아요 0 | URL
어허허.. 오랜만입니다. 답이 많이 늦었습니다. 곧 태풍이 올라온다던데, 비가 또 오겠죠?

2013-10-01 0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03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폭력의 자유]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폭력의 자유.

 

  글을 읽을 때 여러 가지 당혹스러운 경험을 겪을 때가 많지만, 특히 당혹스러울 때는 다음과 같은 경우입니다. 자기 자신의 글을 참고 자료로 사용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인데, 예를 들자면 ‘나는 이것에 대해서 이러이러하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내가 쓴 이 글을 보면 알 것이다.’ 와 같은 것 말입니다. 이전에 쓴 그 글은 그저 본인 스스로의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글의 객관성을 자신이 어떻게 담보하겠습니까?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과거의 자신의 글을 사용하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지요. 객관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는 단순히 어떤 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책도 마찬가지이고, 당연히 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주장을 내세우는 글들은 그 글이 내세우는 근거가 객관적이지 않으면 안 되리라 봅니다. 그래서 이 책 ‘폭력의 자유’의 첫 장을 넘겼을 때 이런 부분에 대한 걱정이 사실 많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수십 년 동안 보고 들은 사실들을 개인적 시각으로 적었다.’ 라고. 그리고 동시에 이를 ‘자전적 에세이’ 로 여겨달라는 부연을 덧붙이지만 이는 책 자체의 관점을 하나로 한정시켜버리며 이런 모습으로도 여겨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적은 사례는 내가 직접 발로 뛰면서 겪은 사례들이다. (직접 내 눈으로, 발로 확인한 일들이기에 잘못된 일은 없다.)’

 

물론 직접 겪은 사람의 관점이 하나의 사실을 보는데 가장 좋은 관점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주의해야만 합니다. 이는 자신의 관점만을 절대화하는 그런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해방 전후부터 살아온 분이 있다고 합시다. 그분에게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정말 생생하게 들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이 말하는 것들을 모두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뇌는 우리를 속일 수 있습니다. 겪은 일이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틀에 맞춰서 바뀔 수 있고, 바뀌지 않더라도 그 틀의 영향에서는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생생하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주변의 다른 자료와 비교하면서 검증하는 작업을 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폭력의 자유, 라는 책은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종철은 분명 한국 근현대사의 언론의 발전에 있어서 발로 뛰면서 사회 상황에 조금이라도 진보를 가져오려고 노력한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자신의 경험을 발전시켜서 생생한 그림을 그리며 한국 언론사를 조명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생생함은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어느 정도는 한국 현대 언론사에 대하여 하나의 관점을 형성하도록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하나의 관점, 이라는 것은 저자의 관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저자는 보수 기득권 언론과 맞서서 싸워온 이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그의 관점은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진보쪽이겠지요. 소위 말하는 보수적 스탠스를 가진 언론들, 조선, 중앙, 동아, 의 왜곡과 그에 대항하면서 자라온 한겨레, 경향과 같은 신문들의 발전사, 와 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 관점을 우리는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요? 처음부터 보수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아무리 조선, 중앙, 동아의 왜곡에 대하여 이야기하더라도 전혀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 책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생각을 더 강화하는데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책의 구성을 조금 살펴보면 이 책의 저자가 대략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책을 읽지 않더라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차례에 보면 1부부터 9부까지 되어있는데, 저자가 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한 부분이 눈에 쉽게 들어옵니다. 그 부분은 바로 3부와 9부인데, 3부는 박정희 시대 언론과 권력, 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며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9부의 제목은 이명박 시대 보수 언론 공기인가, 흉기인가, 인데 이는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이 3부와 9부는 쪽수로만 따져도 100쪽이 넘습니다. 다른 부분은 20쪽에서 50쪽 정도인 것에 비하면 정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이는 동시에 저자가 가장 한국 언론사에서 문제가 있었던 때라고 여기는 시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와 이명박 전 대통령 시대, 라는 말이 됩니다. 할 말이 없고, 사건이 없는데 뭐 하러 쪽수를 많이 배정하겠습니까? 아니 처음부터 쪽수를 배정하고 쓰지는 않았겠지요. 하고 싶은 말들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쪽수가 길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각 부의 장의 내용을 읽어보면 저자가 특히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각 부는 시대 순으로 배열되어있고, 해방 이후에서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의 언론사를 적어두었는데, 처음에는 각 장의 제목으로 자주 등장하던 단어가 뒤로 갈수록 등장하지 않는가 하면, 처음에는 별로 등장하지 않던 단어가 뒤로 갈수록 자주 등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9부에 속한 장들의 일부를 적어보겠습니다. 5장 방송 연대파업, 6장 멀고도 험한 방송 민주화, 7장 연합뉴스의 파업, 8장 거대 교회 권력의 싸움, 9장 노조의 투쟁. 얼핏 읽어봐도 싸움, 투쟁, 파업이라는 단어가 눈에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투쟁과 파업은 이전 장들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는 단어는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이전 시대들에서 이 책의 저자가 뽑은 단어들은 재갈 물리다, 쫓겨나다, 등의 단어였지요. 여기서 우리는 처음 해방 전후 공간에서는 일제와 미군정에 대한 반발이 있었고, 독재 시대에서도 독재에 대한 반발이 있었지만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언론사 자체에 대한 반발이 강해졌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이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언론은 그동안 정말 많은 부침을 겪었었지만,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와 이명박 전 대통령 시대에 많은 위기를 겪었다. 박정희 시대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 라는 구체적 외부의 적이 존재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외부의 적에 가려졌었던 보수적 언론사 권력, 이 진정한 적으로 대두되었다. 그리고 이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싸움, 투쟁, 파업과 같은 수단이 쓰인다. 가 되겠지요. 이에 대하여 저자는 직접 책에서 말합니다. ‘그동안 언론과 정치는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단순한 유착을 넘어 밀월 관계에 이르렀다’ 고 말입니다. 박정희 시대에서의 언론을 떠올려보면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뒤의 유착을 넘어 밀월에 이르렀다, 라는 부분은 잘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유착이면 유착이지, 왜 밀월일까요? 이 책에서는 거기에 대한 설명을 독재가 해소된 뒤의 대통령들의 정책들에서 찾습니다. 독재 시대에서부터 유착과 굴종을 통하여 이미 자본과 자산을 축적한 언론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잃기가 싫은 법, 자본을 가진 사람은 그 자본을 굴려서 더욱 더 큰 자본을 이루어냅니다. 이런 스노우볼링Snowballing은 때마침 찾아온 정부, 특히 이명박 전 대통령의 언론법 개정 등을 통하여 산사태처럼 부풀어집니다.

 

하지만 이는 이 책의 관점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은 소위 말하는 진보 세력을 결집시키고, 보수에 대한 어떤 감정을 증폭시키는 데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이 언론이 정말로 객관적으로 모두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가, 에 대한 답은 도출해내기 어렵습니다. 쉽게 말해서, 상대방이 설령 극우나 극좌라도 포용해낼 수 있는 그런 관점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저자 본인은 뒤에 루퍼트 머독이라던가, 위키리크스에 대한 이야기를 끝에 덧붙였지만, 그런 사례들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더라도 사실 진정한 해답은 되지 못합니다. 대안언론? 사실 우리나라에는 소위 말하는 대안언론들이 정말 많습니다. 인터넷이 우리나라만큼 발전한 곳도 드물지요. 인터넷의 발달덕분에 수많은 언론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언론 자체의 기능에 순수하게 충족시키는가, 에 대한 물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이런 진보, 보수 틀을 넘어서야만 할까요? 방금 상대방이 설령 극우나 극좌라도 포용하여야 한다고 말했는데 사실 이는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극단에 사로잡힌 사람을 어떻게 중간 쪽으로 데려오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에 대한 해답을 김기협이 쓴 해방일기, 에서 가져오고자 합니다. 해방일기에서 보면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분단의 원인을 우리 내부에서 찾으며, 역시 우리 민족은 이렇게 싸움을 좋아하는구나, 라고 좌절을 하는 경우가 많다’ 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실제로 분단이 일어난 것은 외부의 원인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틀이 거대 보수화된 언론 권력, 그리고 정치 권력과 이에 대응이 되는 진보적 색채의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언론들의 대결 구도로 나타난다면, 이 틀이 우리를 데려다주는 곳은 변증법적인 결론일 뿐입니다. 하지만 언론 자체의 속성을 분석하여 그 속의 한계를 이끌어낸다면, 그리하여 이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담론을 가져온다면 책에서 드러난 진보, 보수 대결구도에서 언론 자체의 속성과 그 외의 것들의 구도로 바뀌게 됩니다. 이는 공통의 적이 생기면 뭉치게 되는 원리와 같습니다.

 

언론의 한계라는 말은 사실 당황스러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론은 분명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발행되기 위해서는 사업체로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업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적 질서에 어쩔 수 없이 편입한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느끼는 공간들인 트위터, 페이스북, 이들 모두 사업체입니다. 결국 돈을 벌기 위해서 광고를 달고, 이용자들이 많이 찾아줄수록 수익이 되는 시스템입니다. 조정환이 쓴 인지자본주의, 에서는 ‘그런 공장의 컨테이너를 탈취하여 사용한다’ 는 개념이 나왔었지만 이는 그나마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인터넷에서나 가능한 일이며, 일방향으로 전파가 되는 신문과 방송에서는 힘든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업체라면 수입을 내야 되는데, 광고수입을 포기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그 광고는 기업체들이 싣습니다. 언론으로써는 이를 외면하기가 어렵겠지요. 게다가 사업체라면 혼자 운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 또한 한계입니다. 현장에 나가있는 기자와 편집하는 사람의 의견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도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언론이 대중을 생각한다면 그들 자신을 철저히 비워야 하겠지요,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러면 인터넷에서 계속 대안언론을 해나가면 그런 한계를 없앨 수 있지 않은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지만, 이는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찻잔 속의 태풍’ 이라는 벽에 말입니다. 인터넷에서 정말 큰 이슈가 되더라도 그 이슈가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니죠, 오히려 반대입니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인터넷 실제 검색어에 오르내리는 겁니다. 실제 방송에서도 ‘오늘의 검색어’ 라면서 인터넷 검색어들을 소개하면서 네티즌 의견을 소개할 때도 있지만, 그건 그야말로 한계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방송이나 신문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네티즌 의견을 뽑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한계점을 언론은 분명 가지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한계를 없애기에는 사실 현재 언론 구조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니 이 책, 폭력의 자유, 의 첫머리, 해방 전후의 언론사에서도 드러나듯이 뿌리가 매우 깊기 때문입니다. 한 번 굽힌 사람은 두 번 굽히기 쉽습니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 이미 언론들은 심한 탄압을 받고 그들의 몸을 굽혔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싹튼 모순들은 지금에 이르러 도저히 메울 수 없을 정도로 커졌습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파업, 투쟁, 싸움으로는 뿌리를 뽑기 어려울 정도로.

 

그렇다면 우리는 이에 대하여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저는 그 대안으로 협동조합을 들고 싶습니다. 기존의 진보적 색채를 가진 언론이든, 보수적 색채를 가진 언론이든, 그런 언론들 모두를 옆으로 제쳐두고는 새롭게 협동조합으로 시작하는 언론을 만드는 것입니다. 진보, 보수의 간극은 깊고 넓지만, 서로의 편의 증대, 라는 협동조합의 목적 아래에서는 분명 같이 활동을 할 수 있는 길이 존재할 것입니다. 사업체라면, 그래서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할 수 밖에 없다면 어렵겠지만 말입니다. 물론 현재 언론 중 진보적 색채를 가진 매체인 프레시안의 경우에는 협동조합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혼자 협동조합으로 활동한다고 해서 특별히 언론의 문제점들이 해소되거나 하기는 어려우리라고 보며, 인터넷 기반과 진보적 색채 자체 또한 언론의 한계를 극복하기에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간의 대립에서 벗어나 협동조합으로 이뤄진 언론이 한 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가 동시에 발전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도 중요하겠지요. 지금 언론이 가지고 있는 여러 모순들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전망을 해봅니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 사실 책의 제목에 대해서 갸웃거렸습니다. 폭력의 자유, 라는 제목은 폭력과 자유, 도 아니며 폭력은 자유, 도 아닙니다. 두 명사가 전혀 맥락에 맞지 않게 위치되어있습니다. 폭력을 휘두르면서 자유를 얻는다, 라는 뜻은 아닐 것 같고, 한국 현대 언론사를 설명하는 두 가지 키워드인 폭력, 그리고 자유, 그러나 그 두 개를 합쳐놓으니 저자가 어떤 반어적 효과를 노린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무엇인지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그런 제목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이해가 갔습니다. 이는 반성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엔 진보적 언론과 보수적 세력의 구도가 전체적으로 드러나지만, 거기에 앞서 언론 자체에 대한 자성이 깔려있습니다. 언론인들이 가지고 있는 펜은 무한히 날카롭습니다. 그 펜으로 누구를 사회적으로 말살할 수 있기도 하며, 어떤 후보를 밀어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폭력, 입니다. 그리고 그 폭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자유, 를 언론인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유는 허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언론인들은 자신의 펜을 움직일 때 항상 그 점을 유의해야만 할 것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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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9-24 23:09   좋아요 0 | URL
역시 가연님 글이 좋습니다. 협동조합으로 언론사를 만든다는 건 생각을 못해봤네요. (아..프레시안도 그런 거였군요.) 확실히 언론도 경제구조하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군요. (하기는 예전에 누군가가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건 돈이 나오는 구멍이다,라고 하더군요.)


가연 2013-09-25 09:40   좋아요 0 | URL
ㅠㅠㅠ 부끄럽습니다. 아직 다른 한 권 읽고 있는 중이라 다른 분들의 글은 구경도 못했네요. 맥거핀님께서는 다 읽으셨나요? 협동 조합은 여러 가능성이 있을 듯 하여 이렇게 언론쪽에도 붙여보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써놓고 뭔가 좀 부족한 느낌을 자꾸 받는 중입니다.

희선 2013-09-25 00:35   좋아요 0 | URL
진보와 보수의 틀을 넘고 언론의 한계를 넘어서, 제목이 좋군요 정말 이렇게 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느 한쪽에 마음이 치우쳐 있다 할지라도 다른 것도 괜찮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마음을 열어둔다면 좋을 텐데요 이것은 언론만 그런 것은 아니기도 하군요 사람이 살아가면서도 그렇게 해야 하죠

협동조합으로 시작하는 언론, 좋겠군요 어떤 식으로 해나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로 달라도 말을 나누다 보면 좋은 것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론인들은 정말 펜을 마음껏 휘두르면 안 됩니다 언론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누군가를 공격하는 데 글을 이용하면 안 돼요


희선

가연 2013-09-25 09:43   좋아요 0 | URL
아하하.. 협동조합의 원리를 보고 나름 머리를 굴려 찾아본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쫌 찜찜하달까, 뭔가 부족하달까. 평가단 다른 한 권이 기만에 관한 책인데, 편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그리고 편향된 것을 고치기 정말 어렵다, 라고도 이야기하고... 그래서 더 찜찜한 것 같아요. 마지막 말씀에 일부 동의합니다만 분명 비판은 있어야 할 듯 합니다.

마립간 2013-09-25 08:29   좋아요 0 | URL
자기 자신의 글을 참고 자료로 사용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인데, 예를 들자면 ‘나는 이것에 대해서 이러이러하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내가 쓴 이 글을 보면 알 것이다.

위 글은 제게 해당되는 것 같아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요. 객관성을 담보하기 보다, 생각의 일관성 및 현재 생각이 있게 된 근거되는 과거 생각의 서술로 봐야하지 않을까요?

가연 2013-09-25 09:38   좋아요 0 | URL
음.. 오해를 살 것 같아서 해명을 합니다. 확실히 마립간님께서 여기 서재에서 댓글을 다실때 예전 글들을 같이 읽어보라고 보여주시는 경우가 있었었지요. 그런데 그런 예전 글들을 마립간님께서 참고 자료라고 생각하시고 쓰셨던 거라면.. 분명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하리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댓글을 읽으면서 받아들였던 것은 참고자료라기 보다는 (사실 이런 블로그 등의 댓글에서 분명한 참고자료를 제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말씀하신대로 생각의 궤적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서두에 저 글을 쓴 것은 첫 문단의 아래쪽에도 보듯, 적어도 책으로, 그리고 부제로 현대언론사, 라고 이름을 붙여놓았다면 그런 저자 자신의 시각은 어느 정도는 배제하여야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적어놓은 것입니다. 이 제가 쓴 글에는 빠져있지만 이 책에서는 저자가 쓴 신문기사도 일부분이지만 실려있지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자 본인이 물론 현대언론사에서 한 역할을 맡았던 분이겠지만, 신문 기사는 사실 그 색채에 따라서 어조가 확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여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 부분은 언급을 하여야겠다고 여겼습니다. 혹시나 저 글이 본인을 겨냥해서 쓰인게 아닌가, 그런 느낌을 받으셨다면 죄송합니다.

마립간 2013-09-25 14:20   좋아요 0 | URL
가연님, 죄송하실 것 없습니다. 가연님의 글을 타산지석처럼 내게 적용해 볼 것은 없나 생각해 본 것입니다.

가연님이 쓰신 글은 위 책에 대해서 쓰신 것은 맞습니다만, (게다가 제가 책을 읽지 않아, 책의 뉴앙스를 알 수 없지만) 지적하신 바가 일반화가 될 수 있는지, 가연님의 가치판단이 맞는지 생각했는데, 아직 판단 보류입니다. 책(공개?), 부제, 언론이란 분야 등 특정화가 있으면 가치 잣대가 달라지나 해서요.

가연 2013-09-25 21:31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넷상에서는 쉽게 오해가 쌓일 수 있는 법이니.. 조심하는게 옳지요. 언짢게 여기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가치 판단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사실 잘 감이 오지 않지만.. 첫 문단의 내용을 간단하게 말하면 어떤 주장을 하려면 그 근거는 객관적이어야 한다, 입니다. 여기에 가치 잣대가 들어갈 부분이 있는지 좀 의아해집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조금 더 부연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혹은 제가 저 명제를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걸까요?

마립간 2013-09-26 08:48   좋아요 0 | URL
가연님의 마지막 댓글을 읽으니, 저와 가연님과의 생각에 차이가 있었던 부분을 파악한 것 같습니다. ; 객관적.

제가 어떤 글을 쓸 때, 제 주장을 강력히 표현하지 않더라고 (통계숫자만을 나열하지 않는 한, 통계 숫자를 표현하더라도 나열하는 방식을 통해) 의견을 표출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모든 글에 약간의 주장을 포함하게 되죠. 그리고 그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 근거는 과학적, 객관적, 타당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근거의 객관성의 판단은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저의 경우는 생각의 궤적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줄이기 위해서 저의 글을 referece로 제시하지만, 같은 이유로 그리고 자기표절을 피하기 위해 (잘 아시겠지만) 의학논문의 인용에 (특히 연구배경에서) 자신의 연구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부정적인 감정보다는 긍정적인 감정이 많았습니다.

가치판단이란 단어는 제 글과 위 책의 글이 같은 수준의 글로 보아야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중복게제 논쟁에서 독후감과 논문은 같은 창작글로 본 가치판단과 상품평과 같은 서평과 논문은 다른 수준으로 봐야 한다는 가치판단과 같은 의미입니다.

위 책의 글이 (그리고 내용이) 객관성이 필요한 글이라면 글쓴이 스스로 객관성을 확보하기 자신의 글보다는 다른 근거를 제시했어야 했지만, 과연 그런 글이었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위 책을 읽지 않아서) 판단을 유보한 것입니다.

마립간 2013-09-26 08:49   좋아요 0 | URL
댓글을 쓰다보니, 이런 판단이 내려지네요. 위 책은 (가연님의 판단으로는) 내용상, 형식상 객관성이 필요한 글이었는데, 그 근거를 자신의 글로 삼아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해 ; 결과적으로 더 좋은 글이 될 수 있는 것에 미치지 못했다.

가연 2013-09-26 20:07   좋아요 0 | URL
네, 마립간님의 두번째 말씀이 맞는 듯 합니다.

근거의 객관성의 판단을 독자의 몫으로 넘기는 것에는 여전히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여기가 마립간님과 저의 의견 차이겠지요.

가치판단은.. 사실 마립간님의 글을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궤적, 으로 여겼기 때문에 여기에 더 관련시키지 않아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하긴 만약에 제가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제 글에 연관지어서 생각을 했을 것 같지만.. 본의아니게 무신경하게 넘어가버린 것 같네요,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