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유일, 아니 유이한 취미는 책을 사는 것과 롤LOL 중계를 보는 것이다. 책을 사는 것은 조금 뒤에 이야기를 하고, 롤 중계 시청에 대해서 먼저 푸념을 할건데, 요즘 롤 계의 축제라는 롤드컵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사실 기분이 시큰둥하다. 그 이유는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응원하는 팀이 롤드컵에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1년 전만 해도 이 팀을 누가 이기겠는가, 하는 그런 느낌을 모두에게 줄 정도로 멋진 모습이었는데, 어떻게 1년만에 이렇게 폼이 떨어질 수가 있지, 하는 생각도 들고, 좀 많이 슬프다. 다시 예전같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아마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미천한 언랭인 나로서는 저들의 수준을 평가할 수가 없고, 다만 그때부터 팀이 하락세에 접어든 것 같다. 예전에 그러니까 팀 전체가 일종의 조작의혹을 받은 적이 있다. 물론 무고하다는 결론이 났지만 이미 욕은 먹을대로 먹었고, 결국 그 시즌은 최악의 성적으로 마감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분명 그 이후다. 저 팀이 도저히 수렁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하기 시작했던 때는. 마음의 상처가 정말 너무 깊은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물론 이렇게 말하면, 그게 벌써 몇 개월 전인데,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마음의 상처가 고작 몇 개월만에 가라앉겠는가? 그것도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무고한 일로 받은 것인데.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비판할때는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된다.. 그냥 무작정 의혹만 가지고 싫다고 비판, 아니 보통 이런 경우는 비난이 되는 경우가 많던데, 하고 욕하면, 그건 정말 어이없는 짓이다... 자기는 그냥 돌 던지는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맞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저 팀의 경우가 딱 그런 경우인데, 만약에 저런 일이 없이 그냥 성적이 나빠졌다면 아, 다른 팀들이 잘했구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저런 일 이후에 저렇게 성적이 나빠져가니 계속 아쉬운 것이다. 물론 게임 내적으로는 수많은 고랭크들이 (꼭 분석글을 쓰는 사람들은 최소 골드 이상이다, 풋) 텔포 메타에 부적응했다, 다른 선수들의 라인전이 강화되었다 등 이야기하지만 말이다.

 

그다음에 취미가 바로 책을 구매하는건데, 사실 집에 책이 너무 많이 쌓였다. 아직 읽지 않은 책이 태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이 책이 반값이야, 하면 괜히 귀가 솔깃해.. 아니 눈이 솔깃해져서 5만원씩 끊어서 구매하게 된다. 이번에 구매한 책이 바로 위의 뇌, 인데, 그전부터 사실 노리고 있던 책이다. 그리고 반값할인되었다고 득달같이 주문을 넣었는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혹시 이달의 반값도서에 선정될까봐 이틀 기다렸다, 풋) 아니, 글쎄 저 책에 걸려있는 이벤트가 있지 않은가? 나는 저 책을 구매한다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서 상품페이지에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나중에 다른 책을 살펴보다가 우연히 들어갔더니.. 저 출판사의 할인 책들을 구입하면 적립금을 주는거였다. 그것도 3만원 구매시부터. 저 책이 2만 5천원이니 5천원만 더 합쳐서 구매했다면 적립금도 받고 반값할인책도 사고 기분이 최고였을텐데, 나중에 저 이벤트를 알게 되니 하늘이 노래지더라.

 

이미 출고완료에 배송까지 되어있는 책을 두고 이것을 반송할것인가, 한참동안 고민했다. 사실 밖에서 보면 웃기고 어이없는 모습이리라. 기껏해야 적립금 이천원, 비싼 아이스크림이면 하나 사먹을 돈 정도인데, 이 이천원이 아까워서 발발거리며 떠는 모습이란.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천원만 손해본 것은 아니고, 이달의 쿠폰을 합쳐서 - 이 쿠폰을 저 주문에 썼으니 - 삼천원 손해일테고, 이천원이 저렇게 보면 작은 돈이지만 적립금으로 보면 큰 돈이기에 - 5만원 채워서 주문하면 보너스 마일리지가 이천원이다 - 이렇게 떠는 것도 아주 이해를 못할 일은 아니리라.

 

아니, 이해를 못할 일은 아니리라, 라는 말은 왠지 애처롭다. 나는 이해할 수 있지만 아마 이해못할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하지만 절차를 밟아 물품을 다시 돌려보내려니 추석도 다가오고 너무 번거롭기에 결국 포기했다. 아깝다, 내 이천원. 그리고는 기필코 적립금을 받아내려는 일념하에 책들을 골라놓았다. 근데 머릿속에서 못받은 적립금 생각이 계속 떠나지를 않는다. 여기서 심리학적 실험이 떠오른다. 처음부터 오만원을 줬다가 사만원을 뺏는것과 그냥 만원을 주는 것은 다르다고. 그러고보면 이번도 마찬가지인데 사실 지금껏 주문할때 상품페이지에 꼭 들어가서 적용되는 쿠폰들 모조리 받아서 알뜰하게 주문해왔는데, 단 한번 방심이 이렇게 슬픈 결과를 낳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상품 창에 이벤트 팝업이라도 띄어줬으면 놓치지 않았으련만, 풋, 그래서 괜히 궁시렁거리고 있다.

 

김수영의 시 중에 고궁에서, 였던가? 국밥집인지 설렁탕집인지 기억안나는 가게 주인장에게 짜증을 내던 시가. 지금 심정이 딱 그런 심정이다. 사실 이렇게 째째하게 안살아도 되는데, 한편으로는 이천원에 발발거리는 모습에 한숨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래도 다시금 오만원씩 끊고 적용되는 쿠폰을 모조리 다 다운받고, 이벤트까지 챙긴다음에 구입하게 된다. 읽지도 않은 책들이 그렇게 많은데 또 책을 구입하려고?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안사면 절판되고 품절될거같은데. 그래서 놓친 책이 바로 저 위의 크라카토아다. 글쎄, 나중에 돈이 많으면 아, 이 책들 모조리 한번에 사서 내 창고에 쌓아두자, 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그때가서 생각할 일이고, 지금은 별 수 없이 천원이라도 아끼려고 잘라서 주문할 수 밖에 없다. 

 

 

p.s. 책은 안읽고 책만 주문하고 있다. 사실 이게 진짜 푸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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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위의 세 권은 재미있는 책들이었다. 아니, 재미있는 정도롤 떠나서 추천하고 싶은 정도의 책들이랄까. 경제학 강의는 읽고 있는 중이고, 사랑하지 말자, 는 쓱 훑어본 정도이지만 어떤 책이 좋은지 나쁜지를 붙잡고 열시간동안 읽어내려가야 아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개인적으로 도올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이었지만 저 책을 읽고 상당부분 생각이 바뀌었다. 비판적이었던 부분이 사실 도올 선생의 너무나 자신감 넘치는 태도때문이었기도 한데, 저 책을 읽고보니 그렇게 자랑할만할지도 모르겠다. 너무 대선을 겨냥한 것 처럼 책이 팔렸던 것 같은데, 꼭 대선이 아니더라도 도올 선생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가, 를 알고 싶다면 한 번 읽어보기를 바란다.

 

장하준 교수의 경제학 강의도 마찬가지인데 또한 개인적으로 장하준 교수에 대해서 그렇게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지는 않았으나 (물론 내가 좋은 평가를 내리든 말든 눈도 하나 깜짝안하겠지만) 저 책을 읽고 상당히 생각이 바뀌었다. 과연 교수할만하구나. 개인적으로 경제사에 대해서 정리한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읽고 나면 새롭게 글을 묶어서 써볼생각이다.

 

 

 

 

 

 

 

 

 

 

 

 

 

 

이 두권은 그럭저럭 읽을만한 책들. 사실 왼쪽의 의산문답, 을 먼저 읽고 다른 책들을 찾아 읽게 되었다. 도올 선생의 책인데, 마지막에 도올 선생이 왜 이 책을 썼는지 이야기한다. 들어오는 인세가 없어서 쓰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자기 책은 잘 안팔린다고 강조한다. 난 도올 선생의 책이 잘 안팔리는지는 모르겠다. 근데 이 책도 아마 팔리기 어려웠지 않을까? 오른쪽의 할도 그럭저럭 다 읽을만 하지만.. 어딘가 아쉽다.

 

여기 밑에는 별로 마음에 안들었던 책들이 위치하겠지만..

요즘은 별로 누구를 비판하고 싶지가 않다.

 

업무때문에 밖에 나가서 대학생이랑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몇 번 있었는데, 요즘 20대는 내 어린 시절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 좋게 말하면 벌써부터 철이 든 거구.. 한편으로는 벌써 세상의 엄혹함을 알고 있다니 좀 씁쓸한 맛이 입안을 맴돈다. 어려서부터 학점관리, 면허따고, 스펙쌓고 그런 것들을 쳇바퀴처럼 굴러다니다가 20대를 넘어 30대가 되니까..

 

요즘은 사는게 많이 힘들어지는 세상이다. 역시 전문직이 최고인걸까, 싶은 생각이 들때도 있다. 그런데 아직 사는게 힘들다, 라고 투정부릴수 있다면 그나마 좀 나은 상태인거구 사실 정말 걱정되는건 곧 이런 말조차 입에서 제대로 나오지 못할 것 같은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삼포세대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은 아닌것 같다. 똑똑한 사람은 똑똑하기 때문에 똑똑하지 않은 대다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의지가 강한 사람은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의지가 강하지 않은 대다수를 이해하지 못한다. 각종 책들은 왜 이렇게 못하냐 이야기하고, 또 다른 각종 책들은 힘내지 말고 그냥 거기 있어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회의가 다시금 닥쳐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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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내가 이 서재에서 철학에 관련된 책을 추천하였을때, '러셀 서양철학사' 를 추천한 적이 있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참 겉멋만 들었다, 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나는 서양철학사를 끝까지 읽지 못했고 - 겨우 칸트부분까지만 읽었다 - 읽은 부분도 사실 내것으로 만들었다고 하기도 어렵다. 결국에는 나는 철학에 대하여 아는 척, 하고 있는 딜레탕트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에 이르렀다고 해서 내가 저 딜레탕트의 수준을 넘었냐면, 또 그렇다고 할 수도 없다. 여전히 중구난방식으로 이 철학자의 이 이론, 저 철학자의 저 이론을 읽어왔기 때문이다. 그나마 약간 내세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장 자크 루소의 사상 정도에 지나지 않으리라. 결국 모든 철학자에 대하여 모든 것을 통달하기란 어려운 일이고, 모든 철학자들의 역사를 공부하는 한 끝도 없는 딜레탕트의 평원에서 땅짚고 헤엄치고 있을 뿐이리라.

 

이 글은 이왕 딜레탕트의 범위에서 글을 쓸거라면.. 이라는 생각에서 쓰게 된 것이다. 어차피 깊게 묻지도 않고 논문쓸것도 아니라면, 아는 척 하는 정도로 겉만 슬쩍 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에서 말이다. 읽지도 않은 책에 대해서 글을 쓰기도 하고, 책을 내기도 하는 세상인데 철학이라고 달라질 게 있겠는가? 그래서 말인데, 이 글이 철학을 읽으면서 허세를 부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 먼저 철학에 대하여 질문부터 시작하자. 여러분은 철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도올 김용옥 같은 경우에는 무전제의 사유,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여러분이 이 질문을 받았을때 꼭 이 답변부터 먼저 하기를 바란다. 여러분의 철학 포인트가 5포인트 상승할 것이다.) 하지만 무전제의 사유는 사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전제를 안내리고 사유를 한다? 전제가 없이 생각을 한다고? 그냥 자유롭게 생각하자는건가? 하지만 당신의 앞에 있는 사람은 절대 이정도로 물어오지는 않을 것이고, 따라서 여러분의 무식이 탄로나지는 않을 것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의 논쟁에서도 절대 이런 것을 물어오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철학에 대한 토론은 게임과도 같아서, 깊게 물어오는 것은 룰에 위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혹은 이런 식으로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은 어두운 방 속에 검은 고양이가 있는지 없는지 고민하는 것이다, 라고 말이다. 이는 서양의 농담에서 따온 말인데, 이렇게 이야기하더라도 당신의 지적능력에 대한 상대방의 평가는 전혀 훼손되지 않고 도리어 매우 유머스러운 사람이라는 평을 얻게 될 것이다. 게다가 앞서 말한 이야기보다 훨씬 직관적이고 그럴듯하게 보인다. 해석은 상대방이 하는 것이다. 그저 당신은 말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상대방은 모른다. 당신이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고차원적인 토론을 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모를 것이다. 토론 규칙중에는 자비의 원칙이라는게 있어서, 여간하면 당신이 합리적이고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될터이니 말이다. 인터넷으로 철학 논쟁을 한다면 더욱 쉽다. 댓글 다는 사이에 검색좀 해보면 된다. 아, 인터넷 논쟁이라면 친목을 쌓고 정치적 관점을 좀 가지면 하면 논쟁을 이길 수 있다. 당신의 동조자를 만들라. 당신의 철학의 깊이가 아무리 깊더라도 동조자가 없으면 키보드 앞에서는 모두 평등해진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 스스로도 철학에 대하여 궁금한 점을 가지고 있으며, 납득할만한 설명을 원한다면 철학은 1. 익숙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생각을 정지하고, 2. 그 익숙한 것을 완전히 부숴버리고 3. 완전히 부숴버린 그 익숙한 것을 스스로의 말로 다시 쌓아올리는 작업. 이라는 이 세 가지 단계를 밟아나가는 학문이라고 여기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쉬운 말로 풀어썼지만 어렵게 쓰자면 저 세 단계를 한없이 어렵게 쓸 수 있다. 그건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쓰도록 하자.

 

이렇게 철학에 대한 규정을 하고 나면 철학은 크게 갈래를 나눌 수 있게 된다. 하나는 존재론, 하나는 인식론, 하나는 가치론. 여기서 당신이 현대 철학의 조류라던가, 한창 유행했던 정의론 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가치론 쪽으로 가도록 하고, 만약에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 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존재론과 인식론으로 가도록 하자. 왠지 후자의 쪽이 더 멋있어보이니 이 글은 후자를 택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상대방이 가치론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말을 중간에 끊고 플라톤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라.

 

 

 

 

 

 

 

 

 

 

 

 

 

 

 

 

자, 그럼 수박 겉핧기 식으로 철학에 대하여 아는 척을 하기 위해서 책을 골라보도록 하자. 위에 세 권 정도 골라봤는데, 가장 왼쪽의 철학, 책, 이 책을 넘겨보고는 개인적으로 놀랐다. 이 책은 무료로 제공되는 책임에도 생각보다 알차게 구성되어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가장 위에 올라와 있는 이유는 무료이기 때문이다.) 무료로 이정도 정보를 제공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고, 뒤에는 더 읽을거리까지 풍부하게 소개되어있다. 당신이 철학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이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 숙지하고 뒤에 철학자들이 쓴 책들 몇 권을 외워가도록 하라. 물론 좀 아쉬운 부분도 있다. 실용주의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는 그다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지 않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칸트 전문 연구자인 백종현 교수가 직접 칸트에 관해서 소개하는 부분이다. 그 외에도 나름 각 분야에서 전문적으로 각 철학자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해왔고, 번역도 맡았던 교수들이 필진으로 참여한 것에 대하여 매우 만족스럽게 여겨진다.

 

그 다음 책이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인데 개인적으로 이 책을 추천한다. 철학에 입문하고 싶거나, 혹은 얕은 지식으로 아는 척을 하고 싶다면 이 책으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인 것 같다. 너무 깊지는 않게, 그러나 너무 얕지도 않게 나와있는 이 책은 각 시대별로 사상의 변천을 잘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강점은 한 철학자의 사상이 어떻게 내면적 연관을 맺고 있는가 에 대하여 잘 설명을 하고 있다는 부분일 것이다. 예를 들어서 로크의 사상을 공부할때, 우리는 로크가 주장한 제1성질, 2성질과 로크의 사회 사상에 대하여 따로 공부를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 모든 것은 내면적 연관을 갖고 있다. 라이프니츠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그의 모나드론과 변신론, 그리고 그의 논리학적 업적이 어떻게 연계가 되어있는지 피상적으로는 따로 외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사상이 어떻게 일관성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이 책은 매우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첫 번째로 제논의 역설에 관한 것인데, 이 역설 - 아킬레우스가 어떻게 거북을 못따라잡는가 - 은 결국 풀리긴 풀렸다. 여기서는 '언젠가 풀릴 날이 올 것' 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프레게와 그 이후의 논리학적 성과에 의하여 풀린 것으로 알고 있다. 계량할 수 있는 무한과 계량할 수 없는 무한의 구분으로 풀어나갈 수 있다고 하는데 이 책의 저자가 그 연구를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기에 좀 의아한 부분이 있다. 번역에 대한 문제도 있는데, 중간에 '뉴턴을 내버려 두라', 라고 번역한 부분은 '뉴턴이 있으라' 라고 번역하는게 옳을 것이다.

 

세 번째 책은 철학 개념어 사전, 인데 이 책이 필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물론 위의 책들을 읽더라도 여전히 모르는 개념어들이 있을 것이고, 괜스레 상대방이랑 대화하다가 유식한 척 개념어를 내뱉었을때, 그 개념어가 무슨 뜻이지? 라고 되물어오면 당황스러울때가 있다.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 이런 책 하나 정도는 구비해두는 게 좋다. 물론 책을 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 제목과 저자만 외워두고 실제 개념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는게 효율적이다. 어차피 상대방도 이 책 보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령 보았더라도 다 기억하지 못한다.

 

 

 

 

 

 

 

 

 

 

 

 

 

 

 

 

 

철학책을 대충 읽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언급한 정도만 읽어도 아, 그때 그거? 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다. 어차피 철학자의 무슨 무슨 책 읽었냐, 라고 묻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묻는 사람에게는 '당신은 읽었냐?' 라고 되물어라. 아니면 애초에 상대방이 당신이 읽은 것 처럼 여기도록 대화를 할때, 플라톤의 ...에 따르면, 등과 같은 말들을 가져다붙여라. 그러면 상대방은 당신의 학식에 놀라 '아, 이 사람 너무 잘난 척 하는데' 라고 여길 것이다. 혹은.. 상대방도 당신처럼 자신의 무지를 감추고 맞장구를 칠 것이다. 당신이 고대 아테네 철학을 읊는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으로 말이다. 너무 노골적인가? 그렇다면 국내 철학자들이 쓴 책들도 있다.

 

국내 철학자들이 쓴 책을 말할때는 꼭 강신주의 이야기부터 하는게 좋다. 힐링캠프를 나온 이후로 왠만한 사람들에게는 대중적으로 알려져있다. 어, 너도 강신주 알아? 라는 식으로 대화를 시도하라. 이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면 좀 더 당신이 지적으로 보일 수 있다. 강신주의 책들 중 강신주가 가장 아끼는 책이 두 권 있다. 그 책 중 한 권이 가장 오른쪽의 책이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이 말은 진짜다. 강신주가 인터뷰집에서 그런 말을 했다. 다른 책은 김수영을 위하여, 다.) 사실 정말 진지하게 철학 공부를 하고싶다면 이 책은 다른 책들을 읽고 난 뒤에 읽는게 좋다. 가장 표준적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은 가운데 있는 이진경의 책이다. 강유원의 저서도 빼놓을 수 없다. 대중적으로 엄청나게 인지도가 있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내실있는 철학자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최근 철학의 경향에 대해서 아는 척을 해보고 싶어질 것이다. 요즘 그럭저럭 이름 날리고 있는 철학자는 지젝이다. 인터넷에서만 유명한 것 같지만 여튼 지젝 정도를 읽고 있다고 하면 왠지 뭔가 있어보인다. 지젝을 말할때는 경희대에서 방한에서 강연했던 그 사람? 혹은 월가 점령 시위에서 연설했던 그 사람? 정도의 추임새를 붙여주라. 그리고 지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일이 있으면 라캉과 헤겔이 보통 같이 나올 것이다. 그럴 때 뒷짐을 지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상대방에게 무지를 들키지 않을 것이다. 아, 지젝의 철학적 작업이 원래 그런거잖아요, 헤겔로 라캉을 읽는. 그래서 최근에 번역서 헤겔 카페랑 라캉 카페가 나오지 않았던가요? 라고 말이다. 개인적으로 지젝의 저서에 접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와 이현우씨의 해설서로 생각이 든다.

 

아니면 들뢰즈를 읽는다고 해라. 인터넷에서 자주 보는 철학자는 어차피 이 두 명이다. 들뢰즈의 반응은 모르겠지만 지젝은 좋아할 것이다.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을 것을. 보통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철학자들이 언급이 많이 되는 경향이 있다. 들뢰즈의 저서는 어렵다, 아니 무슨 소리인지 사실 모른다. 제대로 읽은 사람도 별로 없을터이니 혹시나 들뢰즈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오면 아, 정말 읽기 어려웠다, 라는 식으로 인정하는 척 해라. 진짜 천 개의 고원과 같은 저서는 독해하기가 어렵다. 아니 이렇게 순순히 인정하면 아는 척을 어떻게 하냐고? 훗, 여기서 한 수 물러나는 것은 전진을 위해서다. 그러다가 리좀 정도의 개념을 검색해서 읊어주면 상대방은 오, 어렵지만 나름 읽었나보다, 라고 착각할 것이다. 어차피 입으로는 무슨 말을 못하겠는가? 실제 읽었다고 해도 검은 것은 글씨다, 라고 읽었다면 안읽은 것이나 차이가 있을리 없다.

 

결국에는 개념 몇 개 외워두고 검색해두면 두고두고 쓸 수 있다. 각 철학자마다 개념어가 있지 않은가? 루소의 경우 일반의지,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는  내 언어는 세계의 한계다. 칸트의 경우에는 정언과 가언, 범주. 이런거 좀 외워두고 국내에 번역된 책들 좀 제목만 알고 있으면 아는 척 하기 어렵지 않다. 여기에 위에 소개한 책들 좀 읽어주면 누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철학이 당신에게 무슨 쓸모가 있냐고? 허세부리는 것 말고 무슨 용도가 있겠느냐고? 그렇다. 허세부리는 것 말고는 용도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이다. 당신이 나치 지배하의 독일에서 살았다고 가정하자. 당신은 반인륜적 범죄들을 그대로 묵인할 것인가? 아니면 저항할 것인가? 이건 철학의 문제다. 앞서 철학의 정의를 적어두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것이라고. 당신 자신의 찔리다 지쳐 이윽고 넝마가 되어버린 양심에 다시금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 바로 이런 생각들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의를 그냥 눈감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거기서 한 번더 멈춰서 생각하는 것이 철학이다.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면 당신은 끄나풀이 될 것인가? 그냥 숨을 죽여살것인가? 아니면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당하더라도 끝끝내 저항할 것인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것이 당신만의 철학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당신이 위의 책들을 통해 진지하게 철학을 생각해보고 싶다면.. 철학은 당신의 선택에 따라 액세서리가 될 수 도 있고, 당신을 지탱해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이 살아가고 숨쉬며 밥먹는 그 모든 것에 철학이 담길 수 있다. 다만 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사유해온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생각을 왜 이용을 하지 않는가? 땅을 파고 기초공사부터 시작하는 것이랑 어느 정도 뼈대가 놓인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아는 척을 하기 위해서 읽은 책들도 있겠지만 혹시나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어도 그런 책들은 당신에게 뼈대를 만들어주는 책이다. 혼자서 모든 것을 사유했다고 해서 자랑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의 사유를 읽는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도 없다. 배워서 익힐 수 있는 것이라면 그걸 처음 발명한 사람과 배워서 익힌 사람의 차이가 있긴 하겠는가? 당신이 젓가락질을 처음 고안한 사람과 젓가락질 비교를 한다면 누가 더 낫겠는가? 둘다 별로 차이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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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한글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19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허승진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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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괴테를 떠올리면서 과학자를 떠올리는 사람은 지금은 거의 없으리라. 하지만 실제로는 어설픈 과학자였던 그는 자신 나름대로 색채론과 광학에 대하여 무언가 이론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고,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론을 조직해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자신이 맞는 이론을 세운것인지, 혹은 그른 이론을 세운 것인지조차 알아낼 수가 없었고, 결국 그는 아마추어 과학자로도 당대에 이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과학의 세계에서는 사실은 당신이 부정하는 동안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사라진 스푼' 이라는 주기율표에 관한 멋진 저작을 쓴 샘 킨은 괴테에 대하여 이렇게 일침한다 : 결국 그가 과학에 어떤 이바지를 했다면 적어도 사람보는 눈은 있어서 과학 교수자리에 제대로 된 사람을 추천했다는 것이 될 것이리라. 결국 그는 데카르트나 - 좌표 체계의 고안 - 라이프니츠 - 미분법 - 같은 부류의 사람은 영영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괴테는 라이프니츠가 수학과 철학에서 이룬 만큼의 성취를 문학에서 이루어내었다. 파우스트,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등등, 당시의 시대상을 집약하고 그 자신의 사상을 제대로 녹인 대작들을 몇 편이나 연달아 써내려갔었던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은 그런 그의 초기작인데, 이 작품으로 괴테는 상당한 명성을 얻고, 또한 그만큼이나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 젊은이들의 사랑이라는 격정적인 감정을 서간문 형식의 소설에 잘 녹여냄으로써 그는 젊은이들에게 명성을 얻었고 - 저 나폴레옹도 그렇게 이 작품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 그만큼이나 다른 의무를 방기하고 사랑에 빠진 모습을 보인 '추태'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개탄을 금치 못했으니 당시의 문제작이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 작품은 불멸의 생명을 얻었고, 그렇게 불멸을 얻게 된 까닭이 그 '추태' 때문이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아니, 아이러니한게 아니다. 세대를 초월하는 인간 본연의 감정인 사랑때문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것일수도 있겠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은 친구 빌헬름에게 베르테르가 편지를 쓰면서 시작한다. 전체적인 형식은 외부에 우리 독자가 있고, 작품의 가장 바깥쪽 껍질에 소설속의 소설의 편집자가 존재하고, 그 안쪽 껍질에 빌헬름 등에게 보낸 편지가 존재하며, 가장 내부에 베르테르가 존재한다. 정리하자면 이 소설 자체는 마치 가상소설로, 실제 베르테르라는 사람이 존재했던것 처럼 그의 서간집을 모아서 펴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실의 괴테에게는 베르테르의 모티프가 된 인물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일수도 있을 것이고, 자살한 그의 친구 예루살렘의 이야기일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베르테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고, 이 점을 유념해야만 우리가 베르테르의 감정에 지나치게 이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리라.

 

아니, 소설의 목적이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여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아닌가? 라고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인물들, 당대의 나폴레옹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일종의 연애소설로만 읽었고, 그래서 실제로 괴테를 만났을때 이런 저런 말들을 했다고 한다. 주인공의 연애사에 관련없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닌가, 라고.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베르테르의 슬픔, 에 대한 다른 독법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몇 가지 독법이 섞여 있고 - 정신분석학적인 요소, 마르크스적인 요소, 여성주의적 요소 - 그로 인하여 단순히 연애이야기로만 보일법한 소설이 어떻게 탈바꿈되는지 흥미롭게 주시할 수 있으리라.

 

이 이야기의 기본 얼개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이 어느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그 여자는 약혼자가 있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그녀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포기할 수 없어서 그녀의 곁을 맴돌다가 결국에는 비극적인 최후로 달려가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먼저 던질 수 있다. 주인공은 그녀, 로테를 사랑했는가? 이를 위하여 우리는 사랑, 이라는 것의 정의를 먼저 내려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헤겔사전', 의 정의를 빌려오자. 도서출판 b에서 나온 헤겔사전에서는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타자 안에서의 자기 내 삶" 이는 무슨 말인가, 하니 "인격성을 포기하고도 자립적이라는 변증법적 모순의 감정" 이라고 한다. 참으로 헤겔다운 사랑의 정의이다. 그러나 변증법적인 모순의 감정, 이라는 말은 놓아두고서라도 앞의 문장은 되새길만한 가치가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상대방 안에서 내가 살아간다는 말이니 말이다. 그런 상황을 위하여 자신은 자신이라는 인격을 포기해야만 하고, 동시에 살아가기 위하여 자립성을 지녀야만 한다.

 

그런데 관념론자인 헤겔의 성향으로 볼때, 이 사랑은 적어도 육체관계보다는 정신적인 부분을 지향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서 위의 사랑의 정의는 플라토닉한 사랑에 더 가깝다는 이야기이다. 적어도 헤겔에게는 절대 정신의 물화인 이 세계에서 육체에 중점을 둔다면 헤겔은 '사랑을 통한 운명의 도야', 와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헤겔사전, '사랑') 더 설명하자면 헤겔에게 있어서 운명의 도야, 는 무수한 과정을 거쳐 변증법적인 길을 걸어온 절대정신으로의 합일이기에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주인공인 베르테르는 로테와 과연 그런 관계를 맺고 있을까? 그런데 적어도 로테를 향한 베르테르의 마음이 플라토닉 러브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알 수 있다.

 

태양 아래 가장 사랑스러운 그녀를 내 품에 안을 수 있었더라면! 알베르트가 그녀의 갸냘픈 몸을 끌어안는 걸 생각하면 내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네.

베르테르가 원하는 것은 그녀의 정신과의 합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몸에 대한 소유이기도 하다. 단순히 저 문장뿐만이 아니다. 베르테르는 어느 하인의 고백을 듣는데, 그 하인이 자신이 흠모한 여주인을 겁탈하려 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하인은 베르테르에게 고백하기를 '그녀는 어느 정도 그가 보내는 정감의 표시를 받아주었으며..' 그래서 자신이 강제로 여주인의 몸을 취하려고 하더라도 당연히 받아들일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뒤에 언급할 여성주의적 해석을 시도할 경우 착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연히 여주인은 거절했으며 결국에는 그 하인은 여주인의 오빠에 의하여 쫓겨나기에 이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 대한 베르테르의 반응은 긍정적이며 동정심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헤겔적인 의미의 사랑 - 소유관계는 일절 배제해야만 하는 - 과는 가장 거리가 있으리라. 즉, 우리는 베르테르의 로테에 대한 사랑을 에로스적인 의미의 사랑으로 판단하여야 하며, 여기서 우리는 정신분석학적인 개념 - 성욕에 대한 개념을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성욕은 정신분석학에서 매우 핵심적인 주제다. 성욕은 정신분석학에서 초자아와 이드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양자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베르테르의 경우에는 사회적 규범과 자신의 교육으로 형성된 초자아로 인하여 간신히 로테를 '안고' 싶어하는 욕구를 억누르지만 동시에 자신에게는 어려운 그 일을 시도한 하인에 대하여 동정심을 표하고, 그 하인이 나중에 살인사건을 저질렀을때 변호하기까지한다. 이는 무의식중에 베르테르의 이드가 그 하인과 여주인의 관계를 자신과 로테의 관계로 투사하여 충족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잘 살펴보면 매우 기묘한 한 쌍의 삼각형을 확인할 수 있다. 베르테르-로테-알베르트, 와 하인-여주인-여주인의 오빠. 알베르트와 여주인의 오빠는 베르테르와 하인의 사랑을 방해하는 존재이고, 베르테르와 그 하인 입장에서는 로테와 여주인은 당연히 자신에게 와야만 하는 존재들이지만 방해하는 존재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는 그런 대상이다. 작품전반적으로 이 삼각형은 반복되고, 베르테르는 그때마다 자신의 욕망을 또다른 자신인 그 하인에게 투사한다.

 

베르테르의 투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베르테르는 자신의 사랑에 못이겨 결국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로테와 알베르트 커플을 떠나기로 마음먹고는 작품 중간에 그들에게 안녕을 고하고 잠깐 멀리 여행을 떠나버린다. 그 여행에서 베르테르는 궁정에서의 하급관리로 일을 하게 되는데, 그 여행에서 'B양'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B양을 두고 베르테르가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한번 살펴보자.

 

B라는 아가씨는 내가 이곳에서 만난 유일한 여자입니다. 사랑하는 로테, 당신을 닮은 누군가가 존재하는게 가능하다면 바로 그녀가 그 사람입니다.

로테에게 보내는 편지에 B라는 아가씨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이 B라는 아가씨는 베르테르의 눈에는 로테와 닮아보인다. 그런 베르테르에게는 B양은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이를 정리하자면 1. B양은 로테와 닮았다. 2. 그래서 B양을 통해서 로테를 보기 때문에 좋아한다. 가 될 것이다. 이 도식 자체도 이미 불안한 요소를 품고 있지만 - 한 사람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바라본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단적인 예로 당신의 아내나 남편이 당신을 두고 예전 여자친구를 떠올린다면 당신은 그것을 허용하겠는가? - 저 도식을 뒤집어 읽으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1. 외로운 상태에서 B양을 만난 베르테르는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2. 자신의 호감을 로테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한 베르테르는 B양을 통해서 (예전에 사랑에 빠졌던) 로테를 보게 된다.

3. B양은 로테와 닮았다.

 

위의 도식보다는 사실 현실적으로 아래의 도식이 더 베르테르의 상황을 잘 설명해준다고 여겨진다. 저 여행을 떠날때의 베르테르는 실연한 상태다. 결국 그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다니다가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그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게 되고, 베르테르는 이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베르테르의 초자아가 이 상황을 용납하지 못한 것이다. 베르테르의 초자아는 자신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연민을 베풀어야 하고, 한 사람에게만 자신의 모든 신실한 마음을 다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어떻게 알수 있는가? 그것은 본문에서의 묘사를 보면 알 수 있다.

 

... 자네들 잘못이야. 자네들은 듣기좋은 소리로 나에게 멍에를..

이 모두는 자네들의 책임일세.

자네들이라고 그 이상의 존재라 말할 수 있는가?

인용한 부분은 모두 친구 빌헬름 - 귀족으로 보이는 - 에게 툴툴거린 편지의 대목이다. 빌헬름의 도움으로 하급관리가 되어 궁정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귀족들에 대하여 비판을 하고 있다. 정작 그 본인도 귀족과 같은 삶에 동참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너희들과 다르다, 라는 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하지만 베르테르가 베푸는 자선들 -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베푸는 것 - 은 사실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반복하자면, 베르테르는 적어도 있는 사람들, 에 속한다는 이야기이다. 초반에 베르테르가 지방에 내려간 이유는 어머니가 그에게 맡긴 수금때문이다. 그 자신의 아주머니가 유산을 붙잡고 내놓지 않기에 베르테르를 보내 그 유산을 받아오도록 시킨 것이리라.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 베르테르가 지방에서 만난 사람들은 베르테르 본인도 인정하듯이 계급의 차이가 있고, 돈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고, 앞서 말한 초자아 이야기로 돌아가자. 베르테르는 강박관념 - 나는 귀족들과는 다르다 - 에서 사람들을 도우고, 결국에는 그렇게 본인은 선하고 단 한명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순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로테와의 대화에 따르면 그에게 있어서 귀족들은 순진한 '처녀를 유혹해서 그 열매를 따고는 뒤돌아서는' 그런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르테르는 한 명만을 사랑하여야 된다는 제약을 본인에게 무의식중으로 걸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베르테르 본인 또한 저런 귀족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본인이 그렇게 맘에 들어하지 않는 귀족의 행위들을 그대로 답습한다.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서, 베르테르가 하는 말을 들어보자.

 

불쌍한 레오노레, 하지만 그것이 내 잘못은 아니라네 ...(중략)... 그 불쌍한 레오노레의 가슴속에 애욕이 싹트게 된 것을 어쩌나 ...(중략)... 난 현재의 순간을 그대로 즐기고 과거는 그냥 흘려보낼거야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전형적인 바람둥이의 대사로 읽힌다. 한마디로 네가 나에게 빠진건 네 잘못이지 내 잘못은 아니다. 라는 말이다. 그 말은 현재의 순간을 그대로 즐기겠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바꿔말하자면 지금 이 여자도 만나보고, 저 여자도 만나보면서 많이 만나보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다가 사랑에 빠지면 사랑 좀 하다가, 여자가 아니다 싶으면 이별통보하고 시골로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아아, 어린시절 나의 여자친구가 떠나가버렸다니! ...(중략)... 나는 그녀를 가졌었고 그녀의 심장을 느꼈네... (중략)... 그때 내가 사용하지 않은 영혼의 힘이 정녕 조금이라도 있었나이까? 그녀 앞에서 나의 신비한 감정이...(후략)    

알던 여자의 부고를 받은 베르테르의 반응이다. 몇 가지 포인트를 찾을 수 있다. 베르테르는 그녀를 '가졌'고 '신비한 감정'을 가졌다고 한다. 그녀를 가졌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녀와 육체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의미하리라. 그리고 신비한 감정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그녀에게 끌렸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를 언급하는 베르테르의 첫마디에 주목하라. 이 모든 것은 '어린시절'에 일어난 일이다. 정리하자면 어느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육체관계까지 맺었지만 결국에는 깨어졌고 훗날 회상하기를 그 모든 것은 어린시절의 치기였었지,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베르테르가 로테에게 정열적으로 끌린 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한 해답은 본문에 이미 나와있다. 로테의 말에 의하면 영영 이루지 못할 사랑때문에 끌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렇게 대한 것은 네가 처음이야, 라는 마음이고, 이 여자, 저 여자 모두 나에게 넘어왔는데 너는 왜 안넘어오는거냐, 라는 자만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에 로테에게 매달린 것은 그저 자신이 자신에게 부과한 제한 - 나는 한 여자만 사랑하는 순수한 남자이며 귀족과는 다르다 - 때문일뿐 실제로 로테를 사랑하는것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읽어보면 B양과 관계가 깨진 뒤에 다시 로테에 대한 과격한 편지들이 많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속된말로 현재 썸타는 여자와 깨지고 난 뒤에 전 여친이 떠오르는 것과 비슷한 상황인 것이다. B양과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을때에는 로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장 끈적끈적한 언어는 이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랑스럽고 친근감 넘치는 작은방 안에서 당신의 발치에...

그리고 로테의 결혼에 대하여 축하하는 편지를 쓴다. 말미에는 자신을 잊는다면 미쳐날뛸거라는 말을 덧붙이지만 이는 자신의 행동 - 그동안 로테에게 격정적으로 다가갔던 - 을 설명하기 위해서 의례상 덧붙이는 말로 해석할수가 있다. 이번에는 B양과 깨지고 난 뒤에 빌헬름에게 보내는 편지의 언어를 보자.

 

로테가 그가 아닌 나와 결혼했더라면.. 

심지어 이런 상상마저도 한다.

 

만약 알베르트가 죽는다면...

B양과의 관계가 잘 되었다면 다시 로테에게 돌아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B양에게 일종의 틀, 순수한 여자다, 사려깊은 여자다, 등의 선입관을 씌워놓고 정작 그 선입관이 파괴되자 - 무도회에서 자신을 아는 척을 안했다 등 - 실망감을 느끼고는 다시 예전의 로테, 자신의 마음에 이미 이상화되어 존재하는, 에게로 마음이 돌아가버리고 만다. 그런 생각이 지나치게 깊어지자 알베르트를 방해자로 여기게 된 것이리라. 결국 정리하자면 베르테르는 자신의 감정에 빠져사는 인물이며, 육체적으로 로테를 원하고, 정확히 말해서 로테를 '사랑'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볼때 베르테르의 격정적인 모습은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이고, 그렇기 때문에 영영 이루지 못할 유부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왜? 유부녀는 아무리 사랑해도 절대 가까워질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베르테르는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그런데 베르테르의 자살은 사실 예견되어있다. 사람은 왜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가? 그것은 친해지면 잃게 되기 때문이다. 잃을게 없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지만 잃을게 많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공포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베르테르는 기본적으로 당연히 상실을 두려워하며, 상실을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볼때 궁극적인 상실 - 아무것도 잃을 게 없는 상황 - 을 애타게 기다릴수 밖에 없다. 그런데 궁극적인 상실이자 궁극적인 잃지 않을 상황은 죽음뿐이다. 따라서 베르테르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 ->적극적 삶에 대한 의지상실 ->궁극의 상실인 죽음에 대한 매혹, 이라는 과정을 밟아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로테는 어떠한가? 로테는 과연 베르테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베르테르를 사랑하고 있기는 있을까? 아니면 자신의 남편을 사랑하고 있을까? 그런데 로테는 단순히 정신분석학적인 도구를 활용하는 것보다 여성주의적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이 좀 더 적절할 것이다. 그 이유는 작중에서 표현되는 묘사때문인데, 여기서 로테에 대한 묘사는 한결같이 사랑스러운 여인의 모습이며, 또한 순종적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 ... (중략)... 싱그러운 입술과 상기된 볼에...

나 대신 저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다오! ...(중략)... 어머니처럼 잘 돌봐 주고 아내와 같은 정성과 순종으로 네 아버지를 대하고...

한 착실한 여자가...

첫 번째 부분은 처음 베르테르가 로테를 만났을때 묘사한 부분이다. 전형적은 젊은 처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당시의 여성관에서 이상적으로 표현할만한 그런 모습이다. 두 번째 부분은 조금 설명이 필요한데, 로테의 어머니는 일찍 떠나면서 로테에게 유지를 남긴다. 그것은 동생들에게 그리고 아버지에게 잘하라, 라는 말들이었고, 인용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유의깊게 읽어보아야한다. 로테의 어머니가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는 바로 정성과 순종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머니로부터의 유지를 받은 베르테르는 자신의 남편에게 정성과 순종을 다할 것을 다짐할 수 밖에 없었고, 이렇게 가부장제 안의 여성의 성gender역할이 그대로 대물림되게 된다. 여성은 그저 남자에게 사랑을 베풀고 또한 남자를 잘 따르기를 시대가 강제하는 것이며, 로테 또한 이 시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세 번째 부분은 거의 끝부분에서 두 남자, 베르테르와 알베르트 그리고 자신의 관계를 생각해보는 상황에서 나오는 묘사다. 로테를 두고 착실한 여자로 묘사를 하고 있는데 위의 두 번째 부분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이 착실한 여자는 곧 남편에게 의지하고 생을 맡기며 (실제로 뒷부분에서 남편, 그러니까 알베르트의 토대위에서 인생의 행복을 쌓는다는와 같은 문장이 나온다.) 정성과 순중으로 남편을 대하는 여자다. 이런 여자는 바람을 피거나, 혹은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거나 하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 왜? 반복하지만 착실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거나 하는 일이 생긴다면 착실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리며, 그렇게 된다면 어머니로부터 받은 유지를 어기게 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도 놀림감이 될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서 징벌을 받으리라.

 

로테는 작중에서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혹은 편집자의 시선을 빌려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로테는 알베르트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영원히 맺어져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앞서 세 가지 상황을 살펴보았으니 우리는 다른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로테의 저 '사랑'이라는 말은 반복적으로 사회가,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가 주입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실제로는 자신의 감정을 모르는데도 자신은 남편을 사랑'해야만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무슨 말인지 짐작가는가? 그녀의 사랑 마저도 가부장적 주입의 결과 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면 차라리 이 베르테르의 슬픔, 에 대해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는 '시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정도의 평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테르의 슬픔, 은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여성들에게 가부장제를 강요하고 내면화시키는 것까지 이르게 된다. 바로 로테에게 내려진 징벌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리둥절할수도 있을 것이다. 징벌이라고? 작중에서 로테가 가부장제를 위반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 행위로 인하여 징벌을 받은 적이 있는가? 그건 바로 이 문장이다.

 

베르테르는 두팔로 로테를 꼭 껴안은 채, 떨리는 그녀의 입술에 격렬한 키스를 퍼부었습니다.

알베르트는 로테의 생명이 위태로웠기 때문에...

결국 베르테르는 격정에 못이겨 자살을 하고 만다. 그런데 그렇게 자살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로테의 권고인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찾아오지 말라, 를 어기고 찾아왔고, 그리고는 로테와 마주앉아 책을 낭송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로테의 마음의 빗장이 문학의 효과때문인지 좀 느슨하게 풀리고 만다. 그 결과가 바로 위의 첫번째 문장이다. 결국에는 이들은 서로 키스를 했다. 가부장제에 철저히 종속된 착실한 여자라면 절대 해서는 안되는 행위, 외간남자와의 통정, 를 하고 만 것이다. 처음부터 로테는 베르테르를 집에 들여서도 안되었고 문학을 읽어달라는 말도 하지 말았어야 했으며, 어떤 식으로든 남편이 없는 집에서 외간남자랑 둘이서 있는 행위는 피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로테는 그것을 어겼고, 결국 베르테르의 자살 소식을 듣자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만다. 그리고 아래 문장이 보듯, 그 결과는 자신의 생명의 불이 꺼지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아직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지만 만약에 작가가 글을 더 썼다면, 작가 자신은 사랑의 열병과 심적 괴로움이 죽음의 원인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분명 로테의 죽음으로 마무리하였을 것이다.

 

이 부분은 투르게네프가 쓴 뛰어난 단편 파우스트, 에서 그대로 변주된다. 여기서도 아는 사람의 아내를 사랑하게 된 주인공은 함께 파우스트를 읽어나가면서 서로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돌변한 상대의 반응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 아내는 야위어가면서 심적 고통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아마 이 부분 또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가부장제의 굴레, 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남편 알베르트를 사랑하는 것이 가부장제 때문에 그렇게 '착각'하고 '형성'된 것이라면, 쉽게 말해서 '사랑한다고 믿게 된' 것이라면 로테의 베르테르에 대한 마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 부분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로테의 심리, 엄밀히 말하면 편집자의 시선으로 보는 로테의 심리, 를 가지고 파악해보도록 하자.

 

직접적인 심리가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처음 서로를 알게 된 순간부터 그들의 마음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일치했으며...(중략)...만일 그와 헤어지게 된다면 그녀 존재 자체에 다시는 채울 수 없을 구멍이 생길 것만...

로테는 자기 친구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지만 그때마다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만...

편집자는 로테의 착실함, 을 강조하기 위하여 기어코 로테는 베르테르를 자신의 '오빠'로 삼고 싶다, 혹은 '자신의 여자친구들 중 하나랑 결혼'시키고 싶다. 정도로 격하시키지만, 위의 묘사는 사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묘사다. 자신의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기 친구들은 당연히 베르테르에게 부족하다. 왜? 베르테르에게 어울리는 존재는 내심 자신밖에 없다고 이미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석해보면 겉으로 보이는 베르테르 -> 로테의 흐름은 실제로는 정반대로 로테 -> 베르테르,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저렇게 로테가 베르테르를 좋아하더라도, 당시의 가부장제의 굴레에 묶인 로테로서는 자신의 감정을 속이는 것 외에는 달리 할 방법이 없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의 감정에 대하여 합리화를 하는 방법만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주인공들에게는 절망스러울 것이다. 만약에 현대 소설의 주인공이었다면 아마 남편을 버리고 사랑의 도피라도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만에 하나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저 둘이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되었을지라도 결론은 베르테르가 로테에 대한 사랑의 열정이 식는 것으로 마무리될것이다. 베르테르는 위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로테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왜 이런 식으로 구성이 되었을까? 그것은 작가 자신의 개인적 상황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실제 인물인 샤를로테를 사랑했지만, 샤를로테는 그 사랑을 거절하고, 단호하게 그의 마음을 막았다. 얼핏 보면 위의 베르테르와 로테, 의 관계와 비슷해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다. 위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로테가 베르테르에게 마음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 현실에서의 샤를로테는 자신의 남편인 케스트너와 괴테 중에서 케스트너를 택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모른다. 샤를로테가 자신의 심정을 남긴 편지는 전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심정을 남긴 편지가 없다고 해서 과연 현실에서 샤를로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안 로테처럼 행동하였을까? 만약에 샤를로테와 자신의 쌍을 그대로 소설에 반영했다면 뒤의 편집자의 시선으로 본 로테의 속마음 부분은 삭제되어야 하였으리라. 그런데 그러지 않았고,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오기 때문이었으리라 : 이런 일을 겪었으니 작가로서는 소설에서라도 샤를로테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야겠다, 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품었던 것이다.

 

두 주인공의 비극적인 상황을 살펴보았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으로 살펴보면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계급제 이데올로기를 옹호한다. 어째서 이렇게 볼 수 있는가? 이제 이 소설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계급제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게 만드는지 그 과정을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소설의 형식은 앞서도 설명했지만, 편집자가 외부에 있고, 그 안에 사료, 가장 안쪽에 두 주인공의 이야기가 있다. 가장 안쪽을 살펴보았으니 이제 나머지를 파악할 차례다. 일단 사료, 부분은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보낸 편지로 구성되어있다. 군데군데 로테에게 보낸 편지도 섞여있지만 사실 그 편지들보다는 빌헬름에게 보낸 편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앞서도 설명했지만 이 소설은 편집자가, 가상의 인물인 베르테르의 생애를 보고 너무 불쌍하게 여겨져 그 베르테르의 사료를 모아 하나로 펴낸 소설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편집자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갈 수 밖에 없다. 편집자의 입김에 따라서 편지를 빼고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편집자는 가상의 인물이 아니냐고 반론할 수 있다. 그렇다. 편집자는 가상의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가상의 인물이든 혹은 가상의 인물이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결과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런 검열을 거쳤고, 그 검열이 끝난 뒤에 남은 편지들은 그 편집자의 성향을 드러내어 준다는 것이다. 이제 편지를 다시 꼼꼼히 읽어보자. 직접적으로 신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이 있다.

 

다소 신분이 있는 사람들은 서민들과 늘 냉랭한 거리를 두려 한다...

나도 우리 모두가 평등하지 않고 그리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존경받기 위해 서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비난받아 마땅...

얼핏 읽으면 베르테르의 따스한 마음씨처럼 여겨지는 구절들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베르테르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행동한다 ; 서민과 왜 멀리 있으려 하는가, 나는 다르다, 서민에게 다가가겠다, 라고 한다. 그런데 직관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공이 보이고, 내가 그 공을 주으러 다가간다면 이 문장은 필연적으로 그 내부에 나는 저 공과 멀리 떨어져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공이 내 손에 있다면 내가 공을 구태여 주으러 갈 필요가 없지 않는가? 마찬가지다. 베르테르 본인이 이미 서민이라면 왜 서민에게 다가가려고 하는가? 서민이 아니고 그들과 신분차이를 명백하게 느끼기 때문에 다가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말하자면 자신은 높은 신분에 있고, 그 신분에서 아래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그런 모양새다. 결국 몸을 굽힐 수 있는 사람은 무언가 더 가진 사람이고 더 높은 사람이다. 나에게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몸을 굽히지 못할 것이다. 왜? 내가 몸을 굽히는 순간은 나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순간이 될터이니 말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에서 보인다. 여주인공 중 하나인 미도리는 주인공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자신이 다니던 곳은 그 근방에서 손꼽히는 부자동네에 있었는데, 거기서 다른 아가씨들은 아, 오늘 난 돈이 없어서, 라고 이야기하지만 자신에게 물어오면 그걸 부정할수밖에 없었노라고. 다른 사람들은 돈이 없다는 것이 정말로 돈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지만 자신이 말하는 것은 실제로 돈이 없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니까, 라고.

 

서민들은 그렇기 때문에 쉽게 몸을 굽히지 못하고, 늘 고개를 빳빳히 들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더 빳빳하게 고개를 세우게 만드는 부자들의 태도가 있다. 바로 '이 신분제는, 이 계급은 절대 바뀌지 않을 거야' 와 같은 태도다. 위의 베르테르의 말이 바로 그 태도에 정확히 일치한다. 베르테르는 말한다. 나도 우리가 평등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이다. 바꿔서 다시 써보겠다. '귀족들은 서민들과 자신이 평등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차별적인 발언이 아닐 수가 없다. 귀족들은 금으로 된 음식을 먹는가? 그들의 오줌과 변은 희귀금속으로 구성되는가? 그들이 서민들에 비하여 지적으로 더 뛰어난가? 그렇지 않다면 왜 귀족들은 서민과 평등하지 않는가? 결국에는 그들이 가진 재산때문이며 사회적 배경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문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지만 실제로 꼼꼼히 읽어보면 은근히 계급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문장이 한 두개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베르테르는 본인이 양심적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속한 계급과 다르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서민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행위를 계속하지만, 뒤집어 말하자면 베르테르가 서민들과 관계를 맺는 양상은 오직 돈을 나눠주는 것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요일마다는 그들에게 1크로이처를 주는 것을 빼먹지 않았는데, 어쩌다 예배 후에 내가 그곳에 가지 못할 때에는 여관 여주인에게 대신 주라고... 

맏이 녀석에게 약간의 돈을...

매주 몇 몇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얼마씩 나눠주던 돈은...


결국 진정한 인격적 관계는 서민들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베르테르는 서민을 절대 이해하려고도 하지도 않았고 자신과 이들은 이미 다른 존재라 라는 것을 마음 속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근본적인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왜 베르테르는 서민들에게 다가가려고 할까? 아마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부분을 살펴보면 자명해질 것이다.

 

당신이 여기 있는 것을 여기 모인 사람들은 탐탁치 않게 여기는 듯합니다...

상류 계급의 신사 숙녀들이 모임을 가지는 날, 베르테르는 그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스스로는 몰랐다고 하지만, 어쨌든 그는 참여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뻔했다.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B양도 그를 모임에서 모른척 하였고, 결국 백작에 의하여 파티에서 쫓겨나게 된다. 백작은 베르테르를 아끼던 터라 좋은 말로 타일러 내보냈지만 결론적으로는 파티에 참석 못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마을에서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

 

백작이 당신을 파티장에서 쫓아냈다고 하던데.

물론 여기에 대하여 베르테르는 쿨하게 반응한다.

 

파티 따위는 악마나 가져가라지요!

하지만 이 사건이 이 젊은 청년의 감수성에 과연 아무런 상처를 남기지 않았을까? 내가 볼때는 매우 큰 상처를 남겼으리라고 여겨진다. 이런 일은 아마 처음이 아니었으리라. 당장 베르테르가 편지를 보내고 있는 사람도 빌헬름이고, 이 빌헬름은 편지 내용으로 판단하건데 귀족으로 여겨진다. 귀족 친구를 두고 있는 한 어떻게든 신분 차이를 느낄 것이다. 이 신분은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벽으로 작용하고, 결국에는 절망에 빠지게 만들 것이다. 같은 친구인데 무도회장에 들어가면 저 사람은 귀족, 나는 하급이라니. 얼마나 절망스럽겠는가? 이런 계급에 대한 인식이 베르테르에게 서민들에게 다가가는 제스쳐를 취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서민에도, 귀족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계급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베르테르는 귀족이 되고 싶었으나 귀족은 태생적으로 될 수가 없었고, 서민은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되고 싶지는 않았기에 영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이 신분차는 B양과의 대화에서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저는 어젯밤은 물론이고 오늘아침까지도 당신과 사귀는 문제를 두고 설교를... ...당신을 경멸하고 모욕하는 소리를...

하지만 베르테르는 끝끝내 B양과 자신을 파티에서 내보낸 백작에 대하여 비난하지 않는다. 끝끝내 귀족 계급의 일부를 긍정하는 것이다. 완전히 부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자신도 귀족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쫓아내게 만든 귀족들에 대한 그런 분노는 감출 수 없었고 결국 그것은 귀족들의 특질, 서민을 멀리한다, 을 비난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며, 그런 특질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 라는 생각을 강박적으로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는 사실 시대의 한계 상 어쩔 수 없다고 여길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가장 큰 문제가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아이러니의 정점은 정말 슬프게도 이 소설 자체에 있다. 소설의 형식상 편집자가 가장 바깥에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이 소설은 베르테르라는 인물의 생애 자체를 그 편집자가 교환가치를 가진 상품으로 본 것이나 다름없다. 베르테르가 누구를 사랑하였는가, 라는 것이 상품이 되버린 것이다. 이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교환가치를 가져서는 안될 물품이 돈으로 교환될 수 있는 책으로 펴내졌다. 세상의 어느 누구의 인생이 감히 교환가치를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런 인생에 억지로 교환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이 이야기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으로 보았을때 계급주의에, 더 나아가 자본주의에 헌신하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자발적인 것이 아닌 편집자의 손에 의하여 말이다. 편집자의 변은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우리의 친구 베르테르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상품화가 되었다는 것은 그도 부정하지 못하리라.

 

결국 베르테르는 기만으로 점철된 사랑을 하고 있고, 그렇다고 다른 서민들과 인격적 연대를 가지지도 못했고, 그의 인생은 결국 상품화가 되어버린 최악의 삶을 보내고 말았다. 혹자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 실제 존재했던 사람도 아닐텐데, 그리고 작가가 이 책을 썼을때는 저런 정신분석학이나 마르크스주의가 있지도 않았는데 훨씬 뒤의 이론을 적용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이다. 옳다. 실제 존재했지도 않은 사람을 두고 열을 올릴 필요도 없고, 슬퍼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소설보다도 더 소설스러운 법. 이런 일이 현실을 살아가면서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에 대해서는 나도 사실 물음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정신분석학자들의 반론을 가져오자면 '프로이트는 원래 있던 정신분석학적인 원리를 발견한 것' 이며 발명한 것이 아니며, 이는 마르크스주의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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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내 머릿속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데니스 카스 지음, 임지원 옮김 / 알마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요즘 한가할때 저렴한 책들을 잔뜩 구입하는데, 이 책도 그런 책들 중 하나다. 그래서 거의 기대 안하고 책을 넘겨봤는데, 이게 왠걸, 이 책 장난아니게 재미있잖아? 그래서 혹시나 해서 상품 페이지에 들어가봤더니 리뷰도 거의 없고 그래서 내가 잡글을 하나 더 보태야겠다고 느꼈다. 왜 이 책에 이렇게 리뷰가 적은 걸까? 리뷰가 많았다면 굳이 이런 잡글을 쓰지 않았으리라.

 

이 책의 전반적 구성은 저자와 저자의 양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아들, 이라는 축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괜히 무게잡고 썼지만 이런 말이다. 저자의 양아버지에게 저자는 심적으로 고통을 겪은 적이 많았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에게는 그러지 않아야겠다, 라고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양아버지와 비슷해져만 가는 자신을 보면서 절망에 빠져가는데..

 

저 축에 뇌과학적인 지식이 잘 스며들어가있다. 뇌과학을 살펴보게 된 이유에서부터 그 뇌과학으로 인하여 사람을 일종의 생물학적 화학적 집합체로 보게 되었다던가, 하는 소소한 경험, 그리고 뇌과학을 한다는 합리화로 처방 약물을 복용하고 담배를 피우는 것을 열망하게 되는 등, (굳이 설명하자면 보상회로에 대한 실험의 자원자로 나서서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 인간적이다. 그리고 이 인간적 부분이야말로 딱딱한 과학서적에서 이 책을 구별하게 하는 힘이다.

 

사실 사람들마다 이 책에서 얻어가는 것이 다르겠지만, 나에겐 소득이 원하다, 와 좋아하다, 의 차이점을 이 책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하다, 라는 것은 여러 대상 중 하나를 원하는 것이고, 좋아하다, 는 한 대상에서의 정도의 차이라는 것이랄까, 하지만 아마 이 책의 가장 큰 소득은 등장인물의 말을 빌려서 말하는 것이 좋겠다.

 

자신의 강점을 파악하고 그것으로부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갑자기 도약해서 어디론가 뛰어오르기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위의 책, 66p. 

 

저 말은 글쓴이가 뇌연구 실험에 자원하여 스페인어를 외우는 실험에 참가하였을때 과학자가 한 이야기이다. 아는 스페인어는 잘 활용하였지만, 전혀 듣도보도 못한 스페인어 앞에서는 좌절을 겪었는데, 거기에 대하여 아는 부분에서부터 준비하라는 것을 말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이다. 전문적인 각주도 하나도 없는 책이지만 만약에 당신이 뇌에 대하여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이 당신의 강점이 되어줄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HPA라던가 PFC에 대하여 하나도 모르고 있어도 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느 정도 익숙해질테고, 그것은 여러분이 다른 저서를 접할때 자산이 되고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줄 것이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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