퀄리아님의 댓글과 글을 이제 방금 잘 읽었습니다. 사실 길게 글을 써주셨는데, 아마 저는 짧게 답변을 드릴 것 같습니다. 사실 시간도 별로 없거니와, 퀄리아님과 제가 어떤 건설적인 논쟁을 하기는 무리가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으로 이루어지는 논쟁 - 이라고 이름을 붙이려고 하는 그런 말싸움 - 이 원래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실 방금 읽었을때는 좀 발끈하기도 했었습니다. 퀄리아님의 페이퍼를 보면 1. 가연은 오독했다. 2. 가연은 이러저러해서 오독했다. 3. 그래서 오독했다. 4. 심각한 오독/오해/오류다. 가 되는데, 오독까지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무슨 격투게임도 아니고, 4번 항목처럼 오독/오해/오류의 삼단 콤보 필살기를 굳이 쓰실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퀄리아님께서는 제 글에 달아주신 댓글에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유익한 논쟁이 있기를 바랍니다.
논쟁에서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신다면야 상대방을 흥분시키고 발끈하게 만드는게 좋은 전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흥분한 사람의 논리만큼 논파하기 쉬운게 없으니깐요. 그런데 만약에 퀄리아님께서 원하시는게 진리의 추구 - 거창한 말로 - 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적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제프 호킨스, 의 책에 대하여 리뷰를 쓸때 제프 호킨스의 블로그에 찾아가거나 그의 메일에다가 '헤이, 제프, 내가 니 글에 반박글 달았음, 반박 오케이?' 라고 쓴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단순히 제 글에 대한 반박이라면 굳이 '유익한 논쟁' 이라는 말을 쓰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결국 제 글에 댓글을 달고 하신 것은 제가 답변하기를 바라는 것일텐데 굳이 저렇게 저한테 말씀하실 것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에 저와의 대화를 원하지 않고 그저 반박을 하고 싶으셨던 거라면 굳이 유익한 논쟁 운운하실 필요는 없었을테니깐요. 애초에 오독/오해/오류를 가졌다고 판단하는 사람과 무슨 논쟁을 원하시는 겁니까? 논쟁해서 저를 꺾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본인의 옳음을 관철하고 싶다, 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사실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말하는 이유는 마음이 상했다, 라는 것을 어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좀 아쉽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가 이제부터 쓸 글이 아쉽습니다. 퀄리아님께서 온건하게 말씀하셨다면 저 또한 이런 식으로 -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 말하지는 않았을테니깐요. 퀄리아님, 제가 오독을 했다면 저는 퀄리아님께서 너무 무비판적으로 제프 호킨스의 책을 독해했으며, 그 과정에서 텍스트에 대한 충분한 독해조차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퀄리아님. 사실 발끈하기도 했지만, 좀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저희는 똑같은 텍스트를 보고, 심지어 레퍼런스까지도 똑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그 외에도 비슷한 책들을 보았겠지요. 제가 찾는 책마다 퀄리아님의 페이퍼가 달려있는 것을 보았으니깐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인데, 사실 퀄리아님의 글이 어딘가 내용적으로 잘못된 부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결론을 내리는 과정인데, 가장 먼저 좀비, 엄밀히 말해서 p-좀비에 대해서 봅시다. 퀄리아님이 본인의 글에 쓰신 것이 옳습니다. 분명 p-좀비는 그런 양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리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쓰였다가, 도리어 논박에 쓰이게 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p-좀비의 연원은 퀄리아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차머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의 견해를 인용까지 하셨으니 당연히 아시겠지요.) 그리고 차머스 본인은 본인의 의식에 대한 견해의 분류에서 F type에 해당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깐, 물리주의를 논박하기 위해서 사용했다는 겁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겁니다. 퀄리아님께서는 이 p-좀비를 두고 제프 호킨스가 이원론적인 분위기를 띈 신경과학자에 대해서 '역설적 반론'을 펼쳤다고 주장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1. 신경과학자가 이원론적인 의식 개념을 전제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대화가 짧기에 무리가 있으며 (퀄리아님 본인도 아실텐데요, 오늘날 대부분의 신경과학자, 그리고 심리철학자까지도 물리주의를 기반으로 삼고 있지 않은 사람이 드물정도입니다. 당연히 저도 물리주의가 근본적으로 옳다고 봅니다. 물론 철학계나 신경과학계에서 전반적으로 의식에 대한 이야기가 줄어들어서 마땅한 논변이 예전처럼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 우선이겠지만요. 어쨌든 만약에 이 대화만으로 - '물론 당신은 의식을 가지고 있지요, 라는 말과, '의식을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정도의 말만으로 - 그 신경과학자가 이원론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시고 싶은 거라면 저는 퀄리아님께서, 더 나아가서 제프 호킨스마저도, 텍스트 독해를 불완전하게 하셨다고 생각이 듭니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안하시겠지만. 철학자들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이었던 크릭마저도 의식에 대하여 명확하게 규정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코흐와 같이 쓴 리뷰논문을 참조하십시오.)
2. 설령 이원론적인 의식 개념을 전제했다고 보더라도 그런 사람에게 정반대의 의미로 p-좀비를 이용하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대화이겠느냐, 라는 말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자, 퀄리아님과 제가 서로 게임을 하는데, 제가 가위를 냈습니다. 그러자 퀄리아님께서 보를 내셨지요. 저는 (우리가 가위바위보를 하는 줄 알고) 제가 이겼네요, 라고 말하자, 퀄리아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아직 안끝났다. 우리는 묵찌빠를 하는 거였다.
이해가십니까? 제가 제프 호킨스를 두고 무지하다고 말한 이유가? 짧은 대화만으로는 사실 뭐라고 결론내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정리하자면 우리가 다만 텍스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제프 호킨스는 상대방이 '의식과 뇌는 별개다, 라고 생각한다' 인 것이고, 저는 1. 상대방이 그렇게 생각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거나, 2. 설령 상대방이 그런 의도가 있었더라도 가위바위보 게임에 묵찌빠를 내니 참 의미없는 짓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퀄리아님께서 말씀하시는 역설적 반론, 의 수준이 되려면 적어도 '이런, 이게 바로 나야', 아 퀄리아님에게는 영어제목이 더 익숙하시려나요? the mind i 의 일화정도는 되어야지요. 의식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의식을 없애는 물약을 받아서 꿀꺽합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는 마셔도 아무 소용없네, 라고 말하지요. (이 일화를 아마 기억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사실 일반적으로 해석하자면 물리주의에 더 무게를 두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깊게 생각해보면, 그런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부연설명을 드리자면, 같은 일화를 가지고도 우리는 의식이란 처음부터 물리적으로 종속된 것이었다, 라고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테고, 의식이 물리적인 존재와는 동떨어진 그 무엇이었기에 약물이 듣지 않았다, 라고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저는 퀄리아님께서 너무 제프 호킨스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견해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여담이지만 p-좀비에 대해서 지금까지 이야기할때 중요한 것은 상상가능한 것이 정말 실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는 차머스의 논변과 잭슨의 논변인데, 둘다 물리주의를 비판하는 논변이지요. (사실 퀄리아님의 글을 읽다가 좀 웃었는데, 차머스는 누가 뭐래도 이원론자, 적어도 양상 일원론자로 구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논변과 초물리주의자에 가까운 제프 호킨스를 - 제프 호킨스는 본인을 피질 지상주의자라고 일컫지요, 책에서 - 의식 이분법에서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씀하시니, 웃을 수 밖에요.) 그런데 요즘 어느 심리철학자들은 맹시실험 - 이것도 어떤 것인지 아실테니 자세한 설명은 넘어가겠습니다 - 을 두고 좀비의 실재의 가능성이 성큼 다가왔다고도 해석합니다. 말하자면 형이상학적인 논변에 기대지 않고서도 좀비의 실재를 밝혀주는 - 그것도 물리주의쪽으로 - 일이 발생했다고 말입니다. 분명 제프 호킨스가 좀비를 이야기했을때, 저 실험을 염두에 두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감히 여기서 제안하건데, 저 실험은 사실 좀비의 실재를 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건 좀비의 실재를 밝혔다기보다는 라마찬드란의 용어를 빌리자면 일종의 phantom입니다. 좀비는 혼자서 움직이지만 이는 누군가에 빙의되어야만 드러납니다. 이들이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고 말입니다. (제가 빙의라는 말을 썼다고 저를 신비주의자로 몰아가지는 말기 바랍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거지, 진짜 빙의하겠습니까? 라마찬드란의 책을 읽어보면 무슨 용어인지 금방 감이 잡힐테니 그만 적겠습니다.) 이 사변적인 생각을 자세한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없으니 바로 다음 주제로 넘어갑시다.
두번째는 좀 더 짧게 쓸텐데, 이번에도 내용적 측면에서 그다지 그른 부분은 없는 듯 합니다. 저야 번역본만 읽어보았으니 원문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요행스럽게도 네드 블락, 에 대해서 언급하셨으니 이 사람을 가지고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이 네드 블락의 의식 이분법은 p의식과 a의식으로 나뉘는 것을 잘 아실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누었다고 해서 네드 블락이 의식은 p의식만으로 충분해, a만으로 충분해, 라고 주장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제프 호킨스와 그의 차이점이지요.
물론 퀄리아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옳습니다. 제프 호킨스는 분명 의식을 두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자의식, 감각질로 말입니다. 제프 호킨스의 사고 실험은 앞선 자의식이 기억과 동일하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여기서 돌이켜보면, 분명 제 리뷰에서는 제프 호킨스가 의식을 기억과 동일시한다, 라고 적었습니다. 이는 제가 불분명하게 적은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책의 예를 들도록 하겠습니다.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너 인사도 안하고 지나쳤어"
책에서 나오는 문장입니다. 노골적으로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이라는 용어를 쓰긴 했지만, 문장 자체는 그다지 문제가 될 것 없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살펴봅시다. 시계를 돌려 어제 A라는 사람이 B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A가 B를 그냥 지나쳐갔지요. 나중에 B는 A에게 위의 문장을 말합니다. 이 경우 B는 A가 의식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제 어제 A는 의식이 있었던 존재입니다. (의식에 대한 분명한 정의가 없지만 일상 생활을 하고 그랬으니 의식이 있었을테지요. 아, 물론 여기서 좀비논변으로 넘어갈 수도 있겠습니다, 만 쉽게 여기서는 일상적 의식 개념, 자의식을 다루고 있으니 여기에만 국한해봅시다. 자, 어제 A는 자의식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있었겠죠.) 그렇다면 B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이라고 말한 이유는 뭘까요? 그건 A가 B를 본 '기억'이 없기 때문입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저 문장은 이렇게 쓰여져야만 합니다.
"기억못하겠지만, 너 인사도 안하고 지나쳤어."
이제 좀 감이 잡히십니까? 제프 호킨스는 처음부터 기억과 의식 (여기서는 자의식) 을 동의어로 놓고 사고 실험을 전개한겁니다. 바로 이 부분을 저는 비판한 것입니다. 퀄리아님께는 이런 사고실험이 충분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퀄리아님을 보고, 너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계신다, 라고 말할테지요. 어쩌면 번역의 문제라고도 하시고 싶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책에서도 번역이 잘 나누어져 있습니다.
문제점이 명확하지 않으신지요? 한번만 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알츠하이머 환자분이 있다고 합시다. 보통 알츠하이머에 빠지게 되면 지남력, 시간, 가족 등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의 기억은 이제 사라져갑니다. 결국 그는 본인의 이름까지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분을 보고 우리가 저 분은 자의식이 없어졌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제프 호킨스에 따르면 당연히 그렇겠지요. 저분은 기억도 없고, 이윽고 본인의 이름마저 잊어버렸으니 말입니다. 자, 그럼 이제 중간지점으로 시계를 돌려봅시다. 이 환자분이 과거력, 지남력을 상실했지만, 본인의 이름은 잊어버리지 않은 때로 말입니다. 자, 이 분은 기억은 상실했습니다. 그럼 자의식은? 자의식도 상실한 것입니까? 아니 그 자의식이라는 것이, 무슨 색종이처럼 중간에 자르고 떼고 일부만 남기고 그런게 가능한 것인가요? 제가 30퍼센트의 기억을 잃어버리면 저는 30퍼센트의 자의식을 가지고, 제가 70퍼센트의 기억을 잃어버리면 자의식도 70퍼센트만 가지는 겁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위의 사고 실험을 보여드렸는데, 기실 저는 본인의 이름마저 잊어버렸다고 해서 자의식을 상실하였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아, 물론 이름은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이름으로 상징되는 자신의 대한 모든 정보) 아니, 더 나아가서 자의식은 감각질과 연관되어있고,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서로 떼어놓으려는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의식의 문제를 제프 호킨스처럼 자의식과 감각질로 나누는 것은 글쎄요,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요. 여기서 다시 라마찬드란의 말을 가져와야 될 것 같습니다. 감각질은 자기의 문제와 연관이 있노라고.
이제 제가 비판한 이유가 명확하십니까? 물론 제가 너무 함축적으로 불분명하게 적은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오독/오해/오류의 삼단 콤보를 먹을 것 까지는 없을 것 같군요. 뭐, 퀄리아님이 이런 생각에 빠지게 된 이유는 어쩌면 당연하다고 봅니다. 퀄리아님의 서재를 보면, 평소 물리주의를 본인의 심리철학의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 다른 분께 책을 소개할때 김재권의 심리철학을 가장 기본서적으로 드셨더군요. 김재권의 물리주의는 매우 유명합니다. - 또한 번역에 대하여 크나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시더군요. 그러니 이 두가지 색으로 이뤄진 색안경을 끼고 글을 읽지 않을 수는 없으셨을 것 같습니다. 이해합니다만, 가끔은 본인의 틀을 벗어나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아마 퀄리아님께서는 이 글을 읽고도 여전히 본인이 옳고, 제가 오독을 한다고 여기겠지요. 그리고 어쩌면 다시 재반박글을 쓰는 무익한 일을 하실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저는 다시 재재반박글을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서로 합의도 못할 상황이고, 제가 퀄리아님을 이해시키지도 못할텐데, 그런 무익한 짓을 왜하겠습니까? 저는 당연히 제가 옳고 퀄리아님께서 무비판적인 독해를 하셨다고 주장할 것 입니다. 퀄리아님이 하시는 행동 그대로 말입니다. 서로를 납득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서로 중점을 두는 부분이 다르고, 말하자면 지식투영체 - 김성호 교수의 책을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 의 방향이 너무 달라서 서로 다른 투영체를 지니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온건하게 제대로 된 논쟁을 했었더라도 저희가 어떤 합의에 도달하기란 요원했으리라고 봅니다. 지금은 더 심하겠지요. 오독(가연)과 무비판(퀄리아) 사이의 강은 너무 멀어서 건너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제 서재에 찾아와주시는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제대로 답글도 안쓰고, 친구추천도 많이밀렸는데도 말입니다. 사실 요즘 이런 저런 일들때문에 알라딘 서재에는 거의 안들어오고 있습니다. 빨리 신간평가단 일해야되는데, 에휴. 여튼 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다른 분들 한테는 답글도 하나도 안달았으면서 이렇게 비판하는 글에 대해서 끄적거리는 모습이 사실 제 스스로가 좀 꼴사나워서, 이 글을 빌어서 몇마디 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