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알라딘에 글을 안썼다. 솔직히 말하면 들르기는 들르는데, 서재에는 발을 거의 끊다시피 한 상태였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사실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다. 어떤 분께서 예리하게[...] 지적하셨다시피 누군가를 만났었다. 그리고 길지도 짧지도 않게 연애를 했고, 그 연애시간동안만큼이나 그녀를 기다리고, 결국에는 파국을 맞이하고, 상처를 입고, 상처를 입히고, 다시 또 혼자가 되는 이런 순환 속에서 지금에 이르러 다시금 나는 글을 쓰고 있다. 그러니까 글을 쓰기 시작한때가 슬슬 파국의 전조가 보였던 때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때는 너무 힘이 들어서 글은 쓰고 싶었는데, 답글이라던가 그런 것에 신경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누군가를 너무 사랑하면 안된다. 이게 내 상처투성이 연애의 결론이라서, 솔직히 슬프긴 하지만, 그래도 잊을 만큼은 앓았다. 그러니 슬슬 서재활동을 다시 해볼까 한다.

 

내 닉네임은 가연이다. 가연의 뜻을 가끔 물어오시는 분이 있..기도 한데, (정말이다. 이런 마이너 블로거의 닉네임의 뜻을 물어보기도 한다.) 보통 추측을 먼저 하신다. 첫 번째 추측은 대개 여자친구의 이름인가요, 다. 두 번째 추측은 옛날 여자친구의 이름인가요, 이고 말이지. 하지만 둘 다 땡이다. 내 닉네임은 아름다울 가, 그리고 인연 연을 써서 아름다운 인연, 이라는 상당히 닭살돋는 뜻이다. 사실 나도 어둠의다크의황제, 작은나를건드리면X되는거야, 같은 멋진닉을 쓰고 싶을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 닉네임을 쓰게 된 연유가 있다. 그건 내가 옛날 인터넷 어느 곳에서 활동할때의 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거기서 법정 스님의 '귀한 인연이길' 이라는 시를 본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시를 보고 너무 감명을 받았고, 따라서 인터넷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그리고 굳이 인터넷뿐만 아니라 앞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귀한 인연이고 아름다운 인연이 되기를, 하는 바람에서 이런 닉을 쓰게 되었다.

 

물론 지나고보니, 인터넷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다 귀한 인연은 아니었고, 이런 저런 다툼도 벌이기도 했고 사실 그럴때면 상대방이 미워지기도 했지만, 그럴때마다 한편으로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그냥 온라인에서 싸우는 거고, 이게 내 현실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해. 사실 정말로 그랬다. 그냥 욕설이 오가고, 정신승리가 오가는 정도는 현실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다만.. 내가 그런 일들을 겪으며 꼭 유념하게 된 것은 캡쳐의 중요성이었다. 응? 이게 무슨 소리냐고? 사이버세상은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단 하나를 빼고. 그 하나가 무엇이냐면.. 고소다. 그러니까 여러분, 싸울때에는 고소 안당하게 욕은 하지 말고.. 여튼 선을 지켜서 싸워야된다. 이 고소를 할때 주로 캡쳐로 증거를 모아서 하는 경우가 잦다. 그래서 내가 다니던 커뮤니티에서도 기고만장하던 네임드 몇 분이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어쩌다가 캡쳐이야기로 넘어갔는데, 여튼 욕이나 상대방에 대한 비난은 적당히하는게 좋다. 굳이 저런게 아니더라도 소위 말하는 '부관참시' 용으로 쓰이기도 하고 - 이게 무슨 말이냐면, 상대방이 머리에 열이 올라서 비아냥거리거나 그런 상황을 일일이 캡쳐를 해서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에 올린다. 그리고는 하나씩 주석을 단다. 이 사람은 이런 경우에 화가 났고 어쩌고 저쩌고.. 그리고 이제 ㅋㅋㅋㅋㅋㅋ 하며 웃는 것이다. 요즘은 트위터덕분에 이런게 정말 쉽게 일어난다. 그러니 항상 글을 쓸때는 내 글이 누군가에게 캡쳐당할수 있다고 생각하고 쓸 수 밖에 없다. 뭐,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상대방에 대해서 나쁜 말을 하면 상대방이 기분이 나쁘고 감정적인 대응을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조심하여야 된다, 가 되겠지만.

 

좀 길어졌는데,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귀한 인연일지라도 쉽게 끊기는경우도 많다. 처음 한두번은 만나고 이야기하고 그러다가도 연락이 뜸해지면 저절로 끊기게 된다. 이는 인터넷에서 만나서 오프라인 모임을 가지게 되었을때도 마찬가지인데, 오프라인으로 만나서 안면을 트더라도, 두 세번 자기일이 바빠서 모임을 못나가면 그대로 끝나게 된다. 다시 모르는 사람이 된다고 하여야 할까. 인터넷이라는게 사람을 사귀기도 쉽지만, 사람을 잃기도 쉬운 공간이다. 우리가 현실을 살아갈때 소위 가면을 쓴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가면을 쓰고 현실을 살아간뒤, 인터넷 공간에서는 우리는 그 가면을 벗으며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 가면을 벗은 얼굴을 우리의 본모습이라고 착각하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주변 사람이 아닌 낯선사람에게 자신의 본 얼굴을 드러내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것은 묘한 물이라서, 자신의 본 모습을 보인 사람에게는 다시 거리를 두게 된다. 헉, 내가 내 마음을 너무 많이 열어버린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에 말이다.

 

이런 경우도 있고, 남자 - 여자 쌍이 만났을때 이런 저런 문제점이 생기는 경우도 많다. 이런 수많은 커뮤니티의 폭파 이유이기도 하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겠고, 주변에서 보면 저런 경우가 좀 있었다. 여튼 인터넷으로 귀한 인연이 되기가 쉽지는 않더라. 내 짧은 인터넷 생활동안말이다. 결국에는 애인은 오프라인 현실에서 사귀시고, 또 그게 맞다, 인터넷에서는 저런 허튼 생각하면 안된다, 풋. 그런데 참 웃긴게, 저런 걸 피해서 동성간에 만나거나, 정작 나이차가 많이 나는 사람끼리 만나는 것도 모임이 잘 유지가 안된다. 인터넷에서야 익명성의 베일 뒤에서 누구나 나랑 비슷하겠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 만나는 순간 그런 생각이 지워지게 된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사람이 그 '가연'(이름은 예시다)이라고? 저 가연, 이 그 알라딘의 가연이라고? 무슨 여자 닉네임처럼 붙여놨는데 알고보니 산적같이 생겼다고? 게다가 나이는 왜 저래?

 

갑자기 왜 이렇게 길게 쓰냐면.. 사실 인터넷에서 만나는 것에 저런 힘든 사항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모임을 하나 만들고 싶다. 예전부터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독서모임을 만들고 싶다고 말이다. 며칠동안 생각을 해봤는데, 반년동안 한달에 책 한 권씩 읽으며 알라딘 서재에 발제나 의문을 올리고, 그런 것들을 종합해서 만나서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가는게 좋을 것 같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서 책에 대해서 적당한 시간동안 이야기하는것 말이다. 주제는.. 그래, 과학책이다. 과학책을 읽는 모임을 해보고 싶다. 한 달에 한 권 정도면 책을 다 읽고, 그 책에 관련된 것들을 가지쳐서 읽어볼만한 시간이 아닐까? 사실 이런 비슷한 독서모임이 있기는 있다. 백북스, 라고, 꽤 활발하게 조직되어있고 - 뇌에 대한 책을 펴냈던 박문호 박사가 있는 - 조직원들자체도 상당한 내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보인다. 하지만 뭐랄까, 저 모임은 너무 두꺼운 것 같고, 적당히 말랑말랑하면서도 적당히 깊이 있는 수준의 토론을 할 수 있는 모임이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해본다. 젠장, 적당히가 제일 어렵다, 풋. 그러니까, 지적호기심을 자극받아서 책을 읽기는 읽는데, 이 두꺼운 책을 읽는데 누군가와 함께였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을 대상을 하고 싶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 혼자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정말 혹시나 수요가 있는지부터 알아보는게 우선될 것 같다. 사실 나는 나서서 사람들을 모으거나 하는 것은 정말 젬병이다. 난 2인자 포지션, 그러니까 제갈량같은 포지션이 제일 좋다. 그리고 난 돈도 없고 피곤하고 게다가 지방에 있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흥미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협력해서 딱 6개월간만 시범삼아서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말인데, 여기 투표넣는 기능이 있다. 정말 만약에 혹시나 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주시길 바란다. 그러니까 6개월동안, 한 번 귀한 인연이 되어보실래요?

 

 

 

투표기간 : 2014-11-21~2014-12-05 (현재 투표인원 : 7명)

1.해볼 의향이 있다.
85% (6명)

2.그런거 없다.
0% (0명)

3.몰라, 일단 생각해보자.
28% (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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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11-21 14:36   좋아요 0 | URL
와- 가연님과 과학책 읽기라니, 너무나 근사한 제안이라 덥썩 물고 싶지만, 분야가 `과학`이므로 저는 조금 생각을 해볼게요. 전 과학바보라서 따라 잡을 자신이 없거든요 솔직히. 그렇지만, 바보 탈출의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까, 이건 조금 더 고민해보겠습니다. 제 고민이 너무 길어진다면 그 사이에 만들어져서 활동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하핫. 일단, 저는 3번에 투표합니다.

(댓글을 언어순화하여 살짝 수정했습니다 ㅎㅎ)

가연 2014-11-21 12:16   좋아요 0 | URL
정작 이렇게 말해놓고 오늘 아침에 신간평가단 신청은 소설분야에.. ㅋㅋㅋㅋㅋ 뽑힐지 모르겠지만요

에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어째요ㅠㅠ 저도 아는게 별로 없는데요ㅠ 그냥 다같이 읽자 이런 거에요. 다락방님께서 참여해주시면 과학에 문학의 향기를 더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멋지지 않아요? 힛. 무슨 일을 크게 벌일 생각도 없고, 한 대여섯명 정도 모이면 좋을것 같은데... 그만큼이나 모일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시작부터 너무 거창하게 하면 분명 힘들거든요...

마립간 2014-11-21 09:30   좋아요 0 | URL
http://blog.aladin.co.kr/dangdang

예전에 차력도장이란 이름으로 알라딘 마을 내에서 독서모임이 있었습니다. 오프라인 모임을 제안하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저는 참여가 곤란하지만 차력도장과 같은 형식으로 알라딘 온라인 모임 `과학도서` 독서모임에 참여할 의사가 있습니다.

가연 2014-11-21 12:22   좋아요 0 | URL
오프라인 모임 제안 맞아요ㅎ 아무래도 저런 독서모임 방식은 너무 힘들것 같아서 제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지금은 조그만 잎싹부터 만들어볼까, 생각중이에요. 그 잎싹도 피어날지는 잘..ㅎㅎㅎ 영 미심쩍지만 풋.

조선인 2014-11-21 11:58   좋아요 0 | URL
차력도장 운영자였던 사람으로서 잘 되기를 기원합니다. 과학은 저 역시 도전분야가 못 되긴 하지만 마립간님 말씀대로 온라인으로도 유지한다면 참여 의사가 있긴 합니다.

가연 2014-11-21 12:30   좋아요 0 | URL
아, 안녕하세요, 물론.. 일단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는... 온라인에서의 서재, 그리고 아마 페이스북 페이지 같은.. 여튼 그런 방식으로의 소통도 물론 있어야하겠죠. 다만 한 번 정도 대화를 직접 나누며 토론하는 것은 지금 생각으로는 뺄 수 없을 것 같네요. 거창하게 모임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런게 당장 뚝딱 생길리는 없을테고, 일단 혹시나 인원이 모인다면 6개월 정도 소모임형식으로 시험삼아 진행할 생각입니다만..ㅎㅎ 이거 투표라도 제대로 될지..

사실 저런 방식으로 하되.. 혹시나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들은 모여서 토론하는 형식으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렇게 되면 온라인으로 참여하는 사람만 있을테고, 오프라인으로만 참여하는 사람도 있을테니 간극이 벌어질 것 같아서... 이것 저것 복잡한 생각은 다 접고 일단 하나만 생각하려고 하는 중이에요. 여튼 관심 감사해요ㅎ

2014-11-21 1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1-26 1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1-22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1-26 1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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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5 06: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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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6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림모노로그 2014-11-26 12:00   좋아요 0 | URL
가연님 개인사에 한 획을 그으실 뻔 하였구만요 ㅎㅎㅎ어쩐대요....ㅎㅎㅎ

처음에 가연님 글과 닉 이미지로 여자분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독서모임 좋아하지만, 과학분야라 ㅠㅠ

그래도 가연님께서 주관하신다면 멋진 독서 모임이 될 것 같습니다.

참여하도록 노력해 볼게요 ^^ ㅎㅎㅎ

가연 2014-11-26 12:29   좋아요 0 | URL
드림님께서 참여해주시면 영광이죠ㅎㅎ 안그래도 막막한데ㅋㅋㅋ 일단은.. 인원 수를 보고..ㅎㅎㅎ 투표기간까지는 기다려봐야겠어요

비로그인 2014-11-26 21:18   좋아요 0 | URL
재밌을 것 같아요~~ ♥.♥
전 가연님 포함 3명 이하일 경우 꼭 참여할게요~(ㅇ?) 음...보험 쯤?

가연 2014-11-27 08:33   좋아요 0 | URL
만세! ㅎㅎ 갑자기 서재활동을 해오길 잘했어, 하고 눈물이 주륵...ㅎㅎㅎ 감사합니다, 힛.

2014-12-01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01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04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06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거두절미하고, 이 책은 그냥 묻히기 아깝다, 라고 생각되는 책들을 다섯 권 꼽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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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에서 특이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보통 그 물리학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지점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블랙홀같은 경우를 물리학에서는 특이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무한히 수축한 점과 같지만 동시에 중력이 무한대에 달하여, 그 어떤 물리학 이론도 그 지점에서는 갈기갈기 찢기고 만다. 또다른 특이점이라면 역시 태초에 있었으리라 짐작되는 빅뱅의 시초점을 들 수 있으리라. 물론 스티븐 호킹은 우주에는 시작도 없었다, 라는 주장과 함께 허수시간을 도입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떠올리는 빅뱅의 이미지는 하나의 무한하게 작고 무한한 에너지를 가진 점이다. 이 시초점에서도 우리는 어떠한 이론도 적용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이론이라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현실을 기술하고, 그 기술한 모델을 바탕으로 바람직한 예측을 가져오는데 그 의의가 있다. 저런 특이점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내 이론은 완벽하다, 라고 눈을 돌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실제로 현실에는 블랙홀이 존재하고, 거의 확실히 빅뱅이 일어났으리라고 높은 확률로 예측되어지고 있다. 이런 모순으로 가득찬 것도 현실의 일부라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물리학에서는 이런 특이점들을 기술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섭동의 방법을 쓰기도 하고,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통합을 통하여 어떻게든 돌파구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물리학에서는 특이점이 일종의 해소해야만 하는, 현실에 존재하는 모순덩어리이다. 눈을 돌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눈을 돌리지 않을 수도 없는. 그런데 이런 특성은 기술사학에서 쓰이는 특이점, 이라는 용어가 가진 특성과 매우 흡사하다. 기술사학과 물리학의 특이점은 그 쓰이는 용도 자체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성은 비슷하다는 이야기이다. 기술사학에서의 특이점은 인간의 기술이 너무나 발전하여, 이윽고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경지에 이른 상태를 가리킨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지만, 이 스마트폰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작동을 하게 되는지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직업적으로 스마트폰을 만들지 않는 한 말이다. 아니, 설령 만들더라도 분업화된 현재 산업체계에서는 그 기술의 산물에 대한 완전한 이해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특이점을 모른체 넘어가고 싶고, 특이점에 대하여 신경도 쓰지 않지만, 어느새 우리는 그 특이점에 둘러싸여 있고, 따라서 어디에 눈을 두더라도 우리는 그 산물을 만나게 된다. 이런 특이점은 긍정적인 의미가 될 수도 있고, 부정적인 의미로 작용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위의 특이점이 온다, 의 저자 레이 커즈와일의 경우 긍정적으로 특이점을 여긴다. '미래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노기술들과 인공지능은 스스로를 보수하고 더 발전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긍정적인 전망을 물리학자인 미치오 카쿠도 이어받아, 자신의 저서 미래의 물리학에서 마음껏 그 전망을 펼친다. 심지어 마지막에 이르면 소설까지도 쓰고 만다. (문자 그대로의 이야기이다. 마지막에 아직 다가오지 않은, 하지만 자신의 예측에 따라 찾아오리라 짐작되는 일상에 대한 소설을 썼다.)

 

하지만 미래는 정말 이렇게 장미빛일까? 두려움은 없다, 에 나오는 수많은 미래학자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금은 위기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식으로든 여기서 노력을 해나가야만 한다, 라고 말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이들이 말하는 위기나 파국은 '이런, 위기에 빠졌어, 파국을 맞이했으니 우리는 멸망할거야' 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어원 그대로 (파국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 시절의 전차경주에서 가장 위험한 주로를 가리킬때 쓰이는 용어에서 왔다고 한다.) 운동상태에서 어떤식으로든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상황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들도 완전히 부정적으로 미래를 보지는 않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에 따라, 그리고 우리의 노력에 따라 미래는 장미빛이 될 수도, 우중충한 구름에 뒤덮힐 수도 있다는 것이 저 책의 미래학자들의 요지이다.

 

그러나 아쉬운 부분이 있다. 미래학자들은 우리가 지금 노력해야 한다, 올해가 변곡점의 해이다, 등의 이야기를 하는데 구체적으로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만다. 만약에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됩니까?' 라고 묻는다면 이들은 추상적인 이야기를 할 것이다. 협력을 늘리고, 자연을 생각하라, 라고. 누가 그걸 모르겠는가? 하지만 어떻게 협력을 하고, 어떻게 자연을 생각하라고 하는지는 전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거기에 대해서 미래학자들은 너희가 스스로 알아서 생각해야만 한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또 똑같은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누가 그걸 모르겠는가? 이들은 환원적 방법을 비판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환원적 방법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야 만다. 이럴바에야 그냥 특이점이 찾아오더라도 그 산물을 그대로 즐기고 머리아픈것은 잊어버리는게 더 나은 방법이 아닐까?

 

말하자면 두려움은 없다, 에 나오는 미래학자들은 이런 상황에 빠져있는 것이다. 이미 정답을 알고 있고, 정답을 이야기하지만, 그 정답이 받아들여질만한 때가 아니다. 환원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왜 그런 비판을 받으면서도 의학이나 생리학 등의 과학에서 그 방법을 사용하겠는가? 왜 구조의 특성을 밝히고 새로운 단백질, 유전자 등을 조사하겠는가? 그냥 아, 모든 것이 연결되어있고 유기체이다, 전체를 살펴보아야한다, 라고 말하면 과학자들도 얼마나 편하겠는가?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왜 그럴 수가 없겠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전체를 다 살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쁜 꼬마선충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저 꼬마선충을 해부하고 유전자 서열 분석을 한다고 해서 그게 꼬마선충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다다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꼬마선충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냥 선충이네, 길쭉하네, 눈에 안보이니 신경쓰지 말자, 라는 지식만 얻고 싶은가? 

 

아직 환원적 사고방식을 비판할때가 아니다. 감히 말하건대 환원적 사고방식이 어느 순간 한계에 다다를 경우 전체적 사고방식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될 것이다. 아직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고, 아직은 답지를 미리 넘겨볼때가 아니다. 하지만 두려움이 없다, 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적어도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위치에 당면한 두 가지 큰 문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읽을만하다. 하나는 빈부격차이고, 하나는 지구환경문제이다. 그 어느 것도 미래의 물리학, 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우리 자신의 자각이 없으면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 자각은 어떤 식으로든 특이점을 맞이하였을때, 에라 모르겠다, 그냥 살자, 와 같은 태도가 아니라, 그 특이점에서 이것은 무엇일까, 저것은 무엇일까, 와 같은 관심에서 시작될 것이다. 특이점에서 발전된 기술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과학자들은 환원적 사고방식으로 계속 과학 지식을 쌓아올리도록 놓아두자.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 인간의 감성, 존엄과 관련된 - 제대로 주장하고 요구하여야 할 것이다. 이해할 수 없다고 던져버린다면 우리는 기술에 사로잡힌 망령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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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실 거의 알라딘 서재에는 안들어온다.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는데, 개인적인 일때문에 안들어오게 되니 어느 순간부터 글을 쓰기가 힘들어졌다. 개인적인 일을 드러내고 싶지 않지만 지금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그런 개인적인 일들인데, 그 일들을 빼놓고 글을 쓰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 서재는 내 일상생활의 배출구가 아니다. 여기에서는 다만 책 이야기만 하고 싶을 뿐이다. 서재에서 내가 무슨 일을 겪었다, 등을 시시콜콜하게 늘어놓는다고 해서 그게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로잡고 있는 그 일은 너무 커서 나를 놓아주지를 않는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책을 최근에 그럭저럭 읽고 있는데, 너무나도 내가 모르는 것이 많기에 글을 쓰기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예전에는 교양있는 사람들이 책을 쓰고 대중이 그것을 읽었지만, 지금은 대중이 책을 쓰고 그 책은 아무에게도 안읽힌다. 이걸 오늘날에 적용시키자면 지금은 정보가 난무하지만 정작 제대로 읽'힐'만한 글은 별로 없다.

 

내 글도 그런 수준의 글에 그친다면, 과연 그런 글을 끄적거려서 인터넷공간의 바이트수나 차지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정말 글을 쓰기가 어려워진다. 책은 무한해서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모르는게 많다.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현실에는 정말 내가 모르는 일들이 너무 많다. 겉만 슬쩍 찔러보는 수준으로 아는 지식에 지나지 않는 것들도 많기에 항상 부끄럽다. 그래도 정말 가끔씩 이 책에 관한 내용은 조금 적어봐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좋아하는 책이 항상 리뷰를 쓸만한 책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에, 아마도 이런 내용은 그나마 공익적인 - 위의 '누구나 게임을 한다'에서 분석했듯 더 큰 목표를 위해서 쓰여지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이 책을 사람들이 좀 더 많이 읽어보았으면 한다는 그런 주제넘는 바람.

 

마크 트웨인이 인구에 정말 많이 회자되는 - 누구나 이름은 알지만 읽지는 않는 - 명언으로 고전을 정의한 바 있지만, 나는 고전에 있어서 좀 더 일반적인 정의를 적용하고자 한다. 고전, classic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읽힐만한 가치가 있고, 시대가 지나도 그 향이 변하지 않으며 각종 생각의 기초가 되는 그런 책으로 말이다. (classic이 내 기억으로는 언어학적으로 그 기원을 따져볼때 선박, 이라는 classis에서 온 말이었던 것 같다. 이 선박이 왜 고전이 되었는가, 를 살펴보려면 당시 로마 시대의 시대상과 따져보아야 되는데, 자신의 돈으로 선박을 구입해 국가에 쾌척할 수 있는 사람을 classicus라고 부르고, 이들이 일종의 국가의 기초를 마련한다고 보아서 고전, 이라는 의미가 붙었던 것으로 본 적이 있다.) 예를 들어보자, 근대의 가장 뛰어난 고전을 네 가지 들어보자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의 특수이론과 일반이론(논문을 말하는게 아니라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에 대하여 일반독자를 대상으로 쓴 책을 말한다), 그리고 다윈의 종의 기원을 들 수 있고, 마르크스의 자본론,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이 바로 그런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위의 호모 루덴스 또한 고전이라고 부를만한 위치에 놓인 책이다. 부제를 보면 놀이와 문화에 대한 한 연구, 라고 적혀져 있는데, 보통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문화의 부분이 놀이같은데 이 책에서는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놀이'와' 문화다. 놀이와 문화가 서로 동등한 위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위징아는 자신의 주장, 놀이와 문화는 동등하며, 문화에 종속된 것이 아닌 한 형상이 바로 놀이다, 라는 것을 저 책 전반을 통하여 밝혀내고 있다. 그 접근법은 역사학적일수도 있고, 언어학적일수도 있으며, 그 둘다 일수도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책의 진가는 바로 머릿말에서 저자가 한 마지막 문장이다.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지금 쓰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쓰지를 말하야 한다. 그래서 나는 쓰기로 결정하였다.' 이 책에서 하위징아가 자신이 과감한 추론을 펼치는 것에 대하여 변명조로 이야기한 말이지만, 젠장, 너무 멋진 말이 아닌가? 

 

그런데 하위징아는 스스로가 과감한 추론을 펼쳤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반향은 현대에 이르러 크게 울리게 되었다. 그 반향에는 몰입, 과 같은 긍정심리학이 있지만, 가장 크게 울리게 된 것은 바로 저 책, '누구나 게임을 한다' 에 이르었을때다. 감히 말하건대, 이 책은 분명 현대의 고전이라고 불릴만한 책이다. 고전의 의미가 기초, 의 의미에 가깝다고 아까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이 책은 게임화Gamification에 대한 가장 뛰어난 책이며, 저자 스스로의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우리 사회의 변혁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현대의 고전과 과거의 고전 - 호모 루덴스 - 사이의 연결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놀이는 문화의 한 형상이고 문화 그 자체이며 인간 본질에 닿은 활동이다. 따라서 누구나 게임을 할 수 밖에 없으며, 이 게임을 통하여 우리는 문화, 더 나아가 인간의 삶 자체를 바꾸고 현실을 개선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감명깊은 것은 현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가지 경제체제에 있어서, 게임을 통한 제 3의 길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어느 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의 종말보다도 자본주의의 종말을 떠올리기가 더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그렇게 생명력이 강하면서도 그 자신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끝끝내 대립항으로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과연 안티테제로서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치열한 대립들 - 인간의 생존과 자본주의의 생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 은 게임, 이라는 우리 본유의 활동에 의하여 해소된다. 피드백과 자발성이라는 게임의 요소를 통하여 말이다.

 

두 책에서 게임, 혹은 놀이를 정의하는 (편의상 게임과 놀이를 동일선상에 두겠다. 물론 여기에 반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만약 하위징아가 컴퓨터 세대에 살게 되었다면 주저없이 컴퓨터로 즐기는 것들도 놀이에 넣었으리라는 것을 확신함에 있어 조금도 주저함이 없다.) 내용은 조금 차이가 있다. 루덴스에서는 고정된 시공간에서 일상의 제약에서 벗어나 이해득실이 없이 특별한 규칙에 따라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을 놀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게임을 한다, 에서는 목표, 규칙, 피드백, 자발성, 이라는 네 가지 특징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공통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규칙과 자발성이다.

 

규칙은 놀이의 요소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의 존재양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여러 제약과 규칙에 얽매여 살게 된다. 그런데 하나 현실에서 모자란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저 제약과 규칙들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자신의 힘을 제약하는 슈퍼맨에서 보통 샐러리맨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영영 슈퍼맨이 될 수 없는가? 아니다. 어떻게든 샐러리맨에서 슈퍼맨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현실에 자발성을 도입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위의 두 고전, 현대와 과거를 비추는 거울이 공명하며 밝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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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도 - 진중권의 철학 에세이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시간 전에 이 책을 다 읽었다. 따라서 이 리뷰는 갓 읽은 책에 대한 따끈따끈한 리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오븐에서 갓 구어낸 빵을 설명하는 것 처럼 말이다. 이 책의 경우에는 다 읽는데 두 시간 정도 걸렸다. 4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책이긴 한데,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분량이 짧은 것도 있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읽는데 짧게 걸린 편이다. 요즘 붙들고 있는 책들이 워낙 진도가 안나가서 나는 내가 읽는 속도가 많이 느려진 줄 알았다. 그런데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다.

 

몇 가지 지적하자면,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대해서 해석이 이상한 부분이 있다. 이 책에서 들뢰즈와 라캉이 워낙 많이 나오기에, 그 두 축 중 하나를 이루는 라캉에 대한 엄밀성이 부족하다면 책 전체의 신뢰성이 많이 떨어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은 라캉의 거울단계에 대한 저자의 해석인데, 이 거울단계는 아기가 파편화된 자신의 육체를 거울로 비춰보면서 일종의 통일성을 찾아나가는 단계이다. 그런데 저자는 외모에 대한 글에서 아기는 거울의 완전한 상과 동일시하여 상상계 속으로 들어간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외부에서 본 아기의 모습이 아기 자신이 느끼는 것 처럼 파편화되어있는가, 그러니까 아기의 팔이 다른 곳에 떨어져있고 다리가 구부러져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아니다, 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부연하자면 아기는 거울단계를 통하여 불완전한 아기가 완전한 상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단계를 통하여 이미 상징적(사회적)으로는 완전하지만 본인은 그렇다는 것을 모르는 아기가 상상계의 단계로 접어들면서 완전한 상을 획득한다고 보아야 한다. 단순히 저자가 말하는 것 처럼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접어들고, 그 사이에 간극이 있는 그런 상태라 보기 어렵다. 

 

실재에 대한 해석도 의아하다. 실재는 불안으로 가득찬 곳이지 저자의 말대로 touch를 불러일이키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상징체계로도 편입되지 않는 장 뤽 낭시의 감각의 터치, 라고 말할때의 저 '상징'은 라캉에서의 '상징'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상징체계에 균열을 내는 장 뤽 낭시의 파편, 또한 라캉에서의 실재의 파편이 아니다. 우리가 만약에 실재의 파편을 보게 된다면 감동touch가 아니라 두려움 - 어쩌면 이 또한 일종의 감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 그리고 불안감을 느낄 것이다.

 

다만 제목은 참 마음에 드는데, 서문에 저자는 몽타주로서 자신의 짤막한 사유가 적혀진다면 그것이 바로 약도, 지도에 가깝다고 적는다. 그리하여 생각의 지도, 라는 제목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이 책을 완벽히 규정해주는 말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또 마음에 드는 부분은 진보에 대하여 이야기한 부분과 종교에 대하여 이야기한 부분이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저자는 이성적인 사고의 화신이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다. 저자는 소수에 속하는 것을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가 좋든 나쁘든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의 이름에 오르내리는데, 그리하여 군중속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한 지식인이라고 본다면, 모순적이지만 소수에 속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런 용기가 그에게 군중속 지식인으로서의 명성을 가져다 주지 않았을까.

 

지나치게 많은 사상가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만 빼면 - 하나의 글에 적어도 서넛은 있는데, 예를 들자면 첫번째 글인 델포이의 신탁의 경우 글이 막바지에 이르면 각 문단마다 사상가가 하나씩 튀어나오는 (첫 문단부터 마지막문단까지 각각 데카르트, 하이데거, 푸코) 위엄을 자랑한다 - 이 책은 나무랄데없는 타임-킬링용 책이다. 저자가 이 책 안에서 자기 책을 빌려서 읽는 독자들을 (거기에 더하여 자기 책을 빌려보면서 비난? 혹은 비판하는 독자들을) 디스했으니 왠만하면 책을 사서 읽어주도록하자. 아, 물론 나는 반값할인이라 구입해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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