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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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까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부터 말해두자. 짬짬이 책을 읽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언제부터인가 (작가가 보기에)나는 과연 괜찮은 독자인가, 하는 의문이 여러번 들었던 것이다. 독서란 결국 책을 매개로 작가와 소통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야말로 일방적인 책읽기, 나 혼자만의 독백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러한 의문에서 비롯된 반성은 어쩌면 뒤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책이 쓰이고 만들어지는 과정을 제대로 알아보자,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즉, 책의 제목과는 다르게 좋은 작가가 되려는 목적보다는 좋은 독자가 되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 책을 읽었다는 말이다. 어린 시절 장난감이나 라디오가 작동하는 원리가 궁금하여 이리저리 뜯어보고 해체함으로써 결국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으로 망가뜨렸던 기억, 그 과정에서 눈으로 볼 수 없던 원리를 스스로 깨우쳤던 기억이 내가 이 책을 선택하게 된 동기였다.

 

소설보다는 오히려 영화《미저리》《쇼생크탈출》《돌로레스 클레이본》의 원작자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스티븐 킹'은 이 책에서 소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하기에 앞서 자신이 소설가로 성장하게 된 전 과정을 회고록처럼 쓰고 있다. 두 개의 머릿말에 이어 '이력서'라는 소제목으로 등장하는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만큼이나 흥미롭다.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난 까닭에 그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이상한 베이비시터에게 맡겨져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홍역으로 시작된 질병이 귀와 편도선으로 전이되어 초등학교 1학년을 다시 다녀야만 했던 기억, 소설 한 편을 완성할 때마다 어머니로부터 25센트 동전 하나씩을 받았던 초등학교 시절, 자신이 쓴 소설을 친구들에게 팔아 9달러를 벌었던 고등학교 시절과 선생님을 풍자했던 글로 처벌을 받았던 경험, 아내 태비사와의 만남, 결혼과 아이들, 생활고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창작활동, 첫 장편소설 <캐리>의 성공 이후 미국 최고의 작가로 성장하기까지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가 글을 쓴 진짜 이유는 나 자신이 원하기 때문이었다. 글을 써서 주택 융자금도 갚고 아이들을 대학까지 보냈지만 그것은 일종의 덤이었다. 나는 쾌감 때문에 썼다. 글쓰기의 순수한 즐거움 때문에 썼다. 어떤 일이든 즐거워서 한다면 언제까지나 지칠 줄 모르고 할 수 있다." (p.308)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글쓰기란 무엇인가'라는 소제목으로 쓰인 본론에 해당하는 글이라고 볼 수 있다. 어휘력을 증진시키고 올바른 문법을 익히는 것의 중요성과 더불어 작가는 지나친 부사어의 사용과 수동태 문장의 남용에 대하여 경계하라고 말한다. 또한 서술(narration)·묘사(description)·대화(dialogue)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들, 문단의 구성법, 묘사에 있어서 배경 스토리의 사용 등 좋은 글(이 책에서는 주로 좋은 소설을)을 쓰기 위한 방법들을 풍부한 예시와 함께 위트와 재치를 섞어 설명하고 있다.

 

"나는 지금 간단한 두 가지 명제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의 중심부에 접근하려 한다. 첫째, 좋은 글을 쓰려면 기본을(어휘력, 문법, 그리고 문체의 요소들을) 잘 익히고 연장통의 세 번째 층에 올바른 연장들을 마련해둬야 한다. 둘째, 형편없는 작가가 제법 괜찮은 작가로 변하기란 불가능하고 또 훌륭한 작가가 위대한 작가로 탈바꿈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스스로 많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고 시의적절한 도움을 받는다면 그저 괜찮은 정도였던 작가도 훌륭한 작가로 거듭날 수 있다." (p.172~p.173)

 

훌륭한 작가가 된다는 것은 다분히 선천적인 재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하다고 짐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스티븐 킹의 생각은 많이 읽고 많이 써봄으로써 훌륭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작가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홀로 있는 시간을 통하여 깊이 사유하고 삶의 교훈을 깨닫는 일 또한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스티븐 킹은 말한다.

 

"글쓰기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귀중한 교훈들은 스스로 찾아 익혀야 한다. 이런 교훈을 얻는 것은 서재문을 닫고 있을 때가 거의 대부분이다. 물론 창작 교실에서의 토론도 지적인 자극을 주고 흥미진진한 때가 많지만, 글쓰기의 실질적인 문제들을 도외시하고 곁길로 빠지는 일도 많다는 게 문제다." (p.293)

 

좋은 독자가 되는 길은 훌륭한 작가가 되는 것만큼이나 험난할지 모른다. 작가의 의도나 작품의 구조 속에서 드러나는 어떤 상징과 교훈을 무시한 채 무작정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분히 자가당착의 딜레마에 빠질 우려가 있다. 내가 그랬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책의 내용을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이 일반론이란 듯 떠벌렸다. 나는 간혹 그 과정을 즐겼고, 이따금 우쭐해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인류의 보편성을 발견하고 삶의 비의를 찾는 일에는 언제나 서툴렀다. 스티븐 킹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 글쓰기(엄밀히 말하자면 소설 쓰기)에 국한된 것이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좋은 글과 형편없는 글을 구분하는 안목을 기르는 방법, 즉 좋은 독자가 되는 방법을 기술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글쓰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 이 책의 일부분은 - 어쩌면 너무 많은 부분이 - 내가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부분이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한 내용이다. 나머지는 - 이 부분이 가장 쓸모있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 허가증이랄까. 여러분도 할 수 있다는, 여러분도 해야 한다는, 그리고 시작할 용기만 있다면 여러분도 해내게 될 것이라는 나의 장담이다. 글쓰기는 마술과 같다. 창조적인 예술이 모두 그렇듯이, 생명수와도 같다. 이 물은 공짜다. 그러니 마음껏 마셔도 좋다." (p.334)

 

글을 통하여 행복해지는 것, 스티븐 킹의 바람은 바로 그것이다. 직접적으로 글을 쓰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좋은 글을 읽고 무한한 상상의 세계에서 잠시 쉴 수 있는 것, 그 시간에 현실의 고단함을 잠시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글이 갖는 가치와 생명력을 함께 누리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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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2일 아침.  전날 모질게도 비가 내리던 하늘은 이상하리만치 쾌청했다.  벽제로 가는 운구버스에서 누나는 목놓아 울었다.  한이 깊어서였는지, 아버지의 인생이 불쌍해서였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나는 목울대 바깥으로 터져나오려던 울음을 끝내 토하지 않았다.  이른 새벽의 안개를 뚫고 속속 도착한 많은 운구버스와 리무진 차량이 접수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검은 상복을 입은 유족들은 쓴 커피 한모금을 마시며 담배를 피웠다.

 

사는 것은 기다림이고, 기다리는 빈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는 일이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이 이제는 죽어서도 제 순번을 기다려야 한다.  6시 40분!  직원이 유리문을 열고 접수를 받는다.  배정받은 번호에 따라 영정을 앞세운 시신이 화로로 운반되는 동안 가족들의 흐느낌이 이어진다.  화장로로 향하는그 짧은 시간에 어찌나 많은 생각들이 스쳐가던지...

 

엘리베인터처럼 단단한 문이 닫히고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 주황색 램프만이 서럽게 밝혀져 있었다.  하릴없는 유족들이 좁디 좁은 2층의 가족 대기실에 빼곡히 모여 앉아 화장의 진행상황을 알려주는 모니터만 주시했다.  꽉 막힌 대기실이 답답했던지 사람들은 이따금 조용히 일어나 방을 나갔고, 한동안 밖을 서성이다 들어오곤 했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를 파는 2층 카페는 옹색한 대기실과는 딴판이었다.  마치 죽음과 삶의 경계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모니터에 '냉각중'이라는 자막이 뜨면 화장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화장을 마친 시신은 한 줌 뼛조각이 되어 나왔고 마스크를 쓴 직원이 쓰레받기에 쓸어 담았다.  알 수 없는 무력감에 디딘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영정 사진을 앞세우고 흰 보자기에 싸인 분골함을 들고 벽제 화장장을 떠났다.  납골당에 유골함을 안치할 때까지 누구도 말이 없었다.  뉴욕에 사는 여동생은 늦게 도착한 것에 대한 죄스러움 때문인지 벽제 화장장에서부터 소리를 죽여 울었다.

 

아버지의 발길이 거쳐간 이 세상의 모든 곳에는 몇 웅큼의 증기로 변해버린 아버지의 정령들이 가족들 시선을 한참이나 앞장서서 날아와 안개처럼 퍼져 있을 듯싶었다.  나는 그 정령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이제는 더 멀고먼 하늘 저쪽으로 날아가 편히 사시라고 달래주고 싶었다.  자기 주장이 강하셨던 당신은 내 말을 순순히 따르실까?  몸뚱이가 불에 탄 다음에는 치매도 다 치유되었을 것이고 원래의 영혼으로 되돌아갔을 터였다.

 

아버지를 보내드린 지 오 일만에 다시 돌아온 직장은 낯설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알 수 없는 설움이 안개처럼 몰려왔다.  혈육의 정이라곤 눈곱만치도 느끼지 못했던 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회한을 당신이 불 타던 화장로에 함께 태웠다.  인간의 그 보편적인 죽음 앞에서 나는 절반쯤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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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8-25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아버님께서 이 세상을 뒤로 하고 가셨군요.
대학생때이니 삼십년도 더 전에 벽제에 간 적이 있는데, 전 제 또래 되는 사람을 보내면서 어찌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절차 하나하나가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더군요.
꼼쥐님, 절반쯤 무너진 다리를 다시 추스리고 일어나셔야지요.

꼼쥐 2014-08-26 13:54   좋아요 0 | URL
저는 벽제 화장장을 서너 번쯤 다녀온 듯싶어요.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사는 게 참 허망하다는 것이었어요. 일말의 감상이겠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느낌에 더하여 많은 생각들이 오가더군요.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요. 이제는 다시 일어나야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위로 고맙습니다.
 

엊그제 충남 공주의 한 교회 수양관에 차량이 돌진하여 1명이 숨지고 50여명이 다치는 큰 사고가 있었다. 사상자 대부분이 여름 성경학교에 참석한 어린 아이들이었는데 이 사고를 두고 고소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어 많이 놀랐다. 어떻게 사람이 죽고 다쳤는데 안타까워하기는커녕 그런 생각이 먼저 들 수 있었을까? 북한 아이들이 죽거나 다쳤다고 하더라도 딱하게 여겼을 텐데 말이다. 나는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밑바탕에는 일부 개신교 관계자의 극단적인 편가름이 한몫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제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던 시복식 행사만 보더라도 그렇다. 가톨릭과 교황 제도에 반대하는 일부 개신교 단체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광화문 광장 근처에서 반대 집회를 열었다고 하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집회 관계자의 주장에 따르면 “로마 카톨릭은 정식종교가 아니라 이단이며 이들에게 광화문 광장을 내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이고 너무 예우를 해주는 것"이란다.

 

게다가 어제는 개신교 단체에서 그토록 싫어한다는 레이디 가가(Lady Gaga)의 내한공연도 있었다. 다행히도(?) 반대집회가 열렸던 것은 아니지만 공연이 있기 오래 전부터 SNS를 통한 대대적인 반대운동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일부 개신교 관계자의 돌발 행동은 이제 그 도를 넘어선 느낌이 들 정도다. 이런 현상은 최근에 가시화된 반유대주의적 움직임과 맞물려 심각하게 인식하고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2012년 유럽연합(EU)이 6,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76%가 반유대주의 움직임이 증가하고 있다고 응답했다고 하지 않던가.

 

사실 집단 이기주의와 폐쇄성은 양날의 검과 같은 역할을 한다. 내부적으로는 조직원의 결속을 다지게 하는 긍정적 효과가 있는 반면 외부적으로는 다른 구성원과의 소통을 차단하여 외부 조직으로부터 소외되고 때로는 분노와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극단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러한 전략은 주로 권력 쟁취를 제1의 목표로 삼는 정당에서 선호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 개신교 집단에서도 같은 방법을 택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본다.

 

어찌 보면 정당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복지보다는 이데올로기를 이용하는 것이 먼저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대선 이전에 새누리당이 내세웠던 복지와 관련된 여러 공약이나 경제 민주화 공약들은 정권을 잡자마자 헌신짝처럼 내팽겨쳤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지지세력에게는 별 영향이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당장 시급한 만 원짜리 한 장을 얻기보다는 국가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이 우선이라는 말도 안 되는 허영심을 품게 마련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새누리당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희생(막걸리나 고무신, 또는 기초 연금을 받지 못한)으로 국가의 정체성(반공 이데올로기)을 세웠다는 허황된 착각을 하게 된다. 즉 대(국가)를 위해 소(복지)를 희생했다는 뿌듯함마저 품게 된다는 얘기다. 비록 오늘 당장 한 끼의 식사도 해결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아니라고 우길지 모르지만 인간의 심리 저변에는 누구나 허영심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야당도 그와 같은 정당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선거에 적극적으로 이용하면 될 것이 아니냐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국민 대다수의 이데올로기는 반공이념인데 그것은 이미 새누리당이 선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야당에게는 그들만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혹시 복지 이데올로기가 있지 않느냐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복지는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없다. 물론 통합진보당은 그들만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과 같은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사람이 극소수라는 데 문제가 있다. 폭넓은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이데올로기를 누가 선점하느냐의 문제는 선거의 성패와 직결된다. 경제나 복지는 부수적인 문제일 뿐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의 개신교 집단도 그와 같은 방법론을 택하고 있는 듯 보인다. 예컨대 '예수 천국, 불신 지옥'과 같은 극단적 구호는 외부에서 바라볼 때 허무맹랑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개신교 신도들에게는 조직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신도 개개인에게 이데올로기와 같은 대의명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론은 적어도 종교에 있어서는 그 한계에 이른 듯하다. 외부 세력의 반감이 날로 심해지고 그에 맞설 수 있는 특별한 대비책도 없기 때문이다. 가장 낙관적인 상황은 전국민을 개신교 신자로 받아들임으로써 반대세력을 없애는 것인데 그게 가능키나 한 일인지... 개신교 신자의 점진적인 감소추세에 있는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는 외부 세력과 소통하고 그들과 평화롭게 지내는 게 상책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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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8-17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톨릭 신자로서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일부 개신교 집단에서 반대집회를 연다는게 참....
전 개신교도 불교도 다 존중하는데 말입니다.

꼼쥐 2014-08-25 22:31   좋아요 0 | URL
저도 세례를 받았으니 카톨릭 신자이기는 하지만 불교든 이슬람교든 배척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아요. 종교 때문에 평화를 깬다는 것은 종교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하죠. 그 사람들 생각은 도대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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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알고 싶은 유럽 TOP10 -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두 번째 이야기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2
정여울 지음 / 홍익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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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년 전쯤에 프랑스로 이민을 간 후배가 있다. 예상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이민이었다. 제 나라를 떠나 가까웠던 가족이나 친구들과 헤어져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겠다 마음먹는 일은 그에게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터였다. 그가 떠나기 전 사정을 모르는 지인들은 그의 결정을 두고 무책임하다거나 무모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고, 잘했다 응원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는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정들었던 대한민국을 그렇게 떠나갔다.

 

살던 집과 가재도구를 정리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던 시기에 그는 잠깐의 짬을 내어 나를 만나러 왔었다. '이제 떠나면 형도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아서...' 하며 말끝을 흐렸다. 복잡한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의 얼굴에서는 쓸쓸함이 묻어났었다. '그렇겠지' 나는 곧바로 수긍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는 자신이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어눌한 어조로 떠듬떠듬 내뱉었었다.

 

그의 말인 즉슨 대한민국의 교육 환경에 자신의 아이들을 맡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민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라고 했다. 그렇다고 무슨 자식에 대한 대단한 기대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아이들만큼은 적어도 누구의 강요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지 않고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계획하고 그렇게 살도록 하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라고 했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그럭저럭 참고 기다리면 일말의 희망이 있으려니 기대했었지만 MB정부를 지나 다시 또 보수정권이 권력을 잡는 것을 보았을 때 대한민국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접었다고 했다.

 

엊그제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간이 되면 한번 놀러오라는 의례적인 인사였지만 그의 말 속에는 그리움이 깃들어 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들은 이제 프랑스 사회에 완전히 적응했노라며 들뜬 목소리로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정여울 작가의 <나만 알고 싶은 유럽 TOP10>을 읽으며 프랑스로 이민을 떠난 후배 생각을 했었다. 여행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충만한 자유, 그것은 구속에서 벗어난 육체적 자유이기도 하거니와 동시에 자신에게 익숙했던 틀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비춰지는 사람들과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범위에서 축조된 인공구조물에서 느끼는, 말하자면 풍경에 동화된 사물에서 느낄 수 있는 자유가 아닐까 싶다. 사람을 풍경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 사물을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게 하는 겸손, 집착과 욕심에서 한 발 비껴서게 하는 관조는 여행을 통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이자 '자유와 행복은 등가'라는 삶의 방정식을 푸는 실마리이이다.

 

"처음 유럽여행을 시작했을 때는 유럽의 웅장한 건축물과 화려한 미술관이 정말 부러웠지만, 이제는 드넓은 광장에서 햇살바라기를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광장의 문화가 부럽다. 굴지의 건축물이나 걸작으로 가득 찬 미술관은 우리가 지금 당장 가질 수 없지만, 광장의 문화, 골목길의 문화는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함께 누릴 수 있는 기쁨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p.91)

 

이 책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단순히 눈을 휘둥그레하게 하는 명소의 소개가 아니라 일상을 들여다보는 관객으로서의 삶, 사색과 공감을 가능케 하는 인문학적인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짧은 일정에 맞추어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보려고 욕심내던 젊은 시절의 여행이 아닌 역사 속에서 자신의 삶을 차분히 지켜볼 수 있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중년의 여행을 작가는 권하고 있다.

 

이민을 간 후배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거창한 여행이 아니라 텐트 하나 싣고 냉장고 속 음식 재료 몇 가지 담아 무작정 떠나는 여행, 맘에 들어 차들 멈추게 되는 이름도 없는 숲에서의 하룻밤을 그는 원없이 하고 있다고 했다. 때로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들을 보며 감상에 젖기도 한다고.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는 삶이 이토록 변화무쌍한 것인지 미처 몰랐노라고 그는 말한다. 문득문득 어쩔 수 없는 향수를 느끼기는 하지만 행복하다고 했다, 그는.

 

"오랫동안 혼자 여행을 하는 것은 우리의 잃어버린 신체성과 주체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내 몸이 어떤 순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내 몸이 얼마나 휴식과 명상을 요구하는지, 내 몸이 어떤 상황에서 진정으로 깊은 희열을 느끼는지, 그런 것들을 여행 속에서 깨달을 수 있다면 그 여행은 평생 약효가 지속되는 보이지 않는 명약이 된다."      (p.334)

 

엊그제의 전화통화에서 후배는 한국의 뉴스를 접할 때마다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떠나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 느낀다고 말했다. 천진한 고등학생은 수학여행 가다 죽고, 수학여행에서 죽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던 부모는 윤일병이나 임병장처럼 군대에서 자식을 잃고 그게 어디 나라라고 할 수 있느냐며, 아프리카 후진국도 그보다는 낫겠다며 마치 제 일처럼 분통을 터뜨렸다.

 

나는 이따금 후배가 그립다. 제 나라를 떠나 유목민의 삶을 자청한 후배, 여행자의 그것처럼 향수를 못 견뎌 하는 후배, 그럼에도 천진하게 웃음을 흘리는 후배, 나는 그에게서 잠시 여행을 떠난 막내 동생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그는 여행자처럼 쉽게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대한민국이 절대 허용하지 않는 삶의 자유를 그가 끝내 거부하는 까닭이며, 그것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그의 비장한 결심을 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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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어수룩하고 수더분해 보이는 사람이 좋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비즈니스 관계로 만나는 사람이야 깐깐하더라도 일처리가 빠르고 꼼꼼하면 그만이지만 사적인 자리에서조차 그런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노 땡큐'다.  나는 그런 사람과는 단 10분도 같이 있기 어려울 것이다.  숨이 콱콱 막히는 상황을 참아가며 어쩌다 그 시간을 넘긴다면 결국 나는 심폐소생술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구강 대 구강법을 완벽하게 시연할 수 있는 어여쁜 아가씨와 만나는 경우라면 억지로라도 참고 기다릴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성향 탓인지 나는 규칙을 강요하는 행위에 대한 병적인 거부반응을 보이곤 한다.  예컨대 '외출에서 돌아오면 반드시 손을 씻어라' 라든가 '우측통행을 생활화 하라'와 같은 자잘한 규칙에서부터 '공부를 열심히 해라'나 '최선을 다하라'와 같은 훈계조의 말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일상을 지배하고 강제하려는 행위는 옳지도 않으며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내가 해보니 이러이러한 점이 좋았고 저러저러한 점이 나쁘더라 그러니 너는 어떤 것을 선택할래?' 하는 식으로 상대방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전적으로 옳다.  소위 어른이나 선생님, 또는 지도자라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만 하고 장단점을 충분히 설명했는데도 불구하고 안 좋은 쪽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상황에서 견딜 수 있는 충분한 인내력만 길러주면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믿는다.

 

최근에 불거진 윤일병 사건만 보더라도 그렇다.  군대만큼 획일적이고 통일을 강제하는 조직이 없다.  무엇이든 고참의 기준에 맞추어야 하고 그 기준에 따르지 않는 후임병사는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리게 된다.  나도 군에서 어금니 하나를 잃었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는데 '나를 포함하여 내 밑의 후임병사 전원은 새벽 1시에 창고로 집합하라'는 고참의 명령을 내가 거부했다는 것이 내가 맞은 이유였다.  어이없지 않은가!  그런 곳이 군대다.  소위 '까라면 까야 하는 곳'이 군대라는 말이다.  나는 그때 턱뼈가 부러지지 않고 살아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세월호 특별법 문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여당의 원내대표는 '피해자에게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어 가해자를 처벌하게 한다면 자력구제를 금지하는 법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말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보다는 차라리 '정부와 여당이 워낙 잘못한 게 많아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그 부탁은 도저히 들어줄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여당의 원내대표다운 모습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만 더 말하고 싶다.  일정한 나이가 되지 않은 어린 학생들에게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없는 것처럼 일정한 연령 이상의 노인들도 마땅히 배제시켜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아이들이 대략 20여 년을 선거권 없이 지내고 있으니 노인들도 100세에서 20년을 뺀 8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그렇게 해야 하는 게 공평하지 않은가.  나도 마땅히 그 나이가 되면 속세의 모든 이권다툼에서 조용히 물러날 용의가 있다.  그 나이가 되면 지나온 날들을 반추하며 평화롭게 살고 싶은 것이다.

 

여러 잡설을 늘어놓았지만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내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교회의 책임은 선교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자신이 믿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행위는 누가 뭐래도 '죄'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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