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총리 후보자의 '말'이 연일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이제껏 '말'로 먹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지만 자신의 '말' 때문에 이런 곤욕을 치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여러 사람들의 '말'이 언론에 오르내렸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이지만, 그 '말' 한마디로 온 국민들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걸 보면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우리네 속담이 허언이 아닌 듯싶다.

 

20세기초 판소리가 변하여 만들어진 '창극'이라는 무대극이 있었다.  지금은 그 명맥마저 끊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 사실이지만 한일합병 이후 나라를 잃고 실의에 빠진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위로했던 것이 '창극'이 아닐까 싶다.  1인다역의 마당극 형태인 판소리가 다인다역의 무대극 형태로 전환된 창극은 창과 더불어 위트 있는 대사로 국민들을 울리고 웃겼던 듯하다.

 

그러나 총리 후보자의 '말'은 창극의 대사와는 달리 국민들에게 위로나 감동을 주기는커녕 분노와 탄식만 더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의 말은 코미디 수준을 넘어 저질 개그로도 보아주기 어려운 수준이다.  다음과 같은 말에 국민 중 누가 동의할 수 있겠나.

 

"하나님은 왜 이 나라를 일본한테 식민지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우리가 항의할 수 있겠지, 속으로. 아까 말했듯이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야. 너희들은 이조 5백년 허송세월 보낸 민족이다. 너희들은 시련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남북분단을 만들게 주셨어. 저는 지금 와서 보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우리 체질로 봤을 때 한국한테 온전한 독립을 주셨으면 우리는 공산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받아와가지고 경제 개발할 수 있었던 거예요, 지금 우리보다 일본이 점점 사그라지잖아요, 그럼 일본의 지정학이 아주 축복의 지정학으로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거란 말이에요."

 

"제주도 4·3 폭동사태라는 게 있어서... 공산주의자들이 거기서(제주도) 반란을 일으켰어요."

“조선 민족의 상징은 아까 말씀드렸지만 게으른 거야.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는 거 이게 우리 민족의 DNA로 남아 있었던 거야”

 

“우리나라는 예전과는 다르게 선진국 반열에 올랐기 때문에 굳이 일본의 사과를 받아들일 정도로 나약하지 않은 국가가 됐다"

 

"일본에 대해 더 이상 우리 입으로 과거문제를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해방된 지 6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과거에 매달려 있는 우리가 부끄럽다"

 

"아이들이 공짜 점심을 먹기 위해 줄을 선 모습이 식량 배급을 타기 위해 줄을 선 북한 주민과 내용면에선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나는 그가 한 '말' 중 어떤 대목에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다.  그가 혹시 일본 국적을 갖고 있지나 않은지 의심스럽다.  그가 계속해서 이런 '말'을 하다가는 '창극'에 쓰이는 '말'이 아니라 '참극'에 쓰이는 '말'이 되지나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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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4-06-13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말종들을 만든 것은, 이승만입니다.

친일파 일소를 위한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박살내서,

친일파를 한 명도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출세하게 해준 장본인인데,

지금 국립묘지(현충원)에 있죠. 독재자 박정희와 함께...

꼼쥐 2014-06-19 17:23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친일을 했던 사람들의 후손이 떵떵거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은 가난하게 사는 이 땅의 현실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화도 나구요.
 

가까운 공원이나 산에서 꾸준히 몇 년 동안 아침운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지나치며 눈인사를 주고받는, 또는 그래야만 하는 사람이 줄잡아 대여섯 명 이상은 되지 않을까 싶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게 영 달갑지만은 않은 것이다. 간밤에 꾸었던 시시껄렁한 꿈의 기억들을 얼굴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바른 채,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로, 게다가 개기름인지 땀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추레한 얼굴로 어색한 웃음을 지을 때의 표정이란...

 

아무튼 나에게도 좋든 싫든 눈인사를 하며 지나치는 사람이 몇몇 있다. 서로 이름도 모른 채 인사만 주고받다가 어느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이름은 물론 그 사람의 과거 경력 두어 가지 정도는 듣게 마련인데 웃기는 건 그 정보를 전달한 주체가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마 바람이나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내가 아침마다 산을 오르면서 알게 된 사람 중에는 욕쟁이 할머니 A씨와 슈나우저 할머니 B씨, 순둥이 아저씨 C씨와 성악가 할아버지 D씨, 그리고 육체파 젊은이 E씨가 있다. 물론 그 별명은 모두 내가 지은 것이다. 본인들은 그렇게 불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나에게 가장 강력한 인상을 심어 준 사람은 당연 욕쟁이 할머니 A씨이다. 과거에 젊었을 때는 발레를 전공하여 발레 학원도 운영했었다는데 여든두 살의 나이에 이른 요즘은 산을 오르는 것조차 힘겨워 한다. 그런데 유난히 에너지가 넘치는 순간이 있으니 그건 다름 아닌 산 중턱에 위치한 밤 농장 주인과 시비가 붙을 때이다. 

 

아, 요즘은 정말 밤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철이다. 농장 주인 아저씨는 50대 중반이나 60대 초반쯤의 나이로 보여지는데 소문에 의하면 홀애비라고 한다. 등산로와 인접한 곳에 밤 농장이 있으니 자연 등산객들과는 사이가 좋을 리 없다. 등산로에 떨어진 밤송이를 줍는 것까지야 누가 뭐랄 수 없겠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게 어디 그런가. 줍다 보면 욕심에 철조망 안쪽까지 기웃대게 마련이고 이 모습에 격분한 주인 아저씨는 매년 가을이면 등산객들과 사흘이 멀다 하고 시비가 붙었다.

 

그나마 밤이 열리지 않는 다른 계절에는 농장 주인 아저씨도 등산객들과 인사도 하고 가벼운 얘기도 나누는 편인데 어쩐 일인지 오늘 아침에는 욕쟁이 할머니 A씨와 느닷없는 시비가 붙었던 것이다. 이유인 즉슨 욕쟁이 할머니 A씨가 허락도 없이 밤 농장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아마도 왕꼬들빼기 새순을 뜯으러 들어갔던 모양인데 평소에 억화심정이 있었는지 주인 아저씨는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격하게 화를 냈다.

 

지나던 여러 사람이 만류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시비는 말싸움만으로 그럭저럭 끝이 났지만 그 불똥이 나한테까지 미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모여든 여러 사람 중에 그래도 내가 만만했던지 욕쟁이 할머니 A씨는 나를 붙들고 주인 아저씨에 대한 험담을 한나절 늘어놓는 게 아닌가.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할머니에게 붙들려 농장 주인 아저씨의 험담만 구구절절 듣다가 산을 내려왔다.

 

그나저나 욕쟁이 할머니 A씨에 따르면 농장 주인 아저씨가 아침 일찍 나오는 이유는 여자를 꼬시기 위함이라는데 사실인지 모르겠다. 삼자대면을 하여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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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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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는 누군가 끊임없이 걸었던 마음 발자국들로 가득합니다. 길이 없어 더 길다웠던 어느 길 모퉁이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기약도 없이 기다렸던 적이 있나요? 그 많은 그리움들이 소리도 없이 소복소복 쌓여갑니다. 하여, 하늘은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라봄으로써 허공의 어느 곳에 내 자신의 마음길을 내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유도 없이 심란했던 어느 날, 실체가 없는 허공에 무심한 눈길이 닿았던 것도 따지고 보면 분주히 다녀갔던 누군가의 마음길을 묵묵히 걸어본 것일 테지요.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을 읽으며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히말라야였을까? 전문 산악인도 어렵다는 안나푸르나 환상종주(Annapurna Circuit)를 여행 초짜였던 그녀는 무슨 배짱으로 시작한 것일까? 나는 궁금했습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그 까닭을 누군가에게 논리적으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어도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한동안 마음을 잃고 헤매일 때 육신의 고통을 잊고 오롯이 마음 하나에 의지하여 나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곳은 히말라야가 유일하겠지요. 하늘과 땅이 맞닿은 그곳에서 육체의 고통은 다만 고양된 영혼의 승화로 이어져 선명한 마음길을 미끄러지듯 내달릴 것입니다.

 

"어린 시절, 사남매의 맏이였던 내겐 몇 가지 금기어가 있었다. 힘들어요, 무서워요, 못해요. 어머니는 내게 '강인함'을 요구했다. 상처를 받아도, 슬픈 일이 생겨도,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 없이 이겨내기를 바랐다. 죽는시늉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것이 자존심이라고 했다. 이 가르침은 내 인생을 통제하는 정언명령이 됐다. 히말라야 산속이라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p.48 ~ p.49)

 

정유정 작가의 첫 에세이인 이 책은 김혜나 작가와 함께 떠난 안나푸르나 환상종주 17일간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작가는 자신의 지난 시절을 소설 속의 한 장면처럼 회상하고 있습니다. 전문 이야기꾼답게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일정에 적절한 위트와 유머를 가미함으로써 어느 여행기에서나 등장하는 여행지에서의 감상이나 애수, 기족이나 연인에 대한 그리움 등 끈적끈적하고 구태의연한 이야기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했던 이야기, 일정 내내 변비에 시달렸던 이야기, 일정에 쫓겨 혹은 현지 사정에 의해 세수도 거른 채 일정을 소화했던 경험, 고산병으로 착각하여 먹었던 약의 부작용으로 겪었던 일화 등 여행에 서툰 작가의 일상이 세세하게 드러납니다.

 

최대 난관이었던 해발 5416미터의 쏘롱라패스(Thorung La Pass)를 오르는 과정은 마치 소설 속의 이야기처럼 긴장감을 갖게 합니다. 나는 '작가는 과연 오를 수 있었을까?'하는 궁금증과 조바심으로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작가의 입담과 재치있는 유머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죠. 그러나 이따금 등장하는 그녀의 가족사와 지난했던 어린 시절에서는 울컥하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쏘롱라패스에 올랐던 작가의 기분은 어떠했을까요?

 

"혜나가 먼저 일어섰다. 나도 따라 일어났다. 몸을 돌리고 발아래 설산들을 바라보았다. 귓속에서 맥박이 쿵쿵쿵 울고 있었다. 기적 같았다. 이 고갯마루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사실이. 새벽녘에 찾아든 사자의 손을 생각하면 더 더욱.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승민이만큼 자유로웠다는 것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오롯이 나 자신일 수 있었다는 게.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었다는 사실도. 그러므로 행복했다. 양팔에 설산들을 끌어안고 트위스트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p.186)

 

세상과 맞설 힘을 얻기 위해 안나푸르나를 택했다는 작가의 심정은 백번 이해가 가면서도 나는 그녀의 용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자꾸 희미해져만 가는 자신의 마음길을 선명하게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은 극한의 고통을 체험함으로써 육신의 욕망을 잠시만이라도 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육신의 욕망을 뚫고 내 온전한 마음이 하늘에 닿게 하는 것, 그 망망한 허공에 나만의 마음길을 내는 것이야말로 흔들리지 않고 세상을 살게 하는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필요에 의해 선택한 성격과 달리, 나는 태생적인 겁쟁이다. 낯선 일을 싫어하고, 노상 허둥대고, 곧잘 상처받고, 넌더리나게 망설인다. 혼자 욱하고, 혼자 부끄러워한다. 사소한 일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졸렬하게 군다. 그걸 들키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한다. 이토록 후진 자질로, 극단적인 두 성질의 충돌을 끊임없이 겪으면서 그 기나긴 어둠을 어찌 통과했는지 스스로 신통할 지경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때가 있어 인간으로서 성숙해지고 삶이 단단해지지 않았겠느냐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 어둠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과 싸우는 법보다는 인생을 즐기는 법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전의를 불태울 대상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테다. 나는 노는 일마저 훈련해서 노는 인간이 되었다. 그것이 몸과 마음을 정전 상태에 빠뜨린 원인이었다. 내 판단에는 그랬다." (p.132 ~ p.133)

 

나는 위에 인용한 대목에서 작가의 생각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마다의 그릇을 갖고 태어나는 우리네 삶에서 인생은 때로 용량초과의 과도한 것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극복하라고 모진 회초리를 들기도 하지요. '안나푸르나의 대답은 결국 내 본성의 대답이었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후기(에필로그)를 읽는 것으로 작가와 함께 떠났던 '안나푸르나 환상 독서'가 끝난 셈입니다. 나는 여전히 나만의 마음길을 닦지 못한 채 누군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끝없이 방황하면서 말이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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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6-09 00:39   좋아요 0 | URL
안나푸르나... 정말 멋진 곳이지요... 저는 작년에 처음으로 히말라야를 가봤는데(랑탕계곡), 아쉽게도 안나푸르나는 포카라의 사랑곳 전망대에서 먼발치로 '마차푸차레(6,993m)'만 구경하고 내려왔답니다. 언제 또다시 히말라야를 가게 될 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다시 히말라야를 찾게 되면 그땐 꼭 안나푸르나로 갈 생각입니다.(작년에 함께 히말라야에 갔던 몇몇 친구들과는 내후년에 '킬리만자로'를 함께 오르기로 약속했는데, 그중 한 친구가 내년에 세 번째로 또 히말라야에 가기로 한 약속이 있다는 애기를 듣고 얼마나 부럽던지요. 그 친구가 처음으로 히말라야를 올랐던 코스가 바로 이 책의 작가가 다녀온 코스와 똑같네요. 그 친구는 그 길을 홀로 21일 동안 걸었다고 하더군요.)

꼼쥐 2014-06-10 18:01   좋아요 0 | URL
아~~그러셨군요.
제 주변에도 네팔 트레킹을 다녀온 사람이 몇몇 있는데 다들 좋았다고 하더군요. 저도 부러운 마음에 다녀오고는 싶지만 현실을 핑계로 포기하곤 했었죠. 이 책을 읽고나니 한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드는데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2014-06-24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07 1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예행연습을 하듯 이른 더위가 극성이었던 5월.  세월호의 아픔과 끈적거리는 슬픔을 안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한 느낌이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듯 슬픔과 더위가 용융된 대기의 불쾌함에 책을 읽는 일마저 기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밝아졌으면 좋겠다.  어룽어룽한 그 느낌이 사라지고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투명해졌으면 좋겠다.  6월에는 그런 책을 만났으면 좋겠다.

 

 

얼마 전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소설의 일반적이고도 정형화된 구성에서 벗어나 작가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여실히 드러낸 작품이었다.  지적인 문체도 간과할 수 없는 매력이지만 말이다.  그때의 좋은 느낌으로 이 책을 고른다.  설레고 기대된다.

 

 

 

 

 

 

 

 

 

 

 

국내에 번역된 후지와라 신야의 책은 거의 다 읽었었다.  <인도 방랑>을 비롯하여 <동양기행>, 인생의 낮잠>, <황천의 개> 등 그의 저작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지만 작품 내면을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바라보는 정직한 시선이었다.  그는 사진작가이자 여행가이기 이전에 올바르게 사유하는 참인간이었다.  나는 그 점이 좋다.

 

 

 

 

 

 

 

 

정혜윤 PD의 글에서는 성격만큼이나 꼼꼼함이 배어나온다.  하나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그녀의 세심함이 때로는 답답할 때도 있지만 작가의 작품을 여러 권 읽어 그 권수가 더해질수록 답답함은 미더움으로 변한다.  그리고 작가의 해박한 지식에 탄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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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vs. 알렉스 우즈
개빈 익스텐스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내가 예측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일이 발생하지만 않는다면 하루를 보내는 것은 마치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떨어뜨리는 것만큼이나 손쉬운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내 기억의 빈 공간(만약 있다면)에 동전이 쌓이는 것처럼 부피를 늘리지 않은 채 하루하루의 일상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다.  예외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따금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평소에는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조금쯤 과도한(그렇다고 생각되는) 통행세를 요구할 때가 있다.  밋밋하고 심심해 할까 봐 그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개빈 익스텐스가 쓴《우주 vs. 알렉스 우즈》는 돼지저금통에 만 원짜리 지폐를 넣을 때의 뿌듯하고 든든한 느깜처럼 뭔가가 꽉 채워지는 기분이 들게 하는 소설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뭐랄까?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배제한 채 독자가 꼭 알아두어야 할 내용만을 옮긴 듯한, 다소 시니컬하고 간결한 문체로 465페이지의 긴 얘기가 끝날 때까지 독자의 마음을 흔들림 없이 사로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개빈 익스텐스는 비록 30대 중반의 젊지 않은 나이이지만 이 책은 그의 데뷔작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소설은 알렉스(이 소설의 주인공)가 열 살이었을 때 벌어진 일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그의 집 천장을 뚫고 들어온 2킬로그램짜리 운석에 머리를 맞은 알렉스는 수술을 받고 2주만에 가까스로 깨어난다.  그 후 알렉스는 간헐적 간질을 앓게 되고 걱정이 된 어머니는 알렉스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싱글맘인 그의 어머니는 타로 점을 보거나 그것과 관련된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몇 년 뒤 다시 학교에 나가게 된 알렉스는 동네의 불량배들로부터 심한 괴롭힘을 당한다.

 

"엄마가 따르는 규칙과 내가 따라야 할 규칙은 달랐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 이게 엄마의 규칙이었다.  그 비현실적인 믿음이 어떤 결과를 낳건, 앞뒤가 맞건 안 맞건 상관없었다.  시험 성적을 잘 받아서 장차 내가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 이게 내가 따라야 할 규칙이었다.  내가 간질을 앓기 때문에 특히 중요했다.  엄마는 내가 뒤쳐져서는 안된다고 굳게 믿었고, 우리 주의 어떤 학교도 내 입학을 거절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p.101)

 

어느 날 하굣길에서 동네 불량배들을 피해 달아나던 알렉스는 피터슨 씨의 집으로 뛰어든다.  알렉스를 찾지 못한 불량배들은 피터슨 씨 집의 온실 유리를 부수고 알렉스는 속죄의 대가로 피터슨 씨의 편지 쓰는 일을 대신하게 된다.  피터슨 씨는 베트남전의 참전 용사로서 아내를 잃고 은둔자적 삶을 사는 평화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였다.  작가는 우연과도 같았던 알렉스와 피터슨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지금 나는 카오스로 가득한 한 세계의 정점인 동시에 또 다른 하나의 세계가 시작하던 바로 그 순간을 묘사하려 한다.  이 순간 덕분에 생각하게 됐다.  보기에 따라 인생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또 보기에 따라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다음의 이야기는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p.112)

 

알렉스는 피터슨 씨의 집에서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을 빌려 읽게 된다.  그러던 중 버스 안에서 동네 불량배들을 다시 만났고, 알렉스가 읽고 있던 커트 보네거트의 희귀 초판본이 그들 중 한 명에 의해 버스 밖으로 내던져진다.  알렉스는 그 아이와 주먹다짐을 하고 그 일로 인해 알렉스는 외출 금지 명령을 받는다.  감금 상태에서 풀려난 알렉스는 피터슨 씨에게 사과하고 한동안 공부에만 몰입한다.  어느 날 피터슨 씨의 애완견 커트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알렉스는 처음으로 실제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애완견 커트가 죽은 후 피터슨 씨의 정신건강이 염려되었던 알렉스는 <커트 보네거트 세속 교회>라는 이름의 독서 모임을 만든다.  커트 보네거트의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문장이나 단락을 적어와 피터슨 씨의 집에 모여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모임이었다.  알렉스는 자신이 보관하던 운석을 런던의 자연사박물관에 기증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마중나온 피터슨 씨를 만나 함께 귀가하던 중 가벼운 교통사고가 발생한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피터슨 씨는 놀랍게도 진행성핵상마비. 신경이 점차적으로 마비되는 희귀한 퇴행성 질환으로, 아저씨는 이제 3년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다.

열네 달 동안의 독서 모임이 끝나는 마지막 날 알렉스는 피터슨 씨에게 할 말이 있어 다시 들렀다가 자살을 시도한 피터슨 씨를 만난다.  알렉스의 신고로 되살아난 피터슨 씨는 병원에 입원하고 알렉스는 피터슨 씨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돌보기로 결심한다.  줄곧 대마를 직접 재배하여 마리화나를 피워왔던 피터슨 씨를 대신하여 알렉스는 대마 재배하는 법을 배우고 피터슨 아저씨를 지극 정성으로 돌본다.  피터슨 아저씨의 몸은 점점 쇠락하여 가고 알렉스가 약속했던 스위스로 향하는 여정을 결행할 즈음 아저씨는 바닥에 넘어져 다시 입원한다.

 

병원으로부터 피터슨 아저씨의 퇴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알렉스는 피터슨 아저씨를 휠체어에 태워 병원을 빠져 나온다.  피터슨 아저씨를 차에 태워 스위스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이 시작되고 알렉스는 피터슨 아저씨가 죽기 전 스위스 세른에서 마지막 관광을 한다.  '과학 혁신 전시관'에서 알렉스는 우주와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데 '별난' 입자의 수명을 생각하고, 우주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생각하고, 우주가 마지막 열적 종말(모든 별이 사라지고 블랙홀이 증발하고 모든 핵자가 붕괴하고, 기본 입자만이 우주의 무한한 어둠 속을 떠다니는 순간)을 겪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하다가, 나는 깨달았다.  인생의 문제란 '별난'입자와 닮았다는 것을.  우주의 크기와 규모에 비하면 다른 모든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작고 금방 지나가는 사건일 뿐이다.  우주의 규모로 보면 눈을 깜박이는 시간보다도 훨씬 더 빨리 사라진다."    (p.429)

 

병원의 신고로 알렉스는 영국 방송사의 뉴스 메이커가 되고 피터슨 아저씨의 유골을 차에 싣고 귀국하던 중 경찰에 의헤 체포된다.  그러나 알렉스는 무사히 석방되어 열여덟 살 생일에 피터슨 씨가 남긴 유언장에 의해 5만 파운드의 상속금을 받는다.

 

"나는 피터슨 씨가 이 편지를 쓰면서 아주 즐거워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엄마한테 편지를 건네주었다.  엄마는  편지를 읽고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엘리에게 편지를 넘겼다.  엘리는 울지 않았다.  편지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까딱 흔들면서 내게 돌려주었다."    (p.464)

 

도서관에 들러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제5 도살장>을 빌렸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결코 인연이 되지 않았을 소설.  어쩌면 내 삶에서 결코 등장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커트 보네거트라는 낯선 이름이 우연처럼 내 삶을 파고들었다.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손쉽고 짧았던 하루가 이렇게 끝나가고 있다.  내가 던진 동전이 언젠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내 기억을 깨울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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