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서재 - 나만의 도서관을 향한 인문학 프로젝트
정여울 지음 / 천년의상상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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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이 생활하는 데 기본이 되는 의식주의 문제를 타인의 손에 의존하면서부터 현대인의 질병은 깊어진 듯하다.  나는 그것을 '중독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현대인에게 '중독'은 비단 담배나 마약, 또는 술과 같은 직접적이고도 인식 가능한 사물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종교, 성형, 범죄, 섹스, 권력, 허세, 게임, 사치, 독서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와 양상은 다양하고도 포괄적이다.

 

나는 주변에서 종교에 중독된 사람들을 가끔 본다.  그들은 마치 신의 숨결이 한 번 스치기라도 하면 현실의 상처들이 말끔히 해소될 것만 같은 상상 속에서 종교를 믿는다.  알량한 헌금이나 시주의 대가로 그들이 얻는 상상의 쾌감은 실로 큰 것이다.  그러나 그 효력은 며칠을 넘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약발이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그들이 믿는 종교 신전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  '중독'은 무한반복을 전제로 한다.  그들은 결코 그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서두에 언급했지만 독서도 일종의 중독으로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독서는 모름지기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쉽게 중독으로 이어진다.  자기 계발서에 대한 탐닉이 좋은 예이다.  현실의 습관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주구장창 자기 계발서만 읽는 사람들은 대개 독서 중독에 빠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지 책만 읽음으로써 이사로 승진하거나, 억만장자가 된다거나, 토익 만점을 받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현대인에게 좋은 책이란 무엇보다도 중독의 늪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상상이나 가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영혼의 동아줄, 그것이 바로 책이어야 한다.  가상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현대인에게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책의 진정한 효용이 아니겠는가.  문학 평론가 정여울의 <마음의 서재>는 내가 생각하는 책의 효용에 걸맞는 책이다.  280여 쪽에 이르는 보통의 두께이지만 그 하나하나의 내용을 음미하고 곱씹으려면 일주일은 족히 걸리지 싶다.

 

"도대체 무슨 책을 읽어야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요.  그 질문이 너무 아파, 한참을 망설이다 늦어진 답장은 이렇다.  인생을 확 바꾸는 책은 없지만, 인생을 확 바꾸는 절실한 물음은 있다고.  당신이 그 질문을 시작한 그 순간, 인생은 이미 바뀌기 시작했다고.  머리에 불이 활활 타오르는 채 연못을 찾는 심정으로, 내게 맞는 책을 찾는다면, 내게 전혀 안 맞는 책조차 커다란 스승이 된다고."    (p.11)

 

맞는 말이다.  나는 저자의 말에서 책은 곧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이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의 고통을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뒤돌아서거나 회피하고 싶은 현실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인내심, 상실의 고통마저 의연히 감수하며 먼먼 세월의 뒤안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 책이란 본디 그 모든 것을 담아내야 한다고 믿는다.

 

나도 그랬지만 세월호의 참사를 겪으면서 대한민국 전체가 집단 우울증에 걸린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건전한 태도가 아니다.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무기력해지는 모습은 부끄럽다.  슬픔을 안으로 갈무리한 채 의연하고도 강건하게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사실 나는 이 책을 오래전에 다 읽었었고 최근에 다시 꺼내어 읽었다.  말하자면 두 번을 읽은 셈인데 그래도 뭔가 확연히 떠오르거나 손에 확실히 쥐어지는 게 없다.  책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내 능력이 모자라는 탓이다.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애도와 우울>에 따르면, 대상의 상실로 인한 우울증이 여타의 슬픔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자애심의 추락'이라고 한다.  대상의 상실을 곧 자아의 상실로 인식하면서, 타인은 물론 자기를 사랑하는 능력조차 잃어버리는 것이 우울증의 치명적 위험이다.  슬픔의 경우는 세상이 빈곤해지지만, 우울증의 경우는 자아가 빈곤해진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내 탓이라 생각하는 순간, 우울의 칼날은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된다.  급기야 '누군가 나를 처벌해주었으면'하는 망상에 빠지면서, 고통이 기다리는 장소를 향해 자발적으로 떠나기까지 한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들이 위험천만한 전쟁터에 자원하는 심리가 바로 그것이다."    (p.81)

 

세상의 모든 '중독 현상'의 기저에는 고통이나 불편한 심리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인문학을 읽는 이유는 단순히 고통으로부터 달아나거나 회피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고통과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 그 힘을 배양하는 데 있다.  정여울의 <마음의 서재>가 좋은 책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작가가 우리에게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라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끝없이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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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있어 오후는 대체로 '나른함'이나 '무료함'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비단 문학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요 미술이나 음악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있어 오후는 아직 해가 지지 않은, 나른함을 이겨내고 열심히 업무에 매진해야 할 그런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불행힌 일이지만 현대인이 오후의 '나른함'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여유로운 날은 일 년 중 얼마나 될까.

 

오늘은 주말과 연휴가 이어지는 첫날입니다.

내일도 편히 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이죠.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휴일 아침에는 다른 날보다 더 일찍 잠에서 깬다는 사실입니다.  학창시절에도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졸리면 아무때나 잘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가 환한 대낮에 잠으로 시간을 축내는 것도 딱한 노릇입니다.  평일과는 다르게 휴일에는 오후에 잠깐이라도 자고 싶다는 유혹이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집니다.  그것 참 이상하지요.

 

날씨가 참 좋았습니다.

청명한 하늘이 마치 가을 하늘 같았어요.  햇살은 따가웠지만 알맞게 부는 바람이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는 그런 날이었죠.  고속도로의 정체가 심하다는 인터넷 기사를 보니 집에서 그저 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소일하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더군요.  그렇다고 연휴 내내 이럴 수는 없겠지요.  '어린이 날'이라는 복병도 있으니까요.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을 두어 권 쌓아놓고 이 책 저 책 번갈아가면서 읽고 있습니다.  마스다 미리의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와 레이먼드 챈들러의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정여울의 <마음의 서재>가 그것입니다.  이따금 창밖의 하늘을 쳐다봅니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듯한데 아직도 해가 지려면 두어시간이나 남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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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여왕 5월은 끝내 오고야 말았다.

온 국민의 설움과 분노를 뒤로 한 채 말이다.  5월의 신간 에세이를 휘작휘적 뒤적이다 몇 번인가 아득해졌다.  '이게 무슨 소용이람.'하는 마음이 나를 아득한 절벽으로 밀어부쳤다.  세월호 희생자들이 우리에게 남긴 의미를 천천히 곱씹는 한 달이 될 듯하다.

 

 

 

나는 전문적인 에세이스트보다는 오히려, 또는 산문을 위주로 쓰는 작가보다는 오히려 시인이 쓴 산문을 좋아한다.  음감이나 박자 관념이 없는 내가 왜 이런 버릇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시인이 쓴 산문을 읽을 때 나는 글 속에서 리듬감을 느끼곤 한다.  마치 시를 읽는 것처럼 말이다.  천양희 시인의 산문도 그랬으면 좋겠다.

 

 

 

 

 

 

 

 

명상이나 삶의 가르침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틱낫한 스님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딱히 깊은 사색을 즐기지 않는 나도 스님의 책을 두어 권 소장하고 있다.  물론 한참 전에 산 책이다.  요즘 들어서는 이상하게도 주제가 조금 무겁다 싶으면 고개가 외로 꼬아진다.  그러던 내가 이 책에 눈길이 간 걸 보면 세월호 참사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나는 어차피 죽는 날까지 누군가에게 영원한 타인이니까.

 

 

 

 

 

 

얼마 전에 읽었던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는 남자인 내가 읽기에는 거북한 책이었다.  까놓고 말하면 '당신이 뭘 안다고?'하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던 책이다.  그 저변에는 아마도 작가의 이분법적 사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남자와 여자라는, 혹은 여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남자와 같은.  같은 인간의 입장에서 차이에 대해 말하는, 좀 더 관대하거나 따뜻한 시각을 기대한다.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일종의 도전이다.

 

 

 

 

 

 

 

<7년의 밤>하면 정유정! 하고 굴비두릅처럼 떠오르는 까닭은 그녀의 소설이 워낙 유명하기도 했거니와 이제 그녀도 어느덧 중견작가의 반열에 올라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요즘에는 여행기를 통 읽지 않았다.  마음이 어두워서였다.  이 책은 부디 가볍고 밝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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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더 리턴드 The Returned
제이슨 모트 지음, 안종설 옮김 / 맥스미디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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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지


누군가 나에게 인생을 다시 한 번 더 살고 싶으냐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가능한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나의 지난 인생이 남들보다 더 혹독했다거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시간을 건너뛴 다른 시공간에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달라진 모습을 확인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나는 지금 이대로의 나, 같이 나이를 먹고 같이 늙어가는 지금의 사람들이 좋을 뿐이다.

 

제이슨 모트의 소설 <더 리턴드(The returned)>는 죽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되살아나는 상황을 가정하여 쓴 책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은 벗어나기 힘든 감정이지만 흐르는 세월 속에서 점차 흐릿해지게 마련이고, 우리가 사는 동안 그러한 체험을 통해 우리는 사랑의 소중함을, 삶의 의미를,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상실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게 된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아카디아는 미국에 있는 작고 조용한 시골마을이다.  그곳에는 일흔이 넘은 노부부 루실과 해럴드가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제이콥이라는 아들이 한 명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이콥은 1966년 여덟 살 생일에 강에서 익사하고 만다. 오랜 세월 동안 부부는 제이콥이 없는 삶에 익숙해져 갔고 그들의 상처는 그렇게 치유되고 있었다.  이렇듯 평온했던 부부의 삶을 뒤바꾼 것은 아들 제이콥이 여덟 살의 나이로 그들 앞에 나타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악마 - 그들의 특정한 악마 - 가 눈물이 글썽이는 갈색 눈동자에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부모와 헤어져 낯선 사람들과 함께 지내온 아이 특유의 안도감을 가득 담은 채 여전히 작고 불가사의한 모습으로 그들의 현관 앞에 나타났을 때,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살아난 루실의 단단히 닫혔던 마음은 사무국에서 나온 잘 차려입은 남자 앞에서 봄눈처럼 녹아내렸다."    (p.21)

 

그러나 죽었던 사람이 이 세상으로 귀환하는 것은 비단 제이콥에게만 있었던 일은 아니었다. 전 세계 여러 곳에서 귀환자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고, 이 전대미문의 현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또한 그 누구도 왜, 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이것이 기적인지, 또는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는지 말이다.  급기야 국제 귀환자 사무국이 결성되었고, 정부 차원에서 귀환자들을 관리하게 되었다.  아카디아의 초등학교에 귀환자들을 모아 놓고 감시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귀환자 수용소가 세워진 셈이다.  해럴드는 어린 제이콥을 수용소에 혼자 둘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자청하여 수용소에 남는다.  그 순간에도 귀환자는 계속 늘어나고, 새로운 귀환자들은 사무국 요원들과 군인들의 눈을 피해 달아난다.  사람들은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고, 귀환자의 가족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마찰과 갈등도 심해진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내 마음은 제이콥이 1966년 8월의 그 여름날 물에 빠져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녀석이 말을 하면, 내 귀는 그가 내 아들이라고 말해.  내 눈도 마찬가지고.  그 오래전, 까마득한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해럴드는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p.222)

 

귀환자 사태는 세상이 의도하고 원했던 일이 아니었다.  해럴드와 제이콥이 떠난 빈집에 홀로 남은 루실은 그들을 위해 매일 음식을 준비하여 날랐다.  그러던 중 1963년에 죽었던 윌슨 일가족이 귀환하여 루실의 집에 함께 머물게 된다.  윌슨 일가는 루실과는 먼 친척뻘이었다.  귀환자 사태가 지속됨에 따라 귀환자의 수가 증가하고 수용되지 않은 귀환자도 증가하면서 산 사람들과의 마찰은 점차 심해졌다.  이 사태가 얼마나 지속될지, 귀환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렇다면 이런 사태가 발생한 까닭은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다.  정부도, 성직자도, 과학자도, 그 누구도. 

 

소설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들은 이렇다.  귀환자의 가족이면서 귀환자에게 우호적인 해럴드 가족,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무국 요원 벨러미와 윌리스 대령, 성직자의 입장에서 사태를 바라보는 피터즈 목사, 정상인들을 지지하며 귀환자를 적대시 하는 프레드 그린 등.  나는 소설의 뒷부분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소설일 뿐이다.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한 이야기.  단지 그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철석같이 믿는 어떤 것들이 한순간에 뒤바뀌었을 때의 혼란과 갈등, 그 속에서도 여전히 계속되는 탐욕과 비열함은 인간으로서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국민을 위한 정부의 역할도.

 

"정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국민들에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는가?  정부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최소한의 체면을 유지해야 한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든 기적의 치료법을 제시해야 하고, 필요하면 단호한 군사조치라도 취해야 한다."    (p.80)      

 

우리는 죽음 저편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다만 모름으로써 죽음을 그저 수용할 뿐이다.  예컨대 죽음 저편의 세계를 알게 된다면, 그것이 만약 우리가 상상하는 지상천국이라면  현실의 삶을 서둘러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속출할 테고, 만일 그것이 불구덩이 속의 지옥이라면 사는 내내 공포에 시달릴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죽음에 대해 모름으로써 기대와 공포의 중간자적 입장에 놓일 수 있는지도 모른다.  절묘한 신의 한 수이다.  그렇다면 죽었던 자의 생환은 과연 축복인가 아니면 또 다른 고통인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작가 제이슨 모트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함으로써 우리에게 또 하나의 철학적 난제를 던져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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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향소에서

 

세상에 아깝지 않은 목숨이 어디 있으랴

생때같은 내 새끼 가슴에 묻고

물 한 모금인들 가벼이 넘겼으랴

 

바다에서 비롯된 푸른 슬픔이

끝내 온 산천을 휘감아 돌고

바다도 하늘도 짙푸른 오늘

 

노란 희망을 가슴에 달고

가신 님들 빼곡한 제단에 나설 제

가슴 속 분노 한자락 뽑아

향불에 사른다

 

다하지 못한 생명이 끝내 서러워

눈물자욱 어룽진 하늘 끝자락 

산 자의 죄의식이 발끝에 걸려

휘청이다 무릎을 꺾고 재배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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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분향소를 다녀온 뒤 들었던 복잡한 심경입니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노트에 끄적였던 글을 블로그에 옮겨 적는데

슬픔보다는 치미는 분노가 더한 것은 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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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4-30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곳 청주에도 분향소가 설치되었다고 하는데......생각만으로도 눈물나서 어떻게 가야할지요....
어른들의 무질서가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책임 전가되었네요.

꼼쥐 2014-05-02 14:13   좋아요 0 | URL
많은 분들이 분향을 다녀오셨더군요.
저는 오히려 이제 그 슬픔을 거두려고 다녀왔습니다. 언제까지 허우적댈 수는 없는 일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