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저편 무대에는 물수제비를 뜨는 어린 시절의 내가 등장하곤 한다.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여름 한낮이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종일 물장구를 치던 아이들이 오소소 소름이 돋은 몸으로, 강의 이쪽 모래밭에 나란히 앉아 햇볕을 쪼이고 있다, 누군가의 느닷없는 제의가 있었고, 아이들은 저마다 강변에 흩어진 조약돌을 고르고 있다. 동글동글 마모된 얄팍한 돌을 찾아 이곳저곳을 훑는 그 짧았던 시간에도 몸의 물기는 금세 사라진다. 따가웠던 햇살.

 

금방이라도 닳아 헤질 듯한 누런 팬티 차림의 한 아이가 자세를 잡는다. 마른 체격에도 굵고 실팍한 등근육이 시선에 들어온다. 몸을 비스듬히 눕혀 수면과 한껏 가까워지도록 자세를 취하는 게 요령이라면 요령이었다. 오후의 잔양(殘陽)은 뜨겁기만 하다. 달궈진 돌을 피해 조심조심 강가로 모이는 아이들. 어서 던지라고 성화다.

 

손을 떠난 돌은 어쩌면 수면 위에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채 물보라를 튀기며 곤두박질 쳤거나, 과한 힘으로 던진 까닭에 단 몇 걸음만에 저쪽 강기슭으로 튀어 올랐거나, 물 위를 사뿐사뿐 밟으며 저쪽 강기슭에 가까워지던 돌멩이가 나른한 곡선을 그리며 종종걸음으로 회귀하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중력을 거스르며 통통 튀어오르던 물수제빗돌의 발걸음을 기억한다. 어쩌면 수면 위로 반짝이던 여름 햇살의 눈부심을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까맣게 탄 어깨 위로 드문드문 마름버짐처럼 허옇게 일어나던 화상 자국들. 건너편 숲에서는 뻐꾸기가 한나절 울었을게다. 저녁 어스름이 지고 산그늘이 깊은 음영으로 강물을 잠식할 때면 저 멀리서 들려오던 소리. "아무개야, 밥 먹어라!"

 

이따금 나는 수면 위를 가볍게 걷던 조약돌의 흔적을 아스라히 좇곤 한다. 사는 게 조약돌처럼 가벼웠던 시절이었다. 수면 위로 튀어오르던 조약돌의 발걸음을 합창을 하듯 입맞추어 하나, 둘, 셋, 넷...세던 친구들. 세월의 저편에서 만나는 그 시절의 추억. 친구들 모두 삶의 무게를 딛고 세월의 강을 가뿐히 건너가길 나는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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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튀어! 2 오늘의 일본문학 4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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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를 읽고 나는 그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이런 경험은 참으로 오랜만인 듯싶다.  일본 소설이라면 약간의 편견과 거부감이 있던 나로서는 더더구나.  한 권으로 끝내기에는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어 동네 도서관에서 그의 작품을 주욱 훑어보았다.  서가에는 꽤 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작가인 듯싶었다.  그 중에서 내가 고른 책은 <남쪽으로 튀어>.  사전 정보도 없이 제목만으로 책을 고르는 게 마뜩치는 않았지만 나의 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도서관 입구의 카운터에서 대출증과 함께 책을 내밀었더니 사서 아가씨 왈, "이 책 영화로도 나왔어요.  한 번 꼭 보세요.  재미있어요." 한다.  예감은 다른 누군가의 지지에 의해 너무도 쉽게 확신으로 변한다.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이 생각나기도 하고, 아리엘 도르프만의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가 떠오르기도 했다.  방향을 나타내는 어떤 말이 책의 제목으로 붙여질 때 나는 왠지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된다.

 

<남쪽으로 튀어>는 11살 소년 우에하라 지로를 주인공으로 한 성장소설인 동시에 그의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가 완전한 자유를 찾아 파이파티로마(우리나라로 치면 이어도쯤 될까? 아무튼 지도에도 없는 비밀의 섬)로 향하는 과정을 그린 모험소설이기도 하다.  지로의 아버지는 한때 혁공동(아시아 혁명 공산주의자 동맹)의 전설적인 행동대장으로 활동하였으나 목표보다는 개인의 이권에 골몰하는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에 회의를 느껴 탈퇴하고 지금은 프리라이터를 자처하는 백수로 지낸다.  어딘가에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지로의 아버지는 국민연금 납부를 독촉하는 구청 담당자에게 국민임을 관두겠다고 말하는가 하면 지로의 수학여행비가 너무 비싸다며 학교 선생님에게 항의하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주 작고 작아. 이 사회는 새로운 역사도 만들지 않고 사람을 구원해주지도 않아. 정의도 아니고 기준도 아니야. 사회란 건 싸우지 않는 사람들을 위안해줄 뿐이야." (2권 p.287)

 

지로의 가족은 작은 찻집을 운영하며 생계를 책임지는 어머니와 백수인 아버지, 누나 요코, 그리고 여동생 모모코로 구성되어 있다.  부잣집에서 자란 지로의 어머니는 대학 시절 운동권에 가담했다가 누나 요코를 임신한 채 상대방 남자를 칼로 찌르고 구속된다.  그때 요코를 키우고 돌봐준 사람이 지로의 아버지였다.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지로와 모모코를 낳았지만 지로의 외가와는 일절 왕래가 없었다.

 

어느 날 지로는 중학생 불량배인 가쓰로부터 협박을 받게 되고 그들과 다투는 과정에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비밀을 가쓰로부터 듣게 된다.  외할머니와 우연히 마주친 후 지로와 모모코는 외갓집을 방문하게 되고 자신들과 다른 상류층의 생활을 부러워한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운동권 후배가 지로네 집에 은신함으로써 지로는 원치 않았던 사건에 휘말린다.  아버지의 운동권 후배가 조직 내 다른 분파의 대장을 살해한 것이다.  경찰의 조사로 어수선하고 공안과 기자들의 출입이 잦아지자 집주인은 지로네 가족에게 집을 비워줄 것을 요구한다.

 

누나 요코를 제외한 지로네 가족 네 명은 오키나와의 이리오모테라는 남쪽 섬으로 이사를 한다.  아버지는 개발 예정지의 폐가를 수리하여 그곳에 정착한다.  수도도 전기도 없는 그곳에서 아버지는 밭을 일구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 등 원시적인 삶에 열성적으로 매달린다.  지로에게는 도쿄에서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낯선 모습이었다.  지로와 모모코는 전교생이 다섯 명뿐인 그곳 초등학교에 전학한다.  도쿄에 남았던 요코 누나가 돌아옴으로써 가족은 다시 평화를 되찾는다.  그러나 평화롭던 생활도 잠시 개발업자들의 철거가 시작되고 격렬히 저항하던 아버지와 캐나다 청년 베니는 구속된다.

 

"경잘과 기업에 창끝을 들이댄 사람을 통쾌하다며 재미있어 하면서도, 그것을 막상 내 일처럼 생각해줄 사람은 없다.  텔레비전을 지켜본 어른들은 단 한 번도 싸운 일이 없고 앞으로도 싸울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대항하고 투쟁하는 사람을 안전한 장소에서 구경하고 그럴싸한 얼굴로 논평할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냉소를 던지리라.  그것이 바로 아버지를 제외한 대다수의 어른들이었다."    (2권 p.267)

 

그러나 베니의 도움으로 듣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전설의 섬 파이파티로마로 향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파이파티로마 섬에 내려오는 전설적 영웅 ‘아카하치’ 신화로 끝난다. 아카하치는 섬이 본토로부터 독립되어 자유롭게 살기를 희망하고 이상적인 나라를 건설하였으나 결국 이웃 왕조의 침략에 의해 처형되는 인물이다. 지로는 이 신화를 통해 비로소 아버지가 꿈꾸던 이상을 이해하게 된다.

 

"지로,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노예제도나 공민권운동 같은 게 그렇지.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 날 아침에 거져 내준 것이 아니야.  민중이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어렵사리 쟁취해낸 것이지.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2권 p.245)

 

이 소설은 겉보기로는 초등학교 6학년인 우에하라 지로의 성장 과정을 다룬 소설일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더 파고들면 주인공인 지로의 시선에 비친 각종 부조리와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욕심, 그 속에서 완전한 자유를 꿈꾸는 아버지의 이상이 겹쳐지고 있다.  우리는 사는 내내 편안함을 대가로 어떤 대상이나 제도와 끝없이 타협하게 된다.  자유는 자신의 불편과 타인으로부터의 차별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의지이자 불가능에 도전하고자 하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편리를 대가로 나의 자유는 얼마나 깎여나가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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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있었던 알제리와 우리나라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더군요. 그것은 주로 어느 일간지나 방송에서 들었던 전문가의 분석에 자신의 의견을 조금 덧칠한 것에 불과하지만 이야기를 하는 당사자들은 모두 과하다 싶을 정도의 감정을 분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벌개진 얼굴로 침을 튀겨 가며 누군가를 비난하는 모습은 과히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월드컵 대표선수들에게 그닥 기대도 하지 않았고 경기 결과에 큰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선수들이 지기를 바란 것은 물론 아니었죠. 다만 어떤 선수가 참가했는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경기도 보지 않았으니 이렇다 저렇다 논평할 꺼리가 없었을 뿐입니다.

 

세계 무대에서 우리나라 스포츠의 위상이 지금처럼 높아진 것도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닙니다. 올림픽에서 태극기를 달고 첫 금메달을 딴 것도 1976년의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언제부턴가 우리는 승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듯합니다. 당연히 이길 것이라 예상했던 경기에서 졌을 때의 낭패감이나 모멸감은 곧바로 누군가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게 마련이지요. 더구나 알제리전과 같은 졸전을 본 후에는 그런 마음이 더욱 강하게 들었겠지요.

 

나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이제는 조금 더 현명해져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축구와 같은 국가 대항전에서의 승리나 올림픽의 금메달 획득이 무에 그리 중요한지 냉정하게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승리했을 때의 기쁨은 잠깐입니다. 국민 전체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것도 아니지요. 기껏해야 조금의 위로, 잠시 잠깐의 기쁨을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엘리트 스포츠에 그 많은 돈을 쏟아부음으로써 자살률 1위, 고아 수출국 2위, 교통 사고 사망율 OECD 1위 등 온갖 불편한 진실들을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좋아하는 스포츠 대회에 출전하고 싶은 사람은 자비로 출전하게 함으로써 지든 이기든 그 사람의 열정을 존중하고 열렬한 박수를 보내주는 게 국민 정서나 국가 경제를 위해 훨씬 더 값진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엘리트 교육에 매몰된 대한민국의 정서는 약자와 패자에 대한 비난 일색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반면 승자는 모든 권력과 존경을 독식하게 되었지요.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은 국민 모두를 계몽해야 할 대상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자신들은 모두 승자이고 마땅히 존경과 대우를 받아야 하는 사람쯤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약자와 패자가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세상, 누구의 도움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은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는 정녕 꿈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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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 길 위에서 배운 말
변종모 지음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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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단순히 놀이나 유희가 아닌 단지 효용의 차원에서만 바라보기 시작한 순간부터 독서에 대한 흥미는 반쯤 잃게 된다. 내가 지금보다 더 젊거나 어렸던 시절에 독서는 그저 생활의 일부라고 여겼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하거나 외롭다거나 이유도 없이 슬프다거나 할 때 책은 말없는 위로였고, 가까운 친구였고, 때로는 기분전환의 놀이가 되기도 했다. 어떤 책을 읽어야지 작정하지 않았고 읽을 책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지곤 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비스듬한 사면을 따라 빠르게 구르는 동안 나는 주변을 살필 겨를도 없이 내 손에 쥐어졌던 행복한 기억들을 모두 잃고 말았다. 여행작가 변종모의 <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를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지에서 느꼈던 단편적인 생각들과 지나치게 감상적인 여행자의 애수 또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조각조각 이어 붙인 지극히 개인적인 글들이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 것인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과거의 나는 이런 종류의 책을 읽으면서도 가끔씩 등장하는 멋진 문장에 감탄하거나 때로는 애수어린 문장에 찔끔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그만큼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이었다.

 

"생략과 축축한 침묵. 그 안에 나머지를 남기는 사람이 있고 여전히 제 모든 걸 담아두는 사람이 있다. 타인에 의해 눈물 흘리는가? 타인을 위해 눈물 흘리는가? 자신에 의해 눈물 흘리는가? 자신을 위해 눈물 흘리는가? 눈물은 너의 마지막 언어. 말로는 위로할 수 없는 모스부호. 너를 위해 밖으로 울고 나를 위해 안으로 운다." (p.172)

 

도무지 쓸모가 떠오르지 않는 책은 읽는 데 오래 걸린다. 기준이 하나여서 그렇다. 여러 갈래의 시골길을 오랜 세월 잊고 지낸 까닭이지만 옆 시선을 가린 경주마처럼 오로지 앞만 보인다. 삶은 셀 수도 없이 다양하고 이따금 누군가에게 곁을 내주어야 하겠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을 꾸역꾸역 읽고 있다. 이렇게 힘든 책은(책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읽어내지 못하는 내가 문제이겠지만) 하나하나의 낱글자도 마치 여행서적의 화려한 풍경처럼 하나의 정지된 화면, 쉽게 잊혀지는 풍경처럼 읽힌다.

 

읽는 속도에 시간을 맞추기라도 하려는 듯 머릿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지우개가 기억의 옅은 흔적들을 지우고 있다. 말끔하게. 그럼에도 작가는 내 마음을 조금만 알아달라는 듯 열심히 말을 건다. 책은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길 위에서 만난 말들', '내 안의 말들', '길 위에 두고 온 말들'이 그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가슴 속에 켜켜이 쌓아 둔 말들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자신의 말을 공감할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원이 아니다. 다만 말하고 싶었을 뿐.

 

"나를 먼저 속이고 네가 내게 속아주길 바라는 일은 양심을 따지기 이전에 죄책감부터 드는 일이었다. 한 번 쏟은 물을 다시 담는 일과 한 번 날아간 화살을 되돌리는 일이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한 것처럼 내가 나를 속이는 일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을 겨안은 기분이기도 하다. 부풀 대로 부풀고 불 대로 불어버린 왜곡과 거나해질 대로 거나해져 과장된 말들은 너와 나 사이에 벽을 치고 그 벽 앞에 다시 금을 긋는 일이었다." (p.325)

 

무더위에 지친 어느 여름날 그저 스쳐가는 바람도 마냥 반갑듯이 사람은 때로 내 가슴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말도 반가울 때가 있다. 내 말이 누군가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지 않은들 또 어떤가. 바람처럼 네 가슴을 비껴간들 네 우울과 슬픔을 조금쯤 걷어낼 수만 있다면... 결국에는 잊혀질 말들도 지금 이 순간 네 가슴을 적실 수만 있다면 가슴에 남는 의미가 없다 한들 또 어떠랴.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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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4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4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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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과 한국 소설의 근본적인 차이는 독자를 대하는 태도에 있는 듯하다. 일본 소설은 대체로 책을 읽는 독자에게 즐거움과 웃음을 선사하려는 데 주안점을 둔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의 인터뷰에서 여러번 강조했듯이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에 자신의 책을 읽으며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 그것이 일본 작가들의 공통된 목표가 아닌가 싶다. 반면에 한국 작가들은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진지하다. 독자들에게 감동이나 교훈을 주어야 한다는 강박은 때로는 부담스럽다. 이러한 차이는 물론 두 나라의 민족적 정서에서 기인하겠지만 전통을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절충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일본 소설은 다 좋고 한국 소설은 다 나쁘다는 이분법적 논리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 소설의 가벼움이나 지나친 선정성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게다가 한국 문학도 많이 변해서 신세대 작가의 소설은 일본 소설 못지 않게 유쾌하고 읽는 재미가 가득하다는 것도 잘 안다. 다만 독자층이 얇은 한국의 출판시장에서 유명 작가의 명성에 눌려 신진 작가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말이다.

 

쓰다 보니 얘기가 엉뚱한 쪽으로 빗나갔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공중그네』에 대한 리뷰를 쓰려고 했는데 말이다. 『공중그네』에 대한 평은 여러 경로로 들어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호평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나와 인연이 닿지는 않았었다. 일본 소설에 대한 나의 편견이나 거부감이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기껏해야 무라카미 하루키나 텐도 아라타의 소설만 읽었을 뿐 다른 일본 소설가의 작품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오죽하면 이 소설의 작가인 오쿠다 히데오도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작품은 단 한 권도 읽지 않았으니 말이다. 말하자면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을 나는 처음 읽은 셈이다.

 

『공중그네』는 신경정신과 의사 이라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연작소설이다. 표제작인 <공중그네>를 비롯하여 ,<고슴도치>, <장인의 가발>, <3루수>, <여류작가> 등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131회 나오키상을 수상했던 이 소설은 기획자, 잡지 편집자, 카피라이터, 구성작가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한 작가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역작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인 정신과 의사 이라부를 통하여 현대인들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떠안아야 하는 비애와 고통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 100킬로그램은 족히 넘을 듯한 거구의 이라부는 자신의 외모와 의사라는 직업에 걸맞지 않는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름으로써 병원을 찾는 환자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사라지게 한다. 공중그네를 타는 베테랑 서커스 단원의 강박증을 치료하기 위해 하마 같은 몸으로 직접 공중그네 서커스에 도전하기도 하고, 선단 공포증에 시달리는 야쿠자 중간보스를 위해 야쿠자들의 담판 현장에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갖은 훈수를 두기도 하고, 일탈충동에 시달리는 의대 동창생과 의기투합하여 육교에 기어 올라가 이정표를 슬쩍 고쳐놓고 도망치는가 하면 결국에는 동창생 장인의 가발을 벗기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프로 야구선수를 위해 야구 동호회에 가입하여 환자와 동일한 포지션인 3루수를 자청하기도 하고, 심인성 구토증이 있는 여류작가를 치료하기 위해 자신이 쓴 형편없는 글을 출판하겠다며 되지도 않는 생떼를 쓰기도 한다. 이라부의 치료방법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하다. 각각의 직업군에 종사하는 다양한 환자들을 대할 때 환자와 의사로서가 아닌, 어설프고 서툴더라도 그 직업군에 동참함으로써 실수연발의 자신의 모습을 환자에게 직접 보여주곤 한다. 환자는 천진난만한 이라부를 결코 미워할 수 없다. 그와 한동안 시름을 잊고 어울림으로써 환자는 자신도 모르게 치유되는 것이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을 위한 ‘이라부’식 처방전인 셈이다.

 

"분명 괜찮을 것이다. 그런 기분이 든다. 모너져버릴 것 같은 순간은 여러 번 겪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주위 사람이나 사물로부터 용기를 얻으면 된다. 모두들 그렇게 힘을 내고 살아간다. 어제 사쿠라가 한 말이 큰 격려가 되었다. 반성도 했다. 자신의 작은 그릇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심각한 일들에 비하면 작가의 고민 따위는 모래알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사라진대도 상관없다. 바람에 날려가도 괜찮다. 그때그때 한순간만이라도 반짝일 수만 있다면. 아이코는 진찰실을 나왔다. 여기 오길 잘한 거겠지. 잠깐 그런 생각을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거나 마음은 편해졌으니까." (p.304 ~ p.305)

 

살다보면 누구나 자신이 가장 힘들고 불쌍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자신의 어깨에 얹혀진 삶의 무게가 견딜 수 없이 무겁다고 느껴지는 순간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라부는 개별적인 삶의 무게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보편적인 것임을 체험을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인생을 항상 무겁고 진지하게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가끔은 별것 아닌 것처럼 가볍게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자신처럼 실수해도 된다고 말이다. 누구든 자신의 삶에 프로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나도 언젠가 정신과 의사 이라부가 놓아주는 비타민 주사가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이 올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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