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귀나무를 아시는지? 그렇다면 자귀나무가 콩과에 속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신지? 콩과에 속하는 식물은 콩, 팥, 녹두나 싸리류와 같은 키가 작은 식물만 있는 게 아니냐구요? 그럴 리가요. 여기서 그런 무식한 소리를 해서는 앙~돼요. 아, 키가 작은 식물 하니까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토끼풀도 콩과에 속합니다. 알고 보면 콩과에 속하는 나무 종류는 꽤나 다양합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아까시나무나 등나무, 조금쯤 생소할 수도 있는 주엽나무, 박태기나무, 회화나무, 자귀나무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제가 꽤나 유식해 보이죠? 아니라구요? 그러지 말고 인정할 건 인정하세요. 콩과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두드러지는 특징은 두 가지라고 합니다. 씨앗이 콩깍지 안에 속한다는 것과 공기 중의 질소를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상태로 바꾸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든다는 것이 그것이죠. 전문적인 용어로 이것을 '질소 고정'이라고 합니다. 흠, 이쯤 하니 유식해 보인다구요?

 

엉뚱한 얘기를 하다가 정작 쓰려던 말을 깜박하고 그냥 지나칠 뻔했습니다. 이런 정신머리 하고는... 암튼 요즘은 이런 증상이 시도때도 없이 일어나곤 합니다. 나이 탓으로 돌리기엔 조금 이른 듯하지만 뭐 어떨라구요. 그냥 나이 탓으로 해두죠. 오늘 쓰려고 했던 것은 뭔고 하니 콩과에 속하는 낙엽관목 자귀나무(mimosa tree )입니다. 부부 금슬을 상징하는 합환목(合歡木), 합혼수(合婚樹), 야합수(夜合樹)라고도 하며, 소가 자귀나무 잎을 무척 좋아해서 소쌀밥나무라고 불리기도 하지요.

 

제가 가끔 들르는 도서관의 한 귀퉁이에는 자귀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매일 아침 오르는 산의 정상 부근에도 어린 자귀나무 한 그루가 있지요. 자귀나무는 꽃이 유난히 인상적입니다. 분홍색 색실을 풀어 공작의 날개처럼 만들어 놓은 듯합니다. 막 피어난 꽃이 청명한 하늘과 어우러질라치면 나뭇가지 위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여러 갈래의 꽃술은 아랫부분은 투명하게 희고 끝으로 갈수록 분홍빛이 짙어집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 정성들여 만든 코사지 장식을 나무 곳곳에 붙여놓은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절로 들기도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자귀나무의 잎은 해가 지고 나면 펼쳐진 잎이 서로 마주보며 접힙니다. 마치 잎에 감광 센서라도 달아놓은 듯 보고 있으면 신비하기 이를 데 없답니다. 게다가 떨어진 꽃을 만져보면 그 부드러운 감촉이 어찌나 좋던지 어느 짐승의 털이 이보다 더 보드라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저는 이따금 떨어진 꽃을 모두 모아 붓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발상을 떠올리기도 하지요.

 

오늘 아침 산행길에서도 이제 막 피어나는 자귀나무의 꽃을 여러 송이 보았습니다. 자연은 때로 그 신비를 통하여 인간을 기쁘게 합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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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엊그제 아침 산행길에서 잠자리 한 마리를 보았다.  어찌나 반갑던지.  올해 들어 처음 만나는 잠자리였다.  혹자는 '매년 만나는 잠자리인데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떨 것 까지야...'하며 끌끌 혀를 찰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지겨울 법도 한 시간의 순환이란 게 나는 언제나 반갑고 경이롭다.  나는 매달 그와 같은 마음으로 신간 서적을 둘러보곤 한다.  우리의 삶은 셀 수도 없는 무한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지겹다면 다른 무엇에서 행복을 찾을까? 

 

 

 

내가 윤대녕 작가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마도 그의 소설 <대설주의보>를 읽은 직후가 아닐까 싶다.  감각적이면서도 서정적인 문체.  삶의 이면을 꿰뚫는 듯한 날카로운 통찰.  나와 작가의 교감은 절정에 이른 듯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산문집을 읽어보지 못했다.  인연이란 때로 어긋난 길을 걸을 때가 있다.

 

 

 

 

 

 

 

 

언제부턴가 학교와 학생들을 주제로 다룬 책들을 그냥 넘기기 어려워졌다.  세월호 참사의 영향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지만 나의 이력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청춘 이전의 아이들, 이제 막 제 인생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아이들의 눈빛을 보면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그런 열정이 마치 타고난 재능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거침이 없다.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없다면 그런 열정은 솟아나지 않는다.  나는 가끔 지금 내가 하는 일에 지치거나 약간의 회의감이 느껴질 때 이런 책을 읽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의 어리광을 질책하게 된다.

 

 

 

 

 

 

 

"독서의 기쁨을 아는 자는 재난에 맞설 방편을 얻는 것이다."라는 에머슨의 말은 생각할수록 의미심장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어쩌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 의하여 에머슨이 알려진 측면이 없진 않지만 사실 그는 19세기를 대표했던 미국의 사상가로서 그의 글을 한번쯤 읽어본 사람이라면 단박에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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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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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공포는 호기심을 부풀리는 습성이 있다. 예컨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았던 어린 시절에 마을 인근의 한 기업에서 매주 지역주민을 위한 영화상영이 있었다. 마을 아이들은 왕복 한 시간도 넘는 길을 걸어 영화를 보러 가곤 했다. 저녁 어스름이 질 무렵 시작된 영화는 늘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나곤 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아이들은 어린 아이들을 가운데에 두고 대열의 앞쪽과 뒤쪽에는 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를 세웠다. 그렇게 줄나래비를 서서 걷는 산길은 유난히 무서웠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자 했던 결심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호기심만 점점 부풀어 올랐고 어느 순간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호기심에 뒤를 돌아보면 묵묵히 걷는 형들과 캄캄한 어둠만이 내 발끝을 좇고 있었다. 공포는 더욱 커져만 갔고 비례하여 호기심도 커져만 갔다. 마음 한켠에서는 공포와 호기심이 셀 수도 없이 다투었고 끝내 이기는 쪽은 언제나 호기심이었다.

 

역사적 진실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인간의 잔인성에 있다. 잔인성의 강도가 더하면 더할수록 공포심도 증가하지만 결국, 가슴 속에서는 외면했던 시선을 돌리게 할 호기심도 시나브로 함께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비록 역사적 진실 앞에서 치를 떨지라도 그 실체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편하게 잠들 수조차 없다. 공포와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영화를 보기 위해 마을 형들의 뒤꽁무니를 번번이 따라 나섰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처럼.

 

작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그런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주 대하기 싫은 어둠 저편의 공포를, 실체를 확인하고자 하는 내면의 호기심이 끝내 삼켜버린 듯한 결과물.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나는 이 소설이 갖는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인 그날의 실체와 인간의 잔인성에 대해 책을 읽기도 전에 이미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었었다. 그러나 외면하고자 했던 처음의 결심은 나의 호기심에 끝내 굴복하고 말았다.

 

소설은 5.18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소년 동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동호는 누나와 함께 문간채에 세들어 살던 친구 정대의 죽음을 목격한 것을 계기로 도청 상무관에서 시신들을 관리하는 일을 돕게 된다. 동호는 결국 진압군에 의해 도청에서 살해된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정대의 이야기는 죽어 혼령이 된 사자(死者)의 말이다. 군인들이 트럭에 실어 날랐던 시신은 탑처럼 쌓이고 정대의 혼령은 갈 곳을 잃고 헤맨다.

 

"가장 먼저 탑을 이뤘던 몸들이 가장 먼저 썩어, 빈 데 없이 흰 구더기가 들끓었어. 내 얼굴이 거뭇거뭇 썩어가 이목구비가 문드러지는 걸, 윤곽선이 무너져 누구도 더이상 알아볼 수 없게 되어가는 걸 나는 묵묵히 지켜봤어." (p.59)

 

당시 동호와 함께 상무관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욱 끔찍하다. 참혹한 현장에서 살아 남은 자들의 죽음보다 더 지독한 삶의 모습들을 작가는 너무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나는 몇 번이나 책을 덮어야 했다. 가뭇없이 사라져 가는 역사의 진실들을 30년도 더 지난 이 시점에서 겨우 바라보는 나 자신의 비겁과 발포를 명령했던 살인자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가 나의 시야를 흐리게 했다. 

 

수피아여고 3학년 시절에 동호와 함께 상무관에 있었던 김은숙, 봉제공장에서 노조활동을 하다 쫓겨난 후 광주의 어느 양장점에서 일을 하다 상무관에 합류한 임선주,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진수, 그리고 막내 아들을 잃고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동호의 어머니... 김은숙은 대학을 포기하고 한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한다. 자신이 담당하던 원고의 검열을 받는 과정에서 서대문 경찰서로 끌려가 뺨을 맞는 은숙, 5.18 직후 경찰에 연행되어 갖은 고문을 당했던 선주.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p.166 ~ p.167)

 

도청에 진입했던 진압군에 의해 연행되었던 김진수도 갖은 고문을 받고 출소한 후 결국 자살하였다.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잔인한 행동들을 세밀하게 기록했던 작가 역시 공정성을 잃고 이따금 호흡이 가빠졌다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씀으로써 살아 남은 자의 비겁을 용서 받았을까? 인간에 대한 신뢰를 송두리째 잃은 것은 아닐까?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내란수괴와 반란수괴로 재판을 받았던 전두환을 유엔 전범재판소에 세우지 않았던 까닭을. 전쟁 범죄자보다 더 잔인했던 그를 국내법으로 잠시 재판정에 세우고 형식적인 형을 선고하고 쉽게 풀어줬던 이유를 말이다. 한때 고문 기술자로 불렸던 이근안은 "고문은 애국이고, 신문은 하나의 예술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미친 놈들과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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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희돌이 2014-08-11 15:35   좋아요 0 | URL
축하드려요~ 이달의 당선작^^

꼼쥐 2014-08-12 18:2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남희돌이 님 ^^

조금 부끄럽네요. 잘 쓰지도 못한 글인데...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해발고도 500m 이상의 고지대에 단 한 번이라도 살아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햇살의 질감이 저지대의 그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언제였던가.  내가 저지대의 도시로 처음 나와 살게 되었을 때 척척 감겨오는 햇살의 감촉에 나는 저으기 놀랐었다.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살짝 부담을 느꼈는지도.  나는 왜 그 겨울의 헤살거리던 햇살을 부담스러워만 했던가.  모를 일이다. 익숙함은 언제나 변화에 저항하는 속성이 있다.  사춘기였고 호기심과 저항이 나의 이성을 반반씩 지배하던 시기였다.

 

고지대의 햇살은 공격적이다.  계절에 상관없이 그렇다.  뜨거운 여름이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수천 수만의 햇살이 가닥가닥 풀어져 빛의 화살처럼 내려 꽂힌다.  찰나지간에 모공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온 몸을 헤집어 놓고는 다른 방향으로 유유히 빠져 나갈 것만 같은 느낌.  그러나 저지대의 햇살은 뭉근하게 풀어진 수프처럼 올올이 흩어지는 법이 없다.  그저 저항하는 대상을 은근히 감싸다가 서서히 풀어질 뿐이다.  군불에 달구어진 황토방의 열기처럼 발원을 알 수 없는 열감이 한동안 머물다 흩어지곤 한다.

 

오가와 요코의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고 불현듯 들었던 생각이다.  수학을 소재로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풀어낼 수도 있구나 감탄했다.  이질적인 두 대상이 만나 하나로 융합되는 과정은 경이롭다.  내가 두 지역의 햇살을 한 몸으로 살아낸 것처럼.

 

"물질이나 자연현상, 또는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영원한 진실은 보이지 않는 법이야.  수학은 그 모습을 해명하고, 표현할 수 있어.  아무것도 그걸 방해할 수는 없지."  배가 고픈 것을 참아가면서 사무실 바닥을 닦고 루트를 걱정하고 있는 내게는 박사가 말하는 영원하고 옳은 진실이 필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실감이 필요했다.  넓이도 없이 장엄하게 어둠을 뚫고 한없이 뻗어나가는 한 줄기 진실한 직선.  그 직선이야말로 내게 잠시의 말을 떠올리면서 나는 어둠을 응시했다."    (p.164 ~ p.165)

 

소설의 내용은 최근에 읽었던 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 유>를 떠올리게 한다.  박사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해 기억이 80분을 넘지 못한다.  80분 이전의 기억은 금세 사라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박사를 미망인이 된 형수가 돌본다.  교통사고 이전에는 천재 수학자였던 박사는 이제 수학 저널에 실린 수학 문제나 풀며 하루하루를 소일하는 신세가 되었다.  형수는 집의 안채에서 박사는 별채에서 개별적인 노년을 견디고 있다.

 

최근 수년간 9명이나 되는 가정부를 갈아치운 박사에게 싱글맘인 쿄코가 10번째 가정부로 등장한다.  다음 날이면 가정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박사는 자신이 입은 양복 소매에 메모를 붙여 잃었던 기억을 되찾으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쿄코에게 10살 먹은 아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박사는 아이를 집에 홀로 두어서는 안 된다며 학교가 파한 후 자신의 집에 들르도록 당부한다.  박사는 아들이 모든 수를 포용할 수 있는 루트 기호와 닮았다고 '루트'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80분의 기억이 허락되는 한도에서 박사는 루트를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늘 외롭게만 지냈던 루트는 박사의 무한한 사랑 앞에서 할아버지의 따스한 정을 느낀다.  쿄코는 대인 기피증이 있는 박사를 이끌고 미장원을 방문하기도 하고, 교통사고 이전에 야구에 열광했던 박사를 위해 루트와 함께 야구장을 찾기도 한다.  야구장에 다녀온 후 고열에 시달리는 박사를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어 쿄코와 루트는 박사의 집에 머문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쿄코는 해고된다.

 

박사를 통하여 수식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의미를 배워나가던 쿄코와 루트는 박사를 몹시 그리워 한다.  교통사고 전에 박사는 형수를 사랑했었다.  그야말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형수는 자신의 남편이 죽고 미망인이 되었지만 기억과 젊음을 상실한 채 살아야 하는 박사를 차마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수학 잡지의 현상문제를 풀어 리포트 용지에 깨끗하게 옮겨 쓰고서 다시 한 번 훑어볼 때면 박사는 자신이 도출해낸 해답에 만족하면서 중얼거렸다.  "아아, 조용하군."  정답을 얻었을 때 박사가 느끼는 것은 환희나 해방이 아니라 조용함이었던 것이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장소에 정확하게 자리하여, 덜고 더할 여지 없이 오랜 옛날부터 거기에 한결같이 그렇게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있으리란 확신에 찬 상태.  박사는 그런 상태를 사랑했다."    (p.93)

 

쿄코는 결국 다시 복직된다.  수와 관련된 박사의 사상과 철학을 배우는 생활이 한동안 지속된다.  중학 중퇴의 학력이 전부인 쿄코도 초등학생인 루트도 박사의 설명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고독한 수인 소수를 사랑하는 박사를 통하여 수식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의미를 배운다.

 

"물질이나 자연현상, 또는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영원한 진실은 보이지 않는 법이야.  수학은 그 모습을 해명하고, 표현할 수 있어.  아무것도 그걸 방해할 수는 없지."  배가 고픈 것을 참아가면서 사무실 바닥을 닦고 루트를 걱정하고 있는 내게는 박사가 말하는 영원하고 옳은 진실이 필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실감이 필요했다.  넓이도 없이 장엄하게 어둠을 뚫고 한없이 뻗어나가는 한 줄기 진실한 직선.  그 직선이야말로 내게 잠시의 말을 떠올리면서 나는 어둠을 응시했다."    (p.164 ~ p.165)

 

여름 한낮의 저층에 깔린 해묵은 기억을 가을 햇살처럼 선명하게 되살리는 일은 쉽지 않다.  박사처럼 기억 상실증에 걸리지 않은 사람도 그렇다.  우리는 어쩌면 저지대의 햇살처럼 사랑의 열감만을 간직한 채 평생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세세한 기억이 아니라 그때의 느낌만으로 말이다.  박사도 루트도 도타워졌던 사랑의 열감이 삶을 지탱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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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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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 소설 <소소한 풍경>은 작위적이다. 세상의 모든 소설이 작가의 의도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까닭에 소설은 단순히 허구이고, 작위적이라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 안에 거하는 순간만큼은 그에게는 그것이 전부이고 전 우주였던 것처럼 소설을 읽는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때 소설은 직접적인 자신의 삶이자 경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순간 마치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난 것처럼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훤히 꿰뚫게 되거나 의도된 설정이라고 느끼는 순간 소설은 그저 하나의 텍스트이자 영 시시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예컨대 주인공 'ㄱ'이 '남자1'과 처음 조우할 때 같은 운동화를 신었다거나 비오는 날 같은 색의 구두를 신었다는 설정, '남자1'의 여동생이 사고로 죽었다는 설정과 'ㄱ'의 오빠와 어머니 아버지가 모두 사고로 죽었다는 설정은 공감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두 여자('ㄱ'과 'ㄷ')와 한 남자('ㄴ')가 같은 집에서 '덩어리'진 채 사는 모습은 그야말로 어색하다.

 

소설은 주인공 'ㄱ'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남자1'이 등장하고 그와 'ㄱ'은 대학에서 만나 사랑하게 되는 사이다. 'ㄱ'의 오빠가 죽고 연이어 어머니 아버지를 잃은 'ㄱ'과 여동생을 잃은 '남자1'은 끝내 결혼했으나 1대1의 폭력적 사랑을 1년만에 종식한다. 여자 'ㄱ'은 부모님이 살던 소소시의 포도밭이 딸린 외딴집으로 귀향한다. 포도밭 옆에는 다세대 주택이 있고 그곳에서 늘 물구나무를 서던 'ㄴ'을 만난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아버지와 형을 잃은 'ㄴ'은 실어증에 걸린 어머니를 요양원에 맡긴 채 떠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ㄴ'은 한동안 어느 보컬 그룹의 베이시스트로 지냈으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들로부터 내쳐진다.

 

'ㄱ'과 'ㄴ'이 외딴집에서 동숙을 시작한 지 얼마 후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 온 'ㄷ'이 등장한다. 북한을 탈출하면서 아버지를 잃고 'ㄷ'과 그녀의 오빠, 어머니는 중국의 어느 조선족의 집에 흘러든다. 어머니와 'ㄷ'은 그집 주인 남자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한다. 주인 남자의 부인과 딸이 죽자 'ㄷ'과 어머니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ㄷ'은 결국 대한민국의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ㄱ'을 만난다.

 

눈으로 뒤덮인 소소시의 외딴집에서 'ㄱ'과 'ㄴ' 그리고 'ㄷ'은 '덩어리'인 채 또는 각자인 채 겨울을 난다. 'ㄴ'은 우물을 파고 'ㄷ'은 집 안을 광이 나도록 닦으면서. 봄이 오고 'ㄴ'이 판 우물에서 물이 솟고 그들은 이별을 예감한다. 자신이 판 우물에 빠져 죽은 'ㄴ'과 레미콘으로 우물을 메우는 'ㄷ', 그것을 지켜보는 'ㄱ'. 'ㄷ'은 'ㄱ'을 떠나 티켓다방의 여종업원 신분으로 몸을 숨긴다.

 

소설에서는 이야기의 주체가 섞바뀌고 있다. 'ㄱ'에서 'ㄴ'으로 그리고 'ㄱ'의 선생님으로. 줄리언 반스의 소설《사랑, 그리고》에서 모든 등장 인물들이 각자 자신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도 그렇다. 'ㄴ'과 '남자1'은 화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에서는 많은 소제목들이 하나의 상징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손, 성장, 화석, 모딜리아니, 바르도, 고원지대, 본, 아바타, 묘비명, 아크로칸트사우르스, 베르글라...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을 떠올리게 한다. 각각의 소제목에 붙은 이야기들이 아무런 연관성이 없이 흘러 가는 듯하다가 전체로서 통일성을 갖추는 모습이다. 그것은 마치 색색의 천조가들이 하나로 이어져 멋진 작품으로 재탄생하는 퀼트를 보는 듯한 효과가 있다. 잘 썼을 때는 그렇다는 얘기다.

 

'ㄴ'의 죽음은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따가운 햇살에 살의를 느끼는 '뫼르소'의 충동과 닮아 있다.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죽고 싶고 미치고 싶은 그 모든 감정 말이에요. 희로애락(喜怒愛樂)과 애오욕(愛惡慾)이 요지경처럼 뒤섞인 채 다가와 우리들 마음을 천 갈래로 흩어놓는 것이 봄이잖아요. 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생각해요. 모든 건 그날의 햇빛과 천 갈래 봄빛 때문에 비롯됐었다고." (p.221)

 

이 책의 제목인 '소소한 풍경'에 대해 말할 시간이 되었다. 작가는 주인공 각자에게 처음부터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의 풍경으로 존재해야 하고 작가의 의도도 그랬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풍경'은 바라보는 주체와 오브제 사이의 일정한 거리를 전제로 한다. 여기서의 거리는 물리적 거리가 아닌 마음의 간격을 의미한다. 주체의 관심이 객체에 밀착되는 순간 '풍경'은 '사유'로 전환되게 마련이다. 작가 박범신은 그들을 온전하게 '풍경'으로 그려내지 못했다. 하여 '소소한 풍경'은 오히려 '소소한 사유'로 읽힌다.

 

또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소설에서 소제목이 갖는 효과에 관한 문제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에서 작가는 각각의 소제목에 딸린 글들이 다른 소제목의 글들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묘히 숨기고 있다. 독자는 그로 인하여 각각의 글들을 개별적으로 인식하게 되고 막간의 휴식과 호흡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소소한 풍경>에서 화자 'ㄱ'의 호흡은 너무 가쁘다. 그리고 각각의 글들이 독립성을 유지하지도 못하는 까닭에 독자는 소제목으로 구분된 글들을 단지 단락의 구분쯤으로 인식하게 된다.

 

작가 박범신은 아마도 그동안 자신이 유지해오던 소설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근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도 그랬듯 묘사보다는 사유가 지배하는 소설은 독자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 나이가 들수록 작가는 상상력의 부족을 철학적 사유로 대체하려는 경향이 있다. 분명한 것은 묘사 속에 철학적 사유를 담을 수는 있어도 철학적 사유 속에 묘사를 담는 일은 어색하다. 장롱 속에 집을 담으려는 꼴이다.

 

창작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시도와 모험에 직면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올바른 자세이고 독자에 대한 에의라고 본다. 그러나 철저한 사전 준비와 분석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경력이 화려한 노작가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이 소설에서 불필요한 한자어의 남용도 눈에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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