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가고 또 새해가 오는 이맘때쯤이면 연례행사처럼 빼놓지 않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토정비결이나 신년운세를 보는 것이지요.  대개는 재미삼아 하는 일종의 놀이쯤으로 여기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저는 요즘 신년운세를 보지 않습니다.  믿지 못해서이거나 궁금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귀찮아졌을 뿐이죠.

 

제가 어렸을 때는 점집이 참 많았던 듯합니다.  붉은 바탕에 만자 (卍字) 표시가 있는 집은 한결같이 점을 보는 집이었죠.  지금도 더러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그렇게 자주 보이지는 않더군요.  점도 이제는 다양화되고 첨단화되어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앱으로 이동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요즘에는 점집을 찾기도 어려워졌습니다.

 

제가 돈을 내고 점을 보았던 것은 아마도 아내와 결혼하기 한두 해 전쯤 아내와 함께 점집을 찾았던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듯합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어느 점집에 들러 가족들 사주며 운세를 모두 보고 와서는 저희 형제들에게 들려주었던 적은 한두 번 있었던 듯합니다.  요즘에도 제 주변에는 심심풀이로 점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곤 합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점은 우리 주변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많아지는 게 사실인 듯합니다.  못 믿으시겠다구요?  그 이름만 달라졌을 뿐이지 인간의 길흉을 예측하는 점이나 무슨무슨 예보 또는 예측은 사실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적중률에 있어서는 차이가 나지만 말이죠.  예컨대 일기예보만 하더라도 단기예보는 잘 맞는 편이지만 장기예보는 적중률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주가예측이나 경기예측도 비슷하지요.  이런 것들은 오히려 우리가 보는 점보다도 못한 적중률인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점은 미신으로 치부하며 터부시하는 반면 경기예측이나 주가예측을 두고 미신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개중에는 신기한 예보도 있더군요.  요즘은 미세먼지도 예보를 하고 내년 4월부터는 서울시에서 모기예보제를 시행한다니 점의 종류는 나날이 늘어날 것만 같아요.  예보를 하는 것도 그 주체에 따라 성향이 조금씩 차이가 나는 듯 보입니다.  가령 장기 기상예보는 늘 최악의 상황을 말하고, 주가예측은 항상 최상의 상황을 가정하지요.  올해만 하더라도 올 겨울은 눈도 많고 혹독한 추위를 예보했었는데 지금까지는 그렇지도 않은 듯 보이니 적중률은?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형편없어 보이네요.  주가예측도 올초에는 상당히 높게 예상했는데 강보합 정도였으니 예측은 빗나가도 한참이나 빗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기관에 따라 왜 이런 예측을 하고 사람들은 왜 어떤 예측은 기억하고 어떤 예측은 기억조차 하지 못할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기상청 장기예보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여 말할 경우 이 예보가 맞을 경우 잘 맞는다고 할 테고 맞지 않았을 경우는 날씨가 좋았을 테니 그런 예보가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듯합니다.  그러나 주가예측은 주가가 상승하든 하락하든 손해를 보는 사람과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니 기왕이면 낙관적으로 예측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예측을 믿었다가 손해를 본 사람들은 원망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하겠죠.

 

아무튼 예보든 점이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비록 그 기법이 과학적이냐 비과학적이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죠.  미래는 신의 영역이 아니겠습니까?  문명이 발달할수록 불확실성은 증가하고 그에 따라 우리 인간은 점이든 예보든 그 무엇엔가 더욱 의존하게 되겠지요.  그러나 과학이 발달해도 100% 정확한 예보는 존재하지 않을 듯 싶군요.  점이든 또는 예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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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2-31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 님의 글을 읽으니 문득 어떤 책 속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그 책의 원제목이 'AGAINST THE GODS'였던 만큼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는데 아마도 가장 인상에 남았던 구절이 다음 내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 *

확률은, 확률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합리적」이라는 판단이 나올 때만 중요성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확률에 대한 의존은 확률을 어느 정도 고려해서「행동해야 한다」는 판단이 설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확률이 우리에게「인생의 지표」가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존 로크(Tohn Locke)가 말했듯이, 신은「우리의 관심사 대부분에」단지 미광(微光)만을 부여하셨다. 내가 여기에 부연해 덧붙인다면,「신은 우리에게 확률이라는 미광만을 부여 하셨다」라고 하겠다. 이는 가정하건대, 신이 우리를 놓고 즐거워하셨던「평범(Mediocrity)」과「수습기간(Probationership)」의 상태에 걸맞은 표현일 것이다.


꼼쥐 2014-01-04 11:39   좋아요 0 | URL
멋진 표현이네요.
신은 정말이지 우리 인간에게 확률이라는 미광만을 부여한 것 같아요. 우리는 그 미광을 붙잡고 떼를 쓰고 있구요. ㅎㅎ

세실 2014-01-01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도서관에도 다가올 인사를 앞두고 유난히 말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 어디가고, 누군 어디가고..마치 인사파트에 있는 사람처럼요. 늘 엇나가지만 말의 양은 줄어들지 않네요. 별명이 오뻥입니다. 살아가는 방법이 참 다양하죠? ㅎㅎ

꼼쥐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한 한해 되시길 빕니다.
새해엔 더 자주 뵈어요~~~~

꼼쥐 2014-01-04 11:41   좋아요 0 | URL
어느 조직에서나 그런 사람은 한둘 있게 마련이지요.
아마도 천성적으로 그렇게 되나 봅니다. 눈치를 주고 주의를 줘도 잘 고쳐지지 않는 걸 보면 말이죠.

세실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세 가지 일은 증오를 사랑으로 갚는 것, 버려진 자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자기 잘못을 시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곱씹어 생각할수록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가뜩이나 2013년의 막바지에 이른 요즘의 대한민국 정세를 보면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철도노조의 파업과 민주노총 사무실의 강제진입을 보면서, 그리고 얼마 전 개봉한 '변호인'의 흥행을 보면서 마음이 그닥 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경찰의 강경진압을 보면서 저는 8,90년대의 모습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 장면이 보여지곤 했으니까요.  오죽하면 대학가 주변의 상인들은 민방위 훈련을 하듯 하루에도 몇 번씩 셔터를 여닫아야 했겠습니까.

 

현 정부의 이와 같은 행태는 집권초기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대치 상황이 전 정권에서 발생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신기할 뿐입니다.  저는 노무현 정부가 물러날 즈음 이런 상황이 올 것을 미리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무슨 신통력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것이 모두 노무현 대통령의 위대함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제 의견에 반하는 분도 물론 있겠지요.

 

다들 보셨겠지만 참여정부의 초기에 있었던 평검사와의 대화를 기억하실 겁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에 어느 누구도 실현하지 못했던(어쩌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권위주의의 탈피는 그때부터 비롯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국민은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의 삶에서도 성공과 과오는 있게 마련이지요.  어쩌면 과오가 아홉이라면 성공은 그 중 하나쯤만 되어도 그 사람의 삶은 성공한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과오를 과감히 드러낼 수 있는 삶은 더욱 위대한 것이겠지요.

 

제 주변에 있는 사람 중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과오로 언론을 장악하지 못했던 것과 참여정부와 척을 지는 반대파를 제거하지 못했던 것을 꼽는 분도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뜨뜻미지근했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저는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노무현 대통령의 위대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은 자유보다는 오히려 억압과 복종에 익숙한 삶을 살아왔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젊은이들은 그런 환경보다는 오히려 자유와 개성에 더 익숙하겠지요.  그 정점은 역시 참여정부 시절이었구요.

 

민주주의의 기반인 자유와 평화를 누려본 사람들은 억압과 복종을 결코 참아내지 못하는 법이지요.  저처럼 그나마 나이 든 사람들은 억압적인 환경을 여러 번 경험했던지라 지금 그런 환경에 다시 처한다고 할지라도 적당히 견딜 수 있겠지만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어디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지금 참여정부가 잘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자유의 가치를 심어준 노무현 대통령의 위대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도 일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과오도 많았겠지요.  그러나 다음 세대의 주인이 될 젊은이들에게 자유의 가치를 심어준 것은 그의 위대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정의에 기반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저와 다른 의견이 있는 분들은 오히려 공권력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분도 분명 있을 겁니다.  현 정부를 책임지는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구요.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히틀러나 뭇솔리니도 자신의 행동이 틀리다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곧 전체주의에 다름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과 그것을 모두 수용할 때 가능한 제도입니다.  불협화음과 시끄러움이 오히려 당연한 것이지요.

 

영화 '변호인'이 흥행몰이를 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민주주의 제도 자체에 커다란 위협이 엄습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자유를 향유했던 사람들은 억압과 굴종의 시대를 결코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현 정부의 성공 여부는 그것에 달려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하고, 더 많은 대화를 시도하는 것 그것이 정답일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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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고교 동창들과의 조촐한 송년회가 있었습니다.  하루 걸러 송년 모임이 잡혀 있다고 다들 손사래를 칩니다.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나이가 들면서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모임은 하나둘 늘어만 가고, 그렇게 가입된 모임마다 모두 참석하려면 한 달로는 어림도 없을 듯싶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예전보다는 형편이 좀 나은 편입니다.  경기가 좋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건강이 좋지 않아서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밝히기 어려운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인지 다들 1, 2차에서 헤어지자는 분위기입니다.

 

아무튼 마지 못해 참석하는 자리가 있는가 하면 어제처럼 기꺼이 참석하는 자리도 있게 마련이지요.  이것저것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속내를 털어놓아도, 술에 취해 조금쯤 실수를 하더라도 다 이해하고 덮어줄 수 있는 자리는 제 경우에도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게다가 술을 한 잔도 못하는 저로서는 송년 모임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닙니다.  그나마 친구들은 저를 위해 매번 술대신 음료수를 시키곤 합니다.

 

친구들도 이제는 중년의 전형적인 아저씨 포스를 닮아가는 듯 보였습니다.  주름도 늘고, 배도 나오고, 머리도 희끗희끗해지고...  그럼에도 나이를 잊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은 동창 모임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대화의 주제는 일정합니다.  학창시절의 추억과 세상 살기의 어려움과 서로의 건강과 아이들의 교육 문제 등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어제는 고등학교 1학년 아들을 둔 친구의 고민을 듣고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들 한번쯤은 듣고 고민하는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친구의 고민을 간략하게 옮겨보면 이랬습니다.  친구는 자신의 아들을 교육함에 있어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지 말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남들이 뭐라 하든 끝까지 밀고 나갔다고 합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과외는 물론 학원도 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맞벌이를 하는 그들 부부는 아이만 행복하면 되는 줄 알았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니 여간 후회되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뭐가 문제였을까요?  아이는 비록 공부는 못하지만 다른 수험생들처럼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 같지도 않고, 그만하면 아이는 잘 자란 듯 싶은데 말이죠.  대다수의 교육 전문가나 정신과 전문의, 또는 성직자들로부터 흔하게 들어왔고 그렇게 믿고 실천했던 사람들.  그러나 자신의 자식들이 행복하게, 그렇지만 공부도 잘하는 아이로 성장하기를 바랐던 그들의 염원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다른 아이와 비교하지 않는 데서 오는 행복은 부모에게도, 아이에게도 중학교까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둔 고등학생의 아이는 자신과 친구들의 학습능력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고, 그 현격한 격차를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아이와 부모는 모두 불행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결과에 이른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이 스스로 자기 객관화에 실패한 것도 한 이유가 되겠고, 시간이라는 유한정성을 간과한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상대적 기준이 아닌 절대적 기준에 의해 스스로를 평가하려면 그 기준과 실천의 근거가 명확해야 합니다.  예컨대 하루에 몇 시간을 공부할 것인지, 나는 얼마나 그 목표를 달성하였고 그 발달 정도가 꾸준히 향상되고 있는지 스스로 판단하고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자기검증을 위한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절대적 평가는 오히려 상대적 평가보다 더 어려운 것도 같습니다.  자기 합리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아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오히려 요즘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자기 합리화를 잘하는 듯 보이더군요.  늘 나태하게 보내면서도 자신은 열심히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고 어느 순간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이 열심히 하고 있다고 확신에 차서 말하곤 합니다.

 

시간의 유한정성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은 인생 전체를 계획하는 데는 적합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한정된 단기 목표에 있어서는 잘 들어맞지도, 적합하지도 않은 듯 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찍 시동이 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늦게 시동이 걸리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니까요.  가령 내 아이가 공부의 필요성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가정할 때, 아이는 공부에 몰입하기보다는 허송세월한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와 자신보다 앞선 친구들을 보면서 좌절하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자기 객관화에 실패한 아이들 대부분은 국어 성적이 형편없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국어는 절대적으로 자기 개관화가 필요한 과목이니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것을 선택해야지 자신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한다면 낮은 점수를 받을 수밖에요.

 

저는 친구의 고민을 들으면서 우리나라의 교육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생각했습니다.  초등학생인 제 아들 녀석을 보란 듯이 키울 자신도 없습니다.  아이가 부모의 뜻에 맞춰 성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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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평범한 말 한마디가 사람들의 마음을 적시기도 합니다.

다들 보셔서 알겠지만 고려대 게시판에 붙었던 한 학생의 대자보가 연일 이슈가 되고 있더군요. 저도 보았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우리가 늘 듣고 말하는 <안녕하시냐?>는 한마디의 말에 저도 모르게 울컥했습니다.  왜였을까요?

 

8,9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저는 어쩌면 대자보 문화에 익숙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 당시에 제 주변의 친구들은 열성적으로 투쟁에 동참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그들과 의견을 나누고, 서로 위로하며, 때로는 울분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저도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우리는 그때 어떤 사상적 연대보다는 같은 세대를 사는 젊은이로서의 일체감, '하나'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에 더 열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들지 않는 젊음이란, 오염될 수 없는 젊음이란 언제나 외로운 법이고, 그 때문에 더 많은 위로와 관심이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의 젊은이들은 다들 뿔뿔이 흩어진 채, 각자의 방에서 본인의 외로움을 스스로 풀어야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이기주의라고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또 누구는 사회적 문제에 저항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리고 국가 권력과 기성세대의 무관심이 너무도 높은 장벽으로 그들을 구속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다만 외로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외로움이 임계점에 다다랐을 뿐입니다.  <안녕하시냐?>는 한마디에 왈칵 울음을 터뜨릴 수 있는 것이 젊음입니다.  그 울음을 같이 보듬을 수 있는 것도 젊음입니다.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어려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어찌 기성세대의 눈으로 그들을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철부지 어린애라구요?  천만에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제 그들의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서로를 감싸주고, 때로는 연대하고, 같이 울음을 울어주지 못한다면 세상은 그야말로 사막처럼 변할 것입니다.  저는 그걸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한 학교에 붙었던 어느 학생의 자필 대자보보다 그것을 계기로 그들이 연대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 힘으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기를 또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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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십니까?>

어제 불과 하루만의 파업으로 수천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다른 요구도 아닌 철도 민영화에 반대한 이유만으로 4,213명이 직위해제된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 사회적 합의 없이는 추진하지 않겠다던 그 민영화에 반대했다는 구실로 징계라니. 과거 전태일 청년이 스스로 몸에 불을 놓아 치켜들었던 '노동법'에도 "파업권"이 없어질지 모르겠습니다.

정부와 자본에 저항한 파업은 모두 불법이라 규정되니까요. 수차례 불거진 부정선거의혹,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이란 초유의 사태에도, 대통령의 탄핵소추권을 가진 국회의 국회의원이 '사퇴하라'고 말 한 마디 한 죄로 제명이 운운되는 지금이 과연 21세기가 맞는지 의문입니다.

시골 마을에는 고압 송전탑이 들어서 주민이 음독자살을 하고, 자본과 경영진의 '먹튀'에 저항한 죄로 해고노동자에게 수십억의 벌금과 징역이 떨어지고, 안정된 일자리를 달라하니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비정규직을 내놓은 하수상한 시절에 어찌 모두들 안녕하신지 모르겠습니다!

88만원 세대라 일컬어지는 우리들을 두고 세상은 가난도 모르고 자란 풍족한 세대, 정치도 경제도 세상물정도 모르는 세대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1997~98년도 IMF 이후 영문도 모른 채 맞벌이로 빈 집을 지키고, 매 수능을 전후하여 자살하는 적잖은 학생들에 대해 침묵하길, 무관심하길 강요받은 것이 우리 세대 아니었나요? 우리는 정치와 경제에 무관심한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단 한 번이라도 그것들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목소리내길 종용받지도 허락받지도 않았기에, 그렇게 살아도 별 탈 없으리라 믿어온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조차 없게 됐습니다. 앞서 말한 그 세상이 내가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묻고 싶습니다. 안녕하시냐고요. 별 탈 없이 살고 계시냐고요. 남의 일이라 외면해도 문제없으신가, 혹시 '정치적 무관심'이란 자기합리화 뒤로 물러나 계신 건 아닌지 여쭐 뿐입니다. 만일 안녕하지 못하다면 소리쳐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이 무슨 내용이든지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묻고 싶습니다.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  

 

 고려대 경영08 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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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12-14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말 한마디에 왈칵합니다. 안녕하십니까라면 그래도 덜했을 텐데 "들"이라는 한 글자가 제 눈에 자꾸 밟히네요....

꼼쥐 2013-12-17 14:0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그랬습니다.
너무도 무관심한 채 소외되었던 개개인들이 그 한마디에 다들 마음의 벽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oren 2013-12-14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이 대자보를 읽었을 때만 해도, 대한민국 청년들의 기백이 겨우 이런 정도의 나약한 질문밖에 내놓지 못할까 싶어 연민조차 느껴질 정도였는데, 문득 눈으로 뒤덮힌 온통 꽁꽁 얼어붙은 세상을 폭주하는 '설국열차'의 꼬리칸에 올라탄 승객들이 겹쳐 떠올랐습니다. 마주하고 있는 여러 현실들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겨우 '뒤켠에서 모기만한 목소리로 웅성거리는 듯한' 글밖에 써붙이지 못할까 싶어 짠한 마음부터 앞서네요...

nama 2013-12-15 10:02   좋아요 0 | URL
이만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참으로 어려운 세상입니다.

꼼쥐 2013-12-17 14:07   좋아요 0 | URL
그것이 기성세대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인 것 같아요. 권력에 대항하며 자랐던 기성세대가 그 대가의 혹독함을 경험하면서 자식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하고 바랬겠지요. 하여, 체제에 순응하는 방법만 가르친게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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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마감하는 이맘때쯤이면 몸도 마음도 지치게 마련이다.  부대끼는 사람에게 지치고, 일에 지치고, 멀어져가는 희망에 지친다.  그래서인지 11월에 출간된 에세이는 힐링을 주제로 한 에세이들이 눈에 띈다.  마음을 추스르고 내년을 기약하라는 것인지...

 

 

 

몇 해 전에 읽었던 달라이 라마의 <용서>를 잊을 수가 없다.  구도자의 삶과 사상을 다룬 책은 차고도 넘치지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책은 흔치 않다.  속세의 삶을 사는 독자가 전혀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한 구도자의 삶에 어찌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달라이 라마의 <용서>는 나의 편견을 깨기에 충분한 책이었다. 그때 나는 진실로 공감할 수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자주 꺼내 읽는다. 청전스님의 이 책이 그때의 감동으로 되살아날지...

 

 

 

 

 

 

심리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김형경의 <사람풍경>을 한번쯤 읽어보지 않았을까 싶다.  마음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정신분석을 받았다는 작가의 적극성이 마음에 들었던 책이다. 심리학 입문서와도 같았던 <사람풍경>의 여운은 지금도 남아있다. <남자를 위하여>가 기대되는 이유다.

 

 

 

 

 

 

 

 

작가 '정철'을 카피라이터라고 해야 할 지, 아니면 작가라고 해야 할 지 잘 구분이 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아무튼 나는 정철의 팬이다. 그림과 함께 제시되는 촌철살인의 경구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의 글은 읽는다기보다 머릿속에 쾅쾅 대못을 치는 일이다. 하나의 문장을 생각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시간을 허비했을 작가의 마음을 알기에 어느 문장이든 허투로 읽을 수가 없다.

 

 

 

 

 

 

시인이 시집을 출간하지 않고 산문집만 펴낼 때마다 마음이 짠해진다.  곽재구 시인은 수필가가 아닌 분명히 시인이다. 우리 주변에서 점차 사라지는 시집들. 시인은 이제 시인도 수필가도 아닌 그 중간쯤 어드메에 서 계신 듯하다.  나는 <곽재구의 포구기행>, <곽재구의 예술기행>. <우리가 사랑한 1초들> 등의 에세이집을 좋아하지만 시인이 시인으로 서지 못하는 현실은 늘 안타깝다.  <길귀신의 노래>도 산문집임을 알기에 짠한 마음으로 이 책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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