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나 자신을 방치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삶에 '직무태만'을 작정하는 이 시간이 어쩌면 세월의 잔물결이 짐짓 모르는 체 낙서를 하는 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기억의 백사장에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금세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되살아나곤 합니다. 이런 양가감정 중에 어느 게 우선이라고 말히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아내와 아들놈은 장인, 장모와 함께 여행을 떠났습니다. 6박 7일의 짧지 않은 여행입니다. 아내는 로밍을 해도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크루즈 내에서는 전화가 되지 않는다는군요. 한 번도 크루즈를 타본 적 없는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렇답니다. 저는 이제 일주일 동안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일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아침부터 온몸의 기운이 쭉 빠져나간 기분이었습니다. 그 길을 따라 쓸쓸함이 되밀려 왔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무기력이 다 식은 배달 음식처럼 날라 왔던 것입니다. 때 이른 더위가 눅지근하게 내려앉는 한낮, 형광등 불빛마저 짜증스럽습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오늘이 '부부의 날'이라고. 시도 때도 없이 날아 들어 나를 곤혹스럽게 하던 아내의 문자 메시지도 오늘은 잠잠합니다.

 

 

넝쿨 장미가 흐드러진 5월의 끝자락입니다. 약간의 쓸쓸함이 바람에 실려 오가는 듯합니다. 주말부부로 지낸 지 한참 되었건만 마음에 이는 작은 파문을 어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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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탁이나 의견에 있어 오직 '예스(yes)'만 남발하는 사람이 자신은 성실하며, 책임감이 강하고, 윗사람을 존중할 줄 알며, 희생정신이 강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한편 사교적이며, 아랫사람에게는 모범이 되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 역겨움을 느낀다.  게다가 '노(no)'라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 거만하며, 성격이 까칠하고, 독선적이며 배려할 줄 모르고, 이기적이며, 예의가 없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고 비판한다면 나는 역겨움을 넘어 인간 이하로 본다.

 

사실 우리나라와 같은 서열 중시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 중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노(no)'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 나름의 용기가 필요했을 터이다.  그 말을 겉으로 표현하기까지의 심리적 갈등과 불안 심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개중에는 어떠한 갈등도 없이 내키는 대로 내뱉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어린애가 아니라면 말이다.

 

나는 사람들이 '노(no)'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그 사람의 게으름과 비겁함으로 판단하고 있다.  예컨대 어떤 부탁에 대해 '노(no)'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이미지나 이해득실에 타격을 받지 않기를 바란다면 장황한 설명이나 변명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상황이 싫은 것이다.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사실 그게 편하다.  또는 어떤 논리에 대해 '노(no)'를 외칠 경우 분명한 근거로 상대방을 납득시켜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다거나 혹시 상대방으로부터 괜한 미움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대부분 '예스(yes)'라고 말하게 마련이다.  영혼도 없이 말이다.

 

나도 이제는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고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려야 할 위치에 서 있지만 무턱대고 '예스(yes)'만 외치는 사람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의사가 분명한 사람이 '예스(yes)'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의 진심과 정성이 담길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번 세월호 참사는 우리나라의 서열 중시 문화가 하나의 원인이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야말로 떼거리 문화, 온정주의 비리를 혁파할 수 있는 방패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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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전 딱 이맘때쯤 세상을 등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그분의 나이는 쉰두 살이었습니다.  문득 오늘 그 분 생각이 났습니다.  고3 수험생인 딸과 대학 2학년인 아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여서 세상 부러울 게 없다며 입에 미소를 달고 사셨던 자상한 가장이자 남편이었습니다.  그 분은.  그러나 어느 토요일 오후, 공원을 산책하던 그 분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그렇게 사랑하던 가족들에게 '잘 있으라'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쩌면 과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인은 비록 심장마비였지만 말입니다.

 

이따금 보는 TV에서 자식들 웃는 얼굴을 보면 모든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진다 말하는 어느 가장의 지친 얼굴을 볼 때가 있습니다.  흔히 자식들의 재롱이나 아내의 애교가 '피로 회복제'라고 말하더군요.  물론 직장에서 퇴근하여 편안한 휴식의 시간을 갖는 사람에게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을 보며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일터로 향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피로 회복제가 아니라 과로 촉진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역치(閾値)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생물체가 자극에 대한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의 세기를 나타내는 값을 뜻하는 말이죠.  이를테면 우리에게 어떤 자극이 주어졌을 때 신경계로 그 정보를 이송하여 반응을 이끌어내게 하는 최소한의 자극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경 회로는 육체와 정신이 소통하는 통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피로가 쌓이는 상황인데 아이의 웃음을 보며 육체의 피로를 잊거나 무시한다는 것은 어쩌면 육체와 정신의 소통을 끊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언제나 육체에는 육체에 필요한 원칙이 있고, 정신에는 정신에 필요한 원칙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피로를 호소하는 육체를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육체의 원칙을 무시하는 매우 잘못된 행동입니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있듯이 육체가 건강하지 못하면 주변 사람에게 짐만 될 뿐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에 언급했던 그분처럼 앓지 않고 죽는 것도 가족을 위하는 길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나의 생각은 다릅니다.  적어도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별을 준비할 시간을 줘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은 자신은 편할지 모르지만 남은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상처가 됩니다.  유산만 많으면 문제 없다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유산과 상관없는 그들의 인생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유산을 남겨줬다 한들 지키지 못한다면 또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른 나이에 부모 중 한 명을 잃는다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이 있을까요?  그것은 분명 아이들에 대한 크나 큰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쓰다 보니 매우 우울한 얘기가 되어버렸군요.  '피로 회복제'인지 '과로 촉진제'인지 잘 판단할 일입니다.  그게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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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는 사람들을 기꺼운 마음으로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고 있어도 지루하다거나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즐거운 경험입니다.  그들은 마치 주제가 없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제 시야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소리도 없이 금세 사라져갑니다.  뭐 하는 사람들일까?  사는 게 행복하다고 느낄까?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일까?  부모님은 모두 살아계시겠지?  나와 연관도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별의별 의문과 추측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사는 재미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무덥게 느껴지는 하루였습니다.

지면으로부터 층층이 쌓여가는 열기의 층화를 온 몸으로 감지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나른한 졸음이 오후의 햇살 속에 길게 깔릴 것만 같은 그런 날이었죠.  무언가 분명한 목적을 갖고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이쪽 그늘 속에서 한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구경꾼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 어쩌면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듯, 사람들은 목적하는 곳을 향하여 끝없이 오가더군요.  그들과 나 사이에는 마치 투명한 창유리로 가로막힌 듯한 무위의 공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구명보트에 몸을 누인 채 시간의 하류를 향해 떠내려 가고 있습니다.  의식의 덩어리들이 제각각 흩어졌다가 때로는 커다란 단위로 뭉쳐지기도 하고, 또 다시 분화되는 과정을 몇 번인가 반복하면 결국에는 작은 알갱이들로, 혹은 그보다 작은 먼지로 흩어지는 게 인생이 아닐까 싶습니다.  날씨 탓인지 축축 늘어지는 게 육체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괜한 잡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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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 다가서면 또 한 발 물러서는 무지개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하나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데올로기'를 가장 싫어하는 단어로 꼽고 있습니다만 저라고 왜 이데올로기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말이죠.  제가 여태껏 살면서 이것만큼 털어내기 어려운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가장 싫어하는 단어를 무슨 신줏단지 모시듯 살고 있는 셈이죠.  저뿐만 아니라 다들 그렇겠지요.  공교육이라는 시스템 내에서 적당히 배운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생각하면 한심한 노릇입니다.

 

사람에게 아귀처럼 들러붙은 이 '이데올로기'란 놈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한없이 넓게 벌려놓는 걸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던 것도 이제는 서서히 옛일처럼 지워지고 잊혀져간다 할지라도 그 책임 소재를 따져 철저히 처벌해야 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명확한 일이건만 그놈의 '이데올로기'가 뭔지 그에 따라 정부를 옹호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으로 양분되는 걸 보면서 참담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인륜의 문제도 이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구나 생각할 때 뭐라 할 말이 없어집니다.  얼마 전 신문 기사에는 우리나라의 언론 자유국 순위가 실렸더군요.  보수 성향의 국제인권감시단체인 프리덤하우스에 의해 발표된 <2014 언론자유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언론자유지수 32점으로 조사 대상 197개 국가 중 68위로 '부분적 언론자유국(PARTLY FREE)'으로 분류되더군요.  이것은 나미비아나 칠레보다도 못한 창피한 순위였습니다.

 

한 나라의 언론자유도는 국민 개개인 간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국민 통합의 밑바탕이 되는 기본적 전제조건이 아니겠습니까.  2004년에 26위까지 올랐던 우리나라의 언론자유국 순위는 이제 전 세계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셈입니다.  독일의 진보언론 타츠(Taz)는 '대한민국에서의 언론의 자유, 대통령의 무릎에서 노는 애완견'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더군요.

 

상황이 이럴진대 국가적 재난에 대한 대비인들 제대로 될 리가 없지요.  재난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이나 자세도 그렇구요.  썩어빠진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여 나라가 망할 지경에 처했는데도 제 잇속을 챙기려는 작자들이 도대체 누구인지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는 앞으로 한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함에 있어 그 사람이 가진 '이데올로기'의 집착도를 기준으로 삼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저부터 내려놓아야겠지요.  당연합니다.(오늘 낮에 뉴스를 보며 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하도 가관이어서 한마디 적었습니다.  지금까지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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