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들었던 몇몇 소식들에 가슴이 아려옵니다.

공과금 70만원이 담긴 봉투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세 모녀에 이어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동반 자살한 사람들이 줄줄이 이어졌지요?  그들의 죽음 자체도 안타까운 게 사실이지만 저는 그들이 죽음을 결심하기 전까지 겪었을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옛말도 있지만 그들을 벼랑끝으로 몰았던 책임은 분명 살아 남은 우리 모두에게 있을 것입니다.  제가 잠시 잠깐 느꼈던 아픔을 글로 옮기는 것도 생각해 보면 한 줄 감상에 불과한 것일 터이고, 지극한 아픔인 양 과장하는 것도 한낱 위선에 불과할 터이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제 자신의 아린 가슴과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분노는 쉬이 사라지지 않더군요.

 

봄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오늘, 투명한 하늘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오늘의 풍경은 마치 중고품을 약용 알코올로 닦아 놓은 듯 곰팡내가 풀풀 풍길 것만 같았습니다.  그 풍경을 가로질러 하루 종일 괴기영화에 나오는 덩치 큰 괴물의 휘파람 소리 같은 바람이 훑고 지나갔습니다.  스산한 하루였어요.  몸도, 마음도 겨울 맹추위 속에 놓인 듯 했었지요.

 

시간이 여유로울 때, 적선하듯 제 숙소 주변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제 자신이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들의 삶이 어떠한지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채 외면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힘든 어린 시절을 경험했던 제가 이렇게 모질고 냉정한 사람으로 변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지 바람이 잦아들었습니다.

파리한 초승달만 덩그러니 걸린 하늘이 몹시 슬퍼 보입니다.  이렇게 또 하루가 저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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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2014-03-22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말은 그 자체가 가난은 나랏님만이 할 수 있고, 그래서 나랏님이 해야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꼼쥐 2014-03-26 14:16   좋아요 0 | URL
글쎄요. 아마도 그 말은 아무리 능력이 있는 나랏님조차도 누군가를 가난으로부터 영원히 구제할 수는 없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렇지만 우리가 선거를 통하여 통치자를 뽑는 이유는 그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조금쯤 돌보고,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힘쓰라는 뜻이겠지요.
 

제가 어렸을 적엔 주변에서 많은 까마귀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까마귀는 흔한 새였습니다.  반면에 까치는 자주 볼 수 있는 새가 아니었죠.  하여, 집 근처의 나무 위에서 까치라도 우는 날이면 좋은 소식이 오려나 생각하며 괜히 들뜨고 반겼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 반대가 된 듯합니다.  까치의 개체수가 어찌나 많은지 농촌에서는 까치를 유해조수로 지정하였고 힘들여 키운 농작물을 까치로부터 지켜내고자 안간힘을 쓰더군요.

 

까마귀는 예로부터 죽음을 상징하는 불길한 새로 여겼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어렸을 적엔 온 마을에 죽음이 만연했었습니다.  죽음은 갓 태어난 아기서부터 나이 든 노인에 이르기까지 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달려들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죽음이 만연한 곳에서는 희망도 만연한 법이지요.  마을의 성황당에는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어쩌다 보게 되는 까치와 같은 미물에게도 자신의 바람을 기원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언제부턴가 희망은 '유한성을 인식하는 자의 조급함'이라고 규정하며 살고 있습니다.  조금 어렵지요?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굳이 오늘 당장, 또는 가까운 시일 안에 무엇인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삶은 끝이 보이지 않는 로프처럼 단조롭고 지루한 것이겠지요.  반면에 죽음이 코앞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작든, 크든 무엇인가를 갈구하고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유한성을 인식하는 것이죠.  더구나 시일이 촉박하니 조급해질 수밖에요.

 

까치만 보이는 요즘에는 우리의 삶에 오직 희망만 넘쳐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는 곳에 죽음이 아주 없어질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시대가 변하여 누구의 죽음, 아무개네 집 초상을 온 몸으로 느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병원의 장례식장이나 종교시설에서 치뤄지는 애도의 현장은 너와 나를 구분할 수 없는, 판에 박은 듯한 모습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죽음을 터부시하는 요즘 사람들이 죽음을 그저 눈에 보이지 않도록 숨기거나 기피하기 때문이지요.  죽음은 이제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어쩌면 현재는 사라지거나 잊혀진 어떤 것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이 삶으로부터 멀어진 요즘, 기다렸다는 듯 까치가 온 산천을 뒤덮고 까마귀는 자취를 감추는 걸 보면서 느껴지는 게 많습니다.  그러나 말이죠.  이렇듯 희망만 있고, 죽음이 멀어진 시대가 좋기만 한 것일까요?  이제 희망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흔한 것이 되었고,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간절함이나 조급함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희망은 이제 옛적의 희망이 아닙니다.  죽음은 없고 희망만 남은 까닭이지요.  간절함이 사라진 희망을 희망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죽음을 잊음으로써 희망도 함께 잃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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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3-01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한성을 인식하는 자의 조급함', 희망에 대한 이런 멋진 정의는 처음 봅니다.

꼼쥐 2014-03-02 14:02   좋아요 0 | URL
에구구구. 부끄러워요.
hnine님의 글에 비하면 아무 생각없이 쓴 글이죠.
 

휴일 오후에 공원을 산책하는 것은 너무도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이겠습니다.

그 길에서 나는 음악을 들으며 깊은 사색에 빠져 있는 중년 여성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스마트폰에 내장된 음악이 재생되는 동안 그 앞을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은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많아도 1초 이내의) 짧게 머물다 지나쳐 갔습니다.

그 중년의 여성은 그들의 시선에는 어떤 관심도 두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미세먼지 예보가 있었고

그녀가 틀어놓은 음악이 공원의 적당한 침묵을 잠식하는 동안

미세먼지의 서걱거림이 들리는 듯 하였습니다.

그룹 아바(ABBA)의 노래였습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노래의 제목은 'I have a dream'이었던 듯합니다.

참으로 오래된 노래입니다.

 

스치듯 들었던 그 노래로부터 나는 '국기 하강식'을 떠올렸습니다.

'왜?' 라고 묻는다면 뭐라 답변할 말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추억은 국기 하강식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식의 가는 줄에 매달려 한동안 펄럭이다가

무의식의 품으로 갈무리되는 그런...

 

노래가 끝나기 전에 국기는 천천히 내려오고

먼지가 날리는 아스라한 운동장에 석양이 내려 앉는

그런 시각에 국기 하강식은 진행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가던 길을 멈추고 애국가가 울리는 쪽을 향하여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죠.

 

오늘 내가 들었던 아바의 노래가 끝나기 전에,

한동안 펄럭이던 내 추억의 깃발이 다 내려오기 전에,

어디선가 가던 길을 멈추고

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얹은 채

내 추억의 깃발에 경의를 표해줄 그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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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고향친구가 나의 숙소를 찾아왔었다.

객지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친구는 연락도 없이, 그것도 늦은 시각에 세상 다 산 표정을 하고는 나를 찾았던 것이다.  밤 11시쯤 되었을까.  초인종 소리에 놀라 문을 열었더니 친구는 오래 절인 배추처럼 추레한 모습으로 어두운 복도에 그렇게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치킨 한 마리와 맥주 두 병을 들고.

 

 밖에는 바람이 부는지 아파트 뒤편의 소나무가 술에 취한 거인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뿌연 달빛.  친구는 부부싸움을 하고 무작정 나왔는데 그 시각에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고 했다.  술을 못 마시는 나에게도 거품이 넘치도록 가득 부어주고는 목이 말랐는지 안주도 없이 거푸 몇 잔을 들이켰다.  트림인지 한숨인지 깊은 숨을 토해내는 친구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밑도 끝도 없이 내가 부럽다고 했다.

가족과 떨어져 홀애비 아닌 홀애비 생활을 하는 내가 부럽다니...  맞벌이를 하면서 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 친구.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그와 나는 이따금 전화를 할 뿐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엇이 그리 바빴던 것인지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이른 나이임에도 정 떼는 연습부터 미리 하며 살았나 보다.

 

만사태평한 친구와 무엇에든 욕심이 많고 성마른 성격인 그의 아내는 극과 극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잘도 살아왔다.  그렇게 다른 성격이어서 그렇게 잘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체중 때문인지 무릎 관절이 좋지 않은 친구는 운동 좀 하라는 아내의 말에 괜한 성질을 부렸었나 보다.  그렇게 1시간쯤 다투고는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여 옷도 변변히 챙겨 입지 않은 채 집을 나왔다고 했다.  막상 나오고 보니 딱히 갈 데가 없다는 걸 알았고.

 

친구는 자고 가겠다고 했다.  연락도 없이 그래도 되느냐 물었더니 괜찮다며 소파에 풀썩 쓰러졌다.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렇게 친구는 잠이 들었고, 나는 침대에 누워 몇 번을 뒤척였다.  어찌어찌 잠이 들었고, 운동을 나가기 위해 잠이 깨었을 때 친구는 더 자라는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겠다며 옷을 입었다.  현관을 나서는 친구의 뒷모습이 어두웠다.  마치 누군가의 손에 매달려 공연 시간을 기다리는 줄 달린 인형처럼 처량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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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4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9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TV를 자주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아무 목적도 없이 목을 길게 늘인 채 TV 화면에 빠져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프로건 상관없이 켜진 대로 무작정 보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뉴스는 잘 보지 않습니다.  세상의 끔찍한 사건이란 사건은 죄다 모아 놓고 말하면서도 무심한 듯 아무런 표정도 없는 아나운서를 볼 때마다 세상 공포영화 중에 그렇게 무서운 공포영화도 없겠다 싶어서입니다.

 

그렇다고 예능 프로를 즐겨 보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이 웃긴지, 어느 시점에서 웃어야 하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입니다.  게다가 코맹맹이 소리로 세살배기 애기 흉내를 내는 어느 코미디언의 나이를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저는 놀람보다는 공포를 느끼곤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나이 스물이 넘어도 성인으로서의 티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 늙어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야 철이 드는 것인지...

 

이렇게 쓰고 보니 제가 마치 죽음을 눈 앞에 둔 노인네가 된 기분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취향이 다를 뿐이죠.  저는 자연 다큐멘터리나 인문학 강의 등을 즐겨 봅니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볼 때마다 그 생생한 화면이나 놀라운 촬영 기술에 감탄하곤 합니다.   '세상 좋아졌구나!'하는 감탄이 저절로 터지고 기술의 발달에 새삼 감사하게 되지요.

 

그럼에도 어쩌다 예능 프로를 우연히 보게 되는데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구나 느끼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까무룩 잠드는 낮잠처럼 들었던 생각입니다.  젊은이들이 장악한 모든 프로그램에서 출연자의 엣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자주 비교하여 보여주는 것에서 저는 '아, 이제 물질문명의 정점에 도달했구나'하고 느꼈던 것입니다.  딱히 재미있지도 않고, 앞뒤의 연계성에서 그닥 필요한 장면도 아니었는데 출연자의 옛모습을 보여주며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은 왜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과거는 무조건 나쁜 것, 과거는 무조건 촌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기업 광고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과거를 부정하고 폄훼함으로써 현재의 수요를 창출하려는 노력은 참으로 힘겨워 보였습니다.

 

그런 장면들을 최근 들어 여기저기서 자주 보게 되었다는 것, 뉴스와 비슷한 아침 프로그램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광고로도 수요를 늘릴 수 없는 기업의 다급함이요, 정부의 아우성처럼 들렸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필요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물질이 넘쳐나는 시공간에 도달한 것입니다.  경제지표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ISM 제조업지수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지요.  미국은 그동안 수요를 늘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시장에 쏟아부었던 것일까요.  그럼에도 수요는 예전처럼 늘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했던 그런 생각을 통해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암울한 경제 전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물질문명의 종말과 함께 사람 냄새 나는, 사람다운 세상이 오려나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는 것입니다.  내가 쓰지 않는 물건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푸근한 미소를 덤으로 줄 수 있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제 꿈이 너무 야무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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