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수꼴들은 북조선 3대세습은 잘못됐기에 망하게 해야한다 주장하지만, 정작 북조선 세습보다 더 심각하고 더 여성 억압적이고 더 종교의 자유가 없는 미국의 후원국 사우디 아라비아에 대해선 별말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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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코드
브루스 커밍스 지음, 남성욱 옮김 / 따뜻한손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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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이라크, 북한은 악의 축이다.” 이 말은 미국의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이란, 이라크, 북한을 가리키며 했던 말이다. 북한에게 있어 9.11 테러가 일어나던 2001년과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던 2003년은 큰 위기였다. 비록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과 같은 대규모 아사사태는 끝났지만, 이번엔 국제정세적인 측면에서 미국으로부터 위협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1991년 걸프 전쟁에서의 미군은 막강한 공군력으로 세계에서 손꼽던 이라크 군대를 궤멸시켰고, 2003년 또한 마찬가지로 이라크 정규군은 개전초반에 궤멸 당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 네오콘을 비롯한 극우주의자들은 이라크 전쟁을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라 주장했고, 그들 중 대다수는 북한정권 또한 이라크처럼 없애버리기를 바랬다.

 

미국의 지베계급은 이라크를 침공하고 북한에게 제국주의적인 압박을 가하면서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 위원장을 폭군 혹은 핵폭탄 제조에 미쳐있는 미치광이로 묘사하며,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국가인 냥 언론매체를 통해 묘사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김정일은 스탈린주의자고 독재자이며, 인민들은 생각지도 않은 채 핵폭탄 개발에만 정신이 팔린 미치광이다. 따라서 미국의 지배계급은 북한이라는 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저지르는 제국주의적 대북 고립 정책을 필연적으로 합리화 시켰고, 대한민국의 수구세력들 또한 미제국주의 논리에 편입하여 이를 당연시 여기며 북에 대한 악마화를 진행했다.

 

그렇다면 미국 네오콘과 제국주의자들이 주장과 대한민국 수구세력들이 주장이 과연 북한에 대해 올바르게 본 것일까? 필자의 답변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주장은 단순히 미국 지배계급의 제국주의적인 논리에 편입하여, 지극히 미국 팽창주의 혹은 반공주의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게 바로 브루스 커밍스와 같은 지식인들이 지적하는 포인트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미국과 한국의 극우세력들은 북한에 대한 노골적인 악마화를 해왔고, 북한을 악의 축이라 규정했다. 브루스 커밍스가 쓴 김정일 코드는 그들의 주장이 과연 옳은 지 혹은 북한이라는 나라가 과연 상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비정상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쓴 책이다.

 

커밍스가 내린 결론은 미국 네오콘과 지배계급들이 내세운 논리는 지국중심적인 논리이며, 사실 관계까지 왜곡한 다는 것이다. 즉 미국이 그리도 지적했던 북한의 핵개발과 한반도 관계가 긴장될 시기 북이 외치는 노골적인 선전구호는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전략 전술인 것이다. 이를 깊이 들여다보면 북한의 핵개발에는 그들 입장에서 상식적으로 이해 가능한 이유가 있다. 1991년 소련의 해체와 동유럽 공산권의 해체는 북한에게 있어서 크나큰 경제적인 타격을 입혔다. 당시 사회주의와의 대결에서 승리할 거라 믿었던 미국은 북한 또한 동유럽처럼 망할 거라 예상했었고, 1994년에는 실제로 미국의 클린턴 정부가 북한을 침공할 계획까지 준비했었다. 1991년 걸프전쟁에서 미군에게 궤멸당하는 이라크군의 모습을 보며 북한의 김정일로서는 핵무기 개발의 필요성을 인식했을 것이고, 2000년대 초반 부시가 북한,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이라 주장하면서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하는 것을 본 북한으로서는 핵무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즉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북한의 핵개발은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다.

 

이와 동시에 책 김정일 코드에서 한국전쟁 당시의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북한의 대공방어체계 및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언급한 것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1950년 한국전쟁 시기 북한은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 까지 미공군의 폭격을 경험했다. 당시 북한이 겪은 트라우마는 대공미사일 방어 시스템의 강화로 표출됐고, 북이 대공시스템과 미사일 개발에 몰두했던 것에서 드러났다. 커밍스의 주장은 김정일의 북한은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군사력 강화를 해왔다는 것이지만, 미국은 경험론에 입각하여 행동한 북한을 전략 전술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 부분은 한국전쟁을 단순히 잊혀진 전쟁으로만 치부하는 미국과 미국인들이 시각도 상당히 기여한다.

 

이처럼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방어 체제 강화 및 매체에서 보여주는 김정일 북한의 노골적인 구호는 충분히 전략 전술적으로 이해가능하다. 즉 미국의 네오콘들이 이를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충분히 이성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전략전술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전략전술과 이성의 눈으로만 바라본 저자 커밍스는 북한을 이해만 하는 것일까? 그것 또한 절대 아니다. 브루스 커밍스의 경우 북한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것이지 북에 대한 비판을 삼가지는 않았다. 저자 브루스 커밍스의 말에 따르면 북한이라는 사회가 자국 지도자에 대한 비판이 불가능 하고, 북한에 놀러오는 관광객들이 보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며, 강제수용소와 같은 곳도 분명 있을 것이라고 한다. 저자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으로 탈출한 일부 탈북자들이 하는 증언들이 신빙성과 사실관계에 있어서 매우 떨어진다고도 주장하지만, 보편적인 기준으로 봐도 북한에는 분명 비민주적인 시스템이 있다는 것을 브루스 커밍스는 인정한다.

 

이렇듯 브루스 커밍스는 김정일 코드에서 이와 같이 우리가 북한에 대해 오해하고 있던 것들과 적대심으로만 봐서 보지 못했던 것들 혹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바로 잡아준다. 동시에 북한의 문제점에 대해서 균형 있게 지적하는 저자의 시각은 그저 읽는 이를 감탄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책은 2004년에 미국에서 처음 출판 된 책이기에 그어 걸맞은 오판도 있다. 브루스 커밍스는 유교적 전통주의라는 시각에 입각하여 김정일의 후계자는 그의 첫째아들 김정남이 될거라 주장했지만, 알다시피 김정일의 권력을 계승한 자는 그의 막내아들 김정은이다. 물론 그 당시는 김정은이라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고, 설사 커밍스가 김정은의 존재를 어느정도 알았다 하더라도, 동양의 전통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 당시로서는 김정남이라 예상할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브루스 커밍스가 책에서 과거 김일성의 항일 경력과 1990년대 이전 북조선의 경제력과 일반 인민들의 생활사를 언급한 것도 굉장히 인상적이다. 당시 북한과 미국간의 갈등을 다루면서, 북한의 역사 문화 군사 정치 경제등을 빠지지 않고 다루는 커밍스의 시각에 감탄할 따름이다.

 

남북관계에 대해 필요이상으로 의심하거나 이를 폄하하는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심을 드러내고 이를 부추긴다. 분명한 것은 이는 그저 반공주의와 반북주의에서 나타나는 막연한 의심인 경우가 많다. 브루스 커밍스의 김정일 코드는 당시 많은 미국인들과 한국의 수구주의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많은 해답을 줄 것 이다. 2018년 남북고위급회담 이후 점차 좋아지고 있는 이 시기 이 책을 읽은 것은 시기적절했던 것 같다. 앞으로 더 나은 남북관계가 만들어지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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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유사역사학을 비판하는가?

내가 환단고기를 처음알게 된 것은 대학교 1학년때였다. 당시 고구려사를 전공한 모 교수는, ˝한국에도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는 극단적 집단이 있고, 환단고기와 같은 이상한 서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모종의 집단이 있다.˝고 학생에게 얘기해줬다.

그때는 ˝아 뭐 그런게 있구나?˝라는 생각만 들었지 관심이 생기지 않았었다. 뭐 그냥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라 생각했었다. 2016년쯤이었다. 당시 아는 학교 선배와 만났을때 그 선배는 이덕일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듣게됐고, 적어도 유사역사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일각에서의 주장으로만 치부했었다.

그러던 2017년이었다. 2017년 도종환 장관 문제가 터졌고, 다시한번 환빠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런상황에서 youtube를 통해 증산도 방송을 잠시나마 봤고, 그 영상에서 상당히 병맛스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페북에서 환단고기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쓴 글들을 페이스북으로 봤고, 가입되어있던 모 밴드에서 환단고기 찬양글을 보게됐다. 상당히 충격적이고, 이이가 없었다. 그들의 실체를 알게 된 나는, 간혹 환빠들을 까는 글을 올리게 됐고, 지금까지 그들을 부정적으로 보게 됐다.

사실 환단고기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주장들이 많다. 그 책주장에 따르면 한민족의 역사는 9천년이나 됐고, 모든 문명의 근원은 환국이고, 환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전세계로 퍼져나간 것이기에 한국인들은 이에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먼 훗날에는 한국인들이 전세계로 퍼져나가 많은 영토를 차지해야한다는 논리로 나선다.

이런 주장은 과거 히틀러가 주창했던, 게르만 민족주의와 유사하다. 그런 논리를 가지고,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뒤, 세계를 전쟁속으로 몰아넣은 것이 히틀러의 게르만 우월주의다. 거기다 상식적으로 지금으로부터 9천년 전에 국가가 존재하고, 19세기 제국주의의 산물인 민족이라는 개념을 고대에 적용하는 것 부터가 모순이다.

따라서 환단고기에 담긴 내용은 진실도 없고, 시사하는 바도 파시즘적이다. 이런 파시즘적인 그들의 논리는 영토우월주의에서 표출된다. 고조선 영토와 고구려 영토에 대한 광기어린 자부심과 정복전쟁을 많이한 정복자에 대한 그들의 추종이 바로 그렇다.

환단고기 추종세력들은 이를 비판하는 세력을 식민사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영토를 부풀려 민족적 자부심을 강조하고, 정복을 미화하는 그들이야말로 식민사학에 경도된 것이고, 제2의 대동아공영권론자다.

유사역사학! 이것은 인민을 현옥시키고, 파시즘으로 타락시키는 한국판 레벤스라움 혹은 대동아공영권이다. 인민대중은 유사역사학의 실체를 알고 이와 같은 파시즘적 논리에 맞설수 있는 민중주의적 역사관으로 무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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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인재들 - 왜 미국 최고의 브레인들이 베트남전이라는 최악의 오류를 범했는가 걸작 논픽션 7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송정은.황지현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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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정말 두꺼운 책 한권을 끝까지 다 읽었다. 1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필자가 읽은 책은 한국전쟁을 다룬 책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의 저자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이 쓴 최고의 인재들(The Best And The Brightest)’라는 책이다. 최고의 인재들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과정과 인물들의 심리 상황 그리고 개인사를 정리한 책으로서 당시 미국 최고의 엘리트라 불리던 사람들이 어떻게 베트남 전쟁이라는 최악의 오류를 범했는지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1104페이지나 되는 이 압도적인 분량의 책을 읽다보면 소위 미국에서 최고의 엘리트라 불릴만한 인물들의 이름이 나온다.

 

하버드 대학교의 전설적인 교수 맥조지 번디, 미국의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일하며 사장자리까지 올랐던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하버드에서 엘리트 코스를 거친 뒤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 존F케네디, 록펠러 재단의 회장자리를 지냈던 딘 러스크와 같이 미국에서 엘리트 코스를 거친 인물들 말이다. 이들은 베트남 전쟁이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쟁에 개입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도 어떻게 하면 사상자를 줄인 채 더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을지를 생각했으나, 자신들이 원하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들은 도미노 이론에 따라 베트남 전에 개입했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시작으로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한 미국은 1973년 파리평화조약을 맺고 철수하기 까지 총 58명의 병사를 잃었고, 미국 자존심에 크나큰 타격을 받았으며,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패배했다. 이 대부분의 결과를 최고의 인재들은 알고 있었지만,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1. .소 냉전시대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서로 경쟁하는 체제에 돌입했다.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체제 우월성을 입증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많은 곳에서 경쟁했고, 이는 한 나라의 좌우갈등이라는 형태로 표출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 한반도가 그랬고, 그리스가 그랬으며, 중국이 그랬다.

 

1949101일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은 장개석의 중국 국민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승리한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194910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다. 당시 중국의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자 미국은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당시 미국의 공화당은 우린 중국을 잃었다.”라는 논리를 앞세워 민주당과 대통령 트루먼을 맹비난 했다. 중국 공산당의 통일 이후 미국은 매카시즘이라는 반공주의에 빠졌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49년 소련은 자력으로 수소폭탄을 개발했고, 19506월에는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한국은 북한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전쟁 초반에는 낙동강 전선 까지 밀리는 신세가 됐었다. 따라서 미국은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따라 반공주의에 빠져들었다.

 

2차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은 주체적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과거 베트남을 식민지배 했던 프랑스는 다시 식민지화하기 위해 베트남에 들어왔고, 이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가던 무렵인 1945년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은 일본에 맞서기 위해 미국과 협력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의 도움을 원했으나, 냉전이 격화되면서 미국은 프랑스편을 들었다. 냉전이라는 흐름에 따라 미국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식민세력 대 독립운동 세력으로 보지 않고,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관점에서 해석했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전쟁이 격화됐을 무렵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의 프랑스 전쟁 비용 80%를 지원했다. 예상과 달리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54년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며 프랑스가 물러났다.

 

1950년대 매카시즘이라는 광풍이 어느 정도 사그라지기 시작했었지만, 국제정세는 여전이 미국과 소련의 대립 연속이었다. 1958년에는 금문도를 놓고 중국과 대만간의 충돌이 벌어져 미국의 제7 함대가 투입되기도 했고, 1959년에는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쿠바혁명을 완수했으며, 1961년에는 쿠바 미사일 사태가 터지고 독일에 베를린 장벽이 설치됐다. 즉 냉전 초기 미국과 소련간의 대립은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베트남의 경우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약에 따라 2년 이내에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해야했지만, 호치민이 승리할 것이라 예상한 응오딘지엠은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가족정치와 부정부패 그리고 불교도 탄압으로 얼룩진 응오딘지엠의 독재 정치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1960년에는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이 창설됐고, 남베트남의 농민들은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지하지 않았다. 전 세계적인 냉전이라는 대립 속에서 베트콩과 남베트남 국민들의 저항은 미국에게 있어서 단순한 좌우이념대립으로 보였다. 남베트남 정권의 내부적인 붕괴는 미국에게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미국은 남베트남에 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점차 늘렸다. 즉 미국에게 있어서 남베트남의 문제는 도미노 이론에 따라 미국이 개입해야 하는 대상이었고, 미국은 베트남 문제에 깊이 개입했다. 그러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이 터졌고, 미국은 대규모의 전투부대를 보내며 전쟁에 개입했다.

 

2. 남베트남 정권의 부패와 혼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지원한 남베트남 정권은 정통성을 비롯한 그 모든 면에서 호치민의 북베트남에게 밀렸다. 호치민이나 보 응우옌 잡, 팜반동, 레주언을 비롯한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이 프랑스 식민지 시절과 태평양 전쟁 그리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투쟁을 전개했던 혁명가 혹은 독립투사들이었던 데에 반해 남베트남의 대부분의 고위관료나 군 장성들은 프랑스 식민지 시기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에 빌붙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운 민족반역자들이었다. 따라서 베트남인들이 어디를 더 지지할 지는 안봐도 비디오였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인 응오딘지엠을 예로 들자면, 그 또한 민족반역자였다. 1930년 그는 식민지 관료로 있으면서 공산당의 반프랑스 봉기를 진압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이 들어오자 그는 독립운동이랍시고 일본에 빌붙었지만, 실패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전쟁 막바지에 베트남으로 돌아와 반공주의만을 외쳤고,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에 맞서 싸우지 않았다. 이렇듯 남베트남의 고위관료들은 프랑스에 빌붙었던 민족반역자들이었다.

 

1954년 제네바 협약에 따라 베트남이 남북으로 갈라진 뒤, 응오딘지엠은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남베트남의 초대 내각을 가톨릭으로만 구성했고, 가족정치를 일삼았다. 토지는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할당이 됐고, 자신에게 반대되는 세력을 반공이라는 이름아래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숙청했다. 무엇보다 그는 베트남인 대다수가 믿는 불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심지어 1963년 수도 사이공에서 틱광둑이라는 고승이 소신공양하여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사건이 일어날 정도였다. 따라서 남베트남의 민중은 응오딘지엠을 반대했고, 베트콩이 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남베트남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베트남 고위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무능은 베트콩과의 전투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19631월에 일어난 압박 전투는 남베트남군의 무능력함을 여실히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압박 전투 당시 남베트남군 1500명이 300명의 베트콩을 상대했다. 결과는 베트콩의 대승이었다. 남베트남측은 86(83명 남베트남군 3명 미군사고문단)이 전사하고 미군 헬기 5대가 파괴되었던 데에 비해, 베트콩측은 총 18명이 전사했다. 이처럼 남베트남군은 전투에서도 무능력함 그 자체였다. 따라서 미국은 남베트남을 지키고 베트콩을 격퇴시키기 위해선 더 많은 군대를 파병해야 한다 생각했다.

 

3. 통킹만 사건: 이것은 미국의 침략전쟁이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된 계기는 바로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accident)’였다. 196482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미국 언론들은 베트남 통킹(Tonkin) 만 해상에서 정찰 중이던 미국의 구축함 매덕스(USS Maddox)가 북베트남의 어뢰정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이것이 제1차 교전이었다. 1차 교전 당시 미 해군은 매덕스와 함께 작전하고 있던 동급의 구축함 USS 터너 조이(Turner Joy)가 반격을 가해 북베트남 함정 1척을 격침하고 2척을 파손시켰다. 북베트남군에서는 10여 명의 사상자도 나왔던 데해 바해 선제공격을 당했다는 미군은 한 명의 부상자도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83일 제2차 교전이 있었다.

 

84, 미국의 존슨(Lyndon B. Johnson) 행정부는 매덕스와 터너조이 구축함이 또 한 차례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두 번째 공격에 관한 전문을 받은 존슨 대통령은 즉각 전면적인 보복 공격을 지시했다. 존슨 대통령은 그날 저녁 존슨은 다음과 같은 대국민 선언문을 발표했다.

 

미국의 함정들은 공해상에 있었다. 미국의 함정들은 방어적 태세만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전쟁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북베트남의 이러한 불법행위로 인하여 우리의 남베트남 국민과 정부에 대한 총체적인 지원은 더욱 배가될 것이다.”

 

이는 사실상 선전포고였고, 1965년 미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북폭에 나섰다. 미국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최신식 무기인 B-52 폭격기를 비롯한 최신식 항공기들을 동원하여 북베트남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통킹만 사건은 이에 대한 명분을 싫어줬다. 따라서 전쟁 초기 미국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 그리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1968년 구정 공세가 일어난 뒤 반전운동이 격화됐고, 1971년 미국의 양심적인 지식인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가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를 세상에 공개하면서 미국정부의 조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의 호치민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호치민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일각의 주장에 따르면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에 간첩을 침투시켰고, 북베트남의 꼭두각시라 할 수 있는 베트콩이 미국이 전면개입하기 전 까지 남베트남군과 교전했기 때문에 북베트남의 침략전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베트콩은 어디까지나 남베트남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된 조직이었고, 남파됐던 세력들도 대부분의 경우 어디까지나 남쪽 출신이었다. 북베트남은 베트콩을 지원했을 뿐이지 이를 노골적인 북베트남의 침략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미국이 북베트남을 침략한 적이 없다 하는데, 전쟁 시기 미국 또한 그린베레를 비롯한 특수부대를 북베트남에 침투시켰고, 대규모 폭격을 감행했다. 즉 나치독일의 영국 대공습을 침략전쟁이 아니라 할 수 없듯이, 북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대규모 폭격도 미국의 침략전쟁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미국 스스로 베트남 전쟁을 자신들의 침략전쟁으로 인정했고, 전쟁에 개입하기 위해 무리하게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였기에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침략전쟁이 맞다.

 

4. 미국의 패배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한 미국은 북폭과 동시에 지상군을 파병했다. 19653월 미국의 지상부대가 베트남의 다낭에 상륙했다. 다낭을 시작으로 미국의 지상군 파병은 계속됐다. 이와 동시에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과 호주 필리핀에서도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했다. 미국과 북베트남군의 첫 교전은 캄보디아 국경지대인 이아드랑에서 일어났다. 이아드랑 전투에서 미군은 막강한 화력과 헬기를 동원한 신속한 기동력으로 북베트남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아드랑 전투만 보더라도 미군과 북베트남군 전사자 비율이 1:6이었다. 미군은 북베트남군과의 교전에서 항상 적은 전사자 비율을 냈다.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미군은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했다. 1967년 베트남에서의 미군 전사자는 총 2만 명이 넘었지만, 일반인들은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1968년에 반전되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베트남의 대명절 구정을 틈타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구정 공세 시기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공격을 가했다. 베트남의 옛 수도 후에가 점령됐고,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은 전쟁터로 돌변했다. 구정 공세 초기 베트콩은 미국대사관 1층을 점령했고, 이는 미국인 기자들의 전파를 통해 미국 전역에 생중계됐다. 구정 공세는 사상자 비율로만 따졌을 때 미국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구정 공세 1달 기간 동안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3만 명 이상이 전사했던 데에 비해, 미군 전사자는 2천명 안팎이었고, 남베트남군과 나머지 연합국 군대의 전사자를 합쳐도 6천명 안팎이었다.

 

그러나 구정 공세로 인하여 우린 베트남 전에서 이기고 있습니다.”라고 선전을 했던 린든 존슨이 말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국 내에서는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 결과 그해 린든 존슨은 재선에 성공하지 못했고, 베트남 문제는 고스란히 대통령으로 당선된 리처드 닉슨에게로 넘어갔다. 리처드 닉슨은 1969년부터 단계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으나, 결고 쉽게 철수하지는 않았다. 그는 베트남화 정책이라고 하여 점진적으로 철수했지만, 1970년에는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1971년에는 라오스를 침공했다. 1972년에는 마지막 수단으로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대규모 폭격을 북베트남에 감행한 뒤 19731월 북베트남과 파리평화조약을 맺고 철수했다. 따라서 남베트남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계획은 실패했고, 미국은 베트남에서 완벽히 패배했다. 그리고 2년 뒤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남베트남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여 사이공을 함락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룩한다.

 

5. 결론: 역사는 반복된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최고의 인재들이라는 책에서 미국의 엘리트라 할 수 있는 그들이 엘리트인 것과는 상관없이, 자신들만의 오만에 빠져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는 과정을 낱낱이 보여준다. 미국 최고의 인재들은 2차세계대전 당시 자신들의 조국이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것과 과거 추축국이던 나치독일과 일본 제국을 자신들 조국이 채택한 이념을 선택하게 한 것에 자부심을 느꼈지만, 한계에 대해 생각지 않았다. 한국전쟁 시기 중공군 개입으로 인한 자신들의 실책에 대해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최고의 인재들은 베트남에 개입할 때 자국우월주의와 인종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베트남 전이라는 실수를 저질렀고, 오판했다. 거기에는 전쟁이라는 행위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무지함이 반영됐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였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사람은 실수를 한다. 그 실수를 통해서 또 다른 실수나 실책을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가장 큰 교훈이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최악의 오류를 저질렀음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고, 그 실수는 현재진행형이다. 대표적인 예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예로 들 수 있다. 미국의 네오콘들과 자칭 보수주의자들은 이라크 민주화와 대량살상무기 해체를 핑계로 이라크를 침공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이유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그 나라의 민주화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라크에 매장되어있는 어마무시한 양의 석유를 빼앗기 위함이었다. 거기다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은 1980년대 미국이 지원하던 세력이었다. 이라크 전쟁에 개입했던 미국은 결국 이라크에서 발을 뺐다.

 

20019.11테러 이후 미국이 개입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2019년인 현재도 진행 중이다. 현재 미국에 맞서 싸우고 있는 탈레반은 1980년대 미국이 지원했던 무자헤딘 세력들이다. 즉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이렇듯 미국은 베트남 전 이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여 제2 3의 베트남을 치렀고, 현재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제2의 베트남 전을 치르고 있다. 앞으로의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어떻게 나갈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건 현재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제2의 베트남 전쟁을 치르고 있고, 이는 일방적인 제국주의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이다. 더 나은 세상과 평화를 위해선 미국 정치인들이 인식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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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좌파가 아이언맨보고 스타벅스 커피 먹는 것은 잘못됐다?

최근 어떤 자유한국당 수구주의자가 올린 동영상을 봤다. 그 영상에선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왔다.

˝야 자본주의가 얼마나 좋아?˝
˝왜 이런 자본주의를 싫어하는거야?˝
˝반미 외치는 새끼들 그렇게 미국이 싫고 자본주의 싫으면 사회주의 북한 가서 살아!˝
˝미제가 어떻고 하는 ㅅㄲ들 스타벅스는 좋다고 커피 빨고 있지.˝
˝ㅅㅂ미국 싫다면 아이언맨은 왜 영화표까지 사가며 줄서서 보냐?
이런 등신같은 것들!!˝
˝미국 싫으면 중국판 짝퉁 손오공 나오는 거나 보라고˝

어쩌다가 보게된 영상이지만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우리가 미국을 비판하는 것은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정책과 정치적인 영역이다. 즉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문화를 구가하는 행위는 별개의 영역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자면 수구 꼴통들은 현중국을 극혐하니, 중국에서 만든 중국산 옷 팬티 티셔츠도 입지 말아야 하고 중국산 가구도 쓰지 말아야 하며 중국 음식 짜장면도 먹지 말고 갖다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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