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7
안재성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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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박헌영이라는 이름을 처음알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김두한을 비롯한 극우파 미화 논란이 심했던 드라마 야인시대를 정주행 하면서 부터였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박헌영이 첫등장 했던 것은 50화 이후 해방정국 파트였고 거기서 그려진 박헌영의 모습은 말 그대로 '김두한의 친구 정진영을 공산주의에 세뇌시켜 남조선을 공산화 시키려는 사악한 빨갱이'였다. 박헌영이라는 존재가 궁굼했던 나는 위키피디아를 비롯한 인터넷에서 그의 정보를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 대학 동기 형의 추천으로 드라마 서울1945를 보게 됐는데 거기서도 박헌영이 등장했었다. 드라마 서울 1945는 일제시대와 해방전후사 그리고 한국전쟁까지의 우리 현대사를 좀 더 균형적인 시각에서 다룬 수작이었기에 박헌영을 '김일성과 더불어 한국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비판을 했지만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 혁명가로써의 박헌영'도 나름 중립적인 시각에서 조명했었다.

서울 1945에서 신구할아버지가 연기한 여운형 선생에 매우 감명받았던 나는 2015년 부터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매우 존경하게 되었지만 일제시대때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이끌고 해방 이후 사회주의자들의 우상이기도 했던 박헌영에 대해 나름의 호기심을 갖기도 했었다.


 2015년 말에서 2016년 초 나는 청년독립군이라는 학생단체에서 한 5,6개월 정도 있었고 각종 시위에도 열심히 참가했었다. 청년독립군에서 활동하면서 청년독립군쪽 NL성향이 강한 분들과 항상 상반되는 견해를 가진 주제가 있었다. 하나는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었고 다른하나는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이 단행한 박헌영 숙청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관점은 "박헌영은 억울하게 숙청된 사회주의 혁명가"였다. 2016년 3월 초 일본 도쿄 여행을 떠나기전 박헌영 평전을 구매했고 5박6일간의 도쿄 자유여행을 마친뒤 돌아온 첫째날 부터 안재성 저자의 박현영 평전을 펼쳤고 주말 오전 편의점 알바를 했던 나는 편의점 알바중에도 이 책을 매우 재밌게 읽었다. 당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깨우쳤던 진실의 감격을 잊을 수 없었고 서평을 적어보고 싶었기에 오늘 이 책의 서평을 쓰게 됐다.


1. 박헌영 일대기


박헌영은 1900년 충남의 몰락한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학업성적이 좋은 박헌영은 대흥소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고보에 진학했고 YMCA에서 활동하기도 했었다. YMCA에서 영어를 알게된 박헌영은 10대 후반에 미국유학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박헌영도 3.1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퇴학될 위기에도 몰렸었지만 퇴학은 모면했고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유학 준비에 열을 가했다. 미국유학이 매우 어렵다는 현실을 직시한 박헌영은 미국유학의 꿈을 포기한뒤 1920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중국상하이 망명생활중 후에 동지가 될 김단야와 임원근을 만났고 1921년 독립운동을 하던 중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2년 여운형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에 참가했고 국내로 귀국하게된 박헌영은 1925년 주세죽과 결혼했고 경성의 유명한 중국집 아서원에서 조봉암을 비롯한 동지돌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1925년 제1차 공산당검거사건이 터졌을 당시 상해에 있던 여운형과 모스크바에 있던 조봉암에게 보내려고 했던 보고서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재판기간 도중 고문을 받기도 했다. 당시 재판 기간 도중 박헌영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똥까지 먹어가며 미친척을 제대로 했고 결국 1927년 11월 석방됐다. 


이듬해인 1928년 박헌영은 아내 주세죽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했고 모스크바로 가던 중 딸 박비비안나가 태어났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박헌영은 1929년 엘리트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국제 레닌학교에서 유학했고 이 시기에 박헌영은 자신의 호를 이정이라 지었다. 1931년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떠나 상해로 갔고 1932년 윤봉길의사의 4.29의거 이후 상해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된 뒤 국내로 압송됐다. 재판에서 6년형을 받았으나 5년만인 1939년 석방됐다. 1939년 석방된 박헌영은 이관술, 김삼룡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창설했다. 경성콤그룹을 창설한 박헌영은 비밀활동을 계속하며 소련쪽과 교신하면서 기관지를 발행하는등 여러 사회주의적 활동을 비밀리에 하였다. 1941년 경성콤그룹이 일제의 검거로 해체되었고 박헌영은 전라도 광주로 피신했고 태평양 전쟁시기 광주 벽돌공으로 위장하여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 까지 자신의 몸을 숨겼다.


1945년 서울로 올라온 박헌영은 처음에는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와 협력했지만 여운형과의 의견 갈등을 빚었고 결국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박헌영의 노선은 대체로 소련의 노선을 고수했고 폭력투쟁노선를 고수했다. 1945년 12월 박헌영과 조선 공산당은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국내에서 소련의 노선을 지지하는 바람에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세력으로 부터 민족반역자 취급받으며 공격받기도 했다. 1946년 3월 제1차 미소공동회의 당시 박헌영은 미소공동회의를 지지했지만 제1차 미소공동회의가 결렬되자 다시 노선을 폭력투쟁으로 전환했다. 1946년 여름 정판사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이 탄압받았지만 신전술이라는 강경한 대중투쟁 노선을 바꾸지는 않았다. 1946년 미군정 아래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박헌영은 이승만 세력과 마찬가지로 좌우합작을 방해했고 이는 결국 좌우합작운동이 실패로 끝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한편으론 박헌영을 따라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에 맞서 파업과 투쟁을 계속했고 그 상황에서 박헌영은 월북했지만 9월 총파업과 대구10,1사건과 같이 미군정에 맞선 대투쟁이 남한에서 일어났다. 


1946년 11월 박헌영은 남로당을 창설했지만 1946년부터 3.8선을 왔다갔다하다 북한에 정착했다.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된 뒤 남북은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쪽으로 흘러갔고 1948년 4월 박헌영의 남로당 세력이 제주4.3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1948년 8월에는대한민국이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됬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상은 김일성이 부수상은 박헌영이 선출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이후 김일성과 박헌영은 전쟁으로 인한 통일을 생각하게 됐지만 초반에 스탈린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9년 국공내전이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이 승리하고 1950년 미국의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이 제외되면서 스탈린은 남침을 허용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전쟁이 시작되는 동시에 남조선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희망없는 거짓말을 했다. 박헌영의 말을 믿은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기습 남침했다. 전쟁초기 T-34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거침없이 진격했다. 미군과 유엔군의 지상부대가 참전했지만 8월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다. 그러나 전쟁기간동안 남한내에서는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았고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은 밀렸고 10월 25일 중국군의 참전으로 1951년 초 38선 부분까지 유엔군을 몰아냄으로써 전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박헌영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국내의 빨치산 세력은 남한내에서 게릴라 투쟁을 전개하다가 결국 대부분이 소탕당했다.


박현영의 거짓말에 분노한 김일성은 1953년 그를 체포했고 박헌영을 미제 간첩으로 몰았다. 그의 측근이라 할수 있는 리승엽과 이강국은 미제 간첩혐의로 숙청됐고 북한내에 있던 남로당 세력들은 1955년 쯤에 사실상 씨가 말렸다. 남로당 세력이 사실상 전멸했음에도 소련과 중국의 압박으로 김일성은 박헌영을 쉽게 죽이지 못했지만 1956년 종파사건 이후 김일성이 연안파와 소련파를 대대적으로 숙청을 하면서 박헌영도 1956년 12월에 총살당한다.


2.박헌영은 미제 간첩일까?


박헌영은 남한에서는 빨갱이 북한에서는 미제스파이로 비판받는 인물이다. 남북모두에게 잊혀졌기에 남북 모두다 제대로된 연구를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지 못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북한의 박헌영 미제 스파이론과 심지어 그가 일제시대부터 일제와 미제에 빌붙어 간첩노릇을 해왔다는 이중첩자론은 입증할 근거가 희박하다. 저자 안재성씨는 수많은 자료를 토대로 하여 박헌영의 미제 간첩론을 반박했다. 북한이 제시한 자료중엔 "1941년 광주의 벽돌공으로 숨기전 미제간첩질을 하다 자기 혼자 살기위해 일제에게 동료들을 팔아먹은 뒤 도망쳤다."는 허무맹랑한 자료도 있을 정도다.이 글을 반박하자면 1941년은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여 미국하고 전쟁을 사작하게 되는 시기인데다가 박헌영이 미제간첩이기때문에 적국 일제에게 동료들을 팔아먹는다는 설정자체가 오류고 일제에게 팔아먹었는데 일제를 피해 광주의 벽돌공으로 위장한다는 설정 자체부터가 오류다. 이렇듯 북한에서 제시한 미제간첩론은 터무니 없는 주장들이 많다.


 북한말대로 박헌영이 미제간첩이라면 도데체 어떻게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에서 유학하고 1948년 북한의 부수상 자리에 오르고 북한에서 숙청되고 난뒤 왜 남한에서는 미제를 위해 간첩질을 한 박헌영이 어떻게 칭찬받지 않고 빨갱이라 욕을 먹는 것에 대해 도데체 어떻게 설명이 가능한걸까? 따라서 박헌영은 미제 간첩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보고 개인적으로 박헌영은 미제간첩이 아니라고 본다. 즉 북한의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고 오히려 미제 스파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쪽이 더 논리적으로 사실에 가깝다.


3. 글을 마치며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청년독립군 내에서 김일성의 박헌영 숙청에 대한 입장에서 갈등하면서 부터 정말 북한의 주장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이 박헌영을 비롯한 수많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숙청하면서 일인독재를 구축했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됐다. 책을 보다보면 당시 조선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사진과 이력을 정리한 페이지가 나오는데 거기 나온 인물중에 70%는 북한정권에서 숙청된 인물들이었다. 북한 정권이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내세웠던 논리는 바로 스파이 혐의 였지만 과연 그들 중에 정말 미제간첩이 있기는 한건지 의심이 된다.


 무엇보다 일제시대부터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자신의 똥까짐 먹어가며 투쟁한 박헌영을 미제스파이로 모는 북한의 주장에 대한 나의 입장은 저자 안재성씨와 같은 입장이다. 거기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정권에서 정적들을 숙청했던 방식이 1930년대 스탈린이 소련 공산당을 장악하고 나서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주체들을 하나 둘씩 숙청해나간 방식과 1940년 멕시코에서 죽은 트로츠키를 숙청한 스탈린의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2년전 박헌영 미제 간첩론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주사파들의 주장에 매우 반대했던 나는 그들이 혐오스럽기 까지 했었다. 물론 현재는 그들의 입장도 나름 존중하는 쪽이다. 그러나 아닌것은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고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이 했던 스탈린주의식 정적 숙청에 대한 그들의 옹호를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이 책을 2년전에 읽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당시의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저자 안재성 선생의 필력이 매우 좋았기에 재밌게 그리고 이해하기 쉽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해방 이후 여운형의 좌우합작 운동 시기 좌우합작을 방해했던 박헌영의 행적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거기에 대한 비판 또한 없었던것 같다. 그래도 북한의 터무니 없는 주장을 반박하는 박헌영 관련 서적으로선 매우 좋은 책일 것이다. 조선의 사회주의자이자 혁명가인 박헌영을 알고 싶은 이에게 적극 권하고 싶은 책이다. 앞으로 박헌영 선생의 독립운동 업적이라도 어느정도 재조명 받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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