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한참이던 1960년대 인도네시아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량 학살이 발생했다. 인도네시아 대학살(Indonesia Genocide)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1965년에 시작되었으며, 학살당한 숫자 규모에서 상상을 초월한다. 아무리 낮게 잡은 축소된 수치가 8만 명이고, 최대 300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7610월 당시 인도네시아 국가 보안기구 의장인 수도모 제독은 네덜란드의 한 TV 방송에서 학살 당시 최소 5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한다.”고 증언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사망자 수는 계속 늘어 하비비 전 대통령은 100만명이라고 했고, 학살을 지휘한 사르워 에디 위보워 장군은 300만명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보통의 경우 학살 추정치를 50~300만 명으로 추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인도네시아 대학살의 경우 가장 끔찍한 피해를 본 지역이 바로 휴양지로 유명한 발리(Bali)였다. 학살 당시 북부 수마트라와 동부 자바섬의 경우 학살의 규모가 너무나 커서 위생 문제가 제기될 정도였으며, 발리는 제주 4·3 때처럼 진압군에게 잡히는 사람들은 즉결 처형당했다. 총살이면 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학살당한 사람들의 경우 산 채로 사지가 절단됐고, 참수당했으며 피부를 벗기는 식의 고문까지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말 그대로 학살의 잔혹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 발리의 경우 섬의 인구가 200만 명이었는데, 이 중 10~20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와 같은 학살이 일어난 데에는 그 배후에 미국과 CIA가 존재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영웅으로 알려진 수카르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에 맞서 잠시 일본에 협력하는 실책을 저질렀지만, 이후 노선을 바꿔 반일투쟁을 전개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식민지 지배하려 하자 이에 맞서 4년간의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네덜란드군 6,000명이 전사했고, 인도네시아군은 45,000명이 전사했으며 민간인도 대략 수만 명이 사망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학살 대다수는 네덜란드군에 의해 자행됐다. 당시 수카르노는 서방의 지원을 받아 네덜란드에 맞섰는데,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봉기를 진압하여 수천 명을 죽였다.

 

이와 같은 수카르노의 반공노선은 초기 미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지만, 1950년대 제3세계 노선을 천명하면서 반미·친소 노선으로 돌아섰다. 미국의 CIA1955년에 수카르노 암살을 검토했었다. 이 시기 수카르노는 소련의 흐루쇼프와 중국의 마오쩌둥을 만나, 동유럽에서 무기를 구매하면서 인도네시아 공산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보다 광범위하게 했었다. 이것이 미국으로 하여금 반수카르노 감정을 가지게 만들었다. 1960년대 수카르노의 반미감정은 더욱 커졌으며, 1965817일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에 반제국주의 자카르타-프놈펜(시아누크)-하노이(호치민)-베이징(마오쩌둥)-평양(김일성) 을 선언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미국은 1950년대부터 반공성향의 군부 장성들을 규합했고, 그 중 하나인 수하르토를 내세워 쿠데타를 전개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친미 쿠데타에 성공한 미국은 수하르토 정권의 학살을 도왔으며, 그 결과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의 인도네시아인이 무차별 학살당했다. 학살은 1968년에서 1969년에 종결됐다. 미국의 닉슨 행정부와 카터 행정부 그리고 레이건 행정부는 이 수하르토 친미독재정권을 민주적인 정권이라며 칭송했다. 수하르토는 거대 다국적기업들을 수익률 높은 제안으로 유치했으며, 그와 동시에 자신의 가족을 위해 실질적인부를 축적했다. 물론 1960년대 인구의 절반 이상에서 1966년 약 12%로 빈곤을 감소시켰고, 수십 년간 꾸준히 연 7%의 경제성장도 보이긴 했다. 그와 동시에 수하르토는 집권 시기 포르투갈로부터 해방된 동티모르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을 유혈 진압했다. 1975년 수하르토는 군대를 보내어 동티모르에서 대략 10~20만 명을 학살했다. 동티모르에서의 학살은 1970년대 후반까지 가장 극심하게 전개되었는데, 미국의 카터 정부는 끊임없이 수하르토 정권에게 원조를 제공했다. 그리고 수하르토 정권의 동티모르 학살을 저지하려는 유엔의 시도도 봉쇄했다.

 

1982년에서 1984년까지 레이건 행정부 아래서 수하르토 정권에 판매한 무기는 10억 달러 선을 넘었으며, 이 동티모르 학살은 1990년대 초까지 지속됐다. 19911112일 최소 273명의 동티모르인이 딜리에서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앞서 언급한 수하르토의 가족 제국은 실로 거대했다. 1998년 기준으로 수하르토의 재산은 미화 160억 달러로 추정됐으며, 이는 세계에서 6번째로 부유한 사람임을 의미했다. 일각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300~400억 달러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수하르토의 가족사업은 호텔에서 인공위성까지 뻗어갔고, 루슨트 테크놀로지, 제너럴 일렉트릭, 하얏트 호텔, 휴스 등과 맺은 협력 관계를 이들은 자랑스럽게 주장했다.

 

수하르토의 통치 30년 동안 세계은행은 그를 적극 지지했고, 300만 달러 이상의 차관을 제공했다. 수십 년 동안 자체 보고를 포함한 수많은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은행은 부패를 용인하고, 그릇된 정부 통계에 그릇된 중요성을 부여했으며, 그것을 다른 나라의 모델로 제시하여 독재를 정당화하고, 인권 실태와 경제의 독점적 통제에 만족했다.” 1997년 대한민국 경제에 큰 악영향을 준 IMF는 인도네시아에게도 큰 악영향을 줬다. IMF로 하룻밤 사이에 인도네시아는 급속한 경제 악화를 겪었으며, 수백만 명이 가혹한 생존 조건에 몰렸다. 화폐가치가 폭락했고, 전염병이 자카르타로 퍼졌으며 국제 투기꾼들은 인도네시아 주식을 팔아버림으로써 시장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졌다. IMF 위기가 가속화 됨에 따라 물가가 상승했고, 이는 식량폭동으로까지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1998년 인도네시아 내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불러왔다. 그해 3월 수십 개 캠퍼스에서 수하르토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힘을 얻었고, 학교에서의 시위가 격화됐다. 4월에는 2,000여명의 여학생들이 주도한 행진에 스미랑이라는 작은 도시에 살던 주부들이 합류했으며, 5130개가 넘는 자카르타 노동자단체의 대표들이 데폭의 인도네시아 국립대학 캠퍼스에 와서 4시간 동안 학생 활동가들과 만났다. 12일에는 1만 명의 학생이 평화적으로 행진하면서 노래를 불렀고, 엘리트 대학인 트리삭티 캠퍼스에서 주요 고속도로로 진출했다. 투입된 경찰이 최루탄으로 진압을 했고, 경찰 저격수의 사격으로 학생 4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인도네시아 전역의 충격으로 그리고 분노로 이어졌으며, 513일에서 15일까지 파괴적인 유혈시위가 솔로, 우중판당, 족자카르타, 괄렘방으로 확산됐다. 이러한 시위가 유혈폭동으로 변해 수많은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 죽고, 강간당하는 일이 벌어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와 같은 사태 속에서 반수하르토 시위가 격화되어 결과적으로 1998521일 수하르토가 인도네시아 대통령직에서 사퇴하게 됐다. 이로써 30년 이상 지속되던 수하르토 시대는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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