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전트빌
씨넥서스 / 2001년 11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 이 영화 리뷰는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난 학기 수업시간에 정말 재밌게 보았던 영화가 있다. 그 영화는 게리 로스 감독이 제작한 영화 플레전트 빌(pleasantville)이다. 학교 수업시간에 정말 재밌게 본 영화롸 어제 다시 텔레비젼에서 찾아서 감상했다. 영화 플레전트 빌은 흑백과 컬러 화면을 통해 1950년대 미국 사회를 고찰해본 영화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데이빗과 제니퍼는 이혼한 어머니와 함께 사는 남매인데, 데이빗은 미국에서 인기가 높은 티비 프로그램인 ‘플레전트 빌’의 펜이고, 데이빗의 여동생 제니퍼는 학교서 담배나 피며 불량한 남학생이나 꼬시는 방탕한 생활에 찌들어 있는 인물이다. 그러던 어느날 제니퍼와 데이빗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티비 채널을 보기 위해 리모컨을 가지고 싸우게 되는데, 어떤 티비 수리공 할아버지가 준 리모컨을 가지고 티격태격하다가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플레전트 빌 프로그램으로 들어가게 된다.

(플레전트 빌 영화 표지)


데이빗과 제니퍼는 소위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플레전트 빌 속에서 배우로 출연하게 되는데, 그들이 보게 된 플레전트 빌은 희망과 행복 그리고 풍요와 번영이 넘치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그 세계의 문제점은 모든 것이 다 흑백이었고, 사람들은 플레전트 빌 밖의 세상을 모르고 있으며, 그 세계 도서관에 있는 책들과 교과서는 백지상태다. 또한, 성적으로도 굉장히 보수적인 사회여서 섹스라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1950년대 미국 사회인 플레전트 빌로 가게 된 데이빗과 제니퍼 남매)


(풍요로운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데이빗과 제니퍼의 엄마)


그러나 플레전트 빌 세상도 데이빗과 제니퍼가 살게되면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 변화의 시작은 여동생 제니퍼가 프로그램 상에서 자기를 좋아하는 어느 남자친구와 소위 ‘연인의 호수’에 가서 즐거운 성관계를 맺으면서 시작된다. 애초에 섹스라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던 제니퍼의 남친은 자신의 몸에 변화가 생긴 것에 충격받았고 그런 변화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제니퍼의 남친은 깨닫게 되는데, 흑백이었던 세상에 존재하던 장미꽃 하나가 흑백에서 붉은색을 띄게 된다.

(제니퍼의 남자친구, 그는 제니퍼와의 성관계를 통해 변화를 깨닫게 된다.)


(제니퍼의 설명에 따라 목욕탕에서 자위하는 엄마)


제니퍼와 그의 남친이 성관계를 맺은 이후 연인의 호수는 단순히 손을 잡고 애틋함을 느끼는 장소을 넘어서 남녀가 진정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몸으로 교감하는 장소로 변모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변화는 플레전트 빌 전역에 퍼지게 된다. 플레전트 빌 세상에선 남녀가 침대를 공유하지 않는데, 남녀가 같이 잠자리를 공유하는 침대가 상점에 나타나고, 사랑을 나눈 사람들 중 일부는 색깔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뀐다. 항상 맑은 날씨만 유지하던 플레전트 빌에는 난생처음으로 비가 내리는 일이 생겼고, 도서관에 있던 책들은 백지상태에서 사람의 의지에 따라 글씨가 나타나게 되며, 고양이만 구출하던 소방관들은 난생처음 화재진압이라는 것을 하게 되며 변하게 된다. 또한 남편에게 호화로운 밥상을 차려주던 여성들 중 일부는 자아를 찾게 되어 남편의 말을 듣지 않고 이를 거부한다. 데이빗의 아버지는 아내에게 흑백으로 돌아오라고 부탁을 하지만, 내면의 자아를 깨달은 데이빗의 어머니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변화한 연인의 호수, 이 처럼 플레전트 빌은 컬러화 되간다)


(난생 처음 비를 맞아본 플레전트 빌 연인들)


이러한 변화를 겪게 되는 사람들은 흑백에서 컬러로 변하게 되는데,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않고 흑백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컬러쪽 사람들에게 불리한 법안을 마련하고, 소위 전통을 지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컬러쪽 사람들의 가치관 및 표현을 제한하고자 한다. 예를 들면 컬러쪽 사람들이 듣는 흥겹고 도전적인 노래들을 금지한다든지, 글씨가 들어가 있는 책들은 금서로 지정한다든지 뭐 그런 것들이다. 흑백쪽 사람들은 컬러쪽 사람들의 예술작품이나 존재 자체를 멸시하거나, 위협하는 모습을 보인다. 데이빗이 일하는 식당의 주인은 데이빗의 엄마랑 사랑에 빠지게 되어 성관계를 맺고, 그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누드화를 그렸는데, 그 누드화 그림은 흑백쪽 사람들에 의해 박살이 나버리고, 식당도 난장판이 돼버린다.

(컬러화 된 데이빗의 여자친구, 사랑을 통해 컬러화 되었다.)


플레전트 빌에서 살게 된 데이빗은 티비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플레전트 빌을 “부랑자도 없고 풍요와 번영 행복이 넘치는 세상”이라고 하며 극찬하며 그 세상을 동경했지만, 플레전트 빌 세상의 문제점을 느끼게 되는 과정에서 프로그램상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야할 한 소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소녀와의 사랑을 통해 데이빗 또한 컬러화 되가는 플레전트 빌에 적응하게 되고, 그러한 인간 내면의 변화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본인 또한 컬러화 된다. 그리고 그는 컬러화 된 여친이 흑백화 된 불량배들에게 유색인종이라 놀림을 받는 것까지 목격한다.

(컬러화 되버린 엄마, 그는 결국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흑백이었던 플레전트 빌이 컬러로 도색이 되며 흑백 세상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 그러면서 영화 또한 막을 내린다. 영화 플레전트 빌이 보여주는 1950년대 미국은 소위 보수주의자들에게 있어선 이상적인 사회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재건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었던 미국은 소련과의 경쟁 속에서 1920년대를 능가하는 풍요와 호황을 누렸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호황을 누렸던 1950년대 미국 사회에는 소위 중산층들이 늘어났고, 그런 중산층들은 넓은 마당을 가진 주택에서 살며 자동차를 최소 2~3대 이상이나 보유할 수 있었다. 텔레비전의 보급도 늘어 1957년에는 대략 4000만 대의 텔레비전이 미국인들에게 보급되었다. 소비재 생산도 굉장히 많이 늘어 미국의 중산층 가정들은 대형마트에서 쇼핑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풍요는 당연히 미국의 중산층들에게만 해당한 얘기였다. 미국 사회에서 하층계급이었던 흑인이나 유색인종 노동자들은 빈곤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멸시나 차별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소련과 체제 경쟁을 했던 미국 사회는 사상적으로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 시기에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소위 ‘빨갱이(Commie)’로 낙인찍혀 사회적 활동이 제한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시기 미국의 정치인들은 소위 전통이나 보수적인 가치를 내세우며 국가에 대한 충성과 자본주의의 우월함을 국민에게 강요하고 세뇌했다. 즉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던 게 바로 1950년대 미국 사회라 할 수 있다.


영화 플레전트 빌은 1950년대 미국 사회가 가지고 있던 소위 전통주의와 보수주의의 문제점을 사랑 및 내면의 깨달음이라는 것을 통해 색채화 함으로써 아주 천재적으로 묘사했다. 쉽게 말해 영화 플레전트 빌은 흑백화면을 통해 그런 문제들을 아주 정확히 지적한 것이다. 영화 상에서 등장하는 남녀간의 섹스에 대한 인식은 미국의 전통주의 내지는 보수주의적 성향을 반영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글씨가 담긴 책들을 금지하고, 전통적인 가치관에 반대되는 책들을 불에 태우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당시 미국에 만연해있던 보수주의자들의 편협한 시각과 반공주의적 관점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서 흑백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컬러화된 사람들을 유색인종 내지는 ‘컬러(Colored)’라고 표현하는 것은 1950년대의 인종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플레전트 빌에 사는 사람들 중에 흑인이나 히스패닉 그리고 동양인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영화 플레전트 빌은 컬러화 과정을 통해 1950년대 미국사회가 가지고 있던 성적 보수주의, 전통주의, 반공주의 그리고 인종차별을 아주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데이빗과 제니퍼, 그들은 완벽히 컬러화 된 플레전트 빌을 보게 된다.)


영화를 다시 한번 감상하며 흑백에서 컬러로 색깔을 바꾸는 장면들에서 영화감독의 천재성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이런 명작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플레전트 빌은 찾아보기 힘든 명작이다. 영화 플레전트 빌을 보다보면 자본주의적 물질적 풍요로움이 과연 절대적 진리인가를 깊게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 플레전트 빌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물질적 풍요와 소비의 즐거움 그리고 전통이라는 것 보다 인간적인 내면적 성찰의 깨달음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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