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한국전쟁의 진실(Truth of Forgotten Korean War)

(한국전쟁 전개 과정)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가 형성되면서 세계는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나뉘었다. 그러한 미소 대립 속에서 전 세계적인 대립이 일어났고, 그것은 내전으로 번지기까지 했는데, 1945년 일제가 패망한 이후 독립을 하게 된 한반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고, 그러한 갈등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바로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Korean War)이다. 냉전 초기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은 미국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전쟁이었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미국 또한 대략 3년간 한국전쟁에 참전했었기 때문이다.

(워싱턴 DC에 있는 Korean War Memorial. 필자가 미국 여행기 직접가서 찍었다.)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한국전쟁은 사실상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다. 미국의 워싱턴 DC에 있는 3개의 전쟁 메모리얼이 이를 잘 입증한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있는 ‘제2차 세계대전 메모리얼(WW2 Memorial)’은 그 자체가 아주 거대하며, 관광하는 사람들이나 미국인들이 찾기 쉽게 워싱턴 DC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오벨리스크탑 근처에 있다. 링컨 기념탑 우측에 있는 ‘베트남 전쟁 메모리얼(Vietnam War Memorial)’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전쟁 답게 분위기가 어둡고, 5만 8천 명의 미군 전사자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에 반해 링컨 기념탑 좌측에 있는 ‘한국전쟁 메모리얼(Korean War Memorial)’은 있는 거라곤 M-1 개런드 소총을 들고 있는 사람 크기의 미군 병사 동상들밖에 없다. 워싱턴 DC에 있는 메모리얼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전쟁은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잊혀진 전쟁이다.

(2017년 자유한국당의 한국전쟁 관련 페이스북 게시물. 사실 이것은 한국전쟁을 해석하는 관점에서 옳은 관점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한국전쟁을 다루는 미국인들의 시각은 대체로 반공주의적 시각에 기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이 한국전쟁을 치를 당시 미국 내에서는 한국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운동이 사실상 일어나지 않았었을 정도였고, 미국 사회도 매카시즘이라는 극단적 반공 이데올로기에 심취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 학계나 그나마 역사를 아는 대다수의 미국인이 내리는 한국전쟁은 “미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한 전쟁”일 것이다. 그들이 생각을 더 정리해서 말하자면, “한국전쟁은 1950년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과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시작했고 미국은 한국이라는 민주주의 국가를 지키기 위해 싸웠으며 1953년에 휴전으로 끝난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1990년대 미국의 반공주의 성향의 학자 애덤 울람은 한국전쟁을 ‘스탈린의 전쟁(Stalin’s War)’라고도 불렀다.

(전쟁 기념관에 있는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


쉽게 말해 미국에게 있어서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면서, 자유주의국가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공산주의를 막아낸 전쟁인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반공주의적 시각은 현재 대한민국의 보수 세력(사실은 극우에 가깝다.)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이 참전했던 한국전쟁은 과연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소위 대한민국 보수 세력들이 공유하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이 과연 역사적으로 정당한 평가일까? 그러기 위해선 먼저 한국전쟁이 어떻게 해서 전개되었고 끝났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김일성, 그는 한국전쟁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항복 선언 이후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한반도는 해방이 되었다. 해방된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군이 들어왔고, 이남에는 미군이 들어왔다. 이들이 들어오자 한반도의 신탁통치 관련한 논쟁이 불거졌고, 소련과의 합의를 보지 못했던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에 넘기면서 1948년 이남 지역에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단독정부를 수립했고, 한반도 이북 또한 김일성을 중심으로 단독정부를 세웠다. 그리하여 1945년 8월 15일 한반도 이남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그해 9월 9일 한반도 이북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승만, 일각에서는 그를 건국의 아버지라 하지만 그는 해방 후 무자비한 학살을 전개했던 인물이다.)


1948년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38선 근처에선 남한과 북한 간의 교전이 일어났다. 즉 이 시점부터 한반도는 전쟁의 위협에 놓였다. 단독정부 수립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지도부는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초반의 경우 스탈린이 남침을 허용치 않았으나, 1949년 10월 중국의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고, 미국의 트루먼 정부가 소위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여 미국의 반공 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하자 스탈린 또한 1950년에 남침을 허용했다. 그리하여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은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1950년 수도 서울에 입성한 북한군의 T-34 전차)


1950년 6월 25일 38선 전역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한 북한군은 잘 훈련된 군대였다.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250대의 T-34 탱크를 비롯하여 소련제 ‘야크 전투기’와 대포 박격포로 무장했던 북한군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남한의 군대를 순식간에 괴멸시키기 공격 시작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도망치기 바빴다. 한국전쟁이 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일어나자 미국은 즉각적으로 군사개입을 했다. 그러나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은 오키나와에서 한반도로 즉각 투입된 미군을 격파하며 거침없는 진격을 했고, 그렇게 해서 1950년 8월 남한 땅의 90%를 접수했다. 그 이후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 수많은 군대를 투입하여 전쟁을 끝내려 했지만, 미군과 UN군은 대한민국의 임시수도 부산항을 통해 지원병력을 보충해 나갔고, 더는 진격할 수 없었다. 지속적으로 증원된 병력을 받은 한국군과 미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교전해나갔고, 미 공군은 한반도 전역에 인민군 시설을 대상으로 폭격을 감행했다.

(낙동강 전선의 병사들)


 

(인천상륙작전 당시 더글라스 맥아더)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주도한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한국군과 미군 UN군에게 유리하게 역전되었고, 북한의 조선인민군은 9월 28일 서울을 내줘야 했다. 10월 1일 한국군 단독으로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해나갔고, 미군과 UN군 또한 진군해나갔다. 10월 19일에는 북한의 수도 평양이 한국군에게 떨어졌고, 10월 26일에는 압록강에 인접한 초산군에 이르렀으며 11월 23일에는 함경남도 혜산시, 11월 26일에는 함경북도 청진시까지 도달한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측 포스터, 중국은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가치를 내세우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장진호 전투 당시 중공군.)

 

그러나 1950년 10월 25일 한국군과 미군 그리고 UN군이 진격한 것에 분노한 중국 측은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이라는 가치 아래 참전을 단행했다. 대략 30~50만 이상의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다시 유엔군 측에게 불리해졌고,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북한군과 중공군 측에게 넘어갔다. 수원과 용인에서도 후퇴해야 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밀리자 더글라스 맥아더는 핵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지만, 대통령 트루먼이 그를 해임했다. 그 이후 한국군과 미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38선 부근까지 전쟁을 다시 원점으로 돌렸다. 1951년 여름부터는 휴전 협상이 진행되었고, 대략 2년간 38선 부근에서 양측의 교전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휴전 협상이 길었던 것은 양측의 포로 문제에서 합의를 쉽게 보지 못했던 것에 있었다. 아무튼,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 회담이 성사되면서 끝이 났다.

(1953년 7월 27일에 조인된 휴전 협정)

 

여기까지가 대략 보수세력들이 생각하는 한국전쟁의 전개와 범위일 것이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 회담이 성사되기까지 대략 3년간 전개되었고, 적잖은 인명 피해를 초래했다. 수백만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남북 이산가족을 만들어냈으며, 남북한 할 거 없이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전쟁 또한 휴전으로 끝나면서 남북한 모두 전쟁 이전의 원점으로 돌아갔다. 한국전쟁 이후 남과 북 모두 양측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생겼고,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 방향으로 갔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은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군 병력의 숫자를 증가했고, 이는 지금까지 미국의 최신식 전쟁 기계를 한반도에 설치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 남측과 북측 할 거 없이 양측은 자신들이 사실상 한국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그러한 주장을 북측만 하는줄 알지만, 사실 남측과 미국측도 많이 하고 있다. 미국의 오마바 대통령이 “한국전쟁은 사실상 대한민국이 이긴 전쟁”이라고 규정한 것만 보더라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버락 오바마의 결론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미국 또한 한국전쟁을 마치 “우방국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낸 전쟁”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결론은 반공주의적인 요소가 결합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한국전쟁의 시발점을 단순히 북한의 기습 남침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촉한 여운형 선생. 그는 해방 후 가장 인기가 많은 지도자였다. 후에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다 극우세력의 테러로 희생되었다.)

 

한국전쟁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남측과 북측의 정치인들의 행적, 분단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됐고 그것이 어떻게 해서 전쟁으로 이어졌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사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한반도 전역에서 독립운동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자주적인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그러한 노력들은 이북에 주둔했던 소련보다 미국이 행한 크나큰 압력으로 좌절되었는데, 그것은 미군정이 건준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점령군 행세를 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미국은 한반도에서 친일파들을 앞세워 그들에게 권력을 행사할 기회를 주었고, 1945년 10월에 귀국한 이승만은 그러한 친일 세력들과 정치적으로 결탁하여 반공주의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이승만과 친일세력들의 그러한 분단공작 행위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3상회의가 있은 후 성공적으로 먹혀들어갔다. 그들은 마치 “소련이 찬탁 미국이 반탁”을 주장했다며 사실을 왜곡하여 좌익 세력들을 공격하며 민족반역세력으로 몰아갔다. 사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소련은 5년이내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고, 미국은 신탁통치 10년을 주장했다. 쉽게 말해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소련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게 분단을 막는 길이었다. 소련의 주장은 통일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미국과 합의하여 한반도에 만든다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반소시위를 하고 있는 서북청년회, 이들은 주로 북한에서 월남한 인사들로 구성된 폭력 집단이었다. 이들은 노동자 시위를 광적으로 진압했고, 제주도에서 광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1946년 신탁통치 논쟁에 휩싸인 이남에서 그러한 분열과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여운형과 김규식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지만, 지도자 여운형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극우세력들의 테러에 휩싸였고, 미군정과 이승만의 방조 아래 암살당했다. 그와는 별개로 박헌영과 사회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한 좌익 세력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하여 여러 정치 및 경제 투쟁을 전개해 나갔지만, 미군정과 친일파들의 방해공작으로 아주 잔인하게 진압당했다. 특히나 1946년에 월남인사들로 구성된 극우조직 서북청년단은 좌익을 죽인다는 명분을 들어 광적인 폭력과 살인을 민간인을 대상으로 저질렀다.

(제주 4.3 항쟁 당시 우익들에 의해 학살된 제주도민들)

 

(여순항쟁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

대구 10.1 항쟁을 시작으로 수많은 노동자, 농민 투쟁이 미군정과 친일 세력들에 의해 진압당했다. 이는 미군정의 무방비한 자본주의 정책으로 초래된 문제였다. 1948년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방향으로 나가자 제주도와 여수 순천에서 그에 맞서 민중항쟁이 일어났지만, 미군정과 이승만에 의해 그 항쟁은 대학살로 끝이 났다. 대략 3만 명 이상의 제주도민이 서북청년단과 우익들에 의해 학살당했고, 여수와 순천에서는 1만 명 이상이 우익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보도연맹 학살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들)

(보도연맹 학살당시 민간인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총살시키는 한국군)

당시 미국이 지원했던 이승만 정부는 한국전쟁 시기 광적인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국전쟁 초기 남한 전역에서 자행되었던 ‘보도연맹 학살(Bodo League Massacre)’이다. 이는 한국전쟁 초기 수개월 동안 진행되었던 학살로써, 최소 3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었다. 이 보도연맹 학살의 사망자는 많게는 100만까지 잡기도 한다. 그 학살은 주도한 것은 당연히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이었다. 그 외에도 이승만의 군대와 우익 조직들이 한 학살은 무수히 많다. 대표적으로 북한에서도 있었는데, ‘신천 양민 학살 사건(Sinchon Massacre)’이 그러했다. 대략 3만 5천 명이 학살당했고, 이는 그 지역 전체 주민의 1/4이었다. 이 학살은 우익 청년단체들이 저지른 학살이었다. 또한, 다른 학살들도 많았는데, 남한에서 저질러진 또 다른 학살을 뽑자면 1951년 2월 경남 거창에서 ‘거창 양민 학살 사건(Geochang massacre)’을 들 수 있다. 대략 7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들)

물론 전쟁 초기 북한군 또한 학살이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으로 대전을 비롯한 몇몇 곳에서 학살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2000년대 진실화해조사위원회에서 양측의 학살을 철저히 조사해본 결과 북한군과 좌익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은 한국군과 우익 청년단들이 저지른 학살에 1/6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분이 우익 집안의 가족들이나 우익 출신의 군인과 경찰 청년단을 대상으로 일어났으며, 남녀노소 노인 아이 유아 가릴거 없이 학살했던 우익과 한국군 하고는 분명한 차이가 났다. 쉽게 말해 좌익과 북한군 측에선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중공군의 경우 ‘삼대기율 팔항주의(三大纪律八项注意, Three Rules of Discipline and Eight Points for Attention)’ 원칙을 잘 따랐는지, 민간인 학살 기록이 거의 없는 수준이다.

(노근리 학살 현장, 여기서 3일간 대략 3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미군에게 학살당했다.)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 선생이 쓴 '해방 후 양민학살사')

아무튼, 대한민국 군인과 우익 청년단의 광적인 학살은 당연히 미군의 방조와 도움 아래 일어났다. 미군 방첩대의 경우 한국의 경찰 및 청년단체와 협력하여 민간인 사이에서 좌익 색출에 나섰다는 점에서 우익 세력들의 민간인 학살을 도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미군 또한 전쟁 초기 민간인 학살을 조직적으로 벌였는데, 1950년 7월에 있었던 ‘노근리 학살 사건(No Gun Ri massacre)’이 바로 그것이다. 노근리 학살 당시 미군은 그 지역에 살던 몇 백 명의 민간인들을 피난시키는 척하면서 폭격을 퍼부었고, 도망친 민간인들이 다리 밑으로 숨자 기관총과 소총을 발사하여 3일에 걸쳐 학살했다. 미군 제7 기병연대가 저지른 이 학살로 대략 3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퍼붇고 있는 미군 B-29 폭격기)

(폐허가 된 평양)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저지른 학살 중 가장 심각한 민간인 학살은 바로 공중 폭격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당시 미국은 즉각적으로 한반도에 군사 개입을 했고, 7월쯤에는 제공권을 장악했다.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한반도 전역에 폭격을 감행했고,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대략 2년간 휴전협정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북한 지역을 대상으로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1952년 7월 11일 평양을 목표로 한 ‘전면적인 공격’에서 주간에 1254회의 공습 출격이 있었고 야간에는 B-29 폭격기의 54회의 출격이 있었다. 미국 공군의 평가에 따르면 최종적인 도시 파괴의 규모는 독일과 일본에 비해 훨씬 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이 1942~1945년 동안 65만 7000톤의 폭탄을 독일 본토에 투하했고, 미군이 독일 본토에 투하한 것 까지 합치면 120만 톤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한국전쟁에서 총 63만 5000톤의 폭탄을 투하했고, 추가적으로 3만 2557톤의 네이팜 폭탄도 투하했다.

(폐허가 된 원산)

 

미군이 북한을 대상으로 했던 폭격은 상당히 효율적인 파괴와 살상을 불러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60개 도시가 평균 43% 수준으로 파괴되었다면,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도시와 마을의 파괴 정도는 40~90%까지 추산된다. 북한의 22개 주요 도시 중에서 18개의 도시는 초소한 50%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을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는 책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미공군은 똑같이 어리석고 무의미한 파괴 행위를 베트남에서 되풀이했다. 집중 폭격은 어떤 전쟁에서도 결정적인 효과를 내지 못했다. 그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국제연합의 대량학살협약은 대량학살이라는 용어를 “국민적, 민족적, 종족적, 종교적 집단의 전부나 일부를 말살하려는 의도”로 저지른 행위로 규정했다. 여기에는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집단의 물리적 파괴를 꾀하고자 그 삶의 조건에 고의로 해를 가하는 것”이 포함된다. 협약은 1948년에 채택되었으며 1951년에 발효되었다. 미국 공군이 바로 그 정의에 의거하여 국제연합 사령부의 지원을 받아 북한 주민을 대량으로 학살하던 때였다. 어떤 이들은 적의 도시를 표적으로 지역폭격을 가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불법이 아니었고, 1948년 8월 스톡홀름에서 체결된 적십자사의 전시 민간인 보호에 관한 협약 이후에야 불법이 되었다고 언급한다. 두 조약은 이 공중전에 아주 작은 영향력도 미치지 못했다. 그 공중전은 어리석고 무자비하게 자율적으로 수행되었다.”


책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 사령관이던 커티스 르메이는 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남한과 북한 양쪽에서 도시란 도시는 거의 다 불태워버렸어요. 100만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죽였고 700만명 이상을 고향에서 내몰아서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비극이 일어나게 된 거죠.”

(폐허가 된 서울, 서울 또한 전쟁 초기 미군의 폭격을 받았다.)

한국전쟁 당시 융단 폭격을 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가 말한 것처럼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는 수백만에 달했다. 이는 당연히 남한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를 야기 시켰다. 이런 폭격은 여순 항쟁과 인천상륙작전기 지리산에 고립되어 게릴라 투쟁을 하던 빨치산들을 대상으로도 자행되었다. 이현상 사령관 휘하의 빨치산들은 추위와 고립 속에서 미군의 폭격도 견뎌내야 했고,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미군은 빨치산을 대상으로 네이팜 폭탄을 사용하기도 했다. 심지어 미군은 재귀열을 퍼뜨리는 세균전까지 했다. 안재성 작가가 쓴 ‘이현상 평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북한 지역에 투하된 미국의 네이팜 폭탄)

 

“재귀열은 남부군뿐 아니라 한반도 곳곳에서 막대한 인명을 앗아가고 있었다. 미국산 세균은 북한 지역에도 대대적으로 살포되어 중공군은 물론, 지료약을 구할 수 없는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어갔다.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전남지역에서도 많은 민간인이 죽었다 한반도를 신무기 시험장으로 삼은 미국은 소형 핵탄두나 다름없는 네이팜탄과 세균무기를 마음껏 사용하고 있었다.”

(2016년에 개봉한 반공영화 인천상륙작전, 이 영화는 박근혜 정부에 의해 홍보되었다.)

 

(2019년에 개봉한 반공영화 장사리, 이 영화는 극우세력들의 많은 인기를 끌었지만, 관객수가 참으로 저조했다.)

이렇듯 한국전쟁 시기 미국이 저지른 잔악 행위와 범죄행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미제국주의는 한반도에서 아주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그러한 전쟁 범죄와 추악한 민낯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이 한국전쟁을 우익 내지는 반공적 시각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 또한 이러한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으로써, 그러한 전쟁범죄 또한 같이 잊혀졌기 때문이다. 한국사회 또한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 또한 한국전쟁을 얘기할 때, 일방적으로 반공주의적인 시각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니 더글라스 맥아더를 찬양하는 반공영화 ‘인천상륙작전’이나 트랜스 포머에서 섹시 여배우로 유명한 메간 폭스가 나오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과 같은 수준낮은 영화들이 개봉한 것이다. 미국 사회 뿐만 아니라 우리들 또한 한국전쟁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한국전쟁 연구자 브루스 커밍스가 연평도 포격 이후 집필한 서적이다. 2017년 국내에도 번역되어 출판됐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끝이 났다. 휴전회담에서 당연히 대한민국은 제외되었다. 대통령 이승만이 ‘북진통일’만 주구장창 외쳤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3만 6천 명 이상이나 되는 병사를 잃었다. 그래도 미국은 한국전쟁을 휴전으로 이끌면서, 이승만 정권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패권을 한반도에서 절반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아시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것이 바로 베트남 전쟁(The Vietnam War)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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