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 탕!”
두 발의 권총소리는 초저녁 궁정동의 적막을 깼다. 간발의 차이를 두고 십수 발의 총성이 콩 볶듯이 뒤를 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2분, 박정희 대통령은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의 총탄에 맥없이 쓰러졌다. 박정희의 절대통치 18년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형님, 각하를 좀 똑바로 모십시오”
“각하, 이 따위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정치가 올바로 되겠습니까.”
“차지철이 이놈”
“탕!”
김계원 비서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에게 마지막 ‘건의’를 올린 김재규는 곧바로 차지철을 향해 권총을 뽑아들었다. 순간 연회석은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차지철은 권총을 낚아 채려고 오른팔을 내밀었고 동시에 김재규는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은 차지철의 오른손 팔목을 꿰뚫었다.
“김 부장, 왜 이래, 왜 이래.”
“이거 무슨 짓들이야!”
“탕!”
차지철과 박 대통령의 고함소리는 곧이어 처진 또 한 발의 총성에 묻혀버렸다. 김재규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쏜 총탄은 박 대통령의 오른쪽 가슴 윗부분을 뚫고 들어가 등 아래 쪽 중앙부위를 관통했다.
이렇게 해서 18년 5개월 10일 동안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군림해 온 박정희는 자신의 심복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으로 사망했고, 동시에 1인독재의 막이 내렸다.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자신의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부정행위를 일삼았다. ‘동백림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인혁당 사건’같은 무시무시한 일도 일어났고, 그의 정권에 반대하여 부마항쟁과 같은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역사에선 만약이라는 가정은 없지만, 그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술파티를 하던 박정희는 부마항쟁을 걱정하며 얘기하는 김재규의 발언을 질책하며, “앞으로 서울에서 4.19 같은 데모가 일어난다면 대통령인 내가 발포 명령을 하겠다”고 호언했다. 그러자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정도 죽어도 까닥 없었는데 데모대원 100만~200만 정도 죽어도 걱정 없다”는 말을 하며 박정희를 부추겼다. 당시 박정희와 차지철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만약 박정희가 안죽고 살아있었다면 경상남도의 부산과 마산은 제2의 광주 학살이 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랬기에 김재규가 그를 권총으로 쏴죽인 것이다.
유신독재자 박정희가 죽은지 40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의 잔재는 대한민국 사회에 여전히 남아있다. 아직도 국내에서는 박정희를 찬양해대는 책들이 시중에 돌고 있고, 그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 종교적으로 숭배하는 사람들은 박정희 기념 도서관까지 만들어 샤머니즘적으로 숭배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친일 독재 세력의 결집력은 어버이 연합이나 엄마 부대와 같은 관제 데모에서 잘 드러난다. 이제는 박정희라는 신화적 인물을 걷어내야 한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에 맞서 ‘박정희 평전’을 집필했던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씨는 평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는데, 그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겠다.
“넘어야 하는 질곡은 천박하기 짝이 없는 한국자본주의 괴물이다. 박근혜의 몰락은 한 비리 정치인의 몰락에 그치지 않고 56년 망령처럼 우리 주위를 떠돌던 박정희 개발 독재 신화의 확실한 종언이 되어야 한다. 개발독재로 얼마간의 번영을 누렸지만, 그것이 뒤틀린 산업화의 결과일 수 없다는 반박논리는 접어둔다 해도 결과적으로 공짜는 없었다. 산업화의 과실은 왜곡된 분배구조를 통해 불평등심화를 초래하고, 중산층을 붕괴시켰다. 세계화에 특화된 재벌기업과 자본은 부를 무한 축적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지속적 임금삭감과 자산하락으로 고통받아왔다. 더욱이 승자들의 패자들에 대한 손실전가 행위는 날로 더 심해지고 있으며, 최대의 희생자 중 하나는 나라의 미래인 청년서대다. 불평등과 갑질천국의 헬조선을 만든 한강의 기적은 던져버리고, 이제 대한민국은 광화문의 기적 위에 우뚝 설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