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는 패망했다.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연설이 울림과 동시에 35년간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조선은 해방되었다. 해방 후 국내에서 발빠르게 움직였던 인물은 바로 몽양 여운형이었다. 태평양 전쟁 시기인 1944년 8월 국내에서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했던 여운형은 일제가 패망하기 몇일 전 조선 총독부의 엔도 총감과 회담을 가지었고, 일제 패망 후 행정권을 이양받았다. 행정권을 이양받은 여운형은 자신의 조직인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촉시켜 치안유지와 건국사업을 전국적으로 해나갔다. 그에따라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는 8월 말까지 145개의 지부가 설립됐다.

일제가 패망하기 전 연합국의 루스벨트와 처칠 그리고 스탈린은 1943년 테헤란과 1945년 얄타와 포츠담에서 한반도를 신탁통치하기로 결정했고,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은 만주전역에서 진격했으며, 한반도 이북에도 진격했다. 한반도 이북에 진입한 소련군은 함흥과 평양 원산과 개성 그리고 잠시나마 경성(서울)에 입성했었고, 38도선 부근에서 사실상 진격이 멈췄다. 한반도 이북에 주둔하게 된 소련군은 자신들을 해방군이라 밝혔고, 북조선지역에서 건준을 이끌던 고당 조만식과 협력하여 자주적인 치안유지와 자체적인 친일파 청산 그리고 인민민주주의에 따른 조국건설사업에 나섰다. 물론 소련군이 주둔하는 곳에서 약탈과 강간이 일어나기도 했었지만, 소련은 1946년 1월부터 헌병까지 투입하여 그런 불상사를 철저히 막았고, 북조선 인민들의 재건사업을 도왔다.

해방 후 소련군이 한반도 이북에 주둔하자 1945년 9월 8일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미군도 한반도 이남에 상륙하자. 한반도 이남에 상륙한 미군은 환영하러 왔던 민간인을 오발로 죽이는 것도 모자라 자신들을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이라 밝혔다. 점령군으로써 주둔하게 된 미군은 소위 적산가옥으로 분류된 재산을 몰수하고, 여운형이 이끌던 건국준비위원회를 강제로 해산했다. 그리고 남조선에 숨어있던 친일파들을 등용하여 민중의 불만을 샀다. 더 나아가 미군은 자신들의 자본주의 체제를 남조선에 적용하여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고 경제적인 혼란를 야기시켰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미국은 '신탁통치 5년 연장'을 주장했던 데에 비해 소련은 '신탁통치 5년 이내에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 그러나 친일성향의 언론이자 미군정의 하수인이었던 동아일보는 이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고, 오히려 반대로 왜곡해서 보도했다. 그 바람에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정안을 지지했던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매국노로 몰렸고, 일제시기 친일을 했던 세력들은 반탁을 외치며 애국자로 둔갑했다. 그 과정에서 미군정은 반탁시위를 동조했고, 친일경찰들과 우익세력들을 직간접적으로 도왔다. 또한 지지기반인 친일세력인 이승만을 후원해줬다.

미군정의 무모한 자본주의 정책 도입으로 남조선의 경제는 나날이 악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남조선 전역에선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항쟁등과 같은 반제국주의 투쟁이 일어났는데, 미군정은 이승만과 더불어 이 봉기를 진압했다. 그외에 일어난 봉기 밑 저항운동 또한 미군정과 친일 세력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했다. 심지어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도 진압당했다.

1947년 여운형의 암살 이후 한반도는 완벽히 분단의 길로 가게 되었다. 1948년 남한의 이승만이 유엔의 지원하여 단독정부수립의 길로가자 제주도에선 봉기가 일어났는데, 미군정은 친일경찰들하고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단체와 협력하여 제주도에서 아주 잔인하고 광적인 학살을 벌였다. 이에 반대하여 전라남도 여수 순천에서 여순항쟁이 일어나자 이번에도 미군정은 고민없이 아주 무자비한 학살극을 벌였다. 그 결과 1948년 8월 15일 국내 좌익세력들을 배제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수립되었으며 9월 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

1948년 들어 북 또한 독단적인 정부수립의 길로 들었지만, 여기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물론 모스크바3상회의 이후 조만식 세력이 반탁을 주장해서 이를 무마시켰지만, 기본적으로 북은 친일파 청산 작업을 거쳤고 인민민주주의에 입각하여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북의 지도자 김일성은 1946년에 38선을 넘은 몽양 여운형과 좌우합작 논의를 했었고, 1948년에는 김구 김규식과 남북협상을 했었다.

또한 소련군은 미군과 달리 이런 좌우합작운동과 통일운동을 방해하지 않았었다. 따라서 이런맥락에서 보았을때, 분단의 책임은 소련과 북한 그리고 좌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점령군 행세를 하며 건준을 해산시킨 미군정과 이들에 빌붙어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던 친일 세력들에게 있다. 이것이 바로 지금껏 남한 정부가 가르쳐오지 않던 역사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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