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신서 114
와다 하루끼 / 창비 / 1992년 8월
평점 :
절판


 

김일성! 우리에게 있어서 이 이름을 공개적으로 꺼내는 건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6.25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북한 괴뢰 도당은 나쁜 놈”이라는 식으로 북조선과 김일성에 대해 가르쳐 왔던 우리 사회는 오랜 기간 동안 북조선과 김일성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았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시절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라는 인물에 관해 그저 악마화된 이미지만 부각했던 우리 사회는 일제시기 그가 만주에서 전개했던 항일무장투쟁을 인정하지 않았었고, 군사정권 시기 어용학자들은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은 북한 괴뢰 정권의 수괴 김일성이 아니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김일성 가짜설은 대중들에게 공공연하게 받아들여졌고, 이런 궤변은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탄생한 수구 세력인 뉴라이트가 이어받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뉴라이트와 수구 세력들의 주장과는 달리 북조선의 김일성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그 김일성이 맞다. 김일성 가짜설은 1945년 10월 그가 평양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대회에서 모습을 비추면서 떠돌게 된 얘기였다. 당시 민중들은 1937년 보천보 전투를 전개했던 김일성의 얼굴을 알지 못했었기 때문에 생겼던 해프닝이었다. 그 과정에서 해방 후 우익들이 이를 이용 또는 악용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 부장을 지냈던 김형욱이 자신의 저서에서 밝혔듯이,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김일성은 북조선의 김일성이 맞았다. 1980년대부터 남한으로 탈북한 북측의 고위급 인사들도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북조선의 지도자 김일성은 일제시기 무장투쟁을 했던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였다. 그렇다면 왜 뉴라이트와 수구세력들은 김일성의 항일 경력을 부인하거나 축소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는 김일성의 항일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다. 1912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김일성은 1920년대 중후반부터 반일 활동을 했었다.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의 저서 제국주의론을 읽었던 그는 만주로 갔고,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 일본군대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1932년에는 조선인 무장대를 조직했었다. 김동한을 비롯한 친일변절자들이 설립한 민생단 공작으로 인하여, 숙청의 피바람이 불 때 살아남은 김일성은 1933년 둥닌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인 스중헝을 구하기도 했었다. 193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일성은 무송현성 전투와 대덕수 전투, 소덕수 전투 그리고 이도강 전투 등을 치르는 등 전투를 계속하면서 장백산지구에 근거지를 형성했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기 1달 전인 1937년 6월 김일성은 만주 국경지대에 있는 식민지 조선의 보천보에 잠입하여 진공작전을 개시했었다. 그 과정에서 최소 14명 이상의 일본군 순사와 군인이 죽고 부상당했다. 보천보 전투 이후 김일성 휘하의 부대는 간삼봉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중일전쟁이 격해지면서 일제는 1938년부터 매우 조직적으로 만주에 있는 유격대를 진압하기 시작했고, 김일성 휘하의 부대들은 이른바 100일에 걸친 ‘고난의 행군’을 해야했다. 1939년 10월 일본의 관동군은 또 다른 토벌작전을 개시했는데, 1940년 3월 김일성 휘하의 부대는 홍기하에서 추격해오던 마에다 부대 120명을 매복공격하여 섬멸했다. 이후 김일성과 그의 부대는 만주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넘어갔고, 1942년 8월에는 소련의 붉은 군대 휘하의 제88특별여단에 배속되게 된다. 1940년 10월 소련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김일성이 속해있던 만주의 독립군들은 1942년까지 일제에 맞서 무장투쟁을 했었다. 비록 1945년 8월 소련군이 개시한 만주 진공 작전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김일성을 포함한 북조선의 만주 빨치산파 지도부들은 193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초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었고, 소련에서 대일전을 준비했었다.

 

이렇듯 김일성은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립운동을 해왔다. 따라서 반공주의에 심취한 수구 세력들에게는 이러한 김일성의 항일 경력이 당연히 부담스러울 테고, 국민들에게 숨기고 싶었을 테며, 이를 왜곡하거나 축소하고 싶었을 것이다. 일본의 양심적인 역사학자 와다 하루끼는 이 책을 통해서 수구세력들이 왜곡해오거나, 숨기고 싶어했던 김일성 항일투쟁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부분이야말로 와다 하루끼가 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와다 하루끼가 쓴 이 책을 읽다보면, 항일무장투쟁 당시 군사 지도자 김일성의 지도력이 잘 발휘되는 모습들이 무장투쟁에 같이 참여했던 후세대들의 증언을 통해서 드러난다. 북조선의 지도자 김일성 또한 자신이 지휘하던 병력을 잘 통솔했다. 그랬기에 보천보 전투를 통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질 수 있었고, 일본군의 끊임없는 추격을 피해 ‘고난의 행군’을 이겨낼 수 있었으며, 추격해오던 관동군 측 마에다 부대를 홍기하에서 전멸시킬 수 있었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1930년대 중반 김일성은 장백산에 근거지를 형성했었다. 여기서 말한 장백산은 우리가 아는 백두산이다. 즉 김일성은 1930년대 중반에 백두산을 근거지로 항일투쟁을 했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해봣을 때, 현재 북측에서 백두산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에선 김일성과 만주 빨치산파들이 1948년 북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뒤, 이후 북조선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나온다. 만주 빨치산파 대다수는 북조선에서 주요요직을 차지했고, 북조선 사회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북조선에서 주요 요직을 차지하게 된 인사들의 인적구성을 보면 대다수가 항일운동을 했다. 1949년 조선 인민군 창설 1주년에 수여된 48명의 군 간부 서훈을 보면 일본사관학교를 나온 자가 한 명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조선 인민군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와다 하루끼가 쓴 이 책은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난 지 1년 뒤인 1992년에 출간되었다. 김일성이 사망하기 2년 전에 출판한 이 책을 읽으며 필자는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을 다시 한번 공부할 수 있었고, 그 또한 항일 투사로서의 경력을 당연히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산 김원봉 선생마저 빨갱이로 모는 우리 사회에서 지금 당장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인정하는 것은 절차 및 조건이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지만,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작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와다 하루끼나 브루스 커밍스 같은 양심적인 역사학자들이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튼 정말 좋은 책을 읽었다.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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