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김일성을 맹목적으로 찬양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닙니다. 그저 그의 항일운동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한다는 차원에서 집필했습니다.)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양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김성주였고, 아버지와 어머니 둘다 기독교 신자였다. 김성주는 3.1운동 이후 출옥한 그의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주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1923년부터 1925년 까지 외조부의 교회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1926년 6월 그의 아버지 김형직이 사망했는데, 아버지의 사망을 전후로 해서 학업을 중단하고, ‘타도 제국주의 동맹’을 결성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27년 김성주는 동만주의 대도시 지린에 있는 유원중학에 입학했고, 그 시기 블라디미르 레닌이 집필한 ‘제국주의론’을 읽었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은 ‘조선공산청년회’에서 활동했는데, 이때 일본 측으로부터 체포당해 투옥되었다. 출옥 후에는 이퉁이나 화이떠 현 등의 농촌지역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청년들과 교제했다. 당시 김일성은 리종락이라는 사람이 결성한 조선혁명군에 참가했는데, 1931년 리종락이 체포되면서 그의 부대가 궤멸되어 버렸고, 체포를 면한 김일성은 그 시기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1931년 9월 일본 제국주의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했다. 중국과 일본간의 전투가 격해지던 1932년 봄 김일성은 안투에서 구국군 유사령부대에 속하는 별동대로서 조선인 무장대를 조직했다. 김일성은 자신이 창설한 부대를 이끌고 통화의 조선혁명군 사령 양세봉을 방문하여 민족주의자의 군대와 연합을 시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김일성은 1933년 2월 왕칭현의 유격근거지 마춘으로 나아가 부대와 함께 왕칭유격대에 합류했고, 왕칭유격대대의 정치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1933년 5월 반민생단 사건이 투쟁이 전개되면서, 많은 조선인 당간부들이 일제가 만든 민생단 단원으로 몰려 체포, 구속 처형당했고, 이후 김일성도 왕칭유격대대에서 해임되었다. 그래도 김일성은 1933년 9월 동닝 전투에서 조선인 유격대 2개 중대를 동원하여 이 도시에 대규모의 공세를 퍼부어, 이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인 스중헝을 구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반민생단 사건 당시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35년 김일성이 왕칭으로 다시 돌아온 뒤, 부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 제3단으로 편성되었고, 김일성은 정치위원으로 부활했다. 1936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이 결성되었고, 김일성은 신설된 제3사의 사장에 임명되었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부대는 국내에 침투하여 어느 지역에 대한 습격에 나서는 데 그게 바로 신화화 혹은 전설이 된 보천보 전투다.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부대는 먼저 전화선을 절단한 후 주재소를 공격했다. 그들은 주재소를 습격하여 무기고에서 각종 총기와 탄약 수백 발을 탈취했으며, 동시에 면사무소와 우편소, 농사시험장등 주요 관공서도 공격했다. 보천보가 습격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제 당국은 혜산진 경찰서 경찰대 31명과 국경수비대 60명 그리고 헌병대 8명으로 토벌대를 꾸려 게릴라 부대의 퇴로를 차단했다. 이로 인한 김일성 부대의 피해도 적잖았다. 사실 보천보 전투에서 주재소를 습격했을 당시 일본 측 전사자는 2명이었는데, 한명은 요리사였고, 다른 한명은 오발로 죽은 두 살짜리 아이였다. 이것과는 별개로 김일성의 부대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면서 전투를 치렀는데, 그 과정에서 일본군 7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올렸다. 보천보 전투 이후 동아일보는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김일성은 조선의 영웅으로 등극하였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일제 측의 탄압도 심해졌다. 1938년부터 일본은 매우 조직적으로 만주에 있는 유격대를 진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 김일성의 제2방면군은 흩어져서 이른바 ‘고난의 행군’에 나서야 했고, 1938년 11월부터 1939년 3월 까지 100일 간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리며 행군했다. 히틀러가 폴란드 침공을 하고난 지 1달이 지난 시점인 1939년 10월 일본의 관동군은 또 다른 토벌작전을 개시했고, 이번에는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유격대를 막다른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김일성 부대는 1940년 3월 가장 혁혁한 성과를 올리는데 그게 바로 훙치허 전투다. 당시 김일성의 부대를 토벌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의 대장 마에다는 “김일성의 목은 내가 벤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다녔다. 그는 “김일성 부대가 허룽현 훙치허의 일본인 목재소를 습격하여 쌀을 탈취해갔다.”는 신고를 받은 뒤 경찰 및 군부대를 출동시켰는데, 매복해있던 김일성 부대에게 공격당하여 부대가 전멸당한 것이다. 김일성 부대는 훙치허 전투에서 대략 100~120명이나 되는 일본군을 섬멸했고, 김일성의 유격대는 일본군 토벌대 측의 경기관총 5정, 소총 100여 정, 탄알 1만여 발, 무전기 1대를 노획했다.

 

1940년 7월 김일성 부대는 340명 규모의 부대로 확대되었지만, 계속되는 일본군의 토벌 때문에 1940년 10월에는 소부대로 나누어 만주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넘어갔다. 1940년 말에는 사령부를 선두로 부대 전체가 소련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주둔했다. 하지만 소련은 1941년 4월 추측국 일본과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했고, 따라서 소련은 만주에서 일본과 충돌할 가능성을 줄여야 했고, 이 때문에 김일성 측의 유격대는 소련 영내의 야영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42년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에게 패하자 소련은 항일유격대원들을 훈련시킬 계획을 세웠고, 그해 8월 소련은 제88특별여단을 만들었다. 김일성의 부대는 제88특별여단에 편성되었고, 항일전을 치를 날을 소련에서 준비했다. 이때 같이 활동했던 인물로는 최용건, 김책등이 있다. 1945년 5월 나치독일이 무조건 항복하자 소련은 그해 7월 대일전쟁에 대비해 정보요원을 차출했고, 김일성과 최용건을 비롯한 지도급 인사들은 만주와 조선에 투입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이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게 선전포고 했고, 만주의 관동군을 공격했다. 소련군은 여러지역들을 해방시켰지만, 정작 김일성 측 부대는 전투에 투입되지 않고,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렇게 하여 김일성은 대일전에 제대로 참전해 보지도 못했고, 1945년 9월 19일 김일성은 제88국제여단 조선공작단의 일원으로 원산을 통해 귀국하게 된다.

 

참고문헌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와다하루끼, 창비, 2014
한국의 레지스탕스 조한성, 생각정원, 2013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현실문화,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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