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와다 하루키 지음, 남기정 옮김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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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인 올해는 남북한의 각 정부가 들어선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1948년 9월 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정부가 수립되었다. 분단된 지 70년이 넘었지만, 한반도는 아직도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아래 놓여있다. 더군다나 6.25전쟁이라는 민족적인 비극과 그 잔재가 서로와의 협력과 교류를 막았고, 거기에는 외세의 힘이 작용했다. 따라서 대한민국에서 북한이라는 주제를 말하는 것은 매우 민감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요즘 다시 남북관계에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다. 2018년 4월 27일에는 대한민국의 대통령 문재인과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이 만났고, 2018년 6월 12일에는 미국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와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이 만나 북미정상회담을 가졌었다. 변해가는 한반도의 상황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은 “북한을 제대로 알고 공부하자”이다. 그렇다!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아래 한국도 북한도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 하거나 편협한 눈으로 바라봤지, 이성의 눈을 가지고 서로가 학술적으로 연구할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는 이성의 눈을 가지고 북한의 역사를 연구한 명저일 것이다. 이번에 쓰는 서평은 이 책의 내용을 나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 보단, 책에 나온 북한 현대사를 순서대로 나열해볼까 한다.

1. 김일성의 탄생과 항일무장투쟁 그리고 일제의 패망(1912~1945)

1912년 4월 15일, 평양의 교외 대동군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바로 김성주(김일성)다.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1917년 조선인국민회의 결성에 참가했던 독립운동가였다. 그가 참가했던 조직은 오래가지 못했고, 김형직은 체포되었다가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 그때 김일성도 만주에 갔었다. 그 뒤 소년 김일성은 어머니의 고향으로 돌아와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외조부의 교회학교에 다녔고, 1927년에는 동만주 대도시 지린에 있는 유원 중학에 입학했다. 이때 김일성은 레닌이 쓴 <제국주의론>을 읽었다고 한다. 1929년부터 여러 조직에 가담했던 김일성은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 체포당해 투옥되기도 했고 그 시기 리종락이 결성한 조선혁명군에 참가했다. 김일성이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31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면서 부터인 걸로 추측하고 있다.

1931년 9월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 상황에서 김일성은 1932년 안투라는 지역에서 조선인 무장대를 조직했다. 1933년 2월, 김일성은 왕칭현의 유격근거지 마춘으로 나아가 부대와 함께 왕칭유격대에 합류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왕칭유격대대에서 해임되었고, 1935년 왕칭으로 다시 돌아와 동북인민혁명군 정치위원으로 부활한다. 1936년 동북항일연군에 속해있던 김일성은 1937년 그 나름의 신화를 만들었다. 보천보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보천보 전투는 북한에 의해 과장된 부분이 많다. 북한의 자료는 사실상 소설에 가까울 정도이긴 하다. 1937 6월 김일성의 부대가 보천보를 습격했을 때 그들이 주재소에서 사살했던 것은 오발로 죽은 일본인 요리사 한명과 2살짜리 유아였다. 그러나 습격하고 난 뒤 일본군 경찰과 군인이 김일성 부대를 추격했는데 추격하는 과정에서 일본군 경찰 및 군인이 7명 이상이 죽고 14명이 부상당했다. 븍한의 과장된 주장을 떠나서 보천보 전투는 당시 대대적으로 이슈가 됐던 것만은 사실이다.

보천보 전투 이후인 1938년 동북항일연군에도 위기가 닥쳤다. 1937년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파죽지세로 중국 전선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전선의 조금은 교착되기도 했지만 1938년 까지만 해도 전황 상으로는 일본군에게 유리해 보였다. 1938년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선 일본군은 동북항일연군 조직을 와해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상황에서 김일성의 제2방면군은 흩어져 이른바 ‘고난의 행군’에 나서야 했다. 1939년과 1940년 만주에 있던 독립군 부대들의 상황은 그야말로 고난 그 자체였다. 1940년 3월 김일성 부대는 생각보다 놀라운 항일 업적을 남겼다. 홍치허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홍치허 전투에서 김일성 부대는 일본의 마에다 부대를 섬멸했고, 100명 이상의 일본군을 전투에서 사살했다. 이후 김일성 부대는 1940년 10월 소그룹으로 나누어 국경을 건넜다. 김일성과 그의 부대가 연해주의 하바롭스크에 정착하게 된 건 1941년 2월쯤으로 보인다. 김일성과 그의 부대가 연해주에 정착한 것과는 별개로 세계정세는 희망적이지 않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아들 김정일은 그 당시 소련에서 태어났다.

1941년 4월 일소중립조약이 체결 된 이후 히틀러의 독일은 1941년 6월에 소련을 침공했고, 히틀러의 동맹국이던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1942년부터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패함으로써 전세는 연합군측으로 기울어졌다. 1942년 8월 동북항일연군 부대는 소련 연해주에서 제88특별여단으로 편성되었고, 후에 있을 대일전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1945년 4월 말 히틀러가 자살 한 뒤 5월 8일에 나치독일이 무조건 항복하고, 미군이 오키나와 점령에 성공하고 난 이후 미국은 일본 본토상륙작전을 망설였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고,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게 선전포고 한 뒤 만주에서부터 밀고 내려왔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단련된 소련군은 일본군기지를 단숨에 무너뜨리고 한반도까지 밀고 내려갔다. 김일성의 88특별여단은 참전하지 못했지만, 후에 북한정권에 소련파의 핵심이 될 정상진과 같은 몇몇 소련파 출신 인물들은 소련군으로 참전해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는 아주 의미 있고 감동적인 경험을 했다한다. 결국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항복했다.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은 1945년 9월 2일 전함 미주리호에서 치러졌고, 김일성은 9월 5일 하바롭스크를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 군함을 타고 9월 19일 원산에 상륙했다. 따라서 “김일성 동지께서 왜놈들을 족치며 해방군과 함께 들어왔다.”는 북한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고, 그 해방군은 김일성 부대가 아닌 소련군이었다.

2. 해방정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1945~1948)

해방은 아주 갑자기 찾아왔다. 갑자기 찾아온 해방이자, 외세의 힘에 의한 해방이었기에 해방 이후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전국적으로 활동했고, 북조선에서도 건준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당시 북조선의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던 인물은 우익 민족주의 계열인 고당 조만식이었다. 조선의 간디라 불리던 조만식은 독립운동가로서는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자였던 조만식은 소련과의 마찰이 있었고, 결국 그는 북조선에서의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9월 19일 김일성이 원산에 상륙함으로써 귀국했다. 귀국한 김일성은 소련의 힘을 얻어 북조선 분국을 설립하고, 10월 14일 평양시민대회에서 연설했다. 평양시민대회는 김일성이 공개석상에서 처음 내비치게 된 사건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알려진 김일성이 젊은 이였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실제 김일성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김일성 가짜설과 동명이인 설은 여기서 생긴 것 같다.

소련의 지원하에 권력을 잡은 김일성은 1946년 2월에 위원장으로 취임하고 3월에는 토지개혁을 실행한다. 토지개혁 이후엔 김일성 종합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1946년 7월엔 남녀평등권법을 공포했고, 8월에는 북조선로동당을 결성했다. 이해 11월에는 박헌영의 주도로 남조선에서 남로당이 결성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 남쪽은 좌우익의 대결이 극심했던 데에 비해 북조선은 소련 군정 하에서 사회주의적인 개혁을 차츰 진행해 나갔다. 김일성 또한 좌우합작에 관심을 가졌는지 좌우합작운동시기 여운형을 만나기도 했고, 1948년 남북협상 시기에는 김구를 만나 통일을 논의하기도 했었다. 1948년 2월 조선인민군이 창설됐고 1948년 들어서 남북모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쪽으로 기울어지자 북한 또한 남한처럼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길에 착수했다. 그 결과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 수상은 김일성, 부수상은 박헌영, 제3부수상은 홍명희, 농림상은 백남운등 주로 사회주의 성향을 가지거나 사회주의 활동을 했던 인물들이 북한의 고위직을 점했다.

3. 한국전쟁(1948~1953)

1948년에 접어들면서 한반도에는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됐다. 하나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이고, 다른 하나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정부 수립 이후 두 나라 모두 “무력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의 경우 남침을 허가 받기 위해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을 설득시키느라 고군분투했고, 이승만의 경우 틈만나면 ‘북진통일’ 외쳐대기 십상이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김일성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다가 1950년이 돼서야 김일성의 요구를 들어줬다. 1949년 10월 1일 중국의 국공내전이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고, 1950년 1월 대한민국에서의 미군철수가 진행됨에 따라 애치슨 라인이 발표됐다. 즉 스탈린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어느 정도 승산이 있는 게임이 된 것이었다. 스탈린의 허가를 받은 김일성은 모택동으로부터 조선족2개 사단을 받은 뒤, 남침계획을 본격적으로 세웠다. 사실 분단 정부 수립 이후 3.8선에서는 크고 작은 교전이 벌어졌었다. 크고 작은 교전을 통하여 북한은 대한민국의 군대 상황을 파악한 셈이다.

1950년 6월 23일과 24일 전방에 있던 조선인민군은 공격명령을 받았다. 공격명령을 받은 인민군은 6월 25일 38선 전역에서 공격을 감행했다. 6.25 전쟁이 터진 것이다.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탱크와 비행기 야포 박격포 등을 지원받은 북한군의 전력은 한국군에 비해 너무나도 강했다. 인민군은 개전 3일 만에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에는 다시 진격해 나감으로써 대전과 전라도 일대를 점령한 뒤, 8월에는 포항까지 점령함으로써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기대와는 달리 박헌영이 기대한 남로당 봉기는 대한민국 내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대통령 이승만은 바로 도망치면서 한강의 모든 다리를 폭파하여 북한의 진격을 며칠간 늦췄고, 예상과는 달리 미군의 개입은 매우 빠르고 적극적이었다. 미군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250대 이상의 T-34전차를 앞세워 8월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밀었다. 그러나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전세는 한미연합군쪽으로 기울었고, 1950년 10월1일에는 국군이 38선을 돌파했으며 미군도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10월 말에는 평양은 물론이고 압록강 까지 밀렸지만,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기치아래 중공군이 전쟁에 참가함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용인까지 밀렸다. 1951년 3,4월 쯤 리지웨이가 이끄는 유엔군은 다시 서울을 회복하고 3.8선 부분까지 북진했다. 그 시점인 1951년 7월부터 휴전을 위한 협상이 진행됐다. 휴전 협상은 양측의 포로문제와 영토를 어디에 그을까 하는 문제가 핵심이었지만, 양측 포로문제에서 합의를 잘 보지 못해서 1953년 7월이 돼서야 휴전이 성사됐다. 즉 한국전쟁은 무차별한 파괴와 살상을 남긴 채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으로 끝났고, 양측의 민간인은 수도없이 학살당했다. 특히 개전 초반 국군이 자행한 보도연맹 학살 사건만 하더라도 최소 20,30만 이상의 민간인이 짧은 기간 동안 학살당했고, 인민군 또한 인민재판을 통하여 적잖은 양민을 학살했다. 물론 그 규모나 범위면 에 있어서 한국군이 더 했다. 미군의 경우 노근리 학살이라고 하여 수백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 있긴 하지만, 한국전쟁시기 미군의 자행한 가장 광범위하고 잔인한 학살은 무차별 폭격일 것이다.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북한 전역에다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고, 사망한 민간인 또한 결코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폭격은 1953년 까지 지속되었다. 한국 전쟁 시기 미국은 총50만 톤이나 되는 폭탄을 한국전쟁에 사용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38선 부근에서의 전투는 지속 되어 국군, 인민군 할 거 없이 수많은 군인들이 죽어나갔다.

4. 박헌영 숙청과 8월 종파사건, 사실상 모든 권력을 김일성이 장악하다.(1953~1956)

무력으로 한반도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 오판한 김일성은 1950년 한국전쟁을 일으켰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한국전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김일성은 한국전쟁의 책임을 물어야할 희생양이 필요했다. 희생양으로서 가장 어울리는 정적은 바로 박헌영이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개전 이전 박헌영이 주장한 ‘남로당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박헌영을 미제간첩이라 가르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제시기 김일성이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면 박헌영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5년 조선 공산당을 창당했던 그는 사회주의 독립운동계열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1940년대 까지 변절하지 않았고, 해방 후 남쪽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그의 노선을 따르던 이들이 바로 남로당이다. 남로당 인사들은 해방정국 시기 미군정과 친일파들에 맞섰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박헌영이 미제 스파이라는 북한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이야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자면 1953년 3월 박헌영은 체포됐다. 죄목은 미제 스파이였다. 박헌영이 체포 된 이후 북한에서는 남로당 대숙청의 바람이 불었다. 이 시기 이강국, 리승엽, 임화를 비롯한 남로당 계열 인사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대부분의 남로당 인사들이 사형선고나 징역선고를 받고 숙청당했을 시기 북한의 전 부수상이었던 박헌영만은 사형시키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의 눈치를 봤을 것이다. 남로당 숙청이후 북한의 모든 권력은 김일성의 것이 되어 갔다. 남로당 숙청에 위기감을 느낀 연안파 계열과 소련파 계열은 서로 연합한 뒤 김일성을 당내에서 제거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일으킨 것이 바로 1956년 8월 종파사건이다.

1953년 스탈린 사후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된 소련의 후르시쵸프는 1956년 제20차 공산당 전당 대회에서 스탈린을 아주 강력하게 비판했고, 이는 동유럽과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북한 또한 충격을 받았다. 소련에서 일어난 스탈린 격하 운동 또한 북한의 연안파와 소련파의 8월 종파사건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연안파와 소련파의 계획과는 달리 8월 종파사건은 실패로 끝났고, 실패의 책임을 물어 연안파와 소련파는 대거 숙청당한다. 8월 종파사건 이후인 1956년 12월 박헌영 또한 총살당했다고 한다. 8월 종파 사건 이후 자신의 정적을 웬만큼 제거한 김일성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지도자가 되었다.

5. 김일성의 시대(1956~1994)

8월 종파사건 이후 김일성은 사실상 북한의 모든 권력을 거머쥐게 되었다.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던 북한 입장에선 경제를 재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을 것이다. 이 시기 북한은 소련과 중국식 경제개발에 영향을 받아 전후재건에 나섰다. 그 결과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1957년에는 ‘제1차 5개년 계획’이 실행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경제 재건에 있어 당시 북한에 주둔해있던 중공군 또한 많은 도움이 됐다 한다. 중공군은 1958년이 돼서야 북한에서 완벽히 철수했다. 1959년 북한에서는 천리마 운동이 전개되었다. 천리마 운동은 ‘북한식 스타하노프 운동’이었다. 천리마 운동을 통하여 북한의 경제 상황은 많이 좋아졌다. 이는 1950년대 기아와 빈곤에 시달리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종말을 맞은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권과 비교가 되었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경제가 북한을 넘어서기 시작한건 1970년대 초중반 부터였다.

1960년대부터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베트남의 호치민이 중국과 소련의 물타기 외교를 했듯이 북한의 김일성 또한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둘다 필요로 했을 것이다. 1961년 대한민국에서는 5.16 쿠데타가 일어나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군부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대한민국에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반공주의를 제1의 국시로 삼은 정권이었다. 이를 안 북한은 박정희 정권을 ‘파쇼정권’으로 규정하고 반미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은 경제나 군사력 면에서 대한민국을 압도했었다. 당시 그들이 남북연방제를 주장했던 것도 어쩌면 “우리가 남반부를 평화적으로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냉전시대는 참 긴장감 있게 전개되었다. 1961년 쿠바 사태와 베를린 장벽 설치로 3차세계대전의 위협이 닥치기도 했고, 1964년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은 수많은 최신식 무기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했지만,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의 주장한 자유와 독립이라는 구호아래 단결한 베트콩(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미국에 맞서 결사 항전했다. 미국의 베트남 전에 전면적으로 개입했던 1965년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사회주의건설과 남조선혁명에 대하여"라는 연설에서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주, 이것이 우리 당이 일관하게 견지하고 있는 립장"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북한에서 만든 주체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1965년 김일성은 주체사상 자신만의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냈다.

베트남 전쟁은 점차 장기화 되어 갔다. 베트콩의 대미투쟁을 보던 김일성은 1966년 제2회 조선로동당 대표자회의에서 “남조선혁명노선”을 채택한다. 즉 김일성은 베트남 전쟁처럼 게릴라 전과 간첩 침투를 통한 남조선 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은 김신조를 포함한 31명의 무장공비를 남파했다. 무장공비는 남파한 다음날 밤10시에 청와대 뒤에 있는 북한산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1명이 생포되고 나머지 30명은 사살됐지만, 한국측 사망자는 68명이나 되었다. 체포된 김신조는 인터뷰에서 “박정희 목 따러 왔다.”고 얘기하여 충격을 주기도 했다. 청와대 사건이 일어난 지 1일 뒤인 1968년 1월 23일 원산 앞바다에서 미 함정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었다. 나포 작전 도중 미국 승무원들은 1명 빼고는 전원 포로로 붙잡혔다. 이에 분노한 미국정부는 제7함대(미국 최강의 함대)를 한국 영해에 급히 출동시켰다. 청와대 습격 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 북한은 “전투도 불사 하겠다는 강경한 자세”로 나왔다. 허세였을 것이다. 그런 한반도의 긴장감이 고조되던 가운데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아주 결정타를 날렸다. 구정 공세(테트 공세:Tet Offensive)가 바로 그것이다. 구정시기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공세를 가하자 미국의 관심사는 베트남으로 갔다. 따라서 한반도 긴장상황은 베트남의 구정 공세로 좀 약해진 셈이다. 대남적화 전략을 뿌리치지 못한 김일성과 북한이 1968년 11월 한 번 더 일으킨 사건이 있다. 그게 바로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다. 약100여명의 무장공비가 울진과 삼척에 상륙했지만 대부분 토벌 됐다. 토벌 과정에서 한국측 사망자는 약70명이나 된다.

김일성의 대남적화 전략은 도리어 박정희 정권이 강화되는 역효과만 만들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박정희 정권은 반공주의가 매우 강화된 정권이었다. 김일성과 북한은 베트남식 전략을 어중간하게 모방했고, 그 결과 실패한 것이다. 1968년 시기 미국과 서유럽에선 68혁명의 여파로 사상적 사회적 발전을 거듭했지만, 대한민국은 북한의 도발로 인하여 반공주의 강화라는 역효과만 얻었다. 1969년부터 김일성은 그의 아들 김정일에게 후계자로서의 레슨을 시작했다. 1969년 그의 아들 김정일이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취임했다. 1970년 미국의 베트남 전 개입은 막바지로 들어섰다. 1972년 베트남 전쟁의 패배를 받아들인 미국의 닉슨 정부는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미중수교를 맺었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북한의 김일성과 대한민국의 박정희는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7.4남북공동성명을 통하여 김일성은 사회주의 헌법 개정이라는 목표아래 자신의 독재 권력을 강화했고,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였다. 남북한 둘 다 독재의 길로 접어들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대한민국과 북한의 경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기 시작했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북한의 경제는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74년 북한의 김정일은 ‘속도전’을 주창했고, 10월에는 ‘70일간 전투’를 제안했다. 즉 현재 뉴스에서 나오는 몇일 전투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북한의 상황과 더불어 10월 유신 이후 한국의 상황도 급변했다. 1973년 일본도쿄에서 야당의원 김대중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됐다 목숨을 잃을 뻔 했고, 1974년 4월 한국에서는 반 유신독재 투쟁이 전개되었으며,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베트남 전쟁 종결 이후 박정희는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여 민주주의을 탄압하는가 하면 인혁당 사건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일어났다. 1976년 3월1일에는 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한 문익환 목사와 김대중 후보를 포함한 13명이 체포되었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사건이 일어났다. 다시한번 한반도 상황이 다시한번 긴장상황에 놓였다. 1977년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미군철수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 군부의 반발과 한국사람들의 반발로 미군을 철수를 실행하지는 않았다. 1979년 대한민국의 상황은 막장을 달리고 있었다. 박정희는 부마민주항쟁을 진압하려다 자신의 부하 김재규의 총탄에 맞고 사망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죽은 뒤 박정희 밑에서 세력을 키웠던 전두환이 12.12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전두환 군사독재에 반발하여 대한민국의 대학생들은 전국에서 반독재 시위를 벌였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은 그 과정에서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의 전개와는 별개로 1980년대에 들어서자 북한의 경제사정도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까지만 비슷했던 생활수준은 1980년대 들어서 대한민국이 북한을 훨씬 압도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군사력 면에서도 대한민국의 북한을 조금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그 상황에서도 북한은 평양의 인민대학습당, 개선문, 주체사상탑을 잇달아 완성했다. 1983년 북한의 주도로 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이 일어나서 한반도 관계가 다시 긴장관계에 돌입하기도 했지만, 1985년 9월에는 최초의 남북이산가족 상호방문이 실현되기도 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이한열 열사의 희생으로 시작된 6.10민중항쟁으로 전두환 독재 정권은 막을 내렸다. 그해 11월 대한항공KAL기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소련, 중국,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이 대거 올림픽에 참가했지만, 북한은 참가하지 않았다. 1989년 1월 고향이 북한출신인 현대그룹회장 정주영이 남북교류에 있어서 크나큰 관심을 보였고, 북한과 금강산개발에 대해 협의하기도 했다. 같은 해 민주화 운동가이자 통일 운동가인 문익환 목사가 방북했고, 1989년 7월 1일 외국어대학교 학생인 임수경이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여 남북 모두에게 큰 이슈가 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방북하고 돌아온 임수경을 처벌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공산권 국가와의 외교관계를 개선해 나갔다. 1990년에는 소련하고 수교하고 1992년에는 중국하고도 수교했다. 중국과 소련의 관계를 중시하던 북한에게는 노태우 정권의 외교에 당황했을 것이다. 1980년대 북한의 경제는 점차 악화되어 갔다. 그러던 1991년 전 세계에 크나큰 충격을 준 사건이 일어났다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다.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구 공산권 국가들이 몰락했다. 이를 본 미국은 “북한도 조만간 망할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거기다 1991년 걸프전쟁 당시 강력한 육군력을 자랑하던 이라크군이 미군에게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완패했다. 이는 북한에게 있어 “미국과의 전면전은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각인시켜 줬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한에서는 각종 자연재해가 덮쳤다. 1990년대 북한의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1993년 들어선 김영삼 정권은 때때로 북한에게 적대적인 정책을 취하기도 했지만, 과거 극단적인 메카시즘하고는 좀 달랐다. 1994년 한반도에는 전쟁의 위기가 닥쳤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의 회고록에 따르면 실제로 그는 전쟁준비까지 했었다. 미국이 검토한 작전계획에 따르면 “개전 초기 90일 동안에 사상자는 미군 5만2000명이고, 한국군은 49만명이 예상되며, 전쟁이 본격화되면 미군 전사자 8~10만 명을 포함해 군과 민간인 사망자는 100만 명에 이를 것이다.”라고 나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육해공군 1만 명 증강과 F117 스텔스 전투기의 증강, 항공모함의 근해 배치 등을 내용으로 하는 안을 채택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영삼은 절대적으로 전쟁반대에 나섰고, 그 결과 한반도의 전쟁위기는 잘 넘어갔다. 전 대통령 카터의 방북 또한 전쟁위기를 넘기는데 크나큰 기여가 되었다. 이후 북한은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1994년 7월 8일 수십년간 북한을 통치해오던 김일성이 사망했다. 김일성의 사망으로 충격에 빠진 북한은 눈물의 바다가 되었다. 이로써 김일성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6. 김정일 시대(1994~2011)

김일성이 죽고난 뒤 북한의 최고 권력은 김정일에게로 넘어갔다. 북한의 권력을 장악한 김정일이 지지자와 세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 썻던 전략은 군대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군대를 장악하기 위해 김정일은 1995년 정초부터 부대 방문을 시작했다. 김정일에게 있어 가장 큰 위기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고난의 행군이라는 단어는 1938~1939년 김일성의 독립군 부대가 혹한과 굶주림을 겪으며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100일간 행군한 데서 유래했다. 1996~2000년 북한을 덮친 대기근을 그 사건에 빗대어 고난의 행군이라 표현한 것이다. 고난의 행군은 참으로 처참했다. 최소 60만에서 최대300만(서방측에서 과장했다는 주장이 있다.)되는 북한인민들이 굶어죽었다. 이처럼 1990년대 북한의 경제는 참으로 위태로웠다. 1997년에는 북한정권의 최측근인 황장엽이 망명했다. 1998년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자신의 정권 기간 동안 인도적인 차원에서 북한과의 평화와 협력을 추진했었다. 그 결과 2000년 6월 13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6월 15일에는 6.15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대통령 김대중과 김정일이 만나는 모습을 본 몇몇 사람들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꿈꾸기도 했다.” 그해 10월 울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이 평양에서 김정일과의 회담을 하면서 남북관계에도 변화가 보이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북한과 일본과의 관계에도 그 나름의 변화가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2001년 그 해 당선된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북한,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Axis of Evil)’이라며 남북관계에 찬물을 끼얹었다.

2001년 9월11일 오사마 빈라덴이 9.11테러를 일으켰다. 영상속의 장면은 충격 그 자체였다. 9.11테러를 시점으로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를 선포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그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평화를 위한 노선으로 나아갔다. 2002년과 2003년 남측 공연단이 평양으로 가서 감동적인 공연을 하기도 했었다. 김대중 정권을 이은 노무현 정권 또한 원칙적으로 남북평화노선을 지지했다. 그와는 별개로 2003년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지난 걸프 전쟁 때처럼 이라크군은 미군한테 개전 초반에 궤멸 당했다. 심지어 사담 후세인은 체포되기까지 했다.

2004년 일본의 고이즈미 수상은 북한을 방문하여 납치피해자 가족 5명이 일본으로 귀국하는 등 북일관계도 점차 변화해 가는 것 같았고, 2005년 9월에는 6자회담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미국과 북한간의 마찰로 인하여 남북관계는 다시 금이 가는 듯 보였다. 2006년 7월 북한은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하고, 10월에는 지하 핵실험을 했다. 그래도 노무현 정부는 평화의 길을 선택했기에 임기 말에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회담을 가졌었다.

2008년 기업인 출신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명박 정권은 북한을 매우 적대시 하는 정권이었다. 남북관계가 나빠짐과 동시에 2008년에는 김정일의 건강 또한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으로 2008년 10월 북한은 테러지원국가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2009년 북한은 다시 핵실험을 했고, 이번엔 외국인 기자 납치사건까지 일어났다. 2010년 4월에는 천안함 사건이 일어났고, 그해 11월 북한은 연평도를 포격하여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었다. 다행히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2011년 남북 상황은 긴장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러던 2011년 12월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이 사망했다. 김정일의 죽음으로 김일성 사망때와 마찬가지로 북한은 눈물바다가 되었었다. 이로써 17년간 지속되던 김정일 정권 또한 막을 내렸다.

7. 김정은 시대(2011~?)

김정일 사망 이후 그의 뒤를 이은건 바로 그의 아들인 김정은이었다. 김정일 아들 중에 김정은은 가장 막내였다. 1983년 김정일과 고영희 사이에서 태어난 김정은은 어린 시절 스위스에서 살며 학비가 수천만 원대 하는 국제학교를 다녔다. 쉽게 말해 부르조아 교육을 스위스에서 받은 것이다. 김정일의 개인 요리사인 후지모토 겐지씨에 따르면 김정일은 아들 김정은을 첫째 정남이나 둘째 정철보다 훨씬 아꼈다고 한다. 김정일 사망 이후 정권을 잡은 김정은은 2011년 12월 30일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2012년 4월에는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2012년 12월에는 북한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 그리고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데 성공했다. 2013년 대한민국의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북한은 정전 협정을 백지화 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의 허세였다. 얼마 되지 않아 북한은 핵실험을 감행했다.

2013년 많은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북한에서는 참으로 놀랍고도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김정은이 자신의 고모부인 장성택을 재판에 세워 사형을 선고한 뒤 처형해 버린 것이다. 김정은이 장성택을 처형하기 이전까지 한국의 북한전문가들 중에는 장성택을 높이 평가하며 김정은에게 많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들이 적잖게 있었다. 김정일 사망 이후 ‘SBS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장성택을 언급하며 앞으로의 북한의 변화상을 예측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김정은이 장성택을 처형하면서 그러한 추측은 의미가 없어졌다. 장성택 처형 이후 김정은을 비난 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물론 자신의 고모부를 말 같지도 않은 죄목을 씌어 처형한 건 분명 잘못된 일일 것이다. 다른 한쪽에서는 장성택이 “마약을 유통한 범죄자”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북한의 주장을 꾀꼬리처럼 따라하는 주장이기에 액면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분명한건 장성택 처형 이후에도 김정은 정권은 건재하고 몇몇 이들의 기대 혹은 바람과는 달리 김정은의 내부 지지 세력은 견고하고, 북조선 국민의 지지는 생각보다 높은 것 같다.

김정일 사망 이후 몇몇 이들은 “김정은 정권은 머지않아 망할 것이다.”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이 또한 의미가 없어졌다. 2018년 들어서 남북관계는 다시 좋아지고 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의 정신을 계승한 문재인 정부 또한 마찬가지로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그랬듯이 남북 평화 노선을 지지하고 있다. 앞으로의 김정은 체제는 어떻게 가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는 우리의 몫이다.

8. 글을 마치며

책을 읽고 난 뒤 지금 까지 내 나름 찾은 자료와 읽은 책의 내용을 참고하며 총체적으로 북한 현대사를 정리해 보았다. 이 글을 끝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내가 쓴 서평 내용 중 김일성과 김일성 집권기 일어난 얘기를 많이 다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사실 북한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역사와는 다르게 김일성이라는 지도자가 수십 년간 통치해왔고, 권력을 자신의 아들에게 세습까지 했다. 따라서 북한사를 정리하다 보면 김일성에 대한 내용은 필연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롭고 재밌게 읽은 파트는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 파트였다. 사실 국내에 출판 된 책들 중에서 김일성의 항일 투쟁에 대해 알 수 있는 책은 거의 없다. 있다 하더라도 1992년 창비 출판사에서 출판 된 책 외에는 찾기 힘든 듯하다. 그리고 북한에서 출간했다던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회고록이라 하기엔 신화와 과장이 너무나도 많은 책이다. 북한의 체제를 너무나도 추종하여 북한 찬양 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세기와 더불어>를 극찬하지만,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어느 정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그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북맹은 좌우할거 없이 존재한다. 한쪽은 메카시즘적인 관점을 들이대며 무작정 북한을 부정적으로 보려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이상한 논리까지 만들어 가며 “현 대통령이 적화통일을 원한다.”라는 말인지 방구인지 구분이 가지 않은 소리를 해대고 있다. 다른 한쪽은 북한을 너무나도 추종하여 “조선의 군사력은 미제를 압도한다, 조선의 핵무기는 미제를 초월한다.”와 같은 판타지 소설과 같은 얘기를 거리낌 없이 해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선 양극단의 주장을 배척한 뒤 이성을 가지고 북한을 바라봐야 한다.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선 북한에 대한 역사지식은 필수일 것이다. 평소 북한문제에 대해 관심이 매우 많은 나는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를 읽었다. 아주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이 책의 내용 자체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느끼는 일반 독자들이 있을 것이라 본다. 오히려 독자들은 정보로 가득한, 건조한 문장에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의 내용이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루끼 교수는 학자로서의 도리를 지키며 이 책을 썻다. 어느 한 사건을 정치적인 입장에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팩트와 자료를 통해서 최대한 팩트를 나열하는 쪽으로 책을 썼다. 제목 달기도 전혀 문학적이거나 현학적이지 않고, 책에 사실만 담담하게 담아냈다. 북한 현대사라는 주제를 가지고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그리고 짧고 간략하게 썼다는 점에서 이 책은 매우 호평 받을 만 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하자면 이 책의 저자를 가지고 종북좌파취급하는 일부세력들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색안경을 끼고, 자신들만의 잣대를 가지고 자신들과 생각이 조금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북한사를 연구해온 하루끼 교수를 종북좌파 취급하는 그들이야 말로 편향성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말 북한사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책을 읽었다. 남북관계가 더 좋아진다면 이와 같은 책들이 더 자유롭게 나올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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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하루키는 2018-07-24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실제 김성주가 참여했는지 여부도 확실하지않는 보천보를 봉오동대첩마냥 극찬한 좌빨갱이인데 신뢰를 보내니 김남기도 좌빨성향이 강한가보군 그리고 부마폭동은 이미 진압했떤게 역사적팩트임 신문에도 나와있음

NamGiKim 2018-07-24 17:25   좋아요 0 | URL
넌 내글을 읽긴 한거냐? 난 봉오동과 같은 대규모의 전투가 아니라고 했음. 이 멍청이는 독해력도 떨어지내.

NamGiKim 2018-07-24 17:31   좋아요 0 | URL
에라잇 이 빠가야로야. 내가 쓴거 인용하마

˝사실 보천보 전투는 북한에 의해 과장된 부분이 많다. 북한의 자료는 사실상 소설에 가까울 정도이긴 하다. 1937 6월 김일성의 부대가 보천보를 습격했을 때 그들이 주재소에서 사살했던 것은 오발로 죽은 일본인 요리사 한명과 2살짜리 유아였다. 그러나 습격하고 난 뒤 일본군 경찰과 군인이 김일성 부대를 추격했는데 추격하는 과정에서 일본군 경찰 및 군인이 7명 이상이 죽고 14명이 부상당했다. 븍한의 과장된 주장을 떠나서 보천보 전투는 당시 대대적으로 이슈가 됐던 것만은 사실이다.˝

라고 한게 김일성 찬양이냐 거 참 웃기는 놈일세.ㅋㅋㅋㅋㅋㄱ 논리도 독해력도 매너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NamGiKim 2018-07-24 17:32   좋아요 0 | URL
너부터 공부하고 와라 무논리로 아무말 대잔치나 하지 말고^-^

NamGiKim 2018-07-24 20:13   좋아요 0 | URL
그리고 내가 가끔 안읽은 책 디스할때, 익명으로 책 안읽으면서 쓴다 뭐라 씨부리는데 당신 부터 책 읽어라. 다는 댓글 마다 조낸 유치한 수준이 다 보이네. 내가 보기엔 책 안읽은 티를 내는건 당신인듯 한데?ㅋㅋㅋ 그리고 나 스스로 좌빨이라 생각함. 그래서 뭐 어쩔건데? 면대면으로 만나면 암말도 못하며 사는 놈이 내가 쓰는 서평에 꼭 딴지를 걸지.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