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 뉴라이트의 위험한 역사 인식에 맞닥뜨려 오늘, 대한민국을 돌아보다!
역사교육연대회의, 김종훈 외 지음 / 서해문집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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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록위마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진시황의 아들 호해가 환관 조고와 짜고 자기 형 부소를 죽였다.그렇게 황제의 자리를 탈취한 호해인지라 항상 정당성의 문제를 안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호해를 황제로 올려 놓은 조고의 힘이 세어질 수밖에. 환관 조고의 힘이 강해지다 어느날 호해를 능가하게 된다. 자기의 권위를 과시하고 싶었던 조고인지라 하루는 꾀를 내어 사슴 한 마리를 가져다가 놓고 무엇이냐고 호해에게 물었다. 호해는 당연히 사슴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조고가 이번엔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조고의 힘을 두려워한 신하들은 그것이 말이라고 대답하였다. 정당성을 잃어버린 황제의 권력의 덧없음과,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진실을 호도하는 조고와 살기 위해 진실에 눈감아야 하는 신하들의 비겁한 행동을 바라보면서 어지 그리 오늘과 같은지 모르겠다. 이래서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이 과연 어디에서부터 탄생했는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박정희, 김영삼 대통령 모두 정당성을 획득하였던가? 국민의 소리를 들어가면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던 사람들이었는가? 당시에는 그랬는지 몰라도 세월이 지나고 그들의 권력이 지고난 다음 후세의 평가는 어더한가? 정당성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아닌가? 자기의 영달을 위하여 조국의 분단마저 우습게 생각했던 이승만! 말해 무엇하랴. 일본 만주군 출신인 박정희! 신군부 세력인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을 위해 국민의 염원마저 버리고 노태우와 손을 잡은 김영삼! 과연 그들의 정당성은 어디에 있는가? 일부 영남 인사들, 일부 반공주의자들, 일부 극우파에서 그들의 정당성을 찾지 않았는가? 그들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본주의를 자유주의라 말하면서 호도하고, 북한의 위협을 들먹이면서 반공을 외치던 것이 그들의 권력을 정당화시켜 주던 제도가 아니었던가? 더이상 그 약발이 먹히지 않았을 때, 김대중, 노태우 정부가 들어섰던 것이 아니던가? 권력의 정당성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초등학교 사회만 제대로 들었더오 알게 되는 아주 기초적인 사실을 무시한 결과가 아니던가? 

  인생 무상이라고 했던가? 김대중, 노무현의 같은 실책은 결국 이번에 이명박 정부로 권력을 넘겨 주게 되었다. 이제 다시한번 예전에 먹혔던 마스터 카드를 꺼내기 시작하였다. 소위 말하는 지록위마의 방법 말이다. 대체 에너지 개발이 빠진 하천 정비와 건설 산업 육성을 녹생산업이라고 부른다. 대책없는 민영화를 경영합리화라고 말한다. 임원들의 연봉은 그대로 두고 신입사원들의 연봉을 삭감하여 신규채용을 늘리는 것은 일자리 나누기, 고통분담이라고 한다. 이정도면 지록위마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하는지, 화룡점정으로교과서 시비가 붙었다. 

  교과서 포럼의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가 그것이다. 지금까지 역사에 대한 반성을 좌파라고 몰아붙이면서 자기들이 답이라고 한다. 대안이 아니라 대체라고 말하면서 여전히 자신들은 여러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한다. 과연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사슴이라고 해야하는가, 아니면 말이라고 해야하는가? 권력에 아부하기 위하여 중심을 잃은 자칭 역사학자들과 보수 언론의 띄우기는 차치하고 대한 상공 회의소의 주장은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들이 역사에 대하여 무얼 그리 많이 아는지 검인정을 거친 교과서를 난도질하고 고치라고 한단 말인가? 여의도와 청와대의 조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에게 사슴을 강요한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지록위마라는 말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들은 신하들의 소시민적인 태도때문이 아니던가? 아닌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당장 내게 피해가 오지 않아야 한다고 진실을 부정하고 거짓을 말했기 때문인가? 단 한사람만이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사슴이라고 했다면 사슴이라는 진실을 묻히지 않았을 것이다. 목숨걸고 진실을 말할 수 잇는 단 한사람이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참 애쓴다는 생각을 해봤다. 사슴을 말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고 생각했다. 저런다고 사슴이 말이 되는가 생각했다. 그런데 잘하면 말이 될 것 같다. 사회적으로 암묵적인 동의를 한다면, 우리 모두가 소시민적으로 대응한다면 사슴이 말이 될 것 같다. 금성교과서 사태를 바라보면서 이미 한번 경험하지 않았던가?  

  목숨 걸 한 사람, 진실을 위해서 타협하지 않을 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던 가운데 한 이름을 발견했다. 나도 역사학자가 아닌지라 감정적으로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사 교육의 현장에서 역사를 가르치시던 그분들이 성명서를 낸 것이다. 자랑스러운 그 이름을 보다가 한 이름 앞에 멈추어 섰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찾앗다고 하는 것이 맞다. 고등학교때 나를 가르치셨던 역사 선생님의 이름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찾아 냈다. 내게 역사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고 한때 나로 하여금 역사학도의 길을 가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도록 만들었던 그 분의 이름을 찾았다. 비록 내가 역사학도가 되지는 않앗지만 역사에 관심을 갖고 이 사회에 대하여 눈을 부릅뜨고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선생님의 이름이 거기 있었다. 이 이름이 내게 많은 힘을 주었다. 그분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 그리고 그분에게 영향을 받은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사슴이 결코 말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힘이 났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그분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이다. 그분의 그 작은 이름이 그 위치를 고수할 수있도록 지지하는 것이다. 힘을 보태는 것이다. 나도 사슴을 말이라고 하지 않도록 결단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이 나에게 던져준 큰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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