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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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자가 본 길가메시 서사시


  수메르 신화에 신이 되고 싶었던 인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길가메시이다. 우르크라는 도시에 길가메시라는 왕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는 신의 지위와 권위마저도 위협하게 되었다. 그를 견제하기 위하여 여신 아루루는 엔키두라는 괴물을 보내지만 그는 치열한 싸움 끝에 길가메시와 친구가 되었다.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것처럼 엔키두를 친구로 얻은 길가메시는 더욱 신들을 위협하게 된다. 하늘의 황소를 죽인 엔키두는 그로 인하여 벌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를 목격한 길가메시는 죽음지 않는 비결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가 홍수로부터 살아남은 우트나피시팀을 만나고 불로초를 얻지만 그 불로초는 뱀이 먹어 버린다. 실의에 차서 고향으로 돌아온 길가메시는 남은 생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실존을 극복하고 신이 되고 싶었던 길가메시는 그렇게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신화를 통하여 고대인들은 인간의 존재의 한계와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보듯이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극복하고 싶은 한계이지만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이기도 하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이 아니라는 확실한 징표이다. 마치 에덴 동산의 중앙에 있었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처럼 말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라는 책을 통하여 인간의 한계인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 신의 영역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이 호모 사피엔스가 추구하는 목표이자, 언젠가는 이룰 수 있는 극복 가능한 위기로 본다. 길가메시 서사시와 하라리가 죽음이라는 같은 소재를 이야기하지만 내리는 결론은 정반대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이 책이 말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농업혁명 이전에 인지혁명이 있었다.


  앨빈 토플러는 제 3의 물결이라는 책을 통하여 농업 혁명과 산업혁명, 그리고 정보 통신의 혁명으로 인류의 역사를 구분하였다. 이후 많은 학자들은 토플러의 견해를 따랐고, 농업은 인류가 최초로 일으킨 혁명이자, 위대한 문명을 만들어낸 시발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라리는 다른 관점을 취한다. 농업 혁명 이전에 인지혁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 1의 물결은 인지혁명이고, 그 다음이 농업혁명, 그 다음이 산업혁명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정보통신혁명은 제 4의 혁명이 되던지, 아니면 산업혁명의 연장선에 있는 기술혁명이 된다. 또한 인류 문화의 출발점이자 전환점이라고 이야기하는 농업혁명은 하라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류의 운명을 불행하게 결정지은 패착이며, 돌이킬 수 없는 혁명이라고 말한다.

 

  하라리의 입장에서 가장 신선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농업혁명을 가능하게 만든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다가 호모 사피엔스는 협동하는 존재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렇게 협동이 가능했던 것은 인지혁명을 통하여 대화를 발명했다는 것이다. 물론 말이라는 것이 호모 사피엔스의 것만은 아니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가지는 말의 특징은 가상의 존재를 대상화할 수 있는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호모 사피엔스는 상상력을 개념화할 수 있는 특이한 말을 발명했고, 이를 통하여 여러 가지 신화와 가치관을 발명하고, 이를 기반으로 협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협동은 호모 사피엔스들이 모여 살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었고, 이렇게 모여 살게 되면서 이들은 농업혁명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호모 사피엔스의 협동은 생태계에 엄청난 변화와 재앙을 불러 왔고, 세계는 대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들에게서 인류가 다시 시작되었던 것처럼 호모 사피엔스를 정점으로 새롭게 재편되기 시작하였다.

 

  기록을 발명한 농업혁명


  농업혁명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인류의 삶을 행복하고 풍요롭게 만들지 않았다. 하라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농업혁명은 오히려 인류로 하여금 더 많은 질병과 근심, 그리고 기아 상태에 놓이게 만들었다. 농업혁명을 인류에게 풍요를 가져온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극이다. 농업혁명은 우연한 기회에 호모 사피엔스가 기를 수 있는 식물과 동물을 발견하고 선별하며 개량하면서 이루어졌다. 수렵 채집과는 다른 농업은 더 많은 잉여 생산물을 가져다 주었고 그것은 호모 사피엔스의 개체수 증가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뒤집어 놓고 생각하면 호모 사피엔스가 농작물과 가축을 길들인 것이 아니라 농작물과 가축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여 자기들의 DNA를 안정적으로 전파하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글허다면 농업혁명이 호모 사피엔스에게 가져다 준 이점이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기록의 발명이다. 기록의 발명은 공동체를 더 커지게 만들었고, 호모 사피엔스를 가상의 존재인 신들과 국가, 왕에게 귀속시켰다. 이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보다 강력한 권력을 가진 공동체를 허락하였다.

 

  신으로의 가능성을 열어준 과학혁명


  호모 사피엔스가 축적한 힘과 능력, 재화는 과학혁명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혁명은 호모 사피엔스를 더 커다란 공동체로 재구성하였으며, 하라리에 의하면 이것은 호모 사피엔스가 극복해야할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마치 신의 지위를 위협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처럼 호모 사피엔스는 자신들에게 있는 힘을 가지고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다. 질병과 노화를 인류가 받아들여야할 운명이 아니라 극복해야할 위기로 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으며, 그렇기 머지않은 미래에 극복될 것으로 본다. 즉 호모 사피엔스는 과학혁명을 통하여 불멸의 문턱에서 좌절하였던 길가메시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라리는 극단적인 낙관주의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인류의 가능성에 대해서 낙관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결국은 기술이, 과학혁명이 호모 사피엔스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것이 하라리의 입장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그의 입장을 기억한다면 호모 데우스라는 모순적인 용어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을 던져 보고자 한다. 과연 호모 사피엔스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설령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인가? 만일 호모 사피엔스가 죽음을 극복하고 자신의 시간을 무한정 늘려 놓는다면 그 시간은 호모 사피엔스에게 어떤 의미가 될 것인가? 끝이 있고,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시간이 인류에게 소중한 것이 아닐까? 또한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치자. 모든 사람이 그러한 가능성을 손에 쥐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진 재화의 유무와 크기에 따라서 그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달라질 것인데 그렇다면 영화 인 타임의 현실화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여전히 이야기가 되는 빈익빈 부익부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문학치고는 글이 쉽게 읽힌다는 점에서는 하라리가 왜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지 깨닫게 해 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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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aint236 > 너무 뻔한 그대들에게

이 놈의 행동 패턴은 여전하고
바뀐 것도 밝혀진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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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aint236 > 5년 후 한국 교회는 어디 있을 것인가?

앞으로 10년 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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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간다 -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선전 전략
에드워드 버네이스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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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언론에서 난리가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여론을 조작하려고 한다. 황교안의 재보선 선거 운동과 결과를 두고 이는 민심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한다. 민주당에서 한석도 차지하지 못한 것을 말하면서 이는 문재인 정권에 대한 민심의 심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단 두 석을 놓고 벌이는 재보선, 그것도 한 자리는 자유한국당 텃밭인 보성통영 선거구이다. 그래서 황교안도 창원성산에 내려가서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졌다면 이것은 황교안의 리더십과 확장력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는 이것을 황교안의 승리이자 리더십이 통했다고 말한다. 반대로 말해보자. 황교안이 그렇게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졌다는 것에 집중한다면 이는 황교안의 리더십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쪽으로 해석을 해도 무방한 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 떠들어 대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 다른 하나를 보자. 대한항공의 조회장이 대표이사 재임에서 떨어지고, 이후 오비이락이랄까 그가 죽은 사건을 언론은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그들은 정부가 적폐청산을 한다는 이유로 그를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렇게 병이 깊은 사람이 대표이사에 재임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병이 깊었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요양하는 것이 옳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이런 합리적인 판단을 뒤로 하고 언론들이 왜 문재인 정부가 그를 죽였다고 말하는가? 무엇인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이러한 것을 프로파간다라고 한다. 광고가 상품을 팔기 위한 행위를 말한다면 프로파간다는 조금 더 정치적인 의미가 더 깊다고 할 수 있다. 그 안에는 합리적인 의심도 필요 없고 그저 떠들어 대기만 하면 된다. 계속 말하면 사람들은 거짓도 진실로 받아들인다는 괴벨스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프로파가다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이렇게 프로파간다에 속지 않기 위해서, 거기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합리적인 의심!


  상식!


  이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정치적인 구호를, 신문 기사를 상식이나 이성이 아니라 감성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다 보니 너무나 쉽게 기사에 휘둘린다. 이렇게 휘둘리다보면 진실은 사라지고, 주장만 남게 된다. 언론은 주장이 아니라 진실에 기반해야 한다. 이성으로 가지고 자기의 주장을 펴야 하는데 입장과 감정을 가지고 기사를 쓰고, 그렇게 씌여진 기사를 소비한다. 대중 심리를 조작하는 기술을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다. 합리적인 의심을 가지고 기사를 대하는 태도만 있음으면 된다. 그런데 이것이 참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게으름을 떨쳐 버리고, 부지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휘둘린다. 기사 하나 보는데에도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우리가 불쌍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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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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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의 상징은 붉은 동백꽃이다. 제주도 동백꽃을 치면 4월에는 꼭 놓치지 말아야할 풍경, 여행지라는 말이 가득하다. 그렇지만 4.3의 상징이 붉은 동백꽃이 된 이유를 알면 그 꽃이 그저 아름답지만은 않다. 오히려 가슴이 저릴 정도로 아프다.


  동백꽃은 질때 벗꽃처럼 흩날리지 않는다. 툭툭 소리를 내는듯이 통으로 떨어진다. 붉은 동백꽃이 통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어느 재일 문학가는 4.3이 생각이 나서 차마 볼 수 없다고 한다. 그 꽃을 바라보면서 4.3 당시 피해자들의 목이 떨어지던 모습이 생각이 나서 그런단다. 끔찍하다 못해 섬뜩한 말이다. 어째서 그렇게 처참한 일들이 제주도에서 일어난 것일까?


  여러가지 말들이 있다. 남로당의 지원을 받아서 빨갱이들이 일으킨 일이라고 아직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육지 것들이 들어가서 판을 쳤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서북청년단들의 만행은 유명하다. 장모와 사위에게 사람들 앞에서 성관계를 가지라고 협박하고 죽이는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런데 서북청년단들이 당시 영락교회 청년들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나도 기독교인이지만 이 대목에서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데, 아직도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다고 하늘을 가릴 수 없겠지만 말이다.


  4.3을 비롯하여 한국 근현대사는 많은 부침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부침의 대부분은 우리 민족에 의해서 주동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세력들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다. 일제에 의해서, 미국에 의해서, 소련에 의해서, 자본주의에 의해서, 공산주의에 의해서... 외부에 들어온 세력들에 의해서 날나라가 토막이 나고, 그들은 어느새 우리를 지배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만들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이북에 있던 한 곳에서 일어났던 일들. 기독교와 공산주의, 지주와 소작인 등 평화롭게 어울리던 마을이 토막이 났다. 친구가 친구의 가족을 학살하고, 이에 대한 복수로 다시 그들을 학살하고. 등장인물의 마음에 깊이 남겨진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치유되지 않는다. 마음 깊은 속에 자리하여 서로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외면하고. 그러다가 죽음을 통해서 화해의 실마리가 보인다. 지금까지 서로를 위해서 가지고 있었던 상처 받음과 상처 줌이 한 자리에 모여서 대화를 나누면서 풀려간다.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려서 누가 잘못했느냐를 따지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그들고 피해자이고, 나도 피해자이다라는 공감대가 형성이 되면서 갈라져 있던 인연의 물줄기가 다시 하나로 합쳐져서 저승의 강으로 흘러간다. 어린 시절 함께 어울렸던 시절을 추억하면서 조금씩 거리를 좁혀간다. 그렇게도 떠나고 싶었던 그 땅, 외부 세력이 들어와서 지배했던 그 땅, 손님이 주인 행세를 했던 그 땅에 조그마한 유골이나마 묻히는 일은 우리의 마음에 작은 위안을 건네준다. 


  전체적으로는 손에서 놓기 힘들 정도로 잘 쓰인 소설이고, 우리에게 던지는 감동도 만만치 않다. 다만 요섭에게 갑자기 등장했던 샤먼은 흐름을 끊어버리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유골을 담아갈 뼈를 건네주는 역할을 하는 인물의 등장은 굳이 그러한 설정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갑자기 등장한 신비한 인물은 소설의 장르를 판타지로 착각하게 만드는 쓸데없는 효과를 발휘했다. 이후로 이 인물이 어떤 역할을 할지 관심을 가져봤지만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하는 것을 보면서 이건 뭐지라는 생각을 했다. 이 부분을 감안하고 읽으면 이 책은 소설이 가지는 묵직한 힘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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