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검사와 스폰서, 묻어버린 진실
정용재.정희상.구영식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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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지


  스폰서: 1. 행사 운동 경기, 자선 사업 따위 기부금 내어 후원하는 사람.

             2. [방송] 전파 매체,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에서 프로그램 제공하는 광고주.

 

  포털 사이트에서 스폰서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위와 같은 설명이 나온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인가부터 여기에 한가지 뜻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용법이 아닌 암암리에 사용되는 은어로 "물주"를 뜻한다. 물주라는 말이 뭐가 잘못되어서 숨겨서 사용해야 하는가? 돈을 대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받기 때문이다. 그것도 불법적으로 말이다. 어떤 사람은 몸, 즉 성을 받는다. 어떤 사람은 돈을 받는다. 어떤 사람은 향응을 제공받는다. 그리고 그 대가로 불법적인 일체의 행위들을 해 준다.

 

  법을 집행하는 검사라면 이런 불법적인 커넥션을 색출해 내서 처벌해야 하지만 도저히 그럴 계제가 아니다. 그들도 스폰서를 두면서 불법적인 관계를 맺어 왔다는 사실이 온 천하에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저질스럽고, 화끈하게 놀았다는 사실과 덧붙여서 말이다. 책을 읽다보면 그들의 행위가 한심스러워서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온다. "이건 뭐 동물의 왕국도 아니고..." 견찰, 떡검, 섹검! 검찰을 조롱하는 말은 매우 다양하다. 벤츠 여검사, 그랜저 검사, 샤넬 여검사 등 그들이 커버하는 범위도 점점 넓어진다. 그러면서도 일말의 거리낌도, 미안함도, 그렇다고 조폭만큼의 의리도 없다. 그냥 즐기면 된다, 검사니까 이정도 쯤이야, 주는걸 안받으면 병신 같은 생각을 하나 보다.

 

  검사와 스폰서라는 책은 그동안 말로만 떠돌았던 검사에 대한 불측한 소문들이 낭설이 아니라 사실이었음을 드러내 주는 책이다. PD수첩을 통해 몇번이나 보도 되었지만 결국은 제 식구 감싸기로 끝나버린 검찰의 수사와 특검의 수사에 반발하여 진실을 밝히겠다는 일념 하나로 기록한 책이란다. 그래서인지 상세하게 실명을 거론하면서 검찰과의 불법적인 커넥션의 실체를 하나하나 자세하게 까발린다. 여기에 이름이 올라온 검사들 꽤나 곤혹스럽겠다는 생각을 해봤지만 쓸데 없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오히려 실체를 까발린 사람만 나쁜 놈이 되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조용히 잊혀져 갔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다는 것은 그가 고발한 검찰들로부터 확실한 보복을 당한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공익에 유익하다면 내부고발자를 보호해주는 법적인 장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김용철 변호사도 그렇고, 이 책의 저자도 그렇고 감히 검찰과 맞섰지만 그들은 꼼짝도 않고 괜시리 고발자들만 바보가 되었다. 계속 이런 상태에 머무른다면 검찰의 모습 또한 구태에 머물 뿐이요, 검찰 개혁은 말의 잔치가 될 뿐이다.

 

  이 책에 대해서 평가하자면 검찰과 스폰서라는 불법적인 관행을 폭로했다는 의의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시종일관 어린 나이에 사업을 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는 자기 변명을 반복적으로 듣다보면 짜증이 난다. 검사들의 불법적인 행위도 왜 문제가 되는가라고 깊이있게 묻기보다는 의리없는 놈으로 비춰질 가능성도 농후하다. 쉽게 읽히는 것,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것, 기록 보관용 정도가 아니라면 구입하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 그냥 PD수첩 영상을 찾아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묻으려면 제대로 묻어야지 어설프게 묻으니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다. 제대로 묻을 자신이 없으면 제대로 파헤쳐야지 언발에 오줌누기 식으로 대처하니 비웃음을 사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확실하게 묻어서 차라리 몰라서 속이라도 편하게 하든지, 아니면 제대로 파헤쳐서 법의 공정함과 검찰의 자정 능력을 보여줌으로 국민들의 신뢰를 받든지! 개인적으로 후자였으면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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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 B급 좌파 김규항이 말하는 진보와 영성
김규항.지승호 지음 / 알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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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전에 써클실에 그려져 있던 벽화가 있다.(개인적으로 동아리라는 말이 잘 안나온다. 그래서 편하게 써클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예전에 한번 서평을 쓰면서 인용했던 기억이 있는데 정확하게 어디에다 사용했는지 잘 몰라서 대충 넘어간다. 아이들이 굴렁쇠를 굴리고 있는 그림 밑에 "멈추면 서는 것이 아니라 넘어집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스무살 대학 1학년이던 시절 고향 선배들이 밥 한번 사주고, 써클에 놀러 오라고 했다. 그렇게 찾아간 지하실에 위치했던 써클실의 분위기는 나로 하여금 절대로 이곳과 친해지면 안되겠다라는 생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런 나의 생각을 돌려 놓은 것이 있으니 바로 벽에 그려져 있던 그림이다. "멈추면 서는 것이 아니라 넘어집니다."라는 글귀는 내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고, 이 써클에는 무엇인가 있다는 기대감을 주었다. 그렇게 시작한 써클에서 매일 선배들에게 아메바 취급을 당하면서 변유가 어떻고, 사유가 어떻고, 사구체가 어떻고 등등등... 그렇게 15년이 지났다. 그 당시 선배들의 소식이 들릴 때마다 씁쓸함을 감출 수 없던 적이 종종 있었다. 어떤 선배들은 배움과는 상관없는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어떤 선배들은 김문수의 변신과 맞먹는 변신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씁쓸한 기억은 이런 것이다.

 

  써클의 대선배와 같은 분이 있었다. 86학번이니 대선배이다. 나랑 11살 차이니 거의 우러러봐야 하는 대선배다. 그 선배 부인이 89학번이다. 87학번 선배와 고향이 같았고, 한때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었기 때문에 종종 아이들을 대신 봐주면서 보모 노릇도 했다. 형, 누나로 부르면서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했다. 군 제대후 2년 쯤 지나서 전화 통화를 하다가 누나에게 참 씁쓸한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촛불 집회가 한참이었는데 형이 뉴스를 통해 그 장면을 접하고 "우리나라는 종북좌파가 넘쳐나서 큰 일이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설마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후배들에게 변유, 사유, 맑시즘을 공부시키는 써클에서 촛불집회를 보면서 좌파 운운하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나도 깜작 놀라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즉각 반문했지만 형의 생각은 확고했단다. 그 이후 여러가지 일을 겪으면서 둘은 이혼을 했고, 형과의 연락은 끊긴 상황이다. 연락처를 안다고 해도 선뜻 연락하기 힘든 상황이기에 굳이 연락처를 알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지는 않다.

 

  한때는 실망감으로, 한때는 씁쓸함으로, 한때는 배신감으로 다가왔던 형의 변신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다. 왜 그랬을까? 원래 보수적인 사람이라서? 그 사이에 많은 것을 가져서? 생가이 갑자기 확 바뀌어서? 일정 부분 맞는 대답이기는 하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그 형이 그렇게 급작스럽게 바뀌게 된 것은 멈추어 섰기 때문이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달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해 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이를 들면서 자연스럽게 보수주의가 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꼴통 보수가 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사고를 유연화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인 색깔이 약간 다를 뿐이지 행동에 있어서는 똑같이 독선적인 모습이 된다. 약간 다른 정치적인 색도 진보냐 보수냐를 나눌 정도가 아니라 급진이야, 약간 급진이냐, 극우냐 우냐를 나눌 정도로 차이가 거의 없다. 그것을 가지고 좌냐 우냐, 진보냐 보수냐 운운하는 것은 개미가 웃다가 허리 부러질 이야기이다.

 

  지승호가 김규항을 인터뷰했다. 개인적으로 이런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왠지 그냥 날로 먹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사서 읽은 이유는 김규항과 지승호라는 인터뷰이와 인터뷰어 때문이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고, 읽지도 않았을 책인데 여기에 더하여 50% 세일까지 해주시는 알라딘의 따뜻한 배려에 얼른 집어 오게 되었다.

 

  김규항은 참 독특한 사람이다.  대한민국 사상지도에서 가장 좌편에 위치한다는 그이지만 그의 생각이 그렇게 폭력적이지도 않고 위험하지도 않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가장 좌편에 위치한 사람일까 생각이 들정도이다. 그런 그를 가장 좌편으로 밀어 붙인 이유는 그가 제시하는 좌와 우를 가르는 기준이 신자유주의이기 때문인 것 같다. 민주당을 보면서, 열린우리당을 보면서 좌파라고 부르는 한나라당의 공격과 스스로 진보라 부르는 민주당의 모습을 보면서 김규항은 "웃시고 자빠지네"라는 독설을 날린다. 물론 직접적으로 이런 워딩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뉘앙스는 충분하다. 그의 기준에 의하면 노무현도, 김대중도 좌일 수 없고, 진보일 수 없다. 시장 자유주의자일 뿐이지 진보나 좌파가 될 수 없다는 그의 생각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예전부터 노무현 대통령, 민주당을 보면서 진보라 부르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해 왔던 차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만이 아니구나라는 위안을 얻게 된 것도 이 책이 주는 하나의 위안거리다.

 

  김규항의 또 다른 독특함은 그의 좌파관에 달려 있다. 그는 특이하게 한신대학교 출신이다. 한신대학교 출신이라는 것이 특이한 것이 아니라 좌파 진영에 남아서 운동을 하면서도 한신대학교라는 타이틀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흔히 좌파 운동과 진보 운동은 기독교 신앙과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정부 들어 이런 생각은 더 심해졌다.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 낸다고 할지라도 일단은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기독교에 대한 좌파의 태도인데 김규항은 이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자신은 기독교 신앙이 좌파 운동에 큰 에너지를 준다고 말한다. 자기를 끊임없이 성찰하지 않는 진보는 변질되는데 자기에 기독교 신앙은 자기를 성찰하게 만든단다. "하루에 30분도 기도하지 않는 혁명가가 만드는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을 도외시하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제 심리적 평온뿐"이라는 김규항의 말은 우리가 곱씹어 봐야할 말이다.

 

  요즘 통진당 문제가 시들해졌다. 문제가 해결되어서 시들한 것이 아니라,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질질끌고,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대를 접어서 시들한 것이다. 이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이석기 의원과 김재연 의원이 있다. 한 사람은 문방위에, 다른 한 사람은 기재위에 배정이 되었다. 비례대표 선출 상의 부정 때문에 통진당 내부에 문제가 있었고, 폭력 사태까지 발생했다. 비례대표 전원이 사퇴하자는 의견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귀를 막고 있다. "개는 짖어라 기차는 간다"는 식으로 비례 대표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이러는 와중에 비례대표 1번 윤금순 의원이 사퇴하고 서기호 디례대표 후보가 의원직을 승계했다. 기쁘지만은 않다는 그의 인터뷰에서 복잡다단한 오늘의 현실이 읽힌다.

 

  지난 선거에서 진보신당을 지지함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실제적인 이유를 들어 통합진보당을 찍은 내가 우습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고민을 했던 것이고, 최후의 최후까지 진보신당과 통합진보당 사이에서 갈등을 했던 것일까? 고작 이런 상황을 보기 위해서, 고작 이런 사람들을 국회에 보내기 위해서 그렇게 고민했던가 생각하니 우습다. 이석기 의원과 김재연 의원을 보면서 예전에 형에게 느꼈던 씁쓸함을 또 맛본다. 486이니, 운동권이니, 민주화 운동이니 말은 많이 했지만 결국 그들도 자기 성찰에 실패한 것이 아닐까? 그 결과가 통진당 사태가 아닌가?

 

  김규항이 말하는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라는 말은 어느 지점을 직어 놓고 거기까지라는 말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서 자기들이 처한 포지션이 바뀌게 되니 진보를 꿈꾸고, 좌파가 되기를 원한다면 가장 아래쪽, 즉 가장 낮은 계급의 사람들이 처한 자리까지, 그리고 가장 왼쪽 즉 가장 자본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리까지 나아가려는 용기와 결단과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용기와 결단과 자기 성찰이 사라지는 순간 그 사람은 과거의 삶이 어떠했든지 간에 보수로, 그리고 골통 보수로 휩쓸려 내려가게 될 것이다. 물고기가 항상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그리고 필사적으로 헤엄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이 땅에 진보의 미래는 없고, 좌의 미래는 없다. 오른 날개로만 파닥거리다 지쳐 떨어지게 될 미래만이 우리 앞에 놓여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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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리 2012-07-11 0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아요 x10000 누르고싶어요ㅋㅋㅋ

(이글과 맞닿아있는)저의 생각인데요, 학교다닐때 할수있는만큼 극단까지 가볼껄 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완전 라디컬하게ㅋㅋㅋ그땐 뭐가 무서워서 몸을 사렸는지..-_- 학교에 있을때, 학생 신분일때 양쪽의 끝을 가볼껄 하는 생각이 드네요. 만약 지금그때로 돌아간다면 더 쎄게, 차라리 한신대에 가겠다 이런생각도 들고ㅋㅋ 뭐 이런얘기할때마다 주변에선 아직 늦지않았다고 말씀하시지만요ㅋㅋ

 
방황해도 괜찮아 - 법륜 스님의 청춘 멘토링
법륜 지음, 박승순 그림 / 지식채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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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를 겨냥한 책이 인기를 끈다. 그런데 그런 책들이 대부분 괜찮다는 내용들이다. "방황해도 괜찮아", "아프니까 청춘이다", "건투를 빈다", "내가 걸은만큼만 내 인생이다", "자기혁명" 등등. 괜찮다, 새롭게 도전해보라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청춘콘서트라는 청년 대상 힐링캠프가 유명세를 타고 있다. 안철수, 박경철, 법륜스님이 청춘콘서트를 통해 대중 스타로 새롭게 거듭난 사람들이다. 삭막한 세상 속에서 지치고 상한 청춘 남녀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위로해 주기 때문이다. 이 시대 청년들의 멘토를 뽑자면 빠지지 않을 사람이 세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딴지를 하나 걸어본다. 청년들을 위로하기 위한 책들에 붙어 있는 수식어들이 오히려 청년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아프니까 청춘이다? 오세훈 전 서울 시장은 이 말을 "아파야만 청춘이다"로 오해했다. 방황해도 괜찮아도 청년의 시기를 방황의 시기로 호도할 여지가 충분하다. 오세훈식 어법으로 방황해야만 청춘이다? 건투를 빈다에서는 청년은 목숨걸고 파이팅 하러 전쟁터로 나간다는 의미로, 나머지도 용기를 가지고 혁명을 하는 필사의 각오로 도전하고 깨지고, 또 도전하는 것이 당연한 청년의 삶으로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말이다. 중요한건 그들도 아프고 싶지 않고, 방황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녹록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 청년이기 때문에 더 많이 아프고, 청춘이기 때문에 더 심하게 방황한다. 그렇게 심하게 다치고 깨지고, 아파하는 녀석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야, 방황해도 괜찮아라는 말을 위로의 말이라고 건넬 수 있을까? 솔직하게 난 못하겠다.

 

  올해 초의 일이다. 한 녀석이 편입 시험에 실패를 했다. 작년에 이어 두번의 실패를 겪고 난 다음에 그 녀석은 소위 말하는 멘붕 상태에 빠졌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기에 올해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일이 이상하게 꼬이는 바람에 편입 재수에 실패한 것이다. 시험 결과가 나오고 난 다음에 부모님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막막해 하더라. 내가 가지고 있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가져다가 열심히 보더라. 곁에서 보기에도 꽤나 힘들어 보이기에 불러서 커피 한잔을 사주면서 "시험 결과가 어떻게 되었니? 삼수 확정이니?"라면서 약간은 장난스럽게 물어 봤다. 내가 무얼 묻고 싶어서 불렀는지 서로가 다 알고 있는 마당에 말을 빙빙 돌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결론은 꽤 힘들다는 말이다. 삼수를 하자니 싫고, 휴학한 학교로 돌아가자니 그것은 더 싫다고 한다. 차라리 외국으로 유학을 갈까, 부모님에게 어떻게 말해야할까 등등 온갖 고민거리들이 튀어나온다. 한참을 듣고 있는데 내가 더 눈물이 나더라. 도대체 이 땅의 청춘들의 삶이라는 것이 이다지도 험난한 것인가? 나는 이 녀석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 것인가? 이런저런 많은 말을 했던 것 같다. 무슨 말을 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한가지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은 나는 마지막까지도 이 녀석에게 "괜찮다!"라는 한 마디 말을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지치고 상한 청춘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괜찮다!"라는 한마디 말이 아니다. 그저 마주 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지치고 힘든 자기 마음을 토로할 수 있는 사람, 자기의 아픈 마음을 공감해 주고 함께 눈물을 글썽여줄 사람이 필요하다. 방황해도 괜찮다는 말, 청춘은 원래 아픈 거야, 혹은 아프면서 크는 거야라는 말은 아파할만큼 아파하다가 스스로 몸을 추스르고 일어설 때 그때 해줘도 늦지 않다. 용기를 준다고 방황해도 괜찮다는 말을 성급하게 꺼내는 것은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아파할 기회와 여유마저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닐까? 지금 실패가 결코 마지막이 아니라는 사실은, 실패를 통해서 배운다는 사실은 이 시대의 청춘들이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어른들의 간섭, 꼰대들의 기우가 아닐까? 청춘들에게 멘토와 꼰대는 한끗차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법륜 스님의 책! 참 좋은 말들이 많이 들어 있다. 인생에 있어서 귀한 깨우침을 주는 평범하지만 귀중한 진리들이 가득 들어 있다. 그렇지만 그 진리들이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꼰대의 강요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닌 내가 이 시대 청춘들의 멘토라고 불리는 법륜스님에게 꼰대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지만 아프고 지친 청춘들에게, 실패했다는 절망 속에서 힘들어 하는 청춘들에게 "점잖게 방황해도 괜찮아!"라는 말을 강요하는 것은 꼰대 짓이다. 여러 가지 경험이 많으시겠지만 불경스럽게도 꼰대 짓을 하시는 이유는 간접 경험이 가지는 한계일 것이다. 인간의 희노애락애욕오란 공부한다고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하튼 나는 그 녀석에게 차마 "괜찮다! 괜찮다!" 이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그저 함께 눈물을 글썽였을 뿐이다.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 그 녀석은 툭툭 털고 일어나 복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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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전쟁 - 종교에 미래는 있는가?
신재식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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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이야기 한토막

 

  한 무신론자 교수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무신론에 대해서 강의하기 위하여 칠판에 이렇게 적었다.

 

  "God is nowhre!"

 

  그러자 한 학생이 일어나서 칠판의 문장을 이렇게 바꾸었다.

 

  "God is now here!"

 

  종교과 과학의 차이를 잘 나타내주는 이야기이다. 같은 문장을 보고 누구는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다!"고 읽는가 하면 "하나님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고 읽는다. 서로 다른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을 바라보지만 다른 방식으로 바라본다는 말이다. 같은 자연 현상을 보면서도 과학은 종교에서 말하는 신비를 제거하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반면에 종교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면보다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신비를 노래한다. 한쪽에서는 논리의 문제에 집중하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의미의 문제에 천착한다. 어느 한쪽이 전적으로 옳고 다른 한쪽이 전적으로 그릇되었다든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제압해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의미의 문제와 논리의 문제는 기본 입장이 다른데 어느 한쪽을 완전히 제압한다는 것이 과연 말이나 되는가? 대화를 통하여 상대방을 이해하든지, 혹은 공존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실제로 과학과 종교가 관계를 맺는 방법 중에 가장 온건한 방식이 이런 방식이다.

 

  문제는 어느 한족이 다른 한쪽을 격멸해야할 바이러스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 발생한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의도하는 것처럼 과학이 종교를 박멸하려고 하던지 혹은 교과서 개정추진 위원회에서 하듯이 진화론을 필생의 원수로 대하게 되는 순간 종교는 물론이고 과학고 논리적인 자기 모순과 독선에 빠지게 된다. 과학이 종교에 반하여 독선에 빠지게 되어 과학 만능주의로 흐른다면 과학이 새로운 종교로 대두되는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감정이나 정신 작용도 그저 호르몬에 의한 화학 반응으로 전락하게 된다. 반대로 종교가 과학에 반하여 독선으로 흐른다면 사회는 미신의 시대로 접어들게 될 것이며 삶의 기반이 되는 물질문명은 한치의 발전도 하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퇴보하게 될 것이다. 과학이든 종교든 독선으로 흐르게 될 때 빅브라더가 등장하게 될 확률은 매우 높아지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과학과 종교는 적극적으로는 반목의 길을, 소극적으로는 상대방에 대해 무신경한 태도로 일관해왔다. 그렇지만 인간 존재와 생명까지도 과학의 소재로 삼으려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종교와 과학의 대립과 갈등은 시작되었고, 점점 극단을 치닫고 있다. 과학은 종교의 신비를 미신으로, 종교는 과학을 브레이크가 고장난 폭주 기관차로 공격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지만 더 비극적인 것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과 갈등이 이 페이스로 간다면 결코 끝나지 않을 neverending story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전개는 인류 발전의 동력을 상당히 갉아 먹을 것임이 분명하기에 과학과 종교 양쪽 모두에게 나아가 인류에게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꽤 흥미로운 책이다. 종교계에 몸을 담고 있는 현직 목사와 과거 기독교인이었느나 종교인(특정 종교를 신봉하지 않고 모든 종교에 포용적인 종교성을 지닌 사람)으로 변신한 종교학자, 과거 기독교인이었으나 철저한 무신론자가 된 과학도! 목사와 종교학자와 무신론 과학도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이 책이 과연 종교에 대해서, 그리고 과학에 대해서 어떤 대화를 나누고 어떠한 결론을 내릴 것인가 궁금즘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들은 상대방에 대해서 인격적으로 존중하면서,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서 진지한 토론을 나눈다. 그렇지만 결론은 역시  Neverending Story다. 각자의 포지션에서 상대방의 포지션을 인정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만 온건한 방식을 취하고 있을 뿐이지 그 안에 담겨진 공격의 날카로움은 간장과 막야가 울고간다. 주로 종교가 방어를 하고 과학이 공격을 취하는데 "종교는 이미 유통기한이 끝나버린 것이 아닌가, 사라져 버려야할 과거의 유산이 아닌가"라는 장대익의 공격적인 질문 앞에서 과연 이 사람들이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하여 대화를 나누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온건하지만 자기의 방식을 고집하기는 매한가지다. 도키스와 맥그라스의 한국판 설전 정도로 이해하면 되려나?

 

  과연 이 세사람의 대화가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대변할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목사, 종교학자, 과학도라는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지적인 사람들이다. 그리고 찬성이든 반대든 모두 기독교적인 베이스를 깔고 있다. 이들의 대화가 결코 일반적인 종교인들의 생각을 대변할 수도 없고,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인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도 없다. 그 결과 이들의 대화가 그렇게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 그저 뜬구름 잡는 이야기, 저기 높은 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만 들려 집중하기 어렵다. 과학과 종교가 좀더 상대방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일반 대중의 곁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그저 학문적인 토론에서 멈출 뿐이다. 그러면 여전히 종교와 과학은 Neverending Story를 이어나갈 뿐이다. 조금은 더 쉽게, 조금은 더 편안하게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관전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ps. 장대익씨는 교과서 진화론 개정 추진 위원회와 한바탕 전투를 벌이고 있다. 과거 그가 기독교인이던 시절에 적었던 글을 가지고 그의 현재 입장을 비난하는 것은 치졸한 짓이다. 그는 분명히 자기의 입장이 변화되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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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의 역사: 이브, 그 이후의 기록 - 하이힐, 금발, 그리고 립스틱
잉겔로레 에버펠트 지음, 강희진 옮김 / 미래의창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유혹이라는 말을 사전은 "성적인 목적을 가지고 이성(異性)을 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정의에 충실한 책이다. 유혹은 여자의 본성이라는 입장에 충실하게 여성의 모든 행동들을 남성을 꾀기위한 방편으로 이해한다. 여성의 옷차림도, 화장도, 헤어 스타일도, 심지어는 걸음걸이나 행동 하나하나도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 고도로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라는 말인데, 도대체 이렇게 하나하나 다 계산하면서 산다면 머리가 터지지 않을까 하는 유려는 해본다. 행여라도 페미니즘을 공부하거나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이 책을 추천해 주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책을 보다가 복장이 터져서 죽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도 이 책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재미로 읽어야지 심각하게 "아하 그렇구나!" 감탄하면서 읽는다면 문제가 복잡해질 것이다.

 

  표지에 그려진 인물은 루이 15세의 애인인 퐁파두르 부인이다. 저자가 자기가 말한 모든 유혹의 결정체이자 이상형으로 보는 대상이 바로 이 여인인데 표지에서 보듯이 인형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 인형같은 외모라는 말을 예쁘다는 말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형같다는 말은 말 그대로 인형같이 앉혀놓고, 인형처럼 내 맘대로 하기 좋다는 의미이다. 지은이가 생각하는 여인은 남성의 맘대로 하기 좋은, 남성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여인이지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여인이 아니다. 즉 지은이는 여자는 인정하지만 여성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프랑수와 부셰의 캔버스 유화

 

  어떤가? 하나의 인형같지 않은가? 책꽂이나 선반에 그대로 앉혀놓고 바라보기에 좋은 서양 인형같지 않은가? 그 어디에도 성숙한 인격체로서의 모습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그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이 책을 지극히 마초적인 책으로 규정한다. 분명히 밝혀 두지만 그렇다고 내가 여성의 매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까지 책을 읽고 나서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다. 참 괜찮은 녀석인데, 성격도 좋고, 자기 일도 열심히 하고, 신앙도 좋은 녀석인데 서른이 넘도록 혼자다. 그 녀석을 아끼는 마음에 몇몇의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었으나 대개가 한번 만나고 나면 연락이 없다.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는가? 이 책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사람은 참 괜찮은데 남성을 유혹하는 모습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화장도 안하고, 치마도 입지 않고 항상 맨 얼굴에 청바지, 운동화를 신고 다닌다. 보다 못한 내가 소위 말하는 갈굼을 시작했다. 평소에 일 때문에 청바지를 입는 것은 좋으나 교회 올 때는 일하러 오는 것이 아니니 여성스럽게 입고 와라, 자세는 구부정하게 하지 말고 꼿꼿하게 허리 세우고 어깨를 펴고 다녀라, 화장 좀 하고 다녀라 등등... 내가 여자친구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아내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잔소리를 해댄다.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혹 이 책을 선물해 주면 조금은 더 나아지려나 하는 생각을 혼자서 해본다. 너무 모든 것을 유혹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너무 유혹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도 문제다. 적절하게 유혹의 기술을 행동으로 옮기는 지혜(?)가 그 녀석에 필요하지 않을까?

 

  이야기가 딴 길로 샜다. 남성성에 대해서, 여성성에 대해서 한마디로 해석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지난한 일을 유혹이라는 말 한마디로 해냈다. 거기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 무모함과 용기에는 박수를 보낸다. 심심할 때 읽으면 꽤 재미있는 책이다. 단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 것을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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