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노빠다. 그런데 노빠가 아니다.

 

  앞에서 말한 노는 노회찬이요, 뒤에서 말한 노는 노무현이다. 나에게 있어서 노회찬은 노무현보다 더 대단한 정치인이었다. 민노당에서 통진당으로 그리고 정의당으로 당적을 옮겨가면서 그의 정치 행보를 이어갈 때 나 또한 그와 함께 그 행로를 밟았다. 당적을 바꾼다고 그에게 철새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리당략이 아니라 정치적인 견해를 가지고 갈라져 왔던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원한다면 그도 메이저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와 동창이었던 사람이, 혹은 그와 함께 투쟁을 했던 사람들이 자기의 신념에 반하는 곳에 들어가서 정치행보를 이어갈 때에 그는 그래도 그 자리를 지켰다. 심상정 노회찬이라는 양 날개는 민노당, 통진당, 정의당으로 이어지는 그 길에서 나로하여금 그래도 희망을 보게 만들었다. 날카롭지만 묵직하게 밀어 붙이는 심상정, 날카롭지만 유머러스한 촌철살인 노회찬. 아직까지도 나에게 전희경 의원의 청와대 전대협 점령 의견에 대해서 "그럼 망명하셔야지요."라는 발언이, 당선되면 KTX를 오원구로 끌고 오겠다는 허준영 후보의 말에 "KTX가 코리아 택시의 약자냐?"라는 발언이, 왜 합당하지 같은 당인 것처럼 행동하느냐라는 발언에 "외계인이 침공하면 우리나라와 일본이 손잡고 싸우지 않느냐?"라는 발언이 새록새록 생각이 나서 혼자 웃어 본다.

 

  그런 그가 이젠 없다. 그렇게 참신한 언어를 쏟아낼 사람이 더 이상 없다. 유시민의 촌철 살인도 노회찬만큼 유쾌하지 않다. 심상정은 전혀 다른 캐릭터다. 그가 보고 싶어서 며칠전 노래를 들었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노찾사의 버전이 아닌 MC 스나이퍼의 버전으로 들었다. 노래를 듣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말아
  창살아래 네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나의 영혼 물어다줄 평화시장 비둘기 위로 떨어지는 투명한 소나기
  다음날엔 햇빛 쏟아지길 바라며 참아왔던 고통이 찢겨져 버린 가지
  될 때까지 묵묵히 지켜만 보던 벙어리 몰아치는 회오리 속에 지친 모습이
  말해주는 가슴에 맺힌 응어리 여전히 가슴속에 쏟아지는 빛줄기


  아름다운 서울 청계천 어느 공장

  허리하나 제대로 펴기 힘든 먼지로 찬 닭장 같은 곳에서 바쁘게 일하며 사는 아이들

  재봉틀에 손가락 찔려 울고있는 아이는 배우지 못해 배고픔을 참으며

  졸린 눈 비벼 밖이 보이지 않는 숨막히는 공장에 갇혀 이틀 밤을 꼬박 세워 밤새 일하면

  가슴에 쌓인 먼지로 인해 목에선 검은 피가 올라와 여길 봐 먼지의 참 맛을 아는 아이들
  피를 토해 손과 옷이 내 검은 피에 물 들 때 손에 묻은 옷깃에 묻은 현실의 모든 피를

  씻어낼 곳 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 노동자만을 위한 노동법은 사라진지 오래
  먼지를 먹고 폐병에 들어 비참히 쫓겨날 때 여전히 부패한 이들은 술 마시며
  숨통 조이는 닭장에서 버는 한 달 봉급을 여자의 가슴에 꽂아주겠지 

  비에 젖은 70년대 서울의 밤거리 무너지고 찢겨져 버린 민족의 얼룩진 피를
  유산으로 받은 나는 진정한 민중의 지팡이 모든 상황은 나의 눈으로 보고 판단 결단
  살기 위해 허리를 조인 작업장안의 꼬마는 너무나도 훌쩍 커버린 지금 우리 내 아버지
  무엇이 이들의 영혼을 분노하게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저 홀로 속상 할 뿐이지
  인간으로써 요구 할 수 있는 최소의 요구 자식 부모 남편이길 버리고 죽음으로 맞선
  이들에겐 너무도 절실했던 바램 하지만 무자비한 구타와 연행으로 사태를 수습한
  나라에 대한 집단 비판현실에 대한 혼란으로 이어져 몸에 불지른
  전태일의 추락 나는 말하네 늙은 지식인들이 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이들은 몸으로 실천했음을 

  이제는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판단할 차례
  7,80년대 빈곤한 내 부모 살아온 시대 그때의 저항과 투쟁 모든 게 나와 비례 할 순 없지만
  길바닥에 자빠져 누운 시대가 되가는 2000년대 마지막 꼬리를 잡고
  억압된 모든 자유와 속박의 고리를 끊고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나는
  예술인으로 태어날 수 있는 진짜 한국인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말아
  창살아래 내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듣다가 왈칵 눈물이 났다. 그가 가는 길에 이 노래 하나 띄워주면서 그를 보내고 싶다.

 

  *그의 죽음을 두고 생각이 맞지 않다고 헬기 추락은 그냥 내버려 두면서 부패한 놈 죽었다고 왜 슬퍼하냐 운운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나라가 어찌 이리 망가졌는지, 6.25 시절로 돌아간 것은 아닌지, 유신 시절로 돌아간 것은 아닌지하는 씁쓸함에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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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과 신들 - 개정판
주원준 지음 / 한님성서연구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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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부터 신화가 재미있었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고, 그 내용 자체로도 재미가 있다. 도대체 이런 상상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신화에 관한 책이라면 닥치는대로 읽기 시작했다.


  교회를 다니면서 성경을 이해하는데 이러한 점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무엇인가 아쉬운 것이 있었는데, 내가 알고 있는 신화들은 대개 그리스와 동양, 그리고 북유럽 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바벨론과 이집트의 신화는 아직도 내겐 생소한 부분들이다. 그래서 이 분야의 책이 나오면 구해서 보는 편이다. 책 표지와 제목을 보는 순간 낼름 집어들었다. 그동안 사놓은 책들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구매를 자제했지만 저 표지와 제목을 보는 순간 "이것은 반드시 구매해야만 한다."라는 생각을 하고, "성경을 이해하려면 꼭 필요해"라는 면죄부를 주면서 샀다. 그런데 재미는 있는데 난해하다. 난해하다는 표현은 내용이 어렵다는 말보다는 무엇인가 껄쩍지근한 마음이 해소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책의 두께가 생각보다 두껍지 않은데 너무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화적인 내용에 충실하기 보다는 성경을 번역함에 있어서 이러한 내용을 감안하는 것이 훨씬 더 좋지 않겠는가라는 취지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집트의 신화와 바벨론,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고대 팔레스타인의 신화에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을 연구하거나, 번역하는 사람들에게는 유익할지 모르지만 신화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부족한 책이다. 


  그래서 선뜻 누군가에게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지는 않다. 필요하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라는 말이면 족할 것 같다. 아마 개인적으로도 이 책을 여러번 펴보지는 않을 것 같아서 가뜩이나 넘치는 책꽂이에 꽂아 놓을 책을 하나 장만한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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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07-06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기나긴 역사에 비해서 이집트의 신화와 바벨론, 메소포타미아의 신화는 영미에 비해서 국내에는 아직 많이 번역되지 못한것 같습니다.아마도 국내에선 신화하면 그리스 로마 신화만을 생각해서 그런것 같은데 저도 신화를 좋아해서 많이 읽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그나마 북유럽 신화도 과거에 비해서 좀 번역이 된것 같습니다.
그리고 책 내용이 이집트의 신화와 바벨론,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에 치우쳐 있다고 하셨는데 그건 아마도 성경속 상당수 내용이 이들 나라의 신화를 많이 차용해서 그런것이 아닐까 싶습니다.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노아의 방주인데 이 내용은 메소포타미의 신화인 갈가메쉬 이야기에 나온것을 그대로 본따 성경속에 넣은것이라고 하네요^^

saint236 2018-07-07 16:28   좋아요 0 | URL
아쉬운 건 그나마도 조금더 자세했으면 좋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정작 팔레스타인 토작민들의 신화는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

카스피 2018-07-09 17:37   좋아요 0 | URL
고대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만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오해하는데 팔레스타인은 고대부터 다민족 지역으로 가나안족, 헷족, 히위족, 브리스족, 기르가스족, 아모리족, 여부스족 등 원주민이 ㅇ살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이들 민족은 여러신을 믿었기에 그리스 로마와 같은 신화가 있었겠지만 이들의 신화는 유대인의 정복과 그 이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그리스), 히타이트, 앗시리아, 로마의 침략과 정복으로 아마도 사라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길가메시 서사시 범우고전선 10
N.K. 샌다스 지음, 이현주 옮김 / 범우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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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인간에게 죽음은 공평하다.


  요즘 공평이라는 말이 사회적인 화두이다. 온갖 불공평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정의를 외치는 것은 결국은 공평에 관한 이야기이다. 비정규직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의롭지 않다는 것, 즉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죽을만큼 힘들게 노력해서 취업을 했는데 누구는 비정규직으로 취업을 해서 정규직이 된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 즉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절대적으로 공평한 것이 인류에게 있었는가? 그 어느 사회를 살펴보아도 모두가 공평하다고 느끼는 그런 순간들은 없었다. 그만큼 공평이라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가장 공평한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죽음이다. 모든 태어난 사람은 죽는다는 것만큼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자연의 법칙일 것이다. 죽음을 피해보기 위해서 애를 썼던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도 모두 죽었다. 아무리 대단한 권세를 누리던 사람도 죽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던지, 그리고 어떤 조건을 누리고 살던지 모두 죽는다. 다만 차이는 얼마나 부하게 빈하게, 그리고 오래 혹은 짧게 사느냐의 문제이지 죽음만큼은 피할 수 없다. 아마도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공평한 기회는 죽을 기회라는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우리에게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가진 길가메시라고 할지라도, 세상이 좁다고 돌아다니던, 그리고 분탕질을 하던(길가메시는 그것을 모험이라고 부를지라도 내가 보기엔 분탕질일 뿐이다.) 길가메시도 결국은 죽음이라는 공평한 기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자기와 함께 세상을 눕누비던 엔키두의 죽음 앞에서 길가메시는 자기도 언젠가는 죽게될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죽음을 극복하기 위하여 당시 불사신으로 여겨지던 우트나피쉬팀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영생 불사의 기회를 얻었지만 그 기회를 놓쳐버린 그는 돌아와서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가는 그 길로 갔다.


  가장 오래된 서사시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이 붙어 있는 길가메시 서사시이지만 호메로스나 일리아드만큼 흥미진진하지는 않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라는 별칭은 붙어 있어도 가장 흥미로운 서사시라는 별명은 얻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읽은 판본이 그래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중간 중간에 비어 있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언젠가 이 부분이 연구를 통해서 채워진다면 더 흥미진진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 본다.


  영웅 서사시를 읽으면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호흡이 거칠어져야 하지만 길가메시 서사시는 오히려 차분해진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종착점을 다루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식이 이집트와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 또한 재미가 있다. 


  언젠가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한다는 것이 이 서사시를 읽고 깨닫게 되는 점이다. 우리는 평생을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어도 나는 안죽을 것처럼 살아간다. 혹은 죽더라도 아직은 나와는 상관없는 먼 미래의 일처럼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달려가는데 치중한다. 그 길이 잘못되었는지, 바른 길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열심히 달리는 일에만 몰두한다. 그러다 보니 죽음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 불쑥 찾아온 불청객처럼 달갑지 않은 존재가 된다. 애쓰고 애쓰다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죽음이라는 불청객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삶을 마감한다면 그동안 애쓰고 살아왔던 것은 무엇을 위한 애씀이었던가? 그저 죽을 때 후회하고 "~할 걸"이라는 말로 마무리 짓는 허망한 삶, 후후회를 남기고 떠나는 삶이 되지 않겠는가?


  길가메시가 마지막에 깨달았던 것, 뱀에게 영생 불사의 약을 빼앗기고 깨달았던 것이 이것이 아아니겠는가? 영원히 살고 싶지만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우리는 날마다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죽음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로 설 것인가? 내가 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오랜 질문인만큼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묵직하다.


  책을 덮으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것을 발견하기 위해 오늘도 이책 저책 기웃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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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들어 언론이 참 지랄 맞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영화 1987에서 처럼 칠판에 분필로 적혀 있는 보도 지침을 지우면서, 언론을 뭘로 보고, 사실대로 써라고 일갈하는 언론을 상상했던 내가 너무 순진한 것인지 아니면 철이 없는 것인지...언론의 역할은 감시의 역할이어야 하지, 결코 여론을 조장하여 누군에게 이익을 주어서는 안된다. 가령 누군가에게 이익을 주기 위하여 애를 쓴다고 해도 그 대상은 재벌이나 권력자가 아닌 정말 힘없는 약자들을 위해서여야 한다.

 

  그런데 요즘 언론이 참 지랄 맞다. 기레기라는 말이 참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기레기라는 말이 원래는 "기성용 쓰레기"로 시작했던 말로 기억한다. 기성용의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가?"라는 발언을 싸이월드에 기재했던 2013년 경의 일로 인해 기성용의 도덕성을 이야기하면서 기레기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 별명이 여기저기에 나오기 시작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이다. 처음에 아무 것도 몰랐던 나는 도대체 기성용이 또 어떤 말을 했기에 기레기라는 용어가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리는가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 기레기가 기성용 쓰레기가 아니라 기자 쓰레기라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기성용이 좋아하겠다라는 쓸데 없는 생각을 하면서 킬킬댔던 기억이 있다.

 

  기레기라는 용어에 담긴 언론에 대한 사람들의 불편함, 이것을 뛰어 넘는 반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요지부동이다. 자신들에 대한 공격을 마치 사탄의 세력이 음해하는 것이라는 말로 뭉개는 일부 목사들처럼, 자신들에 대한 공격은 좌빨들의 선동이라는 말로 깔아 뭉갰다. 조중동에 반기를 들거나 불편함을 이야기하면 좌빨로 매도되었고, 사상 검증을 위해 "김정일 개객끼"를 외쳐야 했다. 국방부 장관이 되기 위해서는 때아닌 신앙고백을 해야 했다. 물론 신앙 고백문은 "천안함은 북한의 소행이다. 김정일 개객끼해봐."였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에 대해서 그 어떤 언론도 날카롭게 비판하지 않고 좌빨들이 설친다면서 때아닌 매카시즘을 조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언론이 장춘기 백일장으로 그 밑바닥을 드러냈다. "충성 충성"을 외치는 그들의 충성의 대상은 누구이며, 왜 사주가 아닌 삼성의 임원에게 승진되어서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내야 하는 것인지...

 

  그 충성심의 발로였는지 날마다 김기식 전 금감원장을 까대기 시작했고, 결국 낙마시켰다. 그런데 그 의혹이라는 것이 옐로페이퍼 수준이다. 왜 도대체 그렇게 목숨걸고 씹어댔을까? 자한당이라면(그들은 자한당이라 부르지만 나는 자유당이라 혹은 자해당이라 부르고 싶다.) 이해가 가겠지만, 삼성이라면 이해가 가겠지만 도대체 삼성의 특혜를 철폐하고 금융을 바르게 세우겠다는 김기식을 향하여 맹공을 퍼부은 이유가 무엇일까? 여전히 네이버에 김기식을 치면 "김기식 여비서"라는 연관어가 먼저 뜨는 이 상황을 보면서 그의 가족들은 얼마나 답답할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김기식의 낙마 이후, 이제는 조국을 향한 공세를 시작했다. 정권 초기 임종석에 대한 언론의 공세에 이어 조국에 대한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그 덕일까?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임종석과 조국이 차기 대통령이라고, 비선 실세라고 생각한다. 언론은 이러한 생각에 불을 지피기 위해서 참 가지가지 노력들을 하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언론이 팟 캐스트에서 "왜 그래? 그건 언론이 아니잖아"라고 말을 하면 너희들이 언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격할 때에는 언론이라는 프레임으로 그들을 처벌하려고 애를 쓴다. 이건 기울어져도 너무 기울어져 있다. 어떻게든 바로 잡아 보려고 불매 운동도 하고, 사장 교체를 요구하기도 하고, 방송사 앞에서 시위를 해보지만 그들은 요지부동이다. 정권이 바뀐 다음에나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답답함은 더 커져만 간다. 그런 나에게 언론이 그 지랄맞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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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8-05-01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론사가 그 유지비를 광고에서 대부분 가져오면서 이미 주도권이 넘어갔다고 봅니다. 물론 일종의 공생관계이기도 하고 갑을관계가 역전되기도 하지만 장충기사건을 보면 결국 큰 광고주가 다 잡고 흔드는 걸 막을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기자다운 기자보다는 직장인들이 대부분이고 2030이든 4050이든 결국 월급쟁이 이상의 수준을 기대하긴 힘든 것 같네요. 미국이나 한국이나 뉴스를 가려 보고 듣는 혜안이 필요한데, 이를 위한 필수조건이 활발한 독서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형국이니까 답답하네요..
 
시작된 미래 ⓔ - 코딩과 소프트웨어로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EBS <코딩, 소프트웨어 시대>, <링크, 소프트웨어 세상> 제작팀 / 가나출판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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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은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컴퓨터가 체스보다 더 복잡한 경우의 수를 다루는 바둑에서 사람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기존의 관념을 뛰어넘어 알바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은 알파고의 승리로 끝났다. 이 후에 신문에서 워낙 알파고 알파고 하니까 도대체 알파고가 어디 붙어 있는 학교냐는 우스개 소리도 나왔었다.


이후 인공지능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고, 장미빛 미래를 예견하는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우리의 삶을 더 편리하고 풍요롭게 할 것이라 주장했다. 반면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을 표했던 사람들은 터이네이터의 스카이넷이 현실화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를 표하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사람들 사이에 자녀들에게 코딩 교육을 하는 것이 좋다는 새로운 풍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교육부에서는 초등학생들의 토딩 교육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디고 하였다. 그 이후에 어떻게 진행되는지 살펴보지 않아서 잘 알지 못하지만 머지 않아 공교육 현장에 코딩교육이 도입될 것이고 이와 더불어 코딩 사교육 시장도 커질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우리에게 코딩이 무엇인가? 인공지능이 무엇인가? 인공지능이 무엇인지, 그리고 코딩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불편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답은 아니다이다. 기업에서 물건을 팔면서 그 물건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재원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을 몰라도 잘 사용할 수 있다. 컴퓨터를 제작하지 않는 사람도 코딩을 잘 할 수 있고, 코딩을 전혀 몰라도 인공지능을 잘 사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갑자기 코딩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가? 공교육에 코딩 교육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아마도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닐까?


공교육에 수학 교육이 들어오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애초에 수학은 귀족들이 가지고 있었던 권력이었다. 역법을 계산하는 것도, 천체의 운행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도 권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런데 읽고 쓰고 수를 계산하는 일이 우리 교육 속에 들어오게 된 것은 산업화를 거치면서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수를 가르치고 읽고 쓰는 방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억의 이익을 위해서 수학이 우리 교육에 들어왔고,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 많은 과목들이 우리 교육 속에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기업의의 지배를 받는 것은 대학뿐 아니라 초등교육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코딩 교육도 이러한 기업의 이윤을 위해서, 코딩 능력이 있는 노동자를 키워내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것이라면,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EBS에서 펴낸 이 책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이 책은 우리의 삶 속에 인공지능은 이미 생활이 되었고, 이런 삶을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커퓨터와 대화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데에는 동의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논의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이 과정이 지식으로 읽히면 안된다는 우려 때문이다. 성적을 가지고 우리는 줄 세우는 것처럼 자칫 잘못하면 코딩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아이들을 줄세우는데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코딩 교육을 가르칠 것이라면 그것이 지식이 아닌 삶의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아이들을 사품화하는데 사용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 아이들의 삶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우리가 접하게될 새로운 기술들이 통제가 아닌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방식으로 작동되게 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일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삶에 다가올 새로운 미래를 기대와 걱정의 시선을 담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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