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온난화에 속지 마라>를 리뷰해주세요.
지구온난화에 속지 마라 - 과학과 역사를 통해 파헤친 1,500년 기후 변동주기론
프레드 싱거.데니스 에이버리 지음, 김민정 옮김 / 동아시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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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 개콘의 제일 마지막에 나와서 "누가 끝이래~"를 외치시는 분이 계시다. 바로 이 분이시다. 개그만 윤형민이 오랫동안 울궈먹고 있는 캐릭터인 왕비호인데 항상 처음 외치는 말은 정해져있다.  

"우선 내 소개를 하지, 난 개그계의 안티, 연예계의 안티, 시청자의 안티로 새롭게 태어난 내 이름은 왕비호야!"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작되는 그의 독설은 개콘의 마지막 불씨를 다시 되살릴만큼 인기가 있다. 어던 연예인이 나왔든지 간에 거침없이 독설을 퍼붓는 그의 말은 비꼼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의 비꼼과 독설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독설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까지 보도되었던 많은 사실들을 토대로 해서 이리꼬고 저리꼬니 이렇게 사람의 마음에 상처입히는 독설이 되어 버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의 독설이 스스로 수위를 조절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머릿 속에 바로 떠올린 것이 바로 이 왕비호인다.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면서 이산화탄소 배출에 관해 규제하려는 노력이 있어 왔다. 그 결과물이 교토의정서가 아닌가? 그런데 교토 의정서에 참석하지 않은 미국의 과학자가 "지구온난화는 말짱 거짓말이다. 사기다. 교토 의정서도 순수한 과학적인 열정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라고 외친다. 과연 그의 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어필할 수 있을 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신선했던 것은 지구의 기후현상을  바라보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이다. 하나는 이산화탄소 배출이 늘어남에 인하여 온실효과가 일어난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지구는 과거로부터 1500년의 기후 변동을 겪어왔고, 지금의 온난화도 그 과정의 일환일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후자의 입장을 취하면서 지구온난화가 얼마나 사기성이 짙은 학설인지 조목조목 따지면서 반박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은 아주 간단한다.  

"지구온난화는 비과학적이다. 지금의 온난화 현상은 1500년을 주기로 나타나는 지구 기후변동의 당연한 현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환경단체들이 자신의 이익과 정치적인 입장을 위하여 지구온난화를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화석연료와 화학 비료가 오늘날 풍족을 가져다 주었고, 만약 이것을 멈추어 버린다면 오히려 인류의 위기가 닥칠 것이다. 아끼려는 생각하지 말라. 후손들에게 화석 연료를 불필요할 수 있다. 대체 에너지라는 말은 말짤 거짓말이고 사기다." 

  요약하다보니 조금 과격한 모양새가 되었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다. 저자들은 나름대로 과학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하지만 때론 과학적인 입장이라고 선택한 것이 앞과 뒤에서 다르게 인용되는 부분들도 발견하게 되지만 그것이야 워낙 귀에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과학의 특징이라 생각하니 넘어간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불편했던 것은 무책임한 낙관주의라는 것이다. "기후변동은 원래 일어난다. 그리고 온난화 기후에 들어갔을 때 지구는 번성했다. 로마와 중국, 중세의 번성이 그 예가 아닌가?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라. 인류는 이제 더 번성할 시기를 맞이할 것이다. 더 발전된 기술력(화학 비료, DDT살충제, 화석 연료 등)이 인류의 번성을 보장해 줄 것이다. 화학비료를 배제한 유기농법이라는 것은 무책임하면서도 구시대적인 것이다. 이런 것으로는 인류의 식량을 감당하지 못한다. 왜 미국과 1세계에만 희생을 강요하느냐?" 이런식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도대체 이넘들은 뭐하는 놈들이야?"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더 나아가 후치족과 투치족의 전쟁을 그저 식량의 부족으로 인해 나타난 것이며, 화학 비료 사용과 유전공학을 통한 유전자 변이 식물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전세계적으로 이런 전쟁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 경고하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할 말을 잃었다. 게다가 제일 마지막에 "화석 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아껴서는 안된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사용할 화석 연료들이 많이 있다. 단지 생산비용때문에 사용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기술력이 발달한다면 그 문제는 충부히 해결될 것이다. 후손들은 화석 연료보다 더 좋은 에너지원을 사용하여 화석 연료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인들이여, 일주일에 차를 두번탄다고 생각해봐라.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그리고 해수면 상승으로 위기를 만나는가? 그렇다면 이사가면 된다. 요즘은 이동이 얼마나 편리한가? 우리가 해야할 일은 쓸데없는 에너지원을 개발하는 불확실한 일이 아니라, 더 많은 수확을 위해, 에너지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더 기술력을 발전 시키는 것이다."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도대체 이게 뭐하자는 짓거리야?"라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여기에 비하면 왕비호의 독설은 애교수준이다. 이게 곡학아세라는 것일까? 

  "왜 이럴까?"라는 생각에 저자들의 경력을 보다가 허드슨 연구소를 발견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시 정책의 열렬한 후원자, 온갖 강경 정책을 내놓는 곳, 민간 싱크탱크라 말하면서 전방위적으로 미국을 우향우하게 만드는 단제의 연구원이 쓴 책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하다. 속지말아야 할 것은 지구온난화가 아니라 이 책이 아닐까? 분명 저자들의 주장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도 비판하던 모습을 스스로 취한다. 자기들의 주장, 나아가서 그들의 정치적인 입장을 대변하기 위하여 과학을 이용하고 있다. 이것이 그들의 주장이 힘을 잃는 이유이다. 

PS. 오타가 너무 많다. 번역도 매끄럽지 못한 곳도 있고, 갑자기 문맥이 단절되는 느낌을 받는 곳이 한 두곳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별 3개를 주려다가 1개를 덜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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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이스마엘 베아 지음, 송은주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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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랫동안 눈팅만 하다가 반값 세일이라는 특별 이벤트를 맞이하여 갑작스레 산 책이다. 시에라리온 소년병의 이야기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실상이 이렇게 참혹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일제시대와 6.25라는 민족의 아픔을 겪으면서 우리의 할아버지들과 아버지들은 애국이라는 미명하게 전쟁터에 끌려갔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란 세대도 이미 나이를 먹어벌서 중년을 향해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소년병의 이야기는 별나라의 이야기요, 상상 속에서도 존재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더군다나 물 한잔 마시는 것보다 사람 죽이는 것이 쉬웠다는 그들의 이야기는 "에이 설마~"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게 한다. 게다가 선입견이랄까? 마약을 통하여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쫓아내고, 소년병들을 전투에 참가시킨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반군만의 일이라고 착각했던 것은 무슨 이유런지? 

  우리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제목은 강원도 산골에서 할머니와 티격태격하는 철없는 소년의 삶을 떠올리게 만들뿐이다. 몇년전 만들어졌던 집으로라는 영화, 딱 그정도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무에 힘들겠는가? 그저 돌아가면 되는 것이지." 어떻게든 집을 떠나보려는 우리들에게 집이란 구속의 대명사요, 벗어나고 싶은 굴레이다. 그러나 이 당연한 이야기가 배부른 소리였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어느날 아무런 이유없이 한 마을이 전쟁에 휘말린다. 이 전쟁은 그 마을뿐만 아니라 이미 여러 마을을 휩슬었고, 결코 그 기세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살길을 찾아 도망을 떠났고, 한숨 돌린 순간 가족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전국을 헤맨다. 젊은 사람들이 그러는 것도 힘들겠거늘 12살짜리 소년(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꼬맹이)이 찾아 헤매는 길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마치 마녀의 숲 속에 버려져 죽을날만 기다리고 있었던 헨젤과 그레텔터럼 이들은 전쟁이라는 복마전의 한가운데에서 하루하루 생존을 위하여 버틸 뿐이다. 그러다 눈 앞에서 가족을 잃은 아이들, 복수심과 생존에 대한 본능 때문에 결국 철저한 전쟁기계가 되어가는 어린이들! 내 아이들이 장난감과 과자를 사달라고 떼를 쓸때 그들은 AK-47을 들고 식량과 마약을 얻기 위해 다른 이를 공격하고 죽여야 했다. 

  도대체 누구의 책임일까?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인가? 이 책은 이 질문을 끊임ㅇ벗이 던지면서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까발린다. 그렇기 때문에 더 설득력이 있으면서도 더 서글프다. 집단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아이들, 맹목적인 애국심과 충성심에 불타는 아이들, 동심의 세계보다는 살인과 피에 더 익숙한 아이들, 이들의 잃어버린 영혼과 마음은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그런 나라에 태어난 그들의 팔자를 탓해야 하나? 아니면 그들을 먼자 두고 떠난 부모를 탓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이들을 전쟁에 사용하고 있는 어른 병사들의 책임인가? 그 무엇하나 분명하지 않다. 단지 분명한 것 하나는 결코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가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그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들은 그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진심어린 말 한마디, 자신들의 마음의 아픔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그 말 한마디에 목말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이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산 책 한권이 그들에 대한 내 미안한 마음을 전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나도 무엇인가 하나 해야할텐데라는 미안한 마음에 책 한권을 산다. 그리고 읽고, 또 읽는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저자가 제일 마지막에 기록한 원숭이와 사냥꾼이라는 부분이다. 원숭이를 쏘면 엄마가 죽고, 쏘지 않으면 아빠가 죽는 딜레마에서 자기는 엄마에게 미안하지만 원숭이를 쏘겠다고, 그것이 다른 사냥꾼을 같은 비극에 빠지지 않게하는 가장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는 그의 말은 내 마음에 묵직한 감동을 전한다. 나는 과연 그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까지 생각할 수 있을까? 멀고 먼 길을 돌아 집에 돌아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여유요, 용기요, 현명함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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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체험이다 - 의지.감성.지성.오감 하나님을 체험하는 네 가지 통로, Experiential Worship
밥 로글리엔 지음, 김동규 옮김 / 예수전도단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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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예배자가 하나님과 만나는 것, 그리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세상 가운데 서기로 다짐하는 것, 이것이 예배가 아닐까? 그렇다면 살아 있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에배는 무엇인가? 저자는 예배는 체험이라고 말하다. 예배를 체험하기 위해서, 예배의 감동을 느끼기 위해서, 지성적으로, 감성적으로, 의지적으로 모든 것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 살아 있는 예배를 드리는 비결이다. 그리고 이것을 위하여 예배를 돕는 이들이 최선을 다해 예배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배를 위한 기획회의, 미리 드려지는 리허설 등 예배 또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 일견 낯설게도 느껴지지만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예배는 그냥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준비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강력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들어 예배에 대하여 많이 고민하고 있는데 많은 것을 던져준 책이다. 예배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은 읽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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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 상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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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완결되고 난 다음 시원하면서도 섭섭함을 느꼈다. 한해에 한권씩 낸다는 말을 하면서 거의 15년을 끌어온 로마인이야기가 끝을 냈다는 것에 대해서 시원함을 느꼈다면 이젠 무슨 낙으로 살아가나라는 생각은 섭섭함일 것이다. 그러던 가운데 시오노 나나미의 다른 책이 나왔다는 것은 참 즐거운 소식이었다. 몇번의 망설임 끝에 상권을 구입했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역시 나나미의 책은 재미있다."였다. 

  요즘들어 대세는 사극인가 보다. 용의 눈물, 장보고, 불멸의 이순신, 천추태후, 그리고 선덕여왕까지. 온갖 사극들이 우리의 안방을 차지하고 있지만 걱정이 앞선다. 재미를 통하여 시철률과 역사 의식을 고양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역사를 너무 소설화 해버린다는 단점은 결코 무시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느 학생이 물어보더라. "신윤복이 여자예요?" 이정도면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내가 나나미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나미의 책은 어떻게 보면 소설같지만 철저하게 역사적인 고증을 가지고 쓴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상상한 부분은 분명하게 상상력이라고 밝힌다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 어느 교수님이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질문한 후배에서 어디서 잘못된 쓰레기를 읽고 그런다고 무시했던 일도 있었지만, 그분이 읽기는 읽으셨는가? 나나미가 읽은 그 많은 1차 사료들을 말이다. 

  여하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열었다. 첫장에 이렇게 써 있었다. "해적" 

  지금까지 로마제국의 멸망을 그렇게 안타까워하던 나나미는 로마의 멸망과 함께 해적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사회적인 현상이요, 새로운 직업군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로마제국의 분해와 멸망은 단순히 한 국가의 멸망이 아니라 지중해의 문명을 요동치게 만드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지중해를 내해라고 부르던 로마의 멸망은 지중해에서 안전과 평화라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걷어버렸다. 그것이 군사력에 의한 평화이든, 종교에 의한 평화이든 간에 지중해에서 평화가 사라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맞물려 북아프리카에서의 이슬람 세력의 대두는 지중해를 한층 더 복잡하고 안전하지 못한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교도에 대한 지하드 의식과 산업의 붕괴, 그리고 호전성은 해적이라는 새로운 직종을 출현시켰고 발전시켰다. 로마의 붕괴는 이렇게 해적의 역사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또한 해적의 역사는 이탈리아에 해양국가인 도시국가를 출현하게 만들었고, 그들로 인하여 다시한번 불완전하나마 pax가 시도되었고, 이것은 부의 증가와 르네상스를 불러 일으켰다. 논리적인 비약이 상당히 강하지만 우스개소리로 결국 르네상스는 해적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으려나?  

  이 책과 로마인 이야기의 공통의 주제는 평화와 안전보장이다. 물론 나나미가 외국에서 오래 살았다고 해도 일본 태생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하필 산 곳이 이탈리아 쪽이어서 그런지 군사력에 의한 평화를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많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녀가 호전적이어서라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평화를 위한 방법을 간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곳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평화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의 댓가로 얻어진다는 것이 나나미의 평화에 대한 주장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통하여서 노력을 통한 평화 획득의 예를 보여줬다면 이 책을 통해서는 노력을 하지 않아 평화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책을 보면서 한 가지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 시대는 평화로운가?" 

  물산의 이동과 안전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우리 시대는 결코 평화롭지 못하다. 평화롭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노력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불안 가운데 살면서 만성화 되어 평화라고 착각하고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화로울 것인가? 그녀의 책을 통하여 한가지 현실적인 방법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녀가 베네치아의 항해방법을 설명하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베네치아의 배는 출발하면서 선장과 1등급, 2등급 선원만 태우고 출발한다. 아드리아해를 빠져나가면서 항구마다 들러 신선한 음식을 보충하고, 슬라브인들을 노잡이로 고용한다. 그들에게 물건을 팔 수 있는 기회와 해적이 아니어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전략은 훌륭한 결실을 맺어 슬라브인들은 베네치아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베네치아와 운명을 같이 했다." 살길을 마련해 준후, 평화의 제스쳐를 취하는 것이, 막바지까지 몰아붙인 후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말이다. 

  요즘 북한과 남한의 모습을 바라본다. 살길을 마련해주고 화해를 모색하기 보다는 막바지까지 밀어붙이고 항복하면 그 다음에 이야기하자는 식의 강경책을 고수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럴 것이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찌보면 강경책 일변도로 나서는 정부의 대북정책을 보면서,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이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몰아붙이다가 평화가 깨지면 그 다음에는 해적이 횡행하는 난세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이, 그리고 그 어려움은 고위층 인사가 아니라 우리같은 일반 서민들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것임을 역사를 통하여, 그리고 이 책을 통하여 보게 되지 않는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개성공단, 금강산 여행, 백두산 여행, 대북 지원은 단순히 퍼주는 것도, 상대방에게 전쟁자금을 마련해 주는 것도 아니다. 평화를 위해 치르는 대가이다. 물론 군사력도 보유하고 있어야겠지만 그것은 최후의 수단이지 최선의 수단은 아니다. 너무 근시안적으로 북한을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북 강경책은 그들로 하여금 한 가지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뿐이다. 함께 공생할 수 있고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대북정책을 제시하고 운용하는 정부가 되길 소원해본다. 비록 헛된 바람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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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니 2009-08-27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화를 실천하는 영역으로 북한을 초대해야 하는데. 쉽지는 않은거 같아요.
내부의 반대자를 이해시키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다가, 북한의 강경세력도 평화를 원치않으므로, 내부와 외부의 반대자 모두를 잠재울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역시 현실은 참 많은 변수가 존재합니다. 그래도 평화의 영역으로 조금이라도 나아가야겠죠? ^^

saint236 2009-08-28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그래도 공생의 길을 찾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되겠죠.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공생이 불가능하면 공멸이니까요.
 
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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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작품이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작품인데 원래는 지옥문 위에 앉아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왜 사람들이 죄를 지을까?"라는 고민을 하고 있는 주제를 가진 작품이란다. 그러나 이 작품이 학교 곳곳에 설치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우스개 소리를 만들어 내었다. "화장지가 떨어졌는데 어떻게 해야하나?"라는 고민을 하는 중이라고. 어찌되었던 이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던졌던 질문은 명확하다. "넌 생각이 있는가?"라는 단도직입적인 질문 말이다. 

  신입생 때 선배로 들었던 가장 많은 질책은 "책 좀 읽어라."와 "생각 좀 하고 살아라."였다. 당시에는 무척이나 짜증나는 말들이었지만, 어느새 나도 그 말들을 입에 달고 살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에게 해주는 말이 "책 좀 읽어라."와 "생각 좀 하고 살아라."라는 말이다. 책을 읽고 생각하라는 말은 고민하라는 말이다. 하루하루 그저 때우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고민하라는 말이다. 힘들고 어렵지만 고민한만큼 성장한다는 것을 내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내가 나이가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다. 32살이면 아직도 한창나이이다. 아니다. 어디가서 나이를 밝히기에도 창피한 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내가 보기에도 20대는 너무 쉽게 살아간다. 쉽게 산다는 말이 그들이 아무 것도 안하고 산다는 말이 아니다. 열심히 공부라고, 토익 점수에 목을 맨다. 그런데 그것뿐이다. 스킬을 채우기 위해, 스펙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뿐이다. 전혀 성장하지 않는다. Philasophy라는 단어가 철학이라는 뜻은 알고 있겠지만,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톨스토이와 도스트예프스키가 무슨 책을 썼는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실제로 읽지는 않는다.  철학의 개념을 깊이 이해하기 보다는 철학사의 흐름을 암기하는 것으로 만족해한다. 그러니 깊이가 없다. 

  인생의 의미를 고민한다는 것을 쓸모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나라는 존재의 실존이 무엇이고, 나는 왜 살아가는가 묻지 않는다. 고민하고, 고민하고, 고민하는 것이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일텐데 그 호기심이라는 인자, 고민이라는 DNA가 마치 현대인들에게는 사라져 버린 것 같다.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누군가 내 인생을 결정해 주길 원한다. 주어진 길은 잘 가지만 자기가 갈 길을 스스로 만들지는 못한다. 과연 이게 성숙한 인간의 모습일까? 

  고민은 시간 낭비가 아니다. 내가 살아 있음의 증거이다. 고민을 통하여, 내 인격이 성숙해지고, 내 사고의 깊이가 깊어진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인간은 비로소 성장하는 것이다. 성숙한 인간이란 사고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지, 연봉과 나이와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고민하는가? 그 시간이 너무 아깝다 생각하는가? 착각하지마라. 그 시간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고민하는 깊이만큼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시간이 없다. 고민하는 그 시간만큼 활발하고 솔직하며, 생생한 시간은 없다. 이것이 고민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유익일 것이다. 고민이 되는가? 고민해라. 아주 깊이 고민해라. 바닥까지 내려갈지라도 고민해라. 그 끝에서 삶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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