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 상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9년 7월
평점 :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완결되고 난 다음 시원하면서도 섭섭함을 느꼈다. 한해에 한권씩 낸다는 말을 하면서 거의 15년을 끌어온 로마인이야기가 끝을 냈다는 것에 대해서 시원함을 느꼈다면 이젠 무슨 낙으로 살아가나라는 생각은 섭섭함일 것이다. 그러던 가운데 시오노 나나미의 다른 책이 나왔다는 것은 참 즐거운 소식이었다. 몇번의 망설임 끝에 상권을 구입했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역시 나나미의 책은 재미있다."였다.
요즘들어 대세는 사극인가 보다. 용의 눈물, 장보고, 불멸의 이순신, 천추태후, 그리고 선덕여왕까지. 온갖 사극들이 우리의 안방을 차지하고 있지만 걱정이 앞선다. 재미를 통하여 시철률과 역사 의식을 고양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역사를 너무 소설화 해버린다는 단점은 결코 무시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느 학생이 물어보더라. "신윤복이 여자예요?" 이정도면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내가 나나미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나미의 책은 어떻게 보면 소설같지만 철저하게 역사적인 고증을 가지고 쓴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상상한 부분은 분명하게 상상력이라고 밝힌다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 어느 교수님이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질문한 후배에서 어디서 잘못된 쓰레기를 읽고 그런다고 무시했던 일도 있었지만, 그분이 읽기는 읽으셨는가? 나나미가 읽은 그 많은 1차 사료들을 말이다.
여하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열었다. 첫장에 이렇게 써 있었다. "해적"
지금까지 로마제국의 멸망을 그렇게 안타까워하던 나나미는 로마의 멸망과 함께 해적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사회적인 현상이요, 새로운 직업군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로마제국의 분해와 멸망은 단순히 한 국가의 멸망이 아니라 지중해의 문명을 요동치게 만드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지중해를 내해라고 부르던 로마의 멸망은 지중해에서 안전과 평화라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걷어버렸다. 그것이 군사력에 의한 평화이든, 종교에 의한 평화이든 간에 지중해에서 평화가 사라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맞물려 북아프리카에서의 이슬람 세력의 대두는 지중해를 한층 더 복잡하고 안전하지 못한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교도에 대한 지하드 의식과 산업의 붕괴, 그리고 호전성은 해적이라는 새로운 직종을 출현시켰고 발전시켰다. 로마의 붕괴는 이렇게 해적의 역사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또한 해적의 역사는 이탈리아에 해양국가인 도시국가를 출현하게 만들었고, 그들로 인하여 다시한번 불완전하나마 pax가 시도되었고, 이것은 부의 증가와 르네상스를 불러 일으켰다. 논리적인 비약이 상당히 강하지만 우스개소리로 결국 르네상스는 해적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으려나?
이 책과 로마인 이야기의 공통의 주제는 평화와 안전보장이다. 물론 나나미가 외국에서 오래 살았다고 해도 일본 태생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하필 산 곳이 이탈리아 쪽이어서 그런지 군사력에 의한 평화를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많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녀가 호전적이어서라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평화를 위한 방법을 간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곳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평화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의 댓가로 얻어진다는 것이 나나미의 평화에 대한 주장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통하여서 노력을 통한 평화 획득의 예를 보여줬다면 이 책을 통해서는 노력을 하지 않아 평화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책을 보면서 한 가지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 시대는 평화로운가?"
물산의 이동과 안전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우리 시대는 결코 평화롭지 못하다. 평화롭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노력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불안 가운데 살면서 만성화 되어 평화라고 착각하고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화로울 것인가? 그녀의 책을 통하여 한가지 현실적인 방법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녀가 베네치아의 항해방법을 설명하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베네치아의 배는 출발하면서 선장과 1등급, 2등급 선원만 태우고 출발한다. 아드리아해를 빠져나가면서 항구마다 들러 신선한 음식을 보충하고, 슬라브인들을 노잡이로 고용한다. 그들에게 물건을 팔 수 있는 기회와 해적이 아니어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전략은 훌륭한 결실을 맺어 슬라브인들은 베네치아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베네치아와 운명을 같이 했다." 살길을 마련해 준후, 평화의 제스쳐를 취하는 것이, 막바지까지 몰아붙인 후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말이다.
요즘 북한과 남한의 모습을 바라본다. 살길을 마련해주고 화해를 모색하기 보다는 막바지까지 밀어붙이고 항복하면 그 다음에 이야기하자는 식의 강경책을 고수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럴 것이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찌보면 강경책 일변도로 나서는 정부의 대북정책을 보면서,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이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몰아붙이다가 평화가 깨지면 그 다음에는 해적이 횡행하는 난세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이, 그리고 그 어려움은 고위층 인사가 아니라 우리같은 일반 서민들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것임을 역사를 통하여, 그리고 이 책을 통하여 보게 되지 않는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개성공단, 금강산 여행, 백두산 여행, 대북 지원은 단순히 퍼주는 것도, 상대방에게 전쟁자금을 마련해 주는 것도 아니다. 평화를 위해 치르는 대가이다. 물론 군사력도 보유하고 있어야겠지만 그것은 최후의 수단이지 최선의 수단은 아니다. 너무 근시안적으로 북한을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북 강경책은 그들로 하여금 한 가지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뿐이다. 함께 공생할 수 있고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대북정책을 제시하고 운용하는 정부가 되길 소원해본다. 비록 헛된 바람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