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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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정의란 무엇인가? 

  이상하리만치 딱딱한 책이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당당하게 올린 이유가 무엇인가?  

  일단 저자의 이력이 화려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누가 뭐라고 해도 20대에 하버드의 교수가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출판사도 이 점을 다분히 의식했는지 정의란 무엇인가를 선전할 때 저자의 화려한 스펙을 가장 앞세웠다. 

  다음으로 우리 사회의 부조리 때문이 아닐까? 한미 FTA, 촛불 집회에 대한 강압적인 탄압, 용산 참사 등 민주화된 시대에는 일어날 수 없을 법한 굵직한 사건들이 요 몇년 사이에 일어났다. 사람들은 투표의 소중함에 대하여 철저하게 깨달았고, 그 어느 때보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공통적으로 드는 생각이 무엇이겠는가? 다름 아닌 정의일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로운 사회는 과연 어떤 사회인가? 우리 사회는 과연 정의로운 사회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딱딱한 이 책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만든 동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두가지 이유가 정말 상반된다는 것이다. 저자의 화려한 스펙에 현혹되었다는 말은 나도 저만큼 성공하고 싶다는, 혹은 성공한 사람들이 대접을 받는 이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테고, 정의에 대한 고민은 지금가지 우리가 추구했던 성공이 결국은 잘못되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일테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닌가? 그러나 민주화의 주된 세력이었던 386에 의해서 승자독식과 사교육이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었다는 사실을 떠 올린다면 그다지 새로운 사실도 아닐 것이다. 

  어찌되었든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공전의 히트작이 되었고, 그의 인기에 기대어 생명윤리를 말하다라는 책이 나왔다. 여기에서 멈추기에는 지금가지 띄워놓은 샌델의 인기가 아가운 것일까? 결국 "왜 도덕인가?"라는 책이 숨가쁘게 나왔다. 숨가쁘게 출판되었다는 말이 정말 맞을 것이다. 만약 이 책이 딱 3달만 뒤에 나왔어도 이렇게 비상한 관심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나 또한 샌델이라는 이름값에 휘말려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고, 읽게 되었다. 다 읽고 난 평을 한 마디로 하자면, 정의란 무엇인가의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공리주의와 개인주의의 입장을역사적으로 살펴보고 시민의 덕성을 함양하는 정의에 대한 태도를 설파했다면 이 책은 정의가 실행되어야 하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으로 도덕을 보고 있다는 점이 약간 다르다면 다를까?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이미 파악했듯이 샌델은 공리주의적인 입장도, 그렇다고 개인주의적인 입장도 지지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중립적인 가치는 존재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정의를 가능하게 만드는 장은 결국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생명 윤리를 말한다에서는 생명 공학을 통한 인간 강화가 공동체에 새로운 불평등을 낳을 것이며, 그 결과 공동체가 심하게 위협받을 수 있다는 논지의 주장을 폈다. 이 책에서 샌델은 그렇다면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한다. 

  샌델은 도덕이란 결국 공동체를 지탱하는 공동체의 가치체계라는 말을 한다. 정확하게 그러한 표현은 사용하지 않지만 마지막가지 읽고 난 후 누구나 갖게 되는 생각이다. 왜 도덕이 중요한가? 도덕은 공동체의 구성원 자격을 규정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샌델의 말을 들어보자.  

  정의가 구성원 자격에서 시작되는 사회에서는 분배만 염려해서는 안된다. 구성원 자격을 함양하는 도덕적 상황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P.173) 

  도덕적 상황이란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의 자격을 부여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도덕의 이러한 역할이 있은 후에 비로소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토론하고 고민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지금까지 정의에 대하여 말했다. 왜 우리 공동체가 정의롭지 못한가? 왜 부의 성장과 분배가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왜 사회는 상위 1%를 위해 움직인다고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는가? 왜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말하는가? 이 모든 논쟁의 출발점은 결국 공동체의 구성원은 누구인가에 맞추어 질 수밖에 없다. 나와 수준이 비슷하지 않다면, 생각이나 정치적인 입장이 비슷하지 않다면 기꺼이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매도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색깔론, 영호남, 386. 88만원 세대 등 지속적으로 계급을 분화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고민이 없이 함게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솎아 버리는 편협한 태도에 있지 않은가? 도덕을 말하는 것은 이러한 편협한 태도에 대한 반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발견하게 해준다는 것만으로 이 책은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하겠다. 물론 이 책이 정의란 무엇인가와 상당부분이 겹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들어간다는 전제하게 말이다.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자격을 함양하는 도덕을 이야기하면서 샌델은 마지막으로 경제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옮아간다.   

  진보주의 개혁의 분산화 및 전국화 이슈는 1912년 우드로 윌슨과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대결에서 극명히 나타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해의 선거운동에서 가장 의미심장했던 것은 양 진영 지도자들이 공유한 가정이었다. 한쪽에는 브랜다이스와 윌슨이, 반대쪽에는 루즈벨트와 크롤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수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정치 및 경제 제도가 자치에 필요한 도덕을 장려하거나 훼손시키는 경향에 따라 평가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제퍼슨과 마찬가지로 그들 시대의 경제정책이 어떤 부류의 시민들을 만들어낼지 우려했던 것이다. 그들의 방식은 서로 다를지언정 똑같이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논의했다.
  한편 우리 시대의 경제적 논쟁은 진보개혁주의자들을 분열시킨 주제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그들은 경제구조에 관해 고심하고 민주정부를 어떻게 경제력 집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지 논의했다. 반면 우리는 전반적인 경제 생산에 관해 고심하고 어떻게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동시에 번영의 결실에 폭넓게 접근할 수 있을지 논의한다. 뉴딜정책 후반기에 시작된 성장과 분배의 정치경제학은 1960년대 초에 정점에 달해 마침내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P.280)

  과거 정치인들이 왜 그렇게 거대화된 다국적 기업에 대한 견제에 골몰했는가? 그것은 거대화된 기업, 막강한 권력을 획득한 기업은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기업을 견제하기 위하여 그들의 권력을 분산시키는 정책을 고수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의 권력에 대항하여 국가에 권력을 더 집중시키는 방법을 택했다는 차이만 있을 분이지 모두 다국적 기업이 획득한 권력에 대하여 경계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고삐풀린 기업은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하고 물질만능주의를 최우선의 가치로 만들어 버린다. 기업의 권력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증발해 버리고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성장과 분배의 매커니즘뿐이다. 물론 그 매커니즘도 선성장 후분배라는 조삼모사식으로 바뀌어 버렸지만 말이다. 

  말이 어려운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자랑스런(?) 삼성을 생각해 보면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해진다. 일제 잔재 청산, 반민족 특위, 피해 보상과 같은 도덕적인 가치들은 잘 살아보세라는 말 한마디에 힘을 잃고 말았다. 성장을 위해서는 그것들은 함구해야 하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머릿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을 입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반동분자로 몰려 철저한 처벌을 받았다. 이런 정책을 펴면서 국가는 어떻게 해서든 재벌을 통제하려고 노력했으나, 그 시도는 철저하게 실패로 끝나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처럼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가 버렸다. 기업이 정부를 위협하는 단계를 넘어 정부의 모토마저 기업에서 정해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최후의 보루이자, 사회 안전망인 공동체를 상실하게 된다. 여전히 공동체는 존재하지만 그 공동체에 붙어 있기가 지극히 어렵다. 이제 사회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던 입장도, 인간을 절대적인 기준이요 목적으로 삼던 철학도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시장에서 만인을 위한 만이의 투쟁만이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이 먹고사니즘에 올인한 결과이다. 국어, 영어 , 수학에 올인하면서 도덕 교육과 윤리, 철학을 경시한 결과이다.(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나도 고동학교 시절 윤리, 철학 시간에 자습이라는 명목하에 국영수 공부할 것을 강요받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잘 먹고 잘 살지만, 그 어디에도 만족은 없으며, 인정이라는 훈훈함도 없다. 사회 안전망이 사라지니 기업에 의해 운영되는 보험사가 활개를 친다. 이젠 개인의 미래마저 기업에게 담보물로 잡혀 버린 것이다.  

  케케묵은 이야기같은 도덕, 공동체의 공동의 가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인 판단과 철학을 회복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든 사람이 한 가지 생각과 한 가지 이념으로 뭉쳐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개개인의 생각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다만 끊임없이 인간다움에 대하여 생각하고 고민하는 모습만 같은 뿐이다. 왜 도덕인가? 공동체를 유지하게 해주는 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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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세상은 ‘긍정’을 강요하는가? -
    from 도서출판 부키 2011-04-05 21:07 
    왜 세상은 ‘긍정’을 강요하는가? - 긍정의 배신 밝고 낙천적이고 명랑한 사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환영받는다. ‘긍정’이라는 말은 좋은 의미로 쓰일 뿐, 결코 경계하거나 삐딱한 눈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긍정’은 그 이름부터 이를 거부하거나 기피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친화성 또는 강제성을 담고 있다. 흔
 
 
 
마중물 - 마음을 여는 신뢰의 물 위즈덤하우스 한국형 자기계발 시리즈 3
박현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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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내가 살던 동네는 깡촌이었다. 그래서일까? 남들이 하지 못한 경험을 많이 했다. 지금이야 아이들이 논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겠지만 그 시절 정말 원없이 놀았던 것 같다. 동네에 오락실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롤러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롤러장이나 오락실은 한 시간에 한대씩 있는 버스를 타고 30분식 나가야 하는 깡촌인지라 노는 것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주로 하고 놀던 놀이는 봄에는 산에 가서 칡뿌리 캐기, 머루 다래, 으름 같은 산열매 따먹기, 여름이면 아직 익지 않은 파란 대추 따먹고 갓 익은 호두 까먹기, 동네 개울에서 물장구 치기, 가을이면 이것저것 먹을 것들이 많으니 손에 잡히는 것은 따먹기만 하면 되니 패스, 겨울이면 구슬치기와 자치기이다. 사시사철 즐겨하던 놀이는 공기, 비석치기, 딱지치기, 고무줄이다. 그렇게 한참을 놀다가 마당에 있는 샘에 가서 수돗물로 목을 축이고 다시 논다. 그런데 동네에 모든 집이 수도가 놓여졌던 것은 아니다. 집 안이야 수도가 있겠지만 샘에는 펌프가 있는 집이 10에 5은 있었다. 무더운 여름 놀다가 물 한바가지를 펌프에 넣고 펌프질은 하면 시원한 물이 콸콸 나왔고, 이 물에 등목을 하는 기분은 어린 나에도 무척이나 좋았다. 펌프에서 물을 퍼 올리기 위하여 퍼붓는 한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고 한다. 나중에야 이것이 마중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에는 전혀 몰랐다. 그렇지만 마중물이라는 용어를 몰랐을 뿐이지 마중물이 무엇인지, 그리고 마중무링 없으면 펌프에서 물을 퍼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득했던 것이다. 

  이런 삶은 중학생이 되어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어차피 중학교도 시골에 있는 중학교이니 그다지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한시간 걸어가야 한다는 것만 빼고는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가 고등학생이 되었고, 고등학교는 시내에 있는지라 버스를 타고 통학을 했다. 물론 나는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3년을 지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 버스를 타고 통학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마 그때부터 내 삶이 바뀐 것 같다. 공부에 그다지 묙심이 없어서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놀았다. 33살의 젊은이가 세시풍속이라고 책에서 보던 거의 대부분의 것들을 해봤다면 요즘 누가 믿을 것인가? 같이 어울려 놀던 친구들은 어느새 경쟁의 대상이 되었고, 밤낮없이 기숙사에 박혀서 공부를 했다. 그래도 체육대회가 되면 잠시 경쟁을 멈추고 밤을 새면서 플랭카드를 만들기도 하고, 선도부로 있으면서 규율을 어기고 대들던 후배 때문에 고3이 수업도 째고 서넛이 둘러 앉아서 대책 마련에 골몰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내 얼굴에 금칠하는 것 같지만 성적이 좋았기 때문이다. 전교 10위 안에 드는 사람들이 모여서 수업 한 시간 제끼고 대책 회의를 한다고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우리는 그야말로 학교의 꿈나무였기 때문이다.(물론 그 당시 같이 놀던 친구들, 수업 배먹고 대책 회의를 했던 녀석들은 거의 대부분 서울의 상위권 학교에 진학했다.) 

  그래서일까 경쟁이 있었지만 아직도 내게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은 즐겁고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전교조 활동을 하시던 선생님을 중학생 대 만났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민족 사관이라는 새로운 것을 배웠고 물적 토대로 역사를 해석하는 방법도 배웠다. 국어 수업 시간에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쟁가와 민중가요를 배웠고, 노래마을 사람들, 노찾사의 노래를 접한 것이 이미 중학생 때였다. 당시 선생님들이 우리에게 가르쳤던 것은 물론 공부이기는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사회생활에 필요한 것은 경쟁이 아니라 상생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경쟁, 상생, 승자독식이라는 세련된 말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기본 사고는 여기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온 내가 교회에서 젊은이들을 가르치게 되었고 그들을 보면서 가장 아쉬운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나에 비하여 영어도 잘한다. 나는 그 흔한 토익 토플 시험을 본 일도 없고, 공부를 해본 적도 없다. 영어보다는 국어를 먼저 배워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국어가 문학이 더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랐어도 결코 도태되지 않았고, 지금은 사회에서 내가 맡은 일을 비교적 잘 해내고 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가르치고 있는 청년들은 스펙이라는 것에 열중한다. 강남이라는 입지적인 조건 때문일까 그 경쟁은 더 치열하다. 그런데 그렇게 스펙 쌓기에 열중하는 그들이 나보다 좋은 학교에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맡고 있는 청년들이 다른 사람에 비하여 더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 애스고 있음에도 그들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폭을 넓히기 위하여 수시로 책을 선물하고 빌려 주면서 나도 책을 더 읽게 되었다. 최소한 무슨 내용인지는 알고 권하자는 생각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러던 차에 접하게 된 책이다. 경청과 배려를 워낙 재미있게 읽었고 얻은 것도 많았던지라 이 책이 그 시리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주저 없이 택했다. 제목이 마중물이라는 것도 냐게 큰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책을 열심히 읽던 중 내 마음을 확 뚫어주는 대목을 접했다. 의사가 주인공에게 하는 대사로 여기에 그대로 옮겨본다.  

  "요즘은 모두 스펙 쌓기에 골몰하고 있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뒤질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저는 색다른 의미에서 스펙 쌓기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협력을 통해 어떤 일들을 성취했는가? 나 자신의 이익보다 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한 행동을 얼마나 해봤는가? 그런 경험의 축적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이현은 남과는 다른, 자기만의 모럴 스펙을 쌓아가고 있는 셈이지요"(P.141 ~ 142) 

  스펙이라는 말에 알러지를 일으키던 내가 스펙이라는 말을 이렇게도 사용할 수 있구나 하면서 고개를 그떡이게 만든 것은 모럴 스펙이라는 말이다. 여러가지 스펙을 쌓고 살지만 그것이 결국은 신외지물인 이유는 그 스펙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노력해서 샇았지만 그것이 내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고 내 삶을 더 나아지게 하지 못한다. 쌓으면 쌓을수록 삶을 더 불안하게 만든다. 개인간의 군비경쟁인 까닭이다.  

  나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여러가지 스펙을 쌓는 열정을 조금만 돌려서 모럴 스펙을 쌓는데 썼으면 좋겠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마중물, 모럴 스펙도 결국은 상생의 의미가 아니던가? 사회는 더 치열해지고, 더 살벌해진다. 정글의 법칙이 난무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럴 스펙, 상생을 포기해 버린다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사람의 이성이나 감성이 아닌 동물의 본능과 투쟁만이 남지 않을까?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겠는가? 아니다. 어저면 지금 이미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중물의 정신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는 교육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간만에 책 읽는 즐거움에 빠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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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소통의 정치를 논하다
박홍갑 외 지음 / 산처럼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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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의 정치라? 

  모든 위정자들은 소통의 정치를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소통의 정치라는 정치철학을 삶으로 구현하며 살아왔던 위정자들은 손에 꼽는다. 소통의 정치는 텅빈 구호요, 자신들의 이익을 포장하는 화려한 포장지로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 주면 그걸로 자기의 역할은 다 한 것이다. 군주도 그리고 군주를 보필하는 지배계층도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상의 모든 이치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지배 계층 중에도 소통의 정치라는 철학을 삶으로 구현하는 것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을 왕의 남자라 부른다. 그들은 왕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권력에 아부하지도 않고 목숨걸고 왕명을 제대로 출납하면서, 그날그날의 내용들을 장인정신으로 기록하였다. 승정원에 대한 저자의 평가가 이렇다. 물론 나는 이러한 저자의 장미빛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기록 정신에는 존경을 표하지만 그들의 고고한 학처럼 그렇게 깨끗하게만 살았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승정원 일기라는 제목을 통해 알듯이 승정원에서 그날의 상황을 기록해 놓은 책이다. 그날의 날씨와 정치적인 사안들, 이에 대한 왕의 대응과 정책의 실현 과정들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책이다. 단편적인 기록들이지만 그것이 세월을 두고 쌓이게 된다면 대단한 자료가 된다. 일이십년만 쌓여도 대단한 것인데 그것이 수백년 동안 쌓였다면 그 가치는 말로할 수 없다. 전란의 역사 속에서 잃었던 일기들도 많지만 복구되기도 하고, 우연히 전란을 피하기도 해서 쌓여 있는 것이 200년 분량이 넘어가니 그 대단함은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방대한 분량을 남기기 위하여 모든 열정을 투자한 왕의 남자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소통이 정치라는 제목답게 이 책은 승정원 일기를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그 역사를 바탕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소통을 바라본다. 한 부분을 살펴 보자.  

  이날의 모임은 국왕 영조가 평소 커다란 민폐로 인식하던 공인과 시전 상인들의 고충을 듣고 해결하기 위한 자리로, 특히 이 시기 이후 국왕은 자주 공인 등을 면담하면서 그들의 문제들을 바로 해결하고자 했다. 오늘날 대통령이 재래시장을 도는 모습들이 가끔 TV 화면에 나오긴 하지만, 문제점이 바로바로 해결됐다는 후일담을 들은 기억이 없다. 전통 왕조사회의 단순한 구조와 체제라는 점을 감안한다 할지라도, 영조의 대민 접촉은 분명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신문이나 방송, 그리고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구중궁궐에 갇혀버리면, 그야말로 캄캄한 별천지 세상이기 때문에 국왕은 대민접촉을 중요시했던 것이다.(P.67) 

  왕과 백성이라는 신분의 차이가 날지라도,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아갈 수 있는 구중 궁궐이라고 할지라도 세상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세상과 분리되어 소통을 포기해 버린다면 그는 왕의 자격이 없다. 왕이 백성들을 만나러 가고, 별 효용성은 없지만 신문고라는 제도를 둔 것도, 암행어사를 파견한 것도 결국 소통이라는 정치 철학의 구현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제도를 통하여 약간이나마 개선이 이루어지고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것을 만천하에 알려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어 그들의 불만을 희석시키는 것 또한 고도한 정치 기술이라 할 수 있겠다. 요는 아주 티끌만한 것이라도 소통이라는 가치가 현실에 나타나는 케이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저자의 말마따나 대통령들이 재래시장을 방문한다. 국회의원들이 한표를 부탁하면서 재래시장을 살리겠다는 정책을 제시한다. 재래시장의 상인들은 그 말을 믿으며 반갑게, 혹은 황송하게 악수를 한다. 지지를 약속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정말 그 말을 믿는 것일까? 내가 보기엔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드물다. 기분에 취해 황송하게 악수는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이 아닐까? 되면 좋고 안되면 원래 저래라고 지나가지 않을까? 그동안 오죽 많이 속았으면 이런 말을 할까? 그동안 얼마나 말만 무성했지 소통이 현실이 되지 않았다면 그럴까? 그 자리에서 표를 부탁하며 악수를 하는 사람도, 지지를 약속하면서 악수를 하는 사람도 모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으니 말그대로 소통은 멀리 사라지고 오직 불통만이 남아 있는 답답한 현실이 아닌가?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이 사라들에게 소통을 현실로 보여줬으면 좋겠다. SSM규제문제 같은 정책을 정쟁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쓸데없이 반짝하고 지나가는 이벤트성 사업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서 떡볶이 한번 먹고, 순대 하나 먹고 "나는 국민의 마음을 대변하네, 재래시장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네."라는 농담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린이날 결손 가정 아이들을 초대해서 "어린이에 관심이 있네, 혹은 불우한 아이들의 처우를 개선하겠네."라는 농담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급식비 무상이라든지, 세금 감면이라든지, 그라민 은행같은 소액 대출 은행 제도를 만드는 것이 더 소통을 현실화 하는 것이 아닐까? 

  왕의 남자들은 투철하게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이 왕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대통령 옆에도 대통령의 남자들이 있다. 그들이 기록하는 국가 기록은 어떤 식으로 평가를 받을까? 과연 소통의 정치철학을 어떻게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을까?  

  지금은 불통을 소통으로, 못살겠다는 몸부림을 북한의 지령을 받고 행하는 불순한 행동으로 둔갑시키는 둔갑술만 난무한다. 전우치도 울고가는 둔갑술이 아니라, 반짝 이벤트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G20같은 대형 이벤트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국민들이 느낀느 불평이 다만 한가지라도 해결되었으면 좋겠다.(코엑스 거리를 막아 놓은 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불편함을 가져다 주었는지 알기는 아는 것일까?) 티끌만한 소통이라도 현실이 된다면 좋겠다. 비록 그것이 희망고문이요, 고도의 정치 기술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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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교양강의 -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은 지혜와 성찰 돌베개 동양고전강의 3
진순신 지음, 서은숙 옮김 / 돌베개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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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달전 아내가 홈쇼핑에서 갈치를 구입했다. 비교적 싼 가격에 꽤 많은 양이 왔기에 기대했다. 그러나 상 위에 올라온 갈치 조림은 생각만 못했다. 뼈를 발라먹는 것, 생선을 손질하는 것을 귀찮아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모든 손질을 다 마쳐온 생선은 얇은 절편 같았다. 생선 살만 들어 있어서 요리를 하면 아이들은 먹기 좋겠지만 생선의 참 맛과는 거리가 멀다. 생선은 여러부위를 먹어야 그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다.(이런 말하면서 나도 머리 토막은 먹지 않지만) 특히 갈치의 별미는 가는 뼈까지 으적으적 씹어 먹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나로서는 살만 발라서 온 갈치는 이름만 갈치이지 갈치가 아닌 것이다. 

  왜 뜬금없이 갈치 이야기를 하느냐, 이 책이 꼭 갈치같아서 그렇다. 논어는 동양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가 있는 책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분량도 방대하다. 그런 책을 300 페이지도 안되는 분량으로 옮긴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요약을 할지라도 불가능하다. 이것은 공자께서 살아 오신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순신 선생은 많은 사람들이 논어에 흥미를 갖게하겠다는 일념으로 이 무모한 작업을 시작하신 것 같다. 그의 노력은 가상하다만 역시나다. 에세이 형태로 풀어나가겠다는 말과는 달리 그다지 에세이로 느껴지지 않고 딱딱한 설교를 듣는 것 같다. 게다가 논어에서 중요한 부분들을 선별하여 뽑은 것까지는 좋으나 그 결과가 논어를 살만 발라져 온 생선토막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내용은 논어를 이야기하지만 사람들에게 논어가 아닌 다른 것을 보여주는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흥미를 유발시키겠다는 본심과는 달리 논어에 대해 가지고 있던 흥미마저도 없어져 버리게 된다. 

  게다가 한문을 착실하게 배운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는 부분은 패스다. 물론 이 부분은 어쩔 수 없고 당연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내용을 해설하면서 한문 문법을 가지고 설명하는 부분은 도무지 외계어를 듣고 있는 기분이랄까?  

  신영복 선생이 고전을 읽는 재미라고 했다. 사기와 손자병법은 정말로 재미있게 읽었다. 그 덕에 이 책을 사게 되었는데, 만약 이 책을 먼저 접했더라면 다른 책들은 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고전을 읽는 재미도 신영복 선생처럼 논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 본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본래 내용을 알고 있으니 이 부분이 이래서 중요하구나, 이 부분이 이렇게도 해석이 되는구나 하면서 재미있게 읽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논어의 본래 내용을 알지 못하는 나에게 이 책은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해주는 그런 얄팍한 책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혹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읽지 말 것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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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연습 (양장)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좋은 책 1
로렌스 형제 지음, 오현미 옮김 / 좋은씨앗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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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제목이 어떤 사람에게는 눈에 거슬릴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의 임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인데 사람이 연습하고 훈련해서 이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자칫 교만하다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난 이 말을 참 좋아한다. 임재야 그분의 권한이지만 최소한 내 곁에서 그분에게 다가가도록 노력하는 몸부림은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연습은 매우 유명하다. 어느 특별한 자리가 아니라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 하나님을 만났던 그의 경건한 삶은 우리에게 경건한 삶이란 무엇인지 보다 잘 가르쳐 준다.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경건이라는 말을 많이 오해한다. 경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하고, 번잡한 곳을 떠나서 조용한 곳을 찾아야 하며, 무엇인가 뜨거운 체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건하기 위해서 터가 좋은 기도원을 찾아가고, 능력이 많이 일어난다는 집회를 찾아다닌다. 무슨 집회, 무슨 집회라는 타이틀 밑에는 웃기지도 않는 글들이 써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마음에 근심이 있는 사람,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 무슨 일을 하든지 안 풀리는 사람. 집회를 통하여 병이 치유받고, 소원이 성취되고, 인생이 바뀌기를 바랍니다." 

  이런말 하면 그렇지만 점집을 찾아가서 점을 보고 굿을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한 쪽은 신령님의 이름으로 다른 한 쪽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만 다를 뿐이다. 이게 과연 경건이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겠는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이 양을 치던 곳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것 같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그 거룩한 곳은 그가 매일 양을 몰고 다니던 곳, 즉 그의 삶의 자리였던 것이다.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니 하나님은 일요일만의 하나님이 되어버리는 것이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했던 엘리야는 불, 지진, 바람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세미하게 들리는 음성을 들었다. 로렌스 형제도 마찬가지다. 설거지 가운데, 포도주를 사러 떠나는 먼 길에서, 청소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고 세밀한 음성을 들었던 것이다. 나 또한 이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 애를 쓰지만 쉽지가 않다. 내 삶의 자리가 너무 번잡하고, 하나님의 음성은 너무나 세밀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내 귀에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번잡함을 줄이고, 세밀한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면 언젠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을 수 있지 않을까? 내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사인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PS. 번역이 그래서일까? 아니면 내가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해서일까? 글이 주는 감동이 매우 약하다. 생각보다 못한 책의 감동이 허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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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11-10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오래 전에 읽었어요.
정말 말씀대로 유명한 책이라고 하면서 감동은 그다지 없었죠.
번역이 좀 그런가 봐요. 그땜에 기독교 서적 읽는 걸 꺼려하기도 했구요.
C.S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던가? 그 책도 보십시오.
난 도무지 이해 못하겠던데 십중팔구는 번역의 문제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나아졌는지 모르겠어요.ㅜ

saint236 2010-11-10 14:04   좋아요 0 | URL
그것도 보고 있는데 그나마 이것보다는 조금 낫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