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
이스마엘 베아 지음, 송은주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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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랫동안 눈팅만 하다가 반값 세일이라는 특별 이벤트를 맞이하여 갑작스레 산 책이다. 시에라리온 소년병의 이야기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실상이 이렇게 참혹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일제시대와 6.25라는 민족의 아픔을 겪으면서 우리의 할아버지들과 아버지들은 애국이라는 미명하게 전쟁터에 끌려갔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란 세대도 이미 나이를 먹어벌서 중년을 향해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소년병의 이야기는 별나라의 이야기요, 상상 속에서도 존재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더군다나 물 한잔 마시는 것보다 사람 죽이는 것이 쉬웠다는 그들의 이야기는 "에이 설마~"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게 한다. 게다가 선입견이랄까? 마약을 통하여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쫓아내고, 소년병들을 전투에 참가시킨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반군만의 일이라고 착각했던 것은 무슨 이유런지? 

  우리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제목은 강원도 산골에서 할머니와 티격태격하는 철없는 소년의 삶을 떠올리게 만들뿐이다. 몇년전 만들어졌던 집으로라는 영화, 딱 그정도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무에 힘들겠는가? 그저 돌아가면 되는 것이지." 어떻게든 집을 떠나보려는 우리들에게 집이란 구속의 대명사요, 벗어나고 싶은 굴레이다. 그러나 이 당연한 이야기가 배부른 소리였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어느날 아무런 이유없이 한 마을이 전쟁에 휘말린다. 이 전쟁은 그 마을뿐만 아니라 이미 여러 마을을 휩슬었고, 결코 그 기세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살길을 찾아 도망을 떠났고, 한숨 돌린 순간 가족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전국을 헤맨다. 젊은 사람들이 그러는 것도 힘들겠거늘 12살짜리 소년(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꼬맹이)이 찾아 헤매는 길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마치 마녀의 숲 속에 버려져 죽을날만 기다리고 있었던 헨젤과 그레텔터럼 이들은 전쟁이라는 복마전의 한가운데에서 하루하루 생존을 위하여 버틸 뿐이다. 그러다 눈 앞에서 가족을 잃은 아이들, 복수심과 생존에 대한 본능 때문에 결국 철저한 전쟁기계가 되어가는 어린이들! 내 아이들이 장난감과 과자를 사달라고 떼를 쓸때 그들은 AK-47을 들고 식량과 마약을 얻기 위해 다른 이를 공격하고 죽여야 했다. 

  도대체 누구의 책임일까?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인가? 이 책은 이 질문을 끊임ㅇ벗이 던지면서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까발린다. 그렇기 때문에 더 설득력이 있으면서도 더 서글프다. 집단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아이들, 맹목적인 애국심과 충성심에 불타는 아이들, 동심의 세계보다는 살인과 피에 더 익숙한 아이들, 이들의 잃어버린 영혼과 마음은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그런 나라에 태어난 그들의 팔자를 탓해야 하나? 아니면 그들을 먼자 두고 떠난 부모를 탓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이들을 전쟁에 사용하고 있는 어른 병사들의 책임인가? 그 무엇하나 분명하지 않다. 단지 분명한 것 하나는 결코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가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그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들은 그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진심어린 말 한마디, 자신들의 마음의 아픔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그 말 한마디에 목말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이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산 책 한권이 그들에 대한 내 미안한 마음을 전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나도 무엇인가 하나 해야할텐데라는 미안한 마음에 책 한권을 산다. 그리고 읽고, 또 읽는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저자가 제일 마지막에 기록한 원숭이와 사냥꾼이라는 부분이다. 원숭이를 쏘면 엄마가 죽고, 쏘지 않으면 아빠가 죽는 딜레마에서 자기는 엄마에게 미안하지만 원숭이를 쏘겠다고, 그것이 다른 사냥꾼을 같은 비극에 빠지지 않게하는 가장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는 그의 말은 내 마음에 묵직한 감동을 전한다. 나는 과연 그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까지 생각할 수 있을까? 멀고 먼 길을 돌아 집에 돌아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여유요, 용기요, 현명함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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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체험이다 - 의지.감성.지성.오감 하나님을 체험하는 네 가지 통로, Experiential Worship
밥 로글리엔 지음, 김동규 옮김 / 예수전도단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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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예배자가 하나님과 만나는 것, 그리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세상 가운데 서기로 다짐하는 것, 이것이 예배가 아닐까? 그렇다면 살아 있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에배는 무엇인가? 저자는 예배는 체험이라고 말하다. 예배를 체험하기 위해서, 예배의 감동을 느끼기 위해서, 지성적으로, 감성적으로, 의지적으로 모든 것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 살아 있는 예배를 드리는 비결이다. 그리고 이것을 위하여 예배를 돕는 이들이 최선을 다해 예배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배를 위한 기획회의, 미리 드려지는 리허설 등 예배 또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 일견 낯설게도 느껴지지만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예배는 그냥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준비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강력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들어 예배에 대하여 많이 고민하고 있는데 많은 것을 던져준 책이다. 예배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은 읽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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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 상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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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완결되고 난 다음 시원하면서도 섭섭함을 느꼈다. 한해에 한권씩 낸다는 말을 하면서 거의 15년을 끌어온 로마인이야기가 끝을 냈다는 것에 대해서 시원함을 느꼈다면 이젠 무슨 낙으로 살아가나라는 생각은 섭섭함일 것이다. 그러던 가운데 시오노 나나미의 다른 책이 나왔다는 것은 참 즐거운 소식이었다. 몇번의 망설임 끝에 상권을 구입했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역시 나나미의 책은 재미있다."였다. 

  요즘들어 대세는 사극인가 보다. 용의 눈물, 장보고, 불멸의 이순신, 천추태후, 그리고 선덕여왕까지. 온갖 사극들이 우리의 안방을 차지하고 있지만 걱정이 앞선다. 재미를 통하여 시철률과 역사 의식을 고양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역사를 너무 소설화 해버린다는 단점은 결코 무시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느 학생이 물어보더라. "신윤복이 여자예요?" 이정도면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내가 나나미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나미의 책은 어떻게 보면 소설같지만 철저하게 역사적인 고증을 가지고 쓴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상상한 부분은 분명하게 상상력이라고 밝힌다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 어느 교수님이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질문한 후배에서 어디서 잘못된 쓰레기를 읽고 그런다고 무시했던 일도 있었지만, 그분이 읽기는 읽으셨는가? 나나미가 읽은 그 많은 1차 사료들을 말이다. 

  여하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열었다. 첫장에 이렇게 써 있었다. "해적" 

  지금까지 로마제국의 멸망을 그렇게 안타까워하던 나나미는 로마의 멸망과 함께 해적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사회적인 현상이요, 새로운 직업군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로마제국의 분해와 멸망은 단순히 한 국가의 멸망이 아니라 지중해의 문명을 요동치게 만드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지중해를 내해라고 부르던 로마의 멸망은 지중해에서 안전과 평화라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걷어버렸다. 그것이 군사력에 의한 평화이든, 종교에 의한 평화이든 간에 지중해에서 평화가 사라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맞물려 북아프리카에서의 이슬람 세력의 대두는 지중해를 한층 더 복잡하고 안전하지 못한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교도에 대한 지하드 의식과 산업의 붕괴, 그리고 호전성은 해적이라는 새로운 직종을 출현시켰고 발전시켰다. 로마의 붕괴는 이렇게 해적의 역사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또한 해적의 역사는 이탈리아에 해양국가인 도시국가를 출현하게 만들었고, 그들로 인하여 다시한번 불완전하나마 pax가 시도되었고, 이것은 부의 증가와 르네상스를 불러 일으켰다. 논리적인 비약이 상당히 강하지만 우스개소리로 결국 르네상스는 해적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으려나?  

  이 책과 로마인 이야기의 공통의 주제는 평화와 안전보장이다. 물론 나나미가 외국에서 오래 살았다고 해도 일본 태생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하필 산 곳이 이탈리아 쪽이어서 그런지 군사력에 의한 평화를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많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녀가 호전적이어서라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평화를 위한 방법을 간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곳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평화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의 댓가로 얻어진다는 것이 나나미의 평화에 대한 주장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통하여서 노력을 통한 평화 획득의 예를 보여줬다면 이 책을 통해서는 노력을 하지 않아 평화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책을 보면서 한 가지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 시대는 평화로운가?" 

  물산의 이동과 안전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우리 시대는 결코 평화롭지 못하다. 평화롭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노력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불안 가운데 살면서 만성화 되어 평화라고 착각하고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화로울 것인가? 그녀의 책을 통하여 한가지 현실적인 방법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녀가 베네치아의 항해방법을 설명하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베네치아의 배는 출발하면서 선장과 1등급, 2등급 선원만 태우고 출발한다. 아드리아해를 빠져나가면서 항구마다 들러 신선한 음식을 보충하고, 슬라브인들을 노잡이로 고용한다. 그들에게 물건을 팔 수 있는 기회와 해적이 아니어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전략은 훌륭한 결실을 맺어 슬라브인들은 베네치아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베네치아와 운명을 같이 했다." 살길을 마련해 준후, 평화의 제스쳐를 취하는 것이, 막바지까지 몰아붙인 후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말이다. 

  요즘 북한과 남한의 모습을 바라본다. 살길을 마련해주고 화해를 모색하기 보다는 막바지까지 밀어붙이고 항복하면 그 다음에 이야기하자는 식의 강경책을 고수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럴 것이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찌보면 강경책 일변도로 나서는 정부의 대북정책을 보면서,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이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몰아붙이다가 평화가 깨지면 그 다음에는 해적이 횡행하는 난세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이, 그리고 그 어려움은 고위층 인사가 아니라 우리같은 일반 서민들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것임을 역사를 통하여, 그리고 이 책을 통하여 보게 되지 않는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개성공단, 금강산 여행, 백두산 여행, 대북 지원은 단순히 퍼주는 것도, 상대방에게 전쟁자금을 마련해 주는 것도 아니다. 평화를 위해 치르는 대가이다. 물론 군사력도 보유하고 있어야겠지만 그것은 최후의 수단이지 최선의 수단은 아니다. 너무 근시안적으로 북한을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북 강경책은 그들로 하여금 한 가지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뿐이다. 함께 공생할 수 있고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대북정책을 제시하고 운용하는 정부가 되길 소원해본다. 비록 헛된 바람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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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니 2009-08-27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화를 실천하는 영역으로 북한을 초대해야 하는데. 쉽지는 않은거 같아요.
내부의 반대자를 이해시키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다가, 북한의 강경세력도 평화를 원치않으므로, 내부와 외부의 반대자 모두를 잠재울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역시 현실은 참 많은 변수가 존재합니다. 그래도 평화의 영역으로 조금이라도 나아가야겠죠? ^^

saint236 2009-08-28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그래도 공생의 길을 찾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되겠죠.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공생이 불가능하면 공멸이니까요.
 
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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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작품이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작품인데 원래는 지옥문 위에 앉아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왜 사람들이 죄를 지을까?"라는 고민을 하고 있는 주제를 가진 작품이란다. 그러나 이 작품이 학교 곳곳에 설치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우스개 소리를 만들어 내었다. "화장지가 떨어졌는데 어떻게 해야하나?"라는 고민을 하는 중이라고. 어찌되었던 이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던졌던 질문은 명확하다. "넌 생각이 있는가?"라는 단도직입적인 질문 말이다. 

  신입생 때 선배로 들었던 가장 많은 질책은 "책 좀 읽어라."와 "생각 좀 하고 살아라."였다. 당시에는 무척이나 짜증나는 말들이었지만, 어느새 나도 그 말들을 입에 달고 살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에게 해주는 말이 "책 좀 읽어라."와 "생각 좀 하고 살아라."라는 말이다. 책을 읽고 생각하라는 말은 고민하라는 말이다. 하루하루 그저 때우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고민하라는 말이다. 힘들고 어렵지만 고민한만큼 성장한다는 것을 내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내가 나이가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다. 32살이면 아직도 한창나이이다. 아니다. 어디가서 나이를 밝히기에도 창피한 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내가 보기에도 20대는 너무 쉽게 살아간다. 쉽게 산다는 말이 그들이 아무 것도 안하고 산다는 말이 아니다. 열심히 공부라고, 토익 점수에 목을 맨다. 그런데 그것뿐이다. 스킬을 채우기 위해, 스펙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뿐이다. 전혀 성장하지 않는다. Philasophy라는 단어가 철학이라는 뜻은 알고 있겠지만,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톨스토이와 도스트예프스키가 무슨 책을 썼는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실제로 읽지는 않는다.  철학의 개념을 깊이 이해하기 보다는 철학사의 흐름을 암기하는 것으로 만족해한다. 그러니 깊이가 없다. 

  인생의 의미를 고민한다는 것을 쓸모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나라는 존재의 실존이 무엇이고, 나는 왜 살아가는가 묻지 않는다. 고민하고, 고민하고, 고민하는 것이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일텐데 그 호기심이라는 인자, 고민이라는 DNA가 마치 현대인들에게는 사라져 버린 것 같다.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누군가 내 인생을 결정해 주길 원한다. 주어진 길은 잘 가지만 자기가 갈 길을 스스로 만들지는 못한다. 과연 이게 성숙한 인간의 모습일까? 

  고민은 시간 낭비가 아니다. 내가 살아 있음의 증거이다. 고민을 통하여, 내 인격이 성숙해지고, 내 사고의 깊이가 깊어진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인간은 비로소 성장하는 것이다. 성숙한 인간이란 사고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지, 연봉과 나이와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고민하는가? 그 시간이 너무 아깝다 생각하는가? 착각하지마라. 그 시간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고민하는 깊이만큼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시간이 없다. 고민하는 그 시간만큼 활발하고 솔직하며, 생생한 시간은 없다. 이것이 고민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유익일 것이다. 고민이 되는가? 고민해라. 아주 깊이 고민해라. 바닥까지 내려갈지라도 고민해라. 그 끝에서 삶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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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을 리뷰해주세요.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 - 비밀스러운 종교의 역사
에두아르 쉬레 지음, 진형준 옮김 / 사문난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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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주의에 대해 무엇인가 밝혀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책을 열었다. 거기에데가 출판사 이름이 사문난적이라. 저자는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요, 1차대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읽었다는 책의 소개는 내 궁금증과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라마, 크리슈나, 헤르메스, 모세, 오르페우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예수라는 챕터의 주인공들 또한 심상치가 않았다. 무엇인가 있는 책이라는 느낌이 그냥 팍팍 왔다. 

  그러나 500페이지라는 방대한 분량을 넘기면서 피식거리는 웃음과 실소가 그치지 않았다.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이라는 거창한 제목에 비하여 내용은 종교진화론에 입각한 환타지 소설일 뿐이었다. 아리안족에게서 부터 시작된 종교가 인도를 거쳐 이집트를 중심으로,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아우른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궁금하다. 태양의 아들들과 달의 아들들, 그리고 다신교와 일신교를 종교를 구분한 다음 둘 사이의 전쟁으로 인류의 역사를 정의한 것도 재미있다. 거기에다가 예수를 가장 진화한 단계의 선각자로 이해하는 것도 흥미롭다. 아마도 유럽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했겠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환타지 소설은 한단고기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좋았다고, 신비주의의 핵심을 알게 되어서 좋았다고 서평을 기록했는데 왜 나는 그렇게 흥미가 가지 않았는지. 읽으면서도 계속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은 그래도 뭐가 있겠지, 이렇게 끝나지 않겠지라는 기대는 정말 기대였을 뿐이다.  

  신비주의가 인간의 존재에서부터 출발한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인간의 약함, 존재의 유한함, 상황의 불확실함에서부터 신비주의가 태동했다는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비주의가 고작 남에게 알리지 않고 자기들끼리 돌려먹는 것이라면, 클럽제로 운영되는 것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지 않을까?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권위에 기대어 신도들을 농락했던 중세의 사제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또한 통과 제의라는 것을 통해 얻는 것 자체가 너무 유치하다. 죽음이라는 깊은 체험을 통해서 결국 얻게 되는 것, 배우게 되는 것이 강신술이고, 접신술이고, 마술이라면 너무 유치하지 않은가? 작두타고, 굿하고, 자신을 잃고 황홀경에 빠지는 것, 이것만이 신비주의의 전부인가? 

  게다가 위대한 정신이라고 부르는 초월자의 모습은 무엇인가? 각자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더 추상적인 개념이 되어 전혀 느낌이 다가오지 않는다. 저자가 역시 철학자라는 말장난 잘하는 사람이라는 편견이 들 뿐이다. 

  마지막으로 일신교를 하나로 묶어 버리는 시도 또한 무모했다. 신비주의라는 틀에서 그리스 철학과, 종교, 유태교, 기독교, 힌두교, 라마교 등등 세상의 모든 종교를 섞어 버리는 이건 죽도 밥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종교간의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을 없애고자 각 종교의 특성을 없애버린 것은 빈대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운 격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예수를 최종 진화형의 선각자로 그리다보니 이슬람이라는 거대 종교가 빠져버린 우를 범하게 되었다. 이슬람에는 마치 신비주의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달까? 

  신비주의를 너무 마술적인 것으로 몰아간 것도, 그리고 너무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몰아간 것도 이 책을 재미없게 만든 이유가 아니겠는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정말 크게 들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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