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심층을 보다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들어가는 말 

이책은, 저자의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이후 두 번째로 읽은 책이다. 이 책을 들으면 우선 두 가지 정도로 놀라는데, 하나는 그 두께에 놀라고, 또 하나는 종교 사상가들이 이렇게 많았나 하는 것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적어도 나는 그랬다).  특히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에히리 프롬이나, 빅터 프랭클 같은 사람은 세계적인 학자로 보지 굳이 종교 사상가로 볼까 싶기도 한데, 저자의 해석을 거치고 나니 아, 과연 그도 그렇겠다 싶기도 하다(빅터 프랭클은 말미에 다시 한 번 다뤄 보도록 하자).  그리고 한 가지 추가적으로 놀랄 것이 있다면, 몇 페이지 안 되는데도 각 사상가들의 생애와 사상을 저자가 어쩌면 그리도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해설해 놓았을까 놀라게 되지 않을까 한다.   

저자는 왜 이책을 썼을까?

그런데 읽으면서 느꼈던 건, 저자는 왜 이토록 많은 사상가들을 다룬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세계엔 이렇게 많은 종교 사상가들이 있다고 소개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백하건데, 나는 저자가 소개한 사상가들을 꼼꼼하게 다 읽지는 못했다. 워낙에 책의 두께에도 압도됐지만, 내가 과연 이 많은 사람을 다 알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내가 관심도 없는 이슬람이나 인도의 영성가들에 대해 알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대충 읽고 뛰어 넘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것도 편견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는 종교를 마약이라고 했지만, 그러기 이전에 편견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믿고 있는 신 이외의 신에 관심을 두면 계율을 어기는 죄를 범하고, 자신의 영혼을 해치는 일종의 강박 내지는 순정주의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을 정치에 이용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요긴한 무기로 사용는 것은 아닐까? 또한 그러면서 전쟁을 일으키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인류가 치뤘던, 그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허다한 많은 전쟁의 거의 대부분은 종교전쟁이라고 하지 않는가?(그런데 더 정확히는 종교 전쟁이라기 보다는 이념과 정치를 위해 종교는 강력한 것이라고 해야 옳은 것은 아닐까?)  

아무튼 종교는 때로 강력한 편견의 산물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랬을 때 비난의 화살을 맞는 건 아무래도 기독교는 아닐까 한다. 기독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통 인정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종교도 크게든 작게든 내가 믿는 신이 제일이라는 독선은 있다고 본다. 단지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화합과 관용을 주장하는 오늘 날의 분위기에 편승하고 맞혀 가다보니 묻혀 있을 뿐이지. 그래서 어쩌면 저자는 (전작을 통해서나) 이번 저서를 통해 진정한 종교의 화합을 이뤄 보고자, 종교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종교 사상가들의 삶과 사상을 알아보므로 우리의 시야를 넓혀줘야할 필요성에서 이책을 쓴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저자는 그것을  무엇보다도 기독교인에게 촛점을 맞출려고 한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추측해 볼 수가 있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의 독선적인 것을 완화시켜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저자 자신도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더 그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점은  저자가 '예수'라는 장을 가장 많이 할애한 것에서도 짐작이 어렵지 않았고, 무엇보다 '한스 큉'에 대한 부분에서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었다. 저자는 그렇지 않아도 한스 큉을 다석 유영모와 함께 가장 존경하는 종교가라고 밝히고 있다.   

한스 큉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한스 큉은 누구인가? "종교 간의 평화 없이는 세계 평화 또한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가톨릭 신학자이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기독교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 말씀을 '글로벌 윤리'로 채택하며, 세계 평화에 이바지 하자고 외치고 있다. 또한 그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비롯해 교파 간의 작은 차이들은 지엽적인 문제이며 이런 사소한 문제로 원수처럼 갈라져 있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역설한다.  또한 그는 원래 가톨릭 사제이기도 했는데,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들어 그것은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를 전해주는 것이라며, 전통적인 가톨릭의 가르침을 배격하고 새롭게 해석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문에 바티칸으로부터 출두를 명령받지만 이를 거절하다 결국 가톨릭 신학자로서의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한스 큉은 범종교적이었으며, 진정한 에큐메니스트 였다. 그는 세계 모든 종교는 서로 협력할 뿐 결코 경쟁하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고, 그 가운데 그리스도교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한스 큉의 저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곧잘 지인들에게 선물하며 그에 대한 애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신앙은 보수적으로 갖되, 학문은 통섭하라 

사실 저자가 왜 그토록 종교의 화합을 강조하는지 알 것도 같다. 하지만, 에큐메니즘은 진보 기독교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보수 기독교에서는 다소 경계하는 사상이다. 그런데 나는 저자가 전하는 '그리스도교의 선각자들'이란 큰  장에 소개된 여러 많은 선각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읽으면서 그들의 사상도 알고 보면 이렇게 저렇게 다른 타종교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란 걸 알 수가 있었다. 그들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보수 교회에서도 연구되어지는 사상가들이기도 하다.  나는 보수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인으로, 그런 걸 생각하면 보수 교회가 너무 사람들의 사고를 제한 시키고 조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도 된다. 그래서 우물안의 개구리를 만드는.  하지만 그러기 전에 '신앙은 보수적으로 갖되, 학문은 통섭'하라는 말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 스스로 빚장을 질러놓은 것에 좀 더 열린 자세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자각내지는 반성을 해 보게 된다. 

하다못해 저자는 '붓다'를 다루는 장에서,  성불 즉 '깨친 이'를 '초개인적 자아'로 설명하며,  예수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한복음 14장 6절)"는 말씀을 비교하기도 했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 성경절 때문에 예수 이외에는 다른 길, 다른 진리, 다른 생명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리스도교 이외에는 참된 종교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예수도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요한복음 5장 58절)"고 한 것을 보면 이때 '나'라고 하는 것도 역사적인 한 개인으로서의 예수를 지칭하는 것 이상이라는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441p)며 비교종교학으로서 해석을 시도한다. 그것에 대한 어떤 비평이나 판단을 유보하고 보면 이것도 나름 꽤 설득력 있는 해석이란 생각이 든다.  어찌보면 학문에는 해석의 차이와 진보만 있을 뿐, 진실과 거짓을 가린다는 건 그렇게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종교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종교란 무엇인가? 나는 오감남 교수가 '테라사 수녀' 대해서 쓴 부분에서 그 답을 찾고 싶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그녀는 수녀로서 평생을 인도에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헌신하다가 생을 마친, 지난 세월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최근 출판된 그녀의 전기에서, 그녀는 거의 50년 가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 의심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또 얼마 전, 최근 급부상한 어느 유명한 무신론자가 이것을 걸고 넘어지기도 했다. 봐라. 그렇게 믿음 좋을 것 같은 인도주의자도 신을 의심하면서 살지 않았냐? 그럼으로 신은 없다. 뭐 대충 이런 논조로 신은 없다고 말했던 것으로 안다. 물론 꼭 이것을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오강남 교수는 테레사 수녀가 겪은 의심에 대해,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신비적 사상가가 거쳐야 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테레사 수녀도 거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영적 깊이가 어느 경지에 이르면 유신론적 인격신에 대한 전통적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신은 존재나 비존재의 영역을 넘어서는 '없이 계신 이'쯤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는데, 어찌 아버지 같은 존재가 하늘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는 표층 종교의 전통적 신관을 그대로 답습할 수 있겠는가?(271p) 라고 설명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어찌보면 오강남 교수가 말하는 표층 종교에서 심층 종교로 가는 통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 종교에 입문할 때 표층 종교의 단계로 들어가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복을 열심히 비는 것이다. 소원도 아뢰고, 나름 은혜도 받는다. 하지만 깊게든 얄게든 그렇게 신앙 생활을 접한 사람은 반드시 영혼의 어두운 밤을 맞이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 밤을 통과해 더 깊은 신앙에 들어가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이 싫어 뛰쳐 나오게도 된다. 나도 짧지 않은 세월 신앙생활 하면서 늘 언제나 흔들리지 않은 믿음을 가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누구는 말했다. 의심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고. 그것은 맹신일 뿐이라고. 그래서 도마는 예수님은 성흔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을 것이다. 정말 테레사 수녀가 경험한 "영혼의 밤"은,   믿음 안에서의 의심은 있을 수 있으며, 얄팍한 표층 종교적 시각을 가지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고, 심층 신앙을 가져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즉 사고를 환치시킬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일 게다. 그러고 보면 종교는 무궁무진의 영역이며 이 세상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또한 인간의 좁은 사고의 틀을 끊임없이 깨며 인간과 삼라만상을 좀 더 깊고 넓은 차원으로 인도하는 매개체인지도 모른다.  

맺는 말; 다시 생각해 보는 빅터 프랭클의 '의미요법'  

나는 오강남 교수가 빅터 프랭클은 종교 사상가 반열에 놓을 줄은 몰랐다. 이미 빅터 프랭클의 '의미요법'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잘 아는 줄 안다. 그는 저 죽음 같고, 지옥과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살아 나왔던 사람이다. 그가 어떻게 나왔는지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유명한 저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란 책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그런데 나는 그에 대한 것을 이책에서 다시 한 번 대하면서 오늘 날과 같이 자살이 많은 시대에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삶이 조금만 힘들면 쉽게 자살을 생각한다. 사실 빅터 프랭클이 어떻게 살아 남았는가를 생각하면 우린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말을 하게될 것 같다.  

이 자살이 얼마나 쉽냐면, 어떤 초등학생이 우리 담임선생님은 너무 늙었다고 흉을 보았단다. 그래서 너는 안 늙을 줄 아냐고 했더니, 자기는 그때까지 안 살 거라고 말하더란다. 그러니까 늙기 전에 죽겠다는 말이다. 물론 그냥 하는 소린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도 살 이유가 없는 것인가? 생명 경시 사상이 너무나 팽배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살을 생각했다 다시 한 번 삶으로 돌아선 사람에게는 살아야 하는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하며,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되어야 한다. 바로 종교의 사명은 이것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하고, 실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이책을 읽으면서 종교란 인간에게 무엇인가란 질문에 조금은 다가가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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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7-20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 저는 종교에 관련된 책을 읽어보지 못했어요.
특별히 종교를 믿는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교를 싫어하는 편도
아니에요,, 군 복무햇을 때 주말에 종교행사를 기독교, 불교, 천주교
한번씩 다 가봤어요. 종교의 화합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는 편인데
서로 열린 자세를 가지고 관용적으로 이해하면 세상이
참 평화로울텐데 말이죠 ^^

stella.K 2011-07-20 13:20   좋아요 0 | URL
그래도 뭐 예전에 비하면 많이 양반된 거죠.
작게는 개선이 됐는데 크게는 달라진 것 같진 않아요.
더 강력해졌죠? 911 테러 같은 거 보믄...쩝
 

이태석 신부의 평전이 나왔다고 해서 산 책이다.  

작년 <울지마 톤즈>를 뒤늦게 챙겨보고, 보면서 많이 울었다. 지금도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다.  언젠가 그에 관한 책이 나오면 꼭 한번 읽어보리라고 마음 먹어었다.  생각 보다 조금은 일찍 나왔다는 느낌이 든다.  책이 생각 보다 그다지 많은 분량도 아니다. 과연 평전으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이무튼 이태석 신부의 평전이란 것만으로 충분히 읽어보고 싶게 만든다.  정진석 추기경이나 최인호 작가의 추천글도 이 책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것 같다.   

무엇보다 네잎 클로버 책갈피가 마음에 든다. 이 책갈피가 다른 책에 끼어왔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하필 이 책에 함께 오니 이태석 신부가 천국에서 나의 행운을 빌어주는 것 같다고 하면 오버하는 걸까?ㅋ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다. 마침 알라딘에서 반값에 판다고 해서 샀다. 반값에 팔고 있는 책중 사고 싶은 책이 어디 이 책 뿐이랴? 참고 참았다, 고르고 고른 책이다. 나온지도 오래됐지만 구판이 아닌 신판으로 반값에 파니 정말 안 사고는 못 베겼다. 

 

 

 

 

 

은희경 작가가 이제야 첫 산문집을 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꼭 언제가 한 번은 썼을 것 같은데...!  

그런데 이 책은 정말 사지 않고서는(아직 정식으로 발매되진 않았다. 예판중이다) 못 견디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데, 그것은 은희경 작가의 습작강의 노트가 별책 부록으로 끼어있기 때문이다. 난 또 왜 그런 게 궁금한지 모르겠다. 읽을 책도 많아 가급적 책을 사는 건 자제하고 있는데, 출판사에서 이렇게 나와주시면 사지 않고서는 못 베기긴다. 표지 장정도 마음에 들고. 한마디로 출판사의 마케팅에 손들었다. 

은희경 작가의 책을 주문할 때 같이 주문한 책이다. 얇은 책이 뭐 그리 대단할까 싶기도 하고, 더구나 인문학쪽이라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갖는 아우라는 대단한가 보다. 88페이지. 차 한 잔 값. 이 정도면 부담이 없어 보인다. 한번쯤 읽어줘도 되겠다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한다.  이 책에 대한 리뷰어들의 리뷰가 화려짱짱 하다. 나는 워낙  우물안의 개구리꽈라 이들만큼 분노할게 있을까 싶기도하지만 궁금하긴 하다. 

 

한 달 전인가? 많은 사람들이 개 미워하는 조선일보 주말판을 오랜만에 산 적이 있다. 몇년 전부터 우린 신문을 구독하지 않았지만, 그 몇년 전까지 본게 조선일보다. 조선일보가 다른 건 몰라도 주말판은 워낙에 잘 만들어서 그중 내가 좋아했던 건 당연 책을 소개하는 면이었다. 그런데 그때 비해 축소가 된 건지, 지면도 줄어든 느낌이고, 워낙에 인터넷 매체의 발달 때문인지 생각보다 별로란 느낌이었다. 확실히 이젠 전문가가 소개하는 책 보단 익명의 리뷰어들의 리뷰가 더 많이 구매력을 좌우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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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8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8 1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립간 2011-07-18 14:39   좋아요 0 | URL
무안하게, 댓글이나 먼댓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stella.K 2011-07-18 14:52   좋아요 0 | URL
ㅎㅎ 설마요...^^

cyrus 2011-07-18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등학생 때 중앙일보 북섹션을 즐겨 봤어요, 지금도 모아놓은 것도 있어요.
그걸로 통해서 책 정보도 얻고 정말 읽을거리가 많았는데,,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판형에 변화를 주더니 아예 내용이 축소되더라고요, 지금은 모르겠는데
두 세장 정도,, 나머진 대형광고 끼워놓고,,-_-;;
하필 그때가 수능 공부하느라 책을 멀리하는 동시에 안 보게 되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일간지 북센션을 잘 안 보는 편이에요. 저도 북섹션보다는
알라딘 리뷰어의 글을 통해서 책 정보를 얻어요. ^^

stella.K 2011-07-19 10:31   좋아요 0 | URL
조선일보만 그런 게 아니었군요.
저도 좋아서 어떤 건 모아두고 그랬었어요.
물론 블로그 이전 이야기지만.^^

2019-10-22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1-07-18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들 많이 사셨네요^^

stella.K 2011-07-19 10:32   좋아요 0 | URL
네. 근데 언제 읽을지는 몰라요.ㅋㅋ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볼프강 카이저의 <미술과 과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는 알리딘 신간 평가단에서 대중문화/예술 분야의 이달의 선정 책중 하나다.  

그런데 난 이 평가단을 시작하면서 이상한 습관이 하나가 생겼다. 알라딘에서 보내 주는 책 두 권 중 한 권은 리뷰 글로 써서 정식으로 별점도 주고 하는데, 꼭 나머지 한 권은 페이퍼 글로 써서 별점을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서자와 적자를 따로 구분하는 듯하여 내 마음도 편치는 않다.  

물론 난 이 책이 읽기가 만만치 않을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마감 기일을 지나고, 알라딘 평가단 담당자에게 언제까지 글을 올리겠노라고 이메일을 보내면서까지 어떻게 해서든지 리뷰 글로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 책은 그렇게 연기해서라도 내가 끝까지 읽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 번 나는 '평가단의 이름으로(blog.aladin.co.kr/stella09/4855933)'란 글을 쓰기도 했지만, 나는 일반 독자로서 내가 자의적으로 이 책을 선택했더라면 리뷰를 썼겠지만(사실은 자의적으로 선택했더라도 리뷰는 쓰지 않았을 책이다), 이미 그 글에서도 밝힌 것처럼 난 그저 평가단의 이름으로 이 책을 평가하는 것으로 평가단의 임무를 다하려고 한다.  

우선 지난 번 <사유속의 영화>를 평가할 때, 나는 알라딘이 어떤 과정을 거쳐 최종 평가단 도서로 선정되는지 궁금해했었다. 그때 담당자가 답변을 주시기를 평가단이 추천한 책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순으로 선정을 한다고 했다. 그랬을 때 난 내심 평가단의 책을 추천하는 수준이 꽤 높다는 걸 새삼 느꼈고, 그러면서도 선정된 책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평가단에게 미루는 것 같아 또 한편 섭섭했다.  

(적어도) 선정에 있어서 그 수위를 조절하는 건 각 분야의 MD들이 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그때 담당자분이 답변을 주셨을 때도, 어떻게 이렇게 많은 분야의 책을 수위를 조절해서 선정할 수 있냐고, 설혹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건 담당자의 취향이 반영되는 것뿐 수위조절은 될 수 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셨던 것 같다). 물론 그건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로선 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이떻게 평가단을 한 분이 이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알라딘 각 분야의 MD들은 따로 페이퍼를 만들어서 올릴지언정 평가단에는 관여를 안하는 것 같다.  물론 MD들도 바쁘시겠지. 하지만 적어도 선정된 책들에 대해 간단한 코멘트라도 하면 평가단이 좀 권위도 있어보이고 앞으로 읽을 책에 사전 지식도 될 텐데, 단지 선정 이유를 평가단의 누가 이렇게 추천해서 이 책을 선정하게 되었다는 한 줄 코멘트 정도에서 끝나버린다. 그만한 코멘트 가지고는 그 책을 추천하지 않은 다른 평가단들에겐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러면 그 사람은 울며 겨자먹기로 그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 읽기 시작한 책이 의외로 좋다는 느낌을 가질수도 있지만, 십중팔구는 혹시나 했다 역시나로 책을 덮고, 누가 추천했는지 그 사람에 관해서는 눈을 흘길 지 모를 일이다. 특히 나같이 까탈스런 평가단원은 더 더욱이다. 헉!ㅠ 대신 누구나 평이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손을 들어 박수를 쳐 줄 것이다. 예를들어, 이 달의 예술분야에 선정된 또 한 권, 손철주 씨의 <옛 그림 보면 옛 생각이 난다> 같은 책은 아마도 많은 사람이 읽고 정말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에 비해 이 책 볼프강 카이저의 책은 모르겠다. 학술서적이 주는  그 권위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선정했다는 그 책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별 네개를 주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난 일반 독자라면 별 세 개 이상은 줄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책의 권위로 봤을 때 네 개를 줄 수도 있지만, 책의 이해도 측면에선 형편없이 떨어지는 책이기 때문이다. 나는 좀 야박해서 그 책이 아무리 좋고 권위가 있어도 이해할 수 없다면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뭐 그렇지 않더라도 이 별점이란 건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라 그것을 이 지면서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의 역자도 '옮긴이의 말'에서 이 책은 어렵다고 했다. 책 자체도 어려운데 번역은 또 얼마나 어려웠을까? 그런데 또 그로테스크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면 모를까, 이 더운 날 이 책을 붙든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다. 안 그래도 불쾌지수가 높은 날이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이 책에서 한 가지 안 사실은 이 책을 이해하려면 엄청난 미학적 지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무슨 미술을 비평할 줄 알겠는가? 연극이나 문학을 비평할 줄 알겠는가? 그만한 지식을 가져야 비로소 카이저란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학자며, '그로테스크'가 만만히 볼 수 있는 학술적 용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난 이즈음 평가단 담당자가 나온지 1 개월 이내의 신간을 중심으로 추천해 달라는 게 좀 어패가 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봤더니 이 책은 번역되어 나온지는 얼마 안됐을런지 모르지만, 책 자체는 반세기가 넘은 책이다. 그렇다면 이런 책이 선정이 되서 우리의 손에 들려졌다는 게 어떤 의민지 모르겠다. 카이저는 맨 마지막 5장을 '현대의 그로테스크'라고 했는데 그가 이 책을 썼을 때는 현대일런지 모르지만 오늘 날 봤을 때 근대로 봐질 것이다. 어쨌든 이런 뛰어난 학술책이 평가단 책으로 선정이 됐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이해를 해야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건 첫 번째 평가단 책을 받으면서 느꼈던 건데, 보내주는 책 두 권 중 한 권은 대중적으로나 교양서로서도 꽤 괜찮은 책을 보내주지만, 한 권은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좀 문제있는 책을 보내준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다. 위에서 주저리 주저리 떠는 것만으로라도 좀 감이라도 잡아 줬으면 좋겠다. 이건 정말이지 그 분야에 전문적으로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면 읽어낼 수 없는 말하자면 우리 일반인으로 볼 때 '터무니 없는'책들이다. 이걸 평가단이 됐다는 이유만으로 읽어야 한다면 이건 완전 마루타가 된 느낌이다. 아무리 평가단의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아 알라딘으로선 책임이 없다고 해도 이건 좀 무책임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야 한다면 그 괴리감을 좁혀주고 희석시켜줘야 하는 것이 MD의 역할은 아니겠냐고 감히 말해보는 것이다. 그것이 어렵다면 보내 준 두 권의 책중 한편 이상을 쓰라고 하던가. 다시말하면, 두 편을 써야 한다는 의무 조항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다. 계속 이런 식으로 보내줄 것 같으면 말이다. 또 이런 문제 제기는 나만 하는 건 아닌 것으로 안다. 

나는 또 이즈음 왠지 알라딘이 평가단을  공짜책이나 좋아하는 사람들도 평가절하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진다. 물론 혹자는 자기가 원하는 책이 선정되지 않았다고 너무 심하게 말하는 것은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말하는 건데, 난 이달부터 책 추천해 달라는 미션에 그리 많은 비중을 두지 않고 있다. 물론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긴 하지만 일일이 다 밝힐 수는 없고, 한 가지만 밝히자면 어떤 책이 되든 불평하지 않고 읽겠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밝혀두는 바이다.  나는 평가단이 됐다고 좋아한 적은 발표 당일 외엔 없었다.  읽는 것, 읽었으니 쓰는 것. 그것은 현금의 가치 이상을 뛰어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을 돈으로 계산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시간의 가치는 돈의 가치를 훨씬 뛰어넘는 거란 것에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라고 본다.  

공히 말하건데, 난 지금까지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말하는 것은 평가단에 대한 불만도 불만이지만, 평가단으로서 읽은 책에 대한 리뷰를 하지 못하고 이런 글만 써대는 것에 대해 마음의 부담도 있기 때문이란 걸 밝혀두고 싶다. 물론 어떤 책이라도 말이되거나 안 되거나 리뷰 쓸 수도 있다. 평가단에서도 서평의 질은 고사하고 쓰는 것에만 목적을 두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 주겠다. 무엇이 어렵겠는가? 좋은 소리도 한 두 번이라고, 뭐 좋은 소리도 아닌데 다음 달에도 앵무새처럼 이 문제 가지고 또 떠들겠는가?  

더 이상의 긴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알라딘 평가단이 보내주는 책을 진지하게 다루고 싶었는데 그것이 안 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만 알아 주시라.  그리고 조심스럽긴 하지만, 이즈음 탈퇴를 신중하게 고려중이다.  물론 중간에 탈퇴하는 건 웬만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책 읽기가 즐거워야 하는데 오히려 괴로움이 가중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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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7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1-07-17 21:25   좋아요 0 | URL
에고, 수정하는 중이었는데 귀한 발걸음을 해 주셨네요.
근데 저도 안 써도 되는 거라면 안 쓰고 싶습니다.
하지만 기한내에 못 쓰면 이메일로 언제까지 써달라,
이러고 나오는 거 보면 의무조항처럼 느껴져 도저히 부담되서
그렇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애저녁에 포기하는 것이
주최측으로나 저로서나 마음 편한 것 아닌가 싶어요.
결국 제가 이 말을 하려고 저렇게 길게 쓴 셈이군요. 나도 참...ㅠ
다음엔 서평 못 쓰면 못 쓰겠다고 솔직히 말해 볼까봐요.
아무튼 위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미쓰지 2011-07-18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글을 잘 읽어보았습니다만, 몇 가지 생각나는 게 있어 조심스레 말씀드려봅니다. 신간평가단의 취지가 알라딘 외적인 독자들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데서 오는 게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평가도서 선정에 있어서 MD의 글을 넣는 것도 의의가 있어보입니다만, 신간평가단들이 추천페이퍼에 올린 글을 발췌하는 것이 왜 설득력이 없어보이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는 추천하지 않으신 책이 선정되었지만, 다음 번에는 추천해주신 책이 선정되고 또 스텔라님의 추천글이 발췌되어 올라갈 수도 있는 데 말입니다.

stella.K 2011-07-18 13:15   좋아요 0 | URL
없는 게 아니죠. 저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원하는 책이 선정이 안 된 건 아쉽지만,
제가 원치 않는 책이더라도 일단은 관심을 가져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로 끝나버린다는 거죠.
한 줄 정도의 발췌글 가지고 내가 선정하지 않은 책에 대해 금방
관심으로 돌아설 수 있을까요?
그냥 이왕 선정됐으니 아쉬운 마음 달래가며 읽어보겠다는 마음이 더 큰거지요.
제 글요? 글쎄요. 기분이 좋긴 하겠죠.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나 같은 마음은 아닐테니 그만큼의 부담은 안고 가는 것이라 그리 많이 좋을 건 없다고 보여집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이런 책은 MD들 조차도 잘 읽지 않을 것 같습니다.ㅜ

메르헨 2011-07-18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년전에 제가 투덜거린 기억이 나네요.^^
정말 얇은 책인데 내용이 장난이 아니더군요.
강의를 책으로 옮긴건데...노학자의 글이 제겐 부담과 어려움으로 다가오더군요.
휴...힘들었어요.^^;;

stella.K 2011-07-18 18:24   좋아요 0 | URL
써놓고 보니 미안한 생각도 드네요.
이러다 저 찍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자중자애해야 하는데...ㅜ

카스피 2011-07-18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척 보니 벌써 어려워 보이는군요.평가단에게도 상당한 고충이 되겠는걸요^^;;;

stella.K 2011-07-19 10:33   좋아요 0 | URL
거짓말 좀 보태서 어려워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다른 분들은 리뷰를 잘도 써 올리더군요.
그 가운데 저는 이런 글을 올렸으니 좀 민망하긴 해요.ㅜ
 
집행자 - The Excution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감독 : 최진호
주연 : 조재현, 윤계상(2009년)

지금까지 사형제도에 대해 반대하거나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는 있었다. 쉽게 떠 올려질만한 영화론<데드맨 워킹>이나, 이나영이 나왔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같은. 이 영화도 그쪽 계열의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영화가 가지고 있는 맹점 중의 하나는 자칫 감상주의와 인도주의를 헷갈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영화 자체로는 그다지 못 만든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약간은 작위적인 느낌도 들긴 하지만, 그래도 박인환이나 조재현, 요즘 눈에 띄게 연기력이 돋보이는 윤계상이 극중 분위기를 안정감 있게 잡아주고 있어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도 나쁘지 않고.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조연격인 죄수들을 영화에서는 적절하게 잘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다. 특히 조성하의 사이코패스 연기가 볼만한데, 좀 아쉬운 건 이 영화에선 조성하의 존재감이 그다지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무렵부터 조성하가 점점 TV에 자주 나오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교도관의 업무 중 하나인 사형집행이 괴로운 것은 알겠지만 그것 때문에 사형제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는  설정은 다소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그런데 웃긴다. 나라의 높으신 분들이 국정에 재미가 없으셔서 눈요기감으로 지난 10년 간 한 번도 집행된 적이 없는 사형을 집행을 지시한다는 설정이.  정말 그런지, 시나리오의 오버인지 알 수가 없다. 나는 후자쪽에 혐의를 두고 싶은데, 정치인들 욕을 먹이다 먹이다 나중엔 이런 것을 빌미로 욕을 먹이는구나. 조금은 어처구니가 없다. 물론 하나의 은유? 또는 있을 수 있는 이야기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데, 정말 우리나라 정치인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정치를 하셔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무엇이 정의고 무엇이 인도주의냐를 고민하면서 정치를 하셔야지, 권력자들 앞에서 백정이 소 잡는 쇼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영화라지만 설정이 모호하지 않은가? 관객더러 믿으라는 말도 아니고, 믿지 말라는 말도 아니고. 물론 영화 시작 전에 '이 영화는 실화가 아니며 실제와 다를 수 있다'는 식의 주의사항을 먼저 내보내고 시작하긴 하지만 말이다. 

영화 거의 말미에 윤계상이 괴로워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TV에선 마침 사형집행에 관한 뉴스 보도가 나가고 있다. 그때 주인 아줌마가, 저런 건 일찌감치 처단했어야 하고 해도 공개처형을 했어야 한다는 말이 이제까지의 영화 흐름에서 참 우습고 낮설게 보인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공히 말하건데, 이 영화는 감상주의 영화지 인도주의를 표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 사형집행 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 그로인한 정신적 트라우마는 충분히 공감은 간다. 그리고 사형집행 후 무죄로 판명나 아까운 희생을 초래했다는 설정 역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아는 것만해도 지난 15년 동안 사형을 집행해 본적이 없는가 보다(영화는 10년이란 설정을 하고 있지만, 몇년 전 보도에 따르면 거의 15년 동안 우리나라에선 사형을 집행해 본적이 없다고 들었다. 그리고 다시 몇년이 흘렀는데 그동안 사형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 하지만 교도관 좋자고 법을 올바로 시행하지 못하는 것도 법의 오남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사형반대론자는 사형이란 이름으로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냐고 말하긴 한다. 그것에 관해서는 좀 더 논의해 볼 필요는 있겠지만, 이 영화에선 그것에 근접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본다.  나는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사형을 반대하지 않는다. 적어도 죄수들의 교도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선진 여러 나라에선 악질 범죄인에게 사형대신 종신형을 선고한다고 하는데 그래서는 그들의 온전한 참회는 이루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무리 죄를 져봤자 죽지는 않을테니, 남은 인생 어떻게 돼도 상관없는데 교도소에서 생을 마감한들 어떠랴 하는 생각에 무고한 시민을 상대로 더 많은 죄를 짓는다고 한다. 더구나 그의 손에 죽어간 사람들은 또 뭐란 말인가?  

이 영화도 그렇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 그렇고, 난 희생자들에 대한 피해 남은 가족의 슬픔 보다는 오히려 범죄인들에 대한 인정을 직간접적으로 호소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데드맨 워킹>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반드시 이런 영화들의 반대되는 영화가 나와줘야 한다고 본다. 어차피 이런 영화는 무슨 결론을 보자고 하는 영화가 아니고, 관객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묻는 영화기 때문에 이런 영화만 계속 양산이 되면 한쪽의 시각으로 너무 경도될 우려가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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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7-17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눈에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조금이라도 위에 선 사람보다 아래에 선 사람의 세계를 그리려고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서 범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관객에게 호소하려는 영화가 훨씬 많고 이 영화 역시 제목은 '집행자'이지만 사실은 '집행당하는 사람'의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이 영화 안봐서 잘 모르겠지만 그냥 떠오르는 생각이어요.
인도주의와 감상주의. 어려운 얘기지요. 인도주의 역시 감상만으로는 되지 않는 많은 것들 중의 하나인데 또 감상 없이 출발할 수 있으랴?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고요.

stella.K 2011-07-17 14:07   좋아요 0 | URL
의도는 알겠는데, 설득력은 부족해 보여요.
또 이것을 논의하기엔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죠.
이런 영화가 갖는 문제점 중의 하나는 범죄인들을
너무 선하게 드린다는 거죠.
물론 그들중 모든 사람이 다 악한 것은 아닐거예요.
과실치사나 한순간의 실수 그런 것도 있겠죠.
하지만 간과해선 안되는 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피의 눈물이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분개하는 건 파렴치한들에 관해서지요.
법에도 눈물이 있는데 사람이 먼저 눈물샘을 자아내려고 한다면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죠.
기회되시면 한번 보세요. 나름 볼만한 영화예요.^^


 
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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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부리, 땜통, 두더지... 모두 재밌고, 한번쯤 불러 보고 싶은 별명이기도 하다.  소설가들은 소설을 쓸 때 등장인물의 이름을 정하는 것이 고민이라고 하는데, 한번쯤 사람 이름대신 이런 별명으로 써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대소설가 황석영은 이 소설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처음부터 이런 별명들이 등장하니 어느 한편 이름으로 기억되지 못하는 그들의 세상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소설 전반적인 느낌은 친근감 있어 좋았다.  

이 작품은 내가 그의 <바리데기>와 <강남몽>에 이어 세번째로 읽은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 세 작품에서 내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었다. 작가 김훈은 이미 자신의 소설은 마초가 아니라고 못 밖았지만(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그가 하는 말이 맞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마초는 '남성적'인 이미지를 표현할 때 쓰는 것을 볼 때 황석영의 작품이야말로 마초는 아닐까 싶다. 그렇게 볼 때 이 작품은 유독 그 이미지가 강하다.  특히 아수라 반장이 딱부리의 엄마를 차지할 때를 보라. 딱히 이렇다 할 과정 설명을 생략한 채 모든 것을 제압시킨다. 하다못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딱부리 조차도 조금의 거부감은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명확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꽃섬' 이름만 들어서는 정말 섬 전체가 꽃밭일 것만 같은 그곳은 이성과 문화적인 것이 지배하는 하는 곳이 아니다. 그저 인간의 근저에 깔린 본성이 더 강하게 존재하는 곳이다.  그래서 땜통은 예언처럼 딱부리에게 말하지 않는가? "너네 엄마랑, 우리 아버지랑 붙어 먹을 거라"고.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 말은 적중했다. 거기엔 어떤 설명이 필요없이 그냥 암컷과 수컷의 자연스러운 교미의 현장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그곳 아이들도 실제로  자신의 엄마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흔하게 있어왔던 것이기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러니 딱부리 역시 더 이상 뭐라고 할 것이 못되는 것이다. 그렇게 꽃섬은 원초적인 곳이라 할 수 있고, 그곳은 딱부리가 이제까지 있어왔던 곳과는 또 다른 곳이다.  그곳엔 그곳만의 법칙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작가는 어떠한 비평도 허락하지 않는다. 

작가 김훈이 자신의 문학이 마초가 아닌 것을 가부장의 예를 들어 설명한 적이 있다. 가부장이 오늘 날에 와서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보여지고 있는데, 가부장은 가정을 책임진다는 남자에게 부여된 전통적인 관념이고 문화적인 것이라고 볼 때, 이 작품에서는 가부장적 이미지는 없다. 아수라 반장을 보라. 그는 마초적 힘만 있을 뿐 아무리 내연으로 맺어졌다고는하나 한 가정 책임지려는 의식은 결여된 채 자기 좋을대로만 하지 않는가?  

황석영의 작품의 특징은, 그의 작품의 어떤 것을 펼쳐 읽어도 한편의 장대한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 작품 역시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참 묘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반에 인간적인 끈적끈적한 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본 <바리데기>나 <강남몽>보다 인간적이고 따뜻하다. 그래서 그럴까? 훨씬 읽기도 편했다. 

꽃섬은 어찌보면 개발되기 이전의 난지도 같은 곳이다. 하루에도 몇톤씩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를 분류 작업하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섬을 이룬 곳이다. 어찌보면 작가는 버림 받은 그곳에도 인간성은 존재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원래 물질주의가 팽배한 곳에선 인간의 소외를 말하고, 쓰레기 같이 버림 받은 곳에선 인간적인 것을 역설적하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딱부리 어떻게 그런 곳에 가서 살 수 있냐고 했을 때, 그의 엄마는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말했는가 보다.  하지만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란 엄밀히 말하면 그곳 역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아귀다툼이 있는 말도 되고, 인간적 낭만이 있는 곳이란 말도 될 것이다. 그런 것처럼 딱부리의 시선으로도 보면 꽃섬은 그리 나쁜 곳마는 아니었다. '바리데기'는 처절하고, '강남몽'은 졸부에 대한 가차없는 시선이 존재하지만, 낯설지 않은 세상 꽃섬은 나름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약간은 동화같은 곳이기도 하다.  아마도 작가는 바로 이런 곳에서 인간의 삶의 풍경의 원형을 찾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쓰레기장이라는 장소의 특수성은 있지만, 이 작품은 또 어찌보면 시골의 어느 마을 보여주는 것도 같고, 멀지 않은 과거의 풍경을 보듯 낮설지가 않다. 우리의 7,80년대 풍경은 이러하지 않았는가?  딱부리를 비롯한 등장인물도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어 보인다. 어디서 본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황석영 작가는 '낯익은 세상'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황석영은 왜 이 새롭지 않은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으면서 때론 능청스럽게 들려주려 했던 걸까?  

가끔 어린 손자가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졸라 옛날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면 매번 비슷비슷한 내용인데도 재밌게 듣는다. 그것은 어린 아이의 듣는 능력이 남다르기 때문일수도 있다. 똑같은 이야기더라도 지난번엔 이게 좀 더 흥미롭게 들려왔다면, 오늘은 저게 새롭게 들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우리가 찾으려 했던 건 이야기의 원형은 아니었을까? 그것을 확대하고, 발전시키고, 새롭게 변형시켜왔던 것이 화자의(소설가의) 임무일 것이다. 또한 그 속에서 말하려 했던 건 인간성이었을 것이다. 황석영 작가는 인간의 이념과(바리데기) 향락주의와 물질주의(강남몽)의 도전 속에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었을까를 찾는 모험을 주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또 이 작품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세 작품을 놓고 보니 우리나라의 지형도를 묘하게 아우르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오늘 날의 대부분의 작가가 인간 자아의 문제, 욕망의 문제를 다루고 있을 때 황석영은 이념의 문제, 사회 계층간의 문제를 다룬다. 이것을 말하는 작가가 이제 몇이나 되겠는가 ?  

우리는 이제 좋으나 싫으나 2018년 동계올림픽을 치르게 되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에 명암이 있듯 모든 사람이 평창 동계올림픽을 반기지마는 않는다. 물론 이익이 되는 측면도 있겠지만, 걱정과 우려를 표명하는 단체의 목소리도 만만찮다. 무엇보다 그것은 세계화의 한 이면이라고 볼 때 이것은 있는 사람, 가진 자의 잔치일뿐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배려하지는 않는다는 건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그랬을 때 동계올림픽이란 이름이 갖는 후광 때문에 그들은 더 그늘지고 소외될 것이다. 한번의 행사를 치르고 버려지고 잔해들은 또 얼마인가?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라도 이런 세계화에 기꺼이 몸을 던지는 건 나름의 이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업주의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우리가 기억해야할  '낯익은 세상'은  여기 있다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2018년에도 기억되는 소설이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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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7-15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제가 읽었던 책에 대한 다른 분의 감상을 본다는 것은 참 좋은거 같아요.^^
스텔라님은 소설 속에 흐르고 있는 인간적인 면을 보셨군요.
저도 동계올림픽 확정 소식을 듣게 되면서 기쁜 마음도 있었지만 항상 큰 국제적
행사가 있는 지역에는 가난하고 소외된 주민들이 더 손해를 보게 될까봐
걱정되기도 해요,

stella.K 2011-07-16 10:10   좋아요 0 | URL
저는 늘 무플이 될지도 모르는 저의 페이퍼에 댓글을 달아주시는
시루스님께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요.ㅎ~
저는 기쁜 줄은 모르겠더라구요.
그냥 바라던게되서 다행이다 정도랄까?
아무래도 동계 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그나저나 우린 그런 국제적인 행사에 명만을 생각하지
암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한번의 행사가 약발이 언제까지 갈는지 그것도 그렇고.
내실을 다지는 대한민국이었으면 좋겠는데
너무 겉으로 보여지는 것에만 집중되있는 것 같아 걱정되요.ㅜ

stella.K 2011-07-16 10:12   좋아요 0 | URL
참, 이거 리뷰대회 한다고 해서
읽은 건데 전 그냥 마음을 비우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황석영은 너무 매끄러워서...
그래도 전에 강남몽으로 겨우 턱걸이는 했었는데 말이죠.ㅋ

cyrus 2011-07-18 20:54   좋아요 0 | URL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래요 ^^

stella.K 2011-07-19 10:34   좋아요 0 | URL
ㅎㅎ 읎어요.
기대도 안해요. 아무래도 리뷰 방향을 잘 못 잡은 것 같다능.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