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심층을 보다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들어가는 말 

이책은, 저자의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이후 두 번째로 읽은 책이다. 이 책을 들으면 우선 두 가지 정도로 놀라는데, 하나는 그 두께에 놀라고, 또 하나는 종교 사상가들이 이렇게 많았나 하는 것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적어도 나는 그랬다).  특히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에히리 프롬이나, 빅터 프랭클 같은 사람은 세계적인 학자로 보지 굳이 종교 사상가로 볼까 싶기도 한데, 저자의 해석을 거치고 나니 아, 과연 그도 그렇겠다 싶기도 하다(빅터 프랭클은 말미에 다시 한 번 다뤄 보도록 하자).  그리고 한 가지 추가적으로 놀랄 것이 있다면, 몇 페이지 안 되는데도 각 사상가들의 생애와 사상을 저자가 어쩌면 그리도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해설해 놓았을까 놀라게 되지 않을까 한다.   

저자는 왜 이책을 썼을까?

그런데 읽으면서 느꼈던 건, 저자는 왜 이토록 많은 사상가들을 다룬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세계엔 이렇게 많은 종교 사상가들이 있다고 소개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백하건데, 나는 저자가 소개한 사상가들을 꼼꼼하게 다 읽지는 못했다. 워낙에 책의 두께에도 압도됐지만, 내가 과연 이 많은 사람을 다 알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내가 관심도 없는 이슬람이나 인도의 영성가들에 대해 알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대충 읽고 뛰어 넘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것도 편견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는 종교를 마약이라고 했지만, 그러기 이전에 편견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믿고 있는 신 이외의 신에 관심을 두면 계율을 어기는 죄를 범하고, 자신의 영혼을 해치는 일종의 강박 내지는 순정주의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을 정치에 이용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요긴한 무기로 사용는 것은 아닐까? 또한 그러면서 전쟁을 일으키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인류가 치뤘던, 그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허다한 많은 전쟁의 거의 대부분은 종교전쟁이라고 하지 않는가?(그런데 더 정확히는 종교 전쟁이라기 보다는 이념과 정치를 위해 종교는 강력한 것이라고 해야 옳은 것은 아닐까?)  

아무튼 종교는 때로 강력한 편견의 산물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랬을 때 비난의 화살을 맞는 건 아무래도 기독교는 아닐까 한다. 기독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통 인정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종교도 크게든 작게든 내가 믿는 신이 제일이라는 독선은 있다고 본다. 단지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화합과 관용을 주장하는 오늘 날의 분위기에 편승하고 맞혀 가다보니 묻혀 있을 뿐이지. 그래서 어쩌면 저자는 (전작을 통해서나) 이번 저서를 통해 진정한 종교의 화합을 이뤄 보고자, 종교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종교 사상가들의 삶과 사상을 알아보므로 우리의 시야를 넓혀줘야할 필요성에서 이책을 쓴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저자는 그것을  무엇보다도 기독교인에게 촛점을 맞출려고 한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추측해 볼 수가 있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의 독선적인 것을 완화시켜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저자 자신도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더 그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점은  저자가 '예수'라는 장을 가장 많이 할애한 것에서도 짐작이 어렵지 않았고, 무엇보다 '한스 큉'에 대한 부분에서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었다. 저자는 그렇지 않아도 한스 큉을 다석 유영모와 함께 가장 존경하는 종교가라고 밝히고 있다.   

한스 큉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한스 큉은 누구인가? "종교 간의 평화 없이는 세계 평화 또한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가톨릭 신학자이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기독교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 말씀을 '글로벌 윤리'로 채택하며, 세계 평화에 이바지 하자고 외치고 있다. 또한 그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비롯해 교파 간의 작은 차이들은 지엽적인 문제이며 이런 사소한 문제로 원수처럼 갈라져 있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역설한다.  또한 그는 원래 가톨릭 사제이기도 했는데,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들어 그것은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를 전해주는 것이라며, 전통적인 가톨릭의 가르침을 배격하고 새롭게 해석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문에 바티칸으로부터 출두를 명령받지만 이를 거절하다 결국 가톨릭 신학자로서의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한스 큉은 범종교적이었으며, 진정한 에큐메니스트 였다. 그는 세계 모든 종교는 서로 협력할 뿐 결코 경쟁하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고, 그 가운데 그리스도교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한스 큉의 저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곧잘 지인들에게 선물하며 그에 대한 애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신앙은 보수적으로 갖되, 학문은 통섭하라 

사실 저자가 왜 그토록 종교의 화합을 강조하는지 알 것도 같다. 하지만, 에큐메니즘은 진보 기독교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보수 기독교에서는 다소 경계하는 사상이다. 그런데 나는 저자가 전하는 '그리스도교의 선각자들'이란 큰  장에 소개된 여러 많은 선각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읽으면서 그들의 사상도 알고 보면 이렇게 저렇게 다른 타종교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란 걸 알 수가 있었다. 그들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보수 교회에서도 연구되어지는 사상가들이기도 하다.  나는 보수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인으로, 그런 걸 생각하면 보수 교회가 너무 사람들의 사고를 제한 시키고 조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도 된다. 그래서 우물안의 개구리를 만드는.  하지만 그러기 전에 '신앙은 보수적으로 갖되, 학문은 통섭'하라는 말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 스스로 빚장을 질러놓은 것에 좀 더 열린 자세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자각내지는 반성을 해 보게 된다. 

하다못해 저자는 '붓다'를 다루는 장에서,  성불 즉 '깨친 이'를 '초개인적 자아'로 설명하며,  예수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한복음 14장 6절)"는 말씀을 비교하기도 했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 성경절 때문에 예수 이외에는 다른 길, 다른 진리, 다른 생명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리스도교 이외에는 참된 종교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예수도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요한복음 5장 58절)"고 한 것을 보면 이때 '나'라고 하는 것도 역사적인 한 개인으로서의 예수를 지칭하는 것 이상이라는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441p)며 비교종교학으로서 해석을 시도한다. 그것에 대한 어떤 비평이나 판단을 유보하고 보면 이것도 나름 꽤 설득력 있는 해석이란 생각이 든다.  어찌보면 학문에는 해석의 차이와 진보만 있을 뿐, 진실과 거짓을 가린다는 건 그렇게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종교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종교란 무엇인가? 나는 오감남 교수가 '테라사 수녀' 대해서 쓴 부분에서 그 답을 찾고 싶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그녀는 수녀로서 평생을 인도에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헌신하다가 생을 마친, 지난 세월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최근 출판된 그녀의 전기에서, 그녀는 거의 50년 가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 의심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또 얼마 전, 최근 급부상한 어느 유명한 무신론자가 이것을 걸고 넘어지기도 했다. 봐라. 그렇게 믿음 좋을 것 같은 인도주의자도 신을 의심하면서 살지 않았냐? 그럼으로 신은 없다. 뭐 대충 이런 논조로 신은 없다고 말했던 것으로 안다. 물론 꼭 이것을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오강남 교수는 테레사 수녀가 겪은 의심에 대해,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신비적 사상가가 거쳐야 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테레사 수녀도 거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영적 깊이가 어느 경지에 이르면 유신론적 인격신에 대한 전통적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신은 존재나 비존재의 영역을 넘어서는 '없이 계신 이'쯤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는데, 어찌 아버지 같은 존재가 하늘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는 표층 종교의 전통적 신관을 그대로 답습할 수 있겠는가?(271p) 라고 설명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어찌보면 오강남 교수가 말하는 표층 종교에서 심층 종교로 가는 통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 종교에 입문할 때 표층 종교의 단계로 들어가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복을 열심히 비는 것이다. 소원도 아뢰고, 나름 은혜도 받는다. 하지만 깊게든 얄게든 그렇게 신앙 생활을 접한 사람은 반드시 영혼의 어두운 밤을 맞이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 밤을 통과해 더 깊은 신앙에 들어가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이 싫어 뛰쳐 나오게도 된다. 나도 짧지 않은 세월 신앙생활 하면서 늘 언제나 흔들리지 않은 믿음을 가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누구는 말했다. 의심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고. 그것은 맹신일 뿐이라고. 그래서 도마는 예수님은 성흔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을 것이다. 정말 테레사 수녀가 경험한 "영혼의 밤"은,   믿음 안에서의 의심은 있을 수 있으며, 얄팍한 표층 종교적 시각을 가지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고, 심층 신앙을 가져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즉 사고를 환치시킬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일 게다. 그러고 보면 종교는 무궁무진의 영역이며 이 세상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또한 인간의 좁은 사고의 틀을 끊임없이 깨며 인간과 삼라만상을 좀 더 깊고 넓은 차원으로 인도하는 매개체인지도 모른다.  

맺는 말; 다시 생각해 보는 빅터 프랭클의 '의미요법'  

나는 오강남 교수가 빅터 프랭클은 종교 사상가 반열에 놓을 줄은 몰랐다. 이미 빅터 프랭클의 '의미요법'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잘 아는 줄 안다. 그는 저 죽음 같고, 지옥과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살아 나왔던 사람이다. 그가 어떻게 나왔는지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유명한 저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란 책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그런데 나는 그에 대한 것을 이책에서 다시 한 번 대하면서 오늘 날과 같이 자살이 많은 시대에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삶이 조금만 힘들면 쉽게 자살을 생각한다. 사실 빅터 프랭클이 어떻게 살아 남았는가를 생각하면 우린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말을 하게될 것 같다.  

이 자살이 얼마나 쉽냐면, 어떤 초등학생이 우리 담임선생님은 너무 늙었다고 흉을 보았단다. 그래서 너는 안 늙을 줄 아냐고 했더니, 자기는 그때까지 안 살 거라고 말하더란다. 그러니까 늙기 전에 죽겠다는 말이다. 물론 그냥 하는 소린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도 살 이유가 없는 것인가? 생명 경시 사상이 너무나 팽배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살을 생각했다 다시 한 번 삶으로 돌아선 사람에게는 살아야 하는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하며,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되어야 한다. 바로 종교의 사명은 이것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하고, 실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이책을 읽으면서 종교란 인간에게 무엇인가란 질문에 조금은 다가가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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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7-20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 저는 종교에 관련된 책을 읽어보지 못했어요.
특별히 종교를 믿는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교를 싫어하는 편도
아니에요,, 군 복무햇을 때 주말에 종교행사를 기독교, 불교, 천주교
한번씩 다 가봤어요. 종교의 화합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는 편인데
서로 열린 자세를 가지고 관용적으로 이해하면 세상이
참 평화로울텐데 말이죠 ^^

stella.K 2011-07-20 13:20   좋아요 0 | URL
그래도 뭐 예전에 비하면 많이 양반된 거죠.
작게는 개선이 됐는데 크게는 달라진 것 같진 않아요.
더 강력해졌죠? 911 테러 같은 거 보믄...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