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세계 : 알베르 카뮈의 여정
카트린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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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김화영 교수의 강연을 참석한 적이 있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카뮈 전문가다. 그 강연회를 다녀 오고 나서 당장 이 책을 질러버렸다. 그만큼 카뮈에게 매료당한 것도 있고, 김화영 교수의 강의가 워낙 유려해서 혹시라도 놓쳤을지도 모를 내용을 이 책에 있지 않을까 해서다. 그것은 김화영 교수가 카뮈를 다룬 가장 최신간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날의 김화영 교수의 강연과 책은 그다지 관련성은 없어 보인다. 그냥 이 책은 그날 김화영 교수의 강연회를 빛내주기 위한 소품이라고나 할까? 무엇보다 이 책은 일반책 보다 훨씬 크고 양장이다. 문학 앨범인 만큼 글은 별로 없고 사진만 풍성하게 많다. 솔직히 이런 책을 내가 좋아할 리 없다. 무거워 한 번 들을 때마다 손목에 무리가 가고, 편하게 누워서나 기대어 앉아서 볼 수도 없다. 오로지 책상 앞에 정자세로 앉아 봐야한다. 정말 카뮈가 아니라면 이런 책은 나에게 쉽게 용서 받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표지도 그렇긴 하지만 어느 정도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그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그는 미색은 아니다. 하지만 남자답게 생겼으며 인상이 진지하면서도 좋다. 이런 상을 두고 누구의 말처럼 귄한 상이라고 하는 걸까? 그래서 한때 시몬느 보부아르로부터 사귀자는 청탁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고 한다. 글쎄, 아무래도 그는 한미한 가문의 사내로서 보부아르가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그녀는 복수하는 의미에서 카뮈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퍼트리고 사르트르에게로 갔다고 한다. 그런 걸 가지고, 여자가 한을 품으면 어찌된다는 고리짝 여혐발언 같은 건 하지말자. 차도녀라면 그 정도 뒤끝은 보여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왜냐고? 나는 소중하니까.

 

하지만 그런 그도 첫 번째 결혼은 실패했다고 한다. 좋은 여자일 것 같아 결혼했지만 알고 봤더니 마약쟁이었고, 마약을 구하기 위해 몸을 팔기도 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아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재혼해 딸 아들 쌍둥이를 두었는데 그 딸이 이 책을 엮은 카트린이다.

 

사르트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람들은 흔히 사르트르와 카뮈를 라이벌로 여기기를 좋아하지만, 카뮈는 늘 그렇게 비교되는 걸 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는 모든 면해서 사르트르가 자신 보다 우위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르트르는 유서 깊은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수재중의 수재만 통과한다는 국가시험을 통과해 당당히 교수가 되기도 했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과 자신이 비교될 수 있냐는 것이다.

 

하지만 신은 일견 공평하기도 하다. 그렇게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이 완벽할 것 같은 사르트르도 아쉬운 것이 있었으니 그는 사시였다. 그리고 빼어나게 잘 생긴 것도 아니다. 그런데 비해 카뮈는 매력적이었으며 단명했다. 사르트르는 장수했고. 그러고 보니 공평한 것도 아닌가? 게다가 카뮈는 돈과도 별로 인연이 없는 듯하다. 그가 출판이나 강연 등으로 적지 않은 돈이 은행에 있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단다. 그나마 노벨문학상을 받는 바람에 그 상금으로 엑상프로방스에 조그만 시골집을 사서 어머니와 함께 편하게 글을 쓰겠다는 바람도 이루지 못하고 어느 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그의 어머니도 그 충격으로 6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카뮈가 사르트르와 비교되는 것을 거부했던 것엔 그의 가정환경도 한몫했을 것이다. 포도농장의 감독이었던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에 징집돼 일찍 전사하고, 어마니 역시 말을 잘하지 못하며 정신적으로도 온전치가 못했다고 한다. 집안은 늘 가난했고. 그랬다면 그는 불행했을 거라고 사람들은 짐작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가난했지만 불행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지중해가 주는 기후와 햇빛 때문이었다.

김화영 교수는 카뮈를 이해하려면 이 지중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지중해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문명의 발상지다. 기독교의 반대되는 지점에 헬레니즘이 있다. 기독교는 병적이고, 사변적이며, 낭만주의를 대표하지만 헬레니즘은 구체적이고 확실한 지향점을 펼쳐 보인다. 그러면서 문학은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나는 순간 귀가 좀 번쩍 뜨였다. 이건 별로 깊게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기도 한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던 기독교가 헬레니즘에선 저렇게 인식되는구나 한 것. 또한 이는 카뮈가 지중해의 햇볕아래서 춤추던 조르바와도 중첩되기도 한다. 아무튼 그는 그 햇빛 아래서 가난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카뮈하면 흔히 <이방인>이나 <페스트>를 떠올리겠지만 난 오래 전부터 <시지프의 신화>를 떠올렸다. 그것은 내가 그 책을 독파해서가 아니다. 실은 독파하는데 실패했다. 사춘기 시절의 일이다. 그 책을 이해하긴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책에 손을 댔던 건 바로 실존주의 때문이다. 그게 그렇게 멋있게 들릴 수가 없었다. 이 책에서 그 한 자락을 만났다.

“......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 올리는 한 차원 높은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만사가 다 잘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잖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96p) 그 얼마나 멋진 말인가.

 

카뮈는 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훗날 정오의 사상을 구축해 나갔다. 그는 지중해에는 안개의 비극성과는 판이한, 태양의 비극성이 있다고 했다. 아마도 그래서 <이방인>을 쓰지 않았을까? 그의 세계는 삶과 죽음이 인접해 있다. 이를테면 투우사가 아름다운 건 소의 정수리에 창을 꽂아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한 번에 삶과 죽음을 가르는 그 분명함을 설명했다. 그의 문학은 항상 젊었다. 그것은 그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은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문학도 사람과 함께 나이 먹어가는 유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의 흐름을 뒤집어 놓은 것이 죽음이라고 <최초의 인간>에서 밝히기도 했단다.

 

또한 그의 사상은 따로 또 같이의 문학이었다. 그것만이 이상적인 예술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사랑이 없는 반항은 온전한 반항이 아니라며 사랑과 정의의 함수관계를 그의 책 <결혼, 여름>에서 밝히기도 했다. 그것은 정오의 사상과도 그 맥을 같이 하는데, “정의를 실현하려는 요구가 오래가면 그것을 낳아준 사랑을 메마르게 한다.”, 절도를 지향하는 집념을 표현하기도 했다(111p).

 

카뮈는 앙드레 지드와 함께 프랑스 국어사전에 가장 많은 예문을 싣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명쾌하며 감동적인 표현을 하는 작가라고 한다. 그는 늘 사랑 받지 못하는 건 운이 없는 거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건 불행이다.’라고 했단다. 그런 그가 낭만주의자가 아니라니. 모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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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6-08-18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카뮈 사진 보니 눈이 정말 초롱초롱하네요.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김화영 교수의 강의도 궁금합니다.

stella.K 2016-08-19 13:02   좋아요 0 | URL
오, 고마워요 브랑카님. 이 글에 댓글이 없어서 좀 우울했었는데...ㅋㅋ
강의 정말 좋았어요.
솔직히 그때 제가 거의 뒤에 앉아서 들어서 정말 귀를 쫑긋 세우지 않으면
들을 수가 없거든요. 게다기 교수님이 앉아서 강연을 해서
얼굴도 볼 수 없고 오로지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어요.
전 그러면 거의 듣기를 포기하는데 아무래도 문학에 관심이 많고
더구나 카뮈라 정말 한마디도 허투로 흘려 듣고 싶지 않았어요.
카뮈는 정말 멋진 남자같아요.^^
 

 

하도 많이 들어 본 이름이라 내가 프랑스와 오종 감독의 작품을 한 작품이라도 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작품이 처음이다.

 

이 작품 그야말로 발칙하고 조금은 충격적이다. 그나마 이야기가 시종 위트함을 잃지 않아서 그럭저럭 보는대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위트함 때문에 과연 그럴수도 있겠다 싶다. 그 그럴수도 있다는 것의 전제는 성 정체의 경계가 무너지면이란 전제다.

 

이미 유럽 같은 나라는 남성과 여성을 태어나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선택하도록 한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남자라고 해서 남자로 자라는 것이 아니고, 여자라고해서 여자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 남자라고 해도 자신이 자신을 느낄 때 여자라고 판단되어지면 여자인 거고, 여자도 자신이 남성성이 더 많으면 남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거다. 나로선 잘 용납이 안되는 부분이긴 하지만 이미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으니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럴 경우 문제는 없겠느냐는 것이다.

 

  

서로 너무 친해서 어렸을 때 피의 맹약을 하는 것도 철없을 때 한 때 그럴수도 있다하지만 그런 건 어리석은 일이며 가급적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 같다. 그것은 영원한 친구없을뿐더러 자신의 운명을 올가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너무 우정, 우정해도 언젠가 둘 중 하나는 먼저 떠나게 되어 있다. 그때 그 공허함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하필 죽은 친구의 남편이 여성 복장에 집착을 보이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여성으로 하기를 원한다.

 

프랑스는 이미 성이 개방된 나라다. 동성애는 이미 자연스러운 거고, 트랜스젠더를 원할 수도 있고 그걸 굳이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 복장을 하는 건 어느 정도 봐 줄 수 있더라도 남자가 여장을 하는 건 그 나라도 별로 자유롭지는 못하는가 보다. 그래서 주인공의 친구의 남편은 수시로 여자와 남자를 오간다. 친구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친구의 남편은 자신이 여자인 것 같다고 그러고, 주인공은 친구의 남편을 좋아하는데 자신이 이 사람을 여자로 좋아하는지 남자로 좋아하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결국 그래서 온전한 섹스에도 이르지 못한다.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긴 한데 그 과정이 극적이긴 하지만 억지스럽지는 않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친구의 남편은 온전한 친구로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을 발칙하면서도 나름 유쾌하게 그렸다. 친구의 남편으로 나오는 로망 뒤리스의 연기가 일품이다. 그는 남자역을 자연스럽게 한다. 당연하다. 그런데 여자역은 더 잘한다. 남자들이 대체로 하이힐을 못 신는데 로망 뒤리스는 영화를 위해 연습을 많이 했는지 하이힐 신고도 여자 보다 더 멋지게 거리를 활보하고, 여자다운 몸짓도 능수능란하다. 나는 보수적인 사람이라 이렇게 성정체를 다루는 영화가 익숙치는 않다. 하지만 영화와 상관없이 늘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하는 감독의 정신은 높이 사 줄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은 역시 뭔가 걱정스러운 여지는 있다. 둘은 좋아서 친구가 되기도 하고 애인이 되기도 한다지만, 친구의 아이는 자기 부모를 어떻게 인식을 할까? 엄마로? 아니면 아빠이면서 엄마로? 이런 시대 아이들도 엄마와 아빠를 굳이 따로 구분하지는 않게될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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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12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종 영화 보면 알모도바르 영화와 느낌이 약간 비슷한 구석이 있지 않습니까 ?
오종 영화 나왔을 때 한동안 재미있게 보긴 했었는데..
이젠 딱히 어느 장르에 환장하고 그런 때는 지났나 봅니다..
잘 안 보게 되네요..

stella.K 2016-08-12 15:41   좋아요 0 | URL
그렇죠. 영화를 보는 것도 다 때가 있나 봐요.
저도 끝까지 보게되는 영화가 별로 없어요.
그나마 이 영화는 끝까지 보게 되더라구요.
나름 재밌었어요. 내 취향은 아니지만...^^

기억의집 2016-08-12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글 읽으니 생각나는 게.. 우리 옆동네 아파트에 여장아저씨 있어요. 근데 그게.... 참 이 영화의 남자처럼 여자처럼 보이는게 아니고(전 이 영화 안 봤는데 스텔라님이 여자인척 잘 연기한다길래) 우락부락한 남자 모습 그대로 여자분장을 해요. 키도 작고 몸은 우락부락한 남자가 화장은 찐하게 하고 미니스커트에 망사스타킹 그리고 이 남주처럼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것을 종종 봅니다. 솔직히 첨엔 받아들이기 힘들더라고요. 남자가 여장차림을 하니깐. 그런데 뭐 어쩌겠습니까. 내 이웃아저씨가 여자처럼 살겠다는데... 지금은 차라리 여성호르몬을 맞지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여성 호르몬 맞으면 우락부락한 근육이 금방 사라진다는데...맞으면 지금처럼 남자처럼 들 보이지 않을까하는. 이 생각도 차별이긴 하지만 주변 시선이 곱지 않아서. 아저씨 나이가 오십은 넘어보이는데.. 나름 본인도 정체성에 고민 많았겠지요????

stella.K 2016-08-12 15:54   좋아요 0 | URL
와, 전 영화에선 봐도 아직 실제로 본적은 없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 영화로 봐도 좀 편치는 않는데
실제로 보면 어떨까요? 기억님도 좀 괴로우시겠어요.
전 저 영화에서 저 남자 배우 좀 훈련 받았다고 생각해요.
몸짓이 여자 뺨치겠더라구요.
실제로는 기억님이 보신 사람들이 더 많을 거라고 봐요.

기억의집 2016-08-12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렸다면 괴로울 것 같은데... 이것저것 읽다보니 저런 분들은 본투비더라구요. 그렇게 태어난 분들인데... 받아들여야한다고 생각이 들어요. 혹 워렌의 싸울 기회 읽어보셨어요? 그 책속에 워렌이 상원의원이 되기 위해 유세할 때 유세 모임중에 겉보기에 만만치 않아보이는, 공화당같이 보이는 한 백인남자가 트렌스젠더에 대해 물은적이 있어요. 그러자 워렌이 트렌스젠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여야한다고 평등할 기회를 줘야한다고 그런 식으로 말해요. 워렌은 이 남자가 공화당원일 거라 생각하고 자기를 공격하는 말을 하려는 줄 알았는데 그 남자가 자기 아들이 트렌스젠더라고 그런 말 해줘서 고맙다라는 대목이 나와요. 저는 진화생물학책도 드문드문 읽어서인지 지금은 받아들이게 되더라구요....

stella.K 2016-08-12 16:1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하긴 우리가 그들을 뭐라고 할 권리는 없죠.
하지만 전 아직 그런 쪽으론 아는 바가 없어선지 솔직히
그들을 이대로 봐줘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게되요.
취향의 문제라면 어떻게 못하는데 일종의 호르몬 같은 병의 문제라면
치유가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동성애도 권리를 주장하긴 하지만 또 동성애서 다시 돌아가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어요.
영화에서도 보면 의사를 찾아가 보라고 설득하기도 하죠.
그런 걸 보면 프랑스도 완전히 성개방이 된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다양함을 존중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그 다양함을 받아들이기엔 버거울 때도
있어요.

기억의집 2016-08-12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화관련책 읽어보면 호르몬조차 명령할 수 있는 유전자의 명령 같더라구요.

yamoo 2016-08-18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꼭 보도록 하겠습니다! ㅎ
영화 `플루터에서 아침을`이라는 영화가 있지요...명작입니다.

영화를 안 봐 정확하지는 않지만 스텔라 님의 영화 리뷰만으로는...저 로망 뒤라스는 CD를 연기한 듯합니다. CD는 트랜스젠더와는 완전 다르죠. 자신의 성 정체성을 정확히 인식하면서도, 이성(여성)의 복장을 탐하는 성향을 일컫습니다. 여자 옷을 입으면 완벽히 여성처럼 행동하지요..ㅎㅎ 우리나라에도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이 1만 여명을 헤아린다고 합니다..ㅎ

stella.K 2016-08-18 16:40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저도 예전에 플루토에서 아침을` 본적 있어요.
보기전엔 약간의 선입견이 없지 않았는데 의외로 잘 만들어서
재밌게 본 기억이나요.

진짜 그런 사람이 있더라구요. 그걸 CD라고 하는군요.
맞아요. 로망 뒤라스가 그 연기를 한 거죠.
그런데 남성적 매력이 물씬한데 여장만 하면 여성역을 너무나 잘 소화하더라구요.
재능있어요.
우리나라에도 적지 않군요. 하여간 야무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려.^^
 
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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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주의는 아니지만 김훈 작가의 작품은 나름 꽤 읽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것이 <내 젊은 날의 숲>을 끝으로 한동안 그의 작품을 읽지 못했다. 나는 그 작품을 읽기도 했지만 출간 당시 강연회도 참석 해서 거기서 작가의 다음 작품에 관해 들을 수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흑산>이었다. 물론 그때는 구체적으로 제목을 언급했던 것은 아니지만, 천주교 박해 관한 소설을 쓰게 될 것 같고, 쓰게 된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신앙을 지키는 쪽이 아닌, 목숨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신앙을 버릴 수밖에 없는 사람의 입장을 쓸 것이라고 했다. 그때 나는 확실히 작가답다고 생각했다. 들어나지 않는 이면의 것을 쓰는 것이 김훈 작가의 글 쓰는 방식은 아닌가. 독자는 자신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만만히 보이는 작가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튼 그런 내가 <내 젊은 날의 숲> 이후로 그의 작품을 읽지 않게 되었다. 그는 약속을 지키듯 <흑산>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나의 게으름 탓도 있지만, 난 왠지 <내 젊은 날의 숲>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도 오래 전에 읽어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뭔가 미흡하고, 미진했다. 게다가 <흑산>에 대한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읽었던 작품이 마음을 채우지 못하면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여도 다음 작품을 선택하기란 꺼려진다. 그런 내가 몇 년만에 그의 작품을 읽는다.

 

읽고나서 역시 김훈이다 했다. 작가는 살아 있었다. 아마도 그는 역사 소설을 쓸 때가 가장 그답지 않나 싶다. ‘화장도 좋고, ‘언니의 폐경도 좋은데 다 그것에는 못 미친다. 하지만 그가 역사 소설만 썼다하면 따라오는 오명이 있는데 그것은 마초. 여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나와도 그저 작품의 부속품 정도로 나온다고 해서 마초라고 해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찌질한 마초도 다 있을까?

 

인간의 세계에서 신앙을 가진 게 죄라면 죽음으로 그 죄값을 치르는 것도 좋은 일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 또한 마초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 사내대장부가 죽음을 두려워 할까. 그러나 그렇게 해서 죽는 거라면 그건 허세일 뿐이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순교는 아닐 것이다. 어찌 사람의 생과사를 마초에 비할까. 그래서 살면 마초가 아닌 것이고, 죽으면 마초가 되는 것인가? 그것처럼 어리석은 이분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말했다. 마초는 허세로서 자신의 문학을 단순히 그렇게 부르지 말아 달라고. 이건 모르긴 해도 초기 그의 문학을 평했던 평론가들이 부르기 좋은 말로 그렇게 불렀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마초하면 김훈이란 등식은 이제 성립하지 않는다. 그저 남성의 고독한 실존을 그렸을 뿐이다.

 

남들은 순교라는 이름으로 죽어갈 때, 그 누군가는 배교로 목숨 하나를 구했다. 그리고 순교하는 신도를 지켜 본다는 게 마음 편한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작가는 바로 이 점을 주목하여 본 것이다. 그렇게 구차한 목숨 하나 구했다고 어찌 배교했다고, 비겁하다 할 수 있을까? 나도 신앙인이지만 박해로 인해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면 쉽게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이렇게 교회 다니기 좋은 시대에 그 안에서 온갖 비리의 냄새를 풍기고도 그것이 배교인지도 모르고 교회를 다니는 게 더 문제는 아닐까.

 

책을 읽다보니 내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 있는 것을 알았다. 배교했다고 해서 다 살아남는 것도 아니라는 것. 배교는 배교대로 하고 끝내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더라는 것. 그들은 이승에서도 구원을 받지 못하지만, 저승에서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 영혼은 또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한 것인가. 나는 어떨까? 나는 신잉인으로 죽으면 부활을 믿고, 천국의 소망이 있지만 그런 박해의 시대에 감히 야소를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사학죄인이 되기를 기꺼워 할 수 있을까?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지금도 이 지구 어디에선가는 예수 믿는데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곳이 있다. 즉 순교자가 있다는 말이다. 나는 가끔 교회 다니는 게 비정상 같다는 생각도 든다. 교회는 병든 사람이 위로 받자고 다니는 건데 죽기를 강요 받고, 겁박하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박해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배교할 사람이 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순교는 확실히 신비다. 그것을 아무리 이해 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때로 믿음을 이해의 영역에서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하는 건 얼마나 무모한가. 

 

복음이 전파되려면 그곳에 먼저 피의 순교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참 무서운 분 같다. 그리고 순교의 터 위에 교회는 세워졌다. 내가 죽어야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나의 후손과 공동체가 구원을 받는다. 아마도 이 마음 가지고 순교하지 않았을까? 생명은 나 하나만을 생각하면 결코 버릴 수 없는데, 나의 후대와 공동체를 생각하면 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이를 몸소 보여주신 분이 또한 예수가 아닌가.

 

배교하고 살았다고 그를 쉽게 비겁자라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때는 박해를 피하려고 배교가 불가피 했는지 모르지만 모든 건, 이 또한 지나간다. 박해 후 또 신앙을 회복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아니 그는 배교했을지라도 그의 후손은 신앙을 받아 들였는지 알 수 없다. 그건 그저 그 사람의 실존인 것 같다. .

 

소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배교자로서 순교자와 배교자들을 지켜 본 정약전은 그냥 그 시대를 담담히 살아낸 실존주의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배교자가 되어 가정을 지켜내는 가장이길 바랐을 뿐이다. 그것이 실질적인 명분이었는지 아니면 살기 위한 핑계였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아무튼 그것이 김훈이 말하는 마초와 가부장의 차이일 것이다. 그는 또 말했다. 가부장이 오늘 날 잘못 왜곡되어서 그렇지 진정한 가부장은 가문과 식솔들을 지켜낸다고. 그 옛날 가장들은 가정과 식구를 지켜내지 못한 것을 치욕이요 불명예로 여겼다. 눈 앞에서 오랑캐에 끌려가는 자신의 아내와 누이와 어린 자식을 지켜보면서 울부짖지 않을 가장이 어디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가부장은 나름의 독특함으로 발전하고 왜곡되어져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잠시 세월호 선장을 생각했다. 점점 바다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갑판의 끝에 매달려 구조 받던 그 선장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그는 책임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건 심판 받아 마땅하지만, 난 그때 그것을 보면서 왠지 그의 앞날이 걱정스러웠다. 이해관계를 떠나 그는 본능적이고 원초적으로 살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건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비난을 받던, 벌을 받던 그건 나중의 일이다. 그가 바보가 아니라면 구조 받던 그 순간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 건지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라도 살고 싶었을 것이다. 살아야 그 다음도 도모할 수 있다. 아니면 얻어 걸렸다고 수장됐어야 할 목숨이 얼떨결에 구조되었던 걸까?

 

아무튼 그는 세월호의 희생자수만큼이나 죽어 마땅하지만 생으로 귀환한 그는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비며, 늙은 부모의 자식일 것이다. 다른 사람은 그를 비난하고 욕해도 그의 가족들은 그를 비난할 수 없고, 그렇게라도 살아 있음을 다행으로 여길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들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을까. 심판 이후 모든 것은 그와 그의 가족들이 감당해야 할 몫일뿐 우리는 어떤 것도 그에게 그 이상도, 그 이하의 것도 바랄 수가 없다. 모르긴 해도 그는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세월호 희생자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게 그에게는 앞으로의 실존이고, 삶의 몫인 것이다. 배교자는 배교자의 삶이 있는 것처럼.

 

난 김훈의 문체를 좋아한다. 그의 문체는 아름다운 것도, 시적이지도 않다. 특히 이 작품은 피와 살점이 툭툭 패이는 것만 같다. 또한 적절히 녹아있는 성애장면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런 것을 보면 사극 같은데서 등장인물이 추국을 당하고 그 다음 장면에서 사지육신 멀쩡한 것으로 나오는 걸 보면 참 이미지가 문자를 못 따라 가는구나 싶기도 하다. 

 

그의 문장은 한번도 성공한 사람을 대변하거나 표현해 준 적이없다. 쓰는 것마다 실패하는 자를 대변하고 그의 고독하고도 처절한 실존을 표현해 왔다. 어설픈 성공보다 차라리 처절한 실패가 더 났다는 말은 그의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실패하는데 성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작가다. 그는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난 그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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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7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6-08-08 12:57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저는 반대로 에세이는 자전거 여행인가
그거 달랑 읽은 거 같아요. 근데 소설은 읽히더군요.
아직 안 읽은 것도 많아요.

2016-08-07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6-08-08 13:01   좋아요 0 | URL
오, 정확히 보셨네요. 맞아요.
김훈 자신도 역사 소설가는 아니라고 밝히고 있지요.
단지 역사를 재료로 할 뿐이라고 했어요.
아마도 그는 역사의 인물을 통해 남자를 재해석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뭐 남자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징징거리는지도 모르구요.
아무튼 전 그가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단백한 문장이 좋더라구요.
읽어 주셔서 고맙슴!^^

2016-08-08 0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8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나 아렌트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 자넷 맥티어 외 출연 / 미디어허브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나는 늘 한나 아렌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같은 사람으로 혼동하곤 한다.

이 영화를 발견했을 때도 난 로자 룩셈부르크를 생각했다. 만일 내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전기 영화를 본다면 한나 아렌트를 생각 하겠지.

 

알다시피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 내용을 보며, “악의 평범성을 개념화시킨 철학자다. 영화는 바로 이것이 나온 전후 배경을 집중해서 보여준다. 전기 영화는 잘해야 본전이란 말이 있다. 그만큼 봐도 나쁘지 않고, 안 봐도 그다지 섭섭할 것 없는 장르다. 우린 그 사람의 생애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니.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는 재미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한나 아렌트다. 발견한 이상 예의로라도 봐 줘야 한다.

 

           

영화가 역시 좀 아쉽긴 하다. 악의 평범성을 발견한 한나 아렌트를 조명하기 위한 거라면 나쁘진 않는데, 악의 평범성을 이해시키기엔 다소 모자라 보인다. 뭐 당연한 것 같긴 하지만. 놀라운 건, 한나 아렌트가 이것을 발견했다고 해서 당대 학계나 지성계에 주목을 받았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차가운 냉대와 비판을 견뎌야 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한나가 무엇을 해 주길 바랐던 걸까? 그것은 당시론 듣보잡이거니와 만일 당시의 홀로코스트가 이것을 인정한다면 그들이 나치 독일에 받은 박해와 수모 역시 평범한 것이어서 약화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그녀가 홀로코스트를 옹호하거나 최소한 조용히 있어주길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한나가 여자기 때문에 더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러므로 해서 2차 세계대전 같은 비극은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악의 평범성은 한나 아렌트가 아니어도 그 누군가는 발견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유대의 홀로코스트 이후로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는 민중 대학살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녀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홀로코스트의 아픔을 쉬 떨쳐버리지를 못하는 것이다. 하긴 전범재판이 먼 과거의 이야기도 아니고, 그 시대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것인데 거기서 악의 평범성을 논한다는 건 미친 짓일 것이다.

 

그런데 비해 한나가 가르치는 대학의 학생들은 그녀를 지지한다. 그 대조가 인상적이다. 뭐든지 그 분야가 발전을 하려면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 이런 한나 아렌트의 후학들은 또 악의 평범성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갔을까? 악의 평범성을 너머 정당성을 확보해 나갔을지 모를 일이고, 악의 평범성이 있다면 선의 평범성도 있다고 본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영화는 역시 이미지다. 나름 지적인 영화긴 한데 토론하고 논쟁하는 장면이 영화의 전체를 차지하고 있어 다소 지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담배 피우는 장면이 영화 전체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뭐 지성과 흡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같긴 하다만 담배 피우는 장면이 지나치게 많이 나오긴 한다. 특히 한나가 어찌나 담배를 맛있게 빨아대는지 만일 나도 옆에 담배가 있었다면 끌어 잡아 당겼을지도 모른다. 오래 전에 들은 얘기지만, 어떤 남자는 여자가 담배 피우는 모습에 매료되어 청혼을 했다고도 하는데, 그게 그렇게 매력적인 건지 담배를 안 피우는 나로선 믿거나 말거나한 얘기다.

 

솔직히 그렇게 건강을 부르짖으면서 왜 피우면 피울수록 건강해지는 담배는 못 만드는지 모르겠다. 그랬다면 나도 분명 피웠을 것이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건, 영화의 종반 한나 아렌트가 사람들의 비난과 냉대 속에서도 자신의 이론을 구축하기 위해 담배를 피우면서 타이핑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예전엔 담배를 구름과자라고도 했는데 정말 그녀의 책상에 담배와 재떨이 대신 과자 한 봉지 놔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새우깡. 그리고 어느 광고 문구처럼 그분의 책상에 새우깡 한 봉지 놔드려야겠어요.”하고 싶다. 빼빼로가 나으려나?

 

갑자기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어졌다. 언제고 그녀의 평전 한 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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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7-28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흡연과 지성은 무관합니다..

stella.K 2016-07-29 13:11   좋아요 0 | URL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전 그냥 이미지를 얘기했을 뿐인데...

cyrus 2016-07-29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흡연을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담배에 들어있는 주요 성분을 빼면 건강에 영향을 주지 않겠지만, 문제는 담배 특유의 맛과 느낌이 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담배 회사가 담배 속에 들어가는 유해물질을 포기하지 못하죠.

stella.K 2016-07-29 13:15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인간이 못 만들어내는 게 뭐가 있어?
인공장기도 만들어내는 마당에.
몸에 좋지는 않아도 무해하게는 만들 수 있잖아.
옛날에 담배는 구수한 냄새가 있는데 요즘의 담배는
냄새부터가 강하잖아.

2016-08-07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6-08-08 14:14   좋아요 0 | URL
한나 아렌트의 다큐 영화도 있나 보더라구요.
보진 못했지만 그게 좀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이건 극영화라...
 

엄마가 대장암을 앓게 된 후로 집안일의 거의 대부분은 내 차지가 되었다. 다행히 지금은 차츰 회복 중이시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암은 왜 밤이 되면 그렇게 고통스럽게 사람의 몸을 조여 오는 걸까? 그런 밤이 엄마에게 한 달 넘게 지속이 되었고 그 때문에 아침엔 종종 녹초가 되곤 하셨다. 그런 엄마에게 집안 일 하나라도 대신 맡아주길 바란다는 건 근래 난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엄마는 성격상 가만히 있는 것을 못 견뎌하시는 스타일이라 당신이 할 만한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시는 편이고, 나 역시도 모른 척 가만히 지켜보기는 하지만 예전만큼 마냥 편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되지는 않는다. 건강할 때 집안 일 중 빨래는 엄마가 담당할 때가 많았다. 그런 것을 어느새 난 그 일까지 점령해버리고 만 것이다. 하긴, 엄마가 건강하셨더라도 이 일은 진작 내 일이 됐어야 했다. 늙은 어미 일하고 있는 모습을 간단히 보아 넘길 자식이 얼마나 있겠는가. 물론 건강할 때도 빨래 중 3분의 1은 엄마의 몫이고, 3분의 1은 나의 몫이며, 그 나머지는 세탁기가 할 일이었다

 

엄마는 늘 빨래를 온전히 세탁기에 맡기지 않으셨다. 늘 애벌빨래는 당신이 직접 손으로 하셨지만 기계엔 영 적응을 못하셨는지라 그 어머니의 그 딸이라고, 역시 기계치인 나는 그나마 헹굼에서 탈수까지의 기계 작동 정도는 가능해 이 모든 기능이 완료되면 너는 것까지가 내 담당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가 언제 빨래를 하건 엄마는 상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어제는 이른 아침 내가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 도둑빨래라도 할 모양이었던지 당신이 먼저 서두는 것이 아닌가. 정말 근래에 없던 일이었다. 엄마는 속옷만큼은 세제 푼 온수에 담가놔야 때가 잘 빠진다고 완고하게 믿는지라 이것을 거역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침 동생이 샤워를 하고 더운물이 남아 있을 테니 그것을 이용해 빨래를 하려는 것이란다. 아유, 깜짝도 하셔라. 더운물은 조금 있다 나도 필요한데 그때 보일러 틀어 해도 되는 것을 그새를 못 참고 일을 벌이다니. 물 어라도 봤더라면 알려 드렸을 텐데.

 

사실 그때 나는 날씨가 더워서인지 요즘 연일 잠을 설치는 바람에 밀린 독서를 하고 다시 아침식사 때까지 잠시 눈을 붙여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일에 차질을 빚게 생긴 것이다. 그래도 당신으로선 건강만 했더라면 본래 해 왔던 일이기도 하고, 그동안은 딸이 해 왔으니 이번만큼은 쉬게 해 주고도 싶으셨으리라. 그런데 기계를 쉬 작동하지 못하니 오히려 딸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도 그렇지. 짜증난다고 차마 대놓고 부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말이 나갔을 리는 없었다. 그러자 엄마는 세탁기 어떻게 설정하는지 가르쳐 주면 그대로 할 테니 너는 들어가 잠이나 자란다. 앓느니 죽지 그 설명을 또 언제 하겠는가.

 

어쨌든 기계작동은 내 담당이니 잠시 후 나는 헹굼과 탈수를 설정해 놓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 그런데 또 이게 무슨 일인가. 갑자기 잘 돌아가던 세탁기가 멈추는 소리가 났다. 나가보니 엄마는 내가 설정해 논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직접 해 보겠다고 세탁기 앞에 어리둥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엄마가 기계작동을 아주 못하는 것은 아니다. 머릿속에 정확히 입력이 안 돼서 그렇지. 대충은 아신다. 그나마 빨래를 오랫동안 안하셨고, 긴급하게 세탁기를 작동할 일도 없었으니 아예 그쪽으론 퇴화가 되어버리셨던 것이다. 그런데 난 또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이했으니 역시 이번에도 짜증을 안 냈을 리 만무하다. “오늘은 왜 그러는데?”

 

난 그저 엄마가 이런 시간에 빨래를 하겠다는 게 낯설었다. 엄마가 굳이 신경을 안 써도 다 알아서 할 것을. 모든 일의 질서는 그 일을 하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아무리 전에 했었다고 이렇게 다시 비집고 하려고 해도 맡아서 일을 해 왔던 사람의 무의식이 그것을 쉽게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근래에 보기 드물게 빨래를 깨끗이 빨아 너니 그도 한갓지고 좋았다. 평소 같으면 이제 막 시작했을 시간에 빨래를 마쳤으니 시간을 공으로 번 것 같았다. 나는 조금 아까 엄마 앞에서 예쁘게 말하지 못한 죄도 있고 해서, “아유, 얼마만이야, 이렇게 일찍 빨래를 마쳐 보기는. 일찍 하니까 좋으네. 하하.”하며 그렇지 않아도 없는 아양을 떨어 본다.

 

그런데 나는 머리가 나쁜 아이였을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 그것도 그나마 새벽에 통증이 없으니까 할 수 있었던 거지, 통증이 있었어 봐라. 이 시간에 어림도 없어.”하는 것이다. 그랬구나. 내가 귀찮게 여겼던 시간이 엄마에겐 그리도 되찾고 싶었던 시간인지도 몰랐다. 건강했을 때 여름 아침이면 일찍 빨래를 마쳐놓고 엄마는 종종 나와 비슷한 말을 하곤 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언제부터 엄마가 빨래를 하며 살았다고 저렇게 수선을 피우는 걸까 짜증부터 냈으니. 엄마에겐 축하받아 마땅할 일을 나는 한갓 귀찮다는 생각 따위로 누르려 했던 것이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나만 아는 아이로 자랐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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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6-07-19 1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르셨을 몸으로 밤마다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 상상하니 뭐라고 해야할지. 저의 아버지도 밤에 주로 고통을 느끼셨는지 언제나 웅크리고 계셨었어요. 암이 무서운 건 고통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도 어머님께 그냥 푹 쉬시라 하세요. 딸 좀 부려 먹으시지. 암 이전의 일상이, 평범했던 일상이 그리울 것 같기는 합니다. 스텔라님도 힘드시겠지만, 우리 평범한 일상에 감사해야 할 것 같아요.

stella.K 2016-07-19 18:30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요즘엔 그래도 고비를 넘기셨는지 요즘만 같아도
살 것 같다고 하시네요. 더 이상의 통증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앞으로 어떨지 모르겠어요.
정말 아플 때 제일 그리운 건 일상인 것 같아요.
건강할 땐 하나도 좋지도 않고 다람쥐 쳇바퀴 같은 것이
아프면 이것도 못하나 얼마나 서럽던지.

기억님 아버님도 암이셨군요.
저의 엄니 보니까 이게 이젠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더군요.
건강이 최고여요.^^

yureka01 2016-07-19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시고 싶은대로 보조 맞춰 드리세요...

살면 얼마나 산다고 하려하는데 말리면 스트레스거든요..

내 마음같아선 그저 빨래는 잊고 당신 자신의 몸과 마음이나 추스리련만,

엄니 마음이 또 그렇지가 못하거든요.

건강 찾으셨음 좋겠습니다.....

stella.K 2016-07-20 14:01   좋아요 2 | URL
그게 그렇더라구요. 제깐엔 엄니 신경 쓰지 않게
지금까지 군소리 않하고, 귀찮다는 내색도 안하고
하느라고 하는 건데 꼭 요런데서 삑사리가 나는 거죠.
요즘만 같아도 엄마가 편안해 하시니 저도 마음이 편합니다.
이게 좀 앞으로 길게 갔으면 좋겠어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슴다.^^

페크pek0501 2016-07-21 1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모나 자식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함은 우리에게 늘 있는 일 같아요.
그래서 시간이 지나고 나면 후회할 일이 생기지요.
그래서 인간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면 좀 기분이 나아진답니다.
옥신각신하는 소리도 어쩌면 행복한 잡음일지 모릅니다.

stella.K 2016-07-22 14:10   좋아요 0 | URL
맞아요. 행복한 잡음!
오늘도 빨래를 또 하셨습니다.
전 이상하게 엄마가 빨래하는 걸 그냥 못 넘기는 것 같습니다.
내일쯤 해도 되는 걸 오늘 기어이 하셨으니.
당신이 먼저 나서서 하시려 하는 걸 보면
그만도 건강이 많이 회복된 건데
저는 이러고 있습니다.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