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을 선택한 부부의 고뇌
문(門)/나쓰메 소세키 장편소설
유은경 옮김/향연/246쪽/9000원



▲ 영문학자이자 뛰어난 하이쿠 시인이기도 했던 작가 나쓰메 소세키. 일본 근대 문학사에서 최고의 작가로 손꼽히는 그는 인간 존재의 내면 탐구라는 진지한 주제를 탐구했다.
일본 근대문학의 선구자이며 국민작가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나쓰메 소세키(1867~1916). 인간의 내면적 우울과 불안을 밀도 있게 그려낸 그는 20세기 초 서구의 근대화 물결 속에 나름의 근대적 인간상과 삶의 모습을 모색하는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1000엔짜리 지폐에 얼굴이 새겨질 만큼 일본 국민들에게 추앙을 받는 작가다. 국내에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등의 작품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은 불륜을 선택한 데 대한 죄의식을 안고서 세상으로부터 유리된 채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부부의 고뇌를 담았다. 장편소설 ‘산시로’ ‘그후’와 함께 사랑을 주제로 한 그의 초기 3부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대학 시절 가장 친한 친구의 애인을 빼앗은 소스케와, 애인을 버린 오요네는 사랑은 얻었으나 세상 밖으로 내쫓기게 된다.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던 소스케에게서 친구는 떠나고, 가족과 친척의 외면 속에서 학교와 사회로부터도 고립된다. 오요네는 세 번에 걸친 임신이 실패로 돌아가자 심한 정신적 가책까지 느끼게 된다. 평생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자의식과 고독에 시달리는 이들 부부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면서도 결국 도피하게 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스케는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지도 않은 채 사회와 거의 단절된 생활을 한다. 아버지의 유산 처리나 동생의 진학 문제에 대해 소극적으로만 대처한다. 이들 부부는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금실 좋게 살아가지만, “어느 틈엔가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과거라고 하는 어둡고 깊은 구렁텅이 속에 떨어져 있었다.”(46쪽)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절벽 밑의 작은 셋집은 그들의 위태롭고 불안한 심정을 암시한다. 드라마틱한 사건 대신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 속에 숨어있는 복선과 섬세한 심리묘사를 읽어내는 것이 그의 소설의 감칠맛이다.

▲ 문
“이 비극이 언제 어떤 형태로 다시 자기 가족을 엄습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이따금 그의 머릿속에 안개처럼 드리웠다. …간신히 자기 차례가 되어 차가운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는 문득 이 모습은 원래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144쪽)

자기와 관계없이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불시로 문득문득 고개를 내미는 과거의 죄의식은 이들 부부의 가슴을 억누르곤 한다.

소스케가 대학시절 애인을 빼앗은 옛 친구 야스이의 소식을 듣고 곧 그와 대면할 상황에 처하게 되자 소설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극도의 내적 갈등을 겪는 소스케는 산사로 찾아들어가 참선을 시도하지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다. 소스케로 인해 만주나 몽골로 떠돌며 살게 된 친구 야스이는 소스케 앞을 가로막고 선 ‘문’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오래도록 문 밖에서 서성이는 운명으로 태어난 듯했다. …눈 앞에는 견고한 문이 언제까지나 전망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문을 통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245쪽)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친구의 존재감에 늘 불안해했던 소스케는 친구 야스이의 굴레를 활짝 벗어젖히고 싶었다. 하지만 평생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그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앞에서 초조해한다. 그는 여전히 무능하고 무력하게, 닫힌 문 앞에 남겨져 있을 뿐이다.

작품의 결말에 오요네는 유리창으로 비쳐드는 화창한 햇살을 바라보며 새봄이 왔다고 좋아하지만, 소스케는 고개를 숙인 채 “하지만 다시 또 겨울이 올 거야”(256쪽)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사랑과 불륜, 죄 등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천착하는 소세키 특유의 내면적 문장이 독자를 반성적 성찰로 이끄는 작품이다.

(최홍렬기자 hrchoi@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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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4-05-09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최근에 읽은 소설이 '도련님'인데 그의 다른 작품이 무겁고 내면으로 가라앉는 느낌인반면 도련님은 유쾌하고 가벼워서 즐겁게 읽었죠. 음, '문'의 스토리만 보아도 궁금해집니다. 꼭, 읽어보고싶네요. 나쓰메 소세키의 글은 혹독한 겨울도 봄을 잉태하기 위한 시련일 뿐이라고 위로하는 듯 평화롭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