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다.

기억이 흐릿하긴 한데, 그때 이미 집엔 계몽사란 어린이 책 전문 출판사에서 나온 50권짜리 <소년 소녀 명작 전집>이던가 하는 전집류와 같은 출판사인지는 모르겠는데 20권짜리 <어린이 전래 동화>인가 하는 책이 있기는 했다. 둘 다 몇 년 된 책들인데 이 책들은 나를 위한 책은 아니었다.

엄마가 나 보다 먼저 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언니와 오빠를 위해 방문 판매를 온 책 장사에게 그 책을 샀던 것이다. 엄마는 언니와 오빠가 초등학교엘 다니고 있었으니 그런 책 한 질쯤은 두고 읽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땐 또 서열 의식이 강해서 오빠가 나와 동생에게 함부로 그 책들을 만지지 못하게 했다. 읽어야 한다면 꼭 오빠의 허락을 받고 읽어야 했다. 하지만 나와 동생은 아직도 한글을 떼기 전이었으니 그 책에 욕심 낼 처지가 못 됐다. 그러니 오빠가 그 책 가지고 위세 부려봤자 나와 동생에겐 그다지 먹히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그래? 그럼 그냥 오빠 가져. 어차피 우린 책도 잘 볼 줄 모르잖아.’ 뭐 그런 식이었다.

그래서 그럴까, 서열 의식도 다 같이 욕심 낼만한 것에서 내야 빛을 바라는 거지 한글도 다 못 뗀 조무래기들을 데리고 내 봤자 알아주지도 않는다라는 걸 오빠도 알았는지 나중엔 책에 대해 그다지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전집들은 무료한 날 심심함을 달래기 위한 좋은 놀잇감이 되어 주곤 했다. 이를테면 그 50권 자리를 책꽂이에서 빼서 다 흩어 놓고는 걸레로 깨끗이 먼지를 닦고 1권부터 마지막 권까지 누가 빨리 찾아서 다시 책꽂이에 꽂아 놓나 시합을 하는 것이다. 중간에 두 세 권 정도를 잃어버려서 항상 그 놀이에선 아쉬움이 남았지만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에겐 전집류는 그런 존재였다.

나중에 한글을 깨쳤으니 슬슬 읽어 볼만도 할 텐데 나는 왠지 그 전집엔 손이 가지 않았다. 이제 초등학교를 갓 들어갔으니 한글만 깨쳤다 뿐 왠지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제 초등학교엘 갓 들어 간 아이가 <소공자><소공녀>를 어찌 알겠으며, <쿠오레>는 또 어찌 알겠는가? 그런 것들을 읽으려면 적어도 언니 나이쯤 되야 하는데 그때 되면 그 책들은 구닥다리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받았던 생활통지표(그때는 성적표가 아니었다. 통지표였다)에 담임 선생님은 나의 뭘 보고 그런 평가를 내리셨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책 읽기를 싫어하는 것 같다고 쓰셨다.

솔직히 난 그렇게 써 있는지도 몰랐다. 나중에 언니가 읽어줘서 알았는데 언니는 또 뭐가 좋다고 읽으면서 깔깔대고 웃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생애 처음으로 받아 본 생활통지표에 국어가 였으니 점수로 치자면 빵점을 맞은 거나 다름없으니 그것과 연관 짓다 보니 웃을 수 밖에. 하지만 그게 웃을 일인가? 오히려 언니라면 가슴 아파하며 격려해줘도 부족할 판에 생판 남도 아니고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언니도 알고 보면 날 것도 없었다.

솔직히 그 무렵이 70년 대 초였고, TV가 흔한 시절이 아니었는데 그런 시절에 아이에게 전집류를 사 주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그런 엄마의 마음도 모르고 언니를 위해 산 그 계몽사 전집을 몇 권 읽고 안 읽었던 것이다.[1] 그러면서 내 통지표에 담임 선생님이 그런 평가 좀 썼다고 킥킥대고 웃을 수 있는 것인가? 하여간 언니라고 하나 있는 게 도움이 되질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 역시도 생애 첫 통지표에 국어 성적이 라는 건 어린 마음에도 충격적이긴 했다. 이런 성적이라면 앞으로 이 험난한 학교 생활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좀 캄캄하긴 했다. 그리고 정말 선생님은 나의 뭘 보고 책 읽기를 싫어한다고 했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만해도 선생님 말씀은 곧 진리요 법인데 의문을 품었다간 오히려 반항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 그럴 수도 없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나 자신을 두고 봤을 때 선생님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글을 남들처럼 빨리 읽지를 못하는 것이다. 아주 천천히 읽는 편인데 그것을 선생님은 내가 책을 읽기를 싫어한다고 본 것 같았다. 책을 천천히 읽는 것과 책을 싫어하는 것과는 다른 것인데 그때 선생님은 나를 좀 더 인내하고 지켜봐 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아무튼 그런 담임 선생님의 평가도 있었고, 언니의 조롱을 받고 나니 확실히 이 부분에서 은연중 열등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언니는 일찌감치 책과 담을 쌓고 살지만, 나는 거북이 경주하듯 빨리 읽지 못하여 많이 읽을 수는 없지만 길게 꾸준히 읽어 지금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언니의 웃음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또한 담임 선생님의 그런 평가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렇게 독서는 시간을 이기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사람도 봤다. 책을 빨리 읽을 수 있는데 많이 읽지 않는 사람이 있고, 느리게 읽는데 많이 읽는 사람도 봤다. 물론 빨리 많이 읽으면 그 보다 좋을 수야 없겠지만 어떻게 읽든 그것을 시간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 책을 읽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성적에 있어서 영원한 는 있을지 모르지만 영원한 는 없다. 나는 훗날 학교를 다니면서 국어에서 썩 괜찮은 성적을 거둔 적도 있으니까. 물론 그것이 내 인생에 스크래치는 좀 남겠지. 그러나 사는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말인데 열등감은 열등감으로 있지 않는다. 무엇이든 자신의 한 가지의 것에 가만히 응시해 보라. 그러다 보면 그것에 휘말리는 나 자신 보단 뭔가 그것을 이겨보고 싶다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나는 바로 그 열등감을 응시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본격적인 독서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1] 사실 이것도 분명치는 않다. 나중에 언니는 그 책을 다 읽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언니가 그 책을 산 초기 때를 제외하고 읽는 걸 보지 못했다. 단지 내가 지금 와 이렇게 밝히는 것은 누가 옳고 그르냐를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객관성 유지 차원에서 밝혀두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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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4-30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나게 빠르셨네요. 저는 초등학교 전에 책 읽기를 조금 좋아하다가 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교 입학까지 독서의 공백기였죠. 학업이 분명 관련되었겠지만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독서의 시작은 대학입학이지만 대학시절에는 도서관에서 책만 빌렸지, 독서는 부진했죠. 정작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독서는 대학 졸업과 함께 시작했죠. 저도 왜그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책 읽기 좋은 학창 시절 책을 안 읽다가 남이 책을 안 읽는 그 시절부터 책을 읽게 된 이유를요.

stella.K 2014-04-30 18:31   좋아요 0 | URL
와우, 이 글 올리기 잘했군요.
이렇게 마립간님 댓글도 받고.
제가 빠른 거군요. 전 남 보다 책을 빨리 읽지 못해
무지 열등감 느꼈었는데. 이거 벗어난 거 얼마 안 되요.ㅎㅎ

2014-04-30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30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4-04-30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4학년 때부터 책과 친해지다니... 저에 비해 많이 빠르군요.
원래 4학년 때가 뭔가 알기 시작하는 때가 아닌가 생각해요.
저도 4학년때부터 공부에 흥미를 느끼면서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거든요.

으음... 추천 수도 높고 방문자 수도 200명이 넘고 이제 예전으로 돌아가신 듯하네요.
축하드려요...

stella.K 2014-04-30 18:31   좋아요 0 | URL
제가 빠른 거군요. ㅋ

지지난주부턴가 이래요.^^
 

 나는 작년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내 맘대로 좋은 책을 갈무리 해 보았다. 하지만 지난 한 해 내가 쓴 리뷰 중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던 책은 따로 있다. 바로 <약, 먹으면 안 된다>란 책이다. 

 

사실 이 책은 내 맘대로 좋은 책엔 포함시키지 않은 책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이 전혀 유익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OECD 국가 중 항생제의 남용이 가장 심각한 나라는 단연 우리나라다. 비록 일본인 저자가 쓴 책이라도 확실히 이 책은 경종을 울릴만 했고, 일본의 약 남용 실태는 크게 우리나라와 다르지도 않아 보였다. 

 

하지만 내가 리뷰를 남겼을 때는 책 전체를 아우르는 방식이 아니었고, 특별히 책에서 항암제를 다룬 부분이 있어 그것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밝히기도 했지만, 이 책을 읽을즈음 나의 오빠가 암투병을 하고 있었던 때였기 때문에 그만큼 나의 리뷰는 절절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항암제의 유해성에 대해 다루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아 주었다. 최근까지도 나는 댓글을 받곤 했는데, 그것으로 봐 역시 많은 사람들이 항암제의 심각성에 대해서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내맘대로 좋은 책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글쎄, 약의 심각성에 대해 각성시키기엔 좋은 책이긴 하지만 또 일각에선 이 책을 비판하는 소리도 들었고, 실상 나 자신도 새로운 것에 눈을 뜨는 개기가 되긴 했지만 아주 감동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모름지기 올해의 책은 감동이 다수 포함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책은 한마디로 약의 위험성을 각성시키기엔 좋긴 하지만, 형평성을 고려해 좀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를들면, 이 책은 진통제도 먹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는데, 물론 진통제를 습관적으로 먹는 사람에겐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나 같이 두통에 어쩌다 한 번 먹는 사람은 빨리 두통을 가라 앉히고 다음 일을 하는 것이 훌씬 낫지 않을까? 오늘 날 쏟아져 나오는 진통제는 어느 정도 안정성을 확보하고 나오는 것 같은데 그런 것까지 규제를 한다면, 이 책은 좋고 나쁨을 떠나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씌여진 책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솔직히 이 책의 말대로 정부와 제약회사와 병원의 관계는 그들 당사자들만 아는 것이니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알 길이 없고, 이런 책이 전해주는 나름의 진실이 있기 때문에 알아서 나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엊그제도 어느 블로거가 최근 췌장암으로 어머니를 잃고, 이런 책을 진작 읽을 걸 그랬다며 통한의 글을 남겼는데 마음이 짠했다. 물론 어머니를 잃은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꼭 의사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 가신 것은 아닐테고, 그 분은 담당의가 불친절 했던 것 또 그로인해 더 물어 볼 것도 물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자기 자신의 아쉬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 마음이 어떨지 알 것 같지만 변변히 위로도 못해 주었다. 단지 위의 책 보단 <암에 걸린 채로 행복하게 사는 법>이란 책을 권해 주었다. 이 책은 내 맘대로 좋은 책 리스트에 포함시킨 책이라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다. 

 

이 책을 권하면서, 고인이 아픈 채로 곁에 오래 남아 있는 것 보다 저 세상에서 안식할 것을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고인이 건강할 때 함께 했던 추억들을 떠올리라고 했다. 물론 그 말이 지금 슬퍼하는 그분께 무슨 힘이 될까 싶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슬픔도 상처도 아무는 법이니 나를 빗대어 크게 걱정하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그렇게 잘 쓰지도 못한 리뷰가 많은 사람에게 작게나마 반향을 일으켜서 나름 보람도 있었다. 좋은 글이 사람과 좋은 인연을 맺고, 살릴 수도 있겠구나. 작은 희망 같은 것을 본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댓글을 달아 준 이들 중엔 암에 대한 통계가 잘못 됐다고 지적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는 세 명 중 한 명 꼴이 아니고, 우리나라 인구가 5천만이라고 상정할 때 백만 명, 그러니까 2% 즉 50명 중 한 명이 암에 걸린다고 한 사람도 있었다. 50명 중 한 명 꼴이라면 3명 중 한 명 꼴 보다는 확실히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50명 중 한 명도 과히 낫은 비율은 아닌 것 같다. 며칠 전 뉴스에도 10년 사이 암환자는 2배로 들어났고, 그에 못지 않게 치료율도 높아졌다고는 하는데, 확실히 이제 이 병은 그야말로 '병 주고, 약 주고의 병'은 아닌가 싶다.      

 

 

* 요즘엔 왜 이렇게 글만 썼다하면 긴 글이 되는지 모르겠다.ㅠ

한 가지 더 알릴 것이 있다면, 오늘부터 나의 옛 닉네임인 스텔라를 다시 회복한다. 왜 많은 분들이 나의 옛 이름을 더 선호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나도 그 이름이 싫은 것은 아니다. 이름은 그 뜻도 좋아야겠지만, 무엇보다 남이 부를 때 좋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많은 분들의 뜻을 겸허히 받들어 나의 서재를 스텔라로 하기로 했다. 착오 없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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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1-03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글이 되는 건 매우 좋은 현상인 것 같아요. 글을 쓰려면 할 말이 많아야 하는 법이니까요.
축하드려요.

스텔라 님으로 돌아오신 것도 축하합니다. 2014년은 스텔라, 라는 이름으로 출발하네요.
추카추카추카추카추카추카..........................앞으로 백 번임. ㅋㅋ

stella.K 2014-01-03 12:05   좋아요 0 | URL
ㅎㅎ 진작 고칠 걸 그랬나요? 언니가 이렇게 반가워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고맙습니다.^^
 


 

작가의 책은 최근에 많이 번역되어 나왔지만 나는 이 책으로 첫 인연을 맺었다. 

늘 소설을 많이 읽기를 바라지만, 난 항상 에세이에 마음이 간다. 그러는 것을 보면 나도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그렇듯 에세이는 삶을 생각하게 만들고, 성찰하게 만드니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해 수시로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이 책은 그래서 읽을만 하다. 에세이를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새로운 시각에 눈을 뜨게 해 준 책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각 글마다 제목이 '...하다'식의 동사형으로 되어있다. 우리가 어느 때 한 번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있어서 의미를 부여해 본 일이 있는가? 바로 그것을 붙잡아 글을 썼고, 그 속 깊은 맛이 대단하다 싶다.

 게다가 또 한 번 놀라게 되는 건, 에세이집 치고는 그 두께가 만만치 않은데 이런 에세이집은 근래에 보지 못한 것 같다. 물론 난 이렇게 도톰한 책을 좋아해 이 책은 이래저래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었다.   

특이하게도, 저자는 한국에 잠깐 산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경계인으로써의 삶이 작가로써의 정체성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을 하게 만든 것 같다. 특히 난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모르게 일본인에 대해 편견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이를테면 일본인들은 늘 침략자, 가해자란 의식 말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들도 전쟁의 피해자였고 그로인해 어려움을 겪고 살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저자의 진지한 글쓰기가 난 마음에 든다. 나중에라도 꼭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올해는 오빠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힘든 한 해였다. 아무래도 집안에 누가 아프면 건강서적을 안 볼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렇게도 건강했던 오빠가 갑자기 암에 걸리고 보니 새삼 이 암이란 녀석이 뭔지 알고 싶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전까지는 암은 걸릴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나 걸리는 거지 우리 가족에겐 해당도 안 되는(적어도 아직은) 거라고 치부해 버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래 전, 아버지를 암으로 잃고도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다는 게 왠지 나 자신 스스로에게 속은 것 같아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런 책들이 오빠를 간병하는데 그렇게 많은 도움이 됐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읽었던 암에 대한 책들 거의 대부분은 병원 치료에 대해 회의적이었는데, 오빠는 알고도 또 모르고도 병원 치료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저 오빠가 그렇게 됐으니 나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다 싶어, 난 어떻게 대처해야할까에 참고가 될만 하다고 할까?

무엇보다 이 책이 마음에 드는 건, 저자가 나이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암도 인생에서 만나질 수 있는 한 과정이려니 하는 긍정적인 태도다. 젊은 의사가 암에 관해 글을 썼다면 처방 위주의 글을 썼을지도 모르지.

사실 오빠가 암이라고 했을 때 우리 집은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는데, 이 책을 읽고 그때 우린 좀 오버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동양인들은 죽음에 대해 긍정적이지 못한데다가, 오빠의 나이가 죽기엔 아직 젊은 나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책 표지가 아주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제목도 그렇고 암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가질 수 있게돼서 나름 좋게 읽었다.

더불어 <의사의 90%는 암을 오해하고 있다>도 좋았다고 생각하는데, 무엇보다 일본 의사들만 해도 그들도 의사임에도 무조건 병원 치료만을 권하지 않는 자세가 마음에 든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고 일부 몇몇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나라는 마치 병원 의사만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것처럼 비쳐질 때가 많아 씁쓸할 때가 있다.

 

바로 소개한 위의 책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나온지 좀 된 책이다. 내가 그다지 책을 계획적으로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 책은 정말 우연치 않게 읽게된 책인데 상당히 좋다. 출판된 당시에는 나름 지명도가 있던 책으로 알고 있는데, 다른 책 읽느라 읽어 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책이다. 이렇게 생각지도 않게 읽고 감동을 먹으면 횡재한 느낌이든다.

하지만 내가 진짜 말하려 하는 것은 이제부터다.

어제였나? 뉴스에 서점 귀퉁이에도 진열되 보지도 못하고 바로 패기되는 책이 어마어마 하단다. 나올 때는 꽤 비싼 고가였어도 패기될 땐 한 권에 100원 받고 가루가 된단다. 그도 그럴 것이, 한 해 문을 닫는 동네 서점이 너무 많고, 상승세에 있던 인터넷 서점도 최근 판매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불황이면 제일 먼저 줄이는 것이 문화비일테고, 또 그만큼 영세 출판사는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이에 대해 곧 해결방안을 제시할 거라고 하긴 하는데, 과연 실효성이 있을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볼 때 또 하나 문제점이 있다면, 서점이나 출판사들이 너무 신간 위주로만 마케팅을 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신간이 나왔을 때 반짝 긴장하고 팔지 않으면 언제 묻혀질지 알 수가 없다.

나만해도, 몇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신간에 구애받지 않고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새로 나온 책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고, 그것을 읽어주지 않으면 뭔가 뒤쳐지는 것만 같다. 그리고 예전에는 매체가 한정되어 있고, 꼭 발품 팔아 서점에 가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신간에 대한 생명력이 제법 길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같은 년도에 나왔다고 해도 몇 개월 차이도 없는데도 벌써 구간 취급을 받는다.

이것은 아무래도 인터넷의 영향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과연 앞으로도 스테디셀러가 가능할 수 있을지, 가능해도 얼마나 가능할 수 있을지 새삼 의문스러워졌다. 신간만 가지고는 출판사나 서점이나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각 인터넷 서점마다 잘 쓴 리뷰어들에게 시상하는 제도가 있지만, 거진 대부분이 보면 신간 위주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간혹 출판된지 좀 지난 책에도 당선의 영예를 주기도 하는데 그건 어쩌다 가물에 콩나듯 하는 것 같다. 신간도 물론 많이 알려져야겠지만, 그 때문에 잘 만든 책 한 권이 스테디셀러로 가지 못한다면 좀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출판된지 좀 오래 되었어도 한번씩 눈길을 주고, 무엇보다 자발적인 북클럽이 활성화 되어서 좋은 책이 꾸준히 사랑 받을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비근한 예로 외국에선 출판 당시는 별로 빛을 못 봤는데 북클럽에서 찾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그래서 늦게 빛을 보는 책들이 있는데, 그런 것처럼 이때야말로 '독자의 힘'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사실 불행했던 예술가의 삶을 읽는다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언젠가 에밀졸라의 <작품>이란 책을 읽고 기분이 너무 우울해져 읽다가 덮어버린 적이 있다. 이 책도 우울한 것으로 따지자면 에밀졸라의 책 못지 않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 자체가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상당히 잘 쓴 책이다. 특히 작가의 문체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리만큼 매혹적이고, 깊이가 있다.

무엇보다 작가가 중견을 넘어 노장인데 필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들어서도 지치지 않는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이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다. 나이 먹었다고 절필하는 작가들을 가끔 보곤 하는데, 물론 평생 잘 다닌 직장 은퇴도 하는데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왠지 작가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펜을 놓지 말아야 진정한 작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입장에서 세상에 쓰고 싶은 글이 얼마나 많은데 절필을 한단 말인가? 

 

올한 해, 영화 때문에 유명해진 소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영화를 소설로 만든 책엔 눈길도 안 주지만, 소설을 영화로 만든 책은 일단 관심을 갖고 보는 타입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는 아직 이 작품을 영화로는 보지 못했다. 

그런데 책을 읽어 본 나는, 일단 작가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관상에 관한 거의 모든 자료를 작품속에 잘도 녹여냈다. 작가에게 정말 관상을 볼 줄 아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했는데, 과연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작가는 관상가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것이 너무 만연해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없지 않았다. 물론 좋게 보자면 관상도 쉬운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도 되었지만. 읽고 있으면 정말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고, 사람을 그냥 지나치게 되질 않는 것 같다. 

 

얼마 전,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이 서거했다. 나는 또 짬짬히 그 나라 국민의 추모 장면을 뉴스를 통해 보곤했는데, 다소 놀라운 장면을 보았다. 그 나라 국민들은 그다지 슬퍼하는 기색없이 오히려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오빠 얘기를 해서 그렇긴 하지만,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보면 그게 꼭 슬퍼할 일인가에 대해 다소간의 의문을 갖곤 한다.

물론 두 번 맺어질 수 없는 인연을 죽음으로, 이제 다시는 살아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슬프다 못해 서늘하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축제로 만드는 나라가 있다는 게 자못 부럽기까지 하다.

이 책은 임종에 관한 책이다. 더 정확히는 살아 있는 사람이 임종을 맞이한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역시도 적잖이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안녕을 고하고 떠나갔다. 내년엔 또 어떤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나갈까? 죽음을 점점 더 가까이서 느낀다. 축하 할 일에만 너무 좋아하지 말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 있었으면 한다.

여담이지만, 축하 받을 일에만 축하해 주는 사람은 오래가지 않는다. 슬플 때 말 한마디라도 따뜻히 남겨주는 사람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의 서재에 오빠의 부고를 알렸을 때, 네 분 정도의 서재인이 위로의 말을 남겨 주셨다. 그분들껜 아직도 감사한 마음이 남아 있다. 하지만 내가 한동안 서재 활동을 거의 안한 여파가 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도 종종 서재에 글을 남기긴 하겠지만, 역시 아쉬워 할 일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잊혀지면 잊혀지는대로 한 세상을 살아가는 게 인생이 아니던가?

그대 때문에 또 한 해를 살 수 있어서 고마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그래도 있다는 것에 감사와 위로를 삼아 본다.

한 해 사시느라 수고 많았다고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서재인들에게도 미리 인사를 남겨 본다. 남은 한 해 잘 마무리 하고, 부디 행복한 새해를 맞이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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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26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스스로 좋아하는 책 이야기만 쓰지만,
'새로 나온 책' 이야기가 아니면
그닥 눈길을 못 받는다고 느끼곤 해요.

그래도, 이렇게 쓰는 글을
누군가 언젠가 읽으면서
도서관 마실을 하며 챙겨 살피시는 분이 있으리라 믿고,
즐겁게 책 하나 마음에 담으면 될 노릇이라고 생각해요.

올해 마무리 즐거이 하시면서
새해에 또 새롭게 하루하루 누리셔요~

stella.K 2013-12-30 14:34   좋아요 0 | URL
올한 해 함께살기님 덕분에 무사히 잘 넘긴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저의 서재에 관심 가져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고마웠습니다.
함께살기님도 얼마남지 않은 한해 마무리 잘하시고,
또 힘차게 새해 맞으시기 바랍니다.
님의 서재도 더 풍성하고 좋은 일들 가득 넘쳐나길 빌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4943218#8994943218_MyReview

 

이 책의 출판일이 올해 10월 22일인데 벌써 절판이 되었다.

이유가 뭘까? 평점도 높은데...

그래24에서도 절판이고,

다행히도 옆동네는 판매가 되는 모양이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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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때 미치도록 책을 모았던 적이 있다. 내가 좋아서도 사고, 서재 활동을 하니 여기 저기서 책을 선물 받기도 하고, 물론 또 받은만큼 간간히 개인으로 또는 이벤트로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가급적이면 책을 안 모르려고 하고 있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모은 책이 방 한 가득이니 더 늘어 놓을 때도 없고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사이판에 사는 친구에게 1년에 한 번 많으면 두 번쯤 보내고 있다. 한 번 보내면 적게는 40여권에서 많게는 60권 가까이 보내고 있다. 

예전에는 줄을 치지 않으면 책 읽는 맛이 안나 줄을 치고, 이건 간직할 책이니까 마음껏 쳐야지 하는 책도 어느 새 사이판 행 책 박스에 들어가 있다. 한때는 나도 밑줄그은 책을 남 주는 것에 대한 묘한 강박이 있었다. 누군가 그 책을 읽으면 괜히 관음증을 자극할 것은 아닌지. 또는 새 책을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 뭐 그런 것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역으로 생각해 보면, 나도 가끔 누군가 밑줄그은 책을 받곤 하는데 그것에 대한 거부감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물론 처음엔 이 책 주인은 왜 하필 여기다 줄을 쳤을까? 살짝 궁금해지긴 하지만 만날 일도 없고, 설혹 만난다 해도 왜 그 부분에 밑줄을 쳤냐고 물어 보지도 못한다. 그러니 관음증의 자극은 잠깐 있다마는 정도다. 새 책을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도 잠시다. 요즘 책값이 좀 비싼가? 현금 들여 사지 않을 거라면 그렇게 받는 것도 어찌보면 횡재다. 더구나 새 책이 아니니 밑줄을 맘놓고 칠 수 있어 나쁘지 않다.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물건을 웬만해서 버리는 법이 없으셨다. 그에 비해 나의 엄마는 필요없는 것은 뭐든 버리는 걸 좋아했다. 그 점은 지금 생각해도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아마도 엄마도 아버지와 같은 성격이었다면 우리집은 온갖 잠동사니로 넘쳐났을 것이다.

예전에 책을 모으기만했을 땐 내가 아버지 성격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은 쌓아두는 것이 싫어 뭐든지 가급적 안 모으려고 노력하는데 이 또한 쉽지가 않다. 예전엔 그렇게 사이판에 책을 보내놓으면 약간은 공간이 생겨 마음도 후련해지고, 저 빈 공간을 뭘로 채울까 여유로운 마음도 생겼는데, 어떻게 된 게 요즘엔 그렇게 책을 보내도 별로 비워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책을 추리는 일도 크게 마음 먹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라 자주 보낼 수도 없다.    

예전에 나는, 책을 사면 언젠가 읽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지내보니 그렇지가 않다. 그때 당시엔 왜 그리도 그 책이 탐이 나던지? 무조건 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 읽을지도 모르면서 지르기부터 하는 것이다. 그렇게 지른 책 중 물론 기필코 읽은 책도 있지만, 대부분의 책은 언젠가는 읽지 않게 된다. 책에도 유통기한이 있는 것인지, 언제 읽겠다는 기한이 보장되지 않는 책은 시간 지나면 다시 읽기가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인터넷 서점 검색만해도 따끈따끈한 신간이 그때까지 보지도 못한 표지로 독자를 유혹하고 있는데, 눈이 보배라고 그때 당시엔 좋다고 산 책이 지금 보면 구닥다리가 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뭐 또 그게 아니어도 책이 진화하는 것처럼, 그 책을 낸 저자들도 진화하기 마련이다.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저자가 무슨 책을 내놨다하면 꼭 사게 만드는 책이 있다. 그러나 그 좋다는 책도 얼른 읽어주지 않으면 공염불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내가 꽤 겉멋이나 들고, 속은 게으른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물론 그것에 대해 굳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엄밀히 말하면, 책도 약간의 지적 허영이 있어야 모을 수 있는 물건이라고 생각한다. 출판 기술이 발달하기 전엔 책도 소위 '있는 집 자식들'이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을테니. 물론 또 거기서도 층위가 나눠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책을 읽고 있는데, 너는 이런 책도 읽는구나 하는데서 오는 열등감과 우월감을 나눠갖지 않았을까? 

책 역시 취향에 따라 사람을 구분하기도 한다. 예전엔 어려운 철학책을 척척 읽는 사람이 있으면 무작정 우러러보고 부러워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사람을 보면 웬지 범접하기가 쉽지 않을거란 편견부터 갖게도 한다.    

 

어쩌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음, 그래. 허영과 게으름을 얘기했었다. 난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읽는데 게으른 것 같기는 하다. 그러니 언젠가 읽을 책을 쌓아만 두고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누가 들으면 핑계라고 할지 모르지만, 난 좀 책을 읽는데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그건 책은 좋아하는데, 빨리 읽을 수 가 없는 것이다. 딱히 재본 건 아니지만, 한 번 책을 펼치면 얼마까지 집중해서 책을 읽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책마다 다르겠지만, 좀 재밌고 사로잡는 뭔가가 있다고 하는 책은 대략 1시간 반 내외인 것 같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좀 지치고 눈의 피로도 오고, 어쩔 수 없이 다른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치명적인 약점이 아니어도 책 정보가 예전에 비해 엄청 빨라졌고, 많아졌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전엔 꼭 발품 팔아 서점을 나가 보던가, 신문을 보지 않으면 무슨 책이 새롭게 나왔는지, 어떤 책이 주목을 받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그 일은 손쉽게 이루어지고 있다. 각 매채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책을 소개하고 있고, 각종 이벤트를 통해 현금을 들이지 않고도 책을 구입해 보는 방법도 많아졌으니 이 게으름이라는 것도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난 그런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한 달이면 책을 소화하는(그것이 완독을 했건 이러저러한 이유로 완독을 하지 못하건간에, 소화불량이라고 말하는 것도 소화의 한 과정으로 본다면) 권 수가 예전에 비해 월등히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매체에서 쏟아내는 양에 비하면 여전히 나는 개미걸음인 것이다.       

 

2.

언제가 읽을 책을 그 언젠가 되어도 읽지 않기에 요즘에 나는 사이판 친구에게 책을 보내주는 것 외에도 중고 서점에 내다 팔기까지 하고 있다. 물론 좀 아깝긴 하지만, 더 쌓아두는 것도 뭐하고, 앞서 말한 것처럼 나도 언제부턴가 뭔가를 쌓아두는 것을 짐으로 여기기 시작하면서 우선은 내가 왜 이런 책을 읽는다고 했지? 하는

책부터 팔기로 했다. 지금까지 두 번 실행을 했는데, 비교적 집 가까운 곳에 강남 알라딘 중고서점이 있어 그곳에 갔다 팔았다. 팔아야 할 책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이것도 어느 날 박스 하나를 잡아 한꺼번에 파는 것이 나을 것도 같은데 당분간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운동삼아 직접 나가 팔아 보기로 한다. 

내가 들린 중고서점은 내가 알기론 같은 이름의 중고서점 중 가장 초창기에 문을 연 곳인 줄 알고 있는데 이제야 들려 볼 생각을 한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게으른가 보다. 꼭 팔 목적이 아니어도 오다가다 한번씩 들려 볼 수도 있는데 그것을 하지 못했다. 이 또한 핑계는 여러 가지다. 꼭 중고서점을 들리지 않더라도 읽을 거리는 넘쳐나고, 예전엔 서점에서 한 시간 정도는 서성이며 책 구경을 해도 끄덕없었지만, 지금은 30분 서 있는 것도 힘들 때가 있다. 물론 운동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원인도 있겠지만, 노화에 따른 것도 일부 인정은 해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고서점을 들려야한다면 이유는 한 가지일 것이다. 저렴한 가격. 하지만 이 '저렴하다'는 것도 책을 처음 팔아 본 나로선 엄청난 상대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선, 들어서는 순간 참 세련되고, 모던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름도 '중고서점'이 아닌가? 요즘에 화장실을 변소라고 부르면 눈총을 받듯, 이런 곳에서 '헌책방'이라고 하면 큰 일 날 것도 같다. 정말 점잖게 '중고서점'이라고 해야만 할 것 같다. '헌책방'은 확실히 아날로그적 용어인 것 같다. 지금도 그런 서점이 어딘가 남아 있을 것 같긴한데, 먼지 켜켜이 쌓인 책더미속에서 손님이 찾는 책을 찾아주는 주인의 목장갑 낀 손길. 조금은 바래고, 훝어보면 책의 원주인이 거 놓았을 법한 밑줄들 또는 메모의 흔적. 이런 것이 '헌책'의 의미에 더 가까워 보이는데, 어제 책 네 권의 책을 들고 두 번째로 간 중고서점에선 시쳇말로 쪽팔리는 실수를 연출하고 말았다. 네 권 중 한 권이 증정본이었던 것이다. 책을 파는 것인만큼 흠없고 깨끗한 책으로 선별해서 가져간다고 생각했는데, 그곳 직원의 예리한 눈에 딱걸리고 말았다. "증정본은 안 되시거든요."

작년인가, 재작년에 누구라고 하면 알만한 경제학자가 쓴 베스트셀러 책이었다. 이 책이 언제 어떻게 내 손에 들어 왔는지 기억에 없다. 아무리 베스트셀러여도 경제학에 관해선 아는 바도 없고, 관심도 없으니 이런 책이야 말로 그 언제가 되어도 읽지 않을 책이니 어떤 식으로든 진작에 해결했어야 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런 '증정본'을 우격다짐으로 팔려고 가져왔겠는가? 그건 정말 실수였다. 좀 더 꼼꼼히 살펴보지 않은 나의 실수. 하긴 내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하지만 묻고 싶었다. 아날로그가 종말을 고하고, 디지털 시대에 헌책은 가능한가를. 내가 정말로 먼지 켜켜이 쌓인 헌책방에 그 증정본을 가져갔더라면 과연 그 주인은 받아줬을까? 모르긴 해도 받아주지 않았을까? 아주 싼 헐값에 받아줬을지 모를 일이다(물론 그건 그 중고서점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르지. 아니면 말고). 그러나 난 설혹 그렇다해도 팔지 않았을 것이다. 몇 푼을 받겠다고 그 책을 팔겠는가? 그냥 가지고 있다가 또 어느 때가 되면 사이판의 내 친구에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과연 아날로그 헌책방과 디지털 시대의 중고서점의 차이는 뭘까를. 

마침 그 서점엔 고맙게도 고객을 위해 앉을 수 있는 곳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입구 가까이 몇몇의 직원들의 하나 같은 인사 소리를 듣는다. "ㅇㅇㅇ번 고객님,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알라딘 회원이십니까?" "안녕히 가십시오." 등등의 소리를. 친절해서 좋긴 하지만 뭔가 기계적이고, 저런 소리도 하루종일 해야하는 입장에선 얼마나 피곤할까를 생각해 본다.

아날로그 시대의 서점은 그렇지 않았다. 손님이 오거나 말거나, 계산해서 나갈 때까지 주인과 손님 간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 무뚝뚝하게 돈만 계산하고 나가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또 오면 그때야 비로소 서로의 경계를 풀기도 한다. 내가 학창시절 어느 날 단골 서점의 주인 아저씨는 한쪽에서 낮술을 하는 것이 멋쩍었는지 책을 사러 온 나에게 "어이, 한 잔 하지."라며 농담처럼 권하기도 했다. 나는 그때 아버지로부터 주도를 배우고 있는터라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양을 했다. 지금 같으면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광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의 인간다움이 느껴지기도 하지 않는가?    

 

3.

앞에서도 저렴한 가격의 상대성을 말했는데, 그렇게 깨끗한 놈으로 팔떨리에 책을 들고 와도 세 권을 팔아도 만원을 채 받을 수가 없다. 요즘 책 한 권에 만원이 넘지 않는 책이 얼마나 될까? 아무리 인터넷에서 사도 세 권의 책 값은 2만원을 훌쩍 넘을 것이다. 그것을 만원도 못 받고 팔아버렸으니 책들의 아우성을 듣는 것만 같다. 관심을 못 받아도 좋으니 그저 주인님 곁에만 있게만 해 달라고. 하지만 원주인으로부터 관심을 못 받느니 차라리 싼값이라도 새 주인을 찾아가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이렇게 유래없이 책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빛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하고 휴지조각처럼 버려지는 책이 얼마나 많은데.

중고책을 팔 때는 헐값이란 느낌이지만, 살 때는 또 이처럼 기분 좋은 일이 없다. 특히 안 사고는 못 베기는 책을 발견했을 때는 말이다. 얼마 전, 처음으로 그곳을 들렸을 때 정말 팔기만 하고 사진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서점이라는 곳을 들어왔으니 무슨 책이 있나 구경은 해야할 것 같았다. 내가 안 읽는 책은 남도 안 읽는 걸까? 같은 책이 몇 권씩 진열된 것도 꽤 있었다. 그중에서 유난히 나의 발을 잡아 끄는 책이 있었다. 바로 강원용 목사가 쓴 <역사의 언덕에서>다. 

 

오래 전, 그분이 <빈들에서>란 책을 쓴 줄은 알았는데 이 책은 그 책을 다시 손 본 거라고 한다.

가끔 그런 책이 있다. 도저히 못 지나가겠는 책. 안 사려고 다른 곳을 코너를 빙빙 돌다 결국 어느 틈엔가 그곳을 서성이게 만들고 결국은 사게 만드는 책. 그런 책은 독자가 그 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독자를 선택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읽고 있는 책, 앞으로 읽기를 기다리고 있는 책이 내 책상위에 그득한데 이 책을 사면 언제 또 읽게 될지 모른다. 여타의 많은 책처럼 결국 가지고 있다가 사이판 행 비행기를 타던가, 아니면 다시 중고서점에 파양되지 않을까? 처음에 나는 이 책이 두 권으로 되어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총 다섯 권이고, 그나마 이 책은 알라딘에서는 품절도서로 나온다. 어쨌든 나는 아주 조금씩 읽고 있다.

 

강원용 목사는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 1대 신앙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현대사를 관통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분의 회고록을 읽는다는 건 확실히 남다르긴 하다. 회고록이나 평전 또는 자서전을 읽는 것이야 말로 공인된 관음증을 충족시키는 일은 아닐까?

나도 언젠가 나만의 자서전 또는 회고록을 써 볼 생각이 있는데, 그러려면 지금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야겠지만, 이런 분의 회고록을 읽으면 나는 얼마나 하찮고 무모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다. 특히 글쓰기가 얼마간은 치유의 효과도 있겠지만, 잠자고 있는 기억을 끄집어 내어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도 있으니 이 책을 쓰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특히, 풍수나 명리를 따라 살았던 목사님의 아버지가 장차 이 나라에 전쟁이 있을 것을 예감하고(한국전쟁) 이남으로 가려고 하는 것을 자신의 신앙을 내세워 그런 일은 없을 거라며 북에 남도록 설득하고 자신만 남한으로 내려왔던 부분을 읽고 있노라면 나도 가슴 저려온다. 오죽 마음이 아팠을까. 오죽 자신을 원망했을까? 하지만 세상엔 그런 일이 의외로 많다. 그래서 사람은 한치 않을 모르고 사는 존재인가 보다.

그런데 이 책을 살 때, 이런 책은 누가 팔았을까를 생각해 본다. 나라면 팔지 않고 가지고 있었을 것 같다. 더구나 세월 탓인지 약간 바라기는 했지만 밑줄도 없고 비교적 상태가 좋았다. 물론 덕분에 나 같은 사람은 횡재한 느낌이었지만. 중고서점은 바로 이런 맛에 가는 것일게다. 그나저나 강원용 목사의 저 책의 나머지를 구입해야 할까? 고민된다. 하나가 좋으면 하나가 문제니 인생이란 게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4.

아, 잊은 게 있는데 첫 번째로 들렀을 때 나는 회원등급 플래티넘을 회복한 것을 알았다.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중고서점 거래 한 번했다고 플래티넘 회원도 되고 꽤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제 또 중고서점에 들렀다. 어제는 그냥 팔기만 하고 책은 사지는 않았다. 물론 두어 권 정도가 나의 발목을 잡았지만 나는 애써 그것들을 피해 나왔고, 그래 잘 했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첫날 거기 직원이 물어 봤었다. 현금으로 받겠느냐, 아니면 마일리지로 받겠느냐고. 나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현금으로 받겠다고 했다. 얼마 되지도 않는 현금을 마일리지로 너놓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역시 현금으로 받았던 것이 잘했다 싶다.

어제는 거길 나오면서 몇년 전 아는 사람에게 신세를 지고 갚지 않은 일이 생각이났다. 물론 그쪽은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한동안 잊고지내기도 했는데, 아무래신경이 쓰인다. 책이라도 팔아 신세 갚는 일에 보태야할 것 같다. 옛날엔 책 팔아 학비에 보태쓰곤 했는데, 책을 판다고 얼마나 보탬이 되겠느냐만 그래도 내가 신세진 일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둘 생각이다. 그러다 생각지도 않게 신세를 갚게되면 붕어빵 사 먹지 뭐.

 

그렇게 털어내도 별로 비워냈다는 느낌은 안 든다. 하긴 이제 시작인데 비워내면 얼마나 비워냈겠는가? 별로 표도 나질 않는다. 평생 100권의 책만 지니고 살았다는 수필가 피천득 선생이나, 최근 안 일이지만 김영하 작가도 생각하는 것 보다 적은 책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나도 최종 목표는 정말 가지고 있어야할 책 외엔 갖지 않는 것이다. 갖고 있어야겠다고 하던 책도 세월이 흐르면 별로란 생각이 드는 책도 있다. 그렇게 속아내서 내가 죽을 때까지 남아 있는 책은 몇 권이고, 어떤 책이 될까? 집에 돌아오자 난 또 생각해 본다. 다음엔 어떤 책을 내다 팔까? 이제 나에게 책은 그런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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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1-18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으로 들어온 책을
차근차근 아끼고 사랑하면
그 책이 누구 손으로 돌아가든
아름답게 읽힐 수 있으리라 느껴요.

언제나 즐거운 눈길로
책과 사람과 삶 마주하셔요~

stella.K 2013-11-18 15:49   좋아요 0 | URL
책도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애착이 가니까 그렇겠죠.
그래서 제대로 읽어 주지도 못하고 입양 기관에
맞기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 미안하죠.
그래도 나 보다 꼭 읽어 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한테 가는 게 맞다고 봐요.
제가 강용원 목사님의 책을 입양해 온 것처럼.^^

페크pek0501 2013-11-21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책을 팔지 못할 것 같아요. 아까워서요.
읽지 않은 책들이 많고 어쩌면 끝까지 읽지 못할 책이 있더라도 언젠가는 읽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하나도 없애지 않을 거예요.
이 책도 좋고 저 책도 좋고... 하다 보니까 한꺼번에 병행해서 서너 권을 읽게 되어요.
아직도 읽고 싶으나 읽지 못한 책들이 제 손을 기다리고 있어요.
시간이 많아지면 하나씩 읽어 나가서 리뷰 한 편씩 써서 올리는 걸로 마무리하고 싶어요.
언젠가는 지금보다 시간이 많아지는 날이 오겠지요?

그 대신 책이 많아지는 게 부담스러워 앞으론 아주 신중하게 골라서 책을 구입할 생각입니다. ^^



stella.K 2013-11-21 12:43   좋아요 0 | URL
언니는 욕심쟁이어요!ㅎㅎ
저도 언니 같은 생각이었는데 언젠가는 하다가 안 읽고 방치한 책이
10년 가까이 된 책도 읽더라구요.
이런 책은 아끼고 사랑해 줄 새 주인을 만나는 것이 낫겠다 싶더군요.
요즘엔 글을 가볍게 쓰는 사람들이 많이 생긴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정말 책 고르는데 신중해져요.
저는 고전을 많이 못 읽었는데 그런 책은 정말 한번 사면
쉽게 못 처분할테니 그렇게 되면 저도 예전처럼 책 함부로 못 파는
독자가 될 거예요.ㅋ

비로그인 2014-05-21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좋은 글이 많네요. 책에 관한 이야기, 의료 이야기 등등. 책. 약간의 지적 허영이 있어야 모을 수 있는 물건이라는 글에 공감합니다...

stella.K 2014-05-21 12:29   좋아요 0 | URL
와우, 저의 오래된 글에 댓글을 달아 주시다니...
제가 그런 말을 썼네요. ㅎㅎ
다시 생각나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푸른기침 2014-06-27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하게 공감합니다. ^^ 뜬금없지만 제 꿈은 모든 책을 버리고 딱 한권만 남기는 겁니다.
저도 모르지만 그 책이 무엇이 될지는 참 궁금합니다.

stella.K 2014-06-27 12:14   좋아요 0 | URL
와우, 이런 오래된 글을 보시다닛!
저는 뭐 성경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아서라기 보다(성경은 항상 어렵더군요)
버리면 왠지 불경스러워지는 것 같아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