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스테인 - The Human S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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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생각해 보자. 나는, 태어난 운명과 환경속에 그렇고 그렇게 살아야할 운명이라면 정해진 운명에 따라 살아야하는 것인가? 그것도 인간의 삶의 모습이긴 하겠지만, 인간은 운명을 거부하고 살 유전자도 얼마간은 있기도 하다. 그것은 대체로 타고난 여러 가지 속성과 그 사람의 의지가 그것을 가능하게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인 규범에 맞든지 안 맞든지 간에 말이다. 

인간에겐, 나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그랬을 것이라고 하는 몇몇 가지 상황들이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자신의 태생과 연관이 되어 있다면 그것을 이용해 사회에서 좀 더 유리하게 살아보고자 하는 것은 선택이전에 본능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원래 태어나기는 흑인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몇백만 분의 일로 백색의 피부로 태어났다면 흑인으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노예는 해방되었으나 대신 인종차별이 극심한 시대를 살았다면 더 더욱. 그 시절 사회 모든 부분에서 흑인은 불리한 차별을 받고 있다. 백인의 외모로 태어나기도 쉽지 않은데 흑인으로 살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 것일까? 사회는 백인의 응집을 원하고 있고 그런 와중에 실제로 흑인인 것을 밝혔다가 실연의 아픔을 당한다. 훗날 또 한번의 사랑을 맞고 결혼을 하려할 때 가족에게 등을 돌렸다. 그가 가족에게 등을 돌리니 가족이 절연을 선언을 했다. 가족을 버리니 가족이 나를 버리는 상황이 됐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콜먼 실크의 젊었을 적 이야기다.    

그런데 이것은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그러나 타인의 삶을 보고 수긍하는 것과 한 개인의 개인사를 아는 것은 명백히 다른 차원이다. 그 개인이 때론 그 사회를 말해주기도 하니까.  

이 이야기는 젊은 시절의 콜먼과 노년의 콜먼을 교차해서 보여주고 있다. 현재의 콜먼은 빌 클린턴이 모니카 르윈 스키와 섹스 스캔들이 일어나던 즈음이다. 그 즈음 노년의 콜먼이 대학교수가 되어서 수업시간에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교수회의에서 징계를 받는다. 말하자면 한 나라의 대통령이 섹스 스캔들이 일으킨 것에 비하면 자신의 별 악의없는 발언이 인종차별적이라고 하는 건 콜먼으로선 너무 억울한 처사라고 항의하고 싶은 것이다.  말하자면 콜먼이 젊었을 때와는 사회는 다른 양상이다. 인종차별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고 말 실수하다가 이렇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아내를 잃는 아픔도 겪는다. 하지만 콜먼은 자신이 이러한 일을 겪는데는 뭔가 보이지 않는 세력이 있고 믿고, 어느 날 작가인 레스에게 이것을 파헤쳐 달라고 부탁을 한다. 또한 그즈음 상처속에 살아가는 퍼니아와 불안하고도 욕정 깊은 사랑을 하기도 한다. 콜먼에게 있어서 퍼니아는 젊은 시절 그의 사랑하는 연인을 투영하고 있기도 하다.

이 영화는 약간의 스릴러 형식을 띠고 있다. 이 영화에서 인상 깊은 장면은 눈덮인 설원일 것이다.  


계절 배경이 겨울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유독 이런 장면을 즐겨 사용한 것엔 나름 감독의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은 많은 성공과 부를 낳은 나라다. 지금도 부동의 세계 1위의 강대국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저 눈이 걷히고 나면 맨땅이 드러나듯 미국은 여전히 인종차별로 몸살을 앓고 있고 많은 위선과 음모로 불안에 떨고 있다.  

보는 장면처럼 저런 단단히 언 강에 톱으로 구멍을 뚫고 낚시 바늘을 드리우고 낚시를 할 수도 있지만,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사람의 오점을 들추어 손가락질하고 음모에 이용하기도 한다. 

사실 콜먼은 미국 사회가 낳은 사생아다. 그리고 미국은 그런 콜먼을 이용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 그러니 콜먼의 입장에선 모욕당하고 수치를 당한 희생양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콜먼은 사회적으로 볼 때 국가에 대해선 피해자이지만 그의 가족들에겐 가해자가 아니던가?   

그뿐인가? 평생 불타는 집에서 자신의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괴로워 하는 퍼니아는 미국의 불안한 신경증을 상징하는 것도 같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문제 많고 불안한 미국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레스는 작가이긴 하지만 처음엔 콜먼의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글로 써달라는 것을 거절 했었다. 그러나 콜먼의 지난 삶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그가 갑자기 불의의 교통사고로 퍼니아와 함께 죽자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저 장면은 불타는 집에서 아이를 구하지 못한 퍼니아를 끊임없이 원망하는 그녀의 남편과 작가 레스가 만나 이야기하는 엔딩장면이다. 한때 콜먼과 퍼니아의 교통사고에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그에 대한 증거가 없어 풀려나고 저렇게 한가하게 얼음낚시를 즐기는 것이다.  

대화 내용은 인간의 오점에 대해서 쓸 것이며 책이 출판이 되면 한 권 보내주겠노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온 책은 '휴먼 스테인'일 것이다.  

영화의 분위기는 시종 음울하고 동시에 육감적이다.  퍼니아 역의 니콜 키드먼은 이 역에서 상당히 노력을 많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또한 젊은 콜먼 역의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프리즌브레이크>의 히로인 웬트워스 밀러가 배역을 맡았다. 그에 비해 노년의 콜먼은 명배우 안소니 홉킨스가 맡았는데 그도 참 많이 노쇄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배역이 좀 달려 보인다고나 할까? 보는 내내 서글펐다. 

모르긴 해도 원작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러닝타임도 비교적 짧은 것 같고. 아쉬운대로 볼만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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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 Love Is a Crazy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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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전편에 흐르는 분위기는, 어느 쓸쓸하고 외로운 여자의 생에 대한 본능을 관조적으로 보여 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사실 이혼도 했겠다. 쓸쓸하고 외롭기도 하겠지. 하지만 마음은 마음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이혼 후 어진에게 남겨진 두 아이와 먹고 살기위해 윤정이란 이름으로 노래방 도우미로 나서고 어느 날, 그렇고 그런 수컷들 가운데 매너 좋고, 진지한대다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 주는 남자에게 마음을 연다. 게다가 그 남자가 친구하자고 까지 한다. 이처럼 매력적인 제안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확실히 외로운 어진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아킬레스건이다.  

정말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사실 이것은 해 묵은 질문이긴 하다. 아니 이젠 이것을 묻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을 드러내주는 것인가를 반증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묻지 않는다. 그냥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맞는 얘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감독은 왜 이 영화를 통해서 새삼 이 질문을 하는 것일까? 그것도 노래방과 노래방 도우미란 공간과 신분을 통해서 말이다. 



사실 나는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남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나는 수컷. 또 하나는 신사. 수컷은 여자를 마구 탐하지만, 신사는 함부로 여자를 탐하지 않으며 노래방같은 그런 음습한 곳은 찾지도 않으며 설령 찾는다 해도 아무 여자나 관계를 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환상을 여지없이 깬다. 그렇게 매너 좋고, 진지하고, 먼저 친구하자고 손 내미는 신사도 결국 수컷의 다른 이름이란 걸 보여준다. 그러면서 한마디로 여자가 생각하는 그런 남자는 없다고 못 밖는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 어진을 노래방 도우미로 이끈 김마담을 보라. 그녀에겐 교도소에 수감 중인 남편이 있는데 이제 형이 만기가 돼 출소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가 출소하면 제주도 어딘가로 숨어버릴 거라고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할뿐, 결국 남편에게 걸려 죽지 않을만큼 맞는다. 남편은 무엇 때문에 김마담을 때리며 그녀는 왜 피하거나 저항하지 않는 것인지 관객은 알 길이없다. 그냥 사디즘과 메저키즘의 극치를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김마담이 그렇게 맞고 실종 됐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한편 어진의 민수에 대한 불안한 그리움은 더 해간다. 민수만큼은 세상 여느 남자와 다를 것이다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생각해 보라. 그렇게 진지하고 신사적인 사람과 비록 노래방 도우미란 신분으로 섹스를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친구 관계만으로 가능할까? 그토록 진지하게 섹스를 한다면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것 조차도 여자가 자칫 갖는 환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진정한 사랑은 없는 것일까? 

감독은 이 영화를 몰아가 돼 끝까지 몰아 붙인다. 즉 민수와 어떻게 되는 선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선배는 민수가 어진과 함께 있는 것을 보게 되고 거기서 어진에게 군침을 삼킨다. 선배가 찍으면 민수는 꼼짝도 하지 못하는 관계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김마담의 경우처럼 관객이 알 수가 없다.  그냥 야성의 수컷들의 세계에서 보면 서열이 있지 않은가? 뭐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곧바로 민수는 어진에게 선배를 상대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물론 어진은 처음엔 거절을 하지만 나중엔 민수의 부탁을 들어준다.  사실 이쯤되면 감독의 악취미가 절정에 다다랐다고 봐도 될 것이다. 솔직히 거의 말미에 다다르면 좀 충격적인 장면이 나오기도 하니까. 나는 보면서 '이 정도까지?'하며 놀라기도 했다.  

감독이 악취미는 악취미다. 처음부터 끝까지 남자는 사디즘이요 여자는 메저키즘으로 설정하고 나오니까. 여자에 대해 아픈 추억이 있나 의심이 가기도 한다. 여자와 남자를 이렇게 보여주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를 유쾌하게 다룬 영화는 당연 '해리가 셀리를 만났을 때'가 될 것이다. 그런 영화가 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다. 

이 영화에서 독특한 구성을 보여주는 것이 있다면 어진의 전직은 전화방 도우미였다. 거기에서도 남자들은 다 그렇고 그렇게 나오지만 딱 한 사람 건실하게 전화 통화를 하는 남자가 있다. 엔딩에서 윤정으로 노래방 도우미를 했던 그녀에게 진짜 본명이 무엇이냐는 남자의 질문에 어진이라고 가르쳐 준다. 그것은 뭘 의미하는 걸까? 여자가 남자를 대할 때는 진짜 자신은 감추고 포장된 여자로 만나라는 암시하는 것 같다.   

스토리는 다소 칙칙하고 거시기하지만 맡은 배역들은 정말 호연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딱 그만큼의 안정된 연기를 보여준 전미선을 다시보게 만들었던 작품이 아닌가 싶다. 이 배우 참 오랫동안 안 드러났던 배우였는데 웬지 모르게 신뢰가 간다. 하지만 나 개인적 바람이 있다면 이런 류의 영화엔 더 이상 출연 안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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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2-10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미선이 참 연기를 잘 하죠. 얼굴도 아주 이쁘구요.
이 영화 결말에서 깜딱 놀랐던 기억이 나요. 확~ 깨더군요.
새삼, 영어제목이 눈에 들어오네요. 정말 그럴까요?

stella.K 2010-02-10 20:59   좋아요 0 | URL
전 여기서 전미선이 정말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는 걸 알았죠.
저도 끝에 가서 정말 놀랐어요.
프레이야님 참 부지런하시고 정말 영화 매니아예요.^^
 
카멜롯의 전설 - First K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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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영화는 의상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아서 왕을 비롯한 기사들의 복장이 말이다. 

그럴 운명은 그렇게 된다고나 할까? 란슬롯 결국 카멜롯의 왕비 기네비에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을뻔 하지만 결국 죽을 운명에서도 살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란슬롯은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이다. 아무래도 이런 사람은 보통 사람들 가운데서는 잘 안 나타나며 정말 타고 나야하는가 보다. 

감정과 의지. 감정은 의지를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감정은 솔직하다. 아니 솔직하다고 믿는다. 대신 감정은 오래가지 못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감정은 현재에 충실하기 때문에 상대는 그것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든다.  

조금 아쉽다. 이 부분을 조금 더 물고 늘어진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긴 이건 솔직히 답이 없다. 물고 늘어져봤자다.

영화에 나오는 전쟁 씬은 봐둘만 하다. 우리나라 사극에서 보여지는 전쟁 씬은 우왕좌왕하는 것이 많아서 말이지. 물론 선덕여왕에서 보여주는 전쟁 씬이나 대결 씬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볼거리를 제공하긴 했지만 그래도 약간의 군더더기가 있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본 영화는 많은 영화적 볼거리를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한정적이고 단순하다. 결국 란슬롯과 기네비에의 사랑 이야긴데 애절함이 없다. 갈등이 주는 팩트도 작고.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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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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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연인>이 생각나는 코믹 전혹극이다.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란 프랑스 코미디 영화를 리메이크 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현재 원작은 못 봤다. 그런데 이 영화 보니 뭐 원작까지 챙겨 보고 싶다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난 코믹 잔혹극은 별로 안 좋아하니까. 

그래도 이 영화 킬링타임용으로는 꽤 볼만하다. 초반에 예지원이 우왕좌왕하는 게 몰입하는 데는 좀 시간이 걸리지만 보면볼수록 끌어 당기는 맛이 있다.  

무엇보다 미장센이 좋고 소품의 활용도를 높인 것이 마음에 든다. 

마침 배경도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했다. 요즘 같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심심한 사람들이 보면 나름 위로가 되지 않을까? 물론 꼭 그런 사람이 봐야한다는 건 아니고...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남자나 여자나 잘 생기거나, 어느 분야에서 대박을 내 그 능력을 입증하거나 하면 왜들 그렇게 일단 침을 흘리고 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람을 보는 시야가 너무 좁지 않는가? 쩝. 

 아무튼 예지원과 그녀의 매니저로 나온 임원희 억세게 운 좋은 사람으로 나온다.  

예전에 나의 은사님께서 영화는 과학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타이밍이 절묘하다. 물론 그 모든 게 설정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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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야의 결혼 - Tuya's Marri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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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조금 보다가 말려고 했다. 조금은 낯선 영화라서 말이다. 그것은 내가 평소 몽골 영화(정확히 말하면 제작은 중국이 했고 스토리의 배경이 몽골이다)를 흔하게 접해 본 것도 아니고, 내용 역시 마치 우리나라의 6,70년대 어느 촌부의 이야기를 다룬 것 같아 나에겐 시쳇말로 먹어주는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4,50년 전에 만들어져 명작의 반열에 선 영화들이 있다. 이를테면 <오발탄>이나 <마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뭐 대충 이런 영화들인데 명작은 명작인데 그거 오늘 다시 보라고 그러면 못 보지 않는가? 그런데 하물며 몽골을?! 

그런데 이 영화 그렇게 만만하게 무시해도 되는 영화가 아니었다. 이래뵈도 2007년도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에 빛나는 영화다.  

영화는, 우물을 파다 하반신을 못 쓰게된 남편 바터를 대신해서 억척스럽게 사는 투야도 투야지만 몽골의 결혼과 이혼 풍속이 사뭇 우리내 그것과 많이 달랐다. 우리는 이혼을 하면 서로 남남이 되고 서로에 대한 책임이 없지만(물론 몽골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미워서 이혼한 것이 아니면 여자가 재혼할 때 전 남편을 데리고 재혼을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럴 경우 새로운 남편이 그만큼의 경제적 능력과 포용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일 그럴 수 없다면 아무리 상대가 마음에 있어도 그 결혼은 성립되기 어렵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결혼의 주도권이 남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가 살다가 싫어서 이혼을 하자고 하면, 속으로는 고민하고 실의에 빠져도 여자를 대놓고 원망이나 질투 할 수가 없고 하자는 대로 해 줘야 한다. 그것은 아마도 몽골이 일처다부제의 사회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것도 현대로 넘어오면서 많이 희석됐을 것이다. 그래도 결혼에 있어서 만큼은 아직도 여자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확실히 현대의 결혼과는 많이 다르다. 우리의 결혼은 겉으로는 남자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 같아도 여성의 파워가 세지면서 줄다리기가 심해졌고, 그만큼 여러 가지 갖춰야 할 것들도 많아졌다. 이를테면 학력은 물론이고, 재력도 어느 정도 있어야 하고, 미모도 갖춰야하며, 좋은 유전자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얼마나 외적이고 재미없는 게임의 출발 선상인가? 결혼 시장을 나가 보라. 사람이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고 상품 가치로 전락이 되고 있지 않은가?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의 결혼은 이렇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결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들며 몽골은 그야말로 결혼에 있어서만큼은 별천지란 생각이 든다.  


사실 우리네 같으면 다친 남편을 평생토록 봉양해야 한다면 자식 버리고 도망가서 산다고 해도 이젠 욕도 안한다. 그런데 남편과 이혼하면서까지 남편을 지키려고 한다는 이 모순된 상황을 영화는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몽골은 사람을 보는 가치가 우리네 그것과 참 많이 달라 보인다. 남편도 일하다 다친 몸이지만 투야도 워낙에 일을 많이 해 젊은 나이인데도 몸이 성한 곳이 없다. 나 같으면 결혼할 상대가 건강한 몸이 아니라면 결혼하기가 꺼려질 것 같다. 보통 사랑하는 사이가 아닌 다음에야 쉽지 않다. 그런데도 투야가 이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기 저기서 청혼이 들어온다.  그런 것으로 보아 그 민족은 참 낙천적인 것 같다.

하지만 누구도 속시원이 이혼한 전 남편을 맡아 주겠다는 사람이 없어 결혼은 성사되지 못한다. 나중에 우여곡절 끝에 썬거란 이웃집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은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전 남편 바터에게서 조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게다가 결혼식이 거행되는 중 결혼식은 난장판이 되고, 아들은아빠가 둘이라는 또래 아이에게 놀림을 당해 싸운다. 하지만 투야는 아들의 싸움을 차마 말리지 못한다. 그리고는 아무도 모르게 헛간 같은 곳에서 속수무책 울고만 있다.  

거기서 영화가 끝난다는 것이 내내 아쉬움이 남긴 하다. 행복한 결말이든 불행한 결말이든 그렇게 결말이 있어주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열린 결말이다.  그런 것으로 봐 영화는 어쩌면 몽골의 질박하고도 끝나지 않은 여인의 삶을 가감없이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재혼은 하지만 전 남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건 그만큼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만히 곱씹어 보면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 밑에는 바터에 대한 지극한 동정심이 있으며 그것은 또 어찌보면 모성애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만든다. 사실 오히려 이성적인 사랑이 가능한 쪽은 썬거다. 하지만 이쯤되면 여자의 모성애가 여자로써 누릴 수 있는 이성적 사랑을 뛰어 넘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여기까지 이해가 가능하다고 해서 무조건 모성애 만세!를 외치고 싶지는 않다. 우리가 알다시피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란 소설 속에서 모성애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물론 모성애란 사회를 이루고 그것의 강성함을 가능케 하는데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성애를 쏟아 부어야 하는 어머니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뼈골까지 파 먹도록 내어줘야 하는 아픈 여성의 힘이다. 그것을 알기에 모성애를 무작정 찬양하기에도 우린 너무나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이건 또 숙명이 아니던가? 어머니가 죽어야 내가 살고 나라가 사는 원리.  

우리가 알지만 몽골은 우리나라 보다 낙후된 나라다. 그러나 그 나라를 쉽게 넘볼 수 없는 건 그 나라가 칭기스칸의 후예고, 기마 민족이며, 땅 덩어리가 넓어서가 아니라는 걸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깨달았다. 우리가 그 나라를 쉽게 넘 볼 수 없는 건 그 나라는 아직 모성이 살아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모성은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  

우리나라는 모성이 많이 죽어져 버렸다. 영화를 보면 몽골이 우리나라와 같은 어족이고 비슷한 용모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서구화 되고 여성의 인력을 자본주의의 생산력으로 전환시키면서 상대적으로 모성을 하락시켰다. 몽골도 산업화 하면서 많은 개발도상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성이 평가절하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타민족의 어떤 여자의 결혼을 무작정 얘기하려 든다기 보다 그 이면에 숨은 모성애를 드러내주기 위함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영화가 열린 결말이긴 하지만, 투야 헛간 같은 곳에서 울고 있다는 것은 그녀의 나머지의 삶이 그리 좋지마는 않을 거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도 하다. 

사실 결혼이란 게 행복을 위한 것이 전제가 되긴 하지만 그 행복은 처음부터 크게 다가오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소소한 행복은 있겠지. 하지만 여전히 삶은 모험이고, 고난이며,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투야의 앞으로의 삶도 녹녹치는 않겠지만 추운 겨울 날 모닥불을 쬐는 마음으로 순간 순간 다가서는 소소한 행복이나마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몽골의 결혼제도도 흥미롭지만 엔딩 부분에서 그 나라의 결혼식 장면도 이색적인게 볼만 하다.

나 개인적으로 베를린 영화제가 이 영화에 상을 준 것은 영화 자체가 좋아서라기 보단 몽골의 결혼과 이혼 풍습을 보면서 문화인류학적 가치까지도 포함하고 있어서는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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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12-08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다 보니 영화에도 관심이 가요. 한 동안 몽골 소리만 들리면 눈이 반짝였는데 그때 보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했어요.^^

stella.K 2009-12-09 10:34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마노아님 몽골에 관심 많으시죠?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꼭 한번 보세요. 몽골 대평원도 볼거리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