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에서의 7년 - Seven Years in Tib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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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이제야 보다니... 

하긴 별로 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보려고 하니 봐줄만한 영화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확실히 서양인이 본 티벳. 서양인이 만든 티벳에 관한 영화는 뭔가 모르게 한계가 있어 보인다.  

영화내내 백인우월주의가 곳곳에서 감지가 되던데 나만 괜히 예민하게 보는 걸까? 

티벳 사람들이라고 해서 나온 사람들 그들이 영어 쓰는 것도 왠지 진짜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저 백인들은 어떻게든 자기식으로 동양을 보고 교화시키지 못해 안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오래 전 율 브린너가 주연했던 <왕과 나>로부터 줄창 이어져 온 것이라 감히 건드릴 수도 없어 보인다.  

그래도 뭐 이런 식으로 나마 티벳을 전 세계에 알리고 그곳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에 이 영화의 의의를 삼아야겠지. 

소년 달라이 라마의 조용하고도 거침없는 말솜씨가 인상적이다. 브래드 피트도 고생 꽤나 했을 것 같고. 

그래도 감독이 나와는 좀 안 맞아 보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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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린든 - Barry Lyndo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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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한 인간의 흥망성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런 영화인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스토리면에선 크게 감동이 없다. 단지 이 영화를 보게 만드는 힘이라면 18세기 영국을 충실하게 재현해 냈다는 점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면 이 영화만큼 한 인간을 그리는데 충실한 영화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영화가 없지는 않다. 20세기를 통털어 손가락 안에 드는 저 유명한 오손 웰즈 <시민 케인>이 있지 않은가? 이 영화는 가히 18세기 <시민 케인>을 연상케 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싶기도 하다.  또한 이 영화는 '남자의 원형'을 충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는, 가난한 레이몬드가 어떻게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며 정상의 자리에 서게 되는가를 연대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선 그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버림받을 위기에서 자신의 연적과 결투에서 승리는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차지할 수 없으며, 오히려 도망자의 신세라는 점에서 그는 처량하다. 하지만 당시는 전쟁중이었고 자원 입대를 하면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군에 입대를 한다. 하지만 그는 적당한 때를 보아 군대를 이탈하고 적군에 편입해서는 거기서 첩자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살기위해 적군과 아군에 동시에 첩자 노릇을 해 목숨을 부지한다. 주인공의 이런 모습은 살기 위에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여지없이 들어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쟁 후 그는 군에서 공적을 인정 받고 하사금도 받지만 역시 그의 인생은 레이디 린든을 만났을 때야 비로소 그 정점에 달한다. 하지만 레이디 린든은 이미 결혼한 몸. 명망있는 린든 경의 부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그에게 따뜻한 행운의 햇볕을 쪼이도록 허락한다. 다행히도 린든 경은 허약한 몸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만 죽는다면 레이디 린든과 결혼해서 그녀의 막대한 재산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영화속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이루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아 보인다. 레이몬드는 가난하지만 잘 생겼고, 린든 부인은 젊고 아름답지만 남편은 이제 곧 죽을 것임으로 생의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때 둘은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사랑을 불타오르게 만들 수가 있었다. 영화에서 보면 나래이션이 레이몬드가 린든 부인을 사랑하는데는 불과 6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말이 나온다. 하긴 첫눈에 반한 사랑이라면 그 말은 상당히 믿을만한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 6 시간도 너무 긴 시간인지도 모른다. 순간을 영원에 빗댄다면 말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인간의 마음의 순차적 변화다. 가난할 땐 사랑이 전부일 것 같다. 그래서 결투도 불사하지 않는가? 잘 생겼지만 가난하고 하지만 사랑에 목숨걸 줄 안다. 여성으로서 어찌 이런 남자한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찌 모성본능이 꿈틀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변한다. 아니 이럴 땐 진화한다는 말로 그 변화를 정당화 하기도 한다. 누군들 돈 많고 아름다운(또는 잘 생긴) 사람을 배우자로 원하지 않을까? 이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한결 같은 인간의 마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이 이루어지고나면 거기서 해피 엔딩을 맞으려고 하지 않는다.  


동화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하지 않았는가? 이 영화는 한 인간의 흥망성쇄를 다룬 드라마라고. 인간은 한 가지가 이루어지고 나면 그 다음의 것을 추구하게끔 되어있는 존재다.  

레이몬드는 결혼과 동시에 국왕에게 그의 이름을 자신의 부인의 성과 같게 해 달라고 청원을 하고 그의 이름은 그때부터 배리 린든이 된다. 그것은 동시에 그의 새로운 신분을 의미하기도 했다. 일종의 평민에서 상류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상류사회가 가져다 주는 안락과 나태함과 방탕을 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꼭 완전한 행복을 누렸던 것은 아니다. 그에겐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불안한 미래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아내의 전 남편에게서 낳은 아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 의붓 아들은 훗날 배리 린든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그래도 우리는 여기까지는 배리 린든을 이해할 수 있고 용납할 수 있다. 그를 안타깝게 보는 건 그 다음이다. 

한 인간이 성공을 향해 나간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공이 비정상적일 때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거나 동정하거나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성공을 이룬 한 남자가 이루어야 할 마지막 단계는 뭐가 있을까? 배리 린든의 경우는 기사 작위 즉 명예인 것이다. 이 명예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는 평민 출신이었다. 그만한 부를 누렸다면 그만한 부에 어울리는 명예도 있어야 할 터인데 그는 여전히 평민의 수준을 못 벗어나는 신세였다. 이 '경'이란 작위를 얻기 위해 그는 돈을 물 쓰듯이 쓴다. 결국 그는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고 그것은 결국 정상에 선 그의 발목을 잡아 끌어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된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그에게 늘 위협이 되었던 의붓 아들이 결투를 청하게 되고 배리 린든은 그 결투에서 다리를 절단하는 큰 부상을 입고 만다. 그리고 그의 말로는 초라하게 끝을 맺는다.  

나는 여기서 인간의 또 다른 이름은 욕망이란 생각을 해 본다. 때론 이 욕망을 제어하길 원해 수도원에도 들어가고 극단적인 금욕을 하기도 한다. 인간의 욕망이 얼마만한 것이기에 이런 반대적인 행위를 하기도 한단 말인가?  그것 또한 또 다른 면에서의 욕망은 아닐까? 어찌보면 배리 린든은 지극히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린 감히 그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댈 수가 없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얻게 되는 교훈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랬다고 시시각각 끊어 오르는 욕망과 친하게 지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말이다. 

배리 린든은 그렇게 쓸쓸하고 불쌍한 말로를 맞지만 그는 한 인간으로 나고 자라서 인간으로서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해 봤으니 아쉬움도 후회도 없을 듯하다. 물론 그의 노년이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살고 죽기까지는 어느 만큼의 용기와 운도 따라줘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나래이션의 효과를 보고 있다. 누군지는 모르나 나래이션이 처음부터 끝까지 배리 린든을 주관적인 인물이 아닌 객관적인 인물로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게다가 무슨 연극처럼 3막으로 구성되어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럴까? 정말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느낌도 받는다. 무엇보다 18세기 영국을 충실히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사극을 좋아라는 사람이라면 빼놓지 말고 봐야할 작품이 아닌가 한다.  

연출이나 의상, 음악등 기술적인 면도 탁월하고 기교 또한 빼어난 수작이다. 더구나 주인공 배리 린든 역에 영화 <러브 스토리>의 타이틀롤인 라이언 오닐이다. 영화 매니아라면 빼놓지 말고 봐 줘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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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프레지던트 - Good morning, Pres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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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마치 2020년대나 30년대의 미래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사실 우리나라에 대통령이 꼭 나이 많은 사람이 하라는 법있나? 그때쯤 되면 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여자 대통령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은가? 미국이나 다른 서방 국가는 이미 젊은 대통령이나 수상도 나오고 여자 대통령도 나왔다. 우리나라도 그럴 날이 머지 않았나 싶다. 

이 영화 참 잘 만들었단 생각이 든다. 사실 나랏님이 사시는 집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치장을 했어도 웬지 화장실은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다. 대통령을 비롯해 너무 고귀한 분들만 내집 삼아 드나드는 곳이라 그럴 것만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라고 왜 화장실이 없겠는가? 감독은 바로 이 점에 착안을 한듯 싶기도 하다. 대통령과 그 보좌진들의 인간적인 면들을 보여주는 것 말이다. 

그래서 늙은 대통령에게 사석에서 아저씨라 부르며 따지는 젊은 대통령. 어떻게하면 자신이 한 말에 책임지지 않으며 복권 당청금을 손에 넣을까를 고민하다 해프닝을 벌이는 늙은 대통령. 남편이 사고칠까 봐 전전긍긍하며 결국 이혼 담화문을 발표하려고 하는 여자 대통령. 그리고 그 뒤엔 하나 같이 보좌진들이 언론을 마크하며 일명 '대통령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각종 에피소드도 다양하고 풍성하다. 정말 보다보면 웃게 만들고 가슴이 따뜻해진다. 등장하는 세 명의 대통령에 공감도 많이 가기도 하고.  

그러나 그렇게 빠져있다 보면 너무 공감이가 자칫 감독이 우리나라 대통령과 그 보좌진들을 옹호하기 위해 영화를 만든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모르긴 해도 감독이 그러기 위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대통령이 나왔으면 해서 만들지 않았을까?  재임시보단 퇴임 후가 더 아름다운 대통령. 내외적으로 공적 임무를 수행하느라 중요한 몸인 건 알겠는데 때론 꼭 한 명의 국민을 살려내기 위해 자신의 장기도 떼어내 줄 수 있는 대통령. 가정을 먼저 세우고 나라를 바로 세우는 그런 대통령이 나오길 바래 이 영화를 만들지 않았겠느냔 말이다.  

그런데도 자꾸 전자에 더 많은 혐의를 두게 만드는 건 의도는 좋으나 풍자가 적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마디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좋은 의도에서 영화를 만들면 모든 사람이 다 좋은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것. 왜 작품을 만드는 감독으로서 좀 더 비틀지 않는 것인지? 왜 보는이로 하여금 '그래, 내가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이 바로 저거였어.' 하는 통쾌함이 없었다. 그래서 영화는 지극히 소박하고 소프트 하다. 하긴 우린 최근 몇 년간 몇 번의 대선을 치르면서 소박한 것에 진실함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그것은 대선 홍보를 통해 그것을 믿게끔 만들었던 요인이 먼저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소박한 것에 진실이 없다 할 수는 없겠으나 그런 이미지가 진실 전체를 대변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 국민은, 아직도 정치적 부패를 척결하지 못해 대통령을 비롯해 측근들이 재임시 보다 퇴임 후에 더 많은 실망과 배신감마저 느껴야 했던 적이 한 두번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생각하면 난 차라리 이 영화에서 위로를 받았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영화는 그런 적지 않은 아쉬움 속에서도 어느 만큼은 성공한듯 싶기도 하다.  

또 어찌보면 우리나라는 대통령을 소재로한 영화가 이 영화가 처음이 아닐까 한다. 처음 시도된만큼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것이 다소간의 부담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감독의 최근 만들어진 일련의 영화들(특히 '웰컴 투 동막골')이 그렇듯, 이 영화 역시 동화적이면서도 특유의 유머를 발휘한다는 점에서 같은 코드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히 인정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고백컨대 나 개인적으론 이제까지 감독의 그런 코드를 반겨하지는 않았다. 나하고는 맞지 않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영화는 나에게 좀 다르게 다가왔던 것도 사실이다. 

영화는 동화적이고 상상력을 극대화 시킨 부분이 적지 않지만 제법 아귀가 맞아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세 명의 대통령이 나온 것인만큼 세 편의 옴니버스로 구성이 되며 독립된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으로 보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곱씹을만한 대사도 있다. 이를테면 장동건이 분한 차지욱이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나라를 구하려거든 내 이웃을 먼저 구하라고 했던가? 암튼 그 장면을 보면 꼭 김구가 살아돌아 온 느낌이었다. 또한 영화 말미에 고두심이 청와대 수석 주방장과 나누는 대화는 그야말로 백미다. 대통령 개인이 불행하다고 해서 국민을 행복하게 하지 말란 법 없지 않은가? 그러나 주방장은 그 말을 맞받아,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국민은 행복한 대통령을 원할 것이라고 말해준다. 나는  그것으로서 왜 제목이 '굿모닝 프레지던트'인지를 충분히 설명해 줬다고 생각한다. 일개의 국민인 주방장의 말 한마디는 이혼을 고민중인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였고 본가로 가버린 남편을 만나러 가게 만들었다. 결국 현명한 대통령에 현명한 국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명한 국민에 현명한 대통령이 나오는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게다가 차지욱은 어떤가? 홀아비인 그가 그녀에게 힘을 더 실어, 언젠가는 한 사람을 위한 대통령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느냐고 조언해 줬노라고, 어느 대학 강연회에서 말한다. 너무 멋있는 말이다. 결국 여타의 드라마들이 그렇듯 '가족'이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  

아, 물론 그러다고 해서 이 영화를 비아냥거릴 생각은 없다. 그러리만큼 영화는 좋고 잘 만들었다. 특히 감독의 영화가 그렇듯 음악을 정말 잘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지욱이 장기를 이식하기 위해 환자복에 가운을 휘날리며 흐르는 음악은 자못 비장해서 그 언벨런스에 웃음이 나왔고, 고두심이 남편이 있는 본가로 갈 때 경호차량이 따라붙는 장면에서 흐르던 탱고 음악이 정말 좋다.  또한 배우들의 연기력도 유감없이 잘 발휘되었다.   

그러나 역시 감독은 미니멀리스트란 생각이 든다. 단지 이채로운 건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애국주의를 드러냈다는 점이라고나 할까? 하긴 나라 얘기하는 사람치고 애국주의자 아닌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하지만 감독만큼만 하면 좋지 않을까? 비판과 비난만이 나라를 살리는 것은 아닐 터. 

영화를 보면서 올해 유명을 달리하신 두 명의 대통령이 생각났고, 지금의 대통령이 생각났다. 확실히 젊은 대통령 차지욱은 현 대통령을 향한 감독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디 가까운 미래에 우리나라도 재임시보다 퇴임 후가 더 아름다운 대통령을 갖게되길 기대해 본다.   



뭘 해도 멋있는 차지욱 역의 장동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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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널라이즈 디즈 - Analyze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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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 영화 무겁고 칙칙할 필요 있는가? 빌리 크리스탈의 연기가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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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 The Not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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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듯 이 영화는 어디서 본듯한 뻔한 그렇고 그런 사랑이야기 같다.   

이를테면 가난한 청년과 부자집 딸과의 운명적인 사랑. 그러나 그런 차이 나는 사람끼리의 사랑이 그렇듯 결혼까지는 적지않은 난관이 있어 보인다. 이럴 때 적수가 되는 경우는 부모가 될 경우가 많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의 부모 그중에서도 엄마의 반대가 만만치 않다. 게다가 전쟁은 이들의 사랑을 갈라놓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서로를 잊을 수 없어 그들은 헤어진 후에도 한동안 편지를 주고 받는다. 하지만 이 편지는 여자의 어머니에 의해 확실히 차단이 되고 그렇게 둘은 잊혀져 간다. 그런데 그렇게 세월이 흐른 후, 우연히 신문에난 노아(남자 주인공의 이름)의 기사를 본 앨리(여자 주인공)는 용기를 내어 연락을 하게 되고 이로인해 끊어졌던 그들의 사랑은 다시 불 타오르기 시작한다. 앨리는 약혼자까지 있지만 파혼을 하고 노아에게로 간다. 

보통의 작가들은 그렇게만 되면 할 얘기를 다 마쳤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둘은 행복하게 오래 오래 잘 살았더래요.' 그런데 보통 이렇게 끝나는 남녀 주인공의 나이는 평균 얼마나 될까? 옛날 같으면 10대 말에서 20대 초반이었을 것이고, 최근엔 20대 중반에서 말까지 잡을 것이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70에서 80을 놓고 볼 때 이들은 그렇게 사랑을 이루고도 30년에서 길게는 40년까지도 바라보는 나이를 산다. 그때까지 정말 행복하게 오래 오래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살아가는 동안 그렇게 힘겹게 사랑을 이루고도 막상 살아보니 아니더라 해서 헤어지는 사람이 얼마며, 둘중 하나가 먼저 죽는 쌍이 얼마며, 둘 중 하나가 바람을 피우는 경우는 얼마일까? 그러니 오래 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말은 믿을만한 게 못된다. 그러므로 작가의 동화같은 말을 다 믿지는 말아라.  

그런데 영화는 독특하게도 이들이 사랑을 이루고 나서의 삶은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아이를 낳고, 이사하고 승진하고 등등의 삶은 보여주지 않고 있다. 딱 사랑을 이루고 훌쩍 뛰어넘어 죽음을 바라보는 노년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가장 슬플 때가 잊혀지는 것이라고 한다. 잊혀지면 그 전에 있었던 모든 일은 없는거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린다. 그것은 또 얼마나 안타깝고 불행한 일인가? 당신이 사랑했던 내가 아직도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니 그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치매는 그렇게 앨리의 기억을 갉아 먹었고 요양소에서 만난 웬 낮선 노인에게서 어느 젊은 남녀 한 쌍의 사랑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다름아닌 남편 노아이고, 그 이야기의 기록은 아내인 앨리가 쓴 것이다. 언젠가 치매에 걸려 자신의 사랑을 잊게 될 것을 미리 대비해서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를 더 많이 사랑한 걸까? 치매에 걸려도 변함없는 사랑을 바친 노아일까? 자신이 사랑을 기억하지 못할까 봐 그것을 대비해 기록해 놓았던 앨리일까? 노아 없이 그 사랑의 기록은 가능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왠지 앨리쪽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싶다. 아무튼 사랑을 하면 이렇게 예지가 생기나 보다.

그렇다. 사랑은 이루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순간을 자주 기억하고 가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떻게 이룬 사랑인가? 어떻게 그것을 다 이루었다고 한순간 마음의 창고에 넣어두고 산단 말인가? 

그래서 기록은 중요하다. 내 사랑은 너무나 귀해서 자랑 삼아 누군가는 알아주길 바래서 기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록은 역시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사랑의 순간을 가장 먼저 잊어버릴 나를 위해서 말이다. 결국 그랬을 때 남도 알아주는 법이다.  

나는 이쯤되면 판에 밖힌 사랑 얘기나 쓸 줄 아는 그렇고 그런 작가들 보다 앨리가 더 작가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늙으면 매력도 없고 어떻게 그렇게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늙으면 늙는대로 사랑을 볼 수 있는 시야가 새롭게 생긴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조금만 주위를 기울이면 죽음 조차도 자신의 뜻대로 정할 수도 있는 것 같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럴까? 둘은 한 날 한 시에 앨리가 누웠던 일인용 침대에서 손을 꼭잡고 죽었다. 또 아니면 어떠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죽음으로 헤어지는 것도 아름답지 않은가?  

영화는 처음 볼 때는 그저 그랬는데 보고나니 인생의 지평을 넓혀주는 뭔가가 느껴져 여운이 잔잔히 오래 갔다. 더구나 이 영화는 실화라고 한다. 이런 영화가 있어 인생을 좀 더 넉넉히 관조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나저나 나도 저런 사랑의 기록물 하나쯤 갖고 싶은데 (아직)없으니 사랑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다. 그렇다면 난 뭐에 대한 기록을하며 순간을 기억할까? 

감독: 닉 카사베츠 

주연: 라이언 고슬링, 레이첼 맥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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