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투야의 결혼 - Tuya's Marriag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처음엔 조금 보다가 말려고 했다. 조금은 낯선 영화라서 말이다. 그것은 내가 평소 몽골 영화(정확히 말하면 제작은 중국이 했고 스토리의 배경이 몽골이다)를 흔하게 접해 본 것도 아니고, 내용 역시 마치 우리나라의 6,70년대 어느 촌부의 이야기를 다룬 것 같아 나에겐 시쳇말로 먹어주는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4,50년 전에 만들어져 명작의 반열에 선 영화들이 있다. 이를테면 <오발탄>이나 <마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뭐 대충 이런 영화들인데 명작은 명작인데 그거 오늘 다시 보라고 그러면 못 보지 않는가? 그런데 하물며 몽골을?!
그런데 이 영화 그렇게 만만하게 무시해도 되는 영화가 아니었다. 이래뵈도 2007년도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에 빛나는 영화다.
영화는, 우물을 파다 하반신을 못 쓰게된 남편 바터를 대신해서 억척스럽게 사는 투야도 투야지만 몽골의 결혼과 이혼 풍속이 사뭇 우리내 그것과 많이 달랐다. 우리는 이혼을 하면 서로 남남이 되고 서로에 대한 책임이 없지만(물론 몽골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미워서 이혼한 것이 아니면 여자가 재혼할 때 전 남편을 데리고 재혼을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럴 경우 새로운 남편이 그만큼의 경제적 능력과 포용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일 그럴 수 없다면 아무리 상대가 마음에 있어도 그 결혼은 성립되기 어렵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결혼의 주도권이 남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가 살다가 싫어서 이혼을 하자고 하면, 속으로는 고민하고 실의에 빠져도 여자를 대놓고 원망이나 질투 할 수가 없고 하자는 대로 해 줘야 한다. 그것은 아마도 몽골이 일처다부제의 사회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것도 현대로 넘어오면서 많이 희석됐을 것이다. 그래도 결혼에 있어서 만큼은 아직도 여자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확실히 현대의 결혼과는 많이 다르다. 우리의 결혼은 겉으로는 남자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 같아도 여성의 파워가 세지면서 줄다리기가 심해졌고, 그만큼 여러 가지 갖춰야 할 것들도 많아졌다. 이를테면 학력은 물론이고, 재력도 어느 정도 있어야 하고, 미모도 갖춰야하며, 좋은 유전자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얼마나 외적이고 재미없는 게임의 출발 선상인가? 결혼 시장을 나가 보라. 사람이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고 상품 가치로 전락이 되고 있지 않은가?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의 결혼은 이렇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결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들며 몽골은 그야말로 결혼에 있어서만큼은 별천지란 생각이 든다.

사실 우리네 같으면 다친 남편을 평생토록 봉양해야 한다면 자식 버리고 도망가서 산다고 해도 이젠 욕도 안한다. 그런데 남편과 이혼하면서까지 남편을 지키려고 한다는 이 모순된 상황을 영화는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몽골은 사람을 보는 가치가 우리네 그것과 참 많이 달라 보인다. 남편도 일하다 다친 몸이지만 투야도 워낙에 일을 많이 해 젊은 나이인데도 몸이 성한 곳이 없다. 나 같으면 결혼할 상대가 건강한 몸이 아니라면 결혼하기가 꺼려질 것 같다. 보통 사랑하는 사이가 아닌 다음에야 쉽지 않다. 그런데도 투야가 이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기 저기서 청혼이 들어온다. 그런 것으로 보아 그 민족은 참 낙천적인 것 같다.
하지만 누구도 속시원이 이혼한 전 남편을 맡아 주겠다는 사람이 없어 결혼은 성사되지 못한다. 나중에 우여곡절 끝에 썬거란 이웃집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은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전 남편 바터에게서 조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게다가 결혼식이 거행되는 중 결혼식은 난장판이 되고, 아들은아빠가 둘이라는 또래 아이에게 놀림을 당해 싸운다. 하지만 투야는 아들의 싸움을 차마 말리지 못한다. 그리고는 아무도 모르게 헛간 같은 곳에서 속수무책 울고만 있다.
거기서 영화가 끝난다는 것이 내내 아쉬움이 남긴 하다. 행복한 결말이든 불행한 결말이든 그렇게 결말이 있어주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열린 결말이다. 그런 것으로 봐 영화는 어쩌면 몽골의 질박하고도 끝나지 않은 여인의 삶을 가감없이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재혼은 하지만 전 남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건 그만큼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만히 곱씹어 보면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 밑에는 바터에 대한 지극한 동정심이 있으며 그것은 또 어찌보면 모성애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만든다. 사실 오히려 이성적인 사랑이 가능한 쪽은 썬거다. 하지만 이쯤되면 여자의 모성애가 여자로써 누릴 수 있는 이성적 사랑을 뛰어 넘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여기까지 이해가 가능하다고 해서 무조건 모성애 만세!를 외치고 싶지는 않다. 우리가 알다시피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란 소설 속에서 모성애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물론 모성애란 사회를 이루고 그것의 강성함을 가능케 하는데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성애를 쏟아 부어야 하는 어머니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뼈골까지 파 먹도록 내어줘야 하는 아픈 여성의 힘이다. 그것을 알기에 모성애를 무작정 찬양하기에도 우린 너무나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이건 또 숙명이 아니던가? 어머니가 죽어야 내가 살고 나라가 사는 원리.
우리가 알지만 몽골은 우리나라 보다 낙후된 나라다. 그러나 그 나라를 쉽게 넘볼 수 없는 건 그 나라가 칭기스칸의 후예고, 기마 민족이며, 땅 덩어리가 넓어서가 아니라는 걸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깨달았다. 우리가 그 나라를 쉽게 넘 볼 수 없는 건 그 나라는 아직 모성이 살아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모성은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
우리나라는 모성이 많이 죽어져 버렸다. 영화를 보면 몽골이 우리나라와 같은 어족이고 비슷한 용모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서구화 되고 여성의 인력을 자본주의의 생산력으로 전환시키면서 상대적으로 모성을 하락시켰다. 몽골도 산업화 하면서 많은 개발도상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성이 평가절하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타민족의 어떤 여자의 결혼을 무작정 얘기하려 든다기 보다 그 이면에 숨은 모성애를 드러내주기 위함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영화가 열린 결말이긴 하지만, 투야 헛간 같은 곳에서 울고 있다는 것은 그녀의 나머지의 삶이 그리 좋지마는 않을 거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도 하다.
사실 결혼이란 게 행복을 위한 것이 전제가 되긴 하지만 그 행복은 처음부터 크게 다가오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소소한 행복은 있겠지. 하지만 여전히 삶은 모험이고, 고난이며,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투야의 앞으로의 삶도 녹녹치는 않겠지만 추운 겨울 날 모닥불을 쬐는 마음으로 순간 순간 다가서는 소소한 행복이나마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몽골의 결혼제도도 흥미롭지만 엔딩 부분에서 그 나라의 결혼식 장면도 이색적인게 볼만 하다.
나 개인적으로 베를린 영화제가 이 영화에 상을 준 것은 영화 자체가 좋아서라기 보단 몽골의 결혼과 이혼 풍습을 보면서 문화인류학적 가치까지도 포함하고 있어서는 아닌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