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담긴 세상] 《1953,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

 [한영신 _ 자유기고가]



키스 글레니-스미스, 서울 미아리 고개

▲ 키스 글레니-스미스, 서울 미아리 고개

《영국인 사진가의 눈으로 본 한국-1953,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2007. 5. 18. ~ 2007. 8. 18, 서울대학교박물관 2층 특별전시실)는 한국전쟁 중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두 영국인 장교 안소니 영거(Anthony Younger)와 키스 글래니-스미스(Keith Glennie-Smith)의 개인 사진 기록들을 발굴해 소개한 전시이다. 전시와 함께 사진집『영국인 사진가의 눈으로 본 한국-1953,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서울대학교 엮음, 눈빛, 2007) 가 발간됐다.

전방위적 한국전쟁 기록 수집하기

『영국인 사진가의 눈으로 본 한국-1953,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는『지울 수 없는 이미지』시리즈(박도 엮음, 눈빛)가* 보여주는 전쟁에 대한 기록의 규모 면에서나, 기록사진으로써 구성과 형식의 완성도에 비교할 수는 없다. 물론 상대적 평가의 측면에서 그렇다.『지울 수 없는 이미지』의 기록 사진들 역시 정확한 지명이나 가해자와 피해자의 정체가 모호한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지울 수 없는 이미지』가 보여주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록 사진들은, 미국의 시각과 필요에 의한 것들이란 점을 감안하고 봐야하며, 이것이 한국전쟁의 온전한 총체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지울 수 없는 이미지 1․2․3』를 보면, 미국의 보유하고 있는 한국전쟁 관련 기록의 일부인데도, 미국의 기록, 수집, 보관에 대한 인식과 능력의 우수함과 선진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주체가 된 기록 문화에서도 단절을 겪을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점을 보완하기에 우리와 관련한 타인들의 기록을 열심히 찾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특정 집단과 특정 국가의 시선은 그 자체만으로 제3자의 시선이 있지만, 그 집단과 국가의 이해관계에 편향되는 한계 역시 따른다. 때문에 다각적으로 세계 속의 시각들을 모아갈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더불어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들은 국가 차원에서 한국전쟁에 대해 어떻게 얼마만큼 기록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진다. 이런 자료들을 비교해 본다면 국가라는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국전쟁이 얼마나 다르게 보일 수 있는지, 그 안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이해의 접합점은 무엇인지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키스 글레니-스미스, 동대문 시장(속칭 삐삐선이라 불리던 통신선을 재활용해 만든
장바구니들이 보인다)

그런 면에서 대중이 관련 사진 자료들을 중심으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책으로『그들이 본 한국 전쟁』시리즈(2005, 눈빛)가 있다. 그 중『그들이 본 한국 전쟁 1』은 1959년 중국 해방군화보사에서 참전기념 화보집 형식으로 출간된 것을 재출간한 것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중공군의 실체와 한국전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이것 역시 중국 공산당의 목적과 그들의 시선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봐야 할 것이다.『그들이 본 한국 전쟁 2』는 미 해외참전용사협회에서 참전 기념호로 출간된 것을 재출간 한 것이고,『그들이 본 한국 전쟁 3』은 미군 사진병과 군속 사진가가 찍은 전쟁의 기록들을 모은 것이다.**

이들 사진집에는 사진 자료 이외에도 국제관계, 한국현대사, 정치 등 관련 분야 전문가의 한국전쟁에 대한 글들(『지울 수 없는 이미지』시리즈)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보고서(『그들이 본 한국 전쟁 2』), 맥아더 장군의 뒤를 이어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재임했던 리지웨이와 클라크 장군의 보고서(『그들이 본 한국 전쟁 3』)는 물론, 미국에서 수집한 북한 측의 삐라와 포스터와 서류는 물론 중공군․북한군 포로들이 가지고 있던 사진과 편지 등(『지울 수 없는 이미지3』)이 함께 실려 있어, 학교에서 충분히 배우지 못한 한국전쟁,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이해를 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읽어볼만한 가치가 크다.  

전체가 간과한 기억을 되짚는 특별한 통로

다시 이번 전시로 돌아와서, 영거와 스미스는 비교적 전문적인 사진 촬영 기술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들 사진의 완성도 자체는 높이 평가할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거와 스미스의 사진 기록물들은 사진의 예술성이나 한 컷의 사진이 갖는 구성적 완결성 면에서가 아닌, 기록의 희소성으로부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들의 한국전쟁과 전쟁 직후의 사진 기록들은, 종군 사진 기자들의 취재나 일종의 첩보 활동에 의한 그것들과는 다른 성격과 분위기를 전해준다. 한국의 생활상을 담은 외국인의 호기심 어린 시선, 부대 안팎에서 참전 중 군인의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접근을 느낄 수 있다. 그건 그들이 참전 군인이기는 했지만, 전투 외의 여가 시간에 개인 취미 생활의 측면에서 사진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전쟁 중 격전 현장과 전투 상황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휴식과 휴가 중 전투 이외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휴전 직후의 상황에 대한 여유로운 기록들이다. 그 전쟁중의 여유로운 풍경은 그들이 1950, 51년의 긴박한 상황보다는, 남북은 물론 관련 국가들의 이익과 관련해 전쟁을 지지부진 끌어가던 1952, 53년 사이에 참전했기 때문에 더 도드라지는 것이다. 이들의 사진 속에는 휴전이 발표된 직후 전선에서 방금 전까지 총부리를 겨누며 사투를 벌이던 유엔군과 중공군이 인사를 나누고 기념으로 화폐에 사인을 해 주고 받는 모습마저 담겨 있다.  



안소니 영거, 휴전 발표 후 기념품으로 유엔군의 수표에 사인을 해주는 중공군 장교


또 사진집『영국인 사진가의 눈으로 본 한국-1953,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안에는 영거가 쓴 한국참전 경험과 전란 속의 한국에 대한 기억들이 담겨있어, 한국전쟁에 대해 알지 못했던 부분들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서문에서 안소니 영거는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순전히 개인의 시각과 기억의 착오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음에 대한 양해를 구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의 특성과 감성이 결합한 개인의 기억이란, 때로 전체의 기억이 간과하고 있는 세밀한 부분들을 찾아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통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통로로 들어간 사람들 중에는 공적 기억에서 배제된 기억을 상기해내거나 그 감성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하고, 대화와 소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탄피로 만든 와인잔으로부터


그 중 인상적인 기억의 몇 가지는 이렇다. 전쟁 중 원화 가치가 떨어져 사실상 화폐로서 쓸모가 없게 되자 시장에서 맥주병이 돈으로 사용됐다든가 탄피(탄환이나 포탄의 껍데기)나 통신선 등 그릇이나 장바구니 등 생활용품을 만들어 썼다는 이야기다. 이런 모습들을 구체적 사진 기록들로 충분히 담겨있지는 않지만, 기억에 대한 기록과 수집 물품의 전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점이 이채로웠다. 전시장 중앙에는 안소니 영거가 간직하고 있던 탄피와 당시 한국의 시장에서 사서 아직도 즐겨 쓰고 있다는 탄피로 만든 와인잔이 유리관 안에 전시돼 있었다.『지울 수 없는 이미지3』에서 탄피의 다양한 재활용의 실체를 증명하는 탄피로 만든 교회의 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는, 놋그릇과 철재들이 모아져 전쟁물자로 조달되고 난 후, 그 전쟁의 폐품들이 일상용품들로 재활용되는 전쟁의 궁핍상과 전쟁의 생산성이 절묘하게 교차한다. 이런 교차는, 새삼 전쟁의 경험이 상품화되어 경제적 가치를 갖고 정치적 목적으로 끊임없이 재활용되고 있는 모습들 속에서도 계속해서 재현돼 오고 있다. 더구나 파괴적인 전쟁이 철학과 예술과 과학은 물론 경제 같이 많은 것을 잉태하고 발전시켜낸 생산적인 면모들조차 함축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그러나 '전쟁의 상품화와 재활용' 자체에 무턱 대고 나쁘다는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기는 어렵다. 그러고 보면 선만이 선을 악만이 악을 잉태하지 않으며, 선이 악을 잉태하기도 하고 악이 선을 잉태하기도 하는, 인간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안소니 영거, 적재되어 있는 포탄들

어느 날 한 선배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이것은 나쁜 것, 저것은 좋은 것이라 가르치지 말고, 좋게 쓰면 좋은 것 나쁘게 쓰면 나쁜 것이라 가르치자는 것이다. 가령 ‘거짓말은 나쁘다. 칼은 나쁘다’는 틀렸다는 것이다. 선배의 이야기는 섣부른 가치판단으로 아이들의 사고와 행동을 가두지 말자는 뜻에서 충분히 이해했고, 공감하고 귀담아 들었다. 하지만 모호해지는 면도 있었다. ‘전쟁은 나쁘다’, ‘살인은 나쁘다’, ‘도둑질은 나쁘다’는 틀린가 하는 것과 ‘전쟁과 도둑질과 살인도 좋게 쓰면 좋은 것이다’가 맞는 말일까 하는 것이었다. 답은, 특히 집단의 이익과 관련해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도둑질인 적군․적국의 첩보 활동은 나쁜 것이다. 그러나 조국․아군의 첩보 활동에 대해서는 나쁘다는 가치판단이 들어설 틈이 없으며, 우리 집단 전체를 위한 진취적이고 긍정적이며 의롭고 사명감 있는 행위로 여겨진다. 살인 역시 그렇다. 국가를 위한 경우는, 적․악에 대한 응징으로써, 우리 집단을 위한 정의로운 희생으로 추앙되고, 감히 ‘살인’이라는 부정적 의미의 낱말을 갖다 부치는 것이 적절치 않게 느껴진다. 전쟁 역시, 적의 전쟁 도발은 나쁜 것이고, 이 나쁜 것에 대해 우리를 지키기 위한 대응으로, 또는 우리 집단의 영역과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쟁은 정의로운 힘으로 추앙된다.**** 칭기즈칸의 영토 확장이 서구에서는 폄하되고 아시아에서 미화되듯 말이다. 거짓말도 그렇다. 사람들은 선의의 거짓말이 성립할 수 있는가를 놓고 설왕설래하곤 하는데, 사람은 거짓말도 정의롭게 쓸 줄 알아야 한다. 쉬운 예로 일제로부터 독립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나쁜 것이다. 독립군 활동을 전개하는 중에 효과적 작전 수행을 위해서는 일제를 속이는 거짓말을 아주 잘해야 하고, 못하는 것이 못난 것이다. 고작 선의의 거짓말이 아니라 훌륭하고 숭고한 거짓말조차 존재하는 것이다. 독립군의 거짓말 이야기가 너무 먼 이야기일까.

반공 교육과 ‘한국전쟁’교육의 차이

물론 겨우 탄피 와인잔의 일화에서 이야기가 너무 거창하게 흘러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2007년은 한국전쟁 57주년을 맞은 해이다. 전쟁 발발로부터 어느새 환갑이 가까웠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전후 세대들의 집단적 경험들 중 많은 부분은 한국전쟁과 관련한 반공 교육이 차지하고 있다. 불조심 포스터를 그리고 표어를 짓 듯, 매년 6월에는 반공 포스터 그리기, 반공 표어 짓기, 반공 글짓기 대회 같은 것을 해왔고, 돼지와 늑대의 모습을 한 북한 공산당에 대항해 불쌍한 북한 주민을 구하는 똘이 장군의 활약상을 담은 만화 영화를 보며 성장했다.

그러면서 그들 중 많은 경우 비슷한 형태의 반공 의식과 관련한 꿈까지 공유하는 독특한 경험조차 있다. 고등학교 시절 한 친구가 가끔 가다 한 번씩 태권브이를 타고 북한 공산당을 무찌르는 꿈을 꾼다고 하자, 한 친구는 무장공비들이 침투했거나 전쟁 중이었거나 하는 상황에서 북한 공산군을 피해 마을과 산 속으로 숨어 다니는 꿈을 간혹 꾼다고 해서, 웃은 적이 있다. 사람들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형태의 꿈을 꾸는 것을 보면,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삶의 형태가 사람들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렇듯 대한민국 전후세대들의 집단적 삶과 의식 안에도 한국전쟁은 어김없이 어떤 양상으로든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집단적인 무의식의 공포로만 작용해서, 우리를 갇혀 있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겠다. 북한과 미국도 그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친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어이 없어할 만큼 어리석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안소니 영거, 통신트럭 앞의 아이들, 경기도


그동안 우리의 역사, 정치는 물론 사회와 문화 모든 분야의 교육이 반공 교육에만 치우침으로써, 한국현대사의 가장 굵직한 사건인 한국전쟁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교육은 외면되어 왔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한 전쟁의 역사, 우리가 가진 전쟁의 상처를 우리의 미래에 좋고 이롭게 쓰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고민하고 알고 실천해 나가야 할까. 바로 그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이 한국전쟁과 관련한 기록들을 발굴하고 공유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곧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지도를 찾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들이기 때문이다.







필자주

*『지울 수 없는 이미지』는 한국전쟁과 관련해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 보관돼 있는 기록 사진들과 맥아더기념관(버지니아 노폭)의 자료 중 일부를 모아 엮은 것으로『지울 수 없는 이미지 1-8․15 해방에서 한국전쟁 종전까지』(2005),『지울 수 없는 이미지 2-한국전쟁에 휩싸인 사람들』(2006),『지울 수 없는 이미지 3-한국전쟁이 남긴 것들』(2007)까지 출간돼 있다.

** 사진 기록을 중심으로 찾다보니, 관련 주제에 대해 소개한 책들이 모두 특정 사진 전문 출판사의 책에 집중된 점이 있다.

*** 사진 한 컷이 보여주는 구성적인 완결성이란 단지 형식적인 측면만 아니며, 사진의 예술성이란 단지 여유로운 미학적인 탐닉으로 이해될 수는 없는 일이다. 형식은 주제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고, 예술성은 이런 형식과 주제가 어떻게 조화롭게 결합해 인간의 감성과 이성에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로, 기록 사진 분야에서조차 쉽게 폄하될 문제는 아닐 수 있다.

**** 여기에서 '우리', '아군', '조국', '적군', '적군', '타국'은 지구상의 누군가들이 속해 있고, 배타돼 있는 집단에 대한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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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7-06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울 수 없는 이미지 1, 2를 인상깊게 보았어요. 3편도 나왔군요. 사진집은 너무 고가여서 주로 교보문고를 이용한답니다..;;;;
 

  • 검색어로 읽는 오늘의 문학 4.가족의 탄생
  • 전통적 가정의 와해…
    ‘이혼부부’ 같은 새 개념의 가족 탄생
  • 박해현 기자 hhpark@chosun.com


    • ‘내겐 아버지가 없다. 하지만 여기에 없다는 것뿐이다. 아버지는 계속 뛰고 계신다.’

      한국 소설의 ‘무서운 아이’로 불리는 신예 작가 김애란(27)의 단편 ‘달려라, 아비’는 얼굴모르는 아버지를 상상하는 딸의 이야기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의 이야기는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의 새로움은 부성(父性)에 대한 그리움도 원망도 없는 쿨한 젊은 세대의 감각이다. 좌익 활동을 한 부친을 둔 아들의 시각에서 쓴 소설(김원일 이문열…등)이 한때 성행해 ‘아비는 남로당이었다’(평론가 김윤식)는 명제가 통용된 적이 있다. 그러나 ‘달려라, 아비’의 아비는 그런 거대 서사의 주인공이 아니다. ‘지난 시기의 소설에서라면 부재하는 아버지의 자리를 메우기 위한 실존의 드라마가 펼쳐졌을 대목에서 김애란은 그 부재를 상상으로 가볍게 대처한다’(평론가 손정수)는 것이다.






    • 아버지가 부재한다는 사실에 아무런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는 젊은 세대의 감각은 2000년대 한국사회에서 아버지의 권위와 기능 변화를 반영한다. 올해 대종상 최우수작품상 수상작 ‘가족의 탄생’에도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남동생보다 스무 살 많은 올케가 어느 날 나타나 한 지붕 아래 사는 노처녀, 엄마가 둘인 기묘한 환경에 놓인 딸 등이 모여 한 가족을 이루는 ‘가족의 탄생’처럼 요즘 한국 소설에서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형상화하는 작업이 성행하고 있다.

      젊은 작가 윤성희(34)의 단편 ‘저 너머’도 전통 가족의 해체를 보여준다. 부모는 어느날 가출했고, 혼자 남은 딸은 낯선 할머니 두 명과 전국을 누빈다. ‘그러니까, 이모라고 부를까요?’라고 딸이 물어보자 할머니들은 ‘안돼! 언니라고 불러’라고 한다. 남성이 없더라도 여성들끼리 얼마든지 가족을 만들 수 있다는 상상이 이처럼 손쉬운 것이다.

      평론가 강유정은 최근 소설의 새로운 가족 찾기에 대해 “개인이 더 중요해진 후기 자본주의사회에서 정상 가족은 과거처럼 강박적인 것이 아니다”고 분석했다. “호주제를 비롯한 상속제는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앞으로는 동성 부부 및 여성 호주, 여성 상속, 법적 양육권 문제 등으로 전통 가족 개념의 와해가 좀 더 가속화될 듯 합니다.”

      새로운 가족 소설들은 아버지가 있더라도 희화적인 존재로 다룬다. 박현욱(40)의 장편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는 한 여자가 두 남자와 결혼한다는 탈(脫)전통적 가족형태를 경쾌하고 해학적으로 그린다. ‘천년 전 서라벌땅에는 남편이 셋이나 되는 여자가 있었으니, 선덕여왕이 그랬다. (…)신라가 싫다, 경주가 싫다. 옛날 여왕도 싫다. 처용만은 좀 불쌍하다.’

      2000년대 작가들의 새로운 가족 형태는 남성의 권위 상실을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드물지만 ‘이혼 부부’라는 커플도 등장한다. 정이현(35)의 2004년 이효석 문학상 수상단편 ‘타인의 고독’은 짧은 결혼생활을 마친 젊은 남녀의 이혼 이후 이야기다. 저출산 시대의 부부답게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지만 양육권 문제가 남았다. 애완견을 누가 키우느냐는 것이다. 결국 개를 키우기로 한 남자가 묻는다. ‘근데 얘 말야. 왜 안 짖는 거지?’ ‘몰랐어? 성대수술 시켰잖아.’ ‘나는 짖지 못하는 개와 단둘이 남겨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혼자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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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색어에서 삭제… 비로소 그는 죽었다
  • 검색어로 읽는 오늘의 문학… 3. 유비쿼터스
    새로운 삶의 풍속도 냉소적 비판론 많아
  • 박해현 기자 hhpark@chosun.com



  • ‘모든 사물에 칩(chip)을! 가정에도 사무실에도 숲 속에도 칩을! 자동차에도 시계에도 냉장고에도 칩을! 유비쿼터스 만만세’(김중혁의 단편 ‘멍청한 유비쿼터스’ 중에서)

    오늘날 문학은 정보 통신 환경이 ‘물이나 공기처럼 시공을 초월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유비쿼터스’ 시대에 직면했다. 인간은 이 세상 모든 곳에 편재한 새로운 신(神)의 존재를 향해 진화 중이다. 그런데 젊은 작가 김중혁의 단편 소설 ‘멍청한 유비쿼터스’는 정보통신혁명이 숭배하는 ‘컴퓨터 속의 신’에게 냉소적이다. 완벽한 유비쿼터스를 지향하는 기업체가 스스로 보안 시스템 실험을 위해 해커들을 고용한다. 이 소설에서 해커들은 획일화된 질서를 거부하는 ‘창조적 예술가’처럼 등장한다. 그들은 ‘인간들의 믿음이란 정보를 기반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가 믿음으로 바뀌는 것이다’라며 정보화 사회의 이미지 조작을 비판한다. ‘가장 안전한 컴퓨터는 꺼진 컴퓨터이고, 가장 안전한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 작가의 유비쿼터스 문명 비판론이다.

    디지털 기술이 일상화된 시대에 새로운 삶의 풍속도는 오늘의 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탐구대상이다. ‘검색어 나에 대한 검색 결과로/ 0개의 카테고리와 177개의 사이트가 나타난다/ 나는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나를 찾아 차례로 클릭한다’는 이원의 시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수록된 시집 ‘야후! 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새로운 디지털 문화가 삶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존재의 처소에 관한 질문’(평론가 이광호)이라는 호평을 받은 시집이다.

    ‘다섯 번째 직장을 그만둔 뒤부터 B는 자신의 블로그에 거의 매일 글을 올리고 있다. 책을 뒤적거리다가 불현듯 그중 한 구절을 옮겨 적는가 하면 하릴없이 동네를 한 바퀴 돌던 중에 재미 삼아 카메라폰에 담아본 뒷골목 풍경을 새로운 게시물로 올려놓는다…’(은희경의 단편 ‘지도 중독’ 중에서)

    한 블로그 중독자를 등장시킨 은희경은 소설 중반부터 종이 지도 중독자를 대립시켜 가상 현실이 아닌 현실의 생태계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재조명한다. 역시 디지털 문명에 대한 비판의식이 깔려 있다.

    홍콩영화 배우 장국영이 만우절(2003년 4월1일)에 자살한 것을 놓고 벌어진 네티즌들의 반응을 소재로 삼아 작가 김경욱은 단편 ‘장국영이 죽었다고?’를 썼다. ‘장국영이 죽었단다. 어쩌면 그것은 거짓말인지도 몰랐다. 새로운 자극을 좇는 불특정한 다수의 호기심을 숙주 삼아 온갖 헛것들이 무한 증식하는 인터넷에는 실체 없는 소문들이 유령처럼 떠돌기 마련이다.’

    그러나 장국영의 자살이 사실로 밝혀진 뒤 이 소설에 등장한 장국영 마니아들은 인터넷 채팅을 통해 추모식에 얼굴을 가린 채 모이고 각자 다시 밀실로 돌아가서 익명으로 채팅을 나눈다. “가상 세계에서 장국영을 매개로 채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아닌, 그래서 실제 세계에서는 있으나마나 한 행동(추모식)이 되고 오로지 가상공간에서만 맥락을 지닐 수 있는 행동을 그린 소설”이라고 평론가 우찬제는 풀이했다.

    장경린 시인은 장국영의 죽음을 통해 인기인의 사망 뒤에 늘 발생하는 ‘근거없는 댓글 문화’와 ‘인기 검색어의 냄비 근성’을 풍자한 시를 썼다. ‘죽어서도 마음대로 떠나지 못하고/ 죽어서 더 영화 같은 스캔들을 이어가던 그가/ 인기 검색어에서 삭제된 오늘/ 비로소 그는 죽었다/ 컴퓨터 모니터 전자식 화장터에서/ 끊임없이 일렁이는/ 기호의 바다에서’(시 ‘인기 검색어에서 삭제된 오늘’ 끝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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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사의 내용·방법까지… 결정은 기술이 한다
  • 디지털 시대 서사(敍事)

    소설가 이인화·김탁환, 국문학자 전봉관씨가 말하는 미래
    한국, 기술 있지만 기획력 떨어져… 큰 줄거리, 독립적 에피소드 인기
    고용문제 해결에도 돌파구 될 것
  • 안면도=김태훈 기자 scoop87@chosun.com



    • 디지털 시대의 ‘서사(敍事)’가 차세대 문화 콘텐트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소설가 이인화, 김탁환씨, 국문학자 전봉관씨가 한국적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미래를 전망한 정담(鼎談)을 싣는 특집을 꾸민다. ‘검색어로 읽는 오늘의 문학’ 시리즈는 21세기 한국 문학에 나타난 디지털 문명의 일상화를 ‘유비쿼터스’란 검색어로 알아본다.


      ㅈ디지털 기술과 서사적 상상력을 결합시켜 차세대 문화 콘텐트 생산 방안을 모색하는 2007 디지털 스토리텔링 콘퍼런스가 25일 안면도 롯데오션캐슬에서 열렸다. 26일까지 ‘21세기 문화를 이끌 차세대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주제로 진행되는 이 콘퍼런스를 주최한 디지털스토리텔링학회 이인화 회장(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 사회를 맡은 김탁환 교수(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발표자로 나서는 전봉관 교수(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는 온라인 게임 ‘리니지’를 즐기며 친분을 쌓은 게임 마니아들이다. 2003년 학회 결성도 이들이 주도했다.

      이인화 교수와 김탁환 교수는 각각 장편소설 ‘영원한 제국’과 ‘불멸의 이순신’을 쓴 인기 소설가이고 전봉관 교수는 ‘경성기담’이라는 책에서 일제하 경성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실화를 소개해 화제가 된 이야기꾼이다. 25일 오전 세 사람이 만나 정담(鼎談)을 나눴다.






    • ▲ 25일 안면도에서 열린 디지털스토리텔링 콘퍼런스에 참석한 김탁환, 이인화, 전봉관씨.(왼쪽부터) /김태훈 기자



    • ◆새로운 서사의 틀이 필요한 시대

      ▲이인화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 서사의 내용과 방법마저 결정하는 시대가 됐다. 아날로그 방식의 소설과 영화가 보여주는 전통적 서사와는 다른 새로운 서사의 틀이 필요하다. 일례로 모바일 전화기 화면에 4~5분짜리 다큐멘터리가 상영되는 시대다. 긴 장편 구조의 서사는 이런 틀에 적합하지 않다.

      ▲전봉관〓디지털 시대에 맞는 스토리는 분명히 이전의 서사와 다른 점이 있다. 영국 작가 톨킨(Tolkin)이 쓴 ‘반지의 제왕’은 처음 발표됐을 때 ‘영문학의 재앙’ 취급을 당했지만 지금은 디지털 시대 최고의 히트 작품이 됐다. ‘반지의 제왕’은 하나의 큰 줄거리 속에 독립적인 이야기들이 병렬로 연결된 서사구조라는 점이 주목된다.

      ▲김탁환〓그런 구조의 서사는 영화와 게임, 모바일 콘텐트 등에서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삼국지’나 ‘서유기’도 디지털 서사로 활용하는 데 적합한 소설들이다.

      ▲전〓문제는 우리나라가 디지털 기술은 발달해 있지만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기획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신화와 설화 같은 인문학적 콘텐트들을 확보하고, 온라인상에서 통하는 이야기의 구성 원리를 찾아내 이 둘을 결합시켜야 한다.

      ▲김〓역사적 사실들도 좋은 디지털 서사의 재료가 될 수 있다. 나는 요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디지털 자료화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혜초가 여행 도중 겪은 사건들을 다양한 디지털 콘텐트로 변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대학들도 이런 추세에 발 빠르게 동참하고 있다. 2006년 12월 현재 전국 4년제 대학 및 전문대학에서 디지털 미디어, 멀티미디어, 디지털 콘텐트 등 서사를 새로운 방식으로 연구하는 학과가 930개에 이르고 있다.

      ◆스토리텔링 능력 가진 이야기꾼 찾아라

      세 교수는 “산업 현장에서도 디지털 기술을 가진 업체들이 스토리텔링 능력을 가진 새로운 이야기꾼 확보에 나서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삼성전자 등 일부 이동통신 업체는 모바일 폰에 탑재할 기능을 결정하기 위해 시장조사와 함께 스토리텔링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20대 후반의 직장여성’을 대상으로 제품을 만든다는 영업 목표를 정했다면, 가상의 20대 여성(‘페르소나’라고 칭한다)을 창조한 뒤 그녀의 일상을 소설 쓰듯 시나리오로 만들어 그녀가 모바일 폰을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인화 교수는 “우리 학부 출신 석·박사 졸업생 60명 가운데 유학과 결혼을 제외하면 취업에 전원 성공했다”며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고용 문제 해결에도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 톨킨의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든‘반지의 제왕’포스터.‘ 반지의 제왕’은 독립적인 에피소드들이 하나의 큰 스토리 안에서 연결돼 있어 디지털 스토리텔링에 적합한 서사구조를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 키워드… ‘디지털 스토리텔링’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디지털 매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서사행위’를 뜻한다. 소설이나 연극, 만화와 같은 기존의 이야기예술이 디지털 미디어라는 신기술과 만나 새로운 ‘이야기하기’를 만들어내는 시대를 대표한다. 컴퓨터게임, 온라인게임, 하이퍼텍스트문학, 영화, TV 드라마, 뮤직 비디오, 애니메이션, 광고, 디자인, 홈쇼핑, 테마파크, 휴대폰 등등에서 활용될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국제 경쟁력을 갖춘 문화 콘텐트 개발이란 차원에서 국내에서는 지난해부터 정부 후원 아래 문화예술과 과학기술계의 공동 학술 대회가 잇달아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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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창한 문학은 그만!
  • 이기호, 오현종 등 30대 소설가 12명
    이전 세대와 다른 발랄한 문학관 밝혀
  • 김태훈 기자 scoop87@chosun.com
     




    • ▲소설가 이기호씨


    • “문학에 대한 생각도 저희 세대는 선생님 때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저는 소설 쓰는 일이 굉장히 숭고한 일이라거나 숙명적인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소설집 ‘최순덕 성령 충만기’와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로 최근 주목 받고 있는 소설가 이기호. 선배 소설가 박범신 교수(명지대 문창과)가 진행하는 문학 대담프로에 출연한 그는 “소설을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소설집 ‘귀뚜라미가 온다’를 쓴 백가흠은 한 발 더 나간다. 그는 친절한 이야기꾼 같은 소설가가 되기를 거부한다. “저는 가끔 독자들에게 불쾌함을 요구합니다.”

      2000년대의 이야기를 만드는 30대 젊은 소설가들이 한 세대 선배 소설가들과는 다른 그들만의 젊은 문학관을 공개했다. 소설가 박범신과 젊은 작가들의 대담을 묶은 ‘박범신이 읽는 젊은 작가들’을 통해서다. 이 책은 요즘 가장 주목 받고 있는 젊은 소설가 12명과 박씨가 문학을 주제로 나눈 논쟁적인 대담들을 정리했다. 그들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지난 2005년 개설한 ‘금요일의 문학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에서 만났다. 두 소설가 외에도 김도언, 김도연, 김숨, 김종광, 김종은, 박성원, 손홍규, 심윤경, 오현종, 이신조 등이 대담에 참가했다.





    • ▲소설가 오현종씨



    • 이기호는 전 세대 작가들의 대세였던 참여문학과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나가서 화염병을 던져야 한다거나 내 글이 화염병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강박관념은 없다. 내 글이 조국의 통일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도 물론 없다.”

      그들은 자신의 문학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사양한다. 소설집 ‘우리는 달려간다’를 쓴 박성원은 문학이 갖는 치유 기능을 피력하지만 그 목소리는 크지 않다. “문학이 어떻게 보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데, 가장 요긴하게 사용한다 해도 가위질 같은 걸 하다가 피가 났을 때 임시로 지혈하는 정도밖에 없는데, 그런데 종이책이 그렇게 아무짝에도 소용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절대 억압하지 않는다.”

      문학의 의미를 따질 때는 목에서 힘을 빼는 그들도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지키려는 고집은 선배 소설가들과 다르지 않다. 소설가 김도언·김숨 부부는 “서로의 작품에 대해 의도적인 무관심을 가장한다”며 “서로의 소설에 대한 품평을 결벽적으로 자제한다. 안 그러면 거의 매일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장편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을 쓴 오현종은 자신이 “언어로써 독자를 유혹하는 존재”라는 말로 독자와 소통하고 싶은 욕심을 드러냈다. 반면 장편 ‘달의 제단’을 쓴 심윤경은 “유목민처럼 방랑자가 되어야 하는 운명”이라는 비장한 작가관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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