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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상황과 마키아벨리의 생애

고려대  심재우교수

1) 시대적 상황

마키아벨리(1469~1527)가 살던 시대는 르네상스 시대였다. 그리고, 마키아벨리가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피렌체는 유럽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인간위주의 화려한 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은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었고, 사실은 엄청난 위기와 투쟁이 상존했던 격동의 시대이기도 했다. 당시는 정치사적으로 민족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근대국가 형성기로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침략과 방어가 끊이지 않던 그러한 시대였다.

이제 국가들은 점점 자국의 운명이 그들 자신의 손안에 있으며, 순전히 민족적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는 점을 각성해가고 있었다.4) 그리고, 군주들은 더 이상 신성로마황제와 교황의 권위와 권력을 인정하지 않은 채, 군주 자신의 몫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군주권력의 강화는 신흥 상인계급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확대되었으며5), 그결과 느슨한 권력분산체제인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중앙집권적인 절대군주정이 곳곳에서 성장하게 된다.6)

하지만, 이탈리아만큼은 예외적으로 통일된 민족국가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나라였다. 반면, 이탈리아 국경 알프스 이북의 여러나라에서는 프랑스 등 강력한 근대국가가 건설되었고, 이는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큰 위협으로 작용하였다. 실제로, 주변국가들은 이탈리아를 주된 공격대상으로 삼았고, 이탈리아는 내외적으로 큰 시련을 겪었다.7) 1492년에는 프랑스의 샤를 8세가 피렌체를 침공하여 메디치 정권을 붕괴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탈리아의 지도자들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이탈리아를 지켜내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데 골몰했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내적으로도 역시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외부세력이 강력한 근대국가를 형성하고 있는데 반해, 이탈리아는 본래 무수한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다가, 13세기에 들어서 겨우 몇나라로 정리되기 시작한 나라였다. 15세기에도 여전히 4~5개의 왕국(밀라노, 피렌체, 나폴리 등)이 혼재해 있었으며, 내부적으로는 급격한 충돌과 치열한 경쟁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피렌체 같은 경우에는 형식상 공화정체제임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는 사회 각계층간의 불안정한 연합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각계층간의 불화와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탈리아 지도자들에게는 이러한 분열상을 수습하고 정리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

요컨대, 이탈리아의 이러한 내외적인 어려움은 이탈리아의 지도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러한 내외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강력한 통일 이탈리아를 지켜낼 수 있는가"하는 것을 최대의 화두로 던져주었으며, 마키아벨리의 사상도 여기서부터 출발한다고 하겠다.

 

2) 마키아벨리의 생애

마키아벨리는 1469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교육적인 분위기에서 순탄하게 자라난 마키아벨리에게 첫 번째로 큰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가 25세일 때 발생한 프랑스 샤를8세의 피렌체 침공이었다. 권력자들의 변동, 왕국의 전복, 농촌의 황폐, 도시의 살육, 잔혹한 살생, 피비린내 나는 전투양식 등 골육상잔의 가혹한 세태 속에서 인심은 나날이 흉악해지고 도의심은 땅에 떨여졌다. 샤를8세의 침공은, 외세의 침입으로 겪어야 하는 약소국의 비침함이 얼마나 큰지를 마키아벨리에게 똑똑히 보여주었던 것이다.8)

다음으로 마키아벨리에게 문제의식을 던져준 것은 사보나롤라였다. 사보나롤라는 본래 피렌체의 수도원장 출신으로 1494년 샤를8세의 이탈리아 침공을 계기로 메디치가를 추방하고 인민정부를 수립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기반으로 하여, 일종의 神政을 꿈꾸었다. 그리고 그러한 神政을 통해 모든 시민이 기독교 신자다운 생활의 재생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철저하게 기독교 정신에 의한 사회개혁을 꿈꾸었던 것이다. 또한 사보나롤라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중요시했고, 실제로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로마교황청과의 불화, 피렌체 내부의 반대파 등장, 경제위기 등으로 인해 파탄나게 된다. 결국, 1498년 사보나롤라는 화형대에 오르게 되고, 시민들은 죽은 시체에 돌을 던진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두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하나는 훌륭한 도덕심(도덕적 이데올로기)과 정신력만으로는 강력한 국가를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또 한가지는 민중의 지지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민중에만 의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9) 그런데 우연히도, 사보나롤라가 화형당하던 바로 그날, 마키아벨리는 29세의 나이로 드디어 공직(제2정무처장)에 오르게 된다. 이때는 프로렌스공화국의 소델리니 정권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의 임무는 주로 외교분야였다. 그는 중요한 외교임무를 띠고 동분서주했다. 그는 주로 외국에 나가 활동하면서 상세하고 정확한 현지보고서를 많이 제출하는 등 성실하게 일했다. 그는 적은 봉급에 오랜 외국생활로 가난과 싸우면서, 헌신적으로 국가를 위해 봉사했다. 이때 외교사절로서 겪은 수많은 경험들은 나중에 "군주론" 등의 저작을 집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10)

1512년에는 새로운 시련이 시작되었다. 스페인군이 이탈리아에 진격하여, 피렌체를 정복한 것이다. 그리고, 피렌체에는 소데리니가 축출되고, 18년만에 다시 메디치 가문의 왕정이 복원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추방되고, 설상가상으로 1513년 2월에는 메디치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되기에 이른다. 1513년에 특사로 석방되자,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로 하여금 자신이 쓸만한 인물이며, 그냥 놔두기에는 아까운 전문가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시키게 위해 "군주론"을 집필한다.11) 마키아벨리는 메디정권 하에서도 공직에 오르기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군주론"은 당시 군주인 로렌즈에게 헌정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관직에의 꿈은 멀어져간다. 낙심한 마키아벨리는 결국 피렌체 교외에서 침거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저술활동에 돌입한다. "전술론"(1519~1520), "로마사론"(1513~1519) 등의 저작은 이때 집필된 것이다.

1527년에 프랑스군의 로마 약탈, 교황의 도주, 메디치 가문에 대한 인민봉기 등으로 메디치 가문은 마침내 붕괴되고, 피렌체에는 공화정이 복원된다. 마키아벨리는 다시 공직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같은 해에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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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갈대 > 심리학의 학파

심리학의 학파



구성주의(constructivism) -

구성주의 는 철학, 심리학, 두뇌공학에 뿌리를 둔 지식의 이론으로서, 지식은 개인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개인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아가 지식의 구성 과정에서 개인의 능동적 참여뿐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서의 상호작용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구성주의 심리학의 역사적 발단을 Jean Piaget (1896-1980)와 Lev Vygotsky (1896-1934)의 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 두 이론을 중심으로 본 연구에서는 먼저 구성주의의 태동을 심리학의 역사적 맥락에서 간략히 살펴보았으며, 이어서 구성주의의 다양한 입장들을 살펴보았다. 그 다음에는 개인적 및 사회적 구성주의 입장을 설명하는 주요 개념 및 전제, 이들의 지식 구성의 방식 혹은 특성, 그리고 지식 발달의 심리적 과정에 대한 해석과 기제를 고찰하고 분석하였다.

최초의 심리학 학파인 구성주의는 19세기에 생겨났다. 구성주의자들은 물질을 분석하고 세포, 원자, 분자로 분류하는 생물학자, 화학자, 물리학자들의 영향을 받고 태어났다. 이러한 영향으로 구성주의자들은 마음을 구성요소를 통해 분석하고 이러한 구성요소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알아내려고 했다.

구성주의는 Wundt의 제자인 Titchener에 의해 이름 붙여졌고 일반화되었습니다. 영국인인 Titchener는 코넬 대학의 학부 교수가 되면서 미국에 구성주의를 소개하게 됩니다. 마음을 연구하기 위해서 그는 정신의 기본 요소라고 생각한 심상, 느낌, 감각의 세 가지 요소로써 복잡한 정신 경험을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분석적 내성법(analystic introspection)'을 사용하였다. 내성법이란 자신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게 하는 방법으로써 초창기의 심리학에서 많이 쓰였다. 그냥 자기 마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가를 보고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분석적 내성법을 이용한 전형적인 한 연구에서 Titchener는 피험자에게 소리와 같은 자극을 제시한 후에 피험자로 하여금 그 소리로 인해 생겨나는 심상, 느낌, 감각에 대해 보고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분석적 내성법은 꼼꼼하고 지루한 절차였죠. 피험자가 연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만 번의 내성을 하여야 했다. 그헌 후에 1~2초간 주어지는 자극에 대한 반응의 내성적 보고를 위해 20분이나 소요되었다.

Titchener의 학문적 기여 중에는 미각을 분석한 연구가 있다. 이 연구를 통해 미각이 짠맛, 쓴맛, 단맛, 신맛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구성주의는 최초로 등장한 학파인 반면 역시 가장 먼저 모습을 감춘 학파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연구가 연구실에만 제한이 되었고, 또한 이성적이고 언어적으로 능숙한 성인의 의식적인 정신적 경험을 연구하는 데 제한된 내성법에 지나치게 의존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일반화의 문제라고 그러는데 연구실에서 혹은 실험실에서 나온 결과들이 실제 생활에서도 비슷하게 예측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심리학자들은 특정한 자극에 대한 내성법적 보고가 자극의 변화에 대해 일관되지 못하기 때문에 내성법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과학의 필수요건인 객관성이 충족되지 못했다.

비슷한 자극에 대한 내성법적 보고서는 피험자에 따라 일관성을 보이지 못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다양한 내성적 활동이 보고되어지는 실제의 의식적 경험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비록 분석적 내성법의 단점이 구성주의자들의 소멸을 초래하기는 하였지만 오늘날 많은 심리학자들은 피험자들의 정신과정에 대한 언어적 보고를 이용한 연구 절차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연과학처럼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는 없다.


기능주의
- 기능주의라 불리는 미국의 심리학파는 구성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생겨났다. 기능주의 심리학자들은 정선의 구성 요소를 분석함에 있어서 구성주의 심리학자들이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비판했다. 즉, 어린이, 정신장애자, 동물 등은 대상에서 제외했고, 또한 실험실에서의 연구에만 초점을 두었다. 기능주의 심리학자들은 정신이 인간의 행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느냐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만일 구성주의 심리학자들이 맛에 대한 정신적 요소를 연구한다면, 기능주의 심리학자들은 다른 맛을 구별하는 능력이 어떻게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 연구할 것이다. 이것은 개인이 환경에 적응하는 데 도움을 주는 유전적 형질의 역할을 강조하는 Darwin의 진화 이론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기능주의 심리학자들은 의식적인 정신이 인류의 생존을 증진시키기 때문에 의식적인 정신은 진화한다고 가정하였다. 우리의 의식적인 정신은 우리가 현재의 상황을 평가할 수 있게 해주고, 그에 부합하는 최적의 행동을 선택하도록 한다.

가장 유명한 기능주의 심리학자는 미국의 심리학자이며 철학자인 William James이다. 제임스는 여러 가지의 지능 분야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심리학에 대한 접근을 살펴보면 제임스는 정신을 실제 조류의 흐름같이 별개의 조각들로 나뉘어 질 수 없는 하나의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구성주의 심리학자들이 선호했던 일종의 분석적 연구는 정신(의식의 흐름)을 연구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이것은 결국 Wundt와의 경쟁을 야기시키게 된다.

분트가 라이프니찌 대학에 연구소를 세운 1875년에 제임스는 하버드 대학에 연구소를 만들었다. 그러나 분트와는 달리 제임스는 연구소를 실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증명을 위해서 사용하였다. 실제로 제임스는 연구소에서의 연구에는 관심이 없었고 실험실에서의 제한된 행동이나 정신 경험에 대한 연구에 국한시키는 심리학자들을 비판하였다. 대신에 제임스는 심리학자들에게 실험실 밖의 세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연구하라고 촉구했다. 비록 얼마 안되는 실험을 하였지만 제임스는 심리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고전이 된 그의 저서 <심리학의 원칙>은 철학과 물리학 그리고 심리학의 상호관계를 다루고 있다.

제임스는 또한 감정의 이론에도 공헌하였고 그의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기능주의 심리학자들은 심리학 연구에서 사용되는 실험 대상들을 동물이나 아이들뿐 만 아니라 정신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확대하였다. 또한 기능주의 심리학자들은 심리학에서의 주요 문제들에 기억, 사고, 성격과 같은 주제들까지 포함시켰다. 그리고 연구를 실험실에 국한 시켰던 구성주의자들과는 달리, 기능주의 심리학자들은 베이컨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들의 연구를 일상생활에 적용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응용 심리학 분야의 창시자로 간주되어지는 사람은 Munsterberg였다.

1892년 하버드 대학에서 심리학 연구소를 운영하는 데 싫증을 느낀 제임스는 분트 아래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독일의 유명한 심리학자가 된 Munsterberg에게 연구소를 위임하였다. Munsterberg는 미국에서 명성을 얻게 되는데, 1898년에는 미국 심리학회 회장이 되었고 1899년에는 하버드 대학의 철학과 심리학부의 대표가 되었으며, 1907년에는 미국 철학협회 회장이 되었다.

20세기의 처음 10년 동안 심리학자로서의 그의 명성은 제임스에 버금간다. 그는 많은 저서와 연설을 통하여 심리학을 대중화시켰고 많은 저명한 인사들을 친구로 삼았다. 거기에 H. G. Wells 같은 작가와 카네기와 같은 실업가, 그리고 루즈벨트 대통령도 포합되어 있었다. Munsterberg는 비록 하버드 대학의 연구소를 운영하기 위해 채용되었지만 응용 심리학의 창시자로 가장 많은 공헌을 하게 된다. 그의 연구는 심리학이 법, 산업, 교육, 심리치료, 그리고 영화 비평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기게 하였다.

Munsterberg와 그의 동료 기능주의 심리학자들은 심리학을 연구실 밖으로 옮겨 일상 생활에 적용시키고자 하였다. 그들은 오직 심리학이 연구실에 남아있을 때만 심리학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Titchener 같은 구성주의 심리학자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많은 심리학자들은 연구 방법들, 연구 실험 대상들, 그리고 심리학자들이 사용하는 연구 장치를 발전시킨 기능주의자들을 지지하였다.


행동주의(Behaviorism) -
기능주의적 교수에서 동물 심리학 분야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Watson(1878~1950)은 당신 심리학 연구 방향의 주류이었으며 현대 심리학 발달 초기에 중용한 역할을 했던 의식 심리학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을 한다. 그는 의식이니 정신이니 하는 개념들을 중세시대의 유물인 미신이라고 단정했다. 즉 이러한 개념은 영혼이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정의될 수는 없거니와 측정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막연한 개념을 토대로 하는 과학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은 객관적인 관찰이 가능하고 측정할 수 있는 행동만을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심리학을 행동주의(Behaviorism) 심리학이라고 하는데, 행동주의 심리학은 Povlov(1849~1936)가 현재의 행동을 과거에 학습한 영향의 결과로 설명한 것에 영햐을 받았으면 숀다이크의 고양이 실험(1898)과 스키너의 쥐의 실험(1838)과 같은 동물학습실험에 의해 과학적 측면이 더욱 견고히 되었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모든 행동이 조건형성(conditioning)의 결과로 보고 인간이해의 기본 공식 자극-반응(stimulus-response)이라고 하여 S-R 심리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극단적인 단순 함수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동물의 행동에 있어서는 그 관계가 성립될 수도 있으나 인간의 행동에서는 성립되지 않는 경우가 많음에 따라 Woodworth(1869~1962)는 자극과 반응 공식사이에 유기체(organism)를 삽입하여 S-O-R의 공식을 제시하며 이 유기체의 변인, 즉. 인간의 마음과 정신과정이 자극과 반응 사이를 연결하여 반응을 최종적으로 결정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 그는 신행동주의 심리학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사상은 1950년대까지 심리하계와 미국 사회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나 1960년대에 들어와서 인간은 자극을 받아 행동한다는 수동적 인간관에서 벗어나, 인간은 환경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생각하는 적극적인 존재로 보는 경향이 강조됨에 따라 쇠퇴하게 되었다.

미국의 심리학자 Watson의 이 대담한 발언은 반세기 동안이나 심리학 분야를 지배했던 행동주의라는 학파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Watson은 기능주의 심리학자들과 구성주의 심리학자들이 공유했던, 정신이 심리학의 적절한 연구대상이라는 점에 반대하였습니다. 러시아의 저명한 심리학자 Pavlov는 그의 연구소에서 정신에 대한 전문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해고시킬 것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Watson과 파블로프같은 심리학자들에게 심리학 연구의 올바른 대상은 관찰가능한 행동이었다. 정신의 경험과는 달리 행동은 측정되어지고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서 증명되어 질 수 있는 것이였다. 예를 들어, 어떤 심리학자들은 배고픔에 대한 정신적 경험을 연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관찰 가능한 섭식 행동을 연구하는 것을 선호할 것입니다. 비록 Watson은 정신 과정이 행동을 야기시킨다는 것은 부정했지만 정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배고픔이라고 불리는 정신적 경험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했던 반면에 섭식을 야기시키는 정신적 경험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배고픈 느낌같은 정신에서 섭식의 원인을 찾는 대신에 저혈당과 같은 신체 혹은 식욕을 자극하는 향기 같은 환경에서 원인을 찾아 설명하려고 하였다.


형태주의(Gestalt) -
Watson이 미국에서 행동주의를 주창할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독일에서는 Wertheimer(1880~1943)가 1912년에 정신과정의 조직과 관계되는 형태심리학을 발표했다.

마음을 구성 요소들로 분석해 내려는 구성주의 심리학자들의 시도와 인간을 환경적 반응에 대한 수동적인 반응자로 보려 했던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견해는 게슈탈트(Gestalt) 심리학을 창시한 독일의 심리학자 Wertheimer에 의해 비판을 받게 된다.

Wertheimer는 인간이란 개별적 부분의 조합을 인식하기보다는 전체로 인식하는 존재라는 그의 믿음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게슈탈트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는 영어에서의 Form 혹은 Shape에 해당된다. 형태주의 혹은 게슈탈트 심리학에서는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라고 단언하였고, 이런 기본적인 가정 때문에 Wertheimer는 정신적 경험을 그것의 각각의 부분으로 분석해 내려는 구성주의 심리학자들의 시도를 벽돌과 시멘트의 심리학이라고 비웃었다.

게슈탈트 심리학의 시작은 1912년 Wertheimer의 여름 휴가 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기차 여행 동안 파이 현상(phi-phenominon,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데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에 대한 생각에 빠져 들었다. 그는 정거장에 닿자 기차에서 내려 장난감 섬광촬영장치(stroboscope, 마치 영화처럼 서로 약간씩 다른 그림들을 연속적으로 빠르게 제시함으로써 움직임의 환상을 만들어 내는 기계)를 샀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돌아와 그것보다 더 정교한 장치를 만들어 그의 연구를 계속 하게 된다.

Wertheimer는 연속적으로 두 줄의 빛을 발하는(한 번은 수직으로 그 다음은 수평으로) 순간 노출기를 이용했다. 두 빛 사이의 시간 간격이 적당하면 한 줄의 빛이 수직에서 수평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우리가 흔히 보는 네온사인 같은 것이죠. Wertheimer에 따르면 정신은 부분적인 자극에 대하여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극들을 응집된 전체로서 조직화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인지(認知)는 개별적인 감각 이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환경적 입력의 활동적인 조종자로서 정신을 취급했던 Kant의 개념에 따른 것이었다. 만약 정신이 부분적인 자극에 수동적으로 반응한다면 Wertheimer의 증명을 관찰했을 때 우리는 처음에 수직의 라인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음에 수평의 라인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다.

정신이 부분의 합과는 다른 전체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다른 예로 애국가와 같은 멜로디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이 노래로 불리든 허밍으로 되든 휘파람으로 되든, 혹은 심포니 오케스트라로 연주되든, 어떠한 수단으로 연주되든지 상관없이 인지될 수 있다. 따라서 멜로디는 특정한 원천에 의하여 발생되는 특정한 감각 연속의 결과가 아니다. 멜로디는 정신의 다양한 원천에 의하여 발생될 수 있는 감각들의 정신의 활동적 과정에 의지한 것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감각들을 의미있는 지각들로 조직함에 있어서 정신의 활동적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심리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게 된다.

비록 게슈탈트 심리학이 Wertheimer에 의하여 주창되었지만 그의 동료인 Koffka와 Kohler에 의하여 대중화되었다. 이들은 나치 정권에서 추방되어 미국에서 연구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이 두 사람은 나치가 사라진 후 게슈탈트 심리학을 미국에 소개했습니다. 쾰러는 형태주의자들과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최고의 측면들을 포함한 심리학을 만들어 내야한다고 하였다. 인지주의적 관점을 선호했던 심리학자들은 쾰러의 조언을 따랐다. 또한 독일의 심리학자 Lewin은 미국으로 이민한 후 게슈탈트 심리학의 원리들을 리더쉽 형태, 소수 그룹 행동의 원칙 그리고 사회 충돌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수단으로 활용하는 연구를 활성화시키게 되었다.


정신분석(Psychoanalisys) -
Sigmund Freud(1856~1939)의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은 신경증적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과 임상겸험, 사례연구를 통하여 인간의 행동이나 사고는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고 하여 무의식을 분석해야만 인간이해가 완정하다고 중장한다. 정신분석학파는 의식의 내용이 심리학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이론을 비판하며, 의식보다는 더 깊은 심리적 영역인 무의식 영역을 연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게슈탈트 심리학과 다른 초기의 심리학파가 대학에서 시작되었던 것과는 달리 정신분석은 의학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Sigmund Freud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신경과 의사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정신의 정복자라고 말할 정도로 이 분야의 독보적인 사람이었다. 인류를 우선 동물로 보았던 프로이드의 견해는 다윈의 진화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정신분석은 신체적 고통을 겪는 호환자 예를 들어 마비, 실어증, 신체 감각의 상실같이 명백하게 병인을 알지 못하는 환자들에 대한 프로이드의 치료 시도에서 발전하였다. 전환성 히스테리 (conversion histeria)의 징후를 겪는 환자들에 대한 그의 치료에 기초하여 프로이드는 장애란 성적 흥미에 대한 사회의 금기에 의하여 야기되는 성에 대한 무의식들의 충돌 결과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런 충돌들은 때때로 환자들에게 금기 행동에 관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구실을 제공하는 전환성 히스테리에서 볼 수 있는 신체적 증후들로 전환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프로이드의 환자들에 대한 사례 연구들은 그에게 대개 성과 공격성에 관련이 있는 무의식적 충동들이 인간 행동의 제일가는 동인(動因)이 된다고 추측하였다. 비록 무의식적 동기들의 중요성에 대한 프로이드의 생각들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을 심리학에 포함시킨 최초의 연구자였다. 프로이드는 사람의 행동이 정상이건 비정상이건 간에 때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심리학적 동기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 생각은 정신 결정론이라고 불리는데, 그의 책 <일상 생활에서의 정신병리학>에서 그는 의도하지 않았던 행동들이 정신 결정론에 의하여 얼마나 명백히 설명될 수 있는지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는 인간은 주로 성과 같은 무의식에 의하여 동기화된다고 함으로써 대중에게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아동 초기의 경험들이 성격 발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라는, 논쟁의 여지가 많은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프로이드는 무의식에 저장된 아동 초기 경험의 기억들이 인생을 통하여 행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이런 무의식적 영향은 많은 인간 행동의 비논리성과 심리학적 장애의 기원을 설명해준다고 하였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프로이드는 심리학 역사상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중 한명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많은 학자로부터의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비평가들은 무의식이 아무런 명확한 원인이 없는 행동을 설명하는 데 너무 쉽게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또한 정신분석가들은 성적 추동, 무의식적 과정, 그리고 아동 초기의 경험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적합한 연구 자료를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프로이드는 그의 이론을 실험적으로 측정한 적이 없다. 대신에 그는 환자들과 면담을 한 후에 적었던 그의 기록에 자신의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 게다가 프로이드는 심리적 장애 상태에 있는 소수의 사례 연구 결과를 모든 이들에게 일반화시킴으로서 과학적 접근과는 동떨어져 있다.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프로이드의 견해는 꿈, 창조, 동기, 발달, 성격, 그리고 심리요법 등과 같이 다양한 주제들의 심리학적 연구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와 함께 프로이드의 생각은 예술, 문학, 영화 등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다양한 예술 영역에서 '심리주의적'이라는 말은 바로 프로이드 심리학을 지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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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왜 대적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총독 빌라도나 대제사장들 등 당시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 앞에 나타나셨다면 더욱 확실하게 주님의 부활이 입증되지 않았을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여러 차례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께서 만난 사람들의 면면을 떠올려 볼 때마다 의문이 생긴다. 왜 예수님은 대적자들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여인들과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셨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지만,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기적 자체로 사람들을 믿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 이전에 행하신 많은 기적들을 살펴볼 때, 그런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열광하고 기뻐했지만 결코 주님을 믿지는 않았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에 사람들은 놀라워했지만,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에 걸려 넘어져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버리고 떠나갔다.>
부활도 그러하다. 묘하게도 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대비한 사람들이 바로 주님을 죽음에 내어준 관원들임을 보여준다. 여인들이나 제자들이 기껏 주님의 시신에 바를 향료나 준비하고 있을 때, 관원들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부활 후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부활’이 사람들에게 엄청난 효력을 지닌다는 사실을 사탄도 잘 알고 있다. 요한계시록 말씀에 사탄의 지상 대리자인 ‘짐승’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흉내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짐승의 상처 입은 머리 가운데 하나가 죽은 듯하다가 다시 살아나 많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고 그 짐승을 따르며 숭배한다(계 13:3∼4). 짐승은 교묘하게 부활의 효과를 노림으로써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짐승을 따르는 것은 참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기적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조작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람들을 믿음에 이르게 하는 놀라운 증거이지만, 동시에 어떤 사람들을 믿음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이 있다. 부활이란 사람들이 믿음으로 나아오지 않는 이유로 자신들의 마음 속에 걸림돌이 있기 때문임을 깨닫게 해주는 빛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 부활하신 모습을 보이심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셨을지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걸림돌이 있는 한, 사회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의 말이라 해서 무조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는 않는다.

 * 복음의 완성을 위해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여인들과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셨는가? 예수님께서 그들만을 찾아가신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그들이 증거해야 할 복음의 완성을 위함이다. 주님의 부활은 지상에서 기적 사건으로만 의미가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오신 일, 세상에서 행하시고 가르치며 살아가신 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과 연관돼 있다.
그뿐 아니라,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일도 연결돼 있다. 예수님의 부활이 놀랍고 신기한 일이지만, 그것을 별도로 떼어내 강조할 수만은 없다. 이전과 이후 모든 일들의 연속선상에서 부활을 바라봐야 한다. 이를테면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고, 부활 없이 십자가가 없다는 의미다. 어느 한 부분으로 결코 온전한 복음 증거가 되지 못한다.
사도행전에서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세우는데 그 자격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 1:21∼22).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전체에 대해 목격자와 증언자가 돼야 하고, 특별히 부활의 증언자가 돼야 한다.
사도들이 일치된 부활의 증언자가 돼야 한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를 중시하신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요한복음 20장에 기록된 도마의 사건이 이를 말해 준다. 도마가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고집하는 것을, 흔히 우리는 좁은 시각에서 도마의 개인적인 의심에 초점을 맞춰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도마처럼 의심해서는 안 된다, 도마처럼 중요한 교회 모임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식의 설교들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좀더 넓은 시각으로 이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도마의 개인적 의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니라,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증언이 온전하고 충분하며 일치되도록 만들어 주셨다는 점이다. 그들의 증언이 충분하고 일치해, 이제 제자들의 증언을 직접 빌리지 않고서도 믿는 자들에게 축복이 되고 있다.

* 제자도의 완성을 위해
둘째, 예수님께서 여인들과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신 이유는 제자도의 완성을 위함이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사회적 영향력이나 유력함을 제자 선택의 조건으로 삼지 않으셨다. 오히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중에서 제자를 택하셨다. 그리고 지상의 삶에서 가장 귀한 기회들을 모두 제자들에게 사용하셨다.
예루살렘의 율법 교사들을 놀라게 하고 지혜와 권능이 탁월하신 주님께서 하필이면 왜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택하셨을까, 왜 자신을 좀더 빛내줄 수 있는 훌륭한 지위나 자질을 갖춘 사람들을 택하지 않으셨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계산 방식이다.
한편, 그랬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제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 할 뿐, 예수님의 삶을 자신들의 삶 속에 옮겨놓는 참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탁월했다. 그들이 자질 면에서 그러하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하는 점에서 말이다. 주님께서 자신의 진수를 보잘 것 없는 제자들에게 전부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뛰어난 제자도의 본을 보일 수 있었다.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나 영향력을 이용해 예수님의 복음 전파를 거들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목숨을 내어놓고 덤비지는 않는다. 제자도의 완성은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실재에서만 가능하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을 찾으셨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항상 놀랍고 즐거운 일일 수만 없다. 그것은 세상을 초월하는 죽음으로의 부름이기 때문이다. 이는 요한복음 21장 말씀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에게 장차 어떠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 복선을 깔고 말해 주고 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곳에서 십자가의 죽음이 암시되고 있다. 이와 같이 십자가 죽음의 제자도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부활의 제자도이다. 이제 앞서 던졌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예수님께서 여인들과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신 이유는 증거 돼야 할 복음과 제자도의 완성을 위함이다.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증거 사명의 필요충분 조건이다. 그들이 세상에서 증거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전파는 죽음을 넘어서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사망을 불러 조롱할 수 있는 자가 이미 사망을 넘어 선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될 수 있다.

* 부활의 제자로 부르시다
오늘도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부르시고 계신다. 세상의 출세에 목숨을 건 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증거를 위해선 그 목숨을 내놓지 않는다. 넓고 쉬운 길을 가는 사람들은 진정 필요한 곳에서 빛을 발하는 부활의 증인들로 나서기가 매우 어렵다.
죽음의 길을 가라. 남들이 회피하고 마다하고 좁은길을 택하라. 부활의 증인이 되기 위해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전부 내어주신 그분처럼 살아야 한다. 힘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 앞에서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따랐던 그 사람들 앞에서 부활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셨던 그분처럼 살아야 한다.
우리는 번제단을 지나 성소로 나아가야 한다. 타지도 않고 묻히지도 않은 자아를 가지곤 부활의 제자도를 이룰 수 없다. 오늘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죽음의 문턱을 넘어 모두 타버린 옛 자아의 무덤 위에 새롭게 돋아나는 싹이 되어 새 창조의 권능을 펼치고 이루는 영광의 사역을 감당하는 제자들을 부르신다.

글·최승락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이다.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우리도 부활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복음의 핵심으로,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대속은 부활을 통해 승인되고 확인되었다. 따라서 부활의 부인은 십자가의 부인을 결과한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을 불신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역사적 사실과 구속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인류를 품고 죽은 대표적 행위였던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도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 15:20)고 강조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모든 그리스도인의 부활과 연결해 설명하고 있다. 부활의 ‘첫 열매’ 즉 ‘아프아르케’라는 말은 고린도전서 15장 20절과 23절에서 사용되었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 즉 ‘프로토토코스’라는 말은 골로새서 1장 18절과 요한계시록 1장 5절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부활의 첫 열매인가?

 * 소생과 부활의 차이점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다.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다시 살린 사건(왕하 4장)이나 예수님이 나사로를 다시 살린 사건(요 11장) 같이 숨을 멈춘 사람의 호흡과 생기를 회복시키는 소생(resuscitation)과 부활(resurrection)은 완전히 다른 현상이다. 오늘날 상당수의 경우에 인공 호흡이나 전기 충격 등으로 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들을 회복시키며, 죽은 사람이 기적적으로 생기를 회복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노쇠하고 언젠가 죽게 된다. 그러나 부활이란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에 정의된 대로 네 가지 특성을 가진 새로운 육체, 즉 부패하지 않고 영광스러우며 강하고 신령한 육체로 변화되는 현상(transformation)으로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죽지 않으며 영원히 살게 된다.
이와 같은 부활이 일어난 사람으로 예수님이 최초이며 그 후 오늘날까지 다른 부활이 없었기 때문에 이는 전무후무한 현상이며 성도들의 부활은 그의 재림 시에 일어나게 된다. 마태복음 27장 52∼53절에 예수님의 십자가 및 부활 사건과 함께 다수의 성도들이 무덤에서 나와 사람들에게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초대 교회의 구성원 중 부활한 사람이 있다는 기록은 전무하고 사도행전이나 서신서에도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또 그것이 소생이었는지 부활이었는지 그리고 일시적인 출현이었는지 영속적 존재이었는지 모호하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과 같은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진정한 부활이라면 그리스도의 부활에 선행할 수 없고 예수님이 시작한 부활의 후속으로 봐야 한다.
모든 인류는 범죄함으로써 죽음에 종속되었고 따라서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죽음을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문에 아직 음부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소생은 가능하지만,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음부의 문을 열고 나오는 부활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 언약과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부활의 첫 열매인 이유는 바로 그 다음 절에서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여기서 언약과 대표성의 원리가 나타난다. 하나님은 언약 구도에서 인류를 공동체적으로 관계하시는데, 성경에는 두 개의 언약 공동체가 등장한다. 하나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대표와 머리로 하는 인류 공동체이고, 또 하나는 두 번째 아담이라고 표현된 그리스도를 대표와 머리로 하는 신앙 공동체이다. 하나님은 대표들과 계약 관계를 맺으며, 그 대표의 계약 준수 여부에 따라 그를 대표로 하는 공동체의 모든 소속원들이 상벌간에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원리는 전혀 부당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며 모든 인간 사회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사회 계약 이론이다. 본인의 동의 여부에 상관없이 한국에 태어나 한국인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국의 모든 법률이나 전통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 아래로 들어가며, 이를 어겼을 경우에 형벌이나 불이익을 받게 된다. 또 한국의 통치자나 외무장관이 한국을 대표해 타국과 관계하며 그들이 조인한 협약의 영향을 국민들의 동의 여부에 상관없이 모두 적용 받는다. 이런 원리와 현실은 국가 공동체뿐 아니라 각종 사회 집단이나 가정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가 대표하는 모든 공동체를 위한 공적 행위이며 그 결과와 혜택도 모든 공동체에게 적용된다.
아담의 실패가 인류 공동체에게 큰 피해를 가져왔다면, 그리스도의 성공은 신앙 공동체 전체에 큰 은택을 가져 왔다. 그것은 생명과 부활이 중심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고 부활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먼저 성취하고 개척한 길을 모두 따라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가 대표하는 공동체 모두의 죽음이며 마찬가지로 그의 부활도 모두의 부활인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머리인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며 분리할 수 없는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어나게 된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와 실패로 인해 사망과 죄와 율법과 사탄의 종속 상태로 전락하였고, 그 결과로 언젠가 모두 죽음에 이르고 심판 때까지 죽은 자의 세계인 음부(陰府)에 갇히게 된다. 예수님도 무죄였지만, 신앙 공동체의 대표로서 모든 구성원들의 죄악을 담당했기 때문에 죄인의 죽음을 당했고 따라서 음부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그의 보혈과 대속이 모든 죄과를 만족시켜 하나님께서 용서하셔서 더 이상 음부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음부의 문을 열고 최초의 부활을 실현하였다. 그리스도인도 아담의 인류 공동체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죽음과 음부의 길을 가야 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앙 공동체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죽음과 음부로부터 해방, 즉 부활의 길을 가도록 돼 있다.

 * 신앙 공동체의 집단적 부활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공과 승리는 일순간에 완성되지 않고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며 이 시기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사이에 해당하는 종말(eschaton)이라고 부른다. 구약에서 부활이 예언(겔 37:12∼13, 단 12:2) 되었는데, 그것은 한 사람의 부활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들의 집단적 부활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모든 부활의 시작이며 첫 열매이다. 마치 첫 열매가 모든 추수를 예시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의 전체적 부활을 예고한다. 물론 이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인도 육체적 죽음을 경험하지만 부활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을 사는 것이며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사망에 종속되는 삶을 살지 않는다. 더욱이 종말의 과정이 끝나는 재림 때에 살아있는 성도들은 일시적인 죽음도 겪을 필요가 없다.
이런 종말론적 맥락이 첫 열매를 언급하는 고린도전서 15장 20절 이하에서 나타나고 있다. 부활은 그리스도가 그의 몸된 교회를 사용해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24절)까지 보류되며, 결국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다”(26절). 그런 다음 전체적인 부활이 일어난다. 우리의 부활은 사망 자체를 포함해 모든 흑암의 세력을 완전히 멸절한 후에 일어나기 때문에 아직 육체적 변화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부활을 예시하고 보증하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 때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다.

글·이정석 풀러신학교 조직 신학 교수이다.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사실인가>

“예수 때로 삼류 소설에서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시체를 찾지 못하게 되는 일이 가끔 발생한다. 하지만 실제로 무덤이 비는 사건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예수의 빈 무덤 사건은 어디에서도 시체를 찾지 못한 경우가 아니다. 사건은 그가 산 채로 사람들에게 나타났거나, 죽은 채로 사람들에게 나타났거나, 죽었다가 살아나서 사람들에게 나타난 세 가지 경우 중에 하나이다. 복음서의 설명을 믿는다면, 이것은 시체가 사라졌다는 문제가 절대 아니다. 실제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후 여전히 살아 있다는 문제 그리고 지금도 살아 있는 문제다.
지금까지 빈 무덤은 예수 부활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으며,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예수의 말을 결정적으로 증명해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은 고리도전서 15장 17절에서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 예수의 시체가 무덤에 있었는가
부활에 관해 누군가에게 이 문제를 증명해 보라고 한다면, 최선의 선택으로 부활에 관해 세계 최고 전문가로 알려진 윌리엄 레인 크레그 박사를 만날 것을 권한다. 크레그 박사는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부활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뮌헨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었는지 살펴보기 전에, 먼저 예수의 시체가 무덤에 안치된 것이 사실인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시체는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 넘겨졌다.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믿어지지 않는 내용이다. 이 점에 관해 크레그 박사는 고린도전서 15장 3∼7절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께서 장사 지낸 바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첫 번째 증거로 제시한다.
예수를 무덤에 장사한 사람이 왜 아리마대 요셉인가, 그는 실존 인물인가 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크레그 박사는 부활에 관한 복음서의 기록들이 모두 다르다면서 아리마대 요셉은 모든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고 설명한다. 복음서들 중에서 가장 기록 연대가 빠른 마가복음에 따르면, 산헤드린 공회 전체가 예수를 사형시키는 데 표를 던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누가복음에서 의구심을 갖게 하는데, 누가는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 처형에 관한 투표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고린도전서에도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표현은 없다. 그 점을 근거로 예수의 영혼만 부활하고 육체는 무덤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크레그 박사는 유대인들의 관습과 사고에 대해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죽은 사람의 살이 썩어 버린 후 뼈들을 모아 상자에 담아 놓고 부활할 때까지,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의인들을 살리시고 그 사람들이 최후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같이 모일 때까지 보존하도록 했다.
따라서 그가 부활했지만 아직 시체는 무덤에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겐 모순된 생각이라며, 장사되고 삼 일만에 살아나셨다는 기록은 함축적이며 분명히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 어떻게 무덤을 지켰는가
예수가 무덤에 묻힌 것이 사실이라면, 다음은 어떻게 무덤을 지켰는가 하는 문제이다. 크레그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무덤 입구 밑에는 홈이 파져 있었다. 따라서 원반 모양의 큰 바위가 그 홈에 자리를 잡으면 무덤 입구를 완전히 막게 된다. 그런 다음에 그보다 조금 작은 돌을 사용해 바위를 지탱하게 했다. 바위를 굴리려면 최소한 남자 몇 명이 필요하다. 무덤을 지키는 일에 실패한다면 곧 죽음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훈련된 군인들이 24시간 무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대인 지도자들이 왜 파수꾼을 두고 무덤을 지키게 했을까 하고 크레그 박사에게 물었다. 예수가 부활할 것과 제자들이 예수가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꾸며 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들이 부활을 예언한 예수에 대해 제자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박사는 “도굴을 방지하거나 유월절 기간 동안 일어날 수도 있는 소동으로부터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고 간략하게 대답했다.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이 로마 군병인지 유대 군병인지는 모른다. 박사는 두 경우 모두 가능성을 두고 있었다. 마태가 파수꾼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성전을 지키는 군병들보다 로마 병사들을 가리킬 때가 더 많았다. 요한복음에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명령을 받아 로마 백부장이 부하들을 이끌고 와서 예수를 체포한 것으로 기록한다. 따라서 무덤을 지킨 파수꾼들이 로마 군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 복음서의 빈 무덤을 믿을 수 있나
부활을 공격하는 많은 비평가들이 가장 주요하게 문제 삼는 것이 바로 복음서의 기록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중에 부활하신 후 첫 아침의 빈 무덤에 관한 기록이 복음서의 신뢰성에 큰 손상을 입힌다고 주장한다. 복음서의 기록은 대략 이렇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무덤에 장사 지낸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후 첫 주일 아침에 그를 따르던 몇몇 여자들이 무덤을 찾아왔다. 빈 무덤을 발견한다.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났다고 전해 준다.
에딘버그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마이클 그랜트는 다분히 회의적인 역사가이다. 그러나 그마저 빈 무덤을 인정했다. 저서 「예수: 역사학자가 본 복음서」에서 그가 한 말이다. “분명히 빈 무덤에 대한 복음서의 묘사는 각각 다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고대 문헌을 연구할 때 적용하는 똑같은 기준을 복음서에 적용해 본다면, 실제로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한 증거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빈 무덤에 관한 복음서의 진술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우리가 빈 무덤 이야기에 관한 여러 개의 독립적인 증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마태와 누가가 마가복음에 대해 알고 있다 하더라도 각각의 내용들은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의 이름과 수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어떤 복음서도 그에 대한 완벽한 명단을 제공하지 않는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의 이름은 복음서에 모두 등장한다. 따라서 복음서의 저자들은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 중 몇몇에게서 이야기를 들었고, 직접 대화를 나눈 여인들의 이름만 기록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함께 무덤에 갔지만, 기록되지 않은 여인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예수는 실제 꼬박 하루 동안 무덤에 있었고 나머지 이틀은 하루 중 일부 동안에만 무덤 속에 있었다. 예수가 자신의 예언을 성취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아니냐고 크레그 박사에게 물어봤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유대인의 날짜 계산법에 따른 것이라고 박사는 설명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부분적인 하루일지라도 온전한 하루로 계산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와 토요일 그리고 주일 아침 동안 무덤에 계셨다. 당시 유대인들의 시간 관념으로 꼬박 삼일인 것이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법학자 중 한 사람이던 노먼 앤더슨 경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했고 하버드 대학의 종신 교수였으며 런던 대학에서 학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평생 동안 법률적 관점에서 이 주제를 연구한 끝에 한 마디로 결론을 내렸다. “빈 무덤은 부활을 논박하는 모든 이론들을 단숨에 파괴해 버리는 단단한 바위와도 같다.”


글·리 스트로벨
탁월한 언론인으로 윌로크릭교회를 거쳐 현재 새들백 교회에서 구도자 사역과 구도자 전도를 위한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본 글은 두란노에서 출간한 「예수는 역사다」에서 허락 받아 발췌한 것으로, 미국 크리스천 도서 부분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부활 이후 성도의 몸은 어떻게 되는가>
 
“사람의 죽음 후에 있을 일은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철학자나 다른 종교인들 등 모든 인간의 최대 관심사이다. 실제로 죽음 후에 대한 내세 사상은 고금을 통해 전 세계에 보편화되었다. 석가는‘해탈을 통한 극락과 윤회’를 말했고, 플라톤이나 칸트 같은 철인들은 ‘영혼의 불멸’이나 ‘환생’을 가르쳤다. 하물며 바벨론의 ‘길가메시’ 시에도 ‘생명의 윤회설’이 등장하고 있다.
기독교는 초대 교회 시절에 교리 구성상 내세에 대한 인식이 미흡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내세에 대한 소망은 열정적이었다. 중세에는 내세에 대한 열망이 후퇴하고, 반 천년왕국의 견해가 성행했다. 천주교는 연옥설 같은 비성경적 교리를 용납하기까지 했다. 종교 개혁 이후 초대 교회의 종말관을 다시 회복했으나, 18세기에 자유주의가 종말론을 ‘양자’ 취급하면서 신학의 관심 밖으로 내몰고 말았다.
오늘날 잘못된 종말론에 맞서기 위해 다시 건전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면 죽음 이후와 관련해 영생 그리고 중간기 안식과 육체의 부활에 대해 간단하게 대답을 찾아보자.

 * 죽음이 끝인가 아니면 영생이 있는가
현대의 진화론이나 유전 공학은 영생을 부인한다. 현대 신학은 육체의 부활이 없는 영생을 믿고 있다. 또 어떤 신학은 인간의 죽음을 종말이라 보고 그것을 정상적이거나 자연적인 현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죽음은 비정상적이고 자연적이지 않으며 영생이 있다고 말씀하신다(창 3:6∼15, 롬 6:23). 특히 믿는 사람들의 죽음은 비정상적 징계와 훈련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히 12:6, 시 116:15, 벧전 4:12∼13). ‘징계와 훈련’의 의미는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각 사람의 날의 완성과 다른 영역 즉 천국으로 이전을 말하는 것이다.
영생에 대한 관심은 미래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라 욥이 고백했듯이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욕망, 즉 더 큰 날에 대한 자연적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욕망 때문이다(욥 19:26). 영생이란 말은 ‘죽지 아니함’에서 온 말인데,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근원적 영생이나 시작이 없는 영생과는 다르다(딤전 6:16 참조). 성경에서 인간의 영생을 말할 때 “죽음과 관계가 없으며 죽음의 밥으로 될 가능성이 없는 인생의 지복(至福) 상태를 가리키며, 이것이 인격적 영생 혹은 완전한 영생을 의미한다”(박형룡, 「내세론」, 27쪽).
고린도전서 15장 51∼54절 말씀을 보면 영생을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썩지 않음과 죽지 않음이다. 먼저 ‘썩지 않음’은 ‘불부패’를 말하며, 성령 안에서 현재 누리고 있는 평안과 희락과 같은 생명의 풍성한 질을 나타낸다. ‘죽지 않음’은 ‘불사’를 뜻하며, 미래에 시간과 양으로 풍성한 생명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영혼만 믿는 것이 아니다. 영혼과 육체가 같이 영생한다고 믿으며 그것을 인격적 영생이라 한다.

 * 사망과 부활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사망과 부활 사이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중간기 상태’이고, 사망과 부활 사이에 영혼이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교회사적으로 중간기 상태를 ‘최종 응보의 축쇄판’으로 보는 견해와 ‘의인의 영혼은 사후에 직접 천당으로 간다’는 관념이 대립하고 있다(박형룡 저서 120∼121쪽 참조).
네덜란드 개혁 교회는 이 문제와 관련해 비성경적 관념들을 여덟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는 사후에 연속된 존재가 없는 것처럼 말하는 유물주의, 둘째는 영은 하나의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진다는 영혼 재래설, 셋째는 죽은 자는 사후에 의식이 없는 상태가 된다는 주장, 넷째는 죽은 자의 영과 접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강신술, 다섯째는 죽은 자는 새로 영묘한 몸을 입고 일시적으로 존재한다는 견해, 여섯째는 사후에 불신자는 존재하지 않고 신자만이 존재한다는 조건적 불사설, 일곱째는 죽음이 하나님의 최초 창조의 일부였다는 주장, 여덟째는 죽은 후에 회심하는 모든 종류의 가능성에 대한 주장 등이다(W. J. 그리어, 「성경적 종말론 연구」, 139쪽).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한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말씀하신 ‘낙원’은 중간기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장소적 의미보다 신자의 영혼이 사후에 즉각적으로 ‘천국의 영광’에 들어간다는 것을 증거한다(고후 5:8, 박형룡의 저서 125쪽 참조). 물론 악인은 지옥 혹은 음부에 들어가는 것으로 본다(눅 16장의 부자 이야기). 그러므로 중간기 상태는 의식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죄와 그 부정적 결과가 소멸되며, 천사처럼 육체 없이 사는 것을 말한다.
개혁 신학자들은 이때 사후 영혼은 의식적일 뿐 아니라 활동적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영혼의 활동을 말하지만 이것을 과장해 영혼 ‘시련설’(試鍊說)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 몸의 부활은 만물의 부활을 의미하는가
과연 하나님의 나라에는 영혼만 반짝거리고 육체는 없는가? 인간 육체는 부활하지만 만물은 소멸될 것인가? 아니다. 영혼과 함께 육체와 만물이 부활한다. 부활은 인간 육체의 부활뿐 아니라 변형된 만물 즉 동물, 식물, 문화 등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인간 육체의 변형일 뿐 아니라 만물의 변형이고 유기적 재창조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부활은 현세에서 온갖 고난을 맛본 성도들에게 최대의 기쁨과 위로이다.
박형룡은 부활한 육체의 성질을 네 가지로 제시했다. “부활 후의 신체는 인생의 형상을 보유할 것이다. 미래의 신체는 지상에 있던 신체의 영화물일 것이다. 천상에서 우리는 친우들을 인식할 뿐 아니라 지상에서 서적을 통해 알던 선지자, 사도, 신앙 고백자, 순교자들을 소개 없이도 알아볼 것이다. 부활체는 썩지 않고 죽지 않으며, 강하고 영광스러우며 신령한 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완전한 구원이다”(박형룡의 저서 298∼301쪽).
특히 인간의 부활체는 현재 갖고 있는 육체와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관계를 갖게 될 것이다. 현재 모습을 유지하지만 늙지도 않고 병도 없으며 죽지도 않는 전혀 새로운 육체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완전한 갱신과 변형의 부활 교리를 ‘만유갱신설’이라고 한다. 이것은 현재의 육체와 만물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완전멸절설’이나, 현재의 육체와 만물과는 전혀 다른 것이 창조될 것이라는 ‘완전재창조설’과는 차이가 있다.
만약 육체와 만물이 갱신하거나 변형되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거나(완전소멸설) 완전히 재창조(완전재창조)돼야 한다면, 신정론(神正論)은 진리로 판명될 것이며 사탄의 계획은 성공할 것이 분명하다(최홍석, 「천년 왕국과 종말」, 165쪽). 그러므로 부활은 은밀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신자들뿐 아니라 악인들도 부활하는 보편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악인은 고통의 심판을 받기 위해 육체로 부활하고, 선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을 맛보기 위해 육체로 부활한다.
부활한 후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심판은 예수님 안에서 의롭다고 인정된 자들이 자신들의 신앙, 증거, 생활에서 하나님을 위한 업적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 구원의 섭리에 나타난 지혜, 권능, 오래 참음 등을 고백한다.
죽음 이후의 삶은 거울을 보듯 아직은 희미하다.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 모두 완전히 알 수 없을 뿐이지 불확실한 것은 아니다. 사실 성경의 계시는 확실할 뿐 아니라, 이미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고 앞으로 같은 성격으로 우리 모두에게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현실화되기 전에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의 부활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 형벌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글·성인경 한국 라브리선교회 대표로 「진리는 시퍼렇게 살아있다」 등 저서가 있다.

 

  <부활과 주일의 관계는 무엇인가>   

“부활절이 다가 왔다. 예수님께서 죽음과 흑암의 세력을 깨뜨리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첫 열매가 되심으로써 영원한 삶에 들어가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절을 다시 맞으며 우리는 과연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 부활의 역사를 인정한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앞에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역사성에 대한 상기(想起)는 언제나 중요하게 언급돼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 계시며 영원히 부활의 생명을 가지신다. 그러므로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부인은 결국 예수님의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부활의 의미에 대해 아무리 학문적인 말을 많이 하고 그 의미를 풍성히 한다고 해도 부활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전적인 부인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어떤 학자들이 생각하듯,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로 인해 새로운 존재 방식에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시체가 무덤에 있다고 해도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태도는 결국 부활 자체를 부인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의 역사성을 추호(秋毫)도 의심하지 않는 성도는, 올해 부활절을 맞아 다른 측면에서 부활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부활절에 대해 일년에 한 번 부활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는지 깊이 반성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일년에 한 번도 제대로 진정한 의미의 부활절을 생각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부활의 역사성에 의문을 표하는 많은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정작 부활의 참된 의미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비판과 조롱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면 과연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 주일마다 부활을 기념한다
엄밀히 말해 그리스도인들은 매주일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부활과 관련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 날에 함께 모여 모든 인류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리며 찬양한다. 또한 그분의 뜻을 나누고 그 뜻대로 살자며 서로 권면하고 격려한다. 이것이 주일에 성도가 모이는 이유이고 주일의 참된 의미다. 그래서 우리는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주일마다 부활의 의미가 가득하게 보내야 한다.
성도는 매주일 예배를 위해 모일 때마다 인간의 구속을 이루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려는 마음으로 가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지 않는 주일과 예배는 그 본질이 상실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주일 예배 때마다 부활의 주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이 넘쳐 나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인류 구속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구속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주일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부활절 기념은 무의미해진다. 주일을 부활의 의미로 충실하게 보내는 교회는 매주일을 부활절로 보낼 수밖에 없다.

매일 부활의 생명으로 산다 매주일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보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일의 삶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일으킴을 받아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매주일을 부활의 의미가 가득하게 살려면 우리는 매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일으킴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몸의 온전한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살아야만 한다.
이것이 성도로 살아가는 진정한 길이다. 따라서 참된 성도로 산다는 것은 매일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일이다. 부활을 믿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참여해 그분의 부활 생명 안에서 사는 것이다. 우리는 순간마다 중생으로 인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얻은 부활 생명의 빛에서 살아가며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해 교회가 늘 강조하는 ‘이미 … 그러나 아직 아니’의 구조가 있다. 주님의 부활에 연합해 우리는 중생에서부터 이미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성도는 부활의 생명에 참여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아직 아니’의 측면도 있어서, 우리는 바울처럼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순간마다 육체, 즉 부패한 인간성의 잔재를 죽이고 영을 살려가야 한다. 날마다, 순간마다 말이다. 그것이 주님께 주일을 의미 있게 드리는 길이고, 따라서 매일과 매주일을 제대로 보낼 때 해마다 부활절을 의미 있게 맞을 수 있다.

 * 주님의 부활에 참여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보아야 한다. ‘과연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매일, 매순간을 그분의 부활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또 ‘나는 매일, 매순간을 부패한 인간성의 잔재를 죽이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이런 자문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사로 잡혀서 살지 않는다. 자신의 과거나 현재의 욕심에 사로 잡혀서 살지 않는다. 자신의 미래나 무엇을 이루어야 한다는 욕심의 열망에 사로 잡혀서 살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빛에서 자신의 욕심에 대해 죽은 사람으로 살게 된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새 생명에 참여해 살아간다.
이제 성도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뜻을 성취해 간다. 성도의 삶이 변화할 때 교회의 진정한 의미가 성취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성도는 주님께 행하는 순종을 개인의 공로로 여기지 않는다.
올해 부활절에 모든 성도는 순간과 매일 그리고 주일마다 부활의 의미로 충만한가 스스로 깊이 있게 자문했으면 한다. 우리의 부족한 모습에 대해 애통해야 한다. 더불어 우리의 삶에서 부활의 의미가 잘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모두 성령님께 의지해 힘써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성도들이 변할 때 세상은 달라진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부활 생명의 힘을 드러내는 길이다.


글·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 조직신학교수로 「개혁 신학 탐구」, 「성령의 위로와 교회」 등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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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카를 > 에라스무스의 생애

에라스무스로서 대표된 북방 휴머니즘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근대적 방법에 의한 인쇄술이 보급됨에 따라서 보다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종교개혁의 에라스무스의 위치는 루터의 우월한 지위에 압도되어 크게 주목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방의 휴머니즘의 양상이 특히 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종교개혁을 지향하여 전개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에라스무스의 역사적 역할은 결코 가볍게 평가될 수 없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바로 에라스무스의 사고와 저술의 기반을 이루었으며 본질적으로 중세사회가 가진 모든 특징에 대한 반발이었다. 따라서 에라스무스는 모든 성서 휴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권위적인 카톨릭교회에 대하여 도전함으로써 그의 개혁사상을 펴 나갔던 것이다. 그는 교회의 부패한 실천과 타성화된 형식주의를 개혁할 것을 역설했을 뿐 아니라 사회의 도덕 및 인간성 일반에 관한 검토와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비록 방법에서 루터와 같이 직접적인 교황에 대한 도전은 아니었지만 그도 역시 일생을 부패한 신앙의 일소에 바쳤다. 찬란한 명예가 주어진 종교혁명가는 아니었으나 죽을 때까지 학자였던 에라스무스의 중도적인 개혁사상을 살펴봄으로서 당시의 유럽사상의 흐름과 대비하여 그의 사상을 알아보고자 한다.

본 론

1.청년기의 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는 1466년 10월 27일에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시에서 성직자의 사생아로서 탄생하였다. 그는 당시의 국제어였던 라틴어로 쓴 유명한 「광우신 예찬」을 비롯하여 그 밖의 많은 저작과 헤아릴 수 없는 서한을 남기고 승리의 장년시대와 고독한 노년시대를 거쳤고 결국엔 루터의 위광과 투지의 그늘에 가려서 1536년 7월 12일 스위스 바젤에서 휴머니스트로서의 일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1495년 가을 에라스무스는 그가 생활하던 수도원을 벗어났다. 몽테규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얻기 위하여 수도원 당국의 허가아래 파리에 갔었다. 불쾌한 인상과 회상으로 찬 이때의 생활은 그래도 위대한 사상가로서의 발돋움을 위한 자유였다.

에라스무스의 인품에는 아주 독특한 점이 있었다. 그는 본래 체질상 투쟁형이 아니었다. 그는 본능적인 자기방어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방안의 물건들에 대해 신경질적인 근심과 불평을 하였고 그의 허약한 신체는 생리와 위생에 있어 그를 날카롭게 했을 뿐 아니라 정신적인 결벽성에까지 영향을 준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물질적으로나 도덕적 의미의 순수성을 스스로에게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언제 어디서나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순수성과 청결은 그 자신의 섬세한 감각과 허약한 신체와 함께 비공격적인 비판 형식인 풍자와 비유를 선택하게 하였다고 생각된다. 부정과 불의, 미신을 향해서 격렬한 비난을 퍼붓게 될 때에 그는 먼저 재빨리 체질적으로 이것을 느꼈으며 날카로운 풍자와 완곡한 조롱을 함으로써 자신의 공격을 세련시켰다.

그러므로 중세사회와 교회에 대한 그의 공격은 풍자가 갖는 보호색 때문에 같은 수준의 지성인들 이외에는 발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둔한 고위 성직자들을 때때로 즐겁게 까지 하였다. 이러한 풍자는 당시 휴머니스트들의 공통된 무기였다. 영국의 토머스 모어(Thomas More)는 히슬로데이를 등장시켜 그가 이상국으로 생각하는 유토피아를 묘사하였다. 독일의 스봐비아의 휴머니스트인 브란트는 성직자들을 정신적 바보로 비판하였다. 휴머니스트적인 풍자는 에라스무스의 탁월한 문체, 교묘한 표현, 풍부한 고전지식 등으로 윤색되어 있었다. 에라스무스의 거의 모든 저작에서 이런 풍자성이 깔려 있으므로 적당히 여과된 후에야 진지하게 고찰 될 수 있는 복잡한 것이 되고 말았다. 휴머니스트들의 표현방식은 그들이 처해 있는 시대의 특성 때문에 거의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교회의 권위에 반항하여할 때 풍자는 비판과 공격을 합리화하면서도 동시에 박해와 규탄의 안전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기방위는 양자택일의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간도를 마련해 놓는 성곽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말하기를 현명한 사람들은 가끔 사물을 얻는 것보다 차라리 잃어버리기를 택한다. 그것은 그들을 그렇게 함으로써 덜 희생이 된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적극적 행동보다도 순수객관으로서의 입장을 암시하고 있다. 에라스무스는 22세때에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원에 입적하였다. 한 때는 세속에 대한 멸시란 글을 쓰기도 하였으며 수도원에서의 은둔생활에 만족하였으나 그의 자유정신은 마침내 그로 하여금 이탈리아 여행을 동경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불행하고 어두운 청춘을 가진 에라스무스가 식량을 위하여 아부하지 않으면 안 될 때 그의 정신적 바탕은 왜곡되고 그 날카로운 지성은 풍자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풍자적인 저술방식이 전적으로 자유의지의 정진의 결과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확신하고 그 자신의 자유를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겼다. 그는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는 이탈리아에 정착할 수 있었고 또는 영국에 안주할 법도 하였기 때문이다.

2.휴머니스트로서의 현실비판

에라스무스의 개혁사상은 그의 모든 저작을 통하여 현실의 종교문제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종교개혁을 위한 방법으로서 그는 결코 혁명적 수반인 폭력과 파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화와 재건을 위한 온건한 수단을 제시하였다. 그는 부패한 교회를 고치는데 회초리가 필요하지만 권위를 파괴함이 없이 종교를 순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택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중 일반의 신앙에의 비판은 일반적으로 중세 사람들의 신앙은 거의 미신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들은 파괴에 대한 속죄와 게으른 의무에 대한 용서를 바라는 마음에서 성모나 성자에게 기도드리는 것이 일반신앙의 주된 것이었다. 더욱이 이러한 대중의 변질된 신앙에 대하여 교회측은 극히 타성적인 관례로써 대하였다. 예를 들면 성서의 최중요부분인 복음서나 사주서간은 교회 미사 때 독통되는 정도로밖에 일반 대중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고 그것도 고의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도록 음조를 붙였다. 성서의 필본은 드물었을 뿐 아니라 그것조차도 수도원 도서실 안에 갇혀 있는 수가 많았으므로 다만 직업적인 신학자들에게 공재될 실정이었다.

중세의 일반대중의 크리스트교 신앙은 기적 및 성모를 비롯한 특별한 성서에 대한 미신적인 사구로 되어 버리고 말았다. 에라스무스는 이러한 일반적인 비종교적 풍조에 대하여 진정한 크리스트교도는 세례를 받았다거나 교회에 가는 사람이라기 보다도 마음속에 깊이 내적으로 그리스도를 느끼며 경건한 행위로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였다. 에라스무스는 개혁 내지 보다 위험한 어떤 변화를 바랬으며 이것은 영국에서 토머스 모어가 희망한 것과 일치하였다. 그는 신약성서 번역이 준 영향은 단 하나의 촛불이 아주 넓은 세계를 비춘 것처럼 큰 것이었다. 신학자들의 잘못된 성서 해석과 형식화된 논리를 한층 공격적으로 비판한 것은 에라스무스의 신약 역본의 주석에서였다. 그에 의하면 당시의 신학자들은 마음대로 밀가루 반죽 이기듯이 성서를 뜯어 고치고 거기서 나온 그들의 결론만이 유일불가침의 것임을 인정하고 말솜시거나 언변사용에 까지 신경을 쓰고 섬세한 주의와 천착을 가하였으며 심지어 냄비로써 끓인다 와 냄비 안에서 끓인다. 의 두 가지 어법이 동일한 동일한 뜻을 갖는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이단을 몰릴 정도라는 것이다.

3. 저작활동과 작품사상

에라스무스는 고전연구에 몰두하여 훗날의 그의 저술을 명쾌하고 우아하게 할 라틴어에 정통한 공부를 하였다. 33세부터 저술을 위한 준비를 마치면서 이후 계속하여 자신의 휴머니즘을 표현하는 저술을 발표하였다. 1503년 처음으로 인쇄된 「크리스트교 군인의 경감」Enchiridon Militis Christiani에 뒤이어 세 번째 영국방문시의 큰 수확인 「우신 예찬」Encomium Moriae,1511 은 사회의 퇴폐와 수도성직자의 부패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것으로서 대단히 유고한 문체와 간결한 표현으로 되어 있다.

크리스트교 세계에의 커다란 도전인 우신예찬에 뒤이어 그의 성서 휴머니즘의 원칙에 입각하여 그리스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신약성서를 1516년에 많은 부가설명과 주역을 달아서 직접 번역한 최초의 것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이 중세를 통하여 확고부동했던 권위적인 종래의 성서판의 부정확성을 폭로하였다는 점에 더욱 중요한 의의가 있다. 따라서 그것이 출판되었을 때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후로 성서의 원전비판의 시초를 이루어 놓았다. 신학자로서의 에라스무스는 결코 카톨릭교회나 교황의 궁극적인 권위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휴머니스트의 입장에서 당시의 형식에 지나치게 구애를 받는 수도성직자들과 무모한 사변에 몰두하는 신학자들을 비판하여 그릇 해석된 성서의 권위를 바로 세우려고 하였다. 에라스무스는 각별히 크리스트교적 휴머니즘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크리스트교를 중세교회의 독단과 형식주의에서 해방하여 소박하고 순수한 원시크리스트교로 환원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나아가서는 그것으로서 일상행활을 지도할 윤리적, 도덕적인 기준이 될 것을 희망하였다.

그는 성서의 중세이래의 권위인 종래 성서의 오역을 깨닫고 신약성서의 원문 성서가 일부 지식인과 성직자에게만 애독되고 독점될 것이 아니라 널리 일반대중에게도 읽혀져야 함을 강조 하였다. 이러한 단순하고 소박한 크리스트교에 대한 그의 의도는 전혀 이해되지 않고 종래 성서를 절대시하고 그리스어에 무지하였던 완고한 파리의 신학자들은 그의 신약성서의 번역 출판에 일제히 비난을 가하였다.

4. 휴머니스트로서의 사상

찬반의 양방향의 결정을 회피하고 광신을 싫어한 에라스무스에게는 다만 하나의 확실한 신념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그의 휴머니스트적인 훈련과 학문을 구사하여 성서의 진실한 의미를 파악하고 복음주의에 입각하여 원초적 크리스트교 세계를 찾고자 하는 신념이었다. 이러한 신념 때문에 전유럽적인 분쟁속에서 루터와 카톨릭교회의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초연하게 자기 입장을 지켰다.

후년 루터가 에라스무스를 진실한 크리스트교인이 아니라고 비난하고 동시에 카톨릭교회측에서는 루터의 공모자로 의심했을 때 그는 결연히 그의 성서에 대한 신념을 표명하였다. 그는 루터의 성공이 가장 겸손한 사람까지도 망쳐 놓을 것이다라고 비판하고 이단자를 공격할 때의 성제롬(St. Jerome)처럼 그들의 비난을 들어도 크리스트교 신앙을 위하여 자기 희생을 할 것이라고 확연히 선언하였다. 16세기 초 유럽의 종교계의 모순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고 장차 커다란 동란 속으로 몰고 갈 사태에 이르렀다. 반란의 기운이 더 돌았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결코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노선을 가야하고 또 어느 정도로 배후 지지자를 찾을 수 있다는 확실성을 가지고 안전하게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남에 대한 공격과 자신이 받는 공격을 어느 쪽이든 다 같이 싫어하고 용의주도하게 중용의 길을 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항상 펜을 사용하여 유혈을 보지 않게 하고 아무도 공격하지 않으며 설사 공격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아무도 노엽게 만들지 않도록 희망하였는 데도 불구하고 그의 적수들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狂遇의 확인은 휴머니스트 공통의 비행동성을 설명한다. 중세는 몽매의 시대요 광우에 찬 시대였다. 에라스무스는 이러한 광우를 철저히 인식하여 계몽하고 인도하여야만 하였다. 권위에 대한 맹종과 형식주의에 의한 광신 이것은 제거되어야 하였다. 휴머니스트들은 지성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인쇄술의 보급에 힘입어 이러한 광우의 시대는 광명 속으로 이끌려 나가게 되었으며 대중의 비판력은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에 의하여 원초적인 크리스트교 세계를 밝히고 각언집성을 하여 고전고대의 현명한 말들을 값싸게 동시대인들에게 전하여 계발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시대차체 안에 잠재해 있는 정신적 동경의 심볼이었으며 본질을 개량하려는 각 시대가 모두 그 이상을 우선 한 인물에게 투향하듯이 그를 시대정신의 전위오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에라스무스의 세계는 편견도 없고 작당도 없다. 카톨릭교회와 투터의 양측의 진리를 다 같이 인정하고 어느 한 편에만 예속되려고 하지 않았다. 루터에 가담하지 않고 중세교회 정신에 알맞는 코스모폴리탄의 양상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그는 종교를 위한 소란, 혁명, 전쟁이란 것은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것으로 확신하였다. 이런 점이 루터파와의 분지점의 하나일 것이다. 정말로 에라스무스의 세계주의는 한편으로 크리스트교에 내재하는 진편성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에라스무스의 명석한 지성과 관조적인 휴머니즘은 그로 하여금 이른바 프로테스탄트의 개혁운동의 과중에 휩쓸리지 않게 하였다. 그의 본명은 어디까지나 휴머니즘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진편적인 조화의 세계에 폭풍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는 다만 현재교회의 도덕적 개혁을 지향하기를 주장하였으며 크리스트교 본래의 영적 순수성을 부활시키고자 할 따름이었다.

논의나 합의를 거쳐서 합리적인 해결을 바라는 경향은 종교와 사회의 개량에 관심을 가졌던 대부분의 휴머니스트들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유럽 전체를 종교적인 혼돈으로 몰고 들어갈 폭풍의 전야에 있어서도 고전세계의 이상이던 중용과 조화를 표방하면서 세계주의 이상을 굳건히 지키려는 순수한 학자의 모습이었다.


결 론

중세가 종말을 고하려던 14세기와 15세기는 무한한 중대성을 갖고 있었다. 왜냐면 전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모든 사상이 붕괴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대성은 중세적 요소와 근대적 요소와의 갈등에서 더욱 심각해지고 그 가운데서 새 시대의 출발점이 확정되어 갔다. 이와 같은 시기에 에라스무스가 루터에 앞서서 개혁의 준비를 이룩하여 놓았지만 그는 끝끝내 휴머니스트로서의 한계를 넘지 못하였다.

진실로 그는 음성이 될 수는 있었으나 선구자는 될 수 없었다. 에라스무스의 개혁사상은 결정을 요청받은 순간에는 언제나 중용을 택하며 조정을 고수하는 그런 것이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조류가 북방에 들어온 이래로 그것을 종교적 개혁운동으로 이끌어 나간 휴머니스트들이 궁극에 가서는 고전 고대가 지향한 조화와 중용, 평화와 타협의 범주 안에 머물러 있게 된 것은 혁명적 효과에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는 휴머니즘의 본질이며 동시에 자체의 비극의 요인이었다.

에라스무스 자신으로 말하면 그후 1세기 동안의 서구 전체의 분란으로 확대될 운동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사회의 도덕적 혁신과 시대의 요청에 따라 충실히 끝까지 그 자신의 개혁사상을 고수하여 민중의 자유정신에의 각성을 지도하였다. 휴머니즘의 본질은 결코 혁명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에라스무스는 교회개혁의 도화선에 불을 붙임으로서 개척자로서의 극히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고 하지만 그는 대단히 평화적이며 화해적인 성질 때문에 교회와의 공공연한 작별을 두려워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시기에 서제에 틀어 박혀 확정하게 어느 편에도 가담하기를 거절하였다.

에라스무스의 평판은 17세기말에 나아지기 시작했다. 학자들이 성서 원문에 좀더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가 종교적 헌신과 교회에 대한 복종을 공언한 것은 기회주의적인 방편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에라스무스에 대한 이런 견해는 정통과 비평가들의 혹평에 역설적으로 오랫동안 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비록 그가 폭풍이 불어 왔을 때 몸을 빼기는 하였으나 아무도 에라스무스만큼 대중들을 상대로 종교의 개혁을 위한 준비를 많이 해 놓은 사람은 없었다.

에라스무스는 네덜란드인으로서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로서 그리고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의 카톨릭교도로서 자신의 다양한 자기 정체성을 융합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여전히 카톨릭의 울타리 안에 머물고자 했고 유럽 문화의 자유주의 전통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출 처 : [인터넷] http://myhome.naver.com/sw016/f-0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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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비발~* > 우리나라 기상 관측의 역사

스텔라님의 질문에 문득 궁금해졌다... 해서 찾아보니,

우리의 선조들은 이미 조선시대 세종23년(1441년)에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발명하여 강우량을 정량적으로 측정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앞선 선진 기상기술을 실현하였다. 이는 이탈리아의 Benedetto Castelli가 제작한 우량계(1639년) 보다 무려 198년이나 앞선 것이다.

비가 내릴 때 그 양을 정확하게 측정하였다는 것은 과학사에서 여간 중요한 일이 아니다.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그것에서 법칙성을 찾는 것이 과학일진대 그 관찰에는 좀더 정확한 방법이 중요하다. 17세기 서양에서는 과학이 폭발하듯 크게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그 배경의 하나가 바로 그런 정확한 관찰방법의 확립이었다. 우량계뿐만 아니라 온도계, 기압계, 습도계 등이 이때 나왔는가 하면, 정확한 시계도 만들어져 여러 실험에서 시간을 재기 시작하였다. 이런 측정장치가 거의 다 17세기부터 서양에서 나왔지만, 우량계로서의 측우기만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측우기는 세계과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우리 역사의 쾌거이자 자랑인 것이다.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뒤돌아 본 지난 20세기 우리의 역사는 밝음과 어둠이 극명하게 교차한다. 그 전반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압제에 이어 6·25동란으로 말미암은 동족상잔 등 어둠의 연속이었고, 그 후반은 조국근대화의 뿌리가 내려 민족웅비의 바탕을 구축하는 등의 밝은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 한가운데서 우리의 기상기술은 1904년 부산 등 5개소에 임시관측소 설치를 계기로 기상관측을 시작함으로써 근대 기상업무의 뿌리를 내렸고, 점진적이지만 끊임없는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면서 최근에 이르러 자동기상관측망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한편, 기상용 슈퍼컴 등의 인프라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선진기술을 모방하며 토착화를 시도함으로써 기술현대화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고 한다. 그리고 Q&A에도 똑같은 걸 궁금해하는 질의자가 있었다.

제목 우리나라 기상 관측의 역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등록자 이윤희 등록일 2003-03-03 14:38
질의내용 우리 나라에서 언제부터 기상관측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구체적으로 강수 기온 바람 일사량 습도를 언제부터 관측했으며 어떤 방법으로 관측했나요??




이윤희님의 질의에 대한 1번째 답변 입니다.
답변내용 우리나라 기상관측 역사에 대해 질의하여 주셨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나라의 근대기상관측은 1904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과거 조선시대에도 측우기 등을 사용하여 우량을 관측한 기록은 있으나 체계적인 기상관측의 시작으로 보긴 어렵고, 1904년 일본 중앙기상대의 임시관측소 형태로 강수량을 포함한 전체 기상요소에 대한 관측과 기록, 정기적인 자료집의 발간업무가 시작되었습니다.
관측지점은 5개소 목포, 부산, 인천, 원산, 용암포, 관측요소는 기압, 온도, 바람, 운량, 습도, 우량 등을 관측하였습니다.
일사계를 통한 일사량의 관측은 1969년 수원부터 관측한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과거기상요소의 관측은 장비 및 기술등의 낙후로 인해 전문성이 다소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반을 토대로 현재 첨단장비 및 기술을 이용한 관측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답변부서 기후국   기후예측과 등록자 김진상
답변일 2003-03-04 09:52 첨부파일  
분야
(대분류/소분류)
관측 / 지상관측

이상! 정말 달게 잘 때 전화해서 깨워놓고 아주아주 옛날 주인 찾는 건 정말 싫다!!! 세상에 전화 바뀐 지가 언제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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