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생활백서 - 2006 제30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민음사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방송의 인기개그 프로그램에서 백수의 생활을  적나라하게 꼬집은 '백수생활백서' 코너가 있었다. 거기서 나온 고혜성이란 개그맨이 얼마나 그럴 듯한 캐릭터로 시청자들을 웃겼는지 한동안 그것이 세간에 회자가 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우리나라의 실업자들을 풍자한 것으로  꽤 인기를 구가했다.

 

실업자의 설움이 얼마만한 것인데 '백수생활백서'가 하늘을 찔렀던 것일까? 희극배우의 성공요인 중에 제일로 꼽는 건, 본인은 무대에서 슬픈데 보는이들은 오히려 카타르시스와 희열 느낀다면 그 배우는 대단히 성공한 배우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대한 대표적 인물을 꼽자면 단연 채플린이 아닐까? 그 다음으론 로베르토 베니니 정도?

 

이 책, <백수생활백서>를 읽으면서 갑자기 '백수'의 정의를 내리고 싶어졌다. 그냥 단순히 실업자면 다 백수일까?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실업률 몇%라는 수치에, 무조건 일을 안하고 있으면 실업자의 대열에 넣는 것에 대해 억울해할 사람은 있지 않을까? 그들은 여러 이유에서 일을 안하고, 경제활동을 안할 뿐이다. 자신이 경제활동을 하고있다고, 또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고, 이런 사람을 얕잡아 보고 우습게 여긴다면 그건 또 얼마나 오만한 것인가.

그들은 보통의 사람들과 가치가 다를 뿐이지 그것이 문제가 되거나 병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회는 아직도 획일적인 것이 많고, 분류기법이 세밀하지가 않아서 그들을 단순히 실업자의 대열에 집어넣기를 서슴치 않고, 사지육신 멀쩡한데 왜 일을 안 하느냐고 단죄하기도 잘한다.

 

그렇다면 백수를 정의하기 전에, 무엇이 백수가 아니냐를 논해 보면 어떨까? 당연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으면 백수가 아니다. 일하다 잘려 억울해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들 역시도 백수로 보는 건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억울에 한다는 것은 일 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라는 것으로, 그는 언젠가 복직을 하던가, 아니면 새 일을 찾게 되던가 할 것이다. 또한 부류가 있다. 부모를 잘 만난 덕에 평생 무슨 일을 할까, 뭐하며 먹고 살아야 하나 걱정 안 해도 되는 사람들. 그들이 백수라고? 웃기지 마라. 그건 '베짱이'거나 '양아치'라고 하지 그런 부류의 사람한테 '백수'란 거룩한 이름을 부여하는 건 옳지 못하다.

 

그럼 어떤 사람을 '백수'라고 하는가? 우선, 백수는 자발적이다. 돈을 벌라고 등 떠밀어도 절대로 그 말에 굴복해는 안된다. 그리고 자신이 어떠한 재주를 가졌던 지간에 그 재주로 자신의 안일을 도모 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그러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빌붙어 살아도 그것을 부끄러워 해서도 안 되고,  최소한의 용돈벌이는 하되 긴 안목에서의 노후대책이나 재테크를 위한 경제활동은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백수'는 오늘이라고 하는 이 하루를 살뿐, 자신이 미래에 어떻게 살거라고 하는가 그림 같은 것은 애초에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 하나가 있다. 그것은 자신이 미치도록 좋아하는 것 딱 한가지만을 미치도록 아니 미쳐서 하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완벽한 '백수'가 되는 것이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자기 좋아하는 일이 미래에 돈벌이가 될런지 안될건지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사화는 어떤가? 이런 '백수'를 보호해 주고, 그들도 살 수 있게끔 하는 사회보장 프로그램이 없다. 그들은 나중에 돌봐 줄 사람이 없게되면 기껏해야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최저생계비는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사회에서 인정만 된다면 억울하게 실업자로 분류되지 않아도 좋고, 실업률 몇%란 수치를 다소 떨어뜨려 줄 수 있고, 그 때문에 국가의 위신도 올라갈 뿐만 아니라  대외신임도도 올라갈텐데 국가에선 이런 '백수'에겐 관심도 없다.        

  

왜 우리나라는 '백수'라고 하면 문둥병자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아까 말했던 부모 잘 만난 골빈 베짱이, 양아치와 결혼할 망정 '백수'와의 결혼은 꿈도 안 꾼다. 이건 그가 아무리 잘 생겨도 거부한다. 왜 그 잘난 인물 가지고 인물값도 못하냐고 다그친다. 그러므로 인물이 좋다는 건 백수가 되는데는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될 수도 있다.

 

백수는 말한다. 왜 사람들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봐 주질 않는거냐고. 내가 꼭 뭔가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경제적 가치가 환산이 되야만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이라면 그 가치가 참된 가치일 것인가?   

 

책에서 주인공이 피 한방울 섞이지 않는 외할머니에게 묻는다. 왜 할머니는 소설을 쓰지 않냐고, 그러자 외할머니는 말한다. 소설보다 소설을 쓰는 것보다 인생을 사는 것이 더 재밌거든. 사는 재미에 빠져서 소설을 써야 한다는 생각은 자꾸 미뤄졌지.(316p)라고.이것이 백수의 삶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직 자기 자신으로만 충만한 상태를 즐기는 것. 솔직히 난 인생을 사는 것이 뭐가 재미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인생을 즐길 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현재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란 아무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란 말이지 백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설의 주인공도 책을 좋아하고, 저자도 책을 좋아한다. 그러나 주인공과 저자가 좀 다르긴 하다. 언젠가 저자에 관한 기사를 읽어보니, 그녀는 사회생활 하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대학원을 갔다고 솔직히 털어 놓았다. 하지만 저자는 처음부터 백수가 될 생각은 아니었나 보다. 그러니까 이렇게 '오늘의 작가상'이란 타이틀을 거머쥐고 작가라는 직업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거이 아닌가.

 

물론 그녀는 소설 어디엔가, 작가는 직업이라기 보단 정체성에 불과하다고 피력해 놓았다. 나도 거기엔 상당부분 동의한다. 그래도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온전히 글만 써서 밥벌어 먹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렇게 보면 작가는 직업은 직업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친철하게 <상업문화예찬>이란 책의 예를 들어가면서 역사상 유명한 예술가들이 순수하게 예술활동만 가지고는 자신의 삶을 재대로 영위할 수 없음을 역설해 놓음으로 자신은 여전히 백수임을 말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274p)

 

'상업문화예찬'이라! 작가는 자신의 책에서 상당히 많은 책들을 인용해 놓았는데, 그중 단연 이 '상업문화예찬' 은 나의 가장 많은 흥미를 끌었다(난 이책을 언젠가는 손에 넣고 말 것이다). 왜냐구? 나 역시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온전한 백수이길 바라지만, 자꾸 일에 대한 유혹을 받기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나의 이런 유혹에 대해 이 책이 일말의 답을 주지 않을까 한다.

 

솔직히 작년에 잠깐 돈을 벌기위해 일을 해 본적이 있는데, 하면서 나는 그 일 때문에 좋아하는 책을 읽을 수가 없다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책을 읽는 것과 일. 이 둘 다를 잘할 수 없다면 한가지를 포기해야 하지 않는가. 그러고 하나만 잘하는 것이 나에겐 차라리 더 유리할 것 같아, 난 그 일을 버리고 내 본업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미 말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역시 엄밀하고 순수한 의미에서 백수는 아니었다. 나 역시 책 읽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 일을 통해서 뭔가의 일을 꿈꾸고 있지 주인공처럼 책만 읽지 않는다. 그렇다면 난 좋던 싫던 지금으로선 백수가 아닌 실업자로 분류되야 마땅할 것이다. 일을 기다리는 실업자. 언젠가 나의 날개를 피면 이 딱지도 떨어질 것이다. 그게 언제가 될런지 모르지만.

 

내 후배 한 애는 내가 돈을 벌지 않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하다 못해 닦달까지 한다. 난 녀석이 좀 무례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아직 그애의 닦달에 제동을 걸어 본적은 없다. 그럴 때마다 난 오히려 서글퍼진다. 왜 사람을 돈벌이를 하느냐, 안 하느냐로만 구분지을려고만 하느냐고 녀석에게 따지고 싶어지기도 한다.

 

나는 녀석의 그런 시각이 마음에 들지않고, 미안한 얘기지만 조금은 천박해 보인다. 그러면 녀석은 그러겠지. 언니는 현실감각이 없고 아직도 구름위를 걷고 있다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치열하고 천박한 것인데. 어디 한번 자기 같이 싱글맘으로 살아보라고, 대뜸 치고 들어 올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내가 참는 수 밖에. 이것이 백수가 된 죄라고 밖에 달리 뭐라고 설명하랴?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백수가 대우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을 어쩌랴.

 

그래도 이 책이 백수의 위상을 올려놓은 것 같아 나름대론 애정이 갔다. 하지만 한 사람의 독자로서 이 책을 앞으로 읽을 사람들에게 오해 안 했으면 한다. 물론 그럴리 없겠지만, 백수는 책만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갖지 말았으면 한다.  물론 이 책이 안 그래도 독서인구 감소 방지에 조금이나마 기여한다면 좋은 일이긴 하나, 백수가 책만 읽어야 진정한 백수라고 어디 나와 있겠는가? (솔직히 난 초반에 읽으면서 제목에 불만이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 때문에 다소의 불편을 감수하고 사는 것이 진정한 백수가 아니겠는가? 단지 이 소설의 주인공은 책읽기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때로는 영악하게 사람과 거래를 하기도 한다는 것뿐이지. 어쨌거나 이 책은 나에게 즐거운 독서체험을 하게해 준 것마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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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7-20 0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에 적극 동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추천!

Mephistopheles 2006-07-20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리뷰 좀 자주 올리면 안되겠니~~!! (요)

stella.K 2006-07-20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오랫만에 리뷰에 댓글을 받아 보네요. 그동안 쓰면서 얼마나 외로웠는데요. 서재 폐쇄하려고 했어요. 엉엉~

소쿠리 2006-07-23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대학원에 다니다가 휴학을 하게 된 20대 후반 남성입니다. 학원강사 자리를 구하려고 하는데 쉽지 않아서, 본의 아니게 놀고 먹는 백수 신분이 되었지요... 백수를 단지 일 안하는 사람으로 쉽게 구분하는 사회의 편견을 잘 지적하신 것 같습니다... 주위에서는 저보고 사람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는 살 수 없지 않느냐는 근엄한(?) 충고를 하기도 하지만, 저는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서 살고 싶지 않아서 쉽고 편안한 길을 포기하고 인문학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요즘들어 미래가 많이 불안하기도 하고 사회에 진출해야 하는데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님의 리뷰가 저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stella.K 2006-07-24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시군요. 위로가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006-08-01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6-08-0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self-esteem! 얼마만에 들어보는 말인지! 고마워요. 읽어주셔서.^^
 
타잔
김윤영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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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선 이 소설집은 재미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읽어 나가면서, "재밌네." 소리를 스스로 내며 읽었으니까. 그게 마치 나에겐 매콤한 양념통닭을 뜯어 먹으면서, "맛있네."란 말과 동격으로도 들린다.

왜 재미있어 했을까? 그리고 왜 생뚱맞게도 매콤한 양념통닭을 먹는 맛에 비유하는걸까? 그건 아무래도 작가가 이야기가 될만한 소재를 뽑아내는데 있어서 나름의 독특함이 있고, 이야기의 구성 방식에 있어 아이디어가 있어 보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이야기는 '살인'과 '분열'('그가 사랑한 나이아가라' '집 없는 고양이는 어디로 갔을까' 등에서)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 현대인을 사로잡고 있는 정신적 상태를 잘 끄집어 내고 있다. 그리고 소설은 세련되고, 이미지가 뚜렷한 것으로 보아 작가는 역시 영상세대를 비껴가지 않는 것으로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뭔가의 아쉬움이 남는다. 살인과 분열이라고 하는 독특한 소재를 가지고 썼음에도 불구하고, 재미와 섬뜩함을 고루 겸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써내려가는 이야기의 칼날은 왠지 그 끝이 무뎌 보인다. 즉 이렇게 재미있고 독특한 소재의 작품을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 도달할수록 별거 아닌 것으로 뭉개버린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왜 일까?

작가는 이야기의 시작도 좋아야 하지만 정점에서 어떻게 독자의 알고 싶어하는 욕구를 자극하고 간질거리게 만들 것인가도 중요하다. 그리고 그 끝마무리도 깔끔해야  한다. 그런데 나의 기억 속에 작가의 작품은 끝마무리는 지극히 평범해 오히려 허탈하고 그 결말의 아쉬움 때문에 범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검사와 여선생'이란 작품이다. 1인칭소설 속의 '나는'는 요즘의 젊은 아이를 대표한다. 이 '내가' 쏟아 놓는 말들은 가히 촌철살인이다. 한마디로 나도 정상은 아니지만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똘아이고 정상이 아닌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래도 그중 가장 심성이 바르고 똑똑하다고 할 수 있는 나의 이종사촌 언니에게서 자칫 형부가 될지도 모르는 남자가 '변태'였다는 걸 끝까지 말하지 않는 것에서 언니 또한 얼마나 사람을 놀라게 만들 수 있는 인물인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자칫 형부가 될지도 모르는 남자가 변태라는 사실이 독자인 나에게도 전달되는 순간 화자는 놀랐겠지만, 나는 이야기의 긴장이 확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로 돌아설 수 밖에 없는 것 때문이었다고나 할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방식은 여러갈래다. 그래도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지극히 새로운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작가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쓴다고 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남 보다 깊이 보거나 앞서서 볼 수 있다는 것뿐이지 전혀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본다.

'작가'를 흔히 이야기꾼에 비유하는 것은 그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힘을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일 것인데, 뻔한 이야기도 어떤 사람은 지루하지만, 어떤 사람은 재미있게 한다는 것에 있다. 그것은 독특해서만도 아니다. 어떻게 디테일을 살리고  잘 풀어헤쳐 나갈 것이냐인데 그런 노련미가 작가 김윤영에게선 아직 발휘되지 않고 있다고 본다면 너무 건방진 소견일까?

작가의 작품들은 누군가가 단편영화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욕망을 갖게 만든다. 그만큼 독특하고 세련됐다. 작가가 이런 소설을 쓸 생각이었다면 히치콕의 작품들을 보면(수록작품 중 '집 없는 고양이는 어디로 갔을까') 더 좋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보곤했는데 이건 어딨까지나 나의 바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단편에 여러가지의 것들을 중첩시키는 것은 어찌보면 작가의 능력일수도 있고 욕심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없는 고양이...'에선 혼혈의 자아정체와 아기를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자기분열적 행동을 중첩시키고, '산책하는 남자'에선 장편에서나 시도해 봄직한 남자의 시선에서 여자의 시선으로 크로스되다가 다시 남자의 이야기로 되돌아 오는 것등에서.

이런 일련의 것들을 봤을 때 분명 작가의 작품은 실험적이고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독서 경험을 갖도록 해 준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의견이 구구한데 역시 그것은 독자 스스로가 읽어보고 판단할 일이고, 작가의 다음 행보도 조용히 지켜볼만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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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 - 전2권 세트
박혁문 지음 / 늘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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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원래 드라마를 그다지 꼼꼼히 챙겨보는 스타일이 못되는데, 그래도 어떠한 것들은 챙겨 보기도 한다. 그것은 원작이 있는 경우다.

그렇게 하는데는 이유가 있는데, 우리나라 극작가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어떤 작가는  뒤로 갈수록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감을 잃어버리고 마는데 그러면 여지없이 불쾌감이 느껴진다. 처음에 안 좋다가도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처럼 느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인데, 반대로 처음이 좋다가 뒤로 갈수록 안 좋으면 속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의 서평을 쓰면서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주몽>이라고 하는 드라마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매주 두 편씩 보자니 감질이나 어떻게된 내용인지 스토리나 알고 았자라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책을 펼쳐 든 순간, 나는 몇장 읽지도 않고 당황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야? 내가 봐왔던 그 주몽이 아니잖아?" 그런데 이 책엔 조그맣게 부제처럼 '정설'이라고 씌여 있다.

그것은 어느 특정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  자기네 식당이 진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간판에 '원조'라는 것을 써서 붙이고, 그러자 같은 류의 음식을 파는 그 옆 식당이 그에 뒤질세라 '진짜 원조'임을 강조하다 결국 그렇고 그런 아류가 판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하는, 어느 문화평론가의 쓴소리가 생각이 난 것이다.

어쨌거나 난, 그래 좋다. 책은 책이고, 드라마는 드라마다 생각하고  일단 책에 몰입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러기엔 드라마 <주몽>이 주는 이미지가  강력하여(적어도 아직까지는) 책에 올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도대체 책과 드라마, 어떤 게 진짜 정설에 가까운 것이냐? 의문스러운 것이다. 물론 말대로 박혁문의 버전이 진짜 정설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야기의 구조가 그리 탄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럴 경우 아무리 드라마가 주는 극적 효과 때문에 허구가 더 많이 들어간 TV <주몽>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더구나 영상은 더 없이 화려하고 스펙타클 하다. 게다가 마케팅에 걸맞게 TV<주몽>을 쓴 극작가가 소설로도 써 한달에 한권씩 낼 모양인가 보다. 그렇다면 박혁문의 버전은 승산이 없어 보인다. 아무리 '정설'이라는 것을 강조해도 말이다.

어차피 신화도 이미지고 TV 드라마도 이미지다. 물론 둘은 같지 않지만 사람들은 어쨌거나 이미지를 쫓는 것마는 사실이다. 물론 조금만 더 똑똑한 독자라면 TV 드라마가 주는 이미지가 사람에게 100%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드라마의 만들어진 이미지는 사람의 상상력을 제한 하지만, 활자가 주는 이미지는 사람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끌어 올려 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상보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원작이 있는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둘은 같지 않지만, 그 둘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박혁문의 버전은 불운해 보인다. 그의 버전은 드라마 <주몽>과 현격이 차이를 보이며 비교불가다. 비교를 한다면  최완규가 쓴 소설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작업은 어떻게 비교가 될까? 이 책의 저자 박혁문은 이미 10년 전부터 고증작업을 했다고 한다. 극작가 최완규는 어느 호텔방에 박혀서 외부와 차단된 채  텔레비젼과 노트북과 담배만을 가지고 산다고 한다(얼마 전 모 신문의 인터뷰에 나온 그의 얼굴은 수염도 깍지 않고 초췌하기 이를데 없었다). 박혁문 씨도 고생을 했을텐데 누구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누구는 이제 잊혀질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한간에 말을 들으니 <주몽>에 관한 책만 해도 20종에 가깝다라고 한다. 뭐든 이게 문제다. 넘치는 것은 모자라느니만 못하다. 뭐가 좀 뜬다 싶으면 너도 나도 그것에 목숨을 건다. 그리고 그것이 사그라들면 또 다른 것에 달라붙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가 10년 전부터 작업을 했다고 하면 그때로서는 꽤 선견지명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역사 연구 또는 역사 드라마가 주로 조선시대를 다뤘던 것만큼 이때 이미 고구려를  다룰 생각을 했다면 전망있어 보였으리라. 그런데 작금에 와서 별달리 주목을 받지 못하는 건 출판사의 마케팅 부재였을까?

저자의 노역은 둘째 치고라도 책 자체를 보라. 이미 많은 사람이 지적했듯이 오자가 너무 많고, 디자인 역시 조악하다. 그리고 만약 이 책을 언제 세상에 내놓느냐로 고심했다면  너무 뜸들인 건 아닌지...? 모든 마케팅이 그렇겠지만 출판 마케팅에 있어서도 어떻게 무조건 많이 팔 것인가만을 생각하지 말고, 시대조류를 먼저 읽어내는 안목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여기까지 쓰고 보니 드라마 <주몽>도 그렇게 강렬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신뢰를 얻지 못하게 생겼다. 드라마 <주몽>이 어디까지 정설을 바탕으로 썼을까를 생각할 때 그것을 믿을 사람은 없어 보인다. 하기사 드라마가 아닌가? 그러나 드라마 역시 허구라고는 해도 이건 특별히 역사 드라마다. 어느만치는 정설을 내포하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적어도 어디까지가 정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에 대한 경계가 있어야 한다. 무조건 영상의 화려함 때문에 믿게끔 만드는 효과를 준다면 시청자를 우민화 시키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버전을 여러 개를 만들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혼란을 주는 것도 고려는 해 봐야할 것 같다. 아무리 팩션이라고 하는 장르가 뜬다고는 하나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 필요는 있어 보인다. 

어쨌거나 그래도 난 저자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쳐 주고 싶다. 이 책을 쓰기 위해 10년 동안 고증작업을 했다니 가히 그 고생이 얼마만한 것이었을까 생각하니 위로의 박수를 쳐 주고 싶은 것이다. 다음에 그의 행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좋은 성가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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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미 2006-06-21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년동안의 고증작업, 작가의 땀이 밴 작품에 박수를 보내는 그 마음에 박수를 보냅니다.

stella.K 2006-06-21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워커홀릭 1 - 변호사 사만타, 가정부가 되다
소피 킨셀라 지음, 노은정 옮김 / 황금부엉이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은 영화와 될거라고 예견하고 있다. 정말 이건 누가 봐도 영화화 될 것을 작심하고 쓴 티가 역력하다.  하기야  요즘엔 소설의 영상화가 보편적인 추세라 조금만 똑똑한 작가라면 아예 영화화될 것을 예상 내지는 꿈을 꾸고 쓸 것이다. 아마 내가 작가였어도 그랬을 것이다.

이 작품이 영화와 된다면 별을 몇 개나 받을 수 있을까? 잘하면 세 개는 너끈히 받지 않을까?(영화에서 별 세 개면 충분히 봐 줄만한 영화라고 한다.) 그만큼 이야기는 미끈하게 잘 빠졌다. 그러나 난 오늘 이 소설이 그리지 않고 있는 면들을 얘기해 볼까 한다. 어차피 나는 문제적 인간이라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남이 동의를 하던 않하든 내 식의 얘기는 꼭 하고야 마는 성미라 어쩔 수 없다. 물론 그것이 남이 보기에 별로 대단치 않은 것이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서두에도 말했지만 이 책은 충분히 재밌고 미끈하고 군더더기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라고나 할까? 소설가 이승우 씨가 소설은 철저하게 '인공'이라고 했으니 그렇다면 굳이 이 소설에 죄(?)를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깍고 다듬어 예쁘게 포장까지 했으니 이런 거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라.(난 실제로 이걸 서평단에 뽑혀 읽게 됐으니 선물이라면 선물일 것이다.) 이걸 거절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같은 다이아몬드라도 원석 보다 잘 깍고 다듬어진 게 더 마음이 끌리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이 책을 읽으면서 사만타는 굉장한 행운아라고 여겨졌다. 하나의 이야기니까 가능하지, 사실 하루 아침에 잘 나가던 직장에서 짤렸을 때 회복되는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래도 소설처럼 빠르지가 않다.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우연'이란 게 현실세계에서 있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 우연도 언제 찾아 올런지 모른다. 운 좋으면 얼마 전까지 다녔던 직장만한 새로운 직장을 얻을 수 있을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 보다 못한 일자리를 얻게 된다. 물론 제 3의 선택을 하는 경우도 종종 접하곤 한다. 이를테면 전도유망한 재원이 도시에서의 생활이 영증난다고 귀농을 해서 천신만고의 고생 끝에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는 어느 휴먼 다큐멘터리도 접하기도 하지 않는가.

직장에서 쫓겨난 날,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를 한없이 가다가 어느 시골 화려한 고급 전원주택의 문이 열리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는 건 현실에서는 좀체로 잘 일어나지 않지만 한번쯤 꿈 꿔보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야기는 심리적 대리만족을 하게 한다.

그 세계는 사만타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다. 아니, 전혀 다르다기 보단 사만타가 살았던 세계와 오버랩되면서 새로운 국면과 발상이 일어난다. 조금은 여유롭고 넉넉한 세계. 이런 세계가 있었음을 왜 예전엔 몰랐을까?

중독은 중독된 그 당시로는 잘 모른다. 중독을 벗어나봐야 자기가 중독되어 있음을 알게된다. 그렇다면 중독은 왜 생기는가? 중독은 정말 나쁜일까? 많은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가 이것을 연구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분석에 따르면 중독은 두려움 또는 심리적 공황상태의 반작용으로 생기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어디엔가 미쳐있지 않으면 나를 가눌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 그것이 알콜에 고착이 될 수도 있고,  섹스일 수도 있으며, 사랑일수도 있고, 사만타처럼 일일 수도 있다.

현대인의 병리는 대오이탈을 경험하지 않기위해 아둥바둥거린다는 것이다.(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거기엔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가 있음을 볼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 세계안에 갖혀서 산다. 가끔은 파도타기도 해 줘야하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 점에서 사만타는 심한 중증의 워커홀릭은 아닌 것 같다. 파도타기를 시작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지고 모험을 감행한다.  비록 가정부는 그녀가 결코 원했던 건 아니지만 그냥 질러버리고 보는 거다.

사람은 익숙한 것과 결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존재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힌다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게되고 시야가 한층 넓어지기도 한다. 이건 정말 바람직한 과정이 아닌가.

사만타는 주말에 쉬는 건 지난 7년 동안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호사였다. 그래서 주말 계획을 세워본다.  남을 위해 음식도 만들어 보고, 사랑도 하게되며, 그 사랑 때문에 갈등도 해 본다. 싫은 사람을 위해 일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 들이고 느껴본다. 중독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삶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다. 중독이란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질주해 가는 것이기에 위험한 것이다. 이 작품에선 중독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이 작품에서는 예쁘게 그리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직업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됐다. 변호사가 반드시 비난 받아야 할 직업은 아닐 것이다. 이야기를 전개하다 보니 상대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가정부가 됐다고 다 만족하며 사는가?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사회 통념상 가정부가 변호사 보다 못한 건 영국이나 우리나라나 오십보 백보란 생각이 든다. 요컨대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느냐 안 갖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변호사라고 다 좋은 일만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가정부라고 해서 무조건 폄하해서도 안될 일이다.

소설적 공간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찾는 여행이 반드시 도시에서 시골로 공간이동을 해야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설정은 도시에서 도시로 해도 좋고, 역으로 시골에서 도시로 해도 이야기는 나올 것이다. 중요한 건 변화를 이끌어내는 계기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일 것이다. 그랬을 때 도시에서 시골로의 공간 이동은 무리는 없어 보이지만 좀 진부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야기 말미는 우여곡절 끝에 사만타가 변호사를 회복하지만 결국 사랑을 위해 그것을 포기하고 애인의 품에 안기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데, 역시 이런 이야기는 해피 엔딩이 좋다. 하지만 '...그래서 둘은 행복하게 잘 살았더래요.' 하는 것 역시 진부하다. 왜냐하면 그 이후의 삶은 어찌보면 그 이전의 삶 보다 몇 배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 잘 살지 않으면 이전보다 못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그걸 독자로선 알 수가 없다. 그냥 상상으로나 알뿐.

어째거나 이래저래 생각해 보면 인간의 삶은 아주 잘 살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행복해야 하고 보람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이 귀하고 빛나 보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의 말이 무척 인상 깊다.

인생을 망치는 일이라는 건 없다. 알고 보면 인생은 회복력이 무척 뛰어나다.(211p) 저자는 꽤 긍정적인 인생관을 가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웬만해서 중독되지 않는 나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난 정말 웬만해서 그 무엇에도 미쳐버리지 못한다. 금방 싫증내고 미쳐버리지 않을려고 용을 쓴다. 이런 것 또한 중독일까? 그러면 나 같은 인간은 무엇인가에 조금은 중독되도 좋지 않을까 싶다. 과연 무엇에 중독되면 잘 중독됐다고 소문이 날까?

피에쓰: 나는 이 책에 별 4개를 줬다. 반 개도 표기할 수 있다면 난 3개 반을 줬을 것이다. 나의 경우 영화는 별 세 개 이상 이래여 볼 마음이 난다. 그러나 책의 경우 3개면 그다지 읽고 싶다는 느낌은 나지 않는다. 이 책은 문학성을 따지는 보수적인 독자라면 꼭 안 봐도 될 것 같긴하다.  하지만 보수라고 해도 트랜드를 알 필요는 있다. 이 소설은 웬지 안 보면 허전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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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6-05-23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이미 쓰셨군요. 근데 리뷰가 느무느무 길어요. 단편소설 같애. ^^

stella.K 2006-05-23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제야 보셨단 말입니까? 제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작심하고 쓴다고...길이는 단편소설, 내용은 어설픈 평론 아닌가용? 암튼 고맙습니다. 이 책 꼭 야클님 드려야겠군요.^^

사이 2006-05-26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작품 자체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로 보면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하지요. 실제로 판권도 팔렸고, 영화화 예정이라네요. 영화로 보면 또 다른 맛이 있을 듯.

stella.K 2006-05-2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영화를 염두했거나 이젠 글쓰기 방식이 아예 그렇게 변하고 있거나 둘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집이 언제부터 개를 키우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태어나서 개라는 동물을 처음 대했을 때는 '캐츠'라는 털이 탐스러운 숫캐였다. 원래 있어 왔다고 하면 아마도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도 우리집은 개를 키워오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을 해 본다.

 

암튼 이 '캐츠'라는 개는(개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늘 묶여만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아버지가 운동을 시켜야 한다며 가끔씩 풀어준게 화근이 되어서 어느 날 집을 나가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난 그 녀석이 집을 나가던 날 열심히 녀석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열심이 뒤를 쫓았는데도 녀석은 뒤도 돌아보아 주지 않았다.

 

결국 난 녀석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내 발은 두개고 녀석의 발은 네개다. 난 도무지 따라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외삼촌인지 엄마인지 잘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냥 놔두라고 했다. 그렇게 말했던 그는 녀석이 나가서 안 돌아 올 것을 이미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정말 안 돌아왔다. 난 내심 슬펐지만 우리 가족들 어느 누구도 녀석을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슬픈 내색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개는 그런 존재인가 보다고. 과연 그럴까?

 

언젠가는 인간의 곁을 떠날 존재. 그렇다면 우린 얼마나 많은 개를 떠나 보내고 살았던 것일까? 지금도 내 곁에 있다가 떠나 보낸 개들이 생각이 난다. 개도 사람처럼 개성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켜보노라면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다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그에 준하는 뭔가의 에너지가 개 안에 내재되어 있는 건 아닐까 의문을 가져 보기도 한다. 그러니까 사람과 교감하며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사람과 함께할 수 있지 않았을까?

 

김훈. 올해 들어 본의 아니게 그의 책들을 주섬주섬 읽게 되면서 나는 이 작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 이 책 역시 읽으면서 작가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언젠가 TV에 나와 대담하는 것을 본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의 눈을 보았다. 유난히 눈에 안력이 있고 순수함이 베어 있었다. 그 눈으로 보았을 인물에 대한 또 사물에 대한, 국토에 대한 생각과 느낌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 책은 너무나 완벽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는 단순히 개를 변호하기 위해 개의 입장에서 바라 본 세상을 얘기하려고만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탁월한 묘사도 묘사이지만, 거기에 또 하나의 층위를 더 얹어 우리 인간이 개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해 왔으며, 개와 개끼리는 또 어떠한 교감을 나누며 지내는가 참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들면, 주인공 개를 미워하는 듯 하지만 내심 개를 그 특유의 무뚝뚝함으로 돌봐주는 노부부를 통해 사물을 대하는 한국인의 정서가 느껴졌고, 아무에게나 보리라고 불렀던 그것은 어찌보면 흔하디 흔한 개 이름 '뽀삐'의 대칭이었으리라는 생각도 가늠해 본다.

 

나중에 보리가 노부부의 둘째 아들네로 옮겨와 주인의 배에서 그 망망한 바다에서의 밤을 함께 보내는 모습은 사람과 개가 얼마나 끈끈한 정서적 교감을 나누고 있는가를 잘 표현해 주는 것 같았다. 또한 악돌이와 흰순이를 통해 개와 개끼리의 관계를 통해 야성과 본능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흰순이를 잔인하게 잡아 먹는 인간을 통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개와 사람은 끈끈한 관계라고 여겨졌음에도 그것을 또한 여지없이 배반하는 인간 군상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여준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보리의, 아니 개의 미래는 불안해 보인다. 언제 자기를 낳아 준 어미와 형제들과 떨어질지 모르며, 싸우다 다칠 수도 있다. 자신의 동족이 죽어감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을 그저 묵묵히 지켜봐야만 하고, 자신을 사랑해 줬던 주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보며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주인을 슬퍼하고 그리워 하지만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밖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철저하게 개의 시선이길 바랬던 작가의 착념과 언어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놀랍고 그럴듯해서 '과연 김훈이다!'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 책은 정말 여운이 긴 책이다. 우리집은 개를 오래도록 키워 온터라 개에 대한 애정 또한 계속해서 이어 온 셈인데, 이 책을 읽으면 정말 보리에 대한 연민과 애정에 울컥하게 만드는 감동이 있다.

 

그리고 이건 사족이긴 하지만, 개를 잡아 먹을 수 있는 인간에게 개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모순이란 생각도 해 본다.

오늘 밤도 우리 옆집에 사는 개는 외출해서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목놓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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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5-11-03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걸~!! 멋지게 추천밥~!

stella.K 2005-11-03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좋아라~!

라주미힌 2005-11-03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K 2005-11-03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메르헨 2005-11-15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칼의 노래를 읽은지 정말 오래되었다는 생뚱맞은 생각부터 드는...^^
그의 글은 읽을 수록 좋지요? 때론 완벽함에 숨이 막힐 것도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구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 볼 수 없는건 아마 스텔라님께섬 말씀하신 그 순수함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stella.K 2005-11-15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