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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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난다. 지금은 아니지만 몇 년 전만해도 우린 조선일보를 구독했었고 주말이면 장영희 교수의 수필 연재글을 볼 수가 있었다. 연재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그때 나는 가끔 눈에 띄는 그의 글을 몇 편 읽었을 뿐이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이 분 글 잘 쓰네! 하고 감탄하곤 했다. 그래도 읽는데는 워낙에 게으른 눈을 가진 터라 그때 그의 글을 꼼꼼히 챙겨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새 그는 연재를 마쳤고 책으로 나와 이 청명한 가을 날 나의 손에 들렸다. 과연 이 미치도록 좋은 가을 날 수필 한 편 읽지 않는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책 속에서 장영희 교수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수필은 여간해서 대접 받기가 어려운 분야인가 보다. 오죽 홀대를 하면 교수 업적(?) 보고 때 논문을 내거나 책을 내면 학교에서 가산점을 받는데 유독 수필집을 내면 0점을 받는다고 썼을까? 물론 이것은 벌점 제도도 포함되어 있어 마이너스 1보다 나은 점수이긴 하지만 그래도 0점은 읽는 나도 너무하다 싶다. 그렇잖아도 바쁜 그가 시간을 쪼개 연재글을 쓰고 그걸 책으로 엮어냈구만 점수에 포함시키지 않다니. 그의 시간과 노력은 어디서도 보상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이런 미문에 100점을 줘도 시원치 않을판에 0점이라니? 이는 비단 그가 재직했던 학교의 제도의 문제마는 아닐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수필을 너무 낮게보는 단적인 예를 보는 것이기도 하다.  

꼭 이런 가을 날이 아니더라도 그동안 상처내고 혹사시켰을 나의 '생각'에 반창고 하나쯤 붙여주고, 토닥여주고 살찌우는데 잘 쓴 수필집 하나 읽는 것만큼 좋은 처방전이 또 있을까? 잘 쓴 수필은 저자가 누구든 간에 자신의 삶의 경험이 있기에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 준다. 이 책 역시 그러기에 모자람이 없다. 

더구나 이 책은 그냥 에세이가 아니라 '문학 에세이'다. 에세이 한 편마다 장영희 교수가 다루고 있는 서양문학사에서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문학 작품의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그건 차라리 행운이라는 생각이들 정도다.  

요즘 논술의 비중이 높아져서 명작도 논술의 관점에서 풀어낸 책들이 있던데 (실제로 내용은 어떨지 모르지만)그런거 보면 상술과 대입이라는 단내가 나 꼭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역겨워질 때가 많다. 고전을 고전으로 읽고 명작을 명작으로 읽을 수는 없는 것일까? 거기에 꼭 '대입 논술'이란 꼬리를 붙여야겠는가? 차라리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런 미문의 문학 에세이 한 권 읽게 만들고 꼬리에 꼬리를 물듯 자연스럽게 거기 소개된 고전 명작들을 읽으면 정서도 풍부해지고 교양도 쌓을 수 있을텐데란 생각이 절로 든다.   

읽으면서 어쩌면 자신의 일상과 문학은 그리도 잘 연결해서 설명하고 마무리를 하는지. 그의 탁월한 글솜씨에 오래 전에 이 책을 선물 받아 놓고 너무 늦게 읽은 것이 선물을 한 사람에게나 장영희 교수한테나 못내 미안할 정도다. 

그는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의 아름다움을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남들처럼 외모가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가끔 신문이나 매스컴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는데 그 이지적인 모습과 함께 눈이 참 나의 마음을 끌곤했다. 다소 크고 초롱초롱하면서도 선한 눈매가 말이다.   

책 속에서 교수가 만난 어느 꼬마의 말마따나 그녀는 평생 목발을 짚어야했기에 그 어깨가 더 아팠을 것 같지만 그래도 그녀는 아름답다. 장애자로 평생을 살았지만 장애자에 대한 어떠한 편견도(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간에) 그녀는 원치 않았다. 그냥 장애자는 사람일뿐 거기에 어떠한 수식어를 붙이는 것을 그는 원치 않았다. 그것은 장애자를 보는 또 다른 편견일 수 있기 때문에 경계했던 것이다. 그만큼 장영희 교수는 자기 삶에서 당당했던 사람이었고, 자기 삶을 진정 사랑했던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다.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었던 만큼 자기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확고한 문학관을 갖게되길 바랬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책의 맨 마지막장에 윌리엄 포크너가 노벨상 수상 연설문을 인용하기도 했는데,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 그렇다. 문학은 삶의 용기를, 사랑을, 인간다운 삶을 가르친다. 문학 속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치열한 삶, 그들의 투쟁을, 그리고 그들의 승리를 나는 배우고 가르쳤다. 문학의 힘이 단지 허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도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윌리엄 포크너) 라고 적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장에 자신의 암투병 사실을 함께 밝히기도 했다.  얼굴이 티 없이 맑아 생전 그런 병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있다가도 비껴갈 것 같았다. 그렇찮아도 자신은 이 병에 대해서만큼은 행운아라고도 했다. 또한 신은 다시 일어나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며 자신의 병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어느 덧 자신이 신문 글을 연재한지가 3년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싯점에서 그의 글은 일단의 막을 내렸다. 아직 <데미안>, <파우스트>, <햄릿>에 관한 글이 남아 있긴 하지만 윌리엄 포크너의 말과 함께 훗날을 약속하며 글을 접었다. 아마도 그 무렵이 병이 재발해서 더 이상 버티고 있기가 뭐해 내려놓은 것은 아닌가 싶다.  

이처럼 그의 병이 알려졌을 때 나는 정말 쾌유를 빌었다. 그러나 그는 말과 달리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안타까웠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장을 덥으니 슬펐다.  이제 더 이상 그의 탁월한 미문을 읽을 수 없음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가 없는 교정은 이제 서늘한 바람만 일겠지?  

그래도 그는 지금쯤 우리나라 영문학의 태동을 이끌었던 부친 장왕록 박사와 함께 목발없이 천국을 뛰어 다니지 않을까? 다시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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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9-21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영희님의 글, 저도 참 좋아해요.
편안하게 읽히면서 참 진솔한 울림이 있지요.

stella.K 2009-09-21 11:0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런 분이 이 지구상에 없다는 게 서글프더라구요.
그래도 뭐 프레이야님이 계시니까...ㅋ
 
한승원의 소설쓰는 법
한승원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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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한승원을 알게된 건 10년 전쯤에 읽은 <사랑>이란 소설을 통해서였다.  하도 오래 전에 읽은 것이라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다분히 샤머니즘적이면서도 환상적이고 강렬하면서도 물 흐르는 듯한 문체는 지금도 또렷히 기억한다.  

그후 그의 다른 작품도 읽을만도 한데 그 강렬한 문체가 눈이 부셔서였을까? 나는 단 한 작품도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겨우 선생의 책을 또 한 권 읽고 이렇게 글을 쓴다. 그런데 내가 이번에 읽은 건 그의 소설이 아니라 소설 쓰기에 관한 책이라는 것이다.   

다른 여타의 작가들의 글쓰기에 관한 책은 종종 읽어왔다. 내가 이런 책을 읽는 것은 물론  그들의글쓰기의 노하우를 알고 싶어서다. 물론 읽기만 한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부단한 자기 연마가 있지 않으면 그런 책들은 한낱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글을 쓰지 않을 사람은 이런 책을 읽을 자격이 없다고 한다면 그건 너무 심한 모욕이 될 것이다. 어떻게 글을 쓰지 않을거라고 해서 이런 책을 읽지 말라 하겠는가?  

그런데 나는 이런 책이 나름 재미가 있다. 물론 글을 잘 쓰고 싶어서 읽기도 하겠지만 읽다보면 작가들의 세계관이나 스타일, 보이지 않는 이면들을 볼 수가 있어 나름 흥미롭다.    

나는 지금까지 이승우 씨와 스티븐 킹, 김탁환 씨 등의 책을 읽었는데, 이승우 씨는 논리가 있으면서 깊이가 느껴지고, 스티븐 킹은 마치 오두막 집을 짓는 느낌이다. 또한 김탁환 씨는 그 스펙트럼이 넓다고나 할까?   

그런데 비해 한승원 선생은 글쓰기에 관한 책 하나에도 자신의 사상과 깊이를 잘 녹여내고 있어서 위에 나열한 책과는 또 좀 다른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비록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소설만큼이나 에로틱하며, 샤머니즘적이며 불교적이고 기독교적이다. 즉 말하자면 그 필력이 글쓰기에 관한 책에서도 그대로 녹아진 느낌이든다는 것이다.  

사실 난 그 옛날 <사랑>이란 소설을 읽으면서 선생이 불교 신자거나 적어도 불교 사상에 심취한 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이분은 불교 신자라기 보단 범신론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내가 이 책에서 놀라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이런 글에서도 자유자제로 녹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두고 감히 말하건데 '소설 사상가'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이런 수식어가 있으며 이렇게 불린 사람이 있어왔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읽다보면 선생이 얼마나 글쓰기를 사랑하고, 글을 쓸 때 자기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태워가며 글을 쓰고 있는가가 느껴진다. 하지만 사랑이란 말, 자신의 영혼을 태운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이고 고행인지 조금이라도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실감하고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선생은 기꺼이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며 이 세계에 오라고 초대한다. 올곧게 상업주의를 배격하고 자신의 글만 써 낼 것만 같은 선생은 오히려 이런 상업주의에서 어떻게 어떻게 살아 남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즉 자신의 글쓰기 경험을 말씀하시며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란 성경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고나 할까? 

이 책을 읽다보니 갑자기 그 옛날 생전 처음으로 글 쓰기를 배워 보겠다고 만난 나의 사부님 말씀이 생각이 났다. 그 분은 자신이 과연 글을 쓸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인해 볼 수 있는 두 가지 척도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는 내 안에 분노나 원한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작가가 되어서 그들을 보란 듯이 눌러줄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과 글쓰기를 다 마쳤을 때 그 다음 번에도 글을 또 쓰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확실히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작가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  

내가 나의 사부님으로부터 그런 말씀을 들었을 때 전기에 감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단 말인가?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을 하건 그것의 동기와 정의가 확실해야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보니 후자는 몰라도 전자는 좀 아니겠다 싶기도 하다. 그래서 미움이나 원한 때문에 내뱉는 독설과 가시가 그러한 세상에 동조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여기 한승원이란 작가는 그의 책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세상은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의 몫이다.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 삶을 아름답게 가꾸려 하고 용서하고 더불어 살려 하고 착하게 살려고 한다. 착하게 살려 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좋은 작가는 좋은 눈(시각)이 만드는 것이다. 좋은 눈은 착한 생각과 좋은 책 읽기와 세상을 살아갈 만한 곳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의지를 가질 때 더 잘 만들어진다. 
혁명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꽃 한 송이가 되어 세상에 장식되려 하는 노력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글쓰기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말이 나에겐 좀 더 옳은 말 같다(지금은 그 선생님도 그렇게 가르치시진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그 옛날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기억도 못할지 모르고). 

그런데 우리의 한승원 선생 또 짖궂게도 책 말미에 이런 말씀도 남기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설가'도 하나의 상품이라고 하시면서 소설가를 창녀에 비유한다.  
"고객이 오르가슴에 이르도록 연출할 뿐만 아니라 고객이 성적으로 그녀를 제압한 제왕이 되도록 연기도 능숙하게 해야 한다. 침대안에 들어온 고객으로 하여금 성적으로 열등감을 맛보게 하거나 그녀를 제압하는 데 실패하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소설가도 창녀와 같다. 당신은 고객인 독자를 위해 성심을 다해 책을 읽어야 하고 열정적으로 소설을 써야한다. 독자가 당신의 책을 읽는 한 시간을 위하여 작가인 당신은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쏟아부어야 한다.  

나는 소설가를 잡식성 동물이라고 규정한다. ...... 몸을 파는 창녀가 몸뚱이 하나만으로 창녀 행위를 하지 않고 자기의 온 인생, 온 운명을 던져서 미친 듯이 고객을 위해 사랑행위를 하듯이 소설가는 먼저 책 읽기에 미쳐야 하고 소설거리를 하나 붙잡으면 그 소설을 미친 듯이 써내야 한다." 

지금히 당연한 말이지만 창녀에 비유하니 처절하면서도 묘한 느낌이다. 
또한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뜻 있는 작가는 자기를 스스로 유배 보낸다. 그 유배지는 자기가 마련한 작가실이다. 작가는 그 유배지에서 자기를 양생해야 한다. 작가는 세상과 자기에게서 유배당할지라도 외롭지 않은 기이한 사람이다. 그것은 그가 자기 소설 속에 설정한 인물들과 함께 살기 때문이다." 

 과연 멋진 말이다. 그러니 작가는 외롭고 고독한 존재라고 자위하며 휘청대지 말지어다.   

아무튼 작가 한승원 선생은 멋진 분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소설 사상가라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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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8-24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는 외롭지 않은 존재여야 한다,는 말이군요.
그 말의 의미가 진정 작가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창녀 비유는 글쩍글쩍~

stella.K 2009-08-24 11:59   좋아요 0 | URL
비유가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전 마음에 드는데요.ㅎㅎㅎ

Sati 2009-08-24 21:11   좋아요 0 | URL
창녀 비유는 요네하라 마리의 <미녀냐 추녀냐>를 연상시키는데요.

stella.K 2009-08-25 10:23   좋아요 0 | URL
헉, 정말요? 이 사람에겐 관심이 많은데 아직 읽어 본 적이 없네요.
함 읽어봐야겠습니다.^^
 
희망을 여행하라 - 공정여행 가이드북
이매진피스.임영신.이혜영 지음 / 소나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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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할 때 사람들 저마다 목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쉼과 재충전을 위해. 어떤 사람은 그곳의 문화와 역사를 알아 보기 위해. 어떤 사람은 어느 특정한 것에 관해 글을 쓸려고 하기도 할 것이다.(그 중엔 적절치 못한 방법으로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풀어버리기 위해 떠나는 여행도 있다.) 그래도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쉼과 재충전 또는 그곳의 문화와 풍광을 즐기기 위해 떠나지 않을까?  

사실 난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성격이 그래서 그런지 여행하면 고생이요, 이리저리 끌려다닌다는 인식만 있어서 선듯 나서지지 않는 것이다.(그것은 아마도 선천적으로 여행을 좋아하리만치 튼튼한 체력을 타고난 것도 아니고, 어렸을 적 차멀미를 심하게 해 그런 경험이 여행을 조심스러워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이런 사람이 우리안에 짐승처럼 집안에만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오산이다. 그런 사람도 간혹 그래도 한번씩은 여행을 꿈꾸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 이 책도 문득 여행을 하고 싶다는 바램을 갖고 있을 때 잡게 된 책이다. 그냥 꿩 대신 닭이랬다고 이런 책이라도 읽으면 달래질까 하는 바람에서라고나 할까? 

그런데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여행 한번에 이렇게 많은 것들을 생각해 봐야하는 거구나 새삼 놀랬다.   

물론 그렇다고 그것이 전혀 생소한 것들은 아니었다. 여행을 상상만 했을 때는 그곳의 낮선 풍광에 대한 설레임이 전부겠지만 막상 그곳에 도착하면 어디에 묵을 것인가로부터 시작해서 그곳이 호텔이거나 그에 준한 곳이라면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저렇게 방긋방굿 웃으며 일하지만 저들의 웃음뒤에 무엇이 숨어있을지 우리는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은 그것에 대해 말해준다. 인권에 관한 부분이다. 우리는 여행하는 사람으로서 정당한 돈을 지불하고 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받고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돈을 지불한 이상 서비스에 불만족하면 불평 내지는 호통을 쳐도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 알고 보면 여행객그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의 불만족스러운 서비스 때문에 마음 상하는 것 보다 몇배는 더할 것이다.  

또한 먹고 살아야할 의무 때문에 그들이 가진 직업병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생각해 봤는가? 특히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등산객을 위해 그들이 포터들에게 맡긴 짐들은 포터들의 몸무게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말이 쉬워 반이지 그것을 등이나 머리에 매고 하루종일 등반객들과 동행 한다는 것은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오죽했으면 그 일을 하다 죽는 사람도 있는가? 그들은 단 몇 푼의 돈을 받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일을 마다치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히말라야 등반객들은 자기가 히말라야에 발도장을 찍어봤다는 이유만으로 축배를 드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그러면서 어느 여행 취재물에도 끝까지 그 포터의 죽음은 다루지 않을 것이다. 왜냐고? 그거야 말해 뭐하겠는가? 

문제는 언제나 항상 돈이다. 돈 안되는 일. 자기네들이 가진 무한한 관광 자원을 손상시키고 싶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죽어나가든 말든 이미지를 구겨 득될 것은 없지 않는가? 어차피 세상은 있는자들의 천국이니까. 그 천국의 이면은 들어내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있는 것이다. 자기네 나라 백성이 일하다 병을 얻든, 다치든, 죽든 여행객들은 관여치 않고 관여할 수도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네들의 문제고 자국민에 관한 일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받는 돈의 10분의 1이라도 그 사람네들에게 정당하게 돌아 가지도 않는다. 이런 불공정한 여행이 어디 있는가? 자기네들은 피를 흘려도 돈만 벌고 보자는 식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돈은 확실히 국경도 허물지만 또한 그것은 확실히 사람의 인권을 유린하는 방식으로다. 

이 책은 그 이해를 다소나마 알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여기서 '다소나마'라고 하는 것은 이 책은 여행 비평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구 곳곳을 여행하다 마주치게 되는 불공정한 행태를 고발하기 위해 쓴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만약 그렇다면 전혀 다른 분야의 책이 되어야겠지.)  어떻게 하면 그런 불공정한 것에 저항하며 새로운 여행을 할 것인가에 도전하도록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즉 이 책에 소개된 방식을 따라 여행을 하면 공정한 여행을 하게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처음엔 '공정 여행'이란게 다소 생소하게 들리지만 조금 읽다보면 해 봄직한 여행이며 아니 꼭 필요한 여행이라는 생각에 누구나 금방 공감하게 된다.(물론 나 개인으로선 당장해 볼 수 있는 여건은 안되지만)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인프라가 어느 만치는 구축되어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늘 날 상업적인 여행, 레저 문화의 발달의 속도에 한 없이 뒤져 보인다. 

하지만 뭐 어떠한가? 원래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일은 토끼 뛰기지만 이타적이며 공동체를 위하는 일은 거북이 걸음이고 환영 받지도 못했다. 하지만 나중에 승리하는 쪽은 늘 후자쪽이었다.  

나는 부디 공정한 여행이 확대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며 이 책을 덮었다. 또한 그 여행에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지는 사람들은 진정한 여행자가 아닐까 싶다. 분명 지구 반대편 그곳에도 나와 같은 사람이 숨쉬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공정 여행은 이렇게 인류를 생각하는 여행이다.  나도 언젠간 그 진정한 여행 대열에 끼어보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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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7-10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정여행에 대한 상세한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이 책 담아갑니다~~ 꾸욱!

stella.K 2009-07-11 15:36   좋아요 0 | URL
이런 여행이 있다는 게 정말 다행이더라구요.
정말 여행을 아는 사람은 패키지 여행같은 것 안할 것 같아요.
이 책은 그야말로 공정 여행 가이드북입니다.^^
 
순례자의 책
김이경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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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린 시절, 디즈니 만화에서였던가? 인류 역사에 책이 어떻게 처음 출현하게 되었는가를 밝혀놓은 흥미로운 만화를 본 기억이 있다. 좀 웃기고 단순하긴 한데, 어떤 인류학자(?)가 어느 섬에 표류해서 원주민을 대상으로 우리 하회탈 같은 얼굴이 웃는 상과 우는 상을 번갈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그것을 보는 사람이 그에 따라 얼굴 표정이 바뀌더라는 것이다. 

이 사람은 이것을 더 발전시켜 그 얼굴 모양을 종이에 인쇄했는데, 한 줄은 웃는 상을, 다음 한 줄은 우는 상을 넣었더니 그에 따라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음엔 좀 더 다양한 표정의 얼굴을 삽입해 넣었더니 그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짓더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지만 그것은 문자 이전 책과 인간의 교감은 이랬을 것이라는 상상을 가능케 한 것으로서 지금도 나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만화 중 하나다.  

정말 우리 인간은 언제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일까? 아니 인류 역사상 책이 처음 출현했던 건 언제부터 였을까? 

이 책은 책의 문화사 중 열 장면을 간추려 놓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책이라는 것도 인간만큼이나 굴곡 많고 책에도 생(生)을 부여한다면 참 쉽지 않은 생을 살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책에 왜 생을 부여해도 좋은가?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책은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고 그 작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그저 잠깐 있다 사라질 것에 역사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니 유사이래 책이 책으로 존재하기까지의 역사가 쉽지 않았으니 앞으로 쉽지 않은 생을 살아갈 것이라는 게 첫번째 이유고, 또한 책에는 인간의 혼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발자취, 생각, 사상 등이 이 책이라는 물건에 오롯이 담겨져 책으로서의 생명력을 갖게되고 그것을 유지시켜 와야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인간의 생이 그렇듯, 장수하는 책 즉 오래도록 우리에게 읽혀지는 책이 있는가 하면 단명하는 책도 있다.  

어떤 사람은 그 누구에겐가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겐 있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책 역시도 그와 같아서 일부러 태워없애거나 찾는이가 없어 절명(여기선 절판) 되기도 하는 것이다. 

예전엔 분서라고 해서 책을 태워 없애기도 했다지만 요즘엔 웬만해 의도적으로 그런 일을 행하는 일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여러 해 전, 누구라면 알만한 작가의 작품이 분서 다시 말하면 화형식이 보도된 적이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잘잘못을 떠나서 그에게는 치욕스런 개인사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걸 보면서 책을 좋아해서일까 그 사람을 단죄하는 방식이 너무 가혹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 사람의 죄가 중하기로서니 그 방법만은 피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사람도 글 써서 벌어먹고 사는 사람인데 그 사람의 책과 그 사람의 죄과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저렇게까지 할까? 가혹하다 못해 야만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만한 일을 했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항변했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책을 저리 경히 여기는 민족이 사료(史料)를 귀하게 여길까? 싶기도 한 것이다. 본래 사료라는 것이 문자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문자를 담는 그릇이 책이 아니겠는가? 남기고 싶은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소각해 버릴 것이 아니겠는가 이말이다.  

책은 그렇게 단명 또는 절명도 하지만 유령 같은 면도 있어 언제든지 형체를 변이시켜 연명해 가기도 한다. 예를들어 그렇게 어느 문인의 책이 화형 당했다 하면 그 사실이 어떤 식으로든 문자화 되어서 책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아님 말구). 어쨌든 그렇게 책은 어찌보면 인간의 그것보다 더 질긴 운명을 타고 낳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어떤 책은 아무리 눈을 씻고 지구 끝까지 찾고 싶어도 끝끝내 못 찾고마는 책도 있다. 그런데 반해 책과 영혼과 바꾸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책을 향한 열정이다 못해 열애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기행을 하기도 한다. 과연 책이란 인간에게 무엇인가?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1년에 책 한 권 읽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알량한 독서량을 자랑하면서 독서가 취미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런 사람은 그냥 책을 조금 읽은 사람이지 취미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이다. 정말 취미면 조금 읽어도 상관없겠지만 사실 독서는 취미가 아닌 것이다.  

뭐 좀 뻔한 말 같아 별로 쓰고 싶지 않은 말이긴 하지만 책은 밥이고 옷과 같다고 생각한다. 밥은 삼시세때 먹으면서 왜 책을 읽지 않는가? 이 질문을 받고도 여전히 밥만 먹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책은 옷이다. 사람이 벌거벗고 살 수 없듯이 책도 그런 것이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몇해 전, 옷 좋아하는 엄마와 책 좋아하는 내가 혈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엄마가 갑자기 안 읽는 책은 버리라는 것이다. 그러자 지지않고 엄마도 안 입는 옷 있으면 버리라고 맞섰다. 그러나 엄마는 옷과 책이 같냐고 했다. 그래서 내가 엄마가 옷 좋아하는 거랑 내가 책 좋아하는 거랑 무엇이 다르냐고 항변했다. 서로의 취향이 다른 걸 가지고 아무리 딸이라도 상대의 것을 비하시키는 엄마의 태도가 나로선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날까지도 엄마와 체형이 얼추 비슷해 일부 옷은 같이 입거나 가끔은 엄마가 내옷을 사 주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엄마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책 선물을 해 본적이 없다. 더구나 눈이 나빠 읽을 수도 없다. 그러니 옷에 있어서만큼은 나는 아직도 엄마에게 신세지고 있으니 나의 그런 태도는 항변이라기 보단 불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가끔 나는 정말 책을 좋아하는가에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지금 내 방엔 읽은 책 못지 않게 읽어야할 책이 잔뜩이다. 어느 순간 이것들을 보면 미소 짓고 싶고 뿌듯할 때도 있지만 읽어야할 책에 비해 나의 독서의 속도는 형편없이 느리다. 언제 죽을지 모르고 언제 눈이 나빠질지 모르니 빨리 읽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 맞는가 묻는 것이다.  더구나 나는 책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나의 책들은 싸게 싼 책들이거나 기증 받은 책들이 대부분이다. 만약 읽고 싶은 책이 있는데 엄청 비싸다 하면 일단 그 의지를 접고 만다. 그리고 무슨 책이 떴다고 해서 그것을 기필코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성격도 못된다. 그러니 내가 진정한 비블리오 마니아인가?라는 질문에 결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을 못 읽을 건 아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영히 '책'에 대해 궁금할 것은 당연하다. 이 책은 책의 역사에 대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교양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책이란 게 다 그렇듯이 자기 궁합에 맞는 책이 있고 맞지않는 책이 있다. 아쉽게도 이 책은 나와는 딱 맞는 책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읽다보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을 때가 종종있다. 

편집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이를테면 이 책은 글쓴이가 편저했다고 볼 수가 있는데 뒤에만 참고문헌을 밝혀두었다. 그 보단 오히려 쳅터 하나가 끝날 때마다 이 이야기는 어디에 실린 이야기라고 밝혀야 하지 않을까? 그런 것을 감안한다면 읽어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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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념의 인간 야곱 - 야뽁강을 넘어서
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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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남자가 있다.  

형과 같은 날 태어났으나 차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의 관심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형을 시기했던 열등감 많은 남자가.  

그는 조용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꿈이 있었다. 그냥 보통 사람들이 갖는 그런 꿈이 아니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열정 하나만으로도 그 꿈을 이룰 수 있다지만 그의 꿈은 보통 사람이 갖는 그런 꿈이 아니었기에 열정 하나만으로는 이룰 수가 없었다.  

그의 꿈은 운명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즉 자신의 쌍둥이 형과 어머니 뺏속에서부터 몇 분 상관으로 장남의 자리를 내어줘야 했기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장자권을 빼앗아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너무나 중요했다. 영원히 차남으로는 살 수마는 없었다. 그러나 차마 형과는 겨룰 수는 없었기에 기회를 틈타 장자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아주 기발하고도 우스운 방법으로 장자권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사람의 희생을 요구했다. 

 그냥 장자권만 자신 것으로 만들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를 도운 어머니가 그 때문에 멸문을 당해야 했고, 장자권을 갈취한 것 때문에 형을 피해 낮선 땅으로 가 교활한 외삼촌 밑에서 20년 동안이나 뼈 빠지게 일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와중에 외참촌의 딸을 사랑했지만 그녀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원치 않은 그녀의 언니도 아내로 맞아야 하는 굴욕을 감내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굴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외삼촌의 사위가 되었지만 여전히 종속되어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때고 그가 당하고만 사는 것은 아니었다. 교활한 장인에게 통쾌한 복수도 하면서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끔은 반전이 일어나 주기도 하지만 그의 인생은 장자권을 뺏은 형으로부터 복수를 당하지 않을까 늘 겁내하고, 평생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한 사람인데 뜻하지 않게 네 명의 부인을 거느리며 그들에게서 낳은 자녀들 때문에 평생을 마음 졸이고 고통해야만 했다. 

어디 그뿐인가? 사랑하는 아내와도 오래도록 해로하지 못하고 아내가 막내 아들을 낳다가 목숨을잃는 비운을 맞는다. 또한 그것도 모자라 그녀가 낳은 첫째 아들을 그의 다른 아들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잃어야하는 비운도 겪어내야만 했다.  

그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했는가는 여기에 일일이 다 적지도 못할 것이다. 그저 이만하면 하나님도 버린 사람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지 않을까? 도대체 그놈의 장자권이 뭐라고!   

하지만 그의 인생의 시작은 참으로 창대했다. 보라, 그의 어머니가 꿈을 꿨는데(그것은 동시에 신탁이기도 했다.) 뱃속의 쌍둥이는 두 민족을 가리키며 형이 아우를 섬긴다고 했다. 아우가 형 보다 낫다는 말이다. 하지만 실재는 어떠한가? 그는 오랜 세월 형의 낮을 피해 살아야만 했고 더 이상은 남의 땅에서 자손을 번식시키며 살 수 없기에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마음 먹지만 도저히 형을 만날 자신이 없다. 20년이란 세월이 지났는데도 복수의 서슬이 시퍼런 형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한다. "당신이 나를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당신을 놓아줄 수 없습니다!" 절체절명의 사투였다.  

민족이라도 일으킬 즉 왕이 되어야 할 사람이 이토록 찌질하게 자기 형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해야하다니? 그것도 모자라 그는 씨름하는 과정에서 엉덩이 뼈가 탈골돼 평생 다리를 절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댓가였는지도 모른다. 그 옛날 그가 팥죽 한 그릇에 형에게 장자권을 샀던 것처럼 그는 그렇게 불구의 몸이 됐지만 하나님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함께 하시겠다는 그 언약을 산 것이다. 그에 대한 표로 그는 불구의 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겟다는 약속 하나 받은 것 외에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장자권은 가졌지만 형 보다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살았던 것도 아니다. 분명 태어날 때 민족을 일으킬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태어났지만 그는 왕 커녕 족장도 되지 못했다. 이쯤되면 도대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것이 무슨 의미냐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한 그의 아들들의 모반과 아내를 상처(喪妻) 한 것, 그토록이나 사랑했던 아들 요셉을 잃은 것 등은 그가 야복강에서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란 말씀을 듣고도 계속됐던 그의 비운들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누가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의 말년에 잃은 줄만 알았던 아들 요셉이 한 나라의 재상이 되어 해후하게 되고 그가 마련해 준 처소에서 편히 쉬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 외에 그의 복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아들을 다시 만나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모진 세월을 보내야만 했는가? 

이것이 저자 송봉모 신부의 성경 인물 시리즈중 야곱에 관한 부분을 풀어 놓은 것을 내 나름대로 요약 정리한 것이다.  

사춘기 때 신앙에 입문하고 성경의 제일 앞부분이 가장 많은 손 때가 탈 정도로 창세기는 많이 읽었다. 읽을 때마다 나는 요셉에게 매료 당했지 그의 아버지였던 야곱에게는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얼마나 찌질하고 비겁한 사내란 말인가? 그러나 나는 나이가 들고부터는 요셉보단 야곱에 더 많이 동화되고 이 책을 읽으면서는 그의 모진 인생 여정에 가슴 뭉클해 누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시작은 미약하나 후일엔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이있지만 그는 한번도 창대해 본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을 말 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까지 부른다. 이것은 대단한 영예로써 성경에 많은 인물들이 언급되지만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누구를 빚대어 지칭하신 이 세 사람 밖엔 없다. 도대체  뭐가 그리 대단해서 하나님은 친히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인가? 도대체 이 사람이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기에 이 사람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인가?   

그러나 그를 가만히 생각해 보라. 야곱이 우리네 인생과 얼마나 흡사한가? 거짓말이나 하고, 사기치고, 위험한 상황에선 비굴하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뭐하나 자랑하고 내세울 것이 없다. 그는 그렇게 미약하게 시작해서 고통속에 살다가 쇠하여져 간 것이다. 그런데 또 보라. 성경이 읽혀지는 곳마다 이 사람의 일생이 읽혀지고 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사람들 뇌리속에 각인시켜 놓으시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 가운데 늘 함께 하셨다는 것을 증거하시기 위함이다. 야곱이 쫓기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을까? 야곱이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을까?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을 때 어디 계셨을까? 아들을 잃었을 때 어디 계셨을까? 거기 그렇게 그와 함께 계셨다. 그 고통속에, 그 고독속에, 슬픔 속에 말이다. 그것을 증거하시고자 하나님은 성경이 씌여지고 읽혀지는 곳에 이 사람의 삶도 읽혀지도록 하신 것이다. 

사실 사람의 인생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가끔 하나님 믿고 입신양명에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말도 심심찮게 듣고, 또 세상에 성공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인 경우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매스컴의 영향 때문이지 전체적으로 봤을 때 몇 퍼센트 되지 않으며 그런 이유로 하나님을 믿으려 한다면 성공하지 못할 확률이 더 많을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믿고 성공했다면 그건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것 뿐이다.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했다고 앞으로의 인생이 탄탄대로고 아무 고통이나 고난이 없을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그 모든 것들은 여전히 나의 앞길을 가로막을 것이다. 단지 중요한 것은 나의 고통과 고난 앞에 하나님이 동행하시는가 아닌가를 알면 되는 것이다. 야곱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세상의 어떤 인생도 성경에 나오는 인물 보다 더 고난 받지 않았으며 더 고통당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말하면 세상 어떤 사람도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만큼 고통 당했거나 그 보다는 낫다는 말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고통 당하거나 평범하게 살 뿐이다. 야곱의 인생이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다면 야곱의 하나님도 그렇게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야곱을 예시로 하여 보여주시는 것이 아닐까? 야곱의 고통속에, 고독속에, 기쁨과 외로움 속에 항상 함께 하셨든 것처럼 별 볼 일 없는 내 인생 속에도 함께 해 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 믿고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야곱과 같이 비겁하고 굴욕적인 삶을 산다고 해도 그것을 창피해 하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또 한가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중요한 사실은 야곱 그 별 볼 일 없는 그 사람의 계보를 통해 예수가 오셨다는 것이다. 이게 새삼 나를 놀랍게 했다. 그래서 성경이 읽혀지는 어느 곳이나 누구에게나 야곱의 일생이 전해지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야곱은 그 나라 왕조의 기록속엔 단 한 줄도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족보엔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된다. 이제 나이 먹어 세상에서 크게 명성은 떨칠 것 같지 않지만 예수님의 족보에 내 이름 하나는 올라 갈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야곱처럼 말이다. 내가 앞에서 어렸을 때 요셉을 좋아했다가 나이 들어 야곱을 좋아했다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요셉은 자라 갈수록 큰 인물로 성장해갔지만 야곱은 갈수록 작아졌고 노쇄해져 갔다. 그는 젊었을 땐 욕망의 덩어리었지만 얍복강의 사건을 계기로 영의 것들을 생각하는 인물로 바뀐 것이다. 요셉을 보면 리더는 정말 하늘이 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에 비해 야곱은 인간적이고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에서 영적이고 하나님의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니 우리의 나이들고 늙음이 전혀 추하거나 절망적인 것이 아님을 야곱을 통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모르긴 해도 성서인물을 강해해 놓은 책 중 가장 탁월한 책이 아닐까 싶다. 문체는 평이하면서도 그 영적 깊이는 정말 놀라우리만치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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